자유로운 영혼, 일탈을 꿈꾸는 상상력
-박영복의 작품세계
강 경 호
(시인, 문학평론가)
도예가 박영복은 문학동인 <빛부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고향의 후배이기도 하여 고향에서 예술단체 모임에서 가끔 만나곤 했다. 그의 호처럼 아름다운 말(美馬) 같은 건강한 청년의 인상을 주곤 했다. 말수가 적고 수줍음조차 간직한 순수한 이미지로 내게 다가오곤 했다.
<빛무리>동인으로 활동한 까닭에 그의 시작품에 눈여겨 보아왔다. 그의 시에서 순치되지 않은 길길이 날뛰는 말 같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의 시는 제도권에서 그어놓은 문학의 틀에서 한발짝 비켜서 있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언어는 오염되어 욕망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그의 언어는 순수하다. 때 묻지 않은 그의 언어를 대하면 마음이 헹궈진다. 일반적으로 시언어는 기표 뒤에 숨겨진 언어, 즉 은유 이면의 기의가 무엇인가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 이미지와 의미가 다의성을 갖게 된다.
그러나 어린아이 같은 박영복의 언어는 단순하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보여준다. 언어에 또다른 의미나 이미지를 꼬불쳐놓지 않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자면 “광복절 아침/깨잎 절임과 김을 놓고/ 새벽밥을 먹는다/ 아내와 아이는 꿈 속에서 놀고/ 라디오에서는/ 아베마리아 노래가 나온다” 라는 「쉬는 날」이라는 그의 작품에서 특별한 시적 장치나 기교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또다른 의미를 숨겨놓지 않는다. 그냥 그대로 언어가 지시하는 대로 읽어내면 된다.
자신의 삶의 주변에 널브러진 풍경과 일상적 정서를 가감 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박영복의 시세계이다. 그런데 이런 그의 시를 읽으면 편안해진다. 설사 슬픈 정서의 작품일지라도 그의 시는 독자들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것은 그의 언어가 골치아프게 다른 의미를 찾게 하는 의도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시쓰기는 운문인지 산문인지 경계가 애매한 경우가 많다. 기존의 문학적 기준으로써는 산문이 분명하지만 그는 능청스럽게 시라고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술에 대한 그의 인식의 태도이다.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시를 쓰겠다는 것이 그의 고집이다. 그것이 시가 되든 산문이 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가는 것이 예술이라는 아나키스트적인 예술관 때문이다.
이는 그가 일구는 도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그의 도예 작품들을 살펴보면 작품에 상징적인 의미부여를 한 경우도 많지만 다른 일면에는 기존 예술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치 어린아이가 아무 쓸모없는 것을 장난감삼아 노는 것처럼 혼자서 자신만의 도예라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태도는 삶에서도 엿보인다. 아주 단적으로 말해 그는 세상 근심걱정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리고는 유유자적 자신의 일에 몰두한다.
필자가 그의 작업장을 방문하기 전에 생각한 도예가의 작업실은 나름대로 규모를 갖춘 것이었다. 반듯한 작업장과 함께 위용을 갖춘 가마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망(?)이 컸다. 손바닥만한 보잘 것 없는 것들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일하는 곳은 그야말로 시골의 누옥이었다. 모든 것들이 꾸밈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공기돌놀이 할만한 마당도 없었다. 마당 한켠에는 어디서 뜯어왔는지 나무토막들이 쌓여있고 나무 몇 그루, 집 뒤에서 풍경만 되어주는 대나무 숲이 있는 아주 단조로운 집이었다. 집은 모두 세 채였지만 옆에 있던 한 채는 말벌들이 천정에다 멧방석만한 벌집을 지어 놓아 지난 봄날 이후 출입을 하지 않고 있었다. 벌들이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전세를 내준 것이다. 그래서 윗채, 아래채만 사용하고 있는 셈인데 본채이기도 한 윗채를 방과 작업실로 사용하는 듯 했다. 그곳에는 그가 작업 중인 작품들과 그동안 제작한 작품들이 방에 걸려있거나 놓여 있었다.
아래채는 가마가 딸린 공간으로 이곳에 작업할 때 음악을 듣는지 음향기기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박영복의 관심사를 엿볼 수 있는 박찬호의 투구하는 사진이 벽에 붙어있다. 그 옆에는 “부담 없이 던지라구?”, “당신들이 직접 던져봐”라고 글씨가 쓰여 있다. 처음에는 이러한 그의 예술행위가 도예와 무슨 상관있는지 의아해 하기도 했다.
이처럼 박영복이 바라보고 있는 것들은 대단한 것들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하찮게 생각하는 것들로 그의 상상력은 기존의 예술관에 대해 상식적이지 않는다.
박영복은 1960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무안고등학교를 마지막으로 제도권에서 교육을 마치고 1982년 고향을 떠나 초등학교 4학년 때 마음속으로 다짐한 도예가의 길을 가기 위해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전통도자기 빚는 것부터 생활도자기와 조기정 선생의 무등요에서 청자에 이르기까지 도자기에 관한 일반적인 과정을 두루 섭렵한다. 이른바 도제식 교육으로 도예가가 된 셈이다. 그러나 그는 전통 도자기, 그리고 도예계라는 제도권의 상식적인 방법들을 모두 버리고 자신만의 세계를 개척하고 있다. 아르누보가 일상에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공예의 개념을 혁파했듯, 그도 도자기 공예의 개념을 형식과 내용적인 측면에서 모두 일탈했다. 조기정 선생으로부터 “유약을 바르지 않으면 도자기가 아니다”라는 개념을 그는 “흙이 들어가면 도자기이다”라는 도예에 관한 자신만의 개념을 설정해 놓은 것 같다.
도예를 배우기 위해 우여곡절을 겪은 박영복은 1993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독립을 했다. 그동안 도예에 관한 자신만의 생각을 지녔기에 자신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 결과 1996년 <미마 화병전>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전을 열었다. 이 때 그는 “전시장에서 차려진 상을 보고 마치 제사상 같은 느낌을 받았다”라고 회고했다.
이 작품전에 출품한 작품들은 겨우 이프렛 한 장에서 화병 두 점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花1」 이라는 작품은 흙의 색깔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마치 옷을 벗은 여인 같다는 느낌이 든다. 단조롭고 매끈한 화병의 살결에 원(圓)과 직선의 간단한 붓터치가 있을 뿐 소박하고 담백하다. 감정이 아주 절제된 단아한 작품이다. 또다른 작품 「花2」는 직선의 사각기둥인데 ‘ㄷ’ ‘ㅣ’자의 붓터치가 질서 있게 패턴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전통적인 화병의 개념을 일탈하고자 하는 박영복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이 시기의 박영복의 작품들이 별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보다 구체적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말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짐작컨대 이 무렵 그의 작품들은 소박하다. 그리고 본래 흙의 색깔을 변형하지 않으려는 그의 의도가 느껴진다.
이후 박영복은 2000년에 <그릇에 쓴 천자문>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전을 열었다. 황토색깔을 그대로 보여주는 둥근 사발에 힘찬 붓터치를 새긴 1000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그릇에 새겨진 생생한 붓터치에서 의욕적이고 힘이 넘치는 젊은 박영복을 느낄 수 있다. 그릇에 자연과 인간의 모습은 물론 우주만물까지 담아내겠다는 그의 상상력은 매우 크고 상징적이다. 그릇은 밥을 먹는데만 사용하는 도구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담아내는 비어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그릇에 박영복은 하늘을 담고, 땅을 담고, 우주만물을 담아내려 했으니, 관념적인 그릇의 의미를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박영복은 <그릇에 쓴 천자문> 작품전 이래 그릇들을 마음속에서 버린다. 2005년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들에서는 그릇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108전>이라고 명명한 박영복의 전시회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적 상상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작품전에 출품한 작품들을 들여다보면 불교적 세계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형태면에서부터 큰 변화를 보여준다. 조롱박, 물고기, 우리나라 땅모양, 식물잎사귀, 그리고 조각으로 구성된 원 모양 등 다양한 형태를 보여준다. 또한 투박한 널빤지 같은 흙판 위에 다양한 오브제를 사용하기도 하며 나무판 위에 흙을 배치하기도 하며 유화 파렛트 위에 식물의 잎사귀를 겹쳐놓기도 한다. 때로는 액자나 창틀을 이용하는 등 실험성이 강한 작품들을 보여주기도 하고, 나무판 위에 ‘108’이라는 인간이 지닌 욕망과 번뇌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도 하는데, 이때 ‘108’ 숫자를 포장용 녹색 끈을 사용하기도 해 기존의 도예라는 개념을 간단하게 깨어버린다. 이때 사용하는 오브제는 생활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어서 그의 눈에 띄는 것은 모두가 작품의 재료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108전>은 그의 영혼의 자유스러움이 확장된 계기가 되었다.
그의 상상력은 천방지축, 인간이 그어놓은 경계를 넘나들며 자유분방한 사고를 보여준다. 이 작품전에서 그가 투사시킨 것은 ‘동일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에서는 둥근모양이든 사각형이든지간에 하나가 아닌 둘로 나눠져 있거나 깨져 둘로 나눠져 있는 모습들이다. 둘, 혹은 여러 개로 나눠진 것은 ‘분열’이며 인간의 이념과 욕망에서 기인한 것으로 ‘백팔번뇌’의 원인이 된 것들이다. 때로는 108개의 점을 찍어 백팔번뇌를 기호화시키기도 하고 깨어진 사금파리처럼 파편화된 것들을 둥근 원으로 퍼즐 맞추듯 조합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가장 완벽한 형태인 ‘원’이 나타내는 것처럼 원만하고 하나 되기를 소망하는 작품전이라고 할 수 있다.
박영복은 2008년 <꿴구슬전>을 미용박물관에서 열기도 했다. 이 때 구슬을 6108개를 사용했는데, 그때의 자료들이 없어 구체적인 작품 경향을 짐작할 수 없어 아쉽다. 그러나 언제나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그의 상상력에 알맞는 세계를 보여줬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작품세계를 펼치는 그에게 2010년에 고집스럽게 자신의 작품세계를 펼쳐가는 작가들의 전시회를 개최하는 잠월미술관에서 박영복의 전시회를 기획했다. <옆 동네 미마의 비행기>라는 아주 동화적인 이름의 전시회였다. 자신에게 도예를 배운 시골할머니들에게 그 할머니들이 평생 함게 해 온 ‘부엌’, ‘음식’, ‘생활’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흙을 이용해 다양한 미니어처를 제작한 작업의 결과를 보여준 작품전이었다.
이 작품전은 마치 어린날 소꿉놀이처럼 ‘찐고구마’, ‘감자’, ‘옥수수’를 흙으로 빚어 동심의 세계에 빠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할머니들이 삶이라는 현실에서 살면서 잃어버린 순수한 동심을 회복하자는 취지가 들어있다. ‘모자 쓴 순박한 할아버지’ ‘귀여운 돼지’의 모습에서 오늘 현대인들이 잊고 사는 소중한 가치를 일깨워주는 것이 이 작품전의 의미로 읽혀진다.
<옆 동네 미마의 비행기>전에 박영복은 둥그런 개떡 같은 납작한 황토를 농촌에서 모내기 때 사용하고 버린 검은 플라스틱 모판 위에 하나씩 배치했다. 그러나 흙을 그냥 배치한 것이 아니라 「비행기」라는 동요의 악보를 흙의 높낮이 배치를 통해 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흙은 악보의 기호가 되어있는 셈이니, 소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악보가 마치 풍금의 건반처럼 느껴지는 시각적 효과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비행기」는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청각적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을 바라보면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우리 비행기”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 작품전에서 만나는 것은 소꿉장난 하던 시절의 때 묻지 않은 동심이다. 더불어 현대기계문명이라는 메커니즘에 대한 환멸과 비판이 깃들어 있다.
지금껏 살펴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박영복은 흙과 잘 놀아왔다, 여전히 잘 놀고 있다. 기존 질서에 편입되지 않은 백지장 같은 아이들의 상상력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이는 그의 예술적 신념이기도 하지만 영혼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어눌하고 투박한 언어이지만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은 자기만의 개성으로 독특하다. 더불어 그의 언어는 수많은 번뇌를 일소시키고자 욕망이 없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그의 언어는 토우처럼 소박하고 정겹다. 이는 그의 예술이 그의 삶을 닮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