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동(各洞)의 발자취와 현황(現況)
☞ 성북동(城北洞)은 성북제1동과 성북제2동으로 조선시대에 도성(都城) 수비를 담당했던 어영청(御營廳)의 북둔(北屯)(북쪽의 군 주둔지)이 영조 41년(1765)에 설치 되였고 성(城) 북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성북동은 조선 초부터 한성부에 속했는데 갑오개혁(1894년)때 행정구역 개편으로 한성부 동서 숭신방(성외) 동소문외계 성북동이라 하였다, 그런데 한일합방 후 일제는 1911년 4월 1일(경기도령 제3호) 5부 8면제를 실시함에 따라 이곳을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성북동으로 칭하였고 1914년 4월 1일(경기도령 제1호) 경성부를 축소함으로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로 되었다, 그 후 1936년 4월 1일(총독부령 제8호) 경성부 관할구역의 확장에 따라 경성부 성북정으로 되었으며 1943년 6월 10일(부령 제163호) 구제(區制)를 처음 실시함에 따라 동대문구에 속해였다,
광복이 되자 그 이듬해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고치면서 성북정을 성북동이 되었고 1949년 8월 15일(대통령령 제159호) 성북구가 새로 설치됨으로 성북동은 이에 속하였다, 이 때 성북천에 놓인 운수교(雲水橋)를 중심으로 도로 남동쪽은 성북동 1가 도로 서쪽은 성북동 2가 나뉘었다 그 뒤 성북동 2가는 성북동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렀다,
※ 성북동 지역 인구집적추이(人口集積推移)
성북동지역의 인구통계로 가장 오래 된 것으로 1915년의 것이 있는데 당시의 인구수는 810명이었다, 그러던 것이 그 후 5년인 1920년에는 5명이 줄어든 805명 그 후 10년인 1930년에는 1,666명으로 뚜렷한 증가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 다음 6, 15 광복 때 까지 기술(記述)이 발견되지 않아 인용할 수 없음이 유감이지만 1949년의 통계에 의하면 13,372명이고 6, 25 동란이 발발(勃發)한 후 아직 피난지에서 수복(收復)하지 않았던 1953년 당시에는 5,546명으로 크게 줄어들기도 했었다, 다음 1961년에는 1949년 당시의 인구를 휠씬 상회(上廻)하는 18,535명으로 그리고 그 후 10년인 1970년에는 27,746명으로 크게 증가하더니 다음 해인 1971년의 27,988명을 고비로 줄어들기 시작 1980년에는 22,614명 1990년에는 20,241명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 성북동의 발자취
혜화문(惠化門)을 나서서 왼쪽 일대의 계곡마을인 성북동은 옛 부터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수석(水石)이 어울린 산자수명(山紫水明)한 마을로 복숭아, 앵두나무가 많았다, 그래서 이 동(洞)의 자연촌락명으로 홍도동(紅桃洞) 도화동(桃花洞), 복사동이 남아있다, 조선후기 순조 때 지은 한경식략(漢京識略)에 보면 {맑은 계곡과 언덕을 끼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데 복숭화를 심어 생업을 삼고 있다, 매년 늦은 봄이면 놀이를 나온 사람들과 차마가 두 줄을 지어 가득하게 산계곡 사이를 매우고 깨끗한 초가집이 많다}라고 소개하고 서울 사람들은 봄이면 인왕산 아래 살구꽃 서대문 밖 서지(西池)의 연꽃 동대문 밖 수양버드 나무 꽃 세검정 부근의 수석(水石)등과 함께 성북동의 복숭화꽃 구경을 찾아 나섰다고 하였다,
북절골(北寺洞), 북저동(北渚洞) 도화동(桃花洞)등 옛 부터 많은 이름으로 불리었다, 이곳은 북절골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전에 절이 있었거나 먹을 재조하는 관아인 묵사(墨寺)가 있었던 데에서 명명된 것으로 추측되고 북창동(北倉洞)이라고 칭 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 후기의 어영청의 북창이 성북동 260번지 수월암(水月庵)(성북동 274-2) 남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 북저동은 동국여지비고 권2 한성부 명승조에 소개되어 있으나 그 유래는 알 수 없다,
성북동의 자연촌락명으로는 노구멧골 도둑굴 운수동(雲水洞) 논골 등이 있다, 노구멧골은 옛날 이 마을에 사는 한 여인이 집을 나간 남편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노구매(밥)를 떠놓고 산천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더니 그 정성으로 결국 남편이 돌아와서 잘 살았기 때문에 붙여졌으며 도둑굴은 성북동의 북동쪽의 계곡이 깊고 지형이 험준하여 도둑이 은거하기가 용이하였으므로 불리었다, 그래서 조선후기에는 어영천의 북둔을 두어 군대를 주둔시켰고,
조정(朝廷)에서는 이곳에 백성들을 이주시켜 살게 하였으나 워낙 산 속이라 농토가 적고 시장이 멀어서 생활곤란으로 속속 떠나가자 영조 41년(1765년)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耈)와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왕에게 건의하여 서울 각 시장에서 파는 포목의 표백(漂白) 즉 마전하는 권리를 이 곳 주민에게 주고 3년 뒤 영조 44년에는 창의문 밖에 사는 사람들에게 주었던 궁중에 바치는 메주 쑤는 권리를 일부 이 곳 주민들에게 주었다, 마전터는 성북동 122 - 7번지 일대를 말하며 이곳이 삼베를 표백해서 말리기 위해 널어놓은 모양새가 밭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면 이러한 유래를 담고 있는 마전터 표석은 성북동 큰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운수동은 성북동 60번지 부근의 마을로 바위에 각자(刻字)가 되어 있는데 이곳을 논골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어떤 사람이 깊은 산속인 이곳에 논다랑이를 조금 풀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 밖에 근래에 와서 붙여진 마을 이름으로는 성낙원(成樂院) 꿩의 바다마을도 있다, 성북동 2번지의 계곡을 끼고 있는 성락원은 4천300여평이 1992년 12월 24일자로 사적 제378호로 지정되었다, 조선말 철종 때(1849-1863) 이조판서 심상응(沈相應)의 별장이 던 것을 의친왕(義親王) 이강공(李堈公)이 별궁으로 쓰다가 그 아들 이건공(李鍵公)이 살았는데 그 후 심씨(沈氏) 후손들의 소유로 되었다, 이곳은 수련한 자연경관에 어울리게 한옥과 정자 석상들을 배치해 놓았으며 얼마 전까지 국내의 여성교육을 하던 예지원(禮智院)이 사용했다, 성낙원 서쪽 언덕의 3형제 우물이란 약수터가 있었던 곳에는 꿩의 바다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성북동 문화유적으로 북문(北門)은 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이 였는데 중종 이후에는 숙정문(肅靖門)으로 기록되고 있다, 숙정문은 풍수지리상 경복궁의 양팔이 되는 창의문과 숙정문을 통행하는 것은 지맥(支脈)을 손상 시킨다는 상서(上書)가 있자 마침내 이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의 통행(通行)을 금지 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 권6에 보면 한성의 숙정문을 한상 닫아두는 것은 이문을 열어 놓으면 장안(長安)의 부녀자가 음란(淫亂)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아 두었다는 속설(俗說)도 있다,
이것은 숙정문이 음방(陰方) “즉,, 여자의 방위(方位)에 있는 까닭에 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숙정문은 건립 된지 18년 후 태종 13년 (1413년)에 음양설(陰陽說)에 의해 폐문이 된 것이다, 또한 숙정문은 1968년 김신조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군사보호시설로 지정되어 일반사람은 출입이 금지 되었다가 38년만이 2006년 4월부터 하루 4회, 회차당 100명식만을 제한하여 개방하고 있다, 숙정문은 삼청공원 위 성북구 성북동 소재이다,
조선시대 선조 때 이수광의 지봉류설(芝峰類說) 재이부(災異部)에보면 숙정문 밖 한 바위틈에서 액체가 흘러나오는데 맑을 때는 마치 막걸리 빛 같고 진할 때는 떡과 같아서 사람들이 다투어 먹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숙정문 밖의 쌀바위(米岩) 전설이 남아있다, 이 전설에 의하면 옛날 하루 세차례씩 1되 가량의 쌀이 나왔는데 나무군 노인이 욕심이 생겨 이 바위에 지키고 앉아 쌀이 나오는 대로 자루에 담아 가득 채워 가지고 한 달 가량 계속 했더니 쌀 대신 끈적끈적한 물이 나왔다는 것이다,
※ 사적 83호 선잠단(先蠶壇)의 유래,
성북구 성북동 64의 1에는 누에치기를 장려하기 위한 선잠단이 위치해 있다, 선잠제는 고려시대 매년 봄 길한 뱀날 (사일(巳日)에 잠신(蠶神)인 서능씨(西陵氏)의 신위를 모시고 최초로 지낸 것으로 되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농본(農本) 민생정책이 보다 강화되어 정종 2년 1400년 3월 처음 선잠제를 지냈으며, 태종 13년 (1413년 4월) 제사제도를 대사(大祀)(종묘 사직) 중사(中祀)(선잠 선종) 소사(小祀)(사한 마조)로 정하면서 선잠제는 중사로 하였다, 성종 2년 1471년 선잠단을 성북동에 다시 축소하고 성종 8년 1477년 창덕궁 후원에 채상단(彩桑壇)을 신축하여 왕비가 친잠례(親蠶禮)(누에치기)를 행하였으며 또한 성현의 “용제총화”10권에 선잠제는 3월에 풍악을 써서 제사를 지낸다고 되어 있어 선잠제 거행 시 일무(佾舞)와 제례악이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대한제국 말인 순종 2년 1908년 7월 선잠단(先蠶壇) 신위를 선농단 신위와 함께 사직단(社稷壇)으로 옮겨 제향 후 중단 되었으며, 이후 선잠단의 모습은 알 수 없으나 1939년 10월 18일 보물 제17호로 지정되었다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83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고 선잠제가 중단 된지 85년 만에 1993 5월 16일 재현하여 매년 (음)3월에 선잠제를 거행하고 있다,
※ 영성단터(靈星壇址) 새해 풍년 기원과 기우제를 지내던 재단,
현재 작은 형제수도원(성북동 75번지)소재 내에 있는데, 이곳은 고려 때 처음 설치되어 조선시대에도 그 전통이 이어져 한양 천도 후 서울의 남교(南郊)에 설치되었다가 혜화문 밖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중종 2년(1507년)에 별에게 제사를 지내던 성단 즉 영성단이 있었다, 이곳은 새해 풍년을 기원하며 곡식을 담당하는 별과 농사를 관장하는 별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제단으로 성단(星壇)이라고도 하고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때는 용단(龍壇)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단의 규모는 정사가형이며 한 변의 길이가 6,3m 정도이고 단의 높이는 0,75m정도이다, 주위는 한 변이 15,6m쯤에 요단(燎壇)이 있는데 한 변의 길이는 1,5m쯤 이다, 지금은 다 폐지되어 우리 선조들이 신성시 했던 제단의 위용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2005년 12월에 성북구에서 옛 영성단터의 그림과 그 유래를 기록한 표석을 세워 놓아 아쉬운 대로 우리 선조들의 풍습과 그 숨결을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성북동은 1949년에 정부에서 풍치지구(風致地區)로 지정해 주택을 지을 수 없었으나 한남동, 돈암동, 응봉동 지구와 함께 해제되어 주택지구로 변경 되었다, 영성단 북쪽은 북한산이 있고 이 산 봉우리 중에는 마치 개가 걸터앉은 모양이라 하여 구준봉(狗蹲峰)이라 칭 한다 구준봉 뒤쪽의 잘룩한 고개를 보토현(補土峴) 즉 {보토고개}라고 하는데 이는 서울의 입수(入首)목이 되어 잘룩하므로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따라 그 약한 기운을 보충하기 위해 매년 흙을 메우고 떼를 입혔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이름이 전해온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권2에 보현봉(普賢峰)의 곁가지 산발이 곧 도성(都城)의 주맥(主脈)이기 때문에 총융청(摠戎廳)에서 보토처(補土處)를 설치하고 주관해서 보축(補築)하였다고 하였다,
※기념물 한옥 3, 1운동 때 한 사람인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살던 심우장(尋牛莊)(성북동 222-12)(서울시 기념물 제7호)에 있다, 이 집은 3, 1운동 후 한용운 선생이 총독부를 등지고 일부러 북향해서 지었는데 오세창(吳世昌) 선생이 심우장이라고 문패를 써주었다, 한용운 선생은 1944년 6월 29일 광복을 1년 앞두고 이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용운 선생은 3, 1운동을 주도한 독립 운동가이고 님의침묵을 쓴 시인이며 유명한 불교사상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유명한 욕장이였다, 나라를 잃은 슬픔과 울분이 그의 인격이 되어 욕장이로서의 일화도 많이 남기고 있다, 현재 이 집에는 외동딸인 한영숙(韓英淑)씨 가족이 거주하고 있고 선생의 유품이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이 동에는 지방 민속자료 제10호의 이재준가(李載濬家)(성북동 243-4)
이집은 살림집이라기보다 별장에 더 가깝다 뱃사공이었던 이종산은 젓갈장사로 돈을 모은 후 한강에서 오는 목재 충청도에서 올라오는 양곡과 해산물장사로 거상이 된 인물이다, 그는 당시 마포에서 가장 많은 상선을 가진 상인이었다고 한다, 이재준가는 처음 이종상의 여름별장으로 지어졌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선말기 거상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가옥으로 우리나라 건축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재준가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재준이라는 소설가가 이집을 사서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1985년 11월 덕수교회에서 인수하여 현재는 목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지방 민속자료 제11호의 이태현가(李太賢家)의 한식 주택이 있다,
국립중앙발물관장을 지낸 최순우씨가 우리 것의 아름다움에 젖어 살다간 옛집 한옥집(성북2동 126-20)은 자치 사라질 뻔했던 최순우 옛집을 되살린 것은 다름 아닌 시민들의 힘이었다, 2002년 겨울 헐릴위기에 놓인 이 집을 문화유산위원가 나서 민간모금운동으로 사들인 뒤 1년의 보수공사 끝에 복원했던 것이다, 이후 시민유산1호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또한 국내에서 처음으로 한옥을 개조해 문을 연 전통 찻집 수연산방(성북동 248)은 <문장강화>와 <무서록>을 쓴 상허 이태준의 고택을 손녀가 찻집으로 낸 곳이다,
삼청각(성북2동 330-115) 1970년 - 1980년대 요정정치의 산실로 대표되던 곳 여야(與野) 고위 정치인이 회동과 남북적십자회담, 한일회담의 막후 협상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1990년 중반 이름을 예향으로 변경하고 일반음식점으로 바뀌었다가 2000년 서울시가 삼청각 부지와 건물을 문화시설로 지정해 리모델링을 끝낸 후 새로운 전통 문화공연장으로 문을 열었다, 새롭게 단장한 삼청각은 공연장, 한식당, 찻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섯 채의 한옥이 있으며, 건물마다 원래의 이름을 그대로 살렸다, 일요일을 제외하고 연중 전통공연이 열리고 있어 우리 문화의 맥을 잊고 있다,
※간송(澗松) 미술관(美術館)은 성북동 97의 1호 성북초등학교 정문 옆 도시 속에 있다 주위가 한적하고 조용한 4,000평의 대지 위에는 고(故) 전형필(全鎣弼) 선생의 호를 따서 1938년에 설립된 간송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 보화각(葆華閣)에는 전형필 선생이 평생 수집한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는데 간소미술관은 우리나라 제1의 고서화(古書畵) 소장처로서 1966년 4월 한국민족미술연구소로 발족한 이래 1971년 10월부터 매년 5월과 10월에 소장문화재를 전시하고 있다, 알려진 바로는 이곳에는 훈민정음(국보 70호) 동국정운 권1, 6(71호) 금동계미명 삼존불(72호) 등 국보 9점과 백자박산향로(보물 238호)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376호) 등 보물 12점이 소장되어 있고, 서울특별시지정 유형문화재 4점이 간송미술관 정원에 세워져 있다,
※ 외국인 대사관촌은(성북2동 330번지 일 때) 부촌으로 잘 알려진 성북동은 대사관저가 밀집한 동네로도 유명하다 삼청터널을 지나 성북동 길로 가다보면 대사관저 표지판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대사관저 22곳 가운데 성북2동에만 10곳이 집중되어 있다, 일본, 독일, 노르웨이, 캐나다, 칠례, 호주, 알제리 등 6대주를 망라한다, 이중 독일관저는 땅만 1만2천여평에 달하는 대저택이고 일본, 호주 오스트리아관저도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월래 이 일대는 북한산 줄기로 수목이 울창하고 바위가 늘어서있는 곳이어서 새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시인(詩人) 김광섭(金珖燮)은 이곳 풍경을 주제로 <성북동 비들기>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특히 이곳을 꿩의 바다마을 이라고도 부르는데 1960년대까지만 해도 꿩이 많이 서식했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 꿩의 바다마을에 대사관저가 들어서기 시작 한 것은 1970년 초로 도심에서 가깝고 전망과 주거환경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대서관저에서 내려다보는 서울 야경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 사찰(寺刹)이 성북구에는 약 200여개에 달하는 절이 있는데 특히 북한산 밑에 성북동과 정릉동에 사찰이 많이 있다, 대표적인 것은 성라암(星羅庵)자리(성북동 284번지)에는 비구니(比丘尼) 대학과 한국비구니회 총본부가 들어서 있고 건너편에는 수월암(水月庵)(성북동 274-2)이 1968년에 세워져 있고 성북동에서 가장 오래된 절인 정법사(성북2동 330-76)가 나온다, 원래는 북전암(北渚庵)이라고 불리던 작은 암자였는데 1960년 석산 스님이 머물게 된 이후 중창을 하면서 정법사라고 명칭을 바꾸었다, 비구니(比丘尼)의 조계종(曹溪宗)은 삼각산 길상사(三角山 吉祥寺)(성북2동 323번지)가 있는데 길상사는 대원각(大園閣)요정(料亭)이 였는데 1987년 길상화(吉祥華)김영한 보살이 법정(法頂) 스님게 대원각 대지 7,000평과 지상건물 40여동 부동산 전체를 사찰로 기증할 것을 제의 하여 1997년 5월 대원각 부동산 일체의 등기 이전을 완료함으로써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 서울 분원(分院)이 되었다,
대처승(帶妻僧)의 태고종총무원(太古宗總務院)은 1986년 서대문구 봉원사에서 성북2동으로 옮겨왔다,
※교육기관으로는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고등학교(성북동 150번지)는 사립 일반계 남자 고등학교이다, 이 학교는 1931년 6월 이기윤(李基潤)이 외국에 가서 조국 독립에 공헌할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종로 기독교전도관에 세운 당시의 유일한 외국어 교육기관인 경성외국어학원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이후 중구 삼각동과 종로구 수은동으로 교사를 이전하여 다니다가, 1939년 3월에현재의 위치에 교사를 마련하여 이전하였다, 1943년 9월에는 일제가 영어 교육을 강제 폐쇄시킴에 따라 성북중학원(城北中學園)으로 변경하엿다가 12월에는 다시 경북중학원(京北中學園)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광복 후 임시 휴원(休園)되었다가 1949년 9월에 성북중학원으로 다시 개원하였다가 1954년 4월 재단법인 계원학원(繼遠學園)을 설립하여 성북중학원을 토대로 성북중학교와 성북고등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어 1946년 1월에 재단법인을 학교법인으로 조직 변경하였는데 1970년 9월에 학교법인 계원학원을 학교법인 홍익학원(弘益學園)에서 홉수 합병하고 1972년 6월에 교명을 홍익고등하교로 변경하였다, 1977년 3월에 교명을 다시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고등학교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른다,
동구여자중상업고등학교(성북동 1가 168-275)는 사립실업계 여자 고등학교이다, 이 학교는 1942년 6월 조석봉(趙錫鳳)이 종로6가(현재 이대부속병원 정문위치)에 설립한 동구가정실수여학교(東丘家政實修女學校)로 출발하였다, 교명인 동구(東丘)는 동국(東國) 청구(靑丘) 단국(檀國)등과 같이 우리나라의 옛 이름으로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민족의 얼을 되살리고자 하는 창립정신을 담고 있었다, 1944년 1월에는 교명을 동구여자상업전수학교로 변경하였다, 1945년 10월에 동구여자상업학교로 다시 변경하였으며 동시에 경제적 사정으로 교육받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광복 후 최초로 야간부를 병설하였다,
이어 1950년 2월에는 재단학원이 성립인가를 얻으며, 같은 해 4월에는 동구여자상업중학교로 인가를 받게 되었다, 1954년 1월에는 동구여자중학교, 동구여자사업고등학교로 분리 개편되었고 1961년 3월에 현 위치로 교사(校舍)를 이전하여 오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정신박약아 특수학교로 서울명수학교(성북동 226-91)는 정신지체아 교육을 위한 특수하교로 지능이 낮아 일반학교에서 수학이 어럽고 사회적응능력이 낮은 어린이들을 헌식적인 사랑과 교육을 통해 이들의 잠재능력을 최대로 신장시켜 사회에 복구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학교는 1968년 3월에 최경순이 설립하였는데 설립 당시에는 3학급 45명으로 출발하였다, 이후 학급 증설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졌고 1974년에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82년 4월에 현 위치로 교사를 신축 이전하였고 1988년 3월에는 서울시교육위원회로부터 특수교육시범학교로 지정되어 운영하고 있다, 그 외에도 성북초등학교(성북2동 66번지)가 있다,
① 성북 제1동은 성북동 1가와 성북동 일부의 행정을 담당하는 동장관할구역 명칭이다, 1943년 구제를 실시 할 때 동대문구에 속하였고 이 해 8월에 성북 1, 2정회를 두었는데 광복이 되자 1946년 10월 1일 정회를 동회로 정총대(町總代)를 동회장(洞會長)으로 개칭함에 따라 성북 제1동회와 성북 제2동회로 바뀌었다, 그 후 1955년 4월 18일 (시조례 제66호) 동제를 실시할 때 성북 제1동은 성북동 중 운수교 도로 동남방의 지역 성북 제2동은 성북제1동 관할구역을 제외한 전역을 정해졌다,
이 동의 남쪽으로는 성북동길(삼청터널 - 성북2동 - 삼선교)이 관통하고 남쪽은 동소문로가 지나고 있으면 그 밑으로는 지하철 4호선이 통과하여 한성대 입구역이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성북천이 되어 성북동길 밑으로 흘러 삼선동 동소문동 암암동으로 흐르는 성북천은 청계천으로 합류되는데 현재 성북1동지역이 복개 되어 개천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