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에 걸친 송사와 대동보 발간등 굵직한 현안을 헤치면서 어려운 와중에서도 10만
종인을 대표하여 대종회를 이끌고 계시는 대종회장님과 총무님, 여러 이사님들과 지방
종회의 회장님들께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오랫동안 발행이 중단되었던 초계정씨 대종회보가 재발행을 시작하여 종인의 한 사람으로서 기쁜 마음이며 회보에 게재할 원고작성에 고심하던 중에 가장 시급히 다루어야할 문제중 하나라고 생각되는 3世 3位 諱字 정정에 대한 제 나름의 확신으로 여러분들과 의견을 나누고자 합니다.
“3世 3位분들의 휘자라니...” 이게 도데체 무슨 문제가 있는가? 하시며 의아하게 생각할 분이 많을 것이며 그것이 그렇게 시급히 다루어야 하는 문제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제가 諱字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은 몇 년전부터이며 직접적인 계기는 대제학공파의 파조되시는 3世 福卿公의 墓誌文을 접하게 되면서 부터입니다.
3世 3位의 세분은 福公, 福卿, 福儒의 세분을 말하는 것으로 초계정씨 종인은 누구한 사람 예외없이 이 세분의 후손입니다. 福과 復은 읽혀지는 음은 같지만 뜻은 전혀 다른 완전히 다른 글자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3世 3位의 諱字의 문제점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 기존자료
『...(이상생략) 아들은 福公 福卿 福儒이다』 “고려사 열전 정문편” ※ 고려사는 1449년(세종 31년)부터 1451년(문종 1년)사이에 김종서, 정인지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고려시대 역사서이다. |
고려사는 고려시대 연구의 기본 자료이므로 아마도 오종의 족보 편찬시 많은 자료를
인용하였으리라 생각됩니다.
○ 검토자료
1. 3世 福公公 墓誌文
발견배경 : 1831년(순조31년) 장단군 반룡산 아래 거주하는 尹 진사가 파주에 거주하는
鎭聃(진담)공과 담소중 해평 尹씨가 점거중인 반룡산의 지석함이 나왔는데 고려시대 鄭씨의 선산이었던 것 같다는 말을 듣고 이튿날 진담공이 현장에서 석함의 묘지문을 확인하였으며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高麗國 尙書刑部員外郞鄭公諱復公字餘慶 文廟相國鄭倍傑之孫也....(이하생략)』 (고려 상서 형부원외랑 정공의 휘는 復公이고 자는 餘慶이니 문종조에 재상을 지낸 鄭倍傑의 손자이다) |
1979년 대종회에서 발행한 종사백선 19쪽을 보면 당시 대종회에서도 휘자의 문제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보책과 묘지문의 내용이 달라 고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묘지문의
전문은 종사백선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1975년 발간된 초계정씨종사 48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묘지문은 공의 생존당시 동시대인이 제작한 것이므로 복공공 사망후 약 300년 후에 쓰여진 고려사 보다 훨씬 정확하고 우선적으로 인용해야 할 자료라고 보여집니다. 이 하나의 자료만으로도 휘자 정정에 대한 논의는 충분히 이루어졌어야 했다고 봅니다.
2. 3世 福卿公 墓誌文
『公姓鄭諱復卿字世貴草溪人 左僕射參知政事贈諡貞簡公諱文之子...(이하생략)』 (공의 성은 정씨이고 이름은 復卿이며 자는 世貴로 草溪사람이다. 좌복야 참지정사로 추증된 시호가 정간공인 文의 아들이다...) ※ 고려묘지명 집성 상권(한림대학교 사학과 김용선 교수 번역, 원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묘지문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주로 발견되기 시작하였으며 고려시대의 실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역사 자산이며 복경공의 묘지문은 발견된 경위는 자세하지 않으나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원본이 소장중이며 여러 다른 묘지문들과 같이 고려시대의 실상을 알려주는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묘지문은 돌아가신 분의 행적을 돌에 새겨 기록한 것으로 동시대에 생존했던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들이 제작하였다고 보면 어떤자료보다 우선적으로 인용되어야 할 1차 자료라고 생각됩니다. 반면 3세조께서 졸 하신지 약 300년이 지난 고려사와 고려사를 인용한 기존의 보책은 묘지문에 비하면 2차 자료에 불과합니다.
○ 그외자료
1. 백과사전
① 정복경(鄭復卿) :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세귀(世貴). 광유후(光儒侯)정배걸(鄭倍傑)의 손자로, 좌복야 참지정사(左僕射參知政事) 정문(鄭文)의 아들이다(이하생략) <민족문화대백과사전:네이버자료>
② 정복경(鄭復卿) : 본관은 초계(草溪)이고, 자는 세귀(世貴)이다. 좌복야 참지정사(左僕射參知政事)를 지낸 정문(鄭文)의 아들이다(이하생략) <두산백과사전:네이버자료>
③ 정복경(鄭復卿) : (1087년 ~ 1152년)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세귀(世貴)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검교사공(檢校司空)·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정문(鄭文)의 아들이다.
(이하생략) <위키백과사전:네이버자료>
아쉽게도 福公公, 福儒公의 자료는 조회되지 않으나 福卿公의 자료는 대부분의 백과사전에 復卿으로 기록하고 있어 고려사를 인용한 오종의 족보이외에는 福자를 사용한 자료가
거의 없습니다.
2. 諱字 자체의 의미
정간공께서 세분의 아드님을 낳으셨을때는 보자기에 쌓인 어린 아이였을텐데 막 태어난 유아에게 福公, 福卿, 福儒라고 이름을 지었을리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조상의 유업을 이어받아 장차 훌륭하게 자라나라는 뜻의 復公, 復卿, 復儒가 훨씬 의미적으로 부합된다고 생각됩니다. 정간공께서 아들들의 휘자로 公 卿 儒를 사용한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3. 성명 불용한자
성명학에서 이름으로 사용할수 없는 한자는 학자마다 약간의 견해는 다를수는 있지만 福자는 대부분 불용한자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福자를 사용하는 사람은 빈천해 진다고 하여 꺼리고 있습니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조금만 검색해 보면 알수 있는 것을 한림학사와 예부상서를 지내신 정간공께서 당신님의 아들들의 이름을 지을 때 불용한자를 사용하였을리 없다는 생각입니다.
결론
3世祖 福公公의 실전된 묘지를 확인하고 묘지명을 입수한지 약 190년, 3世祖 福卿공의 墓誌文이 발견된지 약 100년이 되어가는 지금 조상의 휘자에 대한 논의는 너무도 늦었다고 생각하며 지금이라도 여러 경로를 통해 의견을 종합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동시대 현장에 같이 생활했던 사람들이 죽은이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묘지석 보다 수백년이 지난후 기록된 역사기록을 선택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오며,
구백년 가까운 시간동안 조상님의 휘자를 잘못 사용해 온 후손들의 불효를 씻을수 있는 계기가 되기 바라오며 여러분들의 고귀한 의견을 경청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