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사랑은 격화파양(隔靴爬痒)이 아닙니다.]
고향 집을 방문할 때마다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아, 어머니. 몸도 불편하신데 제발 음식 좀 그만 준비하세요. 냉장고에 더 들어갈 공간도 없어요. 저희 맞벌이라 집에서 밥 잘 안 먹는 거 아시잖아요.”
“아니, 그래도 며느리가 왔는데 어떻게 밑반찬 하나 안 해주니? 잔말 말고 가져가거라.”
저는 어머니께 불편한 몸으로 음식 좀 그만하시라 잔소리. 어머니는 해주는 대로 좀 가져가라고 하소연입니다.
전화 통화를 할 때도 똑같습니다.
“아들, 지난번에 보내준 것도 그대로 있는데 또 뭘 보낸 거냐? 돈 아깝게 이런 거 좀 보내지 말고, 시간 나면 애 데리고 좀 올라와라. 손녀 보고 싶어 죽겠어.”
“아니, 아직도 다 안 드셨어요? 그거 보내드린 지가 언젠데. 그래도 그런 거 꾸준히 드셔야 잔병치레를 안 한다니까요. 고집 피지 말고 열심히 드세요. 그리고 주말에 출근해야 해서 못 내려가요.”
공격과 수비는 바뀌었지만, 대강 비슷합니다.
왜 우리 집엔 이런 사소한 실랑이가 끊이질 않는 걸까요. 고민이었습니다. 한쪽에서는 반찬 가져가라, 다른 한쪽에서는 건강식품 챙겨 드시라. 하지만 다 싫답니다. 이상합니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으로 하는 건데, 상대방은 그걸 받아들이질 않습니다. 베푸는 사람이 문제일까요, 아니면 그걸 몰라주는 사람이 문제일까요?
중용에 ‘내게 베풀어지길 원치 않는 것이라면, 역시 남에게도 베풀지 말아야 한다(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는 구절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도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유명한 황금률입니다. 머리로는 이 법칙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어리석게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는 당신 생각만 하시는 어머니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류머티즘으로 불편한 몸 이끌고 그 멀고 먼 마트에서 무거운 식재료를 이고 지고 가져오시는 게 싫었습니다. 하나하나 굽은 손으로 다듬고, 무거운 냄비 들었다 놨다 하며 아픈 허리 굽혔다 폈다 하십니다. 이렇게 생고생하며 챙겨주시는 게 속상하다고 계속 말씀드려도 하나 귀담아들으시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돌이켜보니 저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대방이 원하시는 것에 대한 고민 없이, 그저 내 입장만 생각했던 겁니다.
어머니가 정말로 바라는 것은, 값비싼 홍삼 드링크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당신께서 해주시는 음식을 감사한 마음으로 맛있게 먹어주는 것. 그리고 손녀 얼굴을 자주 보여드리는 것이었어요. 기껏 만들어 놓은 음식 안 가져가겠다 엄포나 놓고, 이런저런 핑계로 차일피일 방문도 안 하니 얼마나 속상하셨을까요.
그래 놓고 스스로 나름 효자라 생각하며 살았죠. 하지만 그건 정작 어머니를 위한 효도가 아니라 나를 위한 효도였습니다. 그걸 깨달았어요. 어머니는 등이 가렵다 하시는데도 저는, ‘아니, 아니, 손등이 더 간지러워 보여요. 거길 긁어드릴게요.’하며 애꿎게 다른 데만 벅벅 긁어드린 셈이 되었던 겁니다.
이제 챙겨주시는 반찬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건강식도 여쭤보고 필요하다 하시는 것만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싫은 것도 일단 ‘예.’로 시작하는 대답을 합니다. 어머니와의 관계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오래 통화를 해도 불편한 마음이 없습니다. 제가 먼저 바뀌니, 어머니도 조금씩 바뀌는 것 같습니다. 이제 임금님 수라상 같았던 반찬이 조금 줄어든 눈치거든요.
‘발등이 가려운데 가죽신을 신고 긁는다.’는 격화파양(隔靴爬癢)이란 말이 있습니다. 결국 가려운 곳은 하나 긁지도 못하고, 헛된 노력만 계속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어쩌면 제가 지금까지 어머니한테 한 소행이 그런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사랑은 격화파양이 아닙니다.’
진정 사랑한다면 엉뚱한 데를 긁지 말고 상대방이 가려워하는 바로 그곳을 긁어주세요.
다가오는 주말엔 딸 아이 데리고 한 번 내려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