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래미 입향 시조 팔오헌(八吾軒) 김성구(金聲久) 종택>
유교 문화(儒敎文化)의 보고(寶庫) ‘바래미’[海底]
김 철 진(金哲鎭)
‘바래미’는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해저1리 ‘전통문화마을’로서, 건축학과 교수가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마을 18곳 중 하나로 선정한 마을이다.
봉화읍 소재지에서 영주 방향으로 영동선 철길과 나란히 달리는 36번 국도를 따라 2km 정도 가다 보면 오른쪽에 옛날 기와집이 많은 고색창연(古色蒼然)한 동네가 보인다. 여기가 의성 김씨 집성촌, 300여 년 세거지인 ‘바래미’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도시에서 태어나지 않고 다행스럽게도 시골에서 태어나 찾아올 고향 마을이 있다는 것은 내게는 크나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제주도 사람들에게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아들이나 남편이 살고 있다는 전설 속 환상의 섬, 피안의 섬 ‘이어도’가 있다면, 내게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 꿈속의 고향 ‘바래미’가 있다.
‘바래미’ 의성김씨의 파조(派祖)는 개암(開巖) 김우굉(金宇宏, 1524-1590)으로 대사간·대사성·승지·충청도관찰사·부제학 등을 두루 거친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이며 문정공(文貞公)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1540-1603)의 중형이다. 입향조(入鄕祖)는 개암 김우굉의 현손인 팔오헌(八吾軒) 김성구(金聲久, 1641-1707)로 정언·수원부사·여주목사·대사성·강원도관찰사 등을 지낸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이다.
‘바래미’가 의성 김씨 집성촌이 된 것은 김성구가 1700년(숙종 26), 의령 여씨들이 살던 마을에 하룻밤 사이 일야각(一夜閣)을 짓고 들어오면서부터라고 한다.
그 후, 후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며 “우리 집안은 대대로 맑고 깨끗함을 전해 내려왔으니, 자손 된 자들은 삼가 지키고 바꾸지 않는 것이 옳다.(家世以淸素相傳 爲子孫者 謹守勿替可也)”라는 뜻을 남겼다. 후손들은 유지에 따라 청빈한 삶을 살면서도 학문에 정진한 결과 대과[문과] 16장 소과[사마시] 63장이 나와 마을 앞 솔거리에 솟대가 빼곡하여 바래미에는 ‘솟대 그늘에 우케를 못 말린다.’[급제하면 세우는 솟대 때문에 그늘이 많아 나락을 못 말린다는 뜻]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6.25때 집을 빼앗기고 가지밭골 단사정(丹砂亭)으로 쫓겨나 있을 때, 인민군 장교가 “여기까지 내려오면서 이렇게 기와집 많은 동네는 처음 봤다.”며 놀라던 그 ‘바래미’이다.
중요민속자료 제169호인 ‘만회고택(晩悔古宅)’, 경상북도기념물 제138호인 ‘개암종택(開巖宗宅)’과 제117호인 ‘김건영가옥[海觀舊宅]’,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445호인 ‘팔오헌종택(八吾軒宗宅)’과 제385호인 ‘남호구택(南湖舊宅)’, 제338호인 ‘해와고택(海窩古宅)’ 등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古宅)만 해도 여섯이나 된다.
그리고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지은 이긍익(李肯翊)의 부친 이광사(李匡師)가 현판을 쓴 ‘학록서당(鶴麓書堂)’, 어사 박문수가 영조 원년에 ‘은거단사협(隱居丹砂峽)하야 독파만권서(讀破萬券書)라’[단사협에 숨어 살며 일만 권 책을 읽어 파했더라]라고 소를 올려 건원릉 참봉을 제수 받았던 단사(丹砂) 김경온(金景溫)을 기리는 ‘단사정(丹砂亭)’, 형조참판·대사간·병조참판 등을 역임한 갈천(葛川) 김희주(金熙周)의 고택인 참판댁 ‘수오당(守吾堂)’, 참봉댁 ‘토향고택(土香古宅)’, 그리고 마을 서고(書庫)였으나 지금은 ‘남호구택’과 함께 고택 체험을 할 수 있는 ‘영규헌(映奎軒)’ 등 수많은 미래의 문화재 자료들이 밀집해 있는 ‘바래미'는 경북 북부 지방 <유교 문화(儒敎文化)의 보고(寶庫)>이다.
뿐만 아니라, 대쪽같은 선비 정신으로 충의(忠義)를 실천하며 항일 운동에 참여하여 한 마을 14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살아 숨쉬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아 관심의 외곽으로 밀려나 잊혀지다가, 때늦은 감은 있으나 그래도 다행히 2010년 7월 17일 제헌절을 기하여 봉화군에서 받은 국가지원금에 성금을 보태어 후손들의 숙원 사업이던 비(碑) 세 기가 바래미에 세워졌다. 항일 독립운동 정신을 기린 ‘독립운동기념비(獨立運動紀念碑)’와 파조 개암 김우굉의 ‘개암십이곡(開巖十二曲)’ 시비, 입향조 팔오헌 김성구의 ‘헌명비(軒銘碑)’가 그것이다.
바래미 항일 독립운동은 바래미가 생가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이 1919년 바래미 만회고택(晩悔古宅) 명월루(明月樓)와 해관구택(海觀舊宅)에서 ‘제1차 유림단사건’[일명 파리장서 사건]이 된 ‘파리장서’를 작성하고 서명을 시작함으로써 비롯되었다. 1925년 만·몽(滿蒙) 접경지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모금 운동이 발각된 ‘제2차 유림단 사건’ 때도 바래미에서 황소 쉰 마리 값을 모금, 심산 김창숙에게 건넨 사실이 발각되어 온 마을이 쑥대밭이 되는 비운(悲運)을 겪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더욱 심해진 왜경의 감시 속에서도 선조의 애국 충정과 선비 정신을 이어받은 젊은 세대들이 1933년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하다 발각된 ‘독서회 사건’으로 또 많은 사람들이 옥고를 치러야 했고, 이러한 바래미 항일 운동은 학생층에까지 3대로 이어져 대구·일본·만주 등지에서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 당시 온 마을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더 많은 독립유공자들이 있는데도 자료 미흡과 증거 유실로 독립유공자는 14명에 그치고 있다.
개암 김우굉의 ‘개암십이곡(開巖十二曲)’은 개암공의 증손인 외서암 김추임(金秋任, 1592-1654)이 ‘개암십이곡’ 중 구전되던 8곡을 수집하여 「개호잡록(開湖雜錄)」에 수록했다는 기록만 전해오다가, 서울대학교 권두환·조해숙 교수에 의해 개암공 7대손 소암 김진동(金鎭東, 1727-1800)의 필사본「추모록(追慕錄)」에서 최초로 발견되었다.
이후 최근에 「개호잡록」 원본이 개암종가에서 발견되어, 그 중 4곡을 원본 표기대로 비에 올린 것이 ‘개암십이곡’ 시비다. 400여 년 전[1585-1587] 언문으로 지어진 ‘개암십이곡’은 교훈 목적의 ‘도산십이곡’(1565)과 달리, 자신의 인생관을 바탕으로 사물을 통한 은유적 현실 비판과 선비의 강호지락을 노래함으로써 문학적 완성도를 높임은 물론, 향촌 문화로서의 시조 전승 과정 및 정착 시기와 발전 과정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문학사상 중요한 의의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팔오헌 김성구의 ‘헌명비(軒銘碑)’는 '팔오헌'을 자호(自號)로 삼고 청빈과 성실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세웠던 여덟 가지 생활 수칙인 ‘경오전(耕吾田:내 밭을 갈고), 음오천(飮吾泉:내 샘물을 마시고), 채오전(採吾巓:내 산 나물을 캐고), 조오천(釣吾川:내 내의 고기를 낚고), 피오편(披吾編:내 책을 읽고), 무오현(撫吾絃:내 거문고를 뜯고), 수오현(守吾玄:내 현묘함을 지키고), 종오년(終吾年:내 삶을 마치리)’을 새긴 비(碑)로서, 지금껏 후손들이 ‘청빈한 선비의 삶’을 살게 하는 교훈이 되고 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로 나와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가서 대학교를 졸업한 뒤 직장 생활을 접기까지 40여 년 동안, 늘 가슴속에서 출렁이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떨칠 수 없었다.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찬 물이 나와 인근에서도 소문난 명천(名泉)인 ‘큰샘’ 물을 마시면서 유년의 꿈을 꾸던 어린 소년이 벌써 이렇게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봉화읍 소재지에 춘양목 우거(寓居) 하나 마련해 ‘예술촌(藝術村)’ 현판 걸어 놓고 살며, 화가가 화폭에 물감 풀어 놓듯 ‘바래미’를 지척에 두고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시심(詩心)으로 풀어내고 있다.
‘바래미 가는 길은 늘 / 풋감 떫은 그리움이다 / 차창에는 철도 없이 / 모과 꽃이 피고 오얏이 익고 / 망막에는 할매 된 남이도 / 눈매 곱게 웃는 복사꽃이다 / 영주역에 내려서 신작로를 달려 / 내 고향 봉화 바래미로 가면 / 아배 심은 노간주나무는 / 세월을 삭히며 용틀임을 하고 / 길옆 토담 아래 앵두나무는 / 잊혀진 나달처럼 사라지고 없다 //
사랑채 불타 버린 옛 집터 / 내 마음의 바래미만 늘 풋살구다’ <‘내 마음의 바래미’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