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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齋 柳致明 종가 3대의 독립운동 김 희 곤* 연 구 논 문 55) 1. 머리말 2. 의병항쟁에 나선 柳止鎬·淵博 부자 3. 定齋 종가에 옮겨 온 協東學校 4. 임동 챗거리(鞭巷)장터 3·1운동의 주 역 柳淵成 5. 巴里長書에 참가한 柳淵博 6. 사회운동에 나선 柳東著 7. 맺음말 1. 머리말 定齋 柳致明(1777~1861)은 퇴계학맥의 정맥을 이은 대학자이다.1) 일반 적으로 퇴계 제자 가운데 가장 높게 평가하는 제자 세 사람으로 月川 趙 穆, 鶴峯 金成一, 西厓 柳成龍을 말한다. 세 사람의 학문과 정치적 성향은 * 안동대 교수/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 1) 정재 종가는 안동시 臨東面 水谷洞 大坪(한들마을)에 있었다. 수곡동에는 水谷(무실 마을)을 비롯하여 大坪(한들마을), 朴谷(박실마을) 등으로 이루어졌고, 전주류씨가 5 백 년을 터 잡고 살아왔다. 그런데 1990년 무렵 임하댐이 건설되는 바람에 많은 집 들이 수몰선 위로 옮겨지거나 구미시 해평면으로 집단 이주하고, 또 여러 곳으로 나 뉘어가기도 했다. 정재 종가는 한들 뒷산으로 옮겨졌다. 76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7집 큰 차이를 보였다. 이 가운데 학봉 김성일을 잇는 중심축이 바로 류치명 으로 이어진 것이다. 따라서 류치명의 위상은 대단히 높았고, 특히 1800 년대 전반기에 안동문화권을 강타한 屛虎是非에서 류치명은 가장 영향 력이 큰 인물이었다. 그러한 위상을 가진 집안이었으므로, 역사적인 격변 시기에 주어지는 역사적 부담과 역할을 흘려 지날 수는 없었다. 근대 민족문제가 발생할 때, 그 첫 만남은 류치명의 아들 洗山 柳止鎬 (1825~1904)에서 시작되었다. 열강의 침략에 위정척사로 맞서던 전통 유 림의 성격 그대로, 그도 그 흐름의 선두에 서 있었다. 안동문화권의 지도 자로서 그가 의병대열에 참가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로부터 대를 이어 민족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대열에 그의 집안이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독립운동의 서막인 의병항쟁에서부터 1920년대 노동운동을 통한 독립 운동에 이르기까지 3대가 거기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독립운동은 의병으 로 시작하여 계몽운동, 의열투쟁, 3·1운동 등을 거쳐 만주지역 독립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내 사회운동, 학생운동 등 분야별로 전개되어, 광 복을 맞을 때까지 51년 동안 전개되었다. 이 가운데 정재 종가의 후손들 이 펼친 활동은 주로 전반과 중반 시기에 집중되었다. 즉 의병과 3·1운 동, 그리고 사회운동이 그것이다. 정재 종가의 3대 독립운동을 빚어낸 주인공은 정재의 아들부터 증손자 까지이다. 아들인 류지호에 이어, 맏손자 柳淵博(1844~1925)과 둘째 손자 柳淵成(1857~1919), 증손자이자 류연박의 아들인 柳東蓍(1886~1961)와 柳 東著(1892~1948)가 그 주인공들이다. 이들의 활동을 시기별로 추적하고, 역사적인 위상을 정리하는 데 이 글의 목표를 둔다. 定齋 柳致明 종가 3대의 독립운동 77 정재 종가 3대 독립운동가 가계도(음영은 독립운동가) 시조 柳濕 (시조) 8대 柳城 (첫째) 9대 柳復起 (첫째) 10대 柳友潛 (첫째) 17대 柳晦文 (첫째) 18대 柳致明 定齋 李彙運 (壻진성) 19대 柳止鎬 金在九 (壻의성) 金精壽 (壻의성) 金達銖 (壻의성) 20대 柳淵博 (첫째) 柳淵成 (둘째) 金魯憲 (壻광산) 21대 柳東蓍 (첫째) 柳東著 (둘째) 柳東英 (셋째) 金世東 (壻의성) 金鴻基 (壻의성) 金雲植 (壻의성) 柳東莘 (첫째) 柳東桂 (둘째) 金(壻 광산) 洪(壻) 78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7집 무실마을과 종가 위치 옛 무실마을 옛 한들 챗거리장터 임동면사무소 정재종택 현 무실마을 34 수 곡 임동교 안동 영덕 2. 의병항쟁에 나선 柳止鎬·淵博 부자 정재 종가 인물이 독립운동에 발을 디딘 것은 독립운동의 출발점인 의 병항쟁부터였다. 의병은 세 시기로 나뉜다. 전기의병(1894~1896), 중기의병 (1904~1907.7), 후기의병(1907.8~1909)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안동의병은 특히 전기의병에 집중되었다. 안동에서 1894년 7월에 일어난 갑오의병은 의병사의 첫 걸음이자 한국독립운동의 출발점이다. 다만 아쉽게도 갑오 의병에 참가한 안동인들의 이름을 밝혀주는 자료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전기의병에서 구체적으로 활동한 인물이 드러나는 시기는 1895년 12월 에 일어난 을미의병이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저항하여 시작된 을미의 병은 전국에서 일어났다. 단발령이 전해지자마자 영남지역에서 맨 먼저 定齋 柳致明 종가 3대의 독립운동 79 안동지역 유림들이 의병 결성에 나섰다. 상투를 자른다는 斷髮令이 내려 지고, 그것이 시행에 들어가기까지 열흘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에 사태를 주시하던 안동유림들은 통문을 돌리면서 대응책을 논의하다 가 결국 의병을 일으키자고 결의하였다. 금계마을 西山 金興洛이 앞장 서 봉정사 회의를 열고 안동부에서 1만 명이 구름처럼 모여 ‘안동의병’을 결성하였다. 안동에서 일어난 을미의병은 안동부와 예안에서 결성된 안동의병과 선성의병으로 나뉜다. 안동의병은 權世淵이 1차 의병장을 맡아 안동관찰 부사 김석중을 축출했다가 반격에 밀리고, 다시 안동부성을 되찾는 공방 전을 치렀다. 이어서 1896년 2월 2차 의병장 金道和가 취임하고서 태봉전 투를 치렀다. 3월 말에 치러진 태봉전투는 안동의진을 비롯하여 예안의 선성의진과 봉화의진·예천의진·영천(영주)의진·호좌의진(제천) 등이 연 합하여 상주 함창의 태봉에 주둔하던 일본 수비대를 공격한 연합작전으 로 펼쳐졌다. 격렬한 전투를 벌였지만 무기와 훈련에서 열세이던 의병이 밀려났고, 추격하던 일본군이 안동으로 들어와 안기동에 불을 지르는 바 람에 서풍을 타고 안동부성 안의 1천 호가 넘는 집이 불타는 비극이 벌어 졌다. 안기동에서 ‘탑곡’, 그러니까 임청각 앞 7층 전탑이 있는 곳까지 불 바다가 되었다. 안동부에서 밀려난 의병은 이후 동쪽으로 옮겨가며 활동 하고, 예안과 봉화까지 오르내리며 전투를 벌였다. 을미의병으로 일어난 안동의병이 해산한 시기는 그해 8월 말이다. 무려 9개월 동안 펼쳐진 기 나긴 항전이었다.2) 안동의병의 현장에 류지호와 맏아들 류연박의 움직임이 두 곳에서 나 타났다. 영양 청기 출신이자, 예안 宣城義陣의 中軍이 되었던 김도현이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1895년 12월 3일(양 1896.1.17) 都正 柳止鎬를 뵙고 그 넓은 포부를 듣 고 물러나와 그 아들인 上舍 柳淵博을 만나고 돌아왔다.3) 2) 김희곤, ꡔ안동 사람들의 항일투쟁ꡕ, 지식산업사, 2007. 80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7집 이때는 의병을 일으키자는 안동통문이 나돌던 무렵이었다. 이미 나흘 앞서 예안통문이 돌았고, 이틀 앞서 삼계통문과 청경통문이, 그리고 바로 이 날 호계통문이 돌았다.4) 그래서 김도현은 한들로 가서 류지호를 만나 ‘넓은 포부’를 듣고, 그 아들 류연박 진사와 만나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단발령에 대한 대응책으로 의병을 논의한 것이라 짐작된다. 그리고 11일 지나 다시 두 부자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이번에는 안동 부 성 안이었다. 1895년 12월 14일(양 1896.1.28) 아침 浦項橋를 건너 濟南樓 앞으로 말 을 달려갔으나, 아무도 막는 사람이 없다. 이에 水谷 上舍 柳淵博을 만나 서 함께 書記所로 들어갔다. 인하여 大將所로 들어가니 대장은 곧 전 참 봉 權世淵 어른이다. 다시 都所로 들어가 持平 金興洛과 都正 柳止鎬 두 어른을 만나고, 또 좌익장 尙五 李運鎬를 만나고 나왔다.5) 14일이면 이미 안동의병이 거병한 12월 6일(양 1896.1.20)보다 8일 지난 날이다. 의진이 결성되자마자 안동관찰사 김석중이 도피하였고, 의병이 안동부성을 장악하였다. 김도현이 안동부를 찾았을 때는 안동의병이 성 을 장악하고 있던 상황이다. 浦項橋, 곧 개목나루를 건너 안동부성의 남 문인 濟南樓를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가 류연박을 만났다. 그리고서 대장 소로 가서 권세연 대장을 만나고, 다시 본부인 도소로 가서 김흥락과 류 지호에 이어 좌익장 이운호를 만났다. 여기에서 우선 류연박이 안동의병에서 맡은 임무를 찾아보자. 그 답은 거병 당일 작성한 안동의병의 간부진 명단인 「安東義所爬錄」에 들어 있 다. 대장 권세연과 부장 곽종석(부임 않음) 다음에 참모 네 사람이 적혀 있는데, 류연박은 바로 그 첫 순서에 나타난다. 김도현이 안동의진에 도 3) 金道鉉, 「碧山先生倡義顚末」, ꡔ독립운동사자료집ꡕ 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16쪽. 4) 김희곤, ꡔ안동 사람들의 항일투쟁ꡕ, 지식산업사, 2007, 85쪽. 5) 金道鉉, 「碧山先生倡義顚末」, ꡔ독립운동사자료집ꡕ 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17쪽. 定齋 柳致明 종가 3대의 독립운동 81 착하여 먼저 만난 사람이 바로 본부를 책임지고 있던 참모 류연박이었던 것이다. ▲ 1895년 12(음력) 작성된 을미의병 당시 직제와 간부진 명단인 安東 義所爬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참모 명단에 류연박이 보인다. 이어서 그는 김흥락과 더불어 류지호를 만난 것으로 확인된다. 그렇다 면 류지호는 안동의병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을까? 어디에도 그 답을 줄 만한 것이 없다. 하지만 추정은 가능하다. 아들이 참모 직책을 맡아 있으 니, 연로한 아버지가 또 직책을 맡는다는 것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직임을 문중과 마을별로 나누어 맡게 했던 상황을 감안 한다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 같다. 당시 만 70세 노령이던 류지호는 김흥 락, 石湖 柳道性, 拓菴 金道和 등과 더불어 당대 최고 지도자로서 의병을 일으키거나 의병장을 선임하는 일에 참여했다. 김도현이 안동의진을 찾 아 본부에서 류지호와 김흥락을 만났다는 글을 남긴 것도 그러한 정황을 보여준다. 여기까지는 당연한 스토리이다. 그런데 여기에 참으로 억누를 수 없는 아픔과 곤혹스런 장면이 있었다. 단발령이 시행되면서 아래위 가릴 것 없이 지나는 사람을 붙잡아 상투를 잘랐다. 그러는 과정에서 당대 안동 사회에서 최고 지도자인 류지호가 ‘욕을 당했다’라고 기록은 전한다. 어 느 정도 훼손당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안동관찰부에 억류되어 8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7집 공박 당했으니 그 정도를 짐작할 만하다. 그렇다면 안동인 전체가 마찬 가지였겠지만, 특히 무실사람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을 것이다. 의 병에 나서는 무실사람들의 결연한 투쟁 의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다. 정재 종가와 관련하여 한 사람 더 덧붙여야 할 인물은 류지호의 생가 동생인 柳廷鎬이다. 그는 다섯 사람으로 구성된 都書記를 맡았다. 자신 의 생가 동생은 도서기를, 맏아들은 참모를 맡았다. 더구나 간부진에 들 어있던 무실 사람은 네 명이나 더 있었다. 「안동의소파록」에는 전체 46 명 가운데 무실 사람이 모두 6명인데, 류연박과 류정호 외에 중군인 柳琓 과 서기 柳淵楫·柳晦植, 그리고 출령을 맡은 柳憲鎬가 그들이다. 이들 대다수가 집안 동생이나 조카들이다. 또 청송의진의 일지인 ꡔ赤猿日記ꡕ 에는 柳璧鎬가 안동의진의 소모장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정재 종가는 의병에 필요한 자금을 나누어 맡는 일에도 자기 몫을 단 단히 맡았을 것이다. 무실 사람들의 역할은 의병을 꾸려 가기 위한 자금 을 문중별로 배정한 데서도 드러난다. ‘안동창의소’는 의병을 일으킨 지 한 달이 지나 여러 문중별로 필요 경비를 배정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많 은 금액이 배정된 문중은 무실 전주류씨 집안을 비롯하여 하회 풍산류씨 와 닭실 안동권씨 등 세 문중으로, 각각 1천 냥이었다. 다음으로는 내앞 마을 의성김씨 8백 냥, 금계와 봉화 해저 의성김씨, 법흥 고성이씨 문중 각각 5백 냥,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4백 냥씩이었다. 이 수치는 당시 안 동사회에서 문중별로 가지는 재력과 역량의 비율을 알려 주는 것이기도 하고, 감당해야 할 역사적 책무의 양을 전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무실마 을 가운데 정재 종가가 맡았던 몫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모습은 뒷날 1910년대 중반에 의병과 광복회의 활동 과정에서 일부 엿볼 수 있 다. 1912년 음력 4월 20일 柳時淵 의병이 자금을 요구한 것이나,6) 1917년 광복회가 이 집에 군자금을 요청한 일,7) 이런 것이 정재 종가의 재력과 자금 지원을 짐작하게 해준다. 6) 대구지방법원, 「柳時淵 등 5인 판결문」(1913.9.15). 7) 김희곤, ꡔ박상진자료집ꡕ,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0, 69쪽. 定齋 柳致明 종가 3대의 독립운동 83 3. 定齋 종가에 옮겨 온 協東學校 혁신의 바람이 안동문화권, 즉 경북 북부지역 전체로 몰아치기 시작한 때는 1900년을 갓 넘어선 무렵이었다. 안동이야말로 온 나라에서 위정척 사적인 분위기가 가장 강했던 곳이다. 온 나라에 불어 닥친 개화 바람도 여기를 범하기는 어려웠고, 퇴계학맥을 자랑스럽게 이어가면서 대의명분 을 중시하던 이곳은 그 와중에서도 아랑곳 않고 성리학적 틀을 확고하게 지켜가고 있었다. 영남만인소를 제출하여 1881년 신사년 대척사운동을 주도하던 곳도 안동문화권이었다. 그러한 세계에 개화 물결과 서양 문명 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질 만했다. 더구나 정 재 종가는 퇴계학맥의 정맥을 잇던 곳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안 동문화권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은 사람은 삼산 출신 柳寅植이다. 1904 년 시작된 이 바람은 金東三을 비롯한 내앞마을 의성김씨 문중이 참가하 면서 1907년 내앞마을에 協東學校를 건립하는 것으로 결실을 보았다. 협동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었다. 이는 안동문화권이라 불리 는 경북 북부지역에 위정척사의 틀을 혁신 유림사회로 전환시키는 바람 의 진원지일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을 펼쳐 나갈 역군을 길러 내는 산실 이었다. 여기에 무실 사람들이 참가한 것은 당연하다. 협동학교 주역들 다수가 서간도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1911년 1월 대거 망명한 뒤, 학교 일을 이어나간 인물이 柳淵甲·柳東泰 등이었다. 1912년 10월 협동학교가 정재 종택으로 이전했다. 교장을 맡은 이는 류 연갑이고, 토지 소유자 이름은 류동태로 적혀있는 것이 많았다. 만주로 옮긴 주역들이 신흥강습소를 열어 민족 인재 육성사업을 계속 이어 나갔 고, 남은 사람들은 정재 종가에 새로운 공간을 확보하고 학생들을 모아 그 뜻을 이어갔다. 그러므로 정재 종가가 혁신의 변화를 고스란히 이어 간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 된다. 84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7집 ▲ 한들(대평)의 정재 종가에서 열린 협동학교 제3회 졸업식 모습, 1916년 3월 로 추정. ▲ 1912년 10월 협동학교 이전 개교 통지서. 수곡동 대평으로 옮겨 개학한다는 통지 문, 교장은 류연갑이다. 定齋 柳致明 종가 3대의 독립운동 85 4. 임동 챗거리(鞭巷)장터 3·1운동의 주역 柳淵成 1) 계기를 만든 柳東蓍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은 한민족 모두가 독립을 추구한다는 의지를 전 세계에 분명하게 밝히는 거사였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 나고 이를 마무리 짓기 위한 회의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게 되자, 일제 는 ‘한국인들이 일본의 통치에 만족하여 독립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엉 터리 사실을 퍼트리고 있었다. 이는 한국 문제가 다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일제의 술책이었다. 이를 뒤집고 한국문제를 안건으로 만들어내려 면, 한민족 모두가 독립을 원한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알려야만 했다. 그래서 들고 일어난 투쟁이 바로 3·1독립선언이자 만세운동이었다. 여 기에 무실 사람들은 주로 임동면 소재지인 중평의 챗거리장터 만세운동 을 펼치고 나섰다. 안동에서는 3월 13일 안동시내 이상동의 단독시위에 이어 17일 예안면 만세운동이 본격적인 투쟁의 불꽃을 지폈다. 18일 안동면 만세운동은 전 체 안동사회의 투쟁으로 발전하여 21일 임동을 비롯하여 임하·길안·일 직면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임동면 만세운동은 류치명의 증손자인 류동시가 광무황제 고종의 장 례에 참가했다가 귀향하면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광무황제의 장 례를 앞두고, 전국 유림들은 대개 서울 궁궐로 사람을 보내 예를 표하고 지방에 남은 사람들은 지역마다 깨끗한 장소를 택하여 望哭禮를 올렸다. 이 마을에서는 류동시가 서울로 가서 인산에 참가했다가 마침 터져 나온 만세운동을 목격했다. 거리를 뒤덮은 만세시위행렬과 태극기, 그리고 선 언문을 본 류동시는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급히 고향으로 돌아왔다.8) 그 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ꡔ독립운동사ꡕ 3, 1971, 405쪽. 86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7집 는 여러 어른들에게 서울의 상황을 말씀드렸고, 방안을 찾았다. 그런 가 운데 핵심인물로 떠오른 사람이 바로 月谷面 桂谷洞(예안면 계곡리) 106 번지에 살던 숙부 柳淵成이다. 그의 나이는 만 62세였다. 2) 독립선언 주도하고 대구감옥에서 순국한 류연성 조카 류동시로부터 소식을 들은 류연성은 협동학교를 운영하던 류동 태, 그리고 李均鎬 등과 만세운동의 방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 금 조선 각지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또 관청을 파괴하는 것은 독립의 시위운동이다. 차제 만세를 부르고 관청을 파괴하여 우리의 힘을 과시하면 반드시 우리 조선은 독립의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라고 역설하 면서 주체적 역량을 발휘하자고 강조하였다.9) 3월 15일 챗거리장이라 불리는 鞭巷市場의 동쪽에 있던 공동 타작장에 서 류연성(1857~1919, 월곡 계곡)·柳東洙(1887~1978, 임동 마령)·柳敎熙 (1886~1965, 임동 박곡)·朴載植(1888~1927. 임동 중평)·朴晋成(1878~1925, 임동 중평) 등이 논의하였다. 류연성의 나이가 다른 주동인물에 비해 서 른 살 가량이나 많다. 그는 63세로 나이 많은 노년이었지만, 나머지는 대 부분 30대 젊은이였다. 나이만으로도 그는 전체를 이끌고 간 최고 지도 자였다. 물론 진행과정을 보면, 그의 모습은 단연 두드러진다.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결과, 이들은 21일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일으 키자고 뜻을 정했다. 지역별로 인원 동원을 담당할 사람도 정했다. 류연 성은 대곡동과 위동, 류동수는 마령동, 박진성과 박재식은 임동면 소재지 인 중평동, 류교희는 수곡동과 박곡동, 그리고 李康郁(1874~1945, 예안 太 谷)과 洪明聖은 갈전동을 각각 나누어 맡았다.10) 만세운동에 사용될 태 극기와 독립선언서 준비는 협동학교에서 이루어졌다. 학교가 정재 종가 9) 대구지방법원 「판결문」(1919.5.31), ꡔ독립운동사자료집ꡕ 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1348쪽. 10) 위와 같음. 定齋 柳致明 종가 3대의 독립운동 87 에 있었으니, 준비가 곧 종택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이다.11) 오후 2시 류연성을 비롯한 10여 명의 주동인물들이 시장 복판에 나타 났다. 먼저 류연성은 군중들에게 독립만세를 불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 뒤, 그와 주동인물 10여 명이 앞장서서 ‘韓國獨立萬歲’를 앞장 서 부르기 시 작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그들이 큰 소리로 외친 것은 분명 ‘한국’의 독립 이었다. 조선독립만세라거나 대한독립만세라는 기록도 많은데, 이들의 외 침은 ‘한국독립만세’였다. 한국이나 대한이란 말은 조선총독부가 들어서 자마자 사용하지 못하도록 통제했던 말이다. 이는 무너진 대한제국을 떠 올리지 못하게 만들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외 친 것은 ‘한국독립’이다. 무엇을 목적으로 삼았는지, 그 지향점이 분명하다. 이들이 앞장서 외치자, 군중들은 호응하여 열광적으로 만세를 부르며 대열에 참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주재소 일본인 경찰 2명과 한인 경찰 1명이 달려와 류연성과 갈전동 출신 裵太根(1871~1923, 임동면 葛田)을 주동자로 지목하고 붙잡아갔다. 그러자 류동수를 비롯한 군중들이 오히 려 주재소를 공격하고 나섰다.12) 주역을 연행한 일이 시위대를 자연스럽 게 주재소로 이끌고 간 셈이었다. 일본인 순사 우치다[內田]가 시위대를 막아서다가 실패하고 밀려서 임 동주재소로 도망쳤다. 이에 8백 명 군중들은 임동주재소로 밀고 들어갔 다. 순사가 권총 한 발을 쏘아 저지하려 했지만, 물결을 막아낼 수 없었 다. 오히려 류연성을 비롯한 조학이·류곡란 등은 가슴을 열어 제치고 “죽이려거든 여기를 쏘아라!”라면서 달려들었다. 이 순간 군중들은 일제 경찰의 무기를 모두 빼앗고, 지적도·호적부·지세명기장 등 서류도 없 애 버렸다. 주재소는 뼈대만 남았고, 대검·권총·무라다총[村田銃] 두 자 11) 임동시위에 참가한 사람 가운데 협동학교 학생이 많았고, 그들의 역할이 격렬한 투 쟁을 끌어가는 데 기여했다. 柳林도 그러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한 강력 한 투쟁성 때문에 3·1운동 이후 이 학교는 다시 문을 열지 못하고 폐교되고 말았 다. 민족문제에 뛰어들었다가 장렬하게 산화한 것이 협동학교의 최후였다(김희곤, ꡔ안동사람들의 항일투쟁ꡕ, 199쪽). 12) 대구지방법원 「판결문」(1919.5.31), ꡔ독립운동사자료집ꡕ 5, 1350쪽. 88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7집 루13)·경찰칼 세 자루·탄환 44발 등을 압수하여 우물 속에 처박아버렸 다. 이어서 군중들은 경찰 사택마저 부수었다. 철저한 응징이었다. 시위 대가 우치다 순사와 權泰奭 순사보를 제압하고 임동주재소를 사실상 접 수해 버리자 오카다[岡田] 순사는 임하주재소로 도망갔다.14) 오후 5시 군중들은 다시 면사무소를 공격하였다. “일본의 정치를 시행 하는 곳은 모두 파괴하라”는 것이 구호였다. 1,500명을 헤아리던 군중들 은 면사무소를 부수었다. 밤을 지새우며 이어지던 투쟁을 벌이던 군중들 은 일본군 수비대가 도착하던 새벽 3시에 해산하였다.15) 하지만 임동시 위가 여기에서 끝난 것은 아니다. 이들의 투쟁이 이튿날 임북면(임동면 사월) 시위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또 임동에서 활약한 류동수는 24일 영 양군 청기면시위에 참가하기도 했다. 임동 만세운동에서 류연성이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류치명의 손자요 류연박의 동생인 그는 준비과정에서도 크게 활약했지만, 특히 만세운동 을 벌이던 그 날에도 군중들에게 시위를 벌이는 정당한 이유를 설명하고 시위대를 끌고 갔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징역 7년 형이라는 보기 드문 중형을 선고 받았다. 그런데 형이 확정된 지 7일 만인 1919년 9월 25일 그 는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다. 류연성은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을 던졌다. 안동에서도 가장 격렬한 투쟁을 벌여, 무려 7년형이라는 형벌을 선고받았다. 이는 형벌이 아니라 민족을 위해 투쟁한 노력의 성과였다. 더구나 그는 갇힌 지 여섯 달, 판결이 내려진 지 일주일 만에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장렬한 순국이 아닐 수 없다. 63세 나이에 젊은 집안 청년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을 앞장 서 끌고 간 류연성, 그에게서 시대를 넘어서려는 몸부림도 느껴진다. 뒷 날 그 자손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은 굳이 되물어 볼 필요도 없겠다. 13) 무라다총은 유럽에 유학했던 무라다[村田經芳]가 만들어 1880년 일본 육군이 채용한 일본의 첫 국산 소총이인데, 그 뒤로 거듭 개량되어 갔다. 14) 대구지방법원 「판결문」(1919.5.31), ꡔ독립운동사자료집ꡕ 5, 1352쪽. 15) 대구지방법원 「판결문」(1919.5.31), ꡔ독립운동사자료집ꡕ 5, 1353쪽. 定齋 柳致明 종가 3대의 독립운동 89 3) 챗거리장터 만세운동에 참가한 무실 문중 사람들 류교희도 류연성에 버금가는 활약을 보였다. 박실마을 종손 柳敦熙의 동생인 그는 임동 만세운동에서 주역으로 활동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6 년 형이라는 중형을 견뎌 내야 했다. 류교희나 류연성이 모두 주손의 동 생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이는 종가로서 감내할 역사적 책무를 종손의 동생이 맡고 나섰다는 느낌을 준다. 두 사람 외에도 임동면 만세운동을 끌고 나간 인사들은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혹형을 견뎌내야만 했다. 임동면시위에 이어 임북면으로 이어 진 만세운동으로 말미암아 모두 69명이나 기소될 지경이었다. 이 가운데 형량을 보면 류연성이 7년, 류교희가 6년 형이라는 보기 드문 중형을 선 고 받았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라는 인물들이 3년 형 안쪽으로 결정 된 사실과 견주어본다면, 이들에게 덧붙여진 형량이 얼마나 높은 것인지 또 그들의 투쟁이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가늠하게 만든다. 특히 류연성은 붙들려 간지 여섯 달 지나, 재판이 끝나자마자 7일 만인 9월 25일 대구감 옥에서 순국했다. 안동지역 3·1운동 주역들이 받은 형량 형량 지역 7년 6년 5년 4년 3년 2년 6월 2년 1년 6월 1년 10월 이하 집행 유예 계 예안 1 1 3 1 4 5 19 13 2 49 안동 1 4 1 7 8 1 22 임동 1 5 6 3 43 1 2 6 67 임하 2 11 2 15 길안 3 1 1 5 5 15 계 1 5 4 1 11 4 53 19 33 28 9 168 류연성의 지도를 받으며 만세운동을 벌인 인물들도 대부분 강성을 지 녔다. 柳東洙(6년형, 마령, 애국장)·柳東爀(2년형, 무실, 애족장)도 옥고 를 치르기 시작한 지 1년 만에 대구감옥에서 순국한 점, 柳淵益(2년형, 무 90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7집 실, 애족장)이 가출옥하자마자 만주로 망명하여 투쟁을 이어갔던 것이다. 눈에 띄는 수곡(무실·한들·박곡·고천)사람으로는 柳淵福(징역2년, 징 역5년, 애국장)·柳東暢(징역2년, 애족장)·柳東煥(징역2년, 애족장)·柳 東壽(동욱·만수, 징역1년, 집행유예3년)·柳東馥(징역1년 집행유예3년) ·柳淵琦(징역1년 집행유예3년)·柳淵泰(징역1년 집행유예3년)·柳宗植 (징역1년 집행유예) 등이 있다. 그밖에도 갈전의 배태근(징역2년, 애족장), 마령의 柳致得(징역2년), 사월의 柳景發(징역2년), 계곡의 柳璣永(징역 2 년) 등의 활약도 뚜렷하다. 5. 巴里長書에 참가한 柳淵博 ‘파리장서’는 3·1운동 직후에 일부 유림세력이 파리강화회의에 우리의 독립을 요구하는 긴 청원서인 長書를 보낸 일이다. 이후 1925·6년에 유 림들에 의해 의열투쟁이 있었는데, 이것을 慶北儒林團義擧, 혹은 2차 유 림단의거라고 부르면서, 파리장서 보낸 일을 ‘제1차 유림단의거’라 부르 기도 한다. 지방에서 상경하여 서울에서 움직이던 일부 유림들이 1919년 1월 22일 광무황제 고종의 사망 이후 활발하게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특히 장례 문제를 논의하는 한편, 그들도 강화회의 소식을 들으며 이에 대한 대응 책을 찾고 있었다. 그 결과 국제회의에 한국 독립의 뜻을 분명하게 전달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 점은 천도교나 기독교를 중심으로 논의되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과 결합하여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독립선언을 앞두고 그들은 급하게 뛰면서 전국 유림들의 뜻을 모아냈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보내자는 것이 그 결과였다. 이것이 바로 유림들의 독립선언이 자 독립청원이었다.16) 이 거사를 논의한 사람은 안동 예안 출신 李中業을 비롯하여 金昌淑· 定齋 柳致明 종가 3대의 독립운동 91 金丁鎬·柳濬根·兪鎭泰·尹中洙 등이었다.17) 이후 본격적인 추진은 김 창숙이 그의 스승 郭鍾錫을 만나면서 급진전되었다. 그 과정에서 충남지 역에서도 같은 일이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 지역 유림의 거두인 金福漢과 그 계열 인물들이 여기에 합류하였다. 두 지역 대표를 비롯하여 137명이 대리 서명자 없이 모두 직접 서명하였다.18) 이를 가지 고 김창숙이 3월 말에 중국으로 갔고, 이미 파리로 파견된 신한청년당 대 표 김규식에게 한문본과 영문본을 인쇄하여 보냈다.19) 안동에서는 류연 박을 비롯해 내앞마을 金秉植, 도산 하계마을 李晩煃, 예안 삼산마을 柳 必永, 서후 금계마을 金瀁模(翊模) 등 5명이 여기에 서명했다.20) 류연박은 1895년 전기의병에서 이미 참모로 활약한 이후, 다시 파리장 서에 참가하여 지속적인 항일투쟁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정재종가 종손이 자 진사인 류연박은 내앞의 협동학교가 1912년 10월 한들로 옮겨질 때 자 기 집을 제공하였던 인물이다. 류연박은 협동학교 교장을 지낸 내앞마을 의성김씨 종손 김병식과 함께 전통 있는 가문의 종손이면서 보수의 극치 를 걷던 사회에 혁신의 물꼬를 틀어가는 데 힘을 보탠 대표적인 인물인 셈이다. 동생 류연성이 임동 만세운동에서 우뚝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16) 김창숙은 1919년 3월 3일 독립선언서를 받아보고, 민족대표 33인 중 유교의 대표가 없음을 개탄하며 통곡했다고 기록하였다(김창숙, ꡔ心山遺稿ꡕ, 309쪽). 17) 국사편찬위원회, ꡔ심산유고ꡕ, 탐구당, 1973, 309~310쪽. 18) 장서는 유림들의 세계관이 변했다는 점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전통적으로 중화중심 의 시각을 가졌던 유림들이 이제는 만국을 평등하게 인식하고, 그것이 公議로 움직 여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장서에서 “평화회의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우리는 모두 용기를 갖고, 만국이 평화롭게 된다면 우리도 만국의 하나이니 우리의 평화도 당연한 것”으로 주장했다. 또 장서는 “우리 한국이 비록 국력이 약하 지만, 삼천리강토에 2천 만 동포가 사천 년 동안 지내왔으며, 우리 손으로 우리 국가 일을 감당할 힘이 있거늘, 어찌 이웃 나라의 다스림을 받겠는가?”라고 하면서 오랜 역사 속에 흘러온 민족 역량을 내보였다. 그리고서 이 글은 “차라리 일시의 위협에 굴복되어 압박을 받을지언정 심리는 한국 민족임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한 뒤, 끝 으로 “차라리 몸이 묶여 죽더라도 맹세코 일본의 노예가 되지 않겠노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김희곤, ꡔ안동 사람들의 항일투쟁ꡕ, 333쪽). 19) 조선총독부 경북경찰부, ꡔ고등경찰요사ꡕ, 1934, 248쪽. 20) 조선총독부 경북경찰부, ꡔ고등경찰요사ꡕ, 248~251쪽. 9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7집 운동의 계기를 맏아들 류동시가 이끌어냈으며, 둘째 아들 류동저는 노동 운동으로 민족 문제에 접근해 나갔다. 더구나 맏사위 金世東(1870~1942, 서후 금계, 애국장)은 파리강화회의 대표를 지원하기 위해 자금모집에 나 섰다가 1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류치명의 아들 류지호와 그를 이은 류연박 부자의 활동은 정재 종가의 위상에 걸맞은 것임이 틀 림없다. 6. 사회운동에 나선 柳東著 3·1운동 이후 새로운 이념이 들어와 독립운동에도 여러 갈래의 활동 무대가 열렸다. 청년운동과 학생운동, 노동·농민운동, 여성운동과 문화 운동 등이 활발하게 진행된 것이다. 안동에도 3·1운동 직후부터 청년운 동과 노동·농민운동이 시작되었고, 1920년대 초반을 지나면서 점차 사 회주의 색채가 짙어져 갔다. 처음에는 색깔 구분이 없이 안동청년회로 시작되었지만, 1921년 노동운동이 시작되면서 점차 사회주의가 자리 잡 기 시작했다. 류동저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은 안동청년회였 다.21) 1920년 5월 23일 안동공립보통학교에서 안동청년회가 조직되었는 데, 그곳에 참가한 인물 가운데 기부금을 낸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류동저는 수십 명 가운데 두 번째로 많은 1백 원을 냈다고 신문에 기록되 었다.22) 이어서 안동청년회가 개최한 토론회에 참석하여 강연했다는 기 록도 있다. 1920년 8월7일 안동 太師廟에서 열린 제2회 토론회에서, 그는 權寧潤과 더불어 ‘事業 進行엔 經驗이 勝於學識’이란 주제로 강연하였 21) 류동저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09년 5월 황성신문 광고였다. “안동 임동면 수 곡리 측량학교에서 去月 27일에 생도 40명을 졸업하였는데 우등생에 柳淵五·柳東 弼·柳淵瓚·金楨權·金宅煥·柳東泰·柳寬鎬이기로 玆以廣佈함”이라는 내용이 바 로 柳東著의 이름으로 게재되었던 것이다(ꡔ皇城新聞ꡕ 1909년 5월 18일자). 22) ꡔ동아일보ꡕ 1920년 6월 11일자. 定齋 柳致明 종가 3대의 독립운동 93 다.23) 또 1921년 6월 15일 신사업으로 학술강습회가 시작되었는데, 거기 에서도 그는 강사로 활동하였다.24) 청년운동은 대개 노동·농민운동으로 연결되었다. 안동지역에서 처음 으로 결성된 노동운동 단체는 1920년 9월 23일에 창립된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였다. 류연갑의 손자인 류주희는 결성 당시부터 여기에 참여하 고, 1921년 7월 제2회 총회에서 총간사로 선출되었다. 여기에는 류연박의 둘째 아들 류동저의 모습도 나타난다. 그는 정재 종가 출신이자 하계마 을 이만도의 손자인 이동흠·이종흠의 매부이며, 금계마을 종손 김용환 의 아래 동서이기도 하다. 류동저는 1921년 7월 15일 안동불교청년회관 에서 열린 노동공제회 안동지회 제2회 정기총회에서 총간사로서 사회를 맡았다. 그 자리에서 임원을 개선하였는데, 류주희를 비롯한 60인이 간사 로, 류동저를 비롯한 30인이 議事로 뽑혔다.25) 7. 맺음말 정재 종가의 역사적 위상은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나라가 무너 지고, 또 잃게 되는 현실을 맞아, 그 주인공들이 대응하고 나선 길은 일반 대중이 걷는 것과는 달라야 했다. 그들이 갖고 있던 역사적 책무가 남달 랐기 때문이다. 정재 종가 주인공들은 결코 그 길을 외면하거나 비켜가지 않았다. 나 라가 무너지던 과정에서, 그들은 나라를 지탱하려고 몸부림쳤다. 류지호 와 류연박 부자가 안동의진에 나서서 지도자가 되고 핵심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1895~1896년의 의병에서 이들 부자가 걸었던 길은 곧 구국의 길 이었다. 23) ꡔ동아일보ꡕ 1920년 8월 12일자. 24) ꡔ동아일보ꡕ 1921년 6월 24일자. 25) ꡔ동아일보ꡕ 1921년 7월 22일자. 94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7집 나라가 무너진 뒤, 협동학교를 정재 종가로 옮겨왔다. 위정척사에서 애국계몽운동으로 방향을 수정한 모습을 확연하게 보여준다. 학교를 세 운 주역들이 독립군기지를 세우려고 만주로 떠날 때, 그 뒷일을 맡은 핵 심인물들이 바로 정재 종가를 비롯한 전주 류씨 무실 집안이었다. 새로 운 시대의 인물들을 키워내는 데 종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종가 주 인 류연박의 선택이 결정적이었을 것은 당연하다. 다음으로 류연박·류연성 형제, 류연박·류동시 부자의 활약이 두드러 졌다. 임동 챗거리장터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의 계기를 만든 사람이 류동 시이고, 그것을 꽃 피운 사람이 류연성이었다. 특히 류연성의 활약은 임 동 만세운동이 전국에서도 보기 힘들만큼 강한 투쟁을 이끌어냈다. 같은 무렵에 류연박은 파리장서에 참가하여 유림들의 독립선언과 독립청원에 나섰다. 여기에는 그의 사위 김세동도 자금을 모아 힘을 보탰다. 1920년대에 들어 류연박의 아들 류동저가 청년운동과 사회운동을 통해 대를 이었다. 그는 안동청년회에 참가하여 강사를 맡기도 하고, 토론을 이끌기도 했다. 특히 그가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의 총간사를 맡아 벌 인 활동은 초기 노동운동이 독립운동의 성격을 갖는 기본틀을 만드는 일 이었다. 이제 계몽운동에서 사회운동으로 전환하는 단계를 맞은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192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제3세대의 투쟁 성이 줄어든 사실이다. 정재 종가는 퇴계문화권에서 가지는 역사적 무게가 대단하다. 그 위상 은 역사적 부담으로 지워졌다. 위정척사에서 애국계몽운동으로, 다시 사회 운동으로 이어진 3대의 활동은 전통적인 유림 집안이 민족문제에 맞서 나 간 대표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정재 종가의 독립운동인 것이다. ▪ 접수일 : 2010.9.30 / 심사완료일 : 2010.10.30 ▪ 주제어 : 定齋 柳致明, 류지호, 류연박, 류연성, 류동시, 류동저, 안동의병, 협동학교, 조선노동공제회 定齋 柳致明 종가 3대의 독립운동 95 참고문헌 조선총독부 경북경찰부, ꡔ고등경찰요사ꡕ, 1934. 金道鉉, 「碧山先生倡義顚末」,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ꡔ독립운동사자료집ꡕ 2, 197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ꡔ독립운동사ꡕ 3, 197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ꡔ독립운동사자료집ꡕ 5, 1972. 김창숙, ꡔ心山遺稿ꡕ, 국사편찬위원회, 1973. 김희곤, ꡔ박상진자료집ꡕ,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0. , ꡔ안동사람들의 항일투쟁ꡕ, 지식산업사, 2007. 96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7집 ❂ 국문요약 定齋 柳致明 종가의 3대 독립운동 김 희 곤 정재 류치명(1777~1861)은 퇴계학맥의 정맥을 이은 대학자요, 1800년대 퇴계문화권을 대표하는 학자였다. 그러한 위상을 가진 집안이었으므로, 역사적인 격변 시기에 주어지는 역사적 부담과 역할을 흘려 지날 수는 없었다. 외침에 맞서기 시작한 때는 류치명의 아들 류지호(1825~1904)부 터다. 그를 이어 손자 류연박(1844~1925)과 류연성(1857~1919), 증손자 류 동시(1886~1961)와 류동저(1892~1948)로 이어지는 3대가 독립운동에 나섰 다. 이 연구는 이들 3대의 독립운동을 추적하고 그 역사적 위상을 정리하 는 데 목표를 둔다. 한국 독립운동의 출발점은 의병이다. 거기에 류지호가 참가하면서 정 재 종가의 독립운동은 시작하였다. 1895년 12월 안동에서 의병이 일어날 때, 류지호가 지도자로 움직였고, 아들 류연박은 그 이듬해까지 전개된 안동의진의 참모를 맡아 활약하였다. 의병항쟁의 다음 단계가 구국계몽운동이다. 안동에서는 협동학교와 대한협회 안동지회 활동이 두드러졌다. 정재 종가 사람들은 협동학교에 기여하였다. 특히 나라를 잃은 뒤 협동학교 주역들이 독립군 기지를 건 설하기 위해 만주로 이동하자, 협동학교를 도맡은 사람들이 바로 무실마 을 전주류씨 문중이었다. 협동학교가 정재 종가로 이전한 것이 이를 말 해준다. 이는 정재 종가의 성향이 위정척사에서 애국계몽운동으로 전환 했음을 말해준다. 새로운 시대의 인물들을 키워내는 데 종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종가 주인 류연박의 선택이 결정적이었을 것은 당연하다. 다음으로 류연박·류연성 형제, 류연박·류동시 부자의 활약이 두드러 定齋 柳致明 종가 3대의 독립운동 97 졌다. 임동 챗거리시장에서 벌어진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의 계기를 만든 사람이 류동시이고, 그것을 꽃 피운 사람이 류연성이었다. 특히 류연성의 활약은 임동 만세운동이 전국에서도 보기 힘들만큼 강한 투쟁을 이끌어 냈다. 같은 무렵에 류연박은 ‘파리장서’에 참가하였다. 이는 파리에서 열 리는 강화회의에 유림들이 나서서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독립청원서’ 를 보낸 것이다. 여기에는 그의 류연박의 사위 김세동도 자금을 모아 힘 을 보탰다. 1920년대에 들어 류연박의 둘째 아들 류동저가 청년운동과 사회운동을 통해 대를 이었다. 그는 안동청년회에 참가하여 강의하고, 토론을 이끌기 도 했다. 특히 그가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의 총간사를 맡았다. 조선 노동공제회는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조직이다. 노동자도 아닌 양반 집안 청년이 초기 노동운동을 이끈 것이다. 이 사실은 초기 노동운동이 단순 한 노동운동이 아니라, 민족문제를 해결하려는 독립운동의 차원의 것임 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계몽운동에서 사회운동으로 전환한다는 말이 다. 다만 아쉬운 점은 3세대가 1920년대 중반 이후로는 저항운동을 지속 해 나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정재 종가는 퇴계문화권에서 가지는 역사적 위상이 대단히 높았다. 그 위상은 역사적 부담이기도 했다. 정재 후손 3대는 이를 결코 피하지 않 고, 맞서 나갔다. 그 성격도 위정척사에서 애국계몽운동으로, 다시 사회 운동이라는 3단계로 이어졌다. 이들의 활동은 나라를 지키고 되살리는 것이자, 역사적 책무를 다하려는 투쟁이었다. 정재 종가의 독립운동은 전 통적인 유림 집안이 대를 이어가며 민족문제에 맞서 나간 대표적인 사례 에 속한다
를 보였다. 이 가운데 학봉 김성일을 잇는 중심축이 바로 류치명 으로 이어진 것이다. 따라서 류치명의 위상은 대단히 높았고, 특히 1800 년대 전반기에 안동문화권을 강타한 屛虎是非에서 류치명은 가장 영향 력이 큰 인물이었다. 그러한 위상을 가진 집안이었으므로, 역사적인 격변 시기에 주어지는 역사적 부담과 역할을 흘려 지날 수는 없었다. 근대 민족문제가 발생할 때, 그 첫 만남은 류치명의 아들 洗山 柳止鎬 (1825~1904)에서 시작되었다. 열강의 침략에 위정척사로 맞서던 전통 유 림의 성격 그대로, 그도 그 흐름의 선두에 서 있었다. 안동문화권의 지도 자로서 그가 의병대열에 참가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로부터 대를 이어 민족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대열에 그의 집안이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독립운동의 서막인 의병항쟁에서부터 1920년대 노동운동을 통한 독립 운동에 이르기까지 3대가 거기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독립운동은 의병으 로 시작하여 계몽운동, 의열투쟁, 3·1운동 등을 거쳐 만주지역 독립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내 사회운동, 학생운동 등 분야별로 전개되어, 광 복을 맞을 때까지 51년 동안 전개되었다. 이 가운데 정재 종가의 후손들 이 펼친 활동은 주로 전반과 중반 시기에 집중되었다. 즉 의병과 3·1운 동, 그리고 사회운동이 그것이다. 정재 종가의 3대 독립운동을 빚어낸 주인공은 정재의 아들부터 증손자 까지이다. 아들인 류지호에 이어, 맏손자 柳淵博(1844~1925)과 둘째 손자 柳淵成(1857~1919), 증손자이자 류연박의 아들인 柳東蓍(1886~1961)와 柳 東著(1892~1948)가 그 주인공들이다. 이들의 활동을 시기별로 추적하고, 역사적인 위상을 정리하는 데 이 글의 목표를 둔다. 定齋 柳致明 종가 3대의 독립운동 77 정재 종가 3대 독립운동가 가계도(음영은 독립운동가) 시조 柳濕 (시조) 8대 柳城 (첫째) 9대 柳復起 (첫째) 10대 柳友潛 (첫째) 17대 柳晦文 (첫째) 18대 柳致明 定齋 李彙運 (壻진성) 19대 柳止鎬 金在九 (壻의성) 金精壽 (壻의성) 金達銖 (壻의성) 20대 柳淵博 (첫째) 柳淵成 (둘째) 金魯憲 (壻광산) 21대 柳東蓍 (첫째) 柳東著 (둘째) 柳東英 (셋째) 金世東 (壻의성) 金鴻基 (壻의성) 金雲植 (壻의성) 柳東莘 (첫째) 柳東桂 (둘째) 金(壻 광산) 洪(壻) 78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7집 무실마을과 종가 위치 옛 무실마을 옛 한들 챗거리장터 임동면사무소 정재종택 현 무실마을 34 수 곡 임동교 안동 영덕 2. 의병항쟁에 나선 柳止鎬·淵博 부자 정재 종가 인물이 독립운동에 발을 디딘 것은 독립운동의 출발점인 의 병항쟁부터였다. 의병은 세 시기로 나뉜다. 전기의병(1894~1896), 중기의병 (1904~1907.7), 후기의병(1907.8~1909)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안동의병은 특히 전기의병에 집중되었다. 안동에서 1894년 7월에 일어난 갑오의병은 의병사의 첫 걸음이자 한국독립운동의 출발점이다. 다만 아쉽게도 갑오 의병에 참가한 안동인들의 이름을 밝혀주는 자료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전기의병에서 구체적으로 활동한 인물이 드러나는 시기는 1895년 12월 에 일어난 을미의병이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저항하여 시작된 을미의 병은 전국에서 일어났다. 단발령이 전해지자마자 영남지역에서 맨 먼저 定齋 柳致明 종가 3대의 독립운동 79 안동지역 유림들이 의병 결성에 나섰다. 상투를 자른다는 斷髮令이 내려 지고, 그것이 시행에 들어가기까지 열흘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에 사태를 주시하던 안동유림들은 통문을 돌리면서 대응책을 논의하다 가 결국 의병을 일으키자고 결의하였다. 금계마을 西山 金興洛이 앞장 서 봉정사 회의를 열고 안동부에서 1만 명이 구름처럼 모여 ‘안동의병’을 결성하였다. 안동에서 일어난 을미의병은 안동부와 예안에서 결성된 안동의병과 선성의병으로 나뉜다. 안동의병은 權世淵이 1차 의병장을 맡아 안동관찰 부사 김석중을 축출했다가 반격에 밀리고, 다시 안동부성을 되찾는 공방 전을 치렀다. 이어서 1896년 2월 2차 의병장 金道和가 취임하고서 태봉전 투를 치렀다. 3월 말에 치러진 태봉전투는 안동의진을 비롯하여 예안의 선성의진과 봉화의진·예천의진·영천(영주)의진·호좌의진(제천) 등이 연 합하여 상주 함창의 태봉에 주둔하던 일본 수비대를 공격한 연합작전으 로 펼쳐졌다. 격렬한 전투를 벌였지만 무기와 훈련에서 열세이던 의병이 밀려났고, 추격하던 일본군이 안동으로 들어와 안기동에 불을 지르는 바 람에 서풍을 타고 안동부성 안의 1천 호가 넘는 집이 불타는 비극이 벌어 졌다. 안기동에서 ‘탑곡’, 그러니까 임청각 앞 7층 전탑이 있는 곳까지 불 바다가 되었다. 안동부에서 밀려난 의병은 이후 동쪽으로 옮겨가며 활동 하고, 예안과 봉화까지 오르내리며 전투를 벌였다. 을미의병으로 일어난 안동의병이 해산한 시기는 그해 8월 말이다. 무려 9개월 동안 펼쳐진 기 나긴 항전이었다.2) 안동의병의 현장에 류지호와 맏아들 류연박의 움직임이 두 곳에서 나 타났다. 영양 청기 출신이자, 예안 宣城義陣의 中軍이 되었던 김도현이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1895년 12월 3일(양 1896.1.17) 都正 柳止鎬를 뵙고 그 넓은 포부를 듣 고 물러나와 그 아들인 上舍 柳淵博을 만나고 돌아왔다.3) 2) 김희곤, ꡔ안동 사람들의 항일투쟁ꡕ, 지식산업사, 2007. 80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7집 이때는 의병을 일으키자는 안동통문이 나돌던 무렵이었다. 이미 나흘 앞서 예안통문이 돌았고, 이틀 앞서 삼계통문과 청경통문이, 그리고 바로 이 날 호계통문이 돌았다.4) 그래서 김도현은 한들로 가서 류지호를 만나 ‘넓은 포부’를 듣고, 그 아들 류연박 진사와 만나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단발령에 대한 대응책으로 의병을 논의한 것이라 짐작된다. 그리고 11일 지나 다시 두 부자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이번에는 안동 부 성 안이었다. 1895년 12월 14일(양 1896.1.28) 아침 浦項橋를 건너 濟南樓 앞으로 말 을 달려갔으나, 아무도 막는 사람이 없다. 이에 水谷 上舍 柳淵博을 만나 서 함께 書記所로 들어갔다. 인하여 大將所로 들어가니 대장은 곧 전 참 봉 權世淵 어른이다. 다시 都所로 들어가 持平 金興洛과 都正 柳止鎬 두 어른을 만나고, 또 좌익장 尙五 李運鎬를 만나고 나왔다.5) 14일이면 이미 안동의병이 거병한 12월 6일(양 1896.1.20)보다 8일 지난 날이다. 의진이 결성되자마자 안동관찰사 김석중이 도피하였고, 의병이 안동부성을 장악하였다. 김도현이 안동부를 찾았을 때는 안동의병이 성 을 장악하고 있던 상황이다. 浦項橋, 곧 개목나루를 건너 안동부성의 남 문인 濟南樓를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가 류연박을 만났다. 그리고서 대장 소로 가서 권세연 대장을 만나고, 다시 본부인 도소로 가서 김흥락과 류 지호에 이어 좌익장 이운호를 만났다. 여기에서 우선 류연박이 안동의병에서 맡은 임무를 찾아보자. 그 답은 거병 당일 작성한 안동의병의 간부진 명단인 「安東義所爬錄」에 들어 있 다. 대장 권세연과 부장 곽종석(부임 않음) 다음에 참모 네 사람이 적혀 있는데, 류연박은 바로 그 첫 순서에 나타난다. 김도현이 안동의진에 도 3) 金道鉉, 「碧山先生倡義顚末」, ꡔ독립운동사자료집ꡕ 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16쪽. 4) 김희곤, ꡔ안동 사람들의 항일투쟁ꡕ, 지식산업사, 2007, 85쪽. 5) 金道鉉, 「碧山先生倡義顚末」, ꡔ독립운동사자료집ꡕ 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17쪽. 定齋 柳致明 종가 3대의 독립운동 81 착하여 먼저 만난 사람이 바로 본부를 책임지고 있던 참모 류연박이었던 것이다. ▲ 1895년 12(음력) 작성된 을미의병 당시 직제와 간부진 명단인 安東 義所爬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참모 명단에 류연박이 보인다. 이어서 그는 김흥락과 더불어 류지호를 만난 것으로 확인된다. 그렇다 면 류지호는 안동의병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을까? 어디에도 그 답을 줄 만한 것이 없다. 하지만 추정은 가능하다. 아들이 참모 직책을 맡아 있으 니, 연로한 아버지가 또 직책을 맡는다는 것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직임을 문중과 마을별로 나누어 맡게 했던 상황을 감안 한다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 같다. 당시 만 70세 노령이던 류지호는 김흥 락, 石湖 柳道性, 拓菴 金道和 등과 더불어 당대 최고 지도자로서 의병을 일으키거나 의병장을 선임하는 일에 참여했다. 김도현이 안동의진을 찾 아 본부에서 류지호와 김흥락을 만났다는 글을 남긴 것도 그러한 정황을 보여준다. 여기까지는 당연한 스토리이다. 그런데 여기에 참으로 억누를 수 없는 아픔과 곤혹스런 장면이 있었다. 단발령이 시행되면서 아래위 가릴 것 없이 지나는 사람을 붙잡아 상투를 잘랐다. 그러는 과정에서 당대 안동 사회에서 최고 지도자인 류지호가 ‘욕을 당했다’라고 기록은 전한다. 어 느 정도 훼손당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안동관찰부에 억류되어 8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7집 공박 당했으니 그 정도를 짐작할 만하다. 그렇다면 안동인 전체가 마찬 가지였겠지만, 특히 무실사람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을 것이다. 의 병에 나서는 무실사람들의 결연한 투쟁 의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다. 정재 종가와 관련하여 한 사람 더 덧붙여야 할 인물은 류지호의 생가 동생인 柳廷鎬이다. 그는 다섯 사람으로 구성된 都書記를 맡았다. 자신 의 생가 동생은 도서기를, 맏아들은 참모를 맡았다. 더구나 간부진에 들 어있던 무실 사람은 네 명이나 더 있었다. 「안동의소파록」에는 전체 46 명 가운데 무실 사람이 모두 6명인데, 류연박과 류정호 외에 중군인 柳琓 과 서기 柳淵楫·柳晦植, 그리고 출령을 맡은 柳憲鎬가 그들이다. 이들 대다수가 집안 동생이나 조카들이다. 또 청송의진의 일지인 ꡔ赤猿日記ꡕ 에는 柳璧鎬가 안동의진의 소모장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정재 종가는 의병에 필요한 자금을 나누어 맡는 일에도 자기 몫을 단 단히 맡았을 것이다. 무실 사람들의 역할은 의병을 꾸려 가기 위한 자금 을 문중별로 배정한 데서도 드러난다. ‘안동창의소’는 의병을 일으킨 지 한 달이 지나 여러 문중별로 필요 경비를 배정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많 은 금액이 배정된 문중은 무실 전주류씨 집안을 비롯하여 하회 풍산류씨 와 닭실 안동권씨 등 세 문중으로, 각각 1천 냥이었다. 다음으로는 내앞 마을 의성김씨 8백 냥, 금계와 봉화 해저 의성김씨, 법흥 고성이씨 문중 각각 5백 냥,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4백 냥씩이었다. 이 수치는 당시 안 동사회에서 문중별로 가지는 재력과 역량의 비율을 알려 주는 것이기도 하고, 감당해야 할 역사적 책무의 양을 전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무실마 을 가운데 정재 종가가 맡았던 몫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모습은 뒷날 1910년대 중반에 의병과 광복회의 활동 과정에서 일부 엿볼 수 있 다. 1912년 음력 4월 20일 柳時淵 의병이 자금을 요구한 것이나,6) 1917년 광복회가 이 집에 군자금을 요청한 일,7) 이런 것이 정재 종가의 재력과 자금 지원을 짐작하게 해준다. 6) 대구지방법원, 「柳時淵 등 5인 판결문」(1913.9.15). 7) 김희곤, ꡔ박상진자료집ꡕ,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0, 69쪽.
기가 좋은 곳으로 유명한 곳이 있다. 미국 애리조나주의 세도나이다. 아들이 직장을 애리조나 중에 잡는 덕분에 세도나를 몇년에 한번씩 간다. 특히 기를 느끼고 기를 받고 땅의 기운을 느껴서... 작년에도 세도나를 방문하여 구경을 하고 중간에 내려서 기를 좀 먹고 왔다. 기가 가장 강한 곳이 좋은 것은 아니고 사람에게 가장 좋은 기를 주는 곳이 있다. 세도나에서도 기가 몸에 좋은 기를 주는 곳은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하여간 세도나보다 좀 못 미쳐서가 가장 기가 좋은 것으로 느껴진다. 세도나는 기를 받으려는 전세계 사람이 매년 500만명이 다녀가는 명소중에 하나이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의 붉은 산이 몇개 있을 정도이다. 세도나는 많은 사람들이 기를 받으러 오고 많은 종교시설도 있고 기도소도 많이 있다
여기의 특징의 하나는 회오리 기가 나오는 몇곳 안되는 좋은 곳이라 하기도 한다. 특히 붉은 색의 자철광이 많아 기가 강한 부분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세도나 에 비하여 떨어지지 않는 기의 명소가 있다. 안동시 임동면에 소재하는 지역이다. 이지역은 우리나라 독립사의 한 축을 차지하는 명문들이 기를 받고 살던 곳이다. 특히 이쪽은 양기가 아주 강하여 몸에 기를 충전하는 역활을 한다. 아마 여기의 기는 세상에서 가장 사람에게 좋은 기를 발산하는 땅 중에 3번째 정도로 좋은 곳일 것이다. 아마 가장 좋은 기가 흐르는 지역은 스위스에 있을 것 같고 2번째로 좋은 지역은 캐나다에 있을 것 같다.
. 안동에 위치한 지역도 붉은 흙이나 바위로 세도나와 유사한 지대이다. 흘이나 바위는 다양한 성분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수십종의 광물의 조성돠 비율의 차이로 전부 다른 전하를 발산한다. 이러한 전하는 사람 몸에 흐르는 전하를 방해하거나 촉진하게 하여 건강에 도움을 주거나 질병상태로 가게 할 것이다.
새도나 마을보다 인체에 좋은 기는 오히려 강하게 보인다. 기가 강하여서 오래 머룰기는 적당하지 않아 보인다. 아마 5일 정도는 있어도 좋은 정도로 보인다. 양기가 아주 좋은 지역이 있으면 음기가 강한 지형이 형성되는데 아마 조금 더 가서 강을 하나 건너면(임하댐의 강) 영양으로 갈라지는 길이 있는데 이쪽의 붉은 산은 음기가 강한 산으로 보인다. 아마 무속인이나 음기를 원하는 분들이 느끼면 좋을 산으로 보인다.
이쪽 산이 세계적으로 기가 좋은 산이라서 그런지 모르나 이 산자락에 전주류씨 정재종택이 있다. 대학선배가 종손이라서 여기 살고 있었는데 최근 연락을 하지 않아 모르겠다. 예전에 여기다가 텃밭을 해도 좋다고 하여 해볼까도 하다가 번거로워 추진하지 않은 적이 있다.
그리고 이 산의 꼬리쪽에 유명한 학봉집안의 집성촌이 있다. 천전리라고 하는 곳으로 일제치하에서 이마을 가구의 절반이 독립운동을 위하여 만주로 간 적이 있을 정도로 한집 건너 마다 독립유공자들이 살던 곳이다. 이곳에 몇년전까지 고등하교 대선배분이 종손으로 살고 계셨었다. 지금은 돌아가셔 안계시지만..여기에 있던 학교는 마치 독립군 양성기관처럼 알려져 있고 이동네에 독립기념관이 있을 정도로 곧은 선비들이 많던 지역이다. 아마도 좋은 산의 정기를 받아 마을에 인재가 많이 배출된 것 같다.
정재종택의 듯산쪽이 전부 아주 기가 좋은 지역이라서 여기에 등산로를 만들어 이용하면 좋을 것 같다. 반대쪽에 수곡교를 지나면 아기산이라고 하는 곳은 등산로가 되어 있는데..여기도 개발되면 최고의 관광지나 최고의 수련장소나 최고의 휴양시설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불행 한것은 여기에 땅이 한평도 없는 것이지만....
아래사진과 글은 이 산의 입구쪽에 있는 고택에 관한 것이다.
지역의 자원 중, 미래산업화(지역 경제활성화, 수출산업화, 지역의 특화발전에 크게 기여할 가능성)에 크게 기여할 자원발굴을 목표로 실시한 행정안전부 향토자원 조사 프로젝트의 결과물입니다
안동 정재종택은 안동에서 34번 국도를 따라 영덕 방면으로 20㎞ 정도 가면 있다.
정재 류치명 선생의 종택으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52호로 지정되어 있고 선생의 증조부인 류
관현 선생이 조선 영조 11년(1735)에 건립하였다. 원래 이 건물은 안동군 임동면 수곡2동에 있었
으나 임하댐 수몰로 인하여 1987년에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이 집은 정침,대문채,행랑채,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종택과 조금 떨어진 곳에 정재선생의
정자인 만우정도 있다.
정침은 정면 6칸,측면 6칸의 ㅁ자형 기와집이고 대문채는 정면 5칸,측면 1칸이며 행랑채도 정면
7칸,측면 1칸이다. 또한 사당은 정면 3칸,측면 2칸이다.
류치명 선생의 후손인 류성호씨는 이전하기 전의 정재종택은 대종택이어지만 현재의 위치에 이전
하면서 많이 축소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자리가 윈래는 집터가 아니라 밭터의 자리에 이전하였
다. 특히 류치명선생의 직계후손들은 민족문제가 발생하자 적극 대응하고 나섰다. 독립운동의 서
막인 의병항쟁부터 1920년대 노동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3대가 거기에 참가하였던 것
이다.
1907년 안동시 임하면 내앞마을에 건립된 협동학교가 1912년 10월 정재종택으로 이전하였는데 9
년 뒤에 일제의 압력에 의해 폐교되었다. 협동학교는 독립운동을 펼쳐 나갈 역군을 길러내는 산실
이었다. 류승호씨의 고조 항열과 증조 항열분들이 학교를 직접 담당했다. 정재 종가에 새로운 공
간을 확보하고 학생들을 모아 민족 인재육성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므로 정재종가가 혁신의 변화
를 고스란히 이어간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 된다.
후손 류승호씨는 1년에 300일 이상을 종택에서 머무르고 계시는데 과수원과 대추나무를 직접 재
배하신다고 하셨다. 손님들이 많이 찾아와서 농사를 짓는데 시간적 어려움이 많다고 하셨다. 특
히 여름에 주말이 되면 가족단위의 관광객들이 많이 구경을 하러 오시는데 사과와 대추를 따고 먹
어서 피해가 많다고 하셨다. 또한 정재가문의 저서와 현판 등이 절도당하는 사건들이 비일비재했
다고 한다. 대부분 서적들이 분실된 상태이며 남아있는 저서들은 국학진흥원 서장고에 위탁관리
를 맡기고 있다고 한다.
재종택이 이건되면서 종택과 사당, 만우정은 이건되었지만 강당과 서실은 문화재가 아니어서
이전되지 못하였다.
가장 기가 좋은 산의 끝자락의 마을로 이마을은 2집중 한집은 독립유공자가 배출 될 정도로 거의 마을주민 절반정도가 만주로 독립운동을 하러 갔던 곳이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좋은 양기를 받은 영향일지 도 모르겠다.
안동은 독립유공자 숫자가 왠만한 도의 독립유공자숫자와 비슷할 정도로 많은 선비분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노력한 곳이기도 한다. 의성김씨 어른 중에 한분?이 만석꾼으로 엄청 부를 지니고 있었는데 매일 기생집에서 술마시고 놀다가 재산을 전부 탕진했다는 소문이 났었는데 나중에 독립군들이 돌아와서 그분이 대부분 재산을 팔아 독립자금으로 보내고 그런 일을 숨기기 위하여 주색잡기하는 것 처럼 보였다고 하는 것을 증거하여 주색잡기로 만석꾼 재산을 날렸다는 오명을 벗기도 했다고 한다.
[출처] 세상에서 가장 기가 좋은 곳--안동시 임동면 정재고택 부근|작성자 건일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가 가장 많이 배출된 문중
- 영남 의병의 중심에 정재 류치명의 문인이 주축을 이루었고,
안동 의병의 중심에는 무실 류씨가 있었다.
1895년 안동의소파록(安東義所爬錄)에는 조직과 간부 46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 중 8명(參謀- 柳淵博. 中軍將- 柳 琓. 都書記- 柳廷鎬, 柳必永. 書記- 柳淵楫, 柳晦植. 出令- 柳憲鎬, 柳昌植)이 우리문중에서 나왔다. 파록에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당시 70세 노령으로 안동의진을 조직하고 지원하는 본부지도자로 洗山 柳止鎬(정재의 아들) 西山 金興洛(정재의 문인 - 학봉 종손)의 활동이 이긍연의 일기와 김도현(영양 의병대장)의 기록에 뚜렷이 나타난다. 義兵大將- 權世淵은 定齋 柳致明의 문인이며, 2차 의병대장 金道和 역시 정재 문인이다.
또 다른 기록에는 류연각, 류연익, 류연영, 류벽호,류시연, 등의 활동이 돋보인다. 진성이씨 주촌파 종손 이긍연의 일기에 류연각이 조총 39정을 가지고 왔더란 기록이 있으며, 1896년 4월 17일(음)자에는 박실에 적병이 들이 닥쳐 柳 세 사람을 잡아가서 두 사람은 총살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류연영, 류연각 두 사람의 제삿날이 4월 17일임을 볼 때 이 두분이 확실한 것 같다고 ‘안동 무실마을’이란 책에 김희곤 교수의 기록이 있다.
의병활동에는 많은 자금이 필요했지만 그 자금은 각 문중에 배정하였는데 그 실적은 무실 류씨, 닭실 권씨, 하회 류씨가 각각 1,000냥, 내앞 김씨 800냥, 금계와 해저의 의성김씨, 법흥의 고성 이씨가 각 500냥, 그밖의 문중은 각각 400냥을 부담했다.
안동의병으로 星南 柳時淵 장군은 전국에서 가장 장기간에 걸쳐서 적극적으로 투쟁하여 큰 전과를 올렸음을 지나칠 수 없다. 그는 안동 의진의 소모장과 2차 김도화 대장 을 도와 선봉장을 맡았다. 태봉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그 뒷수습을 감당했고, 영양 의진의 김도현 대장, 영덕 의진의 신돌석 대장과 연합작전을 펼치면서 안동 청송 진보 영양 영해 영덕 삼척에서 1911년 만주로 망명한 날까지 활약하였다. 경주 분황사에서 영남의병 지도자의 회의에서 영남의병대장으로 류시연을 추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성남의 활동은 의병활동 이후에도 만주 독립군 활동을 계속했고 1912년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몰래 귀국했다가 영주 반구 장터에서 체포되어 1914년 1월 29일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그의 의병활동은 병영에서 읽혀지는 ‘육군’이란 월간지에 연재되었고 KBS라디오 국군의 방송 시간에 ‘다큐멘터리 의병대장 류시연’이란 프로그램으로 오래도록 방송되기도 했다.
- 협동학교와 사회계몽운동의 중심에는 東山 柳寅植이 있다.
동산의 교육과정 개혁운동은 1904년부터 시작하여 1907년 임하면 천전리에서 협동학교(協東學校)를 개교하고 유교경전 중심에서 탈피하여 수신, 국어, 지지, 역사, 외국지지, 한문, 작문, 미술, 대수, 지리, 체조, 창가, 화학, 생물, 동물, 식물, 박물, 등 17교과를 도입한 경북 북부지역 최초의 고등학교였다.
여기에는 보수 유림의 반발이 많았으나 동산의 개혁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 1910년 7월 18일 오후 3시경 안동 영주 예천지역에서 활동하던 무장 의병 18명이 난입하여 김기수 교감 안상덕 교사 이종화 서기를 살해하는 큰 변괴가 있었으나 용기를 꺾지 않고 교육을 지속 하였으나, 그해 8월 22일 국권이 강탈 달하고 류인식, 김대락, 김동삼, 이상룡 등이 주동하여 12월 말에 100여명이 만주로 망명하고,
※ 1913년 임동면 수곡동 한들의 정재 종택으로 옮겨서 재차개교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는 정재 종택 건물을 협동학교 교실로 무상제공이라는 종손 柳淵博의 크나큰 배려와 교장 柳淵甲, 교감 柳東泰의 지극한 정성으로 1915년 제 2회 졸업식을 맞았다, 류인식은 자금 조달을 위하여 일시 귀국하여 고향의 토지를 매각하는 도중 일경에 체포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서 1917년부터 학교 경영을 하면서 안동지방의 계몽운동을 이끌어 간 주역의 위치에 있었다. 1919년 제 4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3 ․ 1 운동의 챗거리 만세운동이 협동학교에서 준비 추진되었음을 빌미로 강제 폐교되었으나, 정재 종택에서 우리 문중이 그 중심에 있었다는데 그 의미는 대단히 크다 할 것이다.
- 3․1 운동의 챗거리 만세운동 중심에는 우리 문중이 있다.
임동면 만세운동은 정재 주손인 류동시(柳東蓍)가 광무황제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서울의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수중에 숨겨서 귀향하여 대책회의를 열고 숙부인 류연성과 협동학교 류동태, 이규호 등과 논의하여 3월 15일 챗거리 공동타작마당에서 류연성, 류교희, 류동수, 박재식, 박진성 등과 洞별 책임자를 정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는 협동학교에서 준비되었다. 그 때 참가했던 어른들의 말씀에 의하면 태극기를 만들기 위하여 안동장에 두 사람을 파견하면서 동시에 점포에 들어가지 말고 두 가지 물감을 동시에 구입하지 말고 한 번에 많은 량을 사지 않도록 당부해서 보냈다고 하였다.
3월 21일 오후 2시경에 500여 명이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고 일본인 순사 우치다가 시위대를 막아섰으나, 우치다와 권태석 순사보를 제압하고 주재소에 들어가서 경찰의 무기를 모두 빼앗아서 우물에 넣어 못쓰게 만들었으며, 면사무소를 공격하여 각종 서류를 파기하고 건물도 부수었다.
일본인 순사에게 태극기를 들려서 동네마다 찾아다니면서 만세를 불렀다.
시위는 새벽 2시가 넘도록 계속되었으며, 이날 만세를 부른 전체 인원수는 1,000명이 훨씬 넘었을 것이라 전한다. ☀ (천안 독립기년관에도 안동의 3.1운동 부분에 편항 1,000명. 예안 500명이 게시되었음)
다음날 임북면(사월) 시위에도 그 다음날 영양 시위에도 참여한 분이 있었다. 이때에도 정재의 손자 류연성의 활동이 가장 두각을 나타냈다.
柳淵成은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서 6개월 동안 재판을 받으면서 옥중에서 만세를 여러 차례 불렀다고 한다. 류연성은 징역 7년을 선고받고 7일 만에 순국했으니 그간의 고초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류교희와 류동수는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이는 독립선언서에 기록된 민족대표 33인에게 3년 이하의 형이 선고된 점과 비교할 때 시위가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다.
- 파리장서에 서명
3․1 운동 직후 유림단에서 파리강화회의에 우리의 독립을 요구하는 장문의 청원서를 보낸 일을 제 1차 유림단 의거라 하는 데 이 장서에 직접 서명한 사람은 137명이며 안동 사람은 5명(한들에 柳淵博, 삼산에 柳必永, 하계에 李晩煃 내앞에 金秉植 금계에 金瀁模) 인데 우리 문중 어른 2인이 들었음은 주목할 부분이다.
-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낸 旦洲 柳 林 선생
협동학교를 졸업하고, 챗거리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중국으로 가서 중경의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동하다가 국무위원에 취임하여 활동하셨다. 광복 후에 한국독립당 당수로서 자유당 독제정치를 규탄하는데 앞장서서 투쟁했음. 수유리 4․19 묘지에 안장
※ 독립운동자로 포상된 무실 류가 어른들 은 22인
독립운동자로 포상된 무실 류가 어른들
성 명 |
생몰 년도 |
마을 |
훈격 |
주요 활동 | |
1 |
류교희 柳敎熙 |
1886-1965 |
박실 |
애국장 |
임동 3․1운동 |
2 |
류동수 柳東壽 |
1898-1983 |
무실 |
애족장 |
임동 3․1운동 |
3 |
류동창 柳東暢 |
1898-1983 |
무실 |
애족장 |
임동 3․1운동 |
4 |
류동혁 柳東爀 |
1891-1920 |
무실 |
애족장 |
임동 3․1운동 |
5 |
류동환 柳東煥 |
1885-1973 |
한들 |
애족장 |
임동 3․1운동 |
6 |
류 림 柳 林 |
1894-1961 |
계곡 |
독립장 |
임동 3․1 운동, 서로군정서, 신한청년단,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임시정부 국무위원. |
7 |
류세진 柳世振 |
1886-1923 |
임동면 |
애족장 |
대한통의부 ※ 우리 문중이 아닐 수 있음 |
8 |
류시연 柳時淵 |
1872-1914 |
한들 |
독립장 |
전기, 중기, 후기의병 |
9 |
류연건 柳淵建 |
1892-1951 |
고천 |
건국포장 |
불교청년회, 조선노동공제회, 길안청년회안동기자단, 신간회 안동지회 |
10 |
류연덕 柳淵德 |
1894-1923 |
고천 |
애국장 |
대한통의부, |
11 |
류연박 柳淵博 |
1844-1925 |
한들 |
건국포장 |
전기의병, 파리장서의거 |
12 |
류연복 柳淵福 |
1890-1965 |
수곡 |
애국장 |
협동학교 졸업, 임동 3․1운동, 군자금모집 |
13 |
류연성 柳淵成 |
1857-1919 |
수곡 |
애국장 |
임동3․1운동 |
14 |
류연익 柳淵益 |
1901-1992 |
수곡 |
애족장 |
임동 3․1운동, 군자금 모금 |
15 |
류인식 柳寅植 |
1865-1928 |
삼산 |
독립장 |
교육구운동, 경학사, 조선노동공제회,신간회 |
16 |
류정희 柳鼎熙 |
1867-1933 |
수곡 |
건국포장 |
국내항일 |
17 |
류필영 柳必永 |
1841-1924 |
삼산 |
건국포장 |
파리장서의거 |
18 |
류후직 柳后稷 |
1894-1956 |
박곡 |
애족장 |
협동학교졸업, 안동면 3․1운동 |
19 |
류동수 柳東洙 |
1887-1978 |
마령 |
애국장 |
임동면 3․1운동 |
20 |
류기영 柳璣永 |
1888-? |
계곡 |
애족장 |
임동면 3․1운동 |
21 |
류창식 柳昌植 |
1859-1912 |
삼산 |
건국포장 |
초기의병 |
22 |
류면희 柳冕熙 |
1916-1940 |
삼산 |
애족장 |
6․10 만세 주도, 조선하생과학위원희 위원 |
23 |
※ 자료 미비로 포상되지 못한 무실 류가 어른들은 62인
- 의병 19 인
柳德永 柳鳳熙 柳止鎬 柳昌鎬 柳淵楫 柳淵永 柳淵覺 柳淵翊 柳東翊 柳璧鎬 柳 琓 柳孝淵 柳承洛 柳承鎬 柳鎬輯 柳淵燐 柳晦植 柳憲鎬 柳廷鎬 柳翊鎬
- 협동학교 3 인
柳東泰 柳淵甲 柳周熙
- 3․1운동 13 인 ※ 단순가담자를 포함하면 500명이상
柳基萬 柳基福 柳基泰 柳淵泰 柳宗稙 柳東馥 柳淵琦 柳晩秀 柳春欽 柳致得 柳景發 柳璣永 柳東蓍 (중심에는 柳淵成)
- 파라장서 1 인
柳萬植 (柳必永, 柳淵博을 도움)
- 청년운동, 노동운동 사회 계몽 운동 10 인
柳 淵建 柳淵述, 柳周熙 柳東著 柳震杰 柳敎黙 柳東徹 柳基萬 柳基一 柳淵和(중심에는 柳寅植)
- 해외항일 3 인
柳廣鎬 柳基東 柳淵德
- 군자금 모금 2 인
柳淵福 柳淵益
- 참가분야가 불분명한사람 12인
柳東植 柳東範 柳淵龜 柳淵鱗 柳顥集 柳東烈 柳淵一 柳淵模 柳康鎬 柳晩植 柳淵運 柳禹洛
※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이 많아서 중복된 경우가 있음.
합 계 84인 ※ 3·1운동 단순가담자 5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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