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동독행 기차를 타기만 하면 되는데 발이 얼어붙어버리다
동생이 김일성 모독죄 등으로 총살당한 뒤부터 김일성과 김정일과 당에 대하여 충성을 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김일성 부자에 대한 증오심과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으로 변해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30대 초반에 모스크바에 처음 갔을 때 김일성의 말이 거짓말임을 알았고, 또 침 공부하러 중국에 매년 한두 달 가량 머물면서 북한이 얼마나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이러다보니 김일성 혁명사상을 배우고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 회의가 생겨서 학습을 소홀히 하게 되었다. 게다가 동철이가 총살되고 나니 북한을 떠나야겠다는 마음이 수시로 꿈틀거리고 올라왔다.
그런 와중에 당에서는 청진의대교수 직위를 박탈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려면 성분이 좋아야 하는데 동생이 반동분자로 총살당한 반동의 가족이니 교수 자격 미달이라는 것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려면 아주 사상이 투철하고 성분이 좋아야 되는데 어떻게 교육을 시키겠느냐며 그냥 일반 의사노릇만 하라는 것이었다. 아마 당 비서가 당분간 내과에 보내라 하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던 모양이다. 대학병원과 의과대학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나는 병원으로 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병원에서 부 과장을 시키더니 한 2년 있으니까 일반 의사로 강등이 되는 것이었다. 올라가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좌천이 되니 참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당 비서가 나를 불러서 “큰 죄는 없으니까 의사까지는 괜찮다.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라. 어떻게 하겠냐? 세상이 이런 것을” 이렇게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그래서 “아!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연좌제로 가족들까지도 반동분자로 취급하는 공산당의 정책이 부당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이러한 불이익을 하나 둘 당하다 보니 공산당과 김일성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다. 아무래도 탈북을 하긴 하여야겠는데 처자식들이 마음에 걸렸다. 집사람과 조무래기 아이들을 몽땅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서 중국으로 탈북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나 혼자만 탈출할 수도 없고 이거 어쩌면 좋을지 머리가 복잡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가운데 시간은 자꾸 흘러갔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안되겠다. 나 혼자만이라도 북한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의대교수로서 모스크바로 출장 간 틈을 타 서방세계로 탈출하기로 작심하였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백혈병 연구차 모스크바 대학에 갈 일이 생긴 것이다. 그때를 틈타서 사회주의 지상낙원이라고 거짓말로 인민을 속이는 양의 탈을 쓴 김일성 독재국가를 탈출하기로 하였다.
1977년 경으로 기억한다. 모스크바에서 동독행 열차표를 끊고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당시 동독은 서독과 자유롭게 왕래가 되었으며, 그곳에는 나를 도와줄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만감(萬感)이 교차하는 가운데 멀리서 기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기차는 내 앞에 섰고, 난 기차에 타기 위해서 발을 내딛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마음은 타야겠다고 하는데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손은 나가는데 발이 꼼짝을 안한다. 두 발짝만 가면 동독행 기차를 타고 자유세계로 가게 되는 것인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기차는 덜크덩 소리를 내며 출발하였다. 나는 물밀듯이 몰려오는 허탈감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대체 이게 뭔 일이란 말인가? 왜 발이 떨어지지 않는 것일까? 가족을 버리고 혼자 도망가서 그러는 것일까? 생사를 건 모험을 감행하여 이곳까지 와서 기차표까지 끊었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누웠으나 낮의 일로 잠이 오지 않았다. ‘왜 발이 안 떨어졌을까?’ ‘갑자기 쥐가 난 것일까?’ 아니면 ‘혼자서 도망치지 말라는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만일 나 혼자 도망간다면 북한에 남은 식구들은 다 곤란한 일을 당할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아버지께서 생전에 늘 거짓말을 하지 말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교육하셨는데 자식들에게 모스크바 갔다온다고 말해놓고는 도망가 버리면 정직하지 못한 것 아니냐. 도망가는 게 아버지의 도리가 아니지 않느냐. 또한 남편이라면 아내에 대한 책임이 있는 거 아니냐. 늘 자식들에게 정직하라고 가르쳐 놓고는 자기는 마누라도 속이고 거짓말하고서 도망가 버린 것을 집사람이 안다면 나를 얼마나 원망하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자 가족들을 버리고 혼자서 도망간다는 것은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의 미래를 책임지는 게 가장(家長) 아니냐.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 되는 거 아니냐. 그게 가족 아니냐. 가족이라는 것은 일심동체요 내가 버려서는 안 된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회피하고 도망가려 한 내가 부끄러웠다.
그래서 부랴부랴 북한으로 되돌아왔다. 돌아와서는 적당히 둘러대고 그간에 제출하지 않았던 연구 자료를 조금 손봐서 제출했다.
집사람과 나는 큰누님의 중매로 결혼하였다. 그때 내 나이는 스물여섯, 집사람은 스물이었다. 나는 대학생이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고 장가를 갔으면 하는데 누님은 더 늦으면 안 된다며 좋은 색시가 있으니 결혼하라는 거였다. 집사람은 평양 평천구역 출신으로 사동고등중학교를 나와서 만년필공장에서 선반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사실 난 의과대학 동기 여학생 중 금애(성은 이씨인지 박씨인지 기억이 안난다)라는 여성한테 마음이 조금 있었다. 마음이 참 착하고 순수해서 그녀를 좋아했다. 만일 그녀와 결혼했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부질없는 일이지만 그때 얘기를 하니까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그러나 나는 큰누님 - 사실 나에게 제일 큰누님은 남조선에 있으니 여기서 말한 큰누님은 둘째누님이다. 아버지가 독립군을 따라 만주로 갈 때 제일 큰누님은 남조선에서 출가하였기 때문에 가족과 헤어져 살게 되었다 - 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큰누님이 우리 형제들을 키웠으니 어머니나 다름없었다.
결혼식을 올리기는 하였으나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잡을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 나는 청진에서 살고, 집사람은 처가에서 살았고, 대학 졸업 후 은사님이 일하시는 청진의대 비뇨기과에 발령이 된 후에야 은사님의 도움으로 주택을 장만하여 집사람과 같이 살 수 있었다.
집사람은 청진으로 와서는 금속물공장에 다니면서 프레스공으로 일하게 되었다. 공장은 24시간 3교대로 돌아가는데 8시간 근무하고 퇴근하여 집에 와서는 가정일을 했다. 3교대로 돌아가다 보니 철야근무를 하는 때도 있었다.
집사람은 공장에서 일하고 집에 와서는 밥하고 나무 장작을 준비하고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다 하느라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다. 세탁기가 있나, 냉장고가 있나, 싱크대가 있나 북한에서 여성들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남한에서는 남자들이 가정일을 도와주는데 북한은 여성들 일이라 도와주지 않는다.
그러나 김일성과 당에 충실하다는 말만 들으면 그게 최고라고 생각했던 내가 동독행 기차를 못타는 일을 겪고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부터는 집사람이 그렇게 불쌍하고 안스럽게 보였다. 집사람이 저렇게 불쌍하게 살았는데 나 혼자 살겠다고 도망을 치려고 했던 것이 너무 양심에 가책이 되었다. 그때 이후로 집사람 대신 장작을 패주기도 하고, 집안일도 돌봐주고, 자식들에게도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그 전에는 애들을 안아준 일도 별로 없었던 내가 그 일로 말미암아 달라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