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활터에 걸려 있는 글귀 중 선례후궁(先禮後弓)을 며칠 전에 운영자님이 소개해 주었습니다. 논어를 배우면서 유교에서 예(禮)를 강조하게 된 연유를 설명들은 것이 있어서 다시한번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공자님(BC 551-479)이 활동하시던 때는 중국의 춘추시대(春秋時代 :BC 770-403) 말기로서 중국이 여러 제후국들로 갈라져서 할거하던 때입니다. 周나라의 천자(天子)는 명목상의 자리만 지키고 있었기에, 제후국간의 세력다툼으로 전쟁이 그치지 않고, 제후국 내에서는 또 임금과 신하인 대부가 권세를 다투었으며, 또한 대부와 그 부하인 가신간에도 세력다툼이 일어났고, 아버지와 자식간에도 자리를 다투는 등으로 질서와 윤리가 땅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공자가 35세 되던 해(BC 517넌)에 노나라 권세를 좌지우지하던 세 명의 대부(大夫), 즉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씨가 난을 일으켜 임금인 소공(召公)을 축출합니다. 소공이 제(齊)나라로 망명하게 되자 공자도 수행하여 제나라로 갑니다.
당시 제나라의 군주는 경공(景公)인데, 그 또한 제나라의 대부인 최저(崔杼)가 선왕이던 장공(莊公)을 죽이고 세운 허수아비 임금이었습니다. 최저(崔杼) 역시 그 아들들이 아비의 자리를 승계하기 위하여 다투는 와중에서 죽게 되는 등 극도로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공자가 가장 미워한 것은 바로 난(亂)을 일으키는 것과,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犯)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작난(作亂)과 범상(犯上)입니다.
범상(犯上)이란 것은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범하는 것, 즉 신하가 임금을 범하거나, 자식이 아버지를 범하는 것을 말합니다.
공자가 이러한 작난(作亂)과 범상(犯上)을 막기 위해서는 예(禮)를 바로세우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천하를 주유하거나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사람이 갖추어야 할 가장 큰 덕목 중의 하나로 가르치게 된 것입니다.
예(禮)라는 것은 바로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효도하며, 나이어린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천하의 어지러운 질서를 바로잡자는 것이 공자의 방식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뒤 유학자들이 예법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너무 번잡하게 되는 폐단도 생기게 됩니다.
오늘 날의 예(禮)는 고대 왕조시대와는 다르게 민주적으로 해석하여 실천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즉, 상하간의 질서를 우선시하는 것에서 발전하여, 자기의 본분을 알고 서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자세가 중요할 것입니다.
활터에서는 나이 많은 연장자와 먼저 활을 시작한 분을 존중하고, 또 나이 많거나 먼저 활을 시작한 사람은 나이가 적거나, 뒤에 활을 시작한 사람을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고 친절히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전수해 주는 아름답고 화목한 기풍을 만들어 가야하겠습니다.
궁사가 예의도 없이 활만 잘 쏘는 것을 최우선적인 목적으로 삼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선인들이 강조한 것이 바로 선례후궁(先禮後弓)이 아닌가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