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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김홍기(金鴻基) 1884년(고종21)~1954년
자는 순우(順遇)이고 호는 만창(晩蒼) 팔오헌의 후손이다이며 택동 희성계열이다
일차장서에서
1919년 3월 儒林團員으로 上海臨政과 연락하여 巴里萬國平和會議에 한국독립청원서 운동을 전개하던 4종숙이자 동강종가로 양자갔던 심산 김창숙이 파리장서 자금모집과 경상좌도의 고무와 서명받는 일을 추진하고자 동력을 얻기위해서 혈연인 교림을 방문한데 이어 바래미를 방문하여 홍기의 집(만회고택)에서 창근 뇌식 창백 한식 창순 홍기등 7-8인에게 파리장서 계획을 설명하고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내고 좌도고무의 일과 서명 받는 일등을 분담하였다
다음날 창도집에서 수십명이 회식 일경이 들이닥쳐 창숙과 홍기가 해혹해서 보냈다
그날 저녁 뜻 맞는 몇분과 홍기집에 유거하였다
다음날 닭실의 권상원장을 맞이하여
권상원장이 지금은 풍색이 좋지 않으니 우리몇이서 좌도와 서명 받는 일들을 할 것이니 자네는 바로 가라함
(명월루에서 일차장서의 계획들이 많이 이루어짐)
이차유림단에서 심산의 지령서를 지닌 정수기는 홍기의 집을 방문해서 전달하며
전달받은 심산지령서를 홍기는 뇌식을 만나서 2000원을 내놓고 자금모집을 함께하기로하고 외숙인 강필을 설득하고 다시 2000원을 희사 받았다
1922년부터 바래미마을의 대표로 선임되었으며 심산생가의 상징적인 대표로서 마을의 8분이 주동이 되어서 황소50마리값인5000원을 희사산 것으로 알려짐(이부분은 자료에 나오지 않음)
이차유림단에서 가장 큰 금액을 수수한 것임
이자금은 황무지개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여 나석주 김지섭등 의열단자금으로 씌여진다
일이차유림단을 혈맹으로 심산과 끝까지 함께했을 뿐아니라 독립운동가 민립대학 신간회...의 책임자들과도 교류하며
독립운동가들의 간착들이 수백통이 보관되어온다
(심산 손후익 송준필 이고 이동흠 권상익 권명섭 권상원장 환기 중열 강필 유연즙 유연박 유동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서훈되었다. 저서로는 만창집 8권 4책 전한다
달수 주) 여러 따님 중에 한분은 여헌 종손 창익(昌翼) 공의 부인이 되시니 나의 종숙모로 3남 3녀이니 맏아들 철수(哲洙) 형은 미동 영감댁으로 출입하였고, 둘째는 동수(東洙)이고, 셋째는 일수(一洙)이고 맏딸은 영주 천운정 주손(김종환)이고, 둘째는 연일정씨에게. 셋째는 원촌 치암고택(이동수)에게 출가하였다.
또 한분은 닭실로 가셨는데 나의 외외종숙모(권세기 공)가 되셨다.
만 족질 순우 홍기 심산 김창숙
생각난다, 일찍이 순우를 찾은 날, / 憶曾訪順遇
그곳은 바다 위 정든 고향마을 / 海上桑梓里
자네는 그때 바삐 나와 맞았지 / 君時忙出迎
서로가 맞잡은 그 기쁨 어떠했나 / 相握歡何似
날이면 날마다 닭 잡고 밥지어 / 日日具鷄黍
여러 일가들 성대하게 만났었지 / 大會諸族氏
의분이 북바치어 고금을 논하고 / 慷慨論古今
횡설수설 모두가 이치에 합당했네 / 橫竪俱當理
뛰어난 행실 재와 늪 풍미하니 / 卓行風嶺藪
뉘 아니 칭찬하리 강직한 선비 / 孰不稱介士
돌아보면 자취는 하마 묵은 옛날 / 轉頭跡已陳
부적 당도하면 자네를 따르리라 / 符到願從子
* 挽 族姪 順遇 鴻基 심산 찬
憶曾訪順遇, 海上桑梓里, 君時忙出迎, 相握歡何似, 日日具鷄黍, 大會諸族氏,
慷慨論古今, 橫竪俱當理, 卓行風嶺藪, 孰不稱介士, 轉頭跡已陳, 符到願從子
제 족질 순우 문 홍기 1995년(을미) 김창숙
슬프다, 순우여! 자네는 세상을 떠났는데 나는 아직 양계에 있다. 자네의 통부를 받은지 한 돐이 장차 바뀌니 참인가 환각인가 의심한다. 내가 지금 여기에 이르러도 자네가 나를 맞이하지 않으니 어찌 그리 인정이 없는가. 내가 목놓아 울어도 자네가 나를 말리지 않으니 막연히 듣지 못하는 것같다. 자네가 만일 아는 것이 없다면 나의 울부짖는 것이 한갓 시끄러울 뿐이다. 자네가 병이 없을 때는 문중의 들보와 기둥이 있고 나라에 노령이 있더니 자네가 죽으매 예전 덕이 빙거 할데 없어 뭇 도깨비가 낮에 행한다. 내가 구차히 사는 것이 자네가 온전히 돌아감에 비교한다면 부럽지 않겠는가. 오늘이 어느 때인가. 자네 생각하기를 더욱 간절히 하니 내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다. 한잔의 전과 판향의 태움으로 영원히 이별한다. 아! 슬프다.
* 祭 族姪 順遇文 鴻基○乙未
嗚呼順遇, 子不于世, 我尙陽界, 執子之訃, 一朞將換, 疑眞疑幻, 我今戾斯, 子不我迎, 奚其不情, 我哭失聲, 子不我止, 漠若不耳, 子如無知, 我之號咷, 徒歸囂囂, 子之無恙, 門有梁楹, 邦有魯靈, 子之不淑, 古德靡憑, 群魈晝行, 如我苟生, 視子全歸, 能不羨爲, 今日何辰, 念子益切, 我心如裂, 一觴之奠, 瓣香之焫, 永訣永訣, 嗚呼哀㦲。
이수응(명춘) 김순도(창순) 김홍기(순우) 벗들과 소백산을 유람하면서 백운동에 머무름
p557
물과 달 시원하고 원우 우뚝한 곳
십년만에 찿으니 감회 새롭네
백운동 구름 속에 경자바위 여전하고
뜰안 풀에는 문 밖의 향기 들려오네
세상은 짓밟혀서 풍우속에 어둡고***소백산27명 권상용에게 소수서원에 맞겨둠(권상용은 의병대장 권세연 아들
유자는 쇠잔하여 백발만 성성한데
죽계 마르지 않고 연화봉 고고하여
p562 강순오 김순도 중두순우 홍기와 더불어 운자내에 읊음
죽계 시원한 물소리 서원에 가득하고
초목 돌아보니 참된 빛을 입었네
현가는 갑짜기 천년의 가락이 끊어졌어도
변두는 여전히 백세의 향기 품어오네
옛날분 보이지 않고 구름만 아득하여
홀로 밝은 달빛 아래서 슬퍼하였네
지금 세상 비바람 몰아치는 때***************홍자기자 교우들의 간찰과 시는 이런 구절들이 많아
백발에 서로 만나니 뜻이 깊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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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의 여정을 답사하려 한다. (1)의 여정은 서부정류장을 거쳐 달서구 관내로 진입하면서 시작된다. 이 여정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역사의 현장은 1973년 12월에 건립된 '태극단 독립운동 기념탑'이다. 상원고등학교 야구장 뒤 도로변에 있는 이 탑은 대구상업학교(상원고 전신) 학생들이 일제 식민지 폭압에 처절하게 저항했던 불굴의 민족의식을 기념한다. '일군(日軍) 입대를 거부하고 일제의 전쟁에 협력하지 말자'는 호소문을 살포한 36명의 학생은 1943년 5월 9일 비슬산 약수터에 모여 태극단을 결성하지만 결국 피체, 고문 끝에 죽고 중상을 입는 등 처참한 탄압을 받는다. 그 현장을 달서구 답사의 출발지로 삼는 것이다.
▲ 대구상고 태극단 기념비 |
일제 말기인 1942년 5월에 대구상업고등학교(현 달서구 상원고등학교)의 이상호, 김상길, 서상교, 김정진 등 26명의 학생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고 항일학생결사 태극단을 조직하였다. 이때 태극단이란 명칭은 한말이래 사용되어온 태극기를 상징하여 정한 것이며 동 결사의 약칭으로 T.K.D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 무렵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도발하여 마지막 발악을 하던 때로 감시와 탄압을 더욱 가혹하게 했으나 이들은 일본군입대 반대 등 일제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조직 확대를 위해 동지포섭 활동에 주력하면서 계속 학교단위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동년 5월에는 그동안 가입한 단원을 포함하여 전원이 대구시 앞산의 약수터에 모여 결단식을 가졌으며, 간부들은 구체적 투쟁방안에 관하여 협의하고 조직을 정비하였다. 태극단의 조직은 크게 일반조직, 특수조직으로 나뉘었으며 최고의결기관으로써 간부회의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일반조직은 다시 육성부 아래 관방국, 체육국, 과학국 등 3국을 두고 그 밑에 군사부, 항공부 등 10여 부를 두어 체계화했으며 특수조직은 건아대라 칭하여 중학교 1·2학년생과 국민학교 상급반 학생을 대원으로 가입시켜 이들을 장차 단원으로 육성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태극단의 투쟁방략은 조직화대를 통항 전국의 학교와 각 지역별로 조직을 완성한 후 여론을 환기시키며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것인데, 만약 국내에서의 투쟁이 여의치 못할 때에는 중국으로 집단 망명하여 그곳에서 항쟁을 계속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리하여 단원들은 학술연구 토론회, 각종체육회 등을 개최하며 동지간 유대의식과 민족적 교양의 함양 및 체력증간에 힘을 쏟았다. 또한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사학 연구에도 정진하여 군사관계서적의 번역, 글라이더 및 폭발물 제조에 관한 연구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1943년 5월 배반자의 밀고로 태극단의 조직과 활동이 일경에 발각되었고 이로 인하여 전원이 체포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1973년 대구상고(현 상인동의 상원고)에서는 개교 50주년을 맞아 이들을 기리는 기념탑을 당시 중구 대봉동 교정에 건립하였고 1985년 달서구 상인동으로 학교가 이전하면서 기념탑도 같이 이전을 하였으나 위치가 외지고 이전으로 훼손되어 2003년 10월에 달서구 상인동 1-38번지에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기념탑도 새롭게 건립하였다.
1) 이상호(1926~1945)
1942년 대구상업학교 4년 재학 중 사상을 의심받아 5학년 진급 때 낙제되었고 이어 태극단 항일운동으로 출학되었으나 특별졸업장을 추서받음(1969). 동지 하두영 등고 kejqnfdj 지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43년 봄, 서상교·김상길 동지와 같이 태극단을 조직할 것을 발기하고 민족자결조의 원칙에 의해 한국의 자주독립과 전세계 인류의 영원한 평화와 자유평등를 쟁취한다는 강령으로 대의 앞에 신명을 걸어 맹약한 후 전국을 통한 학교별, 지역별로 동지규합에 착수하여 김정진, 이준윤, 이원현, 윤삼룡, 이태원, 정환진, 정광해 등 26명의 동지들이 호응하여 규합된 뒤 동년 5월 9일 앞산 약수터 부근에서 태극단의 결단식을 가졌다.
태극단 단장 겸 육성부장으로 활동 및 지도에 전력을 기울이던 중 1943년 5월 23일 왜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은 후 미성년자로서는 최고형량인 단기 5년, 장기 10년의 징역형으로 김천형무소에 수감중 옥조중의 악형으로 사경에 이르러 1945년 2월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동년 12월 9일 19세를 일기로 운명. 영결식은 시민의 애도 속에 광복 후 최초의 사회장으로 거행되었으며, 비밀결사의 세 번째 희생자였다.
1963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 김상길
당시 18세, 대구상업학교 5년 재학 중 태극단 관방국장겸 군사부장으로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단기 5년, 장기 7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겪던 중 1945년 조국광복과 동시에 출옥되어 후일 해군참모차장, 광복회장을 역임하였다.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1963), 충무무공훈장, 국민훈장동백장을 수훈하였다.
3) 서상교
당시 19세로 대구상업학교 5년 재학 중 태극단 체육국장 겸 무도부장 등을 맡아 태극단의 대구상업학교내 지도자로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단기 6년, 장기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던 중 1945년 조국광복과 함께 출옥하였다.
1963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하였다.
4) 김정진
당시 19세. 대구상업학교 5년 재학시 항일비밀결사 태극단의 비서장, 회계관의 중임을 맡아 활약하던 중 체포되어 단기 2년, 장기 3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겪던 중 1945년 조국광복과 함께 출옥하여 후일 교직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63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하였다.
5) 이원현(1926~1945)
당시 17세로 대구상업학교 4년 재학시 태극단 항일 독립운동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단기 2년, 장기 3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3월 30일 병보석 출감하였으나 1945년 운명함으로써 비밀결사의 두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1963년 정부로부터 건국공로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6) 이준윤
당시 19세로 대구상업학교 5년 재학시 태극단 과학국장으로 활약하다가 왜경에 붙잡혀 야만적인 고문으로 사경에 이르자 1943년 9월 하순경 병가 보석으로 출감되었으나 출감 3일만인 1943년 10월 2일 순국하여 비밀결사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1991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7) 이태원
당시 16세로 대구상업학교 3년 재학시 항일독립운동 비밀결사 단체인 태극단 부관 및 경기부장으로 독립운동을 벌이다 1943년 5월 25일 여러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하였다.
8) 윤삼룡
당시 18세로 대구공업학교 기계과 2년 재학 중 태극단에 입단하여 체육위원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1943년 5월 25일 왜경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악형 및 옥고로 인한 늑막염으로 1947년 6월 8일(음력) 유명을 달리하여 비밀결사의 네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9) 정광해
당시 17세로 대구상업학교 4년 재학시 태극단에 입단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여러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하였다.
10) 정환진, 완진
당시 17세로 대구상업학교 4년 재학시 태극단에 입단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여러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하였다.
이 외에도 태극단 단원으로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던 인물로 최두환, 김광연, 김정하, 안광성, 정병준, 황칠암, 김종우, 이상학, 이응락, 하두영, 노정열, 강기인, 박규인, 박상포, 손문호, 안창용 등이 있다.
봉화군민상 김정진씨 수상
지역 문화재 관리·청소년 교육에 헌신
[2002.10.02]
제6회 봉화군민상 수상자로 김정진씨(76·봉화읍 해저리)가 선정됐다.
김씨는 학생독립운동단체(대구상고)인 태극단 출신으로 성균관대를 졸업한뒤 교육계에 투신, 평생을 교단에서 보냈다.
정년퇴임후에는 고향에 정착, 특히 지역문화재 관리 및 보전에 남다른 열정을 불태우며 관내 청소년들을 위한 충효교실 운영,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한문학 강좌 등에도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 현재 봉화향교 전교로 향사 주재와 유교정신·문화의 보급에도 앞장서 국민훈장 석류장, 매일 광복상, 건국훈장 애국장, 국민훈장 목련장 금오대상 도산서원헌관 많은 등 수상 경력도 다양하다.
군민상을 수상한 김씨에게는 상패와 부상으로 금 50돈의 금메달이 수여된다.
한편 지난 93년 시작된 봉화군민상은 격년제 1인 선정을 원칙으로 하며 공동 또는 기관단체도 수상 할 수 있고 심사결과 수상 적격자가 없을 경우에는 수상자를 내지 않을 수도 있다.
심사기준은 10명 내외의 지역 명망가들로 구성된 봉화군민상심사위원회에서 공정하고 엄격한 절차를 거쳐 수상 대상자를 결정하고 사회봉사, 지역개발, 효행 등 향토발전에 기여한 공이 가장 뚜렷한 사람을 선정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