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산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은 그 자락과 계곡마다에 나주인의 역사와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그 길을 따라 오르노라면 나주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고, 영산강 물길도 손금처럼 잡힌다. 나주를 찾을 때면 빼지 않고 올라가 볼 곳이 금성산(錦城山)이 있다. 450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나주의 진산이며 금성산신이 사는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산(上山)이라 부른다. 산 정상은 정녕봉(북), 다복봉(남), 노적봉(서), 오도봉(동)의 4개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주평야에서 가장 높다.
나주호
나주호권은 물과 산과 불교유적이 어우러져 자연경관이 뛰어난 관광코스로서 녹음이 우거진 신록의 계절과 단풍이 물드는 가을의 정취는 그 어느 지역보다 순수한 자연미를 자랑하는 곳이다. 사방이 산 으로 둘러싸이고 붕어 , 잉어 , 뱀장어 , 날치 , 피라미 등 담수어족이 많아 강태공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또한 인근 야산에는 고라니 , 토끼 , 꿩 등 야생 동물이 많고 주변에 문화 유적이 많아 나주에서 인기 있는 여행 코스이다
영산강
영산강은 호남을 관통하는 흐르는 젖줄이지만 나주에 와서야 비로소 그 광활함과 비옥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어 ‘나주의 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산강은 문화를 실어 나르는 길이었으며 나주평야를 적셔주는 생명의 원천이었다. 따라서 나주의 역사와 문화에 있어 영산강을 빼 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주의 문화생성과 관광자원을 이야기할 때 첫 머리에 두어야 하는 대표적 자원이 영산강이다. 무엇보다 영산강권은 우리나라 4대강의 하나인 영상강의 풍요로움과 문화유산 농촌의 모습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나주평야
영산강 유역의 광대한 전남평야 중 가장 지형이 저평하여 그 핵심부를 이루는 나주평야는 서쪽과 남쪽에 바다를 끼고 있어 해양성 기후의 특성을 나타내어 주곡농업과 원예농업이 발달하였다. 특히 주변경관이 빼어나 화순으로 통하는 도로 곁의 드들산 봉우리는 해발 169m의 낮은 산이지만 사철 아름답게 변화하면 서 맑은 지석강물에 비치는 모습이 일품이다.
반남고분군은 나주시 반남군 자미산(98m)을 중시으로 신촌리, 대안리, 덕산리의 낮은 구릉지에 산재해 있다. 신촌리 8호분, 덕산리 14호분, 대안리는 12호분 등 총 34호분으로 이루어져있다.
반남 고분군에는 대형옹관고분 수십 기가 분포하고 있다. 대형옹관 고분이란 지상에 분구를 쌓고 분구속에 시신을 안치한 커다란 옹(壅 : 항아리)를 매장하는 방식이다. 이 고분 양식은 고구려의 적석총(積石塚), 백제의 석실분(石室墳), 신라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가야의 석곽묘(石槨墓) 등과 구별되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의 독특한 고분 양식이다. 대형옹관고분(大型甕棺古墳)은 AD 3세기부터 6세기까지 4세기 동안 영산강 유역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3세기경에는 옹관절반을 지하에 묻는 반지하식이었으나 4세기 중반부터는 지상식으로 발전하며 이 때에는 분구의 규모가 훨씬 대형화 되어 그 규모가 40~50m에 이른다.
대형옹관고분은 나주 반남 일대는 물론 영암, 함평, 무안 등 영산강을 따라 형성되고 있으며, 이 지역 고대 세력의 묘제로 파악되고 있다. 현재 옹관고분의 밀집도로 보아 이곳 반남 지역이 고대 지배세력의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형옹관고분의 출토유물은 영산강유역 계통의 유물이 주를 이루나 후기에는 백제계, 일본계의 유물이 섞이게 되며 가야계의 특징도 일부 보이고 있다. 당시 사회가 백제, 가야, 왜 등과 활발한 교류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영산강의 고대 수로 조건을 이용한 해상활동이 매우 활발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5세기 말경에는 대형옹관고분이 쇠퇴하고 횡혈식석실분, 전방후원형고분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 석실은 토착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 지역의 고대 세력이 능동적으로 횡혈식석실분을 채용하면서 사회발전을 모색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영산강유역 옹관고분사회는 6세기 중엽부터 백제의 지방관제에 본격적으로 편입하게 된다.
(나주 시청 문화 관광과)에서 .....
생명의 씨알
나주읍성의 동문인 동점문. 최근 복원한 것이다.
김준태 시인의 나주, 왕건과 버들아씨의 로망스가 숨쉬는 곳<3>
조각으로 재현해놓은 장화왕후.
마치 장화왕후가 왕건에게 물 한모금 대접하는 듯 하다.
신라 천년이 수명을 다하고 새 시대 찬란한 새벽은 다가오는가.
서라벌의 왕과 신하들이 대의를 좇지 않고 바른 도리 잃었으매
하늘도 돕지를 않고 하얀 옷 못난 백성들만 밤낮으로 갈팡질팡
역사가 부르는구나 길 잃은 백성들 민족의 새 영웅을 찾는구나
궁예도 아니고 견훤도 아닌 우리들의 대왕, 왕건을 부르고 있어
여기 후백제 땅 나주고을에 그를 맞을 버들아씨가 기다리고 있네
삼백 리 영산강 휘돌아 가는 금성산 고을에 우리들의 버들아씨
장화왕후 님 살어리 살어리랏네 나주백성들 더불어 살어리랏네
▲호남선 복선화 사업으로 나주역과 영산포역이 통합되어 송월동에 새로 들어선 나주역. KTX가 정차하고 있지만 과거 영산포 거점역
▲ 기념비 전면, 한수제 소공원에서 금성산으로 접어 드는 길목 왼편의 녹지공간에 자리하고 있
어 나무들에 가려 쉬 눈에 띄지 않는다.
기념비 앞에는 벤치와 탁자가 다수있다. 막걸리 잔이라도 기울이면서 선생의 문학이야기로
꽃 피우는 시민들의 모습이 기대되지만...
- 소설가 오유권 주요작품
<두 나그네>(1957) <참외>(1957) <옹배기>(1956) <쌀장수>(1956) <소문>(1957) <돌방구네>(1959) <이역의 산장>(1961) <방아골 혁명>(장편.1962) <가난한 형제>(1963) <기계방아 도는 마을>(1965) <황토의 아침>(장편.1967) <대지의 학대>(1964) <이삭 줍는 사람들>(1967) <여기수(女旗手)>(1969) <과수원집 딸들>(장편.1969) <농지정리>(1970) <영산강>(1982) <병상일기>(1988) <놉>(1988) <샘안집과 시누이>(1997) <너와 나의 정점> <공황> <민촌마을>
(호시탐탐에서 퍼 온글)
첫댓글 (반남 고분)은 죽동가는 길에 있어서 2번이나 답사 했습니다 실제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높고 넓읍니다
광활하다 란 표현이 맞습니다.
내고향 나주땅에 많은역사가 숨어있고 기회가 되면 한바퀴 빙~ 돌리라!!!!
시범어린이 집에서 남쪽방향으로 나주천까지가 금계동 위치이지요, 교통은 서대문서쪽 밖이고, 서수구도 교통에 해당합니다...
시범어린이 집과 우리집은 약70미터 정도 거리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