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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때 | 1771(영조 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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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곳 | 평남 용강 |
죽은 때 | 1812(순조 12). |
소속 국가 | 조선 |
신분 | 농민반란 지도자 |
홍경래의 난의 원인 배경
홍경래의 난은 평안도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입니다. 조선 후기 세도 정치로 사회가 문잔해지고 피폐해지면서 하층민들 사이에서는 사회 개혁을 외치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고 이런 상황에서 몰락한 양반 출신의 홍경래가 우군칙, 김사용, 이희저 등과 함께 서북 지방에 대한 차별을 구실로 1800년부터 반란을 준비했습니다. 10여 년간 치밀하게 준비를 끝낸 후 1811년에 극심한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틈을 타 2000여 명의 반란군을 동원하여 난을 일으켰습니다. 홍경래의 반란군은 가산, 박천, 곽산, 정주, 선천 등 평안도 일대를 열흘 만에 모두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안주로 진군하던 중 토벌군과 맞서 싸우다 패했습니다.
홍경래의 난 결과
홍경래의 반란군은 정주성으로 물러가 4개월에 걸쳐 전투를 벌였지만 토벌군이 화약으로 성을 폭파해 1812년 4월에 완전히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이 때 홍경래는 총에 맞아 죽고, 나머지 주동자들도 모두 처형당했습니다. 홍경래의 난은 다섯 달 동안 평안도 일대를 휩쓴 끝에 실패로 끝났지만 일부 몰락 양반과 중소 상인 그리고 하층민들까지 모두 합세하여 사회 모순을 개혁하고자 했다는 데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는 대대적인 반봉건 투쟁으로 당시 사회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이후 전국 각지에서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전통적인 봉건 지배 체제는 빠른 속도로 붕괴되기 시작했으며, 홍경래의 난은 그러한 변화를 가속화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가지 홍경래의 난의 원인 배경 결과였습니다.
주요내용
★출생과 사망 : 1771(영조 47) 평남 용강~ 1812(순조 12).
☆조선 후기 농민반란의 지도자.
☆홍경래의 난 원인 : 세도정권의 부패정치, 삼정(三政)의 문란 등 사회적 모순에 저항하여 1811년 조선왕조의 전복을 목표로 한 농민반란을 일으켰다.
본관은 남양(南陽),몰락한 양반가문 출신으로 외숙인 유학권(柳學權)에게 글을 배웠다. 1798년(정조 22) 사마시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전국을 떠돌며 술수를 익히고 풍수를 배워 지사(地師) 노릇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이렇게 각지를 유랑하는 동안 지배층의 부패상과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을 체험하면서 사회의 모순을 인식하게 되었다. 1800년(순조 즉위) 박천의 청룡사(靑龍寺)에서 서자 출신인 우군칙(禹君則)을 만나 시국을 논하는 가운데 당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는 우군칙과 함께 변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면서 향촌에서 부를 축적하여 지방유력자로 등장한 계층과 황해도·평안도 일대의 사상인(私商人) 및 조선정부의 지방차별정책으로 관로가 막혀 불만을 품고 있던 양반지식층들에게 접근, 이들을 포섭했다. 그결과 가산역(嘉山驛)의 관리 이희저(李禧著), 곽산의 진사 김창시(金昌始), 장사 홍총각(洪總角)·이제초(李濟初), 태천의 김사용(金士用) 등이 합류하게 되었다. 이들 외에도 각지의 기인(奇人)·도사(道士)·술사(術士)·무인(武人) 등을 계속 규합하는 한편, 가산의 다복동(多福洞)을 근거지로 삼아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또한 자금 마련을 위해 서울의 유력자 김재찬(金載鑽)을 통해 평안감영에서 공납금 2,000냥을 차용하기도 하고, 의주의 인삼상인 임상옥(任尙沃), 정주의 부호 이침(李琛)·김약하(金若河), 안주 상인 나대곤(羅大坤), 송상(松商) 박광유(朴光有)·홍용서(洪龍瑞) 등과도 손을 잡았다. 한편 운산 촉대봉에 광산을 개설하고 광산노동자를 모집한다는 구실로 유랑민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각종 물자와 무기를 구입·제작하여 다복동에 비축해두었다.
1811년 10월경 비밀 거점으로 삼은 가산의 신도(薪島)에서 이듬해 정월에 거병할 것을 결정하고, 주축 세력을 다복동에 결집시켜 군사지도부를 선정했다. 그러나 12월 중순경 움직임이 탄로나자, 12월 18일 거병했다. 농민군은 우선 가산 군아를 습격하여 군수 정시(鄭蓍)를 죽이고, 군대를 남북으로 나누어 각 군읍을 공략했다. 향반층의 내응을 받는 가운데, 북진군은 곽산·정주·선천·태천·철산·용천 등을 점령했고, 남진군은 박천을 점령했다. 그러나 진격목표를 놓고 지도부 내에서 의견이 갈려 4일간 지체하는 사이에 평안도병마절도사 이해우(李海愚) 등의 군사 1,000명이 안주로 들어오고, 중앙에서 파견된 양서순무사(兩西巡撫使) 이요헌(李堯憲)의 정예군도 합세했다. 홍경래는 박천 송림리(松林里)에 진을 치고 군사를 3진으로 나누어 싸웠으나 관군의 초토작전에 밀려 참패하고 정주성으로 물러났다. 1월 중순경 다른 지역들이 관군에게 점령되어 고립된 상태에서 끈질긴 항전과 인근 농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4개월가량 버티었으나, 4월 19일 관군이 성 밑에 굴을 파고 화약을 폭파시켜 성을 무너뜨리고 들어와 농민군은 진압되었으며, 그도 교전중에 총에 맞아 죽었다.
첫댓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