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21
나는 이과대에 다니기 때문에 스페이스21 건물은 늘 익숙한 공간이다. 강의를 듣기 위해, 과방에 가기 위해, 과제를 하기 위해선 항상 단과대 건물 안에만 있다. 하지만 한의대와 이과대 건물 ‘사이’에 있는 공간에 대해서는 그동안 크게 의식해 본 적이 없었다. 기숙사에서 이과대, 이과대에서 기숙사 이 두 루트만 반복하기 때문에 노천극장 쪽에서 스페이스21 건물을 바라보는 경우보단 대운동장 쪽에서만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얼마 전, 같은 과 선배와 저녁 산책 겸 캠퍼스 투어를 하던 중에 처음으로 스페이스21 건물 사이 계단을 제대로 마주하게 되었다. 해가 지고 난 뒤의 캠퍼스는 낮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낮에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분주한 공간이었다면, 저녁이 되면 그 자리에 고요함이 내려앉는다. 낮이었다면 분명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을 공간이다. 하지만 어둑해진 시간, 건물사이에 놓인 계단과 은은한 조명은 묘하게 또렷하게 드러났다.
이 계단은 본래 이동을 위한 공간이다. 누군가는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 빠르게 올라갈 것이고, 누군가는 강의를 마치고 내려오며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하지만 그날의 나는 그 흐름에서 잠시 벗어나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 이유도, 서둘러야 할 필요도 없는 상태에서 이 계단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 공간이 단순한 통로가 아니라 ‘머물 수 있는 장소’로 느껴졌다. 특별히 생각을 정리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고, 감정이 크게 요동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순간 마음이 차분해졌다. 하루 동안 쌓여 있던 사소한 생각들이 조금씩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평소에는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계속 무언가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그 흐름이 잠시 멈춘 것 같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계단이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온 이유는 ‘사이에 있는 공간’이기 때문인 것 같다. 이곳은 출발점도 아니고 도착점도 아니다. 그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는 과정 속에 놓여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잠시 머무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나는 평소에도 무언가를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쉽게 긴장하는 편이다. 수업을 들을 때도, 과제를 할때도, 사람을 만날 때도 늘 어느 정도의 긴장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계단에서는 그런 감정이 자연스럽게 풀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고, 잠시 멈춰 있어도 괜찮다고 느껴진다. 이 공간이 나에게 주는 가장 큰 의미는 바로 그 점인 것 같다. 그날 이후로 나는 이 계단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다. 여전히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에 지나치기도하고, 별다른 생각 없이 오르내릴 때도 있다. 하지만 가끔은 일부러 속도를 늦추고, 잠시 멈춰 서 보기도한다. 같은 공간이지만,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때문이다.
마침 성찰과 표현 수업에서 나만의 장소를 떠올렸을 때, 딱 그 날이 생각났고 다시 스페이스21 계단을 가보게 되었다. 낮의 그곳은 또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분주한 공간이었다. 계단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특별히 눈에 띄는 장소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공간도 아닐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학교를 다니며 이 계단을 수없이 지나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가끔은 걸음을 멈추고, 그날 저녁 처음 느꼈던 고요함을 다시 떠올려 보고 싶다. 이곳은 어디로 가기 위한 길 위에 있지만, 동시에 잠시 머물러도 괜찮은 곳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