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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대 연표(음력) 나이 추가 보완판
*출전: 김슬옹(2007). 28자로 이룬 문자혁명 훈민정음. 아이세움. 249-254쪽.
* 김슬옹(2013). 세종, 한글로 세상을 바꾸다. 창비.
1397년 4월 10일(양력 5월 15일, 태조 6년) 한양 준수방(지금의 서울 통인동 137번지 일대) 잠저에서 정안군(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다.
1418년 6월 3일(태종 18년, 22세) 세자인 형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하다.
1418년 8월 8일(세종 즉위년 22세)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앉고 22세의 세자(세종)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다.
1418년 8월 11일(세종 즉위년 22세) 근정전에서 즉위 교서를 발표하다.
1418년 10월 7일(세종 즉위년, 22세) 첫 경연을 열고, 경연관들의 <대학연의> 강론을 듣고 과거 방식과 인재 선발 문제에 대해 논의하다.
1418년 12월 25일(세종 즉위년 22세) 정도전이 첨삭한 『고려사』를 고쳐 짓게 하다.
1419년 2월 25일(세종 1년 23세) 기자箕子(고조선 때에 있었다고 하는 전설상의 기자조선의 시조)의 비석을 세우게 하다.
1419년 6월 17일(세종 1년 23세) 삼군도체찰사 이종무가 227척의 배와, 1만 7285명의 군사를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하다.
1419년 9월 20일(세종 1년 23세) 변계량 등에게 『고려사』를 고쳐 쓰게 하다.
1420년 3월 16일(세종 2년 24세) 집현전을 확장하여 영전사, 대제학, 제학, 부제학, 직제학, 직전, 응교, 교리, 부교리, 수찬, 부수찬, 박사, 저작, 정자 등의 관원을 두다.
1420년 10월(세종 2년 24세) 동활자 경자자(경자년에 만든 활자)를 만들기 시작하다.
1421년 1월 30일(세종 3년 25세) 유관과 변계량이 교정한 『고려사』를 세종에게 바치다.
1421년 3월 24일(세종 3년 25세) 주자소에서 경자자를 완성하고, 이천과 남급으로 하여금 인쇄술을 개량하게 하여 하루 수십, 수백 장을 찍을 수 있게 되다.
1421년 7월 2일(세종 3년 25세) 서운관에 있던 『천문비기天文秘記』를 궁중으로 옮기다.
1421년(세종 3년 25세) - 1422년 남양부사 윤사웅, 부평부사 최천구, 동래 관노 장영실을 중국으로 유학 보내다.
1422년 1월 21일(세종 4년 26세) 신문고의 절차와 처벌 규정을 보완하다.
1423년 12월 29일(세종 5년 27세) 춘추관의 유관, 윤회에게 『고려사』를 고쳐서 다시 짓게 하다.
1424년 11월 18일(세종 6년 28세) 악기도감을 설치하고, 생笙․화和․우芋 등의 악기를 만들다.
1424년 11월 24일(세종 6년 28세) 지조소(종이를 만드는 곳)에서 호절지蒿節紙․․송엽지松葉紙 등을 만들다.
1425년 2월 2일(세종 7년 29세) 처음으로 동전을 만들어 사용하다.
1425년 2월 24일(세종 7년 29세) 박연의 건의에 따라 악학 관련 문신을 두어 악서를 짓게 하다.
1425년 7월 7일(세종 7년 29세) 왕지王旨를 ‘교지’라 고쳐 부르다.
1425년 8월 26일(세종 7년 29세) 남양에서 나는 돌로 ‘석경’이라는 악기를 만들게 하다.
1425년 9월 25일(세종 7년 29세) 평양에 단군 사당을 세우게 하다.
1425년 11월 2일(세종 7년 29세) 경상감사 하연이 『입학도설入學圖說』, 사서四書 등을 지어 올려, 이를 사부 학당에 나누어 주다.
1425년 11년 8일(세종 7년 29세) 주자(쇠붙이를 녹여 부어 만든 활자)로 인쇄한 사마천의 『사기』를 문신들에게 나누어 주다.
1426년 4월 17일(세종 8년 30세) 관노비의 첩이 아이를 낳으면 휴가를 기존의 7일에 백일간을 더 주게 하다.
1426년 9월 22일(세종 8년 30세) 여진어에 능한 자를 사역원에 속하게 하여 야인관 통사로 삼다.
1426년 12월 11일(세종 8년 30세)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는 이를 뽑아 사가 독서(집이나 절에서 국비로 연구하는 제도)를 하게 하다.
1427년 5월 15일(세종 9년 31세) 박연이 남양에서 나는 돌로 1틀(12개)의 편경을 만들다. 박연이 석경을 만들어 바치다.
1427년 9월 11일(세종 9년 31세) 『향약구급방(고려시대 1236년, 고종 23년경에 최초 간행 추정)』을 인쇄하여 널리 알리게 하다.
1428년 윤 4월 1일(세종 10년 32세) 경상도에서 인쇄하여 바친 중국의『성리대전』 50부를 문신들에게 나누어 주다.
1428년 9월 25일(세종 10년 32세) 신백정(천민 계급에 대하여 관아에서 내린 칭호)을 평민과 함께 군사 인원으로 뽑다.
1429년 4월 22일(세종 11년 33세) 강원도에서 『사서대전』 50건을 인쇄하여 바치다.
1429년 5월(세종 11년 33세) 정초 등에게 명하여 『농사직설』을 짓게 하다.
1430년 2월 14일(세종 12년 34세) 정초 등이 지은 『농사직설』을 각 도에 배포하다.
1430년 3월 5일(세종 12년 34세) 새로운 공법(토지세법)에 대한 여론 조사를 지시하다.
1430년 8월 10일(세종 12년 34세) 호조에서 새로운 공법(토지 세금법)에 대한 여론 조사 결과를 보고함(17만 여명의 백성들이 투표에 참여하여, 9만 8,657명이 찬성, 7만 4,148명이 반대).
1430년 10월 25일(세종 12년 34세) 상정소(詳定所)에서 관청에서 복무하는 여종이 아이를 낳을 달과 낳은 후 백 일 동안 휴가를 건의하여 시행하게 하다.
1430년 윤12월 1일(세종 12년 34세) 정인지 등이 『아악보』를 완성하다.
1431년 3월 2일(세종 13년 35세) 명나라에 유학생(김한, 김자안)을 보내 산법(산수)을 배우게 하다.
1431년 5월 11일(세종 13년 35세) 주자소에서 『직지방直指方』,『상한류서傷寒類書』,『의방집성醫方集成』,『보주동인경補註銅人經』등을 인쇄하게 하다.
1431년 6월 23일(세종 13년 35세) 조서강과 권극화에게 『대명률』을 상정소에서 이두로 번역해 풀이하게 하다.
1431년 11월 4일(세종 13년 35세) 충신도를 모아서 기록하게 하다.
1431년 12월(세종 13년 35세) 노중례 등이 『향약체취월령鄕樂採取月令』을 편찬하다.
1432년 1월 19일(세종 14년 36세) 맹사성 등이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를 편찬하다. 화포火砲를 비치하여 유사시에 대비하다.
1432년 6월 9일(세종 14년 36세) 집현전 부제학 설순이 효자, 열녀, 충신 100인의 행적을 그리고 사실을 기록한 뒤 시를 붙인 『삼강행실』를 편찬하다.
1432년 가을(세종 14년 36세) 천문관측소 간의대簡儀臺를 만들다.
1432년 10월 12일(세종 14년 36세) 평민들과 섞여 살면서 군역을 치루고 있는 신백정 자제에게 향학鄕學에 입학하는 것을 허가하다.
1433년 1월 1일(세종 15년 37세) 회례연에서 편경 연주를 듣고 아홉 번째 줄소리가 약간 높음을 박연에게 지적하다.
1433년 4월 26일(세종 15년 37세) 최윤덕 등이 15,000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압록강변의 여진족 이만주李滿住를 토벌하다.
1433년 6월 9일(세종 15년 37세) 정초, 박연, 김진 등이 혼천의를 만들다.
1433년 6월 11일(세종 15년 37세) 집현전 직제학 유효통, 전의典醫 노중례, 부정副正 박윤덕 등이 우리나라 질병과 풍토에 적합한 한의학 책 『향약집성방』 85권을 집필하다.
1433년 9월 16일(세종 15년 37세) 장영실이 자격궁루自擊宮漏를 만들다.
1434년 3월 5일(세종 16년 38세) 노중례에게 명하여 『태산요록(胎産要錄)』을 편찬하게 하고, 주자소로 하여금 인쇄하여 반포하게 하다.
1434년 4월 26일(세종 16년 38세) 아기 낳는 여종의 남편에게 30일 휴가를 주게 하다.
1434년 4월 27일(세종 16년 38세) 『삼강행실』을 인쇄하다.
1434년 6월(세종 16년 38세) 밀양에서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를 간행하다.
1434년 6월 24일(세종 16년 38세) 장영실 등이 자격루를 만들다.
1434년 7월 1일(세종 16년 38세) 장영실 등이 만든 새 누기漏器(물시계)를 사용하다.
1434년 7월 2일(세종 16년 38세) 이천이 총감독(김돈, 김빈, 장영실, 이세형, 정척, 이순지 등 참여)하여 인쇄판과 글자에 관한 법을 개량하고, 새 활자인 갑인자甲寅字를 만들다. 진양대군 이유(훗날 세조)가 글씨를 써 20여만 자를 만들어 하루에 40장까지 인쇄하여 예전보다 인쇄가 갑절 쉬어지다.
1434년 7월 16일(세종 16년 38세) 갑인자로 『자치통감』을 간행하다.
1434년 10월 2일(세종 16년 38세) 처음으로 앙부일구(오목 해시계)를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해 시간을 알게 하다.
1435년 9월 12일(세종 17년 39세) 주자소를 경복궁 안으로 옮기다.
1435년 10월 19일(세종 17년 39세) 목판을 구주자소舊鑄字所에 두고 교서관校書館에서 관리하게 하다.
1436년 4월 4일(세종 18년 40세)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를 편찬하여 인쇄, 배포하다.
1436년 12월(세종 18년 40세) 백과전서인『운부군옥韻府群玉』을 간행하다.
1436년 12월(세종 18년 40세) 『자치통감강목훈의』를 인쇄하기 위해 수양대군 유에게 글을 쓰게 하고 납 활자 병진자丙辰字를 만들다.
1437년 4월 15일(세종 19년 41세) 정초․장영실․김빈 등이 시계의 일종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현주일구懸珠日咎․행루行漏․천평일구天平日咎 등을 새로 만들다.
1437년 7월 23일(세종 19년 41세) 각 도 감사에게 명하여 『농사직설』 등을 활용해 농사짓는 법을 백성에게 권장하게 하다.
1438년 1월 7일(세종 20년 42세) 대호군 장영실이 흠경각(천문 시계인 ‘옥루’를 설치한 곳)을 완성하고 천체를 관측하다.
1439년 1월 13일(세종 21년 43세) 강화의 왜닥씨를 충청도 태안, 전라도 진도, 경상도 남해․하동에 나누어 심게 하여 종이 원료의 생산을 확대하다.
1439년 7월 3일(세종 21년 43세)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에 사고史庫(국가의 중요한 책을 보관하는 곳)를 짓게 하다.
1441년 3월 17일(세종 23년 45세) 거리 측정 장치가 붙은 기리고차記里鼓車를 만들어 사용하다.
1441년 6월 28일(세종 23년 45세) 정인지에게 『치평요람治平要覽』을 편찬하게 하다.
1441년 8월(세종 23년 45세) 양수표(강이나 저수지 따위의 수위를 재기 위해 설치하는 눈금이 있는 표지)를 세우다.
1441년 8월 18일(세종 23년 45세) 세자(이향, 훗날 문종)의 아이디어로 장영실 등으로 하여금 측우기를 만들게 하다.
1441년 9월 29일(세종 23년 45세) 이선, 박팽년, 이개 등이 명을 받아 『명황계감明皇誡鑑』을 짓다.
1441년 10월 18일(세종 23년 45세) 『직해소학直解小學』 200본을 인쇄하여 향교와 문신에게 나누어 주다.
1442년 5월 8일(세종 24년 46세) 비의 양을 측정하는 제도를 마련하다.
1442년 8월 12일(세종 24년 46세) 신개, 권제 등이 『고려사』를 지어 올림.
1442년 9월 30일(세종 24년 46세) 집현전에 명하여 행정 제도에 관한『사륜전집絲綸全集』을 편찬하도록 하고, 정인지로 하여금 『사륜전집絲綸全集』을 요약한『사륜요집絲綸要集』을 편찬하게 하다.
1443년 4월 17일(세종 25년 47세) 세자에게 정치를 하게 하다.
1443년 12월 (세종 25년 47세) 훈민정음을 창제하다.
1444년 2월 16일(세종 26년 48세) 집현전에 명하여 『고금운회古今韻會』를 언문으로 풀어 쓰도록 하다. 집현전 교리 최항, 부교리 박팽년, 부수찬 신숙주, 이선로, 이개, 돈령부 주부 강희안 등에게 명하여 의사청議事廳에 나아가 언문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고, 동궁東宮과 진양대군(훗날 수양대군) 유柔, 안평대군 용瑢으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하다.
1444년 2월 20일(세종 26년 48세)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신석조, 김문, 정창손 등과 더불어 훈민정음 관련 갑자상소문을 올림.
1445년 1월 7일(세종 27년 49세) 신숙주, 성삼문, 손수산을 요동에 보내 운서韻書를 질문하여 오게 하다.
1445년 3월 30일(세종 27년 49세) 정인지 등이 『치평요람』을 만들다. 이순지 등이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編』 등을 편찬하다.
1445년 4월 5일(세종 27년 49세) 권제, 정인지, 안지 등이 『용비어천가』 10권(시가 총 125장)을 지어 올림.
1445년 10월 27일(세종 27년 49세) 3년에 걸쳐 365권으로 편찬된 의학백과사전 『의방유취醫方類聚』가 완성되다.
1446년(세종 28년 50세) 12율의 기본음인 황종율黃鐘律을 낼 수 있는 정확한 황종관黃鐘管을 만들고, 그 길이를 기준으로 영조척營造尺(목수가 쓰던 자)을 만들다.
1446년 9월 상순(세종 28년 50세) 훈민정음 해설서인『훈민정음』(해례본)을 완성하여 펴냄.
1446년 10월 10일(세종 28년 50세) 임금이 대간臺諫의 죄를 일일이 들어 훈민정음으로 써서, 환관 김득상에게 명하여 의금부와 승정원에 보이게 하다.
1446년 10월 11일(세종 28년 50세) 이계전과 어효첨에게 명하여 『고려사』를 고쳐 짓게 하다.
1446년 11월 8일(세종 28년 50세) 언문청을 설치하다.
1446년 12월 26일(세종 28년 50세) 이과吏科와 이전吏典 등의 하급 관리 시험에 『훈민정음』(해례본)을 시험 과목으로 정하다.
1447년 4월 20일(세종 29년 51세) 관리 시험에 먼저 『훈민정음』(해례본)을 시험하여, 합격한 자에게만 다른 시험을 보게 하다.
1447년 6월 4일(세종 29년 51세) <용비어천가><여민락><취화평><취풍형> 등의 음악을 잔치에 사용하게 하다.
1447년 7월(세종 29년 51세) 세종의 명으로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석보상절 釋譜詳節』을 저술함(간행은 1449년).
1447년 7월(세종 29년 51세) 세종이 직접 훈민정음으로『월인천강지곡』을 저술하다(간행은 1449년).
1447년 9월 (세종 29년 51세) 신숙주 등이 『동국정운』,『사성통고』를 편찬하다.
1447년 10월 16일(세종 29년 51세) 『용비어천가』 550본을 신하들에게 내려 주다.
1448년 3월 28일(세종 30년 52세) 김구에게 언문으로 사서를 번역하게 하다.
1448년 7월(세종 30년 52세) 좌의정 하연 등을 빈청賓廳에 불러, 환관 김득상과 최읍으로 하여금 언문서諺文書 두어 장을 가지고 오게 한 뒤, 사신史臣을 물리치고 비밀히 의논하다.
1448년 10월 17일(세종 30년 52세) 『동국정운』을 성균관․ 사부학당 및 각 도에 내려 주다.
1449년 1월 28일(세종 31년 53세) 『고려사』를 고쳐서 다시 짓도록 명하다.
1449년 10월 5일(세종 31년 53세) 어떤 사람이 하정승을 비난하는 언문 글을 벽위에 쓰다.
1449년 12월 11일(세종 31년 53세) 수양대군이 지은『석보상절』, 세종이 지은『월인천강지곡』을 간행하다.
1449년 12월 11일(세종 31년 53세) 세종 스스로 신악新樂의 가락을 조정하다.
1449년 12월 28일(세종 31년 53세) 신숙주 등이 교열한 운서에 대해 한양에온 중국 사신들에게 신숙주, 성삼문 등으로 하여금 태평관太平館에 오가게 하며 질문하게 하다.
1450년 윤 1월 3일(세종 32년 54세) 직집현전直集賢殿 성삼문, 응교應敎 신숙주, 봉례랑奉禮郞 손수산에게 명하여 운서를 중국 사신에게 묻게 하다.
1450년 2월 17일(양력 4월 8일, 세종 32년, 54세) 세종대왕이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의 집 동별궁東別宮에서 세상을 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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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0년(문종 즉위년) 6월 12일, 세종 유언에 따라 소헌 왕후 심씨가 안장된 영릉(당시 광주, 지금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무덤인 헌릉 서쪽 산줄기에 있었음) 서쪽방에 합장함.
1451년(문종 원년) 8월 25일, 김종서 등이 『고려사』 편찬을 끝냄.
1452년(문종 2년) 2월 20일, 세종대왕의 신도비를 영릉(당시 광주)에 세움.
1469년(예종 1년) 3월 6일, 세종의 영릉(당시 광주, 지금 내곡동)을 지금 여주(당시 여흥) 자리로 옮김.
첫댓글 세종 연표 많은 도움됩니다. 고전 뒤지고 어쩌고 할 것도 없이 한눈에 다 볼 수 있게 해놓으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한울벗님 이름 멋져요
안녕하세요! 위에 년보에서 잘못표기된 부분이 있어 수정요청합니다."1444년 2월 20일(세종 26년 48세)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신석조, 김문, 정창손 등과 더불어 훈민정음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림." 훈민정음에 반대한다는 제하(題下)는 그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갑자상소 또는 諺文造語論故라고해야 옳습니다. 분명한것은 당시에 세종임금께서는 중국의 제후국임을 자인하시며 사대를 하셨던 분이고, 더욱이 중화사상에 심취하셨다는 것은 세종실록을 보시면 알것 입니다. 그러다보니 문자는 같은데 말이달라 서로소통하기가 어려운것에 착안하시어 발음기호를 만드시고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소리 (훈민정음)이라고 이름도 지으셨던것입니
다. 저는 생각합니다. 세종임금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를 바라게 알고 후학들에게 역사는 바르게 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세종임금의 업적을 높이기위해서 세종조 청백리 12중에 으뜸인 최만리선생을 무조건깍아내리고 폄훼하는것은 적절치 않은것입니다. 그는 다름아닌 세종임금의 신임이 두터웠던 신하인것 입니다. 세자의 스승이기도 하였고요. 하오니 카페담당자분께서는 참고하여주시기 바랍니다.
海州后人 脫凡 崔榮吉 드림
청백리 선생님 말씀도 옳습니다. "언문 관련 갑자상소를 올림"으로 고치겠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갑자상소 덕에 훈민정음 관련 역사의 진실이 많이 드러났습니다. 최만리 선생은 청백리이자 위대한 학자요 관리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