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안씨 제2파>
파조 영린(永麟)
子 정준(貞俊)
子 성철(成哲)
三子 문개(文凱)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증 진한국부인(贈辰韓國夫人)
정씨(鄭氏) 묘지명(墓地銘) 병서(並書)
부인 정씨(鄭氏)는 본관이 진주(晉州)이다. 아버지는 고려 수성협모 찬리공신(高麗輸誠協謀贊理功臣) 중대광(重大匡) 도첨의찬성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都僉議贊成事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인데, 시호는 문량공(文良公), 휘는 을보(乙輔)이며, 조부는 삼사 부사(三司副使)이고, 휘는 연(椽)이며, 증조부는 내부령(內府令) 휘 수규(守珪)이다.
외조부(外祖父)는 순흥부원군(順興府院君)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안공(安公)인데 휘는 문개(文凱)이다. 지금의 정헌대부(正憲大夫) 검교참찬 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 박공 가흥(朴公 可興)의 아내이며, 지신사(知申事) 석명(錫命)의 어머니다.
아버지 문량공(文良公)은 덕행과 문장이 한때에 중시되었다. 부인은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법도 있는 가정에서 자라나서 말하고 행동함을 반드시 예법에 따랐다. 혼기가 차매 배필을 가려 박씨(朴氏)에게 출가하여, 집 다스리기를 부지런히 하고 검소하게 하며 공궤(供饋)를 주관하되 정성껏하였다. 시부모를 효도로 섬기고 지아비를 의리(義理)로 섬겼고, 일에 따라 조용히 간했으며, 친척간에 궁핍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도와 주었다. 참찬공(參贊公)이 흉액을 만나서 두 번이나 억울한 죄과에 걸렸을 때에 부인(夫人)이 정성을 다하여 구해 냈으나, 화가 쌓여 병이 되어서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을해년 6월 15일에 죽으니 나이 50이요, 양릉(陽陵)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 7년 뒤인 신사(辛巳)에 지신사가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므로 참찬공에게 종신토록 녹을 주게 되었고 부인에게도 진한(辰韓)의 호를 추증하였다.
아들이 하나요 딸이 여섯이었는데 아들은 곧 지신사(知申事)이다. 비록 외아들이어서 매우 사랑했으나 가르침에는 심히 근엄하여서, 언제나 선비 10여 명을 그 사숙에 데려다가 함께 글을 읽게 하고, 부인은 음식을 만들어 먹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능히 학문이 이루어졌으며 20세 미만에 진사(進士)에 오르고 거듭 좋은 벼슬을 거쳐서 신사년에는 성균관(成均館) 시험을 관장하였었다. 우리 전하(殿下)를 도와서 공신(功臣)에 참예했으며 오랫동안 중추 기관을 담당하여 깨우쳐 북돋움이 많았으므로 안팎의 어진 친구들은 더 크게 성공할 것을 바랐으니, 부모(父母)의 가르친 공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큰딸은 모관(某官) 모(某)에게 시집갔으나 먼저 죽었고, 둘째는 모관 모에게, 셋째는 모관 모에게, 넷째는 모관 모에게, 다섯째는 모관 모에게, 여섯째는 모관 모에게 시집갔고, 손자는 약간 명이다. 지신사(知申事)는 모관 모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두었으니, 큰아들의 이름은 거비(去非)인데 모관(某官)이고 둘째 아들은 아직 어리다. 형조(刑曹)가 두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은 송수(松壽)와 송몽(松夢)이다.
영락(永樂) 2년 갑신 여름에 지신사(知申事)가 나에게 묘명(墓銘)을 청하니, 세교(世交)의 집안이요 또한 동맹(同盟)의 정의가 있기에 사양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옛날에 선정(先正) 문량공(文良公)이 계셨는데
지금까지도 선비들이 높은 풍도 기리네.
아름다운 따님 맑고도 공손하더니
덕문(德門)에 시집가서 부덕을 닦았네.
가숙(家塾)에 선비 맞아 풍성히 대접하여
아들을 가르쳐서 경술(經術)에 능통했네.
때를 만나 등용되어 현달했으니
이어가는 경사 한없이 흐를 것을
유궁(幽宮)에 새긴 나의 글이 후세에 밝혀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