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일과 놀이
☞ 사람들이 행하는 일상적 활동 중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일과 놀이이다. 일은 미래에 발생할 이익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을 말하며, 놀이는 당장에 발생하는 쾌락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을 말한다. 사람들인 일과 놀이 중에서 어느 것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연령, 성격, 취향 등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유아기나 아동기에는 놀이가 일상적 활동의 중심을 이루다가, 성인으로 성장해 가면서 차츰 일이 일상적 활동의 중심을 이룬다.
☞ 사람들은 좁은 의미에서 일을 주로 생업과 관련된 생산 활동으로 인식한다. 즉 그들은 직장에서 업무를 보거나, 논이나 밭에서 농사를 짓는 것과 같은 활동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은 생활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이익의 발생과 관련된 것으로 심신의 집중적인 노력이 요구되기 때문에 쾌락의 발생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러한 형태의 일을 수행하는 것을 특별히 '노동'이라고 구별하여 부른다. 노동은 생산 활동과 직접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에 일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 놀이는 현재에 발생하는 쾌락을 위해 계획되고 추진되며,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이러한 목표가 달성될 수 있도록 절차와 과정을 자유롭게 조정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현재에 발생하는 쾌락의 여부에 따라 절차와 과정을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어야 지속적인 쾌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로 놀이가 진행되는 과정에도 일처럼 긴장․집중․인내 등이 수반되고, 이로 인해 강한 구속과 고통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으로 그친다. 놀이에 따르는 구속과 고통이 지속적인 불쾌감을 유발할 정도가 되면 놀이 자체를 포기하여 그것을 해소해 버리기 때문이다.
☞ 건강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일과 놀이가 균형을 갖춰야 한다. 사람들은 수고로운 일의 과정을 통해서 생활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확보하는 반면에, 여유로운 놀이의 과정을 통해서 심신의 휴식과 즐거움을 얻는다. 이런 관계로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오로지 그것에만 매달리게 되면 긴장과 고통만이 연속된 삶이 되어 몸과 마음에 병이 발생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 놀이적 요소를 부과하여 일과 놀이를 동시에 추구함으로써 일에서 초래되는 긴장과 고통을 완화해 보려고 노력하게 된다. 일터에서 불리는 노동요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 사람들 중에는 일과 놀이 중에서 어느 한쪽에 강박적으로 몰입하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한 쪽에 일방적으로 몰입하는 것은 정신적 균형이 깨졌기 때문이다.
▶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사람을 일 중독자라고 부른다. 그들은 미래에 발생할 이익에 집착하여 극도로 일에 열중한다. 그들이 일에 열중하는 것은 일을 수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칭찬, 명예, 승리, 이익 등에 의존하여 만족과 안정을 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한 상태에 빠지는 금단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관계로 그들은 비록 일이 심신을 병들게 하는 심각한 상황에 처해도 그것을 중단하지 못한다.
▶ 놀이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사람을 놀이 중독자라 한다. 그들은 현재에 발생하는 쾌락에 강박적으로 집착하여 극도로 놀이에 열중한다. 그들이 놀이에 열중하는 것은 쾌락에 대한 강한 욕구를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놀이를 통해서 얻는 강한 쾌락은 마약을 사용하여 얻는 쾌락과 유사하다. 그들은 놀이를 하지 않으면 심신이 불안한 상태에 빠지는 금단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그들은 놀이에 열중함으로써 일에 대한 책임을 소홀히 하게 되어 강한 심리적 부담을 갖게 된다. 일을 태만히 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따르기 때문이다.
☞ 한국인이 살아가는 경쟁적 삶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인과 놀이문화의 변천을 살펴보면서 그 규칙을 분석하여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놀이의 규칙은 규범의식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놀이를 단순히 놀이 자체로서만 논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 속에서의 놀이문화의 성격을 살피는 것이 오늘날 한국인이 놀이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한국인의 놀이문화를 탐색하는 이유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 한국인은 놀이를 이해할 때 너무 당위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대중적으로 널리 행해지는 놀이조차 그것의 정당성을 논하는 일이 많으며, 특정한 놀이가 대중적으로 널리 행해지는 것은 삶이 그러한 형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을 간과해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놀이 자체를 가지고 시비나 가부를 논하기 때문에 '고스톱 망국론'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이 망하면 국민들이 고스톱을 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사회 환경 때문이다.
② 한국인은 놀이를 이해할 때 그것 자체로서의 사회적 효용성을 너무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놀이를 괜한 시간 낭비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비난은 놀이가 갖는 생산적 성격을 도외시하고 소비적 성격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놀이는 휴식을 제공하고 심신의 재충전을 가능하게 하고, 복잡한 삶의 세계를 축약하여 경험하는 모의경기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③ 한국인은 놀이를 이해할 때 놀이와 일을 단절시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관계로 일의 세계와 놀이의 세계를 너무 구분하려 한다. 이는 일의 장소에 놀이적 요소를 도입하거나, 놀이의 장소에 일의 요소를 도입하면 대단히 부자연스럽다. 따라서 사람들은 미친 듯이 일하고 미친 듯이 놀려고 한다. 이로 인해 일상적 형태의 만남이나 사교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④ 한국인은 오락과 도박을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관계로 어떤 사람은 화투놀이나 포커놀이를 배우면 도박꾼이 되는 것으로 오해해 아예 배우는 것 자체를 두려워한다. 도박꾼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긴장된 쾌락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일반인들은 화투놀이나 포커를 배워도 도박꾼이 되지 않는다.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단순히 놀이로서 또는 제한된 범위의 도박으로서 그것에 참여한다.
2 . 한국인의 놀이문화
1) 한국인과 놀이문화의 변천
가. 전통적 놀이문화
☞ 한국인은 고대로부터 집단적으로 어울려 음주가무를 좋아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삼한의 시월제 등과 같은 국중대회에는 씨족이 모여 하늘에 감사와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여러 날 동안 먹고 마시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놀았다. 이러한 놀이를 통해 내부적 결속을 도모하고 외부적 위협에 대응한 것이다.
☞ 삼국시대 지배층 남자들에게 있어서의 일과 놀이의 관계는 신라의 화랑도에 관한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화랑들은 무예와 학문과 놀이를 일체화시켜 심신을 수련하는 독특한 방법을 통해 전문적 전사로 양성되었다. 그들은 스승을 모시고 산수를 유람하며 노래와 춤을 추면서 도의와 무예를 연마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지배층의 역할이 전문화하면서 승려, 문사, 무사가 엄격하게 구분되기 시작하였다. 사원교육을 통해서 승려가 양성되고, 국학과 독서삼품과를 통해 문사가 양성되자 통합적 방법으로 운영되던 화랑도의 전통이 빛을 잃게 된 것이다.
☞ 고려시대에는 국가적 규모의 불교적 행사인 연등회, 팔관회 등과 연관하여 지배층은 물론이고 피지배층을 대상으로 많은 종류의 놀이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문무 관료들을 중심으로 시회(詩會), 활쏘기, 격구, 수박회, 전렵 등의 놀이가 행해졌다.
☞ 조선시대 선비들은 놀이가 일을 보조하는 방편으로 이용되는 경우에만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들은 개인적 수양의 차원에서 시를 배우고, 짓고, 노래하는 것을 즐겼다. 또한 화살을 병에 던져 넣어 승부를 가리는 투호를 즐겼는데, 이는 몸과 마음을 하나로 집중하여 행하는 투호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기 때문에 정신 수양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그들은 통치의 차원에서 예법에 따라 음악과 연회를 즐기고, 술 마시고 활을 쏘는 것을 즐겼다.
☞ 조선시대 선비들이 일 이외의 방식으로 심신의 힘을 발산한 통로는 대개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선비들은 성의 쾌락을 즐길 수 있는 첩문화, 기생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들은 자녀의 생산이라는 명분에 바탕하여 성적 쾌락을 적극적으로 추구할 수 있었다. 즉 집에서는 첩을 거느리고, 밖에서는 기생을 거느리면서 성적 쾌락을 충족시키는 중요한 통로가 활용하였다. 또한 이들은 철저한 남존여비 사회를 만들어 여성들이 그것을 거부하거나 항의하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것을 통해 그들은 도리러 첩이나 기생을 거느리는 것을 권위를 높여주는 것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풍조는 식민지 시기를 지나 195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능력 있는 남자들은 첩을 거느려야 사내구실을 제대로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② 선비들은 음주의 쾌락을 즐길 수 있는 술 문화를 발전시켰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도입된 이래 술을 금기시하는 불교의 영향으로 술 문화가 위축된 대신에 차를 마시는 다(茶)문화가 발전하였다. 명절에 지내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차례라고 하는 것도 차를 올리는 것에서 연유하였다. 그런데 유교국가인 조선 왕조의 출발과 함께 술에 대한 불교적인 부정적 인식이 불신되면서, 일상생활과 상, 제례에 차를 대신하여 술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들은 공통으로 먹는 음식에 대해서는 검소함을 강조하였으나 자신들만이 즐기는 음주에 대해서는 매우 자유로웠다. 그들은 음주를 통해 음식에 대한 풍요로움을 즐겼고, 음주를 남자의 호기로 자랑하였다.
③ 선비들은 문사로서의 정신적 쾌락을 누릴 수 있는 문학․서예․회화와 같은 예술을 발전시켰다. 정신을 풍요롭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문학에 대한 교양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문학 중에서도 특히 성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시를 중시하였다. 이와 함께 문학적 감흥을 시각적 예술로 표현하는 서예와 회화 또한 대단히 중시하였다. 그들은 문학과 서예와 회화가 높은 예술적 경지에 이른 사람을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이라고 불렀다.
☞ 선비들이 일의 무대에서 전개한 관직 경쟁과 학문 논쟁도 다분히 놀이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다. 특히 그들이 정파 또는 학파를 구성하여 집단적으로 갈등한 것은 놀이와 유사하여, 그들은 관직 경쟁을 모형화한 승경도라는 놀이를 만들어 행하였다.
☞ 조선시대에는 일상적 놀이 문화가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연히 놀잇감이 발달하지 못하였다. 어린이들이 실내에서 가지고 노는 장난감은 단순한 형태의 인형과 같은 것이 고작이었다. 어린이들이 실외에서 사용하는 놀이 도구에는 팽이․연․썰매 등이 있을 뿐이었다. 청소년 이상의 남자가 사용하는 놀이 도구는 윷․장기․바둑․투호 등이 있었으며, 처녀들이 사용하는 놀이 도구에는 윷․널․그네 등이 있었고, 부인들이 사용하는 놀이 도구는 윷이 고작이었다. 양반층의 부녀자들은 놀이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어 옷을 치장하는 애장물을 노리개 삼아 즐겼다.
나. 개화기 이후의 놀이문화
☞ 개항을 시작으로 서구의 문물들이 소개되고, 기존의 제도들이 대대적으로 개혁되면서 삶의 모습이 빠른 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도와 과거제도가 폐지된 가운데, 일반 백성에게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한글 신문이 발행되고, 새로운 지식을 전하는 한글 서적들이 간행되자, 이러한 변화가 한층 빨리 진행되었다. 이때부터 이야기를 읽는 재미를 제공하는 전래소설과 신식소설이 대량으로 출판되었고, 이와 더불어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 의해 다른 나라의 놀이가 소개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으로부터 화투놀이가 전해졌고, 서구로부터 농구․배구․축구 등이 전해졌다. 화투놀이는 주로 투기적 노름으로 행해진 반면에, 구기는 주로 학생들의 신체를 단련하는 수단으로 행해졌다.
☞ 대한제국이 망하고 식민지 시대로 접어들면서 선교사, 유학생, 일본인 이주자 등에 의해 신식 놀이 문화가 본격적으로 수입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초반부터 다수의 신문과 잡지가 발간되어 많은 읽을거리를 제공하였다. 이와 함께 축음기가 소개되고 음반이 판매됨에 따라 상업적 대중가요가 놀이문화의 중심적 지위를 점하게 되었다. 레코드 회사들이 전통음악을 노래하는 가인들과 신식 가요를 노래하는 가수들의 노래를 음반에 취입하여 판매하였다. 이와 함께 영화가 수입되어 상영되면서 가요와 더불어 중요한 놀잇거리가 되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서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하면서 가요와 영화가 산업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상업적 통속소설들도 꾸준히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으나 경제기반이 붕괴되어 놀이문화를 발전시킬 여력이 적었다. 자본의 소요가 적은 가요는 그런대로 발전해 나갔으나, 자본의 소요가 많은 영화는 그렇지 못했다. 이후 6․25전쟁이 끝나고 경제가 부흥하기 시작하면서 놀이문화가 점차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음반사업, 영화산업이 성장하였고, 이와 함께 사람들을 속이는 야바위가 성행하였다. 시골장터와 같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야바위꾼들이 판을 벌여 놓고 순진한 사람들을 속여 돈을 갈취하였다.
☞ 1950년대까지만 하여도 국민들은 노는 것을 극히 부정적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통상 노는 것을 비난하여 "자빠져 논다고 밥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들은 입에 풀칠하기 위한 밥과 떡을 위해 열심히 노동하는 것에 급급했기 때문에 노는 것에 대한 여유가 없이 단순히 휴식을 취하는 것에 만족하였다. 따라서 놀이문화에 종사하는 연예인 등을 매우 낮게 평가하여 조선시대의 광대처럼 낮게 평가하는 일도 많았다.
☞ 1960년대로 접어들어 경제성장으로 인해 국민소득이 향상되자 놀이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하였다. 프로권투, 프로 레슬링과 같이 결투의 형태를 띄는 프로 스포츠가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프로 권투가 활성화되면서 놀이가 직업 또는 사업으로서의 성격을 확실하게 갖게 되었고, 프로 레슬링이 이를 확충하였다. 프로권투의 김기수나 프로레슬리의 김일처럼 스포츠로 입신하여 가난을 벗어나는 영웅담이 국민적 관심거리가 되었다.
☞ 1970년대부터 국민들이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되자 여유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것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놀이를 통해서 노동의 고통을 보상하려고 하면서 점차 놀이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사회로 변화하게 되었다. 가요산업과 영화 산업이 크게 성장하였고, 스포츠가 발전하였다. 이와 함께 직장 또는 모임에서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놀러가는 단체 여행이 유행하였다. 또한 이때부터 사창가와 술집을 중심으로 성의 상품화가 크게 진전되었다. 가난한 여성들은 접대부라는 직업을 통해서 가난에서 쉽게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와 함께 놀이 문화에 관해 종합적 정보를 제공하는 스포츠 신문이 창간되어 인기를 끌게 되었고, 놀이에 직업적으로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평가도 크게 향상되었다. 대학가요제가 생겨 대학생들이 가수로 나서는 것이 공식화되어 학사가수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다.
☞ 1980년대에 5공세력들이 통금해제, 교복자율화, 텔레비젼 컬러 방송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놀이 문화를 활성화하는 정책을 펴자 다양한 놀이가 상품화되어 팔리기 시작하였고, 이때부터 놀이가 대중의 일상적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야구․씨름․축구 등의 스포츠가 프로화되어 입장료를 지불하고 관전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일류 프로 스포츠 선수의 연봉이 억대를 호가하면서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이러한 국민들의 관심에 짝하여 연예와 오락을 전문으로 하는 스포츠신문과 잡지들이 다수 발간되었다.
☞ 1980년대 후반부터 놀이산업이 중요한 산업으로 등장하였다. 프로스포츠를 비롯하여 영화 산업, 음반 산업, 컴퓨터 게임산업, 만화 산업 등이 크게 성장하여 놀이의 상품화가 극도로 진전되었다. 이처럼 놀이 산업의 규모가 확대되자 대기업들이 직접 놀이 산업에 뛰어들어 영상사업, 방송사업, 스포츠 사업을 주도하였다. 거대 자본들이 쾌락을 담보로 소비자인 대중들의 호주머니를 털어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었고, 그 결과 무력한 대중은 거대 자본들의 의도에 놀아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3. 한국인의 삶과 투기적 놀이의 성격(화투와 카드를 중심으로)
☞ 개화기 이후에 일본에서 화투가 전래되고, 서구에서 카드가 전래됨에 따라 종전의 윷놀이와 승경도놀이를 점차적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인이 일상적 상황에서 직접 참여하여 행하는 투기적 놀이에는 화투․카드․바둑․장기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일상적 놀이로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일본에서 전해진 화투와 서양에서 전해진 카드이고, 사회적 성격의 변화도 잘 드러나 있다. 반면에 바둑은 많은 사람들이 두지만 두 사람만이 참여하는 경기이고, 놀이의 방식이 하나로 고정되어 있어 사회적 성격의 변화를 반영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화투놀이와 카드놀이의 규칙을 중심으로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탐색해 보자.
1) 화투놀이
가. 화투놀이의 종목과 규칙의 변화
☞ 해방이후 한국인이 행해 온 화투놀이의 주된 방식은 1950년대의 민화투, 1960년대의 육백과 나이롱뽕, 1970년대 이후의 고스톱으로 변화해 왔고, 놀이의 규칙은 민화투의 경법적 성격(정상적 상황에서 정상적 방법으로 문제해결)에서, 육백과 나이롱뽕의 권도적 성격(비상적 상황에서 비상적 방법으로 문제해결)에서, 고스톱의 권술적 성격(비상적 상황을 가장하여 비상적 방법으로 문제해결)으로 변화해 왔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적 환경이 신분적 농업중심사회에서 시민적 상공업 중심사회로 변화한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민화투는 농업에 기초하고 있는 전통적 신분사회의 경법적 질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 민화투에서 열두개의 가문은 지위에 있어 차이가 있으며, 각각의 가문에 소속되어 있는 가족 또한 지위에 있어 차이가 있다. 가족은 알짜(지배층)와 죽짜(피지배층)으로 구분되고, 이것은 다시 양반(광과 열)과 상민(열 또는 띠)과 천민(피)로 구분된다. 이렇게 구분된 가문과 가족의 지위는 신분의 변화가 불가능하듯 그 변화가 불가능하다. 알짜는 영원히 알짜이고, 죽짜는 영원히 죽짜이다.
→ 민화투는 스스로의 권리를 갖지 못한 피지배층, 즉 점수화될 수 없는 죽짜가 전체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쓸모가 없게 된 죽짜를 아무렇게나 버리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또한 민화투에서는 일단 확보되어진 패에 대해서는 소유의 변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나의 것은 끝까지 나의 것이고 너의 것은 끝까지 너의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판이 진행되는 과정에 이미 소유가 결정된 죽짜들이 대량으로 발생하게 된다.
→ 민화투는 판이 시작되면 바닥에 깔려 있는 마지막 패가 없어질 때까지 판이 계속된다. 판이 끝까지 계속되지 못하면 파토가 되어 판자체가 무효가 되어 버린다. 따라서 민화투에서는 모든 판이 동일한 과정을 반복하게 되며, 이러한 일은 하나의 원칙만을 고수하며 예외적 상황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 육백과 나이롱뽕은 농업에 기초한 전통적 신분사회의 경법적 질서의식이 상공업 사회의 권술적 질서의식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단계, 즉 권도적 질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 육백에서는 가문의 지위에 변화가 초래되는 동시에 가문에 소속되어 있는 가족의 지위에도 변화가 초래된다. 따라서 민화투에서 볼 수 있는 기존의 점수체계가 무너지게 된다. 이것은 전통적 신분질서의 이완과 해체를 반영하고 있다. 이렇게 때문에 육백에서는 죽짜도 다이( だい)가 되면 알짜와 동일하게 취급된다. 육백과 달리 민화투에서는 이러한 일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
→ 육백에서는 비광은 오야가 되어 바닥에 깔려 있는 알짜는 어떤 것이나 잡아올 수 있다. 이러한 오야의 사용은 상대가 오광이나 칠띠를 하는 것과 같은 비상적 상황에 직면했을 때 비상적 수단을 사용하여 그것에 대처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육백에서는 오광과 칠띠를 하면 판의 중간에서 승부가 끝난다. 따라서 기회는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기회를 잡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이렇기 때문에 신속하게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 필요하다.
→ 나이롱뽕도 육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가문과 가족의 지위에 큰 변화가 있다. 열두 가문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평준화되어 있는 가운데 모든 패가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승부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로 인해 화투의 진행이 매우 빠른 속도로 이루어진다. 신속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점수를 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최악의 경우에는 역전의 위험까지 각오해야 한다. 이것은 1960년대 중반 이후에 나타난 자본주의적 상품문화의 활발한 전개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고스톱은 상공업 사회의 권도적 질서의식이 자본주의적 경쟁이 치열해지는 것과 함께 투기적 성격의 권술적 질서의식으로 변화되는 것을 반영한다.
→ 1970년대의 고스톱은 고스톱의 초기적 형태로서 육백이나 나이롱뽕이 갖고 있는 권도적 성격에 투기적 요소를 강화하여 권술적 성격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고스톱은 전통적 신분 질서의 완전한 해체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피도 점수가 될 수 있다. 그리고 피에 의한 점수는 상대방에게 바가지를 씌울 수 있기 때문에 보다 많은 고통을 강제하게 된다.
→ 육백이나 나이롱뽕에서는 승점이 확보되면 그것으로 승부가 끝나지만 고스톱에서는 승점이 확보되어도 승부를 끝낼 것인지 계속할 것인지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승부의 결과가 큰 점수로 나타나거나, 마지막 순간에 승부가 역전되어 나타나거나, 아니면 승부자체가 무산되어 나타난다. 이것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승부를 판가름해야 하는 심각한 의사결정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고스톱에서는 '광팔기'를 도입하여 기회의 상실을 보상하는가 하면 '흔들기'를 도입하여 동일한 패 세장을 가지고 치는 위험 부담을 보상하고 있다.
→ 1980-90년대의 고스톱은 1970년대의 고스톱보다 권술적 성격이 한층 강화된다. 권술이 주도하는 사회적 현상들이 직접적으로 놀이의 방식에 옮겨지게 된다. 전두환 고스톱, 최규하 고스톱 등이 그 예이다. 또한 이 시기의 고스톱은 피가 알짜보다 중요하게 취급되는 가치 전도의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민주화의 과정을 통해서 피지배층으로 인식되어 온 민중이 사회의 각 부문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과 동일한 성격을 갖는다. 또한 설사, 판쓸이, 쪽 등과 같은 것이 도입되어 피의 이동에 의해 판의 흐름이 매우 불규칙하게 되었다. 따라서 점수가 배로 주어질 수 있는 기회, 즉 흔들기, 피박 씌우기, 광박 씌우기 등도 많아지게 된다. 이는 동일한 승점이 상황에 따라 몇 배 또는 몇 십 배로 확대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한 번의 승부로 결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
→ 이는 사회적 환경이 복잡해지면서 의외의 사건들이 돌발하여 대형 사고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동시에 새롭게 제공되는 기회들에 모험적으로 도전함으로써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투기적 방식으로 한번에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한탕주의, 한건주의 등과 연관되어 있다.
☞ 화투놀이의 규칙을 분석해 보면 사회적 환경의 변화가 놀이 규칙의 변화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분제도의 붕괴, 민주화의 과정, 자본주의화의 전개, 산업화의 과정 등과 같은 사회적 환경의 변화가 화투놀이의 규칙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화투놀이는 일종의 삶에 대한 모형경기와 같다. 사람들은 복잡한 현실 속의 삶을 화투놀이 속에 단순한 형태로 축소시켜 놓고, 그것을 통해서 현실을 축약된 형태로 경험하고 현실에 대한 이해 능력과 대처 능력을 기르게 된다.
2) 카드놀이
☞ 한국인은 개화기 이후에 서구 문화의 유입이 이루어지면서 서구의 카드놀이를 접하게 되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미국에서 개발된 카드놀이의 한 형태인 포커(poker)가 소개 전파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인이 포커에 익숙해지게 된 것은 해방이후 미국문화가 널리 소개되고, 한국전쟁으로 수만 명의 미군이 계속적으로 주둔하고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미국 또는 유럽으로 유학한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난 것 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사회에서 포커를 치는 사람들은 특정한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기지촌을 주변으로 미국병사들과 빈번하게 접촉하는 사람, 미국이나 유럽으로 유학을 다녀온 사람, 미주 지역으로 이민을 간 사람들과 친밀한 연계를 갖고 있는 사람 등을 중심으로 포커가 행해졌다. 따라서 일반인에게 포커는 이국적인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거리감이 있는 놀이였다. 이와 함께 일반인들이 포커를 치는데 필요한 카드를 구입하고 소지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포커가 확산되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 1980년 신군부 세력에 의해 서울의 봄이 좌절된 이후, 학생들은 사복 경찰이 캠퍼스 여기저기에 상주해 있는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포커를 통해 답답한 심정을 간접적으로 배출하기 시작 하였다. 이로 인해 1980년대 초에 대학생들이 캠퍼스나 하숙집 등에서 포커를 치는 것이 크게 유행하였고, 많은 학생들이 집에서 보내온 학비와 용돈을 탕진하여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이후 1980년대의 학생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기성세대로 활동하는 1990년대가 되면서 일반인들도 자연스럽게 포커를 치는 현상을 보게 되었다. 최근에는 친목모임, 상갓집 등에서 흔히 포커가 행해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으며, 언론보도자료에 의하면 도박판에서도 고스톱보다 포커가 더 유행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4. 고스톱과 포커
☞ 고스톱과 포커는 투기에 바탕한 권술적 방법으로 상대를 제압하여 승리를 거두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런데 고스톱과 포커는 채용된 권술적 방법의 성격에 차이가 있다. 고스톱은 승점을 획득하는 방식에 권술적 요소를 도입하여 투기성이 발생하도록 되어있다. 이 때문에 고스톱은 투기성의 정도에 따라 승점을 획득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이로 인해 놀이를 운영하는 방식 또한 크게 달라지게 된다.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여 다양한 고스톱이 새롭게 생겨난 것은 이 때문이다. 반면에 포커는 배짱과 위장술의 형태로 베팅의 과정에 권술적 요소를 도입하여 투기성이 발생하도록 되어있다. 이런 관계로 포커는 권술의 본질인 배짱과 위장술의 사용을 규칙으로 제도화함으로써 권술을 권도화시키게 된다. 이 점에서 포커는 과대, 과장, 덤핑, 투기 등과 같이 권술이 일상화되어 있는 자본주의적 문제 해결의 방식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 고스톱에서 포커로 이행하는 것은 자본주의화를 중심으로 한 사회변화의 과정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포커에서 위장술의 사용을 정당화시켜 놓은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현실적 필요성에 따라 위장, 가장, 유혹, 유인 등과 같은 사악함을 어느 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자본주의적 생활 환경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변화의 측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① 한국인은 민주화와 자본주의화의 과정을 통해 전통적인 집단주의적 삶의 방식에 개인주의적 삶의 방식을 많은 부분 수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부가 집단주의적 성격이 강한 고스톱보다 개인주의적 성격이 강한 포커를 보다 선호하게 되었다.
→ 이는 고스톱처럼 판이 시작되면 개인의 판단과 선택에 관계없이 끝까지 남아 있어야 하는 종류의 놀이를 싫어하여 포커와 같이 판이 진행되는 동안 개인의 판단과 선택에 따라 잔류와 탈퇴를 자유스럽게 결정하는 종류의 놀이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다.
② 한국인은 자본주의적 사회 환경 속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두 가지 방식, 즉 계산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 방식과 배짱을 바탕으로 한 모험적 방식을 아울러 경험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그들 중 일부가 계산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 방식이 중심을 이루는 고스톱보다 배짱을 바탕으로 한 모험적 방식이 중심을 이루는 포커를 보다 선호하게 되었다.
→ 고스톱은 자본의 힘이 직접 행사될 수 있는 여지가 적으나 포커는 모험적 방식을 통해 자본의 힘이 적극 행사될 수 있는데, 이런 점에서 자본의 지배를 정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자본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포커를 좋아하게 되었다.
③ 한국사회는 해방이후에 미국식 교육을 받고 성장한 세대가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면서 문화의 이상적 모형이 일본적 모형에서 미국적 모형으로 이행하게 되었다.
→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 중의 일부가 일본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고스톱보다 미국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포커를 보다 선호하게 되었다.
④ 한국인은 국력의 신장으로 문화적 자신감을 회복해 나가는 것과 함께 문화 개방시대를 살아가게 되자 외국의 문화나 상품을 있는 그대로 수입하여 사용하는 것을 일반화하게 되었다.
→ 이러한 과정에서 수입된 것이면서도 일본적 요소, 미국적 요소, 한국적 요소가 뒤섞인 잡동사니처럼 원형을 상실하고 있는 고스톱보다 본래의 원형을 지니고 있는 포커를 보다 선호하게 되었다.
⑤ 한국인은 자본주의화와 민주화를 통해 가문과 가족의 전통적 질서가 해체되고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에 놓이게 되면서 그들 중 일부가 놀이 자체의 전통적 질서를 해체해 버린 고스톱보다 전통적 질서를 대부분 고수하고 있는 포커를 보다 선호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국가와 국가의 싸움으로 승부를 겨루는 포커는 사회적 환경이 가문적 경쟁의 시대에서 국가적 경쟁의 시대로 변화된 것에 보다 잘 부합되는 특징을 가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