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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시대 이야기
춤을 추게나, 친구여. 하늘과 땅과 사람들이 그대의 아픔을 느낄 수 있도록 지성을 다해 춤을 추게나. 어린이가 즐거워 웃어도, 어른이 모양새가 바르지 않다고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그대는 춤을 추어야 하네.
다소간 미치광이 소리를 들어도 나쁠 건 없겠지. 무언가 한 가지 일에 열중하는 사람은 타인의 객관적인 평가에는 언제나 정상이 아닌 걸로 비치는 법이 아니던가. 그대의 춤이 광인의 발작으로 보인다면 우리는 성공한 것일세. 그러한즉 친구여, 그대의 무대에는 부끄러움이 없을 테니 열심히 공간을 정복하는 춤을 추도록 하게나.
나는 그 밤의 무대에 관객으로 있었을 것일세. 우리는 한 예인과 한 애호인으로 첫 상면을 가졌지 않나 싶네. 그 시절에 살았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듯 몇 푼의 관람료를 내고 소문난 춤꾼인 그대의 공연을 보며 나는 어딘가 결함이 있지 않을까 찾고 있었네. 아시지 않는가.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지 않은 재능이 뛰어난 타인을 볼 때 우리네 가갸거겨들은 우선 부러워하고 다음은 어떻게든 격하시켜 보려는 속된 감정이 생긴다는 사실을. 그 밤의 나는 그런 기분을 가지고 무대 위의 마녀로 소문이 높은 그대의 무대를 찾았던 것일세.
그대는 로봇 춤을 추고 있었네. 처음 나는 근자에 갑자기 유행하는 로봇의 동작 흉내라는 로봇 춤의 단조로운 춤사위에 ‘저 따위가…’의 기분이었네. 그대는 바람에 흔들리는 허수아비와 같이 미적인 율동이 없는 손놀림을 하고 있었네. 곧게 뻗은 팔을 상하좌우로 흔들어 댈 뿐인 그대의 춤은 춤사위라기보다는 도수체조에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속았다’의 기분이 될 수밖에 없었네.
그러나 나는 그런 기분이었지만 선뜻 자리를 뜨지 못했는데, ‘설마 무언가 있겠지’의 기대를 버리지 못할 만큼 그 무렵의 그대는 소문이 높았기 때문이었네. 내가 전해들은 그대는 ‘장난감 전자허수아비의 기계적인 율동을 흉내 내고 있다’와, ‘22세기를 지향하는 초현실적인 예지예술의 연기인’이라는 식으로 혹평과 찬사를 한 몸에 받는 문제 예술인이었네. 그런 까닭에 나는 그대에 대한 세평과 내 안목을 저울질할 양으로 그대의 무대에서 눈길을 돌리지 못했던 것일세.
그대의 춤은 여전히 같은 동작의 반복이었네. 전후좌우로 흔들거리고 있을 뿐인 팔다리는 기왕의 춤이 추구하는 미학적 율동과는 거리가 먼 내연기관의 피스톤 운동에 지나지 않는 듯 보였네. 나는 정말이지 공연의 전반부까지는 ‘속았다’의 기분을 떨칠 수 없었네.
그러나 무대가 무르익어 절반을 넘겼을 때부터 그러한 내 인식은 달라지기 시작했네. 그대가 분한 로봇은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최첨단 생산도구로써의 임무에 충실하여 힘겨운 밭갈이를 하고 있었는데, 전신의 힘을 한 동작에 모아 삽질을 하는 장면에서 나는 예상외의 진지함을 발견할 수 있었네.
아마도 삽 끝이 돌 뿌리에 걸린 모양으로 예정된 동력 이상의 힘을 낼 수 없는 로봇은 같은 장소를 같은 동작으로 계속 파헤치고 있었지만 작업은 도무지 진척되지 않았네. 밭 가운데에 뿌리를 내린 돌을 캐내어 우환을 덜려는 농부의 심정이 로봇으로 의인화한 무대 위에서 실제의 일인 양 펼쳐지고 있었네. 삽 끝이 파헤쳐 나가는 곳마다 부딪쳐 오던 돌 뿌리는 어느새 무대의 전부를 차지할 만큼 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로봇은 시종 단조로운 동작을 되풀이하여 흙을 걷어내고만 있었네.
관객들의 눈에는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밭 전부를 차지한 바위를 들어내고자 한 삽, 또 한 삽, 흙을 파헤치는 농부의 모습이 보였네. 애당초 조그만 돌부리였을 때 돋우어 덮어버렸거나, 한 줌쯤 적게 씨를 뿌릴 양으로 비켜 갔으면 고역을 치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농부는 우직하게도 집채만 한 바위를 캐내고 있었던 것일세.
농부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네-모두 그렇게 느꼈네-. 삽질을 하던 농부의 동작이 차츰 완만해지며 힘겨워 하는 양이 역력히 보이자 관객들은 농부를 위해 안타까워하기 시작했네. 왜 저 농부는 저렇게 답답한 작업을 계속하고 있을까?
나는 그 시점에서 그대가 명성을 얻게 된 이유를 발견하고 있었네. 특별한 기교도 이렇다 할 미적 율동도 보이지 않는 그대의 무대가 항상 성공을 거두는 이유는 그렇게 관객 개개인의 내면속에 감추어진 인간고를 자연스레 표출시키는 작용에 있었네. 슬프고 괴롭고 고단한, 그러나 때때로 살아갈 만한 즐거움이 찾아지는, 보통의 삶을 사는 보통의 사람들이 흔하게 부딪칠 수 있는 세사의 힘겨움을 그대의 춤은 그려내고 있었던 것일세.
농부의 삽질은 계속되었네. 관객들의 안타까워하는 마음도 높아 갔네. 바위는 밭 전부를 차지하고도 남을 만큼 깊고 넓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한 삽, 두 삽, 삽질이 계속될 때마다 위용을 더해 갔네. 농부는 그만 지치고 지쳐서 바위 아래 구덩이 속에 쓰러지고 말았네.
관객들은 도움을 주고 싶었네. 살아오는 동안 도저히 적수가 될 것 같지 않은 엄청난 상대와 -그것은 제도라던가 율법이라던가 하는 따위의 가시적인 것일 수도 있고, 운명이라던가 신과 자연의 섭리라던가 하는 따위의 불가시·불가해적인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한바탕의 힘 겨루기를 치러 본 적이 없는 이가 드문 21세기의 시민들인 관객들로서는 농부의 곤경이 자신의 일인 양 아팠던 것이네.
그러나 무대 위의 세계는 공연을 맡은 연기인만의 것임을 익히 알고 있는 관객들은 ‘자신의 운명은 자신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라는 진리를 절감했을 뿐 속수무책이었네. 농부의 재기를 기원하는 정도가 관객들이 할 수 있는 염려의 전부였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네. 농부는 쓰러져 있고 관객들은 가슴 졸여 그의 회복을 기다리는 동안 일각 또 일각 시간이 흘렀네. 공연의 전체 시간이 두 시간 남짓이었으니 농부가 탈진상태에 있었던 시간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을 것은 정한 이치였는데, 관객들은 일생의 반절쯤을 흘려보낸 양으로 길고 초조한 시간을 보냈네.
그 순간 나는 보았네-아마 다른 관객들도 보았을 것일세-. 그대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방울과 그 뒷면에 숨은 깊은 피로를. 무대 위의 그대는 정말로 지치고 지쳐서 쓰러져 있었던 것일세.
어찌 아니 그렇겠는가. 심복지환인 밭 가운데의 바위를 캐내려는 농부의 노력은 범인의 일상사를 벗어난 초인적인 것이었으니 말일세. 농부는 정말로 힘겨운 사투를 벌였던 것일세.
다시 그렇듯 안타까운 시간이 한참을 더 흐른 후 농부는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네. 힘겨운, 그러나 단호한 그대의 삽질은 계속되었네. 그리고 이윽고 바위는 전체를 드러내었네.
그때쯤 관객들은 농부를 위하여 새로운 의문을 품기 시작했네. 도대체 저 농부는 바위를 어떻게 옮기려는 것일까?
농부는 바위를 떠밀어 보았네. 삽자루를 휘둘러 부수려 덤벼들기도 하였네. 그러나 바위는 요지부동이었네. 관객들은 농부의 노력이 헛되이 되었음을 안타까워하며 어느새 이 무대가 말하고 싶어 하는 의미를 새기고 있었네.
그것은 ‘시지프스의 신화’였네. 무언가 한 가지 성취를 이룰 때마다 더 큰 무게로 다가오는 삶의 고달픔을 실제인 양 느끼며 관객들은 한숨을 쉬었네. 가까스로 정상까지 굴려 올린 바위가 더 큰 무게를 가지고 굴러 내려올 때의 절망을 그대의 로봇 춤은 표현했던 것이었네.
그때의 공연을 관람한 이후 나는 그대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네. 십대의 열성 팬들처럼 공연마다 찾아다니지는 못했지만 혹 그대가 출연한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을 지날 때나 그대의 이야기가 실린 신문기사를 보게 되면 제삼 제사 새겨볼 정도는 되었네.
그 무렵의 나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세상 밖으로 떠돌고 있었네. 역사가 새 장을 열 때마다 뭇 인간이 제각기 시름을 얻는 것은 자연의 이치였지만 그대를 만난 이후의 나는 정말이지 특별하다고 할 시련을 겪었네. 그대도 들었던 적이 있었을 것이네. 여성형 로봇을 사랑한 미치광이 로봇공학자의 이야기를.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는 암참새 수참새들이 살을 붙이고 치장을 하여 원래의 줄거리와는 엉뚱히 다른 신파극으로 변해 버린 그때의 이야기를 당사자의 입장과 세상의 평판을 대비하여 잠깐 이야기해 보려 하네.
나는 세류의 흐름에 순응치 못하는 나그네족 기질의 인간이었네. 연방통일전쟁이 끝난 지도 30년쯤 세월이 흘러 전쟁의 상처도 아물고 파괴되었던 도시와 농촌이 새 모습으로 바뀌었을 뿐더러 때마침 시작된 세계 경제의 호황기에 힘입어 바야흐로 역사상 유례가 없는 번영을 누리던 자유주의국가 동아시아연방이 성가를 높이던 시대에 18년 의무교육을 마치고 뛰어든 얼치기 사회인이 바로 나였네-그대를 처음 만났을 무렵의 내 모습이었네-.
나는 로봇공학을 공부한 덕택에 ‘예진로봇산업’이라는 인간형 로봇 전문생산업체에 직장을 얻을 수 있었네. 그 무렵 등장한 인간형 로봇은 물질적인 풍요를 극대까지 누리던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낸 최종적인 발명품으로 나는 ‘성기능 부착 여성형 로봇’의 특허를 가지고 있었던 덕택에 최초 개발자의 한 사람으로 불리고 있었네.
최초의 여성형 로봇의 공식 상품명은 ‘예진74형 인간형 로봇’이었네. ‘예진로봇산업이 만든 74번째 시작품’의 표시임은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내게 있어서의 그 이름은 평생의 반려를 표현하는 대명사이기도 하였네.
나는 예진74를 -정확히는 예진74형 로봇 중 하나를- 아내로 맞았네. 그대는 “로봇과 인간의 결혼?”하고 의아해 할 걸세. 로봇이란 생명을 가질 수 없는 기계 부속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세상의 상식이니 말일세.
그러나 나와 예진74의 사이에 있었던 사랑이야기를 듣게 되면 내가 로봇을 사랑하게 된 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네. 패배자의 변명에 지나지 않을 초라한 행동이 되겠지만 그대와 한 운명에 얽혀 오늘의 사연을 엮게 된 사정을 설명키 위해서는 그때의 이야기를 꼭 해야 할 것 같으니 친구여, 잠시 귀를 빌려주게나.
내 아버지는 연방통일전쟁 때에 분리측 병사의 하나였다네. 그 무렵 세계적인 추세였던 지역 연합의 바람이 동아시아를 강타할 때에 역사의 흐름에 거역해 보겠다고 떨쳐나섰던 분리주의 집단의 일원이었던 아버지는 통일 측과의 싸움 도중 전사하시고 말았다네-이렇게 설명하면 대단한 지사를 아버지로 모셨음을 자랑하는 듯 보일 테지만, 실상 아버지는 그 시대에 살았던 한국계 민족주의자들이 대부분 그러했던 것처럼 맹목적인 순혈주의의 보호론자에 지나지 못하셨고, 그에 걸맞을 소모품격인 전사를 하신 일반 병사의 하나이셨네.
그렇다고는 하여도 한국계 무정부주의자의 대명사격인 유강민의 막하에 들어 일본계 지사형 장군 아키야마 지로와 중국계 자유주의 수호론자의 대부였던 공사명 등과 교우를 가졌던 반체제 인사를 아버지로 둔 내가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가지고 경제 지상주의의 연방 정치 체제를 조소하기를 즐겼음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네.
18년 의무교육을 마친 후의 몇 해, 나는 나그네족에 어울려 연방의 전역을 떠돌았네. 통일전쟁의 와중에서 “어느 쪽도 옳지 못하다. 어떠한 형태의 국가가 선들 우리가 무슨 상관이랴!”하는 식의 사상을 가졌던 방관자들이 시작한 나그네족은, 전쟁 후 국력이 커져 세계 유수의 경제 강국이 된 동아시아연방의 완벽한 사회보장제도에 힘입어 풍경으로 정착되었는데, 실패한 분리주의자를 아버지로 하고 태어나 도무지 사는 일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던 나는 당연한 듯이 그 중의 한 분자로 어울렸던 것이네.
그날도 나는 동아연방의 수도 서울의 -지정학적 이유 때문에 연방의 수도가 된 서울은 2035년의 시점에서 세계 제일의 도시였네- 중심에 있는 한 공원의 벤치에 누워 진종일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네. 사회복지기관이 주는 세 끼 식사를 챙겨 먹는 것을 유일한 사회활동으로 하고, 나머지 시간은 그렇게 양지쪽에서 졸거나 끼리끼리 모여 유명인사의 흉을 보고 흥이 오르면 춤판을 벌이는 것이 나그네족의 일과였네. 그 무렵의 나는 그렇게 제롬 할아버지를 떠나온 피노키오처럼 어딘가 꼭 있을 법한 ‘깜짝 놀랄 만한 일’을 찾아 현실 밖의 세계를 겉돌고 있었네.
저녁 무렵 배가 고프기도 하고 몰려드는 데이트족의 대군에 심정이 상하기도 하여 공원을 빠져 나오던 나는 발길에 차이는 신문 조각을 하나 주워들었는데, 거기에 ‘구형 로봇의 월부 할인 대매출’의 광고가 커다랗게 실려 있었네. 나는 나그네족답게 ‘외상이라면 황소라도 잡아먹는다는데…’의 기분으로 광고를 낸 예진로봇산업의 판매장을 찾았네. 직업을 갖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나그네족에게 가사보조용 로봇이란 사치스런 가구였지만 광고문에 실린 할부 조건이 너무 좋아서 -계약금은 국가신용카드의 소지로 대체하고 불입금의 3회 연체까지는 이자가 없다는 등으로- 몇 달쯤 사용하다가 반품시키면 된다는 속셈으로 구입할 마음을 먹었던 것일세.
로봇 판매장에 전시되어 있는 구형 로봇들은 정말이지 그런 파격적인 할부 조건이 아니라면 구매 욕구가 일지 않을 조악한 것들이었네. 하루가 다르게 신제품이 쏟아져 나오는 로봇 시장에서 구형 로봇의 처리는 우리 같은 국가보조금 수혜층에 떠맡기는 것이 폐기물 처리비용보다 싸게 먹히는 모양이었네.
구형 가사보조용 로봇들의 우악스러운 모습은 내게서 사고 싶은 마음을 빼앗아가 버렸네. 그럴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으니 나는 최종학부에서 로봇공학을 전공한 공학도였기 때문에 신형 가사보조용 로봇들의 잘 조형된 외양을 유심히 보아왔던 것일세. 그러니 고급화된 내 눈에 구형 로봇이 들어오기나 했겠나?
되돌아 나오는 발길에 폐기장행의 쓰레기 봉지가 차였네. 그리고 사건이 있으려고 그리 되었는지 차인 곳이 찢어지며 가사보조용 로봇의 팔이 하나 빠져 나왔네.
나는 내친김이라 -나그네족은 무슨 일이든 닥치면 해치우고 보는 법이지- 쓰레기 봉지를 뜯고 팔의 주인을 찾았네. 봉지 속에서 나타난 쓰레기의 정체는 개조된 74형 로봇의 고장 난 몸체였네. 얼굴과 몸통의 표피가 뜯겨 나가 볼품없는 몰골이었는데 검은머리를 길게 따 내리고 있어서 인간 여성의 외양을 했던 가사보조용 로봇이었음을 알 수 있었네.
내가 예의 예진74형 로봇을 -이제부터는 언제나의 습관처럼 그냥 예진74로 부르겠네- 구입한 이유는 할부판매대에 나온 다른 로봇보다 신형이라는 점과 공짜에 가까운 값에 매력을 느껴서이기도 하였지만, 로봇판매장의 판매원이 한 말에 자극을 받아서이기도 하였네. 판매원이 그랬거든.
“어떤 돈 많은 친구가 인기 여배우의 외양을 닮은 로봇을 특별 주문해서 사간 후 한 달만에 저런 모양을 만들어 왔죠. 사디스트였던 거죠.”
예진74의 몸 곳곳에는 채찍 자국이 빨갛게 드러나 있었네. 연성 고무로 표피를 만든 몸이 채찍에 맞아 인체가 고문을 받은 것처럼 참혹하게 짓물러 있어서 오싹 소름이 끼쳤네.
나는 순간 나그네족 특유의 의협심이 발동하여 -정말이네. 나그네족은 불공평한 일을 보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협객들이네- 그 폐품에 가까운 로봇을 구입키로 하였네. 그날 연방의 수도에 사는 시민들은 고철에 가까운 로봇을 등에 업고 내달리는 나그네족을 발견하고 웬 구경거리인가 하고 웃었을 것이네.
집으로 돌아온 내가 -동아연방은 참으로 좋은 나라인지라 나그네족에게도 한 칸씩의 아파트를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나는 내 명패가 붙은 둥지를 갖고 있었네- 예진74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개조하기 시작한 이유는 순전히 권태를 잊기 위해서였네. 나는 나그네족이었던 터라 무슨 일이든지 저지르지 않고는 못 견디는 습관이 몸에 배여 있었던 것일세.
처음 나는 예진74를 로봇판매장에 갔을 때에 목적했던 대로 가사보조용 로봇으로 재생하였네. 밥을 짓고 빨래와 청소를 하고 주인이 없는 집을 지키는 등의 일을 하는 다른 가사보조용 로봇과 별다르지 않은 자동전자가구가 예진74였네.
그런데, 그랬는데 말일세.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자동전자가구 예진74를 가족으로 인식하고 있었네. 예진74의 훼손된 얼굴 부분을 재생하면서 약간의 기호를 가미했던 것이 병폐가 되었던 것일세.
나는 한때 연방 제일의 만능 연예인이라는 진화란을 대상으로 사랑의 열병을 앓은 적이 있었네. 철부지의 첫사랑이 아니었던 탓에 자신의 감정을 뛰어난 예능인에게 보내는 외경의 마음이라고 바로 판단할 수 있었지만 그때의 사랑 이후 나는 여성을 보는 기준을 그녀의 지성과 미모를 축으로 하는 습관이 붙고 말았네. 바로 얼마 전에도 진화란이 출연한 입체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영화 속의 진화란은 연방통일전쟁이라는 극한상황 속에서 주의를 달리하는 남녀 주인공이 엮는 애달픈 순애보를 참으로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었네. 나는 역사의 흐름 속에 떠밀려 들어 사랑과 이별을 되풀이하는 진화란의 운명을 자신의 일인 양 가슴 아파 했었네.
예진74의 얼굴에는 진화란에의 첫사랑의 추억이 재현되었네. 만들어진 얼굴일망정 사랑하는 여인이 시중을 들어주는 둥지를 가졌다-얼마나 행복한 상상인가. 외떨어진 삶을 사는 사람으로 그런 상황을 꿈꾸어 보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그래서 진화란의 얼굴을 예진74의 얼굴에 복사했던 것인데, 그런 이후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즐거워지기 시작했고 차츰 정도가 심해져서 이윽고 그녀 없는 집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되었네.
나는 생각 위에 생각을 더하는 버릇이 있었네. 자꾸 생각을 덧칠하다 보면 어느새 처음과는 다른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네. 그런 연유로 예진74의 얼굴을 진화란으로 꾸민 이후 그녀의 개조에 열중하였고 드디어 여성의 기능을 부착하고 말았네.
나는 -우리는- 행복했네. 날마다 첫사랑 연인을 대하듯 상대를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남편과 남편이 바라는 대로의 여인상을 수시로 연출하는 -나는 예진74에게 현부, 요부, 독부의 세 가지 사랑회로를 만들어 주었네- 아내의 부부생활은 행복 두 글자 이외의 표현은 떠오르지 않는 아름다운 것이었네.
그러나 좋은 일에는 반드시 마가 낀다고 하더니 언제부터인가 우리 부부의 주위 환경은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네. 원인은 오로지 내게서 비롯되었는데, 나그네족 된 분수를 잊고 직업을 갖고 말았던 것이 불운의 시작이었네.
나는 정말이지 자신의 사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네. 하기는 누구라고 내 가정만의 비밀스러운 행복을 남과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마는, 자존심 하나로 세상을 살아가는 나그네족 된 나는 더욱 그러했네. 그런데, 아무리 가난이 유죄라고는 하지만 나와 예진74의 부부생활을 만천하에 공개하게 될 줄이야!
동아연방의 사회보장제도는 실업자인 인간에게는 최저수준일 망정 의식주를 보장하지만 자동전자가구로 분류되는 로봇에게는 혜택이 주어지지 않아서 우리의 살림은 무척이나 가난한 것이었네. 더구나 예진74의 식물인 로봇에너지의 값이 또한 엄청났으니…… 나는 여유가 있을 때 저축을 해두지 않은 나그네족의 생활 습관을 원망하기까지 하였네.
어느 날, 에너지가 바닥 난 예진74가 찌개 냄비를 손에 든 채로 굳어버렸을 때 나는 드디어 직업을 가질 결심을 굳혔네. 돈을 많이 벌어서 최고급 로봇에너지를 양껏 보충해 주리라 마음먹고 용약 구직전선에 나섰던 것일세.
그러나 의욕과는 달리 직업을 얻는 일은 쉽지가 않았네. 2030년대의 동아시아연방은 세계 일류의 경제 강국인 일면 다민족 다인구 국가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나 정도의 인물은 빗자루로 쓸어 담을 만큼 흔했네. 그러니 어떠했겠나. 나는 곳곳에서 거부를 당하여 취업전선의 높고 높은 벽을 실감하며 자신의 무능에 화를 내곤 하였네. 그리고…, 나는 가장 불출스럽게도 아내를 팔고 말았네.
인재가 너무 많은 시대에 계급의 후광을 입지 못한 나그네족 출신이 살아남는 길은 무언가 남다른 면을 보이는 것뿐이어서, 그간 개조를 거듭하여 인간 여성보다 여성적인 기능이 한결 뛰어난 예진74를 상품화시켰던 것이었네.
예진74의 친정격인 예진로봇산업에서 내 재능을 사주어서 나는 신형 여성형 로봇 개발팀의 일원으로 직장을 얻었네. 그때쯤 아내의 역을 굳히고 있던 예진74와 기능이 같은 인간형 로봇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으므로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들이 내 사생활을 보호해 준다고 하여 타협을 보았던 것이었네.
그러나 아니었네. 인기 높은 상품의 모방 생산은 자본주의 기업사회의 생리였음을 나는 몰랐네. 예진74형 로봇의 개량형으로 세상에 나온 예진88형 성기능 부착 여성형 로봇이 연방의 독신주의 남성과 노총각들에게 인기를 끌자, 어느 결에 불법 복제된 여성형 로봇이 지하 로봇시장에 나돌더니 이윽고 남성형 로봇의 생산까지 시작되고 말았네.
그대도 알고 있을 것일세. 그 무렵의 도덕군자들이 성기능 부착 인간형 로봇을 생산한 기업체와 최초 개발자인 김진욱을 파렴치범으로 몰아 무차별 공격했던 사건을. 일용품을 생산하는 공장보다 말초적 쾌락의 만족을 돕는 산업이 더한 돈벌이가 된다고 판단한 자본가들이 연방 전역을 홍등가로 만들어 놓았음을 개탄하던 군자들의 눈에 여성형 로봇을 개발해 낸 장본인이 타락 사회의 원흉으로 보였음을 원망할 수는 없겠지만, 나로서는 -우리 부부로서는-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네. 사회 전체가 한바탕 들고일어나 부도덕한 인간들-성기능 부착 인간형 로봇 생산업자들-을 매도했기 때문이었네.
그 과정에서 최초 개발자인 김진욱과 그의 사생활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네. 부도덕한 인간의 표본으로 말일세.
나는 인간계의 윤리 규범을 어긴 성도착증환자였네. 희세의 파렴치범이었고 지나친 나르시시즘으로 인해 착란을 일으킨 정신병자였네.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에 능한 편집증 환자였을 뿐만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냉대를 당한 데 분기하여 당치 않은 방법으로 복수를 시작한 피해망상증환자이기도 하였네. 세상이 예진74를 빼앗아 가려 할 때 한바탕의 저항을 보인 결과 나는 그렇게 중증 정신질환자의 명성을 획득했네.
그들이 그랬네.
“지성이 없는 사물에 대한 사랑이 소유물에 대한 애호의 수준을 벗어났다면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사회를 오염시킬 염려가 있으므로 격리시켜야 한다.”
나는 반박했네.
“사랑하고 싶은 것을 사랑하는 행위가 왜 죄가 됩니까? 나는 내 아내를 가장 기호에 맞게 만들었고, 세상의 어떤 보배와도 바꾸지 않을 만큼 소중히 여깁니다!”
그들은 연방통일전쟁 때에 분리측에 섰던 아버지가 비명에 가신 일까지 밝혀내어 나를 공격하는 재료로 삼았네. 성기능 부착 여성형 로봇의 개발은 아버지를 잃은 한풀이로 연방의 도덕과 윤리를 어지럽히려는 목적하의 수단이었다고 하였네.
나는 연방의 모든 도덕군자들과의 외로운 싸움 끝에 법에 의해 억류되고 말았네. 나와 예진74는 둘로 나뉘어 경찰청 유치장과 로봇 폐기장으로 끌려갔네.
다행히 나를 담당한 경찰청 제4국 소속 일급 수사관 소영준은 교양이 높은 사람이어서 내 입장을 이해하여 주었네. 그가 그러더군.
“당신은 현재까지 시장에 나온 로봇 중 가장 인간과 닮은 로봇을 만들어 낸 천재라고 하더군. 우리 경찰의 전문위원 중 한 분이 ‘정신질환자 속에서 간혹 나타나는 반짝 천재’라고 평한 소견서를 본 적이 있네. 당신의 생활이 보통 사람의 그 것과 다름을 꼬집은 것이겠지.”
소영준의 호의 덕택에 예심판사와 선고공판의 법관도 내 편을 들어주었네. “당신을 논죄할 법조문이 없다”고 웃던 예심판사의 호방한 얼굴은 연방의 법을 대표한 양심의 모습이었을 것일세.
그러나 여론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네. “로봇은 우리의 일터를 빼앗아 가더니 이제는 우리의 남편까지 빼앗고 있다”고 외치며 연방의 여인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네. 연방통일전쟁 직후의 혼란기에 향락산업 퇴치운동으로 정화의 바람을 일으켰던 여성의 힘이 ‘인간 이외의 물질을 아내로 맞은 성도착증환자’라는 좋은 공격 목표가 포착되자 새삼스레 폭발한 것이었네. 원래의 표적이었던 향락산업은 연방 전역을 핑크 빛으로 물들일 기세로 번창 일로를 달리고 있는데….
‘인간존중법’이라는 묘한 이름의 법이 있음을 그대는 알 것일세. ‘인간은 인간만을 사랑해야 한다’는 요지의 부칙이 있는 예의 법은, 그때에 나를 목표로 만들어진 신법이었네. 나는 급조된 ‘인간존중법’에 단죄되어 법정에 섰고, 내 아내 예진74는 범죄용 기구로 간주되어 폐기장의 용광로에 던져졌네. 내 범죄는 법 제정 이전의 것이었던 탓에 무죄가 선고되었지만, 인권을 갖지 못한 로봇은 용서를 받지 못해 용광로 행을 면할 수 없었네. 2038년 7월의 어느 무더운 날, 나는 슬픈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네.
그날 이후, 나는 다시금 나그네족이 되어 연방의 전역을 떠돌았네. 술을 먹으면 남 먼저 취하고, 논쟁이라도 벌일 양이면 상대보다 곱절쯤 큰 목소리를 내어 두 단어를 들을 때마다 네 단어로 갚아 주곤 하였네. 내 허물을 감추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상대의 허물은 몇 곱절 부풀려서 떠들곤 하였네. 인간형 로봇의 시대를 연 공로자의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막된 떠돌이가 나였네.
그대의 무대를 처음 대한 이후의 몇 해, 나는 그렇게 세류의 표면을 겉돌고 있었네. 아무 곳에나 나타나고, 무슨 일이든지 참견하고, 그러나 결과를 보기 전에 싱겁게 다음의 행로를 재촉하곤 하였네. 쏜살같이 내닫기만 하는 세사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편승하지 못한 나그네족은 그렇게 시대의 냄새를 맡는 것으로 겨우 생존을 확인하고 있었네.
두 해의 시간이 흘렀네. 연방의 서쪽 끝 지방인 티베트의 오지까지의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나는 그대의 불행에 관한 소문을 들었네. 그대가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았고, 전염병에 잃었으며, 그 충격으로 무대 위에서 쓰러진 후 명문가의 자제였던 남편에게 이혼을 당했으며, 그 후 어디론가 사라져 소식이 불명이라는 이야기였네. 연방 내의 손꼽히는 명문가의 하나였던 그대의 시가는 그대가 가진 젊음과 아름다움과 명성을 결혼이라는 수단으로 샀으나, 일가의 번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고 내쳤던 것이었네. 나는 나그네족답게 충천 분기하여 동료들과 함께 예의 명문가를 성토하는 한바탕의 소동을 벌였지만, 법률을 방패로 성을 쌓고 있는 그들의 서슬에는 별무신통이라 다시금 경찰청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었을 뿐이었네.
다시 만난 경찰청 제4국 소속 수사관 소영준의 우정 덕에 나는 며칠간의 영어생활로 풀려 날 수 있었네. 소영준은 나그네족의 협객 기질을 이해하는 의혈남아였기 때문에 예의 명문가의 항의를 묵살했던 것이네.
그리고는 별수 없이 나그네족의 여로…… 사랑하는 이를 빼앗겼고, 좋아하는 이의 불행에 도움도 되지 못한 나그네족 김진욱은 자신의 무능을 조소하며 거리에서 거리로 잘도 돌아다녔네.
동아시아연방이라는 국가의 성립이 경제지상주의의 세계적인 조류에 밀려 다소간의 억지를 무릅쓰고 이루어진 것이었던 만큼 그 무렵의 연방에는 탈도 많고 한도 많았네. 그러나 나는 무능한 나그네족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후였으므로 애써 사건이 있을 법한 곳을 피하면서 그저 떠돌 뿐이었네.
문득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었다…고는 하지만 실은 더는 갈 곳이 없었네. 일본열도에서부터 고비사막까지를 종단한 여행을 끝으로 나는 서울로 향하는 열차 속에 있었네.
대륙횡단열차의 나는 듯 빠른 속도를 나는 즐거워하지 않았네. 그러나 이 도무지 매력이 없는 자본주의 사회는 교통기관의 속도를 나날이 높여만 갔으므로 열차여행은 나그네족이 선호하는 완만형 고향행의 그 나마의 근사치에 속했네.
옆자리의 승객이 펼치고 있는 전자신문의 화면을 어깨 너머로 훔쳐보는 것은 나그네족의 권리였네. 나는 흥미 위주의 기사로 도배를 한 대중전자신문을 주인보다 자세히 읽고 더 큰 소리로 웃어댔네.
오늘의 뉴스가 반절쯤 나왔을 때였네. 뜻밖에도 그대의 이야기가 발견되었네. ‘왕년의 대무희, 비극적인 생애를 마치다’의 제하에 전성기의 그대 모습과 무대 위에서 쓰러졌을 때의 모습이 나란히 영상으로 떠올랐네. 그리고 그대의 최후에 관한 기사가 이어졌네.
그대는 아이를 잃은 데 대한 자책감과 결혼에 실패한 충격으로 한동안 우리들 나그네족보다 더한 방황을 하였던 모양이었네. 아마 실성을 하였던 게라고 기사를 꾸민 기자는 해설하고 있었네. 대륙횡단열차를 이용하는 장거리 여행자들을 주요 고객으로 하는 대중전자신문의 속성상 흥미꺼리 기사를 찾았던 모양인 예의 기자는, 그대의 사정을 알게 되자 의협심이 발동하여 그대의 시가였던 명문가를 무차별 공격하고 있었네. 다음은 내가 기억을 살려 발췌해 본 기사의 내용이네.
-기자는 지방의 소도시를 떠도는 유랑극단에 왕년의 스타를 닮은 무희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2년 전 실종된 어떤 이름을 기대하여 공연장을 찾았다. 그러나 10여명의 무희가 공연의 준비를 하고 있는 연습장에 들어섰을 때 기자는 ‘이건 아니다’의 느낌을 받고 -너무 허술한 무대며 출연진의 활기가 없어 보이는 기색 등으로- 돌아서다가 혹시나 하는 기대로 그녀의 소재를 물었지만 아는 이가 없었다.
돌아 나오는 기자의 뒤를 한 무희가 따르며 “확실치는 않지만 심증이 가는 이가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 무희는 “몇 달 전 혼자 굴러든 여자가 있었는데 기품이 예사롭지 않아 이름을 물었지만 알려 주지 않았다. 우리들 싸구려 유랑극단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 연기를 하여 인기를 한 몸에 모았는데, 공연 도중에 쓰러져 지금은 병원에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기자는 무희의 안내로 지방도시의 작은 병원을 찾았다. 그곳에는 병마와 최후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한 여류 예인이 있었다. 기자는 왕년에 만능연예인으로서의 영예를 누렸던 대스타의 영락한 모습을 발견하고 가슴 아파 하며 그녀를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한 어떤 명문가의 위선적인 면모에 울분을 터뜨렸다.
병석의 여인은 애써 밝은 모습을 보이려 하였지만 이틀 후 끝내 눈을 감고 말았다. 그녀의 임종을 몇 명의 유랑극단 단원들과 함께 지켜 본 기자는 재능이 탁월한 예술인의 최후를 이토록 쓸쓸하게 만든 사회 풍조에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는 서둘러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네. 대중전자신문은 그대의 죽음을 어제로 보도하고 있었고, 다행히 장례지도 열차가 지나는 곳에서 멀지 않았으므로 서둘면 그대의 마지막 가는 길을 전송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네.
그대의 장례식은 대중전자신문이 예고한 바와 같이 쓸쓸하기 짝 없는 것이었네. 나는 기사를 쓴 기자와 일행이 되어 운구 행렬의 뒤를 따랐네. 다혈질의 기자는 육두문자를 함부로 뱉으며 그대를 내친 명문가를 비판하고 있었네.
“연락을 했죠. 전화로, 편지로. 반응이 없어서 그쪽 지역 담당 기자를 직접 방문케도 하였고요. 한데 통하지가 않아요. ‘삼류 계층 출신을 아내로 맞았던 것도 창피한 일인데 절연 후까지 신경을 쓰게 만든다’고 펄펄 뛰더래요. ‘못된 것들이 제 놈들 명예만 소중해서 돈을 주며 기사로는 내지 말아 달라고 하더라’고 그쪽에 갔던 기자가 치를 떨더군요.”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계획을 떠올리고 있었네. 그리고 그가,
“분한 것은 그런 치들이 우리의 연방을 끌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유민주국가를 표방하고 건국된 동아시아연방도 30년쯤 연륜을 쌓자 고급관료와 재벌로 대표되는 귀족 계급을 만들고 말았어요. 우리 신문은 그녀의 억울한 죽음에 관한 특집기사를 준비해 두었는데 압력이 들어와 싣지 못했습니다.”
하고 말했을 때 결심으로 굳혔네.
춤을 추게나, 친구여. 그대가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고 짙게 분장을 하고 유랑극단의 무대에 섰을 때의 아픔을 공간에 흩뿌리게나. 모두들 춤을 추고 있는 시대일세. 입가에는 탐욕을 담고 눈빛에는 의심을 담은 인간들이 남 먼저 달리려고 춤을 추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네. 친구여, 춤을 추게나. 그대는 춤을 추어야 하네.
-나는 그대를 무덤으로 전송했네. 그러나 나는 그대를 이승에 붙잡아 두었네. 나는 그대를 무대에 올렸고, 그대는 춤꾼으로 재생되었네. 그리고 다시 춤을 추었네. 그대는 보다 높은 도약과 율동을 예사로 하고, 다시는 무대 위에서 쓰러지지 않을 최고의 모습으로 부활하였네.
2042년의 봄의 어느 맑은 날, 동아시아연방의 시민들은 대중전자신문에서 ‘왕년의 대스타 재기 무대에 서다’의 기사를 보았네. 시민들은 행방을 감춘 지 몇 년이고 죽었다는 풍문이 돌던 대스타의 돌연한 재기에 의아해 하면서도 잃었던 무대를 다시 보게 된 기쁨에 환호하며 연방대극장으로 모여들었네.
시민들은 보았네. 전성기 때의 발랄한 모습을 하고 더욱 섬세한 동작과 난도 높은 율동을 보이는 그대의 춤을. 그대는 알에서 깨어나 애벌레가 되고 고치를 지은 후 이윽고 세상으로 나가는 나방이의 한살이를 인생에 대입하여 춤극으로 엮고 있었네.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는 자연이 주는 온갖 시련-비, 바람, 평온치 않은 기온, 천적들-을 견디며 성장을 했네. 때때로 경련을 일으킨 듯 와들와들 떨고 있는 그대의 춤사위는 갓 깨어난 애벌레의 세상을 향한 두려움의 표시였을 것이네.
고치를 만들고 번데기가 되어 그 속에 웅크려 새봄을 기다리고, 다시금 광명을 보는 환태의 시간 동안 그대는 내내 인고의 행각을 계속하였네. 한 순간의 영광을 위하여 애벌레는 자신을 먹이로 알고 덤벼드는 새떼로부터 몸을 감추었고, 살을 깎아 실을 내어 고치를 지었네. 그리고 긴 겨울을 견디어 내었네.
겨울은 추웠네. 그리고 길었네. 그 긴 겨울, 관객들은 애벌레의 웅크림에 호응하여 저마다 몸과 마음을 겸손히 하였네. 그대의 무대가 갖는 특색인 관객과 연기인의 일체화가 재현된 것이었는데, 그대의 춤은 인생이란 본시 고치 속의 고난에 다름 아님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일세.
드디어 우화의 순간, 흉물스럽기만 했던 애벌레는 멋진 날개를 단 나방이가 되어 하늘로 날아올랐네. 좌우대칭의 기막힌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날개를 자랑하는 나방이는 무대 위의 상공을 선회하며 너풀너풀 춤을 추어 생의 환희를 구가했네.
인간 비행-그것은 파천황의 춤이었네. 공연이 시작된 이후 내내 관객들은 ‘다음은 이런 장면이겠지’의 기대가 매번 무너지곤 하는 상상 이상의 춤사위에 자신의 지적 능력에 대한 회의를 키우는 한편 그대의 높은 재능에 박수를 보내곤 하였는데, 인간 비행의 공중무용은 그러한 차원 이상의 것이었으므로 상식이 무시된 충격으로 잠깐 어리둥절해 있었네.
그때쯤 나는 무대 위에 나타났네. 그리고 외쳤네.
“이 무희는 전날 무대 위의 만능 연예인으로 소문이 높던 진화란의 재생인 무용수 로봇입니다. 여러분도 짐작하셨을 테지만 이 로봇의 춤은 생전의 진화란이 가졌던 모든 영화와 연극의 무대를 입력받은 전자두뇌가 연출하는 환영예술입니다. 주어진 프로그램대로의 영상을 나타내는 입체영화와는 달리 상황에 따라 다른 장면을 만드는 능력을 가졌으므로 생각하는 홀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이 무희는 진화란의 재능을 물려받은 영상로봇으로 생전의 진화란이 육체에 매여 할 수 없었던 상상 속의 춤사위를 영상으로 나타내고 있는 셈입니다. ‘예인은 가도 그의 예술은 남는다…’ 바로 창조 지능을 가진 인조지성체 영상로봇 무용수의 등장이지요. 하하하!”
한바탕의 사설과 긴 웃음소리를 끝으로 나는 -내 입체영상은- 무대 위에서 사라졌네. 여전히 그대의 비행무용은 계속되고 있었고, 홀연 다가온 뜻밖의 상황에 미처 적응치 못한 관객들은 사뭇 침묵을 지킬 뿐이었네.
춤을 추게나, 친구여. 하늘과 땅과 사람들이 그대의 아픔을 느낄 수 있도록 공간에 널리 한을 흩어 뿌리게나. 어린이가 즐거워 웃어도, 어른이 정통의 예술이 아니라고 비웃어도, 어느 곳 어느 시대에나 반드시 있기 마련인 얼치기 휴머니스트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미친 짓이라고 들고일어나더라도, 우리는 함께 외쳐야 하네. “대지를 탈출하여 4차원 환상무용에의 가능성을 보인 우리의 공중무용은, 인습의 횡포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대표한 자유선언이었노라!”고. 친구여, 춤을 추게나. 그대는 춤을 추어야 하네.
첫댓글 알렉산드로 대왕이 진리찾아고초려라도 할 요량으로”라 물었을때.. “왕이시여 당신이 햇볕을 가리고 있으니 비켜라.”고 한 디오게네소스의 초월답에서 받았던 느낌이토틀의 진리에 실어주던 비중감이
디오게네소스를 찾아가 .....
“무엇을 원하는가
스승이었던 관념 속에서 진리를 찾아 유랑하던 플라톤보다
제자였던 선험적 진리를 피력하던 아
몸소 나그네가 되어 4차원 홀로그램속의 유토피아를 보면서는 재역전인셈인가 싶구요.
잠언 5장 담장 밖으로 넘기지 말아야 할 것이 또한 부부의 일이라는 것.....
그 점에는 허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쉽구요.
스스로 성상품화 하는 경향은 프로이드는 어릴 적 특정시기에 성동일시과정의 고착증세라고
했었는데 무엇이 이토록 인간세계를 그저 종분류에 속하는 사반나로 내 몰고 있는 지
노골적인 성상품화와 전자사회전반에 흐르는 양심빠진 가치에 대한 냉소적인 비판에서와
춤사위와 자태가 예사롭지 않았다는 유랑극단에서 공연 중에 쓰러졌다는 무희에게 붙인염원 등에서는
이상의 소설 <날개> 마지막 부분 바위 위의 모습도 투영되고요
심오함이 담겨 있는 과하객님의 차원 높은 소설이어서
근데 저는정처없이 유리하다 기둥에 부딪혀서 얼결에 잠이 깨어
사실 뭘 읽었는 지 모르면서 비몽사몽간에 몽유병자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것도 같구요.
고맙습니다.
심오함도 철학도 없는 SF인데 너무 높게 보아주셨네요. 있다면 스스로 빠져 든 파괴적 몰아에서 헤어나지 못한 얼치기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소설이라는 방편을 빌어 엉뚱한 상황으로 설정해놓고 뒷감당을 못해 횡설수설 얼버무린 것 뿐인데.....
절망을 만드는 게 인간이라면 희망을 만드는 것도 인간일 수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설정에서, 그나마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게 SF문학의 장점이지요. 니체가 말한 초인론에서 신의 영역인 초현실 세계를 인간의 나아갈 방향으로 풀어본 적이 있는데, 서구의 SF 거장들이 끝없이 추구하는 인간해방의 방법론으로서의 글쓰기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이 우리를 가장 닮게 창조하신 이유를 풀어보고 싶다고 하신 SF문학 선배들의 뜻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기왕에 여기까지 온 인간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 미리 달려볼 수 있는 것이 공상과학소설의 특장인데 감히 흉내를 내보곤 합니다.
이상의 '날개'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분 역시 현실에서는 찾지 못한 무언가를 얻는 방법으로 그런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 주인공을 밀어넣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러고 보니 '날개' 역시 SF의 아류인 환상문학일 수도 있겠네요.
횡설수설 별 의미없는 소리를 길게 늘어놓았네요. 매번 부끄러운 글을 읽어주시고 좋은 평을 주시는 카론샘 님께 감사드립니다.
의정부 미군부대 카투사로 재직하던 시절 하고
어느 미군이 고무로 만든 인조 여성 인형을
미국에 신청해 볼테니 사용 해보겠는가
제안한 적이 있었습니다.
호기심은 갔지만 사람도 아니고
단지 인형을 사고 싶지않아 거절한 적이 있는데
형님의 SF 소설인 로봇시대 이야기를 보면서
당시의 에피소드가 갑자기 생각 났습니다.
본 글은
유한한 인간을 대신하여
거의 불가능의 영역을 소화해 주는
로봇을 의인화 하여 인격을 가미한
단편 소설로서 깊은 생각이
내재된 글이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만이
그려낼 수 있는 글이라 생각되네요.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SF작가 중에서 가장 심취했던 이가 아이작 아시모프였습니다. 그의 로봇 시리즈를 보면서 '참 이야기도 잘 만든다'하고 감탄을 했었는데 나중에 조금 깨인 후 생각해 보니 '인간애가 있는 SF가 아니다'하는 감상이 생기더군요.
그런 면에서 데즈카 오사무(手塚治)의 아톰 시리즈는 성공한 것 같습니다. 꼬마 아톰이 겪는 인간적인 고통들이 매번 가슴에 닿더군요.
'사랑회로를 가진 로봇'을 착상하게 된 건 그 영향을 받아서일 것입니다. 미래 어느 때인가는 인공지능이 스스로 반려를 찾으리라 믿고 그 과정 속에서 이야기를 찾아본 것이지요.
시리즈로 여러 편을 써두었는데 기억이 나는 대로 계속 올려 보겠습니다.
댓글까지도 심오하네요^^~~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자주 뵙기를 바랍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