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만은공계 선영 안내글
① 4세조 밀직사·양관대제학공 (휘 浚,峻 준)
문과급제하고 덕령부주부·대언·정방제조·밀직사지신사·밀직제학·예문관춘추관 양관대제학을 지냈다. 고려말까지 사돈어른 익재 이제현 재상과 함께 왕 측근 요직을 수행하였다. 공민왕 5년 반원정책 추진 시 반역 소문에 연루되어 10여일 옥고를 치렀으나 오로지 직책 소임에만 충직하였기에 왕이 친히 사면을 명했다고 고려사에 나온다.
부인은 판사를 지낸 전의인 이광기李光起의 따님이다. 1남 1녀를 두셨다. 휘 保보, 사위 밀직사·진현관 대제학 파평인 윤취尹就이며, 사돈은 종부령 윤보尹輔이다. 묘는 합천군 가회면 두심1길 86, 운구대 옆에 부인과 합분이다.
증조부이자 풍산홍씨 시조이신 국학직학공 휘 지경之慶께서는 고려 고종29년 문과 장원급제하고 국학직학을 지냈으며 안동 풍산을 관향으로 하여 시조가 되었다. 증조모는 순천김씨이며, 2남을 두셨다. 휘 간侃, 추밀사 휘 비備이다. 묘는 안동 풍천면 신성리 산99-2에 있고, 부인 묘는 시조묘 능선 아래 산79에 있다.
조부이신 2세조 홍애공 휘 간侃은 고려 원종7년 문과급제하고 동래현령·도첨의사인·지제고를 지냈다. 고려 12대 문장가로 홍애집 문집이 전하며 성품이 강직하여 왕에게 충언을 하시다 동래현령으로 좌천되시어 현지에서 운명하셨다. 조모는 사헌규정을 지낸 삼가인 오숭吳崇의 따님이다. 1남 1녀를 두셨다. 휘 유侑, 사위는 중랑장 창녕인 성군부成君阜이며, 사돈은 판서 성공필成公弼이다. 묘는 창암정 뒤 봉화산 기슭, 신성리 산124에 부인과 합분이다.
부친이신 3세조 삼관대제학공 휘 유侑는 고려 충렬왕 20년 문과급제하고 상호군사·밀직사·진현관보문각춘추관 삼관대제학을 지냈다. 모친은 밀직사·판도판서를 지낸 여주인 이경무李景茂의 따님이다. 3남 1녀를 두셨다. 제학공 휘 溟명, 대제학공 휘 演연, 휘 浚준, 사위는 종박부령 경주인 이서종李瑞種이며, 사돈은 정승·계림부원군 익재 이제현李齊賢이다. 묘는 신성리 시조묘 아래에 부인과 합분이다.
② 5세조 좌산기·직제학공(휘 保 보)
문과급제하고 장령·산기상시·지제고·직제학을 지냈다. 조선 개국신하로 산기상시로 국사에 임하면서 선조의 정직·강직함을 이어받아 왕에게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 조선 태조 2년에 백성들의 의심과 흉흉한 소문을 정리하고자 상언하셨다가 안동으로 귀향하는 일을 겪으셨다.
부인은 이부상서·동북면병마사·판개성을 지낸 남양인 홍유구洪有龜의 따님이다. 1남 3녀를 두셨다. 휘 재載, 사위 여흥인 이심李審은 관찰사·도호부사·이조참판·원종공신을 지냈고 사돈은 한림학사와 대사성을 지낸 이고李皐이다. 창녕인 조비형曺備衡은 절제사·도총제·공조판서를 지냈고 사돈은 병마절제사를 지낸 조익수曺益修이다. 정무공 행주인 기건奇虔은 호조참판·대사헌·판중추원사·청백리를 지냈고 사돈은 공조전서를 지낸 기면奇勉이다. 묘는 운구대 옆 선친 옆에 부인과 합분이다. 원묘는 서울 동작구 국사봉에 있는 사자암 옆의 고개 남쪽이였다. 이조참판공 이심의 외손자인 담양인 현감 전실이 큰아들 승우에게 원묘소 중추절 시제에 보냈다는 귀재패록 내용을 여흥인 이재영 외손이 전하였다. 이러한 외가의 효성은 풍홍이 깊게 새기고 감사해야 할 일이다.
③ 6세조 양관대제학 문정공 만은(휘 載 재)
고려 공민왕 18년 문과급제하고 소윤·군사·판도판서·예문관춘추관 양관대제학을 지냈다. 자는 덕유, 호는 만은, 시호는 문정공이다. 문정文貞은 “학문과 덕망이 뛰어나고 절개와 충절이 굳다”는 뜻이다. 고려 성리학 대가이자 정치가인 목은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재주가 사뭇 빼어나 총애를 받았다. 고려말 신돈의 방자한 정치에 탄식하며 “세상에는 용방과 비간 같은 신하가 없지 않은데, 어찌하여 은나라의 탕왕과 주나라의 무왕 같은 임금은 없는가”하며 공민왕에게 나아가 뜻을 아뢰려 하였다. 이에 목은 선생께서 그 의지와 기개를 옳게 여기시면서도 말씀하시길 “왕의 얼굴을 대하고 간쟁하는데에도 때가 있는 법이거늘, 어찌 나비가 등불에 달려들어 스스로 화를 부르려 하는가”하며 만류하였다고 만은선생실기에 행록이 전한다.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치은 길재, 송은 박익 등과 함께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두문동 72현賢이자 8은隱 가운데 한 분이다. 고려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경남 삼가현 황매산 아래 두심동에 은거하였다.
부인은 감찰을 지낸 이요당 밀양인 박흥거 朴興居의 따님이다. 4남 1녀를 두셨다. 참군 휘 흡洽, 휘 양洋, 생원 휘 상湘, 서령 휘 두, 사위는 대사간·도승지 화순인 최한후崔漢侯이고 사돈은 의정부 검교위·우찬성을 지낸 최선문崔善門이다. 묘는 운구대 아래에 부인과 합분이다. 원묘는 유명에 따라 안동 소산촌 금가촌 후에 안장하다 하였으나 누차의 병란으로 묘소가 실전되어 초혼장으로 봉영하였다.
7세조 만은공의 4남 1녀의 장남 참군공 휘 흡洽의 부인은 군사를 지낸 고흥인 유유柳侑의 따님이다. 5남 3녀를 두셨다. 어모장군 휘 옥석玉碩, 휘 계석繼碩, 교수 휘 은석銀碩, 교수 휘 연석璉碩, 휘 우석瑀碩, 사위 하명천河明天, 파평인 윤시형尹時衡, 진사 경사창慶嗣昌이다. 묘소는 운구대 뒤 황매산 기슭의 둔내리 산74에 부인과 합분이다. 차남 휘 양洋은 후무이고, 삼남 생원공 휘 상湘의 부인은 사정을 지낸 은율인 송계중宋繼中의 따님이며 슬하 4녀를 두셨다. 사위는 최중온崔仲溫, 정보鄭輔, 박숙朴塾, 송구몽宋龜蒙이다. 사남 서령공 휘 주澍는 문과급제하였고 부인은 사예를 지낸 상산인 김장춘金長春의 따님이다. 3남 2녀를 두셨다. 대사간 휘 수修, 생원 증예조참의 휘 신伸, 휘 유攸, 사위는 충찬 변진卞珍과 생원 송휘宋徽이다.
④ 운구대
“구름이 사방으로 오가는 누대”를 의미하는데, 고려말 불사이군 충절로 은둔한 만은·금은(재령인 이오), 모은(함안인 조열) 세 분께서 서로 위로하며 시를 읊던 장소이다. 운구대 암벽에는 “만은선생이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시던 곳“이라는 뜻의 “만은선생장구지소晩隱先生杖屨之所”가 새겨져 있으며, 경남 기념물 제262호로 지정되었고 만은공 또한 경상남도사史 역사 인물로 등재되었다.
⑤ 유허비
운구대에 있는 최초 유허비는 1949년 음력 7월 15일 백중 중원절에 만은선생 행적과 충절을 기리는 내용으로 세웠다. 그 이후 1964년 운구대 아래에, 2000년에 운구서원 옆 유적비 옆에 세웠다. 내용은 3기 모두 동일하게 만은공 행적과 정신을 기리는 글이다.
⑥ 운구서원
운구서원은 삼가현 장단마을(합천군 대병3산로 187)에 세워져 전교를 받아 운영되었다. 1773년 왕 하교에 따른 예조 전교문에 학생수, 운영자금 조달, 군역처리 등에 관하여 적혀 있다. 1786년 만은공 봉안 후, 1796년 금은·모은 선생도 함께 배향되었다. 1833년 운구서원을 중수하였으나, 1868년 대원군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구 운구서원터에는 타성씨의 재실이 서 있고, 최초 운구서원을 표시하는 표주석만 남아 있다. 1964년 운구대 옆에 운구서원을 재건하였으며, 36년 뒤 노후화된 서원을 2000년에 재중수하였다. 운구서원 내에 있는 운구서당기·운구서당상량문·운구부에는 서원의 내력과 선생의 정신을 기리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⑦ 유의문
서원 입구 대문에는 유의문由義門 현판이 걸려있다. “인仁에 머물고 의義를 따른다”는 뜻으로 인의정신으로 풍홍을 빛내야 함을 의미한다.
⑧ 삼은 三隱 유적비
삼은 유적비는 고려 말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키며 두문동에서 두문불출 은거한 72현 가운데 만은공과 함께 배향되었던 금은·야은의 충절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고자 2001년에 건립하였다.
⑨ 공적비
죽암 동식 공적비는 문중을 위하여 18년간 만은공계 회장과 대종회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운구서원 재중수, 운구대 선영 조성, 4세조에서 6세조까지 초혼장 봉영, 7세조에서 11세조까지 봉분과 설단 정비, 만은선생실기 국역 등 헌신적인 공을 기리고자 2005년에 세웠다.
⑩ 만은선생실기
1424년 이조판서·대사헌·우의정을 지낸 문정공 고불 맹사성이 행록을 짓고, 1788년에 관찰사·이조판사·양관대제학을 지내신 족후손 문헌공(휘 양호)이 유사를 쓰고, 이조참판 문일공(휘 승헌)이 서문하여 1898년에 『만은선생실기』를 발간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되어 있는 원본의 내용은 1992년에 국역 발행되었다. 내용은 서문, 8은隱·72현賢·사우師友 명단, 운구서원 전교문, 시詩, 부시附詩, 잡저雜著, 부록, 발문으로 되어 있다. 아래는 실기의 한시 중 일부 제목이다.
滿月臺聞杜鵑 만월대 두견새 우는 소리 들으며, 過驪江 여강(여주 가는 남한강)을 지나며, 雲衢臺傷春 운구대에서 봄을 슬퍼하며, 題詠歸臺壁上 귀대벽에 시를 붙이며, 登樓望京 누각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며, 謫居 타향살이, 送李杏村嵒 행촌 이암을 보내며, 贈李茅隱 돌아가신 이모은에게 올리며, 自輓 스스로 애도하며, 紫薇下酬李茅隱午 모은과 술을 주고 받으며 자미화 아래서, 見沙鴗有感 백로를 보며 느낀 바, 曉起 새벽에 일어나, 楓岳 금강산, 忘機臺 망기대에서, 過道峯寺 도봉사(도선사)를 지나며, 暮過楮子島 저녁에 저자도(서울 뚝섬)를 지나며
⑪ 풍산홍씨 현황
2008년 발행된 풍홍 대동보인 무자보 기준 총 종원수는 6만여명이며 큰집 남평공계는 2만8천여명 46%, 생원공은 5백여명 1%, 사정공계는 2만여명 34%. 작은집인 만은공계는 1만2천여명으로 19%이다.
상기 만은공계 직계 외에 큰집 4세조 휘 명溟은 제학, 휘 연演은 대제학, 5세조 휘 구龜는 랑장, 6세조 휘 이伊는 현령, 휘 의儀는 생원, 휘 숙俶은 사정을 지냈다. 7세조 이후 3대는 고려말 불사이군의 충절과 중앙에 나아가지 말라는 선조들의 유훈에 따라 초야에 묻혀 지냈으나,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10세조 모당(휘 이상履祥) 장원급제·대사헌에 오르면서 다시 풍홍의 중흥이 시작되었다.
선조 따님 정명공주의 영안위(휘 주원), 장조(사도세자)의 헌경왕후(혜경궁 홍씨), 정조의 원빈홍씨, 정조 따님 숙선옹주의 영명위(휘 현주), 한말 흥선대원군 장남 흥친왕 이재면과 승정원우부승지(휘 병주) 따님의 국혼으로 조선왕실과 누대를 거쳐 이어졌다.
그 외 호당 9명, 문형 8명, 청백리 6명, 정승 5명으로 전체 성씨중 인구수 대비 문과급자 1순위에 오른 문벌 집안으로 성장하였다. 고증학과 실학의 토대를 구축한 문헌공(이계 휘 양호), 풍홍대동보를 만든 첨지중추부사 몽헌(휘 만종)과 관찰사·대사간·우참찬·청백리 만퇴당(휘 만조), 관찰사·이조판서·좌의정 연천(휘 석주) 등과 같은 대학자들을 배출하였고 130여종 문집과 300여종 저술을 남겼다. 한일합방치욕에 국치순절한 금산군수(휘 범식), 만주 항일독립운동가 이조참판 문일공(휘 승헌), 임꺽정전을 지은 조선 3대 천재 벽초(휘 명희), 임시정부 국무령 홍진(본명 면희), 제헌국회의원과 내무부차관을 지낸 홍범희, 재무부장관을 지낸 홍승희, 한국 최초 천주교 수덕자 농은(휘 유한), 순교자 홍낙민,홍재영,홍병주,홍영주 등 많은 위인들을 배출하였다.
2026.00.00 풍산홍씨 만은공계 문중
【자료 출처】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실록, 풍홍보감, 만은선생실기, 귀재패록, 한국학중앙연구원디지털장서각,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 한국학자료센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가유산청국가유산포털,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한국족보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