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운동사① : 비밀결사의 산실, 경성제국대학
1924년 1월 조선총독부는 경성제국대학 첫 신입생 모집요강을 발표했다. ‘경성제국대학 창설준비위원회’가 발족한지 불과 2달 만이었다. 시험을 준비하며 촉각을 세우고 있던 조선의 학부모들은 이내 실망감을 드러냈다. 신입생 모집 정원은 일본인 124명, 조선인 44명 등 총 168명이었다. 모집 정원이 적을 것이라는 소문은 돌았지만, 일본인과 조선인 선발 인원 차이가 이 정도로 극심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총 647명의 지원자 중에 예과 제1회 문과A(법과 진학반) 수석을 차지한 것은 경성제일고보(경기고의 전신)를 졸업한 조선인 유진오였다. 세 배 가까운 선발 정원 차이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이 수석을 차지하자 총독부에는 싸늘한 냉기만 감돌았다.
1925년 4월, 최용달·이강국·박문규·이효석·이희승·고유섭 등 2회 입학생 44명이 입학했다. 이 무렵 경성제대에는 문우회·동숭회·낙산문학회와 같은 자생적인 조선인 모임이 만들어졌다. 유진오가 주도한 문우회에는 이강국·이효석·이희승·고유섭·김재철·김태준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민족의식의 필요성을 담은 학회지 《문우(文友)》를 발간해 재학생들에게 배포하기 시작했다.
적색공작의 수괴, 미야케 시카노스케
1926년, 일본공산당 비밀당원인 미야케 시카노스케 교수가 법문학부에 부임했다. 미야케는 유진오를 중심으로 문우회를 <경제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재조직으로 재편했다.
연구회는 밖으로 ‘조선경제의 현실을 연구’한다고 표방하였지만, 안으로는 사회주의 저작을 공부하는 ‘비밀독서회’였다. 연구회는 독일과 일본에서 유입된 마르크스와 사회주의자들의 저작들, 마르크스의 자본론,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초철학서인 게오르기 플레하노프(Georgi Plekhanov)의 《유물론사 연구》, 니콜라이 부하린(Nikolai I. Bukharin)의 《공산주의 ABC》, 레닌의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단계》 등을 학습했다.
1929년 법문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한 유진오는 형법연구실과 법철학연구실에서 조수로 일하면서 활동을 계속했다. 경성제대와 연희전문뿐만 아니라 중앙고보와 보성고보 등에도 반제국주의를 선동하는 선전물과 소책자들이 나돌았다. 구체적인 확증을 확보하지 못했지만 경제연구회가 배후라고 확신한 경성제대는 연구회의 해산을 통보했다.
1929년 통영출신으로 경기제일고보를 우등으로 졸업한 신현중이 경성제대에 입학했다. 입학 동기는 청주고보의 수재로 유명한 정태식이었다. 법문학부로 진학한 신현중이 우연히 만난 인물은 의학부 1년 선배인 조규찬이었다. 두 사람은 출신학교도, 고향도, 전공도, 거주지도 전혀 공통점이 없었다. 신현중의 부친은 총독부 관료였고, 조규찬의 부친은 가난한 농민이었다. 두 사람의 유일한 공통점은 경성제대에 다니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전라남도 화순군의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조규찬은 광주고보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경성제대에 입학했다. 조규찬이 의학부에 진학하자 부모와 가족들은 경성제대 인근의 효제동으로 이주를 결정했다. 조규찬은 집안의 유일한 기대주였다.
일제강점기의 반제국주의 운동
1931년 두 사람은 법문학부와 의학부 학생들을 중심으로 비밀독서회를 조직했다. 이 무렵 일제는 공공연히 만주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것은 곧 현실이 되었다. 일제가 만주침략을 강행하자 경성은 싸늘한 소식들이 나돌았다. 만주는 독립운동의 거점일뿐만 아니라 수십만 동포가 거주하는 제2의 조선이었기 때문이었다.
신현중과 조규찬은 비밀독서회를 개편해 <경성반제부>를 조직했다. 특이한 것은 반제부에 일본인 학생들이 참여한 것이다. 반제부는 반전운동을 확대하기 위해 경성의전·경신학교·기독교청년회 등을 포함하여 <반제경성도시학생협의회>를 결성했다.
1931년 9월, 반제협의회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인사동의 조선극장 주변에 <반제학생신문>을 배포했다. ‘반전격(反戰檄)’이라는 제목이 붙은 격문은 신현중이 작성했다. 신문 배포책임자가 검거되면서 50여 명이 잇달아 연행됐다. 두 달 후 반제협의회 사건은 조선일보 사회면 전면을 장식했다. 조선에서 반제국주의운동이 본격화된 신호탄으로 작동했다.
1929년 1월, 원산노동자 파업이 시작됐다. 문평제유공장의 일본인 지배인과 관리들의 빈번한 폭행과 차별을 견디다 못한 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하자 <원산노동연합회>는 부두노동자들에게 문평제유의 물류운송을 거부할 것을 촉구했다. 부두노동자들이 모든 상품에 대한 운송을 거부하는 총파업을 단행하면서 원산 전역의 경제는 순식간에 마비됐다. 경제연구회는 최용달을 대표로 파견했다. 최용달은 85일간 계속된 일제강점기 최대파업을 조사해 보고서를 작성했다. 경제연구회는 보고서를 전국에 배포해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고 연대를 촉구했다.
1936년 이강국이 독일유학을 마치고 국내로 돌아오자 최용달은 원산총파업에 개입했던 이주하 등과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노동자신문>을 발행하며 적색노조 건설을 시작했다. 원산철도를 시작으로 원산지역의 적색노조를 건설해가던 최용달은 1938년 가을 ‘적색노조 원산좌익위원회사건’으로 검거돼 4년형을 선고받았다.
1930년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한 박문규는 경제연구실 조수로 근무하면서 학업을 이어갔다. 이듬해 가을, 반제협의회 사건으로 연행되었지만 관련혐의를 입증하지 못해 석방되었다. 불령선인이라는 꼬리표가 박문규를 따라다니자 한동안 연구에 몰두하면서 일경의 시선을 피해갔다. 이 시기 박문규는 <조선농촌기구의 통계적 해설>과 <농촌사회분화의 기점으로서의 토지조사사업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농업경제학자로 변신했다. 농업경제학 시조의 디딤돌을 놓은 인물은 박문규였다.
남북한 제헌헌법을 기초한 두 사람
해방 후 여운형의 주도로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자 최용달, 이강국 등과 참여해 인공의 재정을 총괄했다. 인공이 미군정에 의해 해산되자 토지개혁과 농민운동의 방향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해방된 조국의 구조개혁 방안을 계속해서 주창했다.
1946년 겨울, 박헌영의 주도로 남조선로동당이 창당되자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토지개혁과 농업개혁의 이론가가 필요했던 박헌영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한 인선이었다. 남로당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는 가운데 박헌영마저 월북하자, 1948년 정부가 수립된 직후 스스로 북한으로 넘어갔다. 함께 북한으로 넘어온 최용달이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헌법의 초안을 기초하자 자문위원으로 농업과 경제체제의 틀을 확립하는데 참여했다. 북한정부가 수립되자 농림상으로 선출되어 북한 농업구조를 재편했다. 박헌영·이강국·최용달 등 남로당 출신들이 모두 숙청을 당할 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남한에 남은 유진오는 제헌헌법을 기초했다.
1926년 이리농림고 출신인 김태준이 경성제대에 입학했다. 실업계 출신으로 경성제대에 입학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실업계 출신이라는 학력 탓에 김태준은 입학과 동시에 경성제대 모두에게 회자되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력 탓이었는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유진오는 신입생에게 경제연구회에 참여를 권유했다.
법문학부로 진학한 김태준은 다른 수재들과 달리 지나문학(중문학)을 선택했다. 향가와 이두를 통해 우리말의 기원과 국문학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경제연구회 소속이었지만 주요 사건과 연루되지 않고 대학을 졸업했다. 평탄하고 무색무취한 대학생활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1931년 대학을 졸업한 김태준은 경성제대 문학전공 동기인 이희승·김재철 등과 함께 <조선어문학회>를 결성을 주도하면서 갑자기 경시청의 주목해야 할 인물로 등장했다. 문학회는 <조선어문학보>와 <조선어총서>를 발간했다. 김태준은 소설과 한문학의 역사를 다룬 <조선한문학사>와 역사적인 저서인 <조선소설사>를 세상에 내놓았다.
1934년 김태준은 <진단학회>의 설립을 주도하고 기관지 <진단학보>의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진단학회 활동을 이어가던 김태준은 1939년 봄, 명륜학원(성균관대 전신) 조선문학 담당 강사로 임명됐다. 이듬해 여름, 김태준은 제자인 이용준의 고향인 안동 와룡면을 방문했다. 이용준은 집안 대대로 내려온 서적 한권을 내놓았다. 고문학에 관한 당대 최고의 권위자인 김태준이 서적의 정체를 혹시 알 수 있을까 해서였다. 서적은 세종실록에 등장하지만 단 한번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던 훈민정음 해설서, <훈민정음 해례>이었다.
훈민정음 해례가 등장하면서 국문학 연구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일제는 김태준을 “불필요한 조선어를 연구하는 신경 쓰이는 조선인”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김태준의 행보는 모두 위장이었다. 1941년 1월, 김태준은 적색전위조직 <경성콤그룹(경성공산주의자그룹)>의 핵심인물로 검거되었다. 진단학회도, 명륜학원도, 경성제대도 일제의 착각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아해야만 했다. 김태준은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946년 겨울, 박헌영이 남로당 창당을 주도하자 김태준은 ‘문화부책’에 선임되었다. 남로당 탄압으로 이현상이 지리산으로 들어가 인민유격대를 조직하자 사상교육 정치위원으로 활동했다. 1949년 7월, 이적간첩죄로 체포되어 같은 해 11월 문화총책 강처중과 함께 총살형이 집행됐다.
사이드 스토리)
연희전문 졸업을 앞둔 여름, 윤동주는 기숙사를 나와 1년 후배인 정병욱과 종로구 누상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윤동주는 졸업논문을 마지막으로 다듬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다.
윤동주는 자필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3권을 완성했다. 한권은 지도교수 이양하에게, 한권은 문학동반자인 정병욱에게, 한권은 자신이 보관했다. 이양하는 이사과정에서 시집을 분실했고, 윤동주는 일본의 감옥에서 고문 끝에 세상을 떠나면서 시집 역시 사라졌다.
정병욱은 징병에 소집되자 고향 광양으로 내려가 모친에게 윤동주의 시집을 맡기고 중요한 물건이니 잘 보관해달라고 부탁했다. 위험한 물건이라고 지레 짐작한 모친은 시집을 구들 아래에 숨겨 보관했다.
징병에서 살아 돌아온 정병욱이 윤동주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제서야 윤동주의 마지막 남은 한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생각났다. 정병주는 윤동주와 연희전문 동기인 경향신문 기자 강처중을 찾아갔다. 강처중 경향신문 편집국장인 정지용과 논의해 매주 시 한편씩을 지면에 소개했다.
1946년 윤동주의 3주기를 앞두고 강처중은 윤동주의 시집을 출판하자고 제안했다. 추천사는 정지용이, 발문은 윤동주 연희전문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절친 강처중은 작성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윤동주가 일본 유학시절 쓴 시들을 추가해 재판을 찍는 과정에서 정지용의 추천사와 강처중의 발문은 사라졌다.
납북된 정지용은 월북으로 추정했고, 강처중은 남로당 문화총책으로 사형당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병욱의 모친이 윤동주의 자필 시집을 보관하지 않았다면 역사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지용의 대표작은 <향수>이고, 1989년 가수 이동원과 테너 박인수가 노래로 부르면서 그의 문학세계와 활동이 세상에 알려졌다. 김태준이 세상에 알린 <훈민정음 해례>는 단 두권이 존재하고 국보다. 감정가는 약 2천억이라고 한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유일한 자필본의 소유주는 알려져 있지 않다. 민음사가 인쇄한 초판이 억대를 넘어가는 것을 감안하면(우리나라 인쇄 단행본으로는 최고가이다) 자필본의 가치는 감정가가 불가능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