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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시절 박종철
6.25 말만 들어도 우리 가족에게는 엄청난 충격과 고난을 줄 줄리야 짐작이나 했겠는가? 6.25 사변이 일어나기 얼마 전으로 모두가 잠든 시각에 갑짜기 경철서에서 아버지를 연행해 갔다는 얘기를 철이 들고 얼마 뒤 어머니로 부터 듣었다.그 때의 내 나이 여들살 츠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천방지축 걱정이나 염려는 하지않고 어머니의 아픈마음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했다.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아무리 어리더라도 그럴 수 있겠는가 하고 자책을 해본다 우리는 일꾼을 두고 과수원농사를 지었는데 할머니께서는 피난을 가야하니 집에서 기르는 닭을 잡아서 일꾼들과 같이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그 와중에 어머니가 닭을 잡을 마음이 있섰겠냐만은 할머니 마음이 그때 부터 좀 이상하신 것으로 기억된다 할아버지는 그 당시 문경군청에서 산림과장,칠곡군에서는 내무과장을 역임하면서 큰댁,작은댁을 도우면서 집안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일제의 강점기로 부터 오랫동안 공무원으로 계셨고 얼마전 대동 양조장 자리가 70년 전에 우리가 살든 집이다
아버지는 그로 부터 행불이 되어서 오늘날 까지 생사를 모르고 있다.왜관초등학교를 거처 5년제인 대구고보 지금의 경북중고등학교에 입학하셨다 졸업후 일본 입교대학 경제학부에 유학한후 지금의 농협의 전신인 금융조합에 조합장으로 부임하여 평양과 포항, 구미등으로 자리를 옮겨 가면서 근무를 하셨다 .핳아버지가 퇴직을 하시고 대동 양조장자리에 큰기와집의 가역을 시작하면서 그 당시만 하여도 나무를 산지에서 직접사 가지고 와야하고 제재소에서 적당한 길이와 폭으로 자르고 켜야하는 모든 작업이 신경을 많이 써야하기 때문에 가역을 마치고 얼마뒤 돌아가시게 되었다 일제의 강점기에서 1945년 8.15일 광복이 되고 사회 전체가 무질서와 죄와우가 갈려서 혼란한 시절에 아버지는 보도연맹이란 죄익단체에 간부를 맡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사표를 내고 집안 살림을 맡으면서 일의 발단이 시작되었던 모양이다 비행기소리,대포소리 요란한 전쟁의 굉음속에서 우리들은 피난길에 올랐다 김정은의 비핵화의 말 한마디에 여당에서는 통일이라도 될 듯한 호기라며 떠들석하다 그러나 김정일이도 비핵화가 선대의 유훈이라며 막대한 경제원조만 받고 핵개발을 계속해 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이승만대통령에 이어 박정희대통령도 자주국방의 피치아래 핵개발을 시도 해 왔지만 미국의 저지에 의해 그만 두지 않을 수 없었다 핵을 보유하지 않고서는 남북이 동듣한 외교를 펼칠 수 없다는 것을 ......
그러나 원자력 발전소라도 계속 발전,유지시켜 핵의 기초과학을 튼틀하게 하여야겠다 분단된 조국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은 정부,국민,대통령이 한마음,한뜻이 되는 것이라 생각된다.우리일행은 하빈에 있는 왕뱅이라는 동네에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할머니 마저 계시지 읺으니 걱정이 태산같았다 어머니,숙모가 한조가 되고 삼촌이 홀로 강둑으로 ,풀숲으로 민가쪽으로 샅샅이 찾았지만 아무데도 계시지 않았다 미군의 검문에 걸리면 말이 통하지 않아 혼이 났던일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헤맸지만 허사였다 이화여전을 나온 숙모가 일어가 통하여 미군병사와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고 들었다 삼촌은 삼촌데로 혼자 나가셨는데 말씀이 어눌하셔서 의심을 받은 것인지 구덩이를 파고 묻는 작업을 몇일이나 계속하면서 어려운 고초를 많이 겪었다는 후문을 들었다
피난 후 어려 웠던 시절 박종철
어머니는 당신 혼자만의 힘으로 피난 후 필자와 다섯 살짜리 여동생 그리고 갓난아이인 남동생을 키우시느라고 말 할수 없는 고통과 번민이 있었다 얼마나 힘 드셨겠는가? 그 꽃다운 나이 35세에 어머니는 왈순 아주머니가 되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눈물겨운 나날 이었다 그 이듬해에는 일꾼을 두고 어머니가 직접 과수원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이른 봄 부터 전지작업, 황 소독을 시작으로 일 년에 농약을 수십 차례나 뿌려야 했다 거름주기,밭갈이 등등....... 사과나무 사이에 간작으로 조나 수수 등도 심었다 일꾼들 밥해주랴,밭에가서 온갖 농작업 하랴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마다 아버지의 생각이 간절했을 것이다 목이 메이게 외쳐보아도 대답 없는 아버지...
경찰서로 매일신문사로 여러 곳을 수소문 해보았지만 아버지의 소식은 전혀 알 수 가 없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남북쪽에 사과밭이 있었다 그야말로 어머니로써는 악전고투였다 농사도 지어야하고 얘들도 키위야 했다 아녀자로써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다음 해 부터는 사과밭을 도지로 팔아 수확 후 농사짓는 사람과 4,6제로 나누기로 하였다 언제부터인가 주택에서 조금 떨어진 변소 옆에 우리를 짓고 돼지를 기르기 시작하였다 먹을 양식도 귀한데 가축의 사료를 구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 었다 처음에는 사료배급이 나오는 농가를 아주 부러워하였다 우리도 배급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가? 여러가지로 궁리를 해보았지만 뽀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농산물검사소에 가서 알아보니 누군가가 우리명의로 배급을 받아간다고 했다 그것도 우리가 잘아는 분이었다 하기야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던 시절 이었던가? 사료일부는 구입을하고 우리는 조합원 이므로 농산물 검사소에서 나오는 쌀겨 보릿겨 밀기울 등, 악간의 배급을 받아 설거지를 하고 남은 음식 찌꺼기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보태어서 돼지를 길렀다.새끼를 낳는 날이면 돼지우리에 등불을 켜고 상위에 정화수를 차려놓았다 어머니는 순산을 빌면서 밤을 꼬박 새기도 하셨다 어미돼지가 발정을 하면 수컷 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짝 짓기를 시키고 난 다음 데리고 오는 일은 나의 몫이다 그때만 하여도 인공수정소가 없어 수정을 시키기가 매우 힘이 들었다 이 일이 나에게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몹시 부끄럽고 여려운 일의 하나였다 7~8마리의 새끼가 무럭무럭 자라서 소,돼지등을 팔아주는 상인에게 비교적 좋은 가격에 판매가 되었다 이 대금으로 대학교 한 학기 등록금를 마련할 수 있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야말로 우리가족에게는 효자몫을 톡톡히 하였다 국광 밭 가운데 양수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부근에 벚나무 수종으로 아주 큰 체리나무가 세 그루 있었는데 오월경이면 열매가 탐스럽게 수확 이된다 대구 청과시장에 내다팔면 한 학기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 체리나무 역시 우리에겐 효자수이다 어머니는 밤이면 틈틈이 삯바느질도 하셨다
가장 큰 수입원은 사과밭이다 초대정부는 농지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조속한 단행을 선언하면서 1949년 6월에 ⌜농지개혁법⌟을 공포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로 하여금 매입할 당시에는 사과나무만 사고 밭은 구입하지 못했다 5년 동안에 걸쳐 우리는 정부에 지료를 납부하여만 했다 피난 후 어머니는 이 지료를 납부하는데 당신은 늘 점심을 굶어면서 한톨이라도 더 모아서 지료를 대기위한 눈물겨운 고통이 뒤따랐다 외외가의 아저씨댁에 한번씩 가면 하얀 쌀밥을 그릇거덕이 떠주어서 언제 다 먹을까 하다가 보면 어느새 밥그릇이 비어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 말씀을 몇번들었다 자식으로써 이런 이야기를 듣고 통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가슴이 터질정도 였다 처음 한해는 낙산동의 강가에 있었던 밤 숲을 팔아서 납부를 하고 그 다음해 부터는 사과밭에서 나오는 수입과 어머니의 삯바느질,그리고 외할머니의 도움으로 완납을 하고 등기를 마칠 수 있었다 어렵고 힘들때 마다 아버지의 생각이 더 간절했다 혹시나 북한에 계실는지 하는 생각도 가끔 했었다
시집살이 박종철
할머니는 우복대감 정경세의 6섯 자매중 장녀로 태어나 우리 집으로 시집오셔서 위로 세분 고모를 낳으시고 아들을 낳기 위해 백일기도를 한후 아버지와 삼촌을 두셨다 할머니는 온갖 정성을 기울여 부처님의 일대기인 팔상록(八相綠)을 언문으로 한지에 써서 책을 멘 것을 나는 소중히 간직 하고 있다 언문이라 읽기가 어렵지만 몇 번 되풀이 해서 읽어보니 이해가 되었다 그 당시에는 학교도 없을 뿐 아니라 아녀자는 서당에도 보내지 않았다 어머니는 여헌 장현광선생의 후손으로 18세에 시집오셔서 ㄷ자형태의 기와집에서 남쪽 오른편에는 조부모가 거처하시고 왼쪽 동편에는 정기를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용하셨다 동침을 하려면 반드시 시어머니의 승락이 있어야만 가능했다고 한다 조모께서 요강을 넣어 주는 날이 함께 할 수 있는 날이다 옛부터 벼락이나 천둥이 치는 날이나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는 길하지 않는 관계로 피하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친정을 한번 다녀 오려고 하면 온갖 정성으로 할머니의 비위를 맞추지 않고서는 어림도 없었다한다 된 시집살이 한 시어머니가 나는 며느리 시집살이 시키지 않겠노라고 장담해놓고 며느리를 맞이하고는 더 심한 시집살이를 시킨다는 얘기가 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가 더 밉다 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한번은 아내가 친정을 다녀오려고 어머니께 승낙을 받을려고 하자 어머니의 눈치가 찬바람이 불자 본인이 중간에서 어머니도 친정가기가 그렇게 힘들었다고 해놓고 왜 보내주지 않느냐고 하다가 어머니부터 혼벼락이 난 적이 있다 시 자가 붙은 시금치 까지도 거부 반응을 일어킨 다고나 할까 며느리가 맞아가면서 시집살이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호된 시집살이는 집안을 일어키기 위한 훈련으로 결코 정도에서 크게 어긋나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며느리의 입자에서 보면 섭섭함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딸은 딸이고 며느리는 역시 며느리인 모양이다
요즈음은 일단 결혼을 하면 시어며니가 며느리 눈치를 보는 세상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생활양식과 환경 습관등이 다른 곳으로 시집와서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한번도 환경이 바뀌어 아내가 힘들 것 이라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늘 나는 아내의 생각보다는 어머니의 의견을 존중해 왔다 육자매를 낳는동안 나의 아내에게는 혹독한 시련이 있었다 그 뒤에는 니의 서러움도 감출 수 없었다 나이 들고 보니 가슴 한구석에는 허전한 마음도 없지않다 그러나 우리 육자매가 건강하게 오손 도손 잘 살고있다
지금도 니의 아내가 “마마보이”로 몰아 새우며 어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손까락을 꼽아가면서 전부터 있엇던 일을 나열하면 나는 할 말을 잃어 버린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본인이 중간역할을 잘하지 못했는 것 같다 할머니,그리고 어머니 우리집에 시집오셔서 온갖 정성과 희생으로 잡안을 일으키기 위한 내조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나의 아내에게도 사랑을 담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이다
귀환 박종철
더운 여름 어느날 피난을 떠났다가 하빈쪽 왕뱅이라는 동네를 거처 대구 대봉동 어느집에서 서너달 옹색한 피난생활을 했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승리로 추석이 지나서야 피난에서 그리운 우리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왜관시가지는 온통 폭격으로 집들이 무너지기도 하고 불이 나서 내려앉아 아수라장이 되어 전쟁의 상흔이 여기저기에서 보였디 격전지인 유학산과 낙동강변 에서는 죽음의 시신들이 절비하게 널려 있었다고 들었다
우리집은 다행히 문과 벽에 총탄의 흔적이 나 있었지만 불이 나지않아 그런 다행한 일이 없었다 우리는 음력으로 팔월 열이랫날 돌아와서 열여드렛날 어머니가 출산을 하셨다 피난에서 돌아온후 친척이나 집에 같이 있었던 일꾼들도 모두 뿔뿔이 떠나고 우리식구 들만 남게되었다 이때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을런지 .....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애들은 어떻게 양육해야 할 것인가? 하늘이 캄캄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아버지의 소식을 백방으로 알아 보았자만 전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다행이 국광밭에 사과가 벌겋게 익어가고 있어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우리집 사랑채는 국군들의 막사로 사용하고 았었고 창고채와 자하실도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군인들이 마당에 큰 무쇠솥을 걸어놓고 장작불로 밥을 짓고 있었다 가끔은 밥을 금방 퍼고 난다음 구수한 누런지를 얻어 먹곤 했었다 정말 그 맛은 꿀맛이다
1950년 6.25 사변이후 계속되는 가뭄으로 농사가 흉년이 들어 피마자잎도 먹고, 산에가서 송진껍질도 벗겨먹어면서 쇠비름 ,참비를,잘경이등 온갖풀로 배를 채우기에 정신이 없었다 ,배고품이 얼마나 참기 어려운지 격거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국광밭에서 수확한 사과를 팔아서 어느정도의 쌀을 준비하여 한해 겨울을 잘 넘길 수 있었다.땔감으로 장작이나 솔잎,낙엽,왕겨등이 아용돠었어나 우리는 사과밭에서 전정을 하고 난다음 사과나무 가지나 낙엽등으로 풍로로 바람을 불어넣어면서 연기가 자욱한 부엌에서 어머니는 밥을 짓거나 군불을 지피기도했다 바람이 역풍으로 부는 날이면 매운연기가 자욱하여 눈물이 줄줄 흐른다 언제 부터인가 집안일을 거들어 주는 누나가 함께 살았다 누나와 함께 나는 인동에 계시는 와할머니를 모시고 와서 어머니의 산후구환을 도우셨다
파괴는 건설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전재이 끝나고 돌아왔을때의 왜관시가지는참담한 모습이었다 배고품에 견디기 힘들어 내일과 미래를 잊은체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가끔은 비행기소리 요란하게 들리고 밤이면 모포로 문의 불빛을 가리는 반공훈련도 계속되었다
가보 박종철
피난을 떠나기 전 우리가 소장하던 진귀한 현판, 묹집,,액자 고서및 옛날에 동전꾸러미를 넣는 괴짝등이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애지중지하시던 것들이다 의견을 모아 금남동 삼촌과수원 지하실 창고에 옮기고 일부는 지금의 왜관농협 하나로 마트 주차장 자리에 ㄷ자고택 기와집에 남겨두었다 어머니는 정든 집을 뒤로하고 만삭이 된 몸으로 우리남매를 데리고 친척일행과 합께 피난길에 올랐다 아버지의 소식을 알려고 각방으로 수소문 하였지만 알 수가 없었다 그당시 아버지,어머니는 꽃다운 나이 35세였다 전쟁이란 모든사람들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는 것인지 한민족이 총부리를 겨누고 싸워야 하는 것인지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그 이후 누군가에 의해서 금남 지하실에 보관해둔 현판,액자,고서등이 없어지거나 흐트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 후에 살펴본즉 누눈가 가 불을 질러 전소가 되었다
아버지,할머니을 잃은 슬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이니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현판 몇점과 백자인지 청자인지 진가를 알 수 없는 항아리와 술병,그리고 단종의 왕위 찬탈후에 전개된 상황을 기록한 장릉지를 비롯한 고서 몇권을 본인이 소장하고있다 1960년도에서 부터 엿장수들리 가윗질로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엿을 뚝뚝 잘라주면서 고서나 문집,현판등을 닥치는 대로 거두어 갔다 그 중에는 쓸모없는 것들도 있었겠지만 아주 귀중한 것들도 있었를 것이다 하나로마트 자리인 우리집에도 사흘이 멀다하고 자주 들려서 창고나 지하실를 뒤진곤 했었다 필자가 어려서 한문실력이 시원찮아 고서 감정을 전혀 할 수 없을 때이다 피난을 가기전 우리집에는 비교적 여유가있어 젖을 먹여주는 유모,허드래일을 하는 취모,아들을 낳으면 오래살도록 판모에게 파는판모등이 있었고 할아버지가 자수성가 하셔서 큰댁,작은댁에도 도움을 주신것으로 들었다 매원에 계시는 존고모님도 거의 우리집에 사시다시피 하셨다 가회동아저씨,밀양아저씨,석당아저씨도 할아버지가 문경에 계실때 몇 달씩 그기에 가 계신것으로 들었다 우리집은 거의 손님이 끊이지 인았고 중간역 처럼 많은 손님으로 대가족의 정취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옛날에는 시집온 새색씨가 신랑과 동침을 할려고 하면 반드시 시어머니가 요강을 넣어 주어야만 가능했다고 한다 왼쪽 큰방에서는 할아버지,할머니가 오른쪽 동쪽방에는 아버지,어머니가 거처하셨는데 동쪽방는 옛부터 정기가 있는곳으로 훌륭한 손자를 낳으려면 동쪽 오른쪽방에서 거처하시게 했다고 한다 천둥,번개가 치거나 폭우가 쏟이지는 날에는 합궁을 삼가라는 애기가 있다 그 만클 시어머니의 위력과 배려가 대단했었다 시어머니의 말씀은 곧 법이고 콩을 팟이라해도 응해야 했을 시절이었다 가정에서 소장하고 있는 여러가지 작품도 소중하겠지만 가장 귀중한것은 역시 사람이다 아버지가 행불이 되고난후 한번도 아버지라고 불러 볼 수 없는 본인으로써는 더더욱 절실하다 삼남매를 데리고 그 꽃다운 나이 35세에 홀로 우리들을 양육하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또 눈물이 난다
꽃자리13호
발간사
꽃자리 13호의 출판에 즈음하여
무술년의 시작이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한 해의 끝자락에 와있습니다
지난여름은 유래 없는 더위와 혹독한 가뭄으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반드시 가는 법이니 대자연의 섭리 앞에 더욱 겸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황금 들녘이 우리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고, 산들바람이 옷깃을 스치며 길섶마다 다양한 꽃들이 앞다투어 피고 있습니다
좀 더 나은 작품을 위해 우리는 다양한 독서와 한작품 한작품 혼을 불어넣어 쓰고 지우기를 거듭하면서 매주 금요일이면 구상문학관에서 자기가 써 가지고 온 작품에 대한 합평이 이루어집니다 그런 다음에 의견이 모아지면 한 작품이 완성되지요 一刻三拜 아니 一作三拜라고 해야겠지요 (한 작품마다 세 번 절하다)
讀書起家之本이라 옛부터 독서는 집안을 일으키는 근본이라 하였습니다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무언가를 끊임없이 도모해 왔으며 그 결과 문명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한개인의 생에 대한 의지도 이와 같이 자기존재감을 성취하고 나아가 세상과 교류하는 가교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회원 모두의 땀과 정성으로 꽃자리 13호가 출판되었습니다 수필은 우리의 생활속에서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하고 정서를 보다 아름답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 동안 열과성으로 지도해주신 장호병 교수님를 비롯하여 김은영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회원여러분, 한 해 동안 우리들의 노고에 다 함께 박수를 보내며 함께하신 내빈여러분께도 항상 건강하시고 가정에 행복이 충만하길 빕니다
편집후기
거의 매주 작품을 올려주시는 우석선생님의 열정에 디시 한 번 감사드리며 꽃자리의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해주시는 송경화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매주 예리한 감성으로 합평해주시는 여선생님 여러분께도 아울러 감사 드립니다
꽃자리 수필 강좌는 매주 한번씩 만나고 데이트하며 창작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원만한 인간관계를 정립하는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생활의 어려움.괴로움도 함께 토로하면서 보다 나은 내일을 바라보며 올 해에는 회원확보가 되어 보람된 한해가 되었습니다 김현석,김순임 신입회원 여러분에게도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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