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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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3.23-24(JDTS 강의) 강의 : 김광일강도사(예수전도단 제주 지부장)
정리 : 김상수 목사(서울제일성결교회)
1. 예맹과 하나님의 광대하심
이 시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 있다. 컴맹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예맹(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수준'에서 평가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광대하심은 우리의 생각과 비교할 수 없다.
사40장에 보면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표현하면서,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리는 분'으로 묘사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별을 헤아리시는 분'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은 알면 알수록 실망하는 분이 아니가, 알면 알수록 놀라운 분이다. 그분에게 나가면 나갈수록 새로운 은혜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욕심에 맞추어서 하나님을 생각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문화(文化) 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이해하려 한다. 특히 가부장적(家父長的)인 분위기에서 성장한 한국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가 친밀하고 가까이 있는 존재 보다는, 좀 나에게서 떨어진 분으로 이해하려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우리와 친밀하게 함께 하시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에 관해서 알기 원하기 이전에, 하나님 자신을 알기 원하신다. 이 땅에서 가장 큰 선물은 하나님 자신이다. 특히 하나님은 말씀 가운데 우리를 만나기 원하신다.
구약의 호세아서를 보라. 하나님은 호세아와 고멜의 관계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셨다(호6:1-3).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호6:1-3)
창6장에 나타난 노아시대의 상황은 어떤가? 노아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임에도 불구하고, 죄악 가운데 살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 여기서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의 정확한 번역은 "노아는 하나님의 눈동자 안에서 그 사랑을 보았도다"이다(KJV 버전)
2. 성경에서 나타난 하나님을 아는 2가지 패턴.
성경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2가지 패턴은 경험적(經驗的)인 앎(마7:23)과 지적인 앎(삼상2:12)의 패턴이다.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
"12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삼상 2:12)
경험적(經驗的)인 앎이란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으로 아는 것을 말한다(호6장의 앎과 동일). 우리들이 추구해야할 것은 바로 경험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지적인 앎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에 관하여(about)는 알지만, 정작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다. 예컨데 삼상2;12에 나타난 엘리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랬다. 이들은 하나님에 관해서는 알았지만, 하나님을 알지는 못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경험적인 앎'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야다'인데, 이는 곧 하나님의 깊은 성품을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3. 하나님의 음성 듣는 일의 필요성과 성경적인 근거
(1) 음성 듣는 일의 필요성(必要性)
부부가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중요한 도구가 무엇인가? 그것은 대화(對話)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이 필요하다. 커뮤니테이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컨데 기도는 중요한 하나님과의 대화소통의 방법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일방적인 기도만하고 끝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응답을 들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根據)
흔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분명히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요10:1-4, 사55:1-4)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요10:1-4)
여기서 보듯이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이 당연하다. 사55;1-4을 보라
"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4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사55:1-4)
여기서 하나님은 "나를 청종하라"고 하신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서 들으라"고 말 한다. 그래서 '살수 있다'고 말한다.
로마서 10:17을 보자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여기서 '들음과 말씀으로'가 중요하다. 말씀은 두 종류이다. 로고스(Logos)와 레마(Rema)이다. 로고스는 기록된 말씀을 의미하고, 레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개인적인 신앙이 성장하는 것은 개인적인 레마의 시간이 많을 때이다.
4.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의 유익들
(1) 하나님과의 관계가 긴밀해 진다
개인적이고 사소한 것까지도 나누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더욱 친밀한 관계까지 나갈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조그마한 것, 사소한 것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언제인가?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이다.
요나는 불순종했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요나를 스올(음부, 지옥)로 비유된 물고기 뱃속에서 지내게 하심으로서 니느웨 백성들의 상태를 경험하게 하셨다. 요나는 하나님과 대화하며, 음성을 들으면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신랑과 신부의 관계처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렇게 되기 바라신다. 요한계시록 3;20을 보라.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한 관계인지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이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 우리와 떨어질 수 없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과 우리들과의 관계를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시대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God for us)'이셨다. 예수님 시대는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God with us)'였다. 그러나 성령시대는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God in us)'이시다. 바로 이처럼 지금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매우 친밀한 관계이다.
요14:23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居處)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14:23)
(2) 개인적인 삶이 변하기 시작한다.
개인적인 삶이 변하기 시작한다. 즉 성품이 달라지고, 생각하는 것이 달라지고, 정서가 달라진다.
(3) 내 삶 속에 주님으로 인한 참 만족(滿足)이 온다.
묵상 시간에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라. 그러면 내 안에 참 만족이 찾아온다. 또한 이 말씀으로 인해서 형통케 되는 나의 모습을 체험하면서, 내 삶의 참 만족을 누리게 된다. 나의 귀를 깨우쳐 주실 때, 곤핍한 자를 말로서 도울 수 있게 된다(사50:4, 렘33;3)
"4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50:4)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여기서 보듯이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놀라운 계획들을 볼 수 있다. 영적인 성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이해할 때부터 시작된다.
(4)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할 수 있다. 모세는 '구스'여인을 취하는 실수를 범한 적이 있었다. 이를 본 아론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를 비난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를 '온유(溫柔)가 지면에 승한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는 무엇인가? 원어로 '야생마(野生馬)를 길들인다'는 의미가 있다. 즉 야생마같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움직이는 것이 온유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향해서 온유한 자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모세를 쓰셨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온유한 지도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잘듣고 순종하는 사람이다.
여호수아도 마찬가지 였다. 왜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쓰셨는지 출33:11을 보라.
"11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33:11)
무슨 말인가하면 여호수아는 모세가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면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으며, 특히 11절에 보면 모세는 진으로 돌아왔지만,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했다". 이것이 중요하다. 여호수아는 바로 모세와 같은 그런 삶을 살기 원했던 것이다. '하나님 저도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과 대면하며, 그런 사람을 소망합니다'라고 간구하지 않았겠는가? 우리 모두의 삶이 이런 삶이 되어야 한다.
5.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몇 가지 조건들
(1) 하나님께 주재권(Lordship)을 드려야 한다(출21:1-6).
이것은 내가 하나님을 주인(主人)으로 섬기는 것을 말한다. 다시말하면 하나님께 백지수표들 드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마음대로 쓰시도록 말이다. 하나님은 내가 모두 결정하고, 결재만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기를 원하신다. 출애굽기 21:1-6을 보라.
"1 네가 백성 앞에 세울 율례는 이러하니라 2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육 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칠 년에는 값없이 나가 자유할 것이며 3 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요 장가들었으면 그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가려니와 4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줌으로 그 아내가 남녀간 낳았으면 그 아내와 그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할 것이요 그는 단신으로 나갈 것이로되 5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 하면 6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출21:1-6)
왜 하필이면 귀를 뚫었을까? 아마 주인의 말을 잘들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즉 '나는 이제부터 주인이 말하는 것만 듣겠습니다'라는 의미로 귀에 구멍을 뚫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주재권이다.
(2) 정결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시66:18, 사59:1-2)
"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罪惡)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
"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罪)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1-2)
이처럼 우리가 죄가 있을 때 하나님이 그냥 넘어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은 곧 '죄를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성품'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해결하셔야만 하시려는 성품 때문에,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악을 해결해 주신 것이다.
(3)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히11:6)
"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한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들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상(응답, 음성, 만남, 크고 비밀한 것 등)을 주신다.
(4)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삼상15:17-23)
"17 사무엘이 가로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18 또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 20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왔고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였으나 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 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5:17-23)
사울왕은 아말렉 사람과의 전쟁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고, 양과 염소들을 취하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그랬다고 거짓말까지 했다. 그때 사무엘은 이것을 지적하면서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17절)라고 하였다. 무슨 말인가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손함으로 스스로 낮출 때에 그 사람을 쓰시며,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신다는 말이다.
(5) 인내(忍耐)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실 때 하나님은 바로 주시지 않고, 기다리게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기다리게 하신 것은 하나님을 향한 모세의 마음을 보시기 위함이였다. 인내하면서 기다렸던 결과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언약의 증표를 받게 되었다.
(6) 영적전쟁(靈的戰爭)에서 승리하기 원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이일에 영적전쟁의 영역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들이 기도 중에 들을 수 있는 음성은 세 가지 종류가 있다. 것은 '자기 자신의 소리(자기생각)'과 '하나님의 음성' 그리고 '사단의 음성'이다. 사단은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변조해서, 마치 하나님의 음성인 것처럼 접근하기도 한다. 예컨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40일간 광야에서 금식하며 기도하셨을 때, 최초로 들려온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사단의 음성이였다. 따라서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6.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1) 실제적(實際的)인 음성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2) 기록(記錄)된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5-17)
하나님은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묵상은 기록된 말씀 앞에서 그 말씀이 내 삶에 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주일 설교를 통해서 기록된 '로고스'의 말씀이
오늘 나에게 주시는 '레마'의 말씀으로 임한다.
(3) 내적(內的) 음성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여기서 내적인 음성이란, 우리의 직관(直觀)을 통해 들을 수 있는 음성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을 잘 구별할 수 있도록 훈련이 필요하다 . 하나님은 우리들이 그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를 보기 원하시면, 계속되는 훈련을 통해서 더 깊이 하나님을 알아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들은 실수를 하지 않아야겠지만, 그렇다고해서 '실수하는 것을 마냥 두려워하는 태도'도 바른 것은 아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표현을 할 때,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라는 직접적(直接的)인 표현 보다는 '하나님이 내 삶을 이렇게 인도해 주셨습니다'라는 우회적(迂廻的)인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듣는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또한 혹시 실수를 했다해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4) 환경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이 말은 모든 환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환경을 통해서도 말씀하실 수 있다. 예컨데 행16:6-7을 보라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행16:6-7)
여기에서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라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가려고 노력함에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서 가는 길을 막는 것을 가지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기드온의 '양털시험'도 마찬가지였다(삿6:36-40).
"36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 37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38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찌기 일어나서 양털을 취하여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39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여 내게 진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나로 다시 한번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40 이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삿6:36-40)
사실 기드온은 원래는 그리 강한용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용사여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기드온 자신보다도, 기드온을 너무 잘알고 계셨다. 하나님이 그에 말씀하신 한 가지는 "너와 함께 하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거(居)할 자'이다. 기드온은 양털이라는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
(5) 경건한 지도자(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신다(잠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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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하고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잠15:22)
사람의 음성을 잘듣는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도 잘 들을 수 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가를 알기 원하다면, 먼저 사람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음성도 잘듣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주장, 자기 말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하나님은 경건한 영적인 지도자들이 말하는 것을 먼저 듣기 원하신다. 보통 사람들은 경건한 목회자나 지도자들이 권면할 때, 그것을 한낱 단순한 조언(助言) 정도로만 받아들인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하기를 '설교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사도바울도 마찬가지로 지적했던 것이다.
(6) 하나님은 은사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도 한다.
하나님은 은사들(예컨데 예언 등)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예수믿는 점쟁이로 만들면 안된다. 하나님은 가장 중요한 문제를 말씀하실 때는 우리에게 직접(直接)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나에게 직접 말씀하시도록 기다려야 한다(특히 젊은이들의 결혼기도). 이런 사람들은 하나의 참고일 뿐이다. 전직인 의존의 대상은 아니다.
(7) 환상이나 꿈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환상이나 꿈을 통해서 때로 말씀하신다.
(8) 기타
천사의 소리, 책, 동물을 통해서(발람), 영화, TV를 통해서 등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서 제한하지 말라는 것이다.
7.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에 있어서 범하기 쉬운 실수들
(1) 하나님의 음성은 듣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듣기 쉽다. 하나님의 음성은 특정한 사람만 듣는 것이 아니다, 모든 성도의 특권이다.
(2)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또는 나에게 손해가 된다고 생각함)
즉 내 생각대로 사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생각이다. 예컨데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하나님은 내 재산을 다 바치락 할 것이다'는 생각등... 우리의 행동의 근거는 재정(財政)이 아니고, 하나님의 음성이다.
흔히 재정에 대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 돈을 요구하고 계신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돈이 없어서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재정(십일조등)을 요구하시는 가장 큰 이유는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이미 하나님은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드림으로, 나머지 십분의 구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고백을 드리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를 보라. 베드로는 고기잡는 방법에 대한 자기의 경험보다도 예수님의 음성을 쫒아서 그물을 던졌다.
(3) 하나님의 뜻은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것
사소한 것, 작은 것은 듣지 말고, 큰 결정이나 사업을 할 때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는 식의 생각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우리의 가장 작은 것까지도 함께 나누시기 원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작은 것까지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예컨데 "하나님 제가 제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합니까?"라고 물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아이를 가장 잘 아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기 나름(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이라고 여기는 것
그러나 하나님은 명확하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분명해 지고, 더 명확해 진다.
8. 하나님의 음성(뜻)을 분별(分別)하는 방법
(1)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비추어 확인하라.
하나님은 성경말씀과 다른 방향에서 말씀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이미 많은 것을 말씀해 주셨다. 따라서 '이것을 훔칠까요 말까요?'라는 식의 질문을 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경험한 음성이 기록된 말씀의 원칙(原則)에 따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2)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 보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위배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품중에서 중요한 것이 화평(和平)과 질서이다. 만일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교회에서 혼란을 야기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신 것을 반드시 기억하라
(3) 몸(교회)의 일치를 가져오는 지를 살피라
만일 내가 들은 음성이 그리스도의 몸을 파괴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은 오히려 교회를 세운다. 하나되게 한다. 또한 우리는 내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교회의 일치(一致)'를 위해서 사용해야한다.
9.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몇 가지 원칙들
(1) 동방박사의 원칙
동방박사들처럼 성도들에게 일치된 마음을 주신다.
(2) 등대불 원칙
하나님이 여러 지체들에게 말씀해 주신 다양한 방법(方法)들이 일치하는지를 살펴야한다. 하나님의 음성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결국은 일치하게 되어있다.
(3) 도끼머리 원칙
여러 의견들이 분분할 때는 처음의 원점(原點)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10. 하나님의 음성과 사탄의 음성과의 다른 점
(1) 하나님이 주신 음성
1) 하나님의 음성을 고요하고 명확(明確)하다
2) 지속적이고 변함이 없다. 이것인지 저것인지 왔다 갔다 하지 않는다.
3) 긍정적이고 소망이 있다(평강이 있다)
(2) 사단이 주는 음성
1) 성급하게 결정하고 싶어한다. 안정감이 없다.
2) 위기감이 생긴다.
3) 평강이 없어진다.
만약에 평강이 없는 생각들이 들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바꿔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하라'
11.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엘리와 사무엘 그리고 사울과 다윗을 비교해 보라. 엘리와 사울은 같은 부류이고, 사무엘고 다윗은 또한 같은 부류이다. 사무엘이나 다윗은 어렸다, 또한 다윗은 작음 목동에 불과 했지만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다. 그렇다면 이 두 부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즉 하나님이 이들을 쓰신 이유는 무엇인가?(삼상3;1-9)
(1) 엘리와 사울왕의 문제점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가로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6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8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삼상3:1-9)
엘리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했다. 무슨말인가? 하나님은 어린 사무엘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희망의 등불을 끄지 않으신 것이다.
엘리와 사무엘의 결정적인 차이를 짐작케 하는 말씀이 있다. 그것은 엘리는 "자기의 처소에 누웠고"(2)이고, 사무엘은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라는 부분이다. 엘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보다는 다른 많은 것에 관심이 있었다. 엘리는 하나님의 음성보다는 사람의 음성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삼상2:17과 24절을 보라
"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삼상2:17)
"24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삼상2:24)
특히 24절을 보라. 엘리는 '사람들의 소문'과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가?'에 좇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사울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삼상15:15).
"15 사울이 가로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삼상15:15)
사울은 자신의 범죄한 이유를 24절에서 설명한다.
"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삼상15:24)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백성들의 말을 청종"했다. 이것이 사울의 근본적인 문제점이다. 엘리와 사울의 공통적인 특징은 하나님 보다도 사람들의 말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2) 사무엘과 다윗의 경우(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들)
반대로 사무엘을 보라. 그는 엘리가 자기 처소에 있을 때도 하나님의 성전에서 누웠다. 그는 여호와여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했다. 이것이 결정적인 엘리와 사무엘의 차이점이다(선지자와 서기관의 차이점은 서기관은 공부한 것, 읽은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이고, 선지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윗의 경우를 보자. 어린목동 다윗은 아버지나 형들에게서 중요하게 취급받지 않았다.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을 찾을 때도, 그 아버지는 다윗을 부르지도 않았다. 이것은 이새의 생각에 다윗은 하나님의 일군으로 쓰임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힘썼다. 다윗은 양을 치면서도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묵상에 힘썼다. 나중에 사울이 악신들렸을 때, 하프를 연주하는데(삼상16:23), 이것은 그가 목동시절에 하나님과 교제하며 찬송했던 사람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다윗은 골리앗에게 출정하기를 자청하면서 사울왕에게 말하는 것을 보라(삼상17장). 그는 목동시절에 하나님의 도움으로 사자와 곰들을 찢여죽였던 것을 말했다. 잘생각해보라. 사자와 곰이 올 때 어린 목동 다윗이 어떻게 담대하게 싸울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그해답은 요한일서의 4:18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이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랑이 다윗 안에서 두려움을 쫒은 것이다.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다윗은 이뿐 아니라 전쟁이나 모든 진로의 문제를 결정함에도 하나님의 음성 가운데 나갔다(삼하2:1)
"1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다윗이 가로되 어디로 가리이까 가라사대 헤브론으로 갈지니라"(삼하2:1)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즐겨했던 어린 다윗의 심정을 주변의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단 한 분 하나님은 알고 계셨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신 것이다.
그는 왕이 된 후에도 변치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변치 않았다.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과 음성을 사모하고, 동행했는지 시편 119에 나타난 그의 고백들을 살펴보라. 다윗은 심지어 마음이 상할 정도로 하나님을 찾고 찾았던 사람이다.
"20 주의 규례(말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시119:20)
"40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시119:40)
"81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오히려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시119:81)
"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시119:97)
"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시119:103)
"127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시119:127)
"131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119:131)
"147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148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시119:147-148)
다윗에게는 돈이나 명예 보다 하나님의 말씀 듣는 일을 사랑했다. 특히 시119:147-148을 보라.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고, 하나님의 음성 듣는 일에 시간을 드렸던 사람이다. 이것이 그에게 기쁨이었다.
다윗에게 항상 중요한 것은 "지금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라는 문제였다. 그는 하나님이 성전건축을 허락하지 않으실 때에도 분노를 내지 않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먼저 생각했다.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했다.
12. 마치는 말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바라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해야 한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일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