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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역
“Are you leaving for good?”
“정의를 위해 떠나시나요?”
⇒ “아주 가시는 겁니까?” (‘for good’ 은 ‘영원히,’ ‘아주’라는 뜻)
“There was no way we could get from fatigues to full dress uniforms in two minutes.”
“피곤한 탓에 2분 만에 군복을 갈아입는다는 건 무리다.”
⇒ “2분 만에 작업복을 군복으로 갈아입는다는 건 무리다.” (‘fatigue’는 ‘피곤’이 아니라 ‘작업복’이라는 뜻)
오역이란?
오역은 정의하기가 매우 어렵다. 아니, 정의할 수 없다고 봐야 옳을지도 모른다. 오역시비가 끊이지 않는 현실을 감안해볼 때 ‘오역’과 ‘정역’을 정확히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다. 이는 오역의 기준을 정할 수 없기 때문인데 그래서 오역처럼 보이는데도 “잘 옮겼다”며 칭찬이 쏟아지는가 하면 언론과 독자의 찬사에도 되레 오역시비에 휘말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러면 구체적인 이야기에 앞서 다음 글에서 오역을 가려보자.
․ Far-far-away palace
겁나 먼 왕국
․ They're looking for angles.
그들은 천사를 찾습니다.
첫 번째 예문은 영화 「슈렉 2」의 팸플릿 문구를 그대로 쓴 것이고 둘째는 『Leading with the Heart(마음으로 이끌어라)』 기출간본에서 발췌했다. 혹자는 전자를 두고 “재치 있게 잘 옮겼다”며 찬사를 보낼지도 모르지만 나는 “글쎄……”다.
둘 다 오역이라는 얘긴데, 우선 ‘겁나 먼 왕국’은 왕국을 꾸미는 말이 사투리(겁나)인 탓에 오역이다(도읍지 건물은 사투리로 표기하지 않는다. 설령 그런다고 해도 왕국이 전라도에 있지는 않을 테니 ‘겁나’는 분명히 오역이다).
두 번째는 ‘angles(각도)’를 ‘angels(천사)’로 잘못 봐서 틀렸으므로 원문은 ‘카메라의 각도를 살핀다.’고 번역해야 옳다. 물론 전자를 오역이라고 밝힌 것이 영 석연치가 않을 줄 안다. “그게 오역이라니, 너무 억지 아닌가?”하고 말이다. 오역이라고는 했지만 이를 두고는 적잖이 논란이 일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저자의 의도가 배어있으면 ‘오역’이라도 어느 정도는 봐줄만 하기 때문이다. 즉, ‘겁나’가 ‘멀다’는 말을 강조하므로 ‘far-far-away’의 의도를 적절히 살렸으니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러나 두 번째는 저자의 의도를 왜곡했으므로 오역임이 적실하고 독자가 이를 알았다면 속았다는 사실에 매우 허탈해할지도 모른다. 본문은 전후 문맥에 따라 ‘농구 경기가 있는 날이면 기자들은 떠들썩한 관중을 뒤로하고 촬영 각도를 맞춘다.’는 뜻으로 풀이해야 하는데 생뚱맞게 천사를 등장시켰으니 원문을 모르는 독자들은 그제부터 상상의 나래를 펼 것이다.
독자 1: 천사? 그래, 행운을 가져다 줄 천사를 찾나 보군.
독자 2: 여기서는 승리의 천사가 팀에 합류할 것을 바란다는 얘길 거야.
독자 3: 뭔가 와 닿는 듯…….
저자: 처, 처, 처…… 천사라고요? 내가 언제 그렇게 썼습니까?
오역은 정의할 수 없지만 그 종류는 ‘참을 수 있는 오역’과 ‘참기 힘든 오역’으로 구분할 수 있을 듯싶다. 참을 수 있는 까닭은 틀리긴 했어도 저자의 의도가 충분히 반영되어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도가 왜곡되면 책의(혹은 번역) 품질이 떨어져 독자는 분노를 느낄 것이다.
참기 힘든 오역
Income and weekly take-home salary are multiplied by 4.333…….
주급과 주간재택근무 수당에는 4.333이 곱해져 있다.
기억에 남는 오역이 많이 있지만 2008년 초, 처음 번역을 감수했을 때 발견했던 오역을 적어봤다. 알다시피 역자는 ‘income’을 ‘주급’으로, ‘take-home salary’를 ‘주간 재택근무 수당’으로 잘못 옮겼다. ‘weekly’가 그 다음에 있으니 ‘공통관계(weekly가 income도 수식한다고 보는 견해)’를 적용하기도 어려울 텐데 굳이 ‘수입(income)’을 ‘주급’으로 번역한 까닭은 무엇일까? 아까처럼 저자가 또 캐묻는다.
스코트 앤더슨(저자): 왜 수입이 주급으로 둔갑한 거죠?
역자: 그, 그건, ……, 4.333을 곱했다는 내용 때문입니다. 이 숫자는 월 평균 ‘주(week)’를 가리키므로 상식적으로 주급에다가 곱해야 월 평균 수입이 됩니다. 그런데 ‘income’을 수입이라고 옮긴다면 수입에는 월급이나 연봉을 아우를 테니 독자는 혼란을 느낄 겁니다.
스코트 앤더슨: 그렇다면 ‘take-home’이 ‘재택근무’라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역자: 음 ……, 인터넷 사전을 찾아보니 ‘학생이 집에서 하는’이라고 돼있더라고요. 집에서 하는 일이 재택근무 아니겠습니까? 맞죠?
사실, 좀 더 정확히 쓰려면 ‘weekly income and take-home pay’라고 해야 옳을 듯싶은데 그러지 않아 번역가는 적잖이 고민했을 것이다. 그대로 옮기자니 독자가 오해할 수 있고 의역을 하자니 원문이 울고……. 그러나 단어를 잘못 찾았다는 점은 좀 아쉽다. ‘take-home’에는 앞서 말했던 뜻이 옳지만 역자는 ‘take-home pay(세금을 제외한 실수령 급료)’를 찾았어야 했다. 따라서 원문의 내용을 살리려면 이렇게 옮겨야 한다.
․ 수입과 실수령 주급에 4.333이 곱해져 있다.
역자가 오역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번역가는 ‘만능 번역기’가 아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잘못 옮길 때도 있고 본의 아니게 몇 줄이 누락될 때도 있다. 그도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다. 게다가 오역이 전혀 없더라도(그럴 리는 없다!) 저자의 심정이나 생각을 100퍼센트 살려낼 수는 없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아무리 잘 옮겼다 해도 영어로는 ‘이별의 정한’을 느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처럼 원문을 살리기 어려운 까닭은 언어적․문화적 차이 탓도 있으리라.
참을 수 있는 오역
오역을 두고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 책 제목은 뜯어고쳐도 되는가?
․ 각 장의 제목은 오역이라도 눈감아줘야 하는가?
몇 가지 제목을 열거해보았다.
․ Your Best Life Now
긍정의 힘 (⇒ 긍정의 ‘긍’자도 없다)
․ Secret
시크릿 (⇒ 고유명사가 아니므로 ‘비밀’이라고 했어야 옳다)
․ The Way is Made by Walking
걸어서 길이 되는 곳, 산티아고 (⇒ ‘산티아고’는 없다)
․ Meeting Excellence
팀장님, 회의진행이 예술이네요 (⇒ ‘탁월한 회의’가 옳다)
․ Good Intentions
좋은 사람 콤플렉스 (⇒ ‘콤플렉스’는 보이지 않는다)
․ Stimulated!
당신 안의 아인슈타인을 깨워라! (⇒ ‘아인슈타인’은 없다)
원제를 그대로 옮기지 않았음에도 이를 두고 시비를 따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왜일까? 독자들이 위의 오역을 ‘참는’ 까닭은 무엇일까? 바꾸어 말하면, 제목은 편집자나 번역가의 재량에 따라 얼마든지 ‘창작’이 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얼마 전 고인이 된 패트릭 스웨이지 주연의 1990년 개봉작 「사랑과 영혼」의 원제목은 「Ghost」였다. 하지만 오역인데도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원제목을 몰라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설령 알았다손 치더라도 이를 문제삼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참을 수 있는 오역’이었다는 얘기다. 원제를 살린답시고 「Ghost」를 「원혼」이라고 붙였다면 오역은 아니지만 왠지 영화의 정서와는 사뭇 다르므로 관객들의 반발을 샀을 것이다. 이럴 땐 ‘정역’이 ‘오역’으로 전락하는 해괴한 해프닝이 벌어진다.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 1989)」 역시 바른 번역은 아니었다. ‘죽은 시인’까지는 맞는데 ‘Society’는 사회가 아니라 ‘학회’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죽은 시인회’로 옮기면 얼추 맞을 듯싶다.
결국, 책이든 영화든, 제목을 두고 편집자가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까닭은 작품 전반에 흐르는 ‘맥’이나 이를 관통하는 ‘키워드’라면 무엇이든 제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제목을 두고 ‘클레임’이 없었다는 것은 독자나 관객이 그에 공감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영화 「가을의 전설(The Legend of the Fall)」을 두고는 논란이 적지 않았다. 한 가족의 몰락이 주된 내용인 탓에 ‘Fall’을 ‘가을’보다는 ‘몰락’으로 옮겨야 옳지 않느냐는 것이다. 물론 ‘가을’이 몰락을 상징한다며 이 주장을 일축하는 사람도 있으므로 굳이 오역이라고 못을 박지는 않으련다. 이처럼 제목은 주관적으로 옳다고 판단되면 바른 번역으로 승격될 수도 있으니 ‘번역’의 정체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쨌든 책이나 영화 등, 작품의 제목은 본문의 글과는 달리 창작의 범위가 매우 넓다.
그러면 각 장의 제목은 어떤가?
․ Chapter 1: The Globalizing Economy
1장 글로벌 경제 (⇒ 글로벌화 되가는 경제)
․ Back to the Future
중국과 인도의 귀환 (⇒ ‘중국’과 ‘인도’는 없다)
․ State Capitalism: A Post-Democratic Marketplace Rising in the East?
국가 자본주의 : 동양에서 부상하는 비민주적 시장 (⇒ 의문문을 살리지 않았다)
․ Bumpy Ride in Correcting Current Global Imbalances
누가 균형을 잡을 것인가 (⇒ ‘누가’라는 말은 없다)
․ Diverging Development Models, but for How Long?
서구 모델의 대안은 있는가? (⇒ ‘대안’은 없다)
― 출처: 『글로벌 트렌드 2025』2009년 3월, 예문
각 장의 내용을 꿰뚫는 ‘키워드’나 ‘어구’ 혹은 ‘문장’도 각 장의 제목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두고는 시선이 곱지 않은 독자도 있었다.
“솔직히 그 두꺼운 영문 보고서를 다시 읽을 생각은 없었다. 그냥 앞쪽의 서문이랑 목차 정도만 비교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목차들에서도 원래 제목에 비해서 너무 자극적으로 변해있었다. …… (중략) …… 원문의 본뜻을 훼손시킨 역자는 그가 지켜야 할 선을 넘어섰다.”
― 출처: Yes24 홈페이지 블로그(작성자: 과학도)
안타까운 글이다. 내가 지켜야 할 선을 넘었다는 오해를 샀으니 말이다. 이번 기회에 독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번역가는 책 이름을 비롯하여 각 장의 제목, 심지어는 추천의 글과 뒤표지의 추천사 및 저자 약력도 전부 옮기지만 최종 출간본에 그대로 반영된다는 보장은 없다. 또한 이를 누가 바꿨는지는 출판사 편집자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번역가나 감수자도 모른다. 사실, 『글로벌 트렌드 2025』에서 각 장의 제목이 내가 옮긴 것과는 사뭇 달라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감수자가 바꿨으리라는 짐작에 ‘감수자’가 바꿨을 거라고 내 블로그에 올렸는데 실제 감수자로부터 ‘뜨끔한’ 답장을 받고는 얼마나 죄송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분은(감수자)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제목을 두고는 역자나 감수자 혹은 편집부 관계자 누구도 탓해서는 안 된다. 독자는 3자 중(역자, 감수자 및 편집자) 누가 손을 댔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괜히 애먼 사람 타박해서 상처 주는 일은 없어야겠다.
말이 나온 김에, 『글로벌 트렌드 2025(Global Trends 2025)』는 언론에 적잖이 소개된 책인데 그에 힘입어 매출도 크게 올랐으리라 짐작된다.
<보도자료>
같은 책 두 출판사서 동시에 번역 출간
외국 책자가 국내 출판사 두 곳에서 거의 동시에 단행본으로 번역 출간되는 흔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미국 국가정보위원회(NIC)가 펴낸 『글로벌 트렌드 2025』가 주인공이다. 예문 출판사는 이 책을 지난 2일자로, 한울 출판사는 5일자로 출간했다. 예문에서 낸 책은 전문번역가 유지훈·김수현씨가 번역했고 윤종석 문화체육관광부 홍보자료제작과장이 감수했으며, 한울의 책은 전문번역가 박안토니오씨가 번역했다. NIC가 이 책을 자유롭게 번역 출간하도록 허용한 바람에 두 출판사는 책이 나올 때까지 같은 책이 나온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 출처: 경향닷컴 2009년 3월 5일
두 출판사에서 거의 동시에 출간되었다는 점도 그렇지만, 오역시비에 적잖이 휘말렸다는 점을 두고도 특이한 책이다. 전문가 박씨의 번역은 원문에 충실하려 했다는 흔적이 많이 보였다. 그래서인지 박씨의 편을 드는 독자가 많았다. 사실 감수자는 박안토니오씨보다 김수현씨와 함께 옮긴 책을 좀 더 높이 평가하긴 했지만 예문에서 출간된 책을 문제 삼는 독자도 몇몇 있었다. 이에 “원문이 인터넷에 공개된 까닭에 오역시비가 잦았다.”고 하면 궁색한 변명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그 때문이라고 봐야 옳을지도 모른다. 원문이 공개되지 않았다면 오역시비는 거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오역을 두둔하는 것이 아니라 ‘오역시비가 불거진 점’만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두고는 오역을 문제 삼는 일이 거의 없다. 영화 대본과 자막을 일반인이 마음껏 열람할 수 있다면 외화 번역가는 오역시비로 홍역을 앓을지도 모른다. 사실, 책보다는 영화가 오역이 더 심한 편이다. 프레임당 글자 수를 맞춰야 하는 까닭에 자세하고도 정확히 풀어 쓸 공간적인 여유가 없고, 재미를 끄집어낼 요량으로 ‘오버’해서 옮기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관객은 오역을 문제삼지 않는다. 왜일까? 앞서 언급했듯이, 영화 한 편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흐름을 저해하지 않는 한, 오역도 정역으로 추켜세우니 영화는 서적보다 관대한 편이다. 영어깨나 한다는 사람들이 원문을 내려 받아 번역서와 일일이 비교해보며 ‘뭐 흠잡을 데가 없나’하고 유심히 살펴본다면?
저자: 오우……, 노우(Oh, NO). 설레발을 삼가시오!
내 지론 상 오역이 없는 번역서는 한 권도 없다. 오역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른 탓에 얼마든지 이를 집어낼 수 있으니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번역서는 없다는 얘기다. 다만 저자의 의도에 얼마나 근접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오역 여부를 가리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듯싶다.
1장(번역의 실체)에서 독자는 번역서를 판단할 능력이나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가령, 화가가 여러분의 초상화를 그린 후 이를 다른 사람에게 판다고 생각해보라. 실력이 부족한 탓에 실물과는 달리 코는 매부리코가 됐고 입술은 삐죽 나왔다면 “그림을 못 그렸다.”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겠는가? 그림의 모델을 알지도 못하는 손님일까? 아니면 모델일까?
(화가가 모델의 초상화를 그린다)
화가: 쓱, 쓱, 쓱……(그림 그리는 소리)
모델: (완성 후) 음, 코가 매부리코인 데다 입술이 너무 삐죽 나왔군요.
화가: 죄송합니다 …….
손님: (그림을 사러 갔다가) 이 그림 얼마에요? 코가 인상적인 데다 입술은 안졸리나 졸려처럼 섹시한 걸. 마음에 쏙 들어요.
화가: (머쓱해 한다) 아, 예…….
․ 화가 ⇒ 번역가
․ 모델 ⇒ 원서/저자
․ 손님 ⇒ 독자
왜 오역하는가?
그렇다면 번역가들은 왜 오역을 할까?
․ 글을 이해하지 못해서
․ 실수로 문장을 빠뜨려서
․ 글을 오해해서
번역가들이 모두 외국어의 달인은 아니다. 또한 너무 난해하여 읽어도 도통 알 수가 없는 원문도 있는데 이를 옮기려면 정말이지 죽을 맛이다. 교실에서 배운 영어로 현장 영어를 읽고 번역하려니 얼마나 어렵겠는가? 여러분은 우리나라 문학을 전부 이해하며 읽는가? 이를테면, 이문열님의 『사람의 아들』은 얼마나 이해했는가? 대학물을 먹었다는 사람들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구절이 많은데 이는 독자가 저자의 배경지식을 따라잡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문화적인 차이와 저자의 배경지식을 번역가가 다 섭렵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번역가는 ― 완벽은 불가능하겠지만 ― 외국어와 우리말뿐만 아니라 배경지식을 늘리는 데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혹시라도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그는 어떤 ‘용단’을 내려야 할까? 저자에게 물어서 답을 알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라면 어떻게 할까? 극단적으로는 이를 과감히 빼버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오역을 할까봐 겁이 나서 그럴 것이다) 100퍼센트 직역을 해버리는 사람도 있다. 실은 둘 다 꺼림칙한 것은 마찬가지다. 아무리 직역을 했다손 치더라도 원문을 이해하지 못한 탓에 바른 번역을 했는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추앙받는 성경에도 원문의 단어를 빼버린 글이 적지 않다.
또한 퇴고할 시간이 부족해서 역자가 오역을 충분히 교정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여유를 두고 번역하면 좋겠지만 출판사의 스케줄에 번역을 맞추다보니 ‘초고속’으로 일을 끝내야 할 때도 있다. 그럴 경우 좋은 번역은 기대하기가 어렵다고 봐야 한다.
번역기, 가능한가?
이렇게 흠이 많은 번역가대신 기계의 힘을 빌리면 번역계의 형편이 좀 나아지려나? 번역기의 가능성을 점치는 기사가 요즘 부쩍 증가한 듯 보인다. 십년 전에도 나는 통․번역기 개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그 견해에는 변함이 없는데, 다음 사례를 보면 내 생각에 조금이나마 공감할 것이다.
<사례>
What motivated you to write the book?
We live in a world with a billion people who are overweight, and a billion people starving. What I wanted to show was both why that happens, and to explain how the same forces are behind both outcomes.
What is the right choice consumers have to make in order to help the poor and starved?
There are some ethical consuming decisions (eat locally, seasonally, sustainably, and much less meat). But the most important thing we can do is to remember that we are more than consumers - we’re citizens, and we can take political responsibility and political action to change the world that has been built in our name.
<구글 번역기>
당신이 그 책을 작성 동기?
우리는 세상에서 과체중입니다. 10억 사람들과 그리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내가 둘 다 왜 그런 일이 어떻게 동일한 세력 모두 결과 뒤에 설명했다 보여주고 싶었어요.
무엇이 옳은 선택 소비자 위해서는 가난하고 굶주린 도움을 위해 해야입니까?
몇 가지 윤리적인 소비 결정(로컬, 계절에, 지속 먹고, 그리고 훨씬 더 적은 고기)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소비자들이 기억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시민이고, 우리의 이름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정치적 책임과 정치적 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본문>
구글(google)에서 발췌했는데 번역기를 쓰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나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반말로 쓰다가도 뜬금없이 경어가 튀어나온다. 컴퓨터도 가끔은 예절을 아는 모양이다. 위 예문은 한국일보 기자의 요청으로 교환한 (질문은 기자분이 우리말로 쓴 것을 필자가 영어로 옮긴 것이다) 원저자의 이메일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솔직히 영한번역기가 왜 있어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영어는 우리말보다 단어의 범위가 넓다. 예컨대, ‘travel’은 ‘(비교적 먼 거리를) 간다’는 뜻이므로 ‘소풍을 간다’거나 ‘해외 바이어가 어디를 방문한다’거나, ‘대통령이 해외를 순방한다’ 등 다양하게 옮길 수가 있는데 흔히 알고 있듯이 ‘여행’으로 일괄 번역하면 오역이 되기 십상이다. 게다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 우리말로 정확히 옮기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영어 단어 5개로 6조 4천억 개의 문장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1개부터 10개까지의 단어로 만들 수 있는 문장은 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할 테니 단순한 문장 입력이 번역기의 해법은 될 수 없으리라. 현재 유통되는 통․번역기는 단순한 인사말이나 아주 기초적인 문장이 전부다. 물론 번역이 영원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언제든 자리를 내줘야 할 텐데 번역기에는 절대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외국어 구사능력이 향상된 국민이라면 또 모를까. 국민의 과반수이상이 외국어를 별 무리 없이 구사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통․번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번역서를 리콜하라!
한 누리꾼이 해외 문학 번역서를 두고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글이 있다. 문학 번역서를 읽다가 오역이 심해 도통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 짜증이 난다며 이를 ‘리콜(recall)’하라는 내용이었다. 번역가로서 공감은 가나 동감할 순 없었다. 나는 “오역을 지적하기 전에, 오역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고 댓글을 달았다. 독자가 엉터리 번역을 문제 삼을 때는 언제인가? 앞뒤 문맥이 맞지 않거나 아무리 읽어도 도통 이해가 가지 않으면 그제야 “날림 번역”이라고 지적할 것이다. 하지만 술술 읽히고 이해하기가 쉽다고 해서 오역이 없다는 보장은 없다.
예컨대, 『신데렐라(Cinderella)』의 원문에 따르면, 신데렐라는 유리구두가 아닌 다람쥐의 ‘모피’로 만든 구두를 신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프랑스 작가 샤를 뻬로가 1697년에 원작 동화를 번역하면서 ― 그가 창의력을 발휘했는지 확인되지는 않지만 ― 생소한 ‘털가죽’을 ‘유리’로 고친 것이다. 솔직히 털구두 보다는 유리구두가 더 로맨틱하지만 심각한 오역임에는 틀림이 없다. 작품의 주요 소재가 완전히 둔갑해버렸으니까.
그럼 오역이 눈에 들어올 때 독자는 이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따져보자.
독자 1: 자질이 부족한 역자를 인터넷에 까발리고 그의 자존심에 흠집을 낸다.
독자 2: 정확한 뜻이(혹은 저자의 의도) 무엇인지 출판사나 역자에게 물어본다.
“아, 날림번역을 했던 그 사람!”이라며 번역가를 생매장하려 들지는 말자. 앞서 언급했듯이, 역자도 사람인지라 아무리 조심하고 꼼꼼히 옮겼다고 해도 워낙 분량이 방대하다보면 실수하게 마련이고 이를 편집자나 감수자가 파악하지 못하면 오역이 그대로 책에 ‘밀반입’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S출판사 편집부는 원고를 세 번씩이나 검토했다는데도 출간된 책에 오타가 몇 군데 있었다!). 또한 마감시한을 비롯하여 외국어․우리말 실력 등 번역의 차이를 낳는 변수는 매우 다양하다. 그러니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책을 읽되 이해가 가지 않거나 의문점 혹은 불만이 생긴다면 번역자의 블로그나 출판사 게시판에 문의하라.
다음은 어느 독자가 내 블로그에 남긴 글을 발췌한 것이다.
『좋은 사람 콤플렉스』독자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책을 읽는 중에 [complex 5 _불합리한 추론에 근거한다] p177에서 '간호원'이라고 번역하셨는데요. 간호원은 전문적 지식인으로써 간호사를 대접하지 않는 그런 표현이라 생각됩니다. 간호사는 의료법에서 정하는 전문교육을 받고 국가시험에 합격한 후 보건복지부 장관의 면허를 받은 자로서 의사의 진료를 돕고 상병자나 해산부를 돌보는 업무를 수행하는 전문인입니다. 간호원은 의사에 비해 간호사를 낮추는 호칭이었기에 현재는 간호사라고 '사' 가 들어가는 호칭으로 바뀌었습니다. 혹시 제 글의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앞으로 번역하실 때 주의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ID: cleanyongsu
얼마나 아름답고 정중한 지적인가! 오역이 발견되면 이를 다행으로 알고 출판사의 독자 게시판에 저자의 바른 의도를 지적해주거나 이를 모를 경우에는 역자에게 바른 뜻을 물으면 된다. 독자의 본분은 번역가의 흠을 잡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의도를 바르게 파악하고 책에서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다. 그러니 될 수 있는 한 역자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바른 내용을 습득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고, 그러려면 역자의 메일이나 블로그 혹은 출판사 게시판을 적극 활용하면 좋을 것이다.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면 역자에게 직접 물어야지 번역가 탓만 해서 해결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작품에 ‘손’을 대야 할 때
믿기진 않겠지만 오역이 ‘불가피’할 때도 있다. 특히 원문에 문제가 있을 땐 어쩔 수 없이 오역을 해서라도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 역자의 양심이 발동하면 이를 가만히 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작품에 ‘메스’를 대야 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 논리가 맞지 않다
․ 사실과 다르다
․ 글이 매끄럽지 않다
․ 같은 말을 지루하게 반복한다
․ 언어문화가 다르다
…… from Darfur to Caracas to Rangoon, the rallying call of Washington for 'democracy' and 'human rights' had to be taken with at least a large grain of salt. Most often the taste was beyond bitter; it was un-palatable.
다르푸르에서 카라카스 및 랭군에 이르기까지 미국 정부가 외치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쓰디쓴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 테니까.
― 『전방위 지배(Full Spectrum Dominance)』 중에서
어디가 오역인가? 원문에는 ‘salt(소금)’가 있으나 역문에는 ‘소금’이 없다. ‘take something with a grain of salt’는 관용어구인데 이를 원문대로(소금 알갱이 하나까지도 받아들이다) 옮기자니 내용의 의미가 분명히 전달되지 않고 의역하자니(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다음 문장의 ‘taste(맛이 나다)’라든가 ‘bitter(쓰다)’ 혹은 ‘un-palatable(입에 맞지 않는)’에 대응되는 말을 찾기가 애매해지므로 역자는 문화적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두 문장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려면 어느 한쪽은 오역이 돼야 한다. 그래서 본문에는 없는 말(쓰디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을 지어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 말이 통하지 않을 때도 난감한 건 마찬가지다.
Inbreathe love that you may forgive.
용서할 사랑을 들이쉬라.
― 『성공의 심리학(Original Psychology of Success)』 중에서
원문대로 옮기고 나니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용서의 대상이 아니다. 왜 사랑을 용서하는가? 그래서 다음과 같이 원문을 ‘조작’하기로 했다.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을 들이쉬라
성경이라서 행복해요
갖은 오역시비에도 일반인(대개는 크리스천)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는 책이 있다면 단연 ‘성경(The Bible)’일 것이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으로 알려진 탓에 오역에 관대한 듯싶기도 하지만 “성경 번역본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 나를 질타하는 크리스천도 있을지 모르겠다. 번역본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쓴 것이라면 영어성경과 우리말 성경 혹은 히브리어(혹은 그리스어) 원전의 내용 중 일부가 각각 다를 뿐 아니라 역본에 따라 누락된 단어도 적지 않다는 점은 석연치가 않다. 게다가 번역본에 따라 일부 내용이 다르니(개역한글과 개역개정 중에는 정반대로 번역된 구절도 있다!) 어떤 성경을 읽어야 할지도 애매할 것이다.
예컨대, 번역을 하지 말아야 할 부분을 번역한 글귀도 눈에 띈다. 다음 사례는 도시를 일컫는 고유명사 ‘로드발(Lo debar)’과 ‘가르나임(Karnaim)’을 그대로 풀이하여 웃지 못 할 해프닝을 연출하고 말았다. 마치 ‘대전(大田)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를 ‘큰 밭(대전)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옮긴 것처럼 말이다. 다행히 『쉬운 성경』은 이를 바르게 번역했다.
․ You who rejoice in the conquest of Lo Debar and say, “Did we not take Karnaim by our own strength?(아모스 6장 13절)”(NIV)
․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뿔들을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는도다(개역개정).
․ 너희는 로드발이 점령되었다고 기뻐하고 “우리가 우리 힘으로 가르나임을 정복했다.”고 말한다(쉬운 성경).
- [번역의 즐거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