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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순우 시집『엄마』전재
해가시선ㆍ17 엄마
초판1쇄 | 2015. 6. 10.
지은이 | 서순우 펴낸이 | 정연휘|
펴낸곳 | 도서출판 해가 245-943강원도삼척시오십천로301-30.101-1503 전화 033-573-4613 ․ 010-3341-3327 e-mail:haika@hanmail.net
출판등록 | 제99-10-3호 1999. 7. 7. 인쇄처 | 문왕사 033-648-3670
ISBN 978-89-93138-22-1
값 13,000원
ⓒ2015 서순우 저자와의 협의에 의해 인지를 생략합니다. 잘못된 책은 바꾸어 드립니다. 날마다 좋은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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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기적은 내 엄마 뱃속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나는 엄마의 딸이 되었고 살며 엄마라는 이름을 달게 되었다. 그 엄마 라는 이름으로 첫 시집을 낼 수 있어 가슴이 벅차다. 내 친구 같던 아버지와 내 존재인 엄마에게 부족한 이 시집을 바친다.
2015. 초여름에 서 순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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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_ 시인의 말
1부 엄마
18ㆍ엄마 19ㆍ사직동 이야기 20ㆍ사진 한 장 21ㆍ점리 2반 산 속에서 22ㆍ영은사에서 23ㆍ봄날 24ㆍ고흐 당신에게 25ㆍ사랑 26ㆍ아버지와 27ㆍ친구야 28ㆍ시장통 그 여자 29ㆍ낙엽 30ㆍ영채 31ㆍ그 安 32ㆍ회상 33ㆍ입춘 34ㆍ남이섬 연가 35ㆍ태풍 루사 36ㆍ꿈이었다
2부 해무
38ㆍ엄마의 봄 39ㆍ달맞이꽃 40ㆍ미자 씨가 좋다 41ㆍ해무 42ㆍ숲 43ㆍ산다는 건 44ㆍ구름 빛 짙은 날 45ㆍ알 수 있을까 46ㆍ어느 찻집 이야기 47ㆍ벚꽃은 피는데 48ㆍ사과밭에서 49ㆍ천천히 가리라 50ㆍ농막에 가자 51ㆍ안개산 오르며 52ㆍ그랬으면 좋겠다 54ㆍ미로 55ㆍ봄 56ㆍ건지골 지나며 57ㆍ밤꽃
3부 엄마네집
60ㆍ엄마네 집 61ㆍ내 나이 오십 62ㆍ무소유 63ㆍ민둥산 64ㆍ그 시인 66ㆍ용대리로 가세요 67ㆍ몽유도원도 68ㆍ5월 어느 날 69ㆍ오두막 70ㆍ그 집 71ㆍ부산에서 72ㆍ사람아 73ㆍ은행나무 아래 서거든 74ㆍ골목길 75ㆍ광진산에서 76ㆍ죽서루에서 77ㆍ유월은 78ㆍ먼 여행 79ㆍ사루비아
4부 아버지
82ㆍ엄마는 하느님이었다 83ㆍ아버지 84ㆍ해당화는 지고 있는데 85ㆍ농부 86ㆍ그립다 87ㆍ경포에서 88ㆍ내 사랑 폴 89ㆍ두타산 90ㆍ활기리 밤 91ㆍ이산가족 92ㆍ어느 날 93ㆍ한재에서 94ㆍ도경역 95ㆍ부엉이 96ㆍ동창회 97ㆍ내가 사는 골목에는 98ㆍ단풍 99ㆍ그해 여름 100ㆍ사월
102ㆍ발문|박문구 상실과 그리움, 그리고 탈출의 허상
1부 엄마
엄마
내 부엌살림의 반은 엄마 몫이었다 살갗을 후볐던 산딸기의 빨간 여름이 그러했고 관절을 더한 만두 속내가 그러했고 몸을 말려 까칠한 명태도 그러하여 겨우내 내 마음도 냉동실에서 얼어야만 했다 입춘이 되면 내 몫은 창문을 열고 먼지와 함께 나가느라 바삐 소심해져갔고 늙은 엄마는 마당의 마른 꽃가지를 걷어내며 묻어두었던 무를 원 없이 파내곤 했다 끼니 때가 되면 고향을 떠날 수 없었던 어느 바람처럼 이리저리 날리던 엄마냄새 나이 든 된장을 풀어 국을 끓이고 이른 초록으로 냉이를 무쳐 입 안 가득 살맛나는 삶을 살게 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사랑 그 뒷전에서 나는 엄마보다 더 빨리 나이 먹어가며 내 안에 다시 반으로 채워질 엄마라는 이름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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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동 이야기
언덕배기 작은 마을 굴뚝마다 피어오르던 학교 종소리 새들이 털고 간 눈꽃송이에 시누대 우거진 마당 한켠이 울었고 비바람 젖은 쪽마루 밑 겨우내 뗄감으로 가득했지만 솜이불 목까지 끌어당긴 팽팽한 싸움 그칠 날 없었다 키 큰 감나무 끝 밤새 만든 가오리연이 주전자 가득 출렁이던 막걸리에 취하면 앞산 그늘 빛에 꽁꽁 언 논밭 뛰놀던 우리 말린 감 껍질 길게 씹으며 편 가른 싸움놀이에 저녁이 지쳤다 해질녘 텃밭 하나 놓고 둘러선 일자 칸 셋집 부엌문 활짝 열어놓고 간 칼바람이 숟가락에 걸려 넘어지면 아궁이 속 군불은 말없이 밤을 내몰고 손금 마디 금간 세월 얇게 드리운 도시 속 황산은 그대로 영웅인 채 서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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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 장
오래된 나무 둥치에 앉아 우리는 사진을 찍었다 아마도 점심을 막 끝내고 누군가에게 꼬드겨 죽서루까지 왔었나보다 아버지의 작업복과 엄마의 야단스런 월남치마에 둘러싸여 비장한 각오로 낡은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심각한 표정으로 지금도 여전히 그때처럼 사진을 찍는다 먼 훗날은 안중에도 없이 그렇게 사진을 찍는다 사진 속에서 우리는 마냥 젊다 이별이 뭔지도 모르게 그냥 젊다
가족은 사진 한 장 속에서도 기적같이 살아남고
나이 들어 죽서루에 서니 석양빛 자욱하고 새떼들 대숲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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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리 2반 산 속에서
별 무성한 하늘 아래 그 집 여자 살고 있었네 바람소리에 에돌아 흐르는 메아리 벌써 몇 잎 단풍을 달고서 가을로 떠나려는데 차를 타고 오르던 고개 너머 산자락마다 한갓지게 어둠은 내리고 허름한 마당에서 백열등을 쬐던 우리의 詩도 고욤나무처럼 커져만 갔네 땀에 씻긴 포도의 반항과 복숭아 뽀얀 속살이 하얗게 일렁이는 시간 속에 새벽을 업은 몇은 떠나고 남은 몇은 술에 취해 몇 번이고 세상을 방뇨하였네 별빛에 눈뜨는 어둠과 그렇게 한통속이 되어가는 점리 2반 산 속에서 우리는 몇 날이고 몸살 앓는 시인이 되어 가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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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사에서
스님이 손수 만든 따박장에 봄나물로 밥을 비벼 먹으며 하루쯤 묵어가도 괜찮을 영은사
심검당 반쯤 열린 문틈으로 밤이 까맣게 익어가네
별이 내리는 마루에 서면 탄허스님 주련에 한풀 꺾이는 욕망
혹여 소쩍이 소리에 깨어나 해우소라도 갈 수 있다면 초승달이라도 차고 앉아 시 한 편 암송 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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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햇살 가득한 마당 팔순 노인은 술이 좋아 봄 술을 마시네 “꽃도 있고 술도 있는데 벗이 없네” 할아범의 시 같은 말을 달고 오늘도 할멈은 육십여 년 부지런히 마실로 가네 혼자 사는 할멈네 구들에 누워 무진장 털어놓는 할아범 흉 위로 벚꽃 가득 쌓이네 돌아와 성성한 할아범 머리를 깎이는 동안 또 봄바람 불어오네 “바람 좋지 아무렴 강바람은 더 좋아” 할아범 주름 사이로 할멈 모르는 옛 사랑 꽃으로 피어나네 언젠가 나도 그들 노부부처럼 담 없는 넓은 마당에서 할아범처럼 술 좋아하는 울 신랑 봄 햇살 가득하도록 흉이나 실컷 봤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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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당신에게
언젠가는 이 세상 광기로 남은 당신의 해바라기를 내 정원에 모조리 옮겨 오고 싶었소 하루의 노동을 막 끝내고 돌아와 그 허름한 신발을 신은 채 그 의자에서 졸며 당신을 꿈꾸고 싶었소 이명이 메아리치던 달팽이관을 따라 나도 언젠가는 잃어버린 한 쪽 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소용돌이치던 당신의 세상을 차마 놓을 수 없었소 당신이 남기고 간 세상은 끝내 홍수에 지고 바람 속에 있지만 해마다 당신처럼 들녘에 씨를 뿌리며 노동을 그치지 않겠소 당신은 이르디 이른 나이를 살다가 갈 것을 알고 그리도 책 속에 빠졌던 것이요 영혼의 편지를 쓰면서 말이요 이 늦은 밤 당신의 그 편지를 받고 슬프고도 행복한 까닭은 나도 하찮지만 시인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오 부디 당신을 닮은 한 폭 자화상처럼 나도 그리 살다가 가고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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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말없이 비에 젖은 하늘과 풋풋한 바람에 묻어가기를 원한다 빈 마음을 안 어느 변방에서 너를 훔치기로 한 하루 그 하루는 너무나 특별했다 너를 사랑이라 부르며 밤새 괜찮다 괜찮다며 여린 몸을 내 고향처럼 아름답게 사랑하기로 했다 마침내 너는 나의 애인이 되었다 책 사이에 끼워둔 가을처럼 사랑은 다시 오고 있었고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늘 바빴지만 우리는 이것을 행복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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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버지 병원에 가 계시는 동안 나는 바람난 개망초처럼 살았다 아버지 병원에 가 계시는 동안 도시는 자주 눈꺼풀을 내리고 안개 속에 눈물을 쟁이며 살았다 아버지는 병원에서 얼마나 많은 밤을 멈추게 했을지 축난 아버지의 살점은 바람을 타고 날마다 마당으로 와 풀이 되어 자랐다 그러는 동안 밤마다 기도는 달빛으로 차올라 숨차게 달려 아버지에게로 갔다 이별은 훗날에나 기약하는 것이라고 자꾸만 자꾸만 생각해야 했다 아버지와 내가 같이 생각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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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야
내가 꽃씨로 말하면 늘 꽃으로 피어나는 친구야 너는 비타민으로 저장된 내 휴대폰의 비밀을 모른 채 오늘도 나와 새해 점심을 먹었다
네가 준 달력에서 꽃 내가 난다 내가 또 한 번의 미역국을 먹을 동안 너는 이승을 쉬 놓지 못하던 어머님을 보내며 어머니 같은 병을 앓았다고 핼쓱하게 말했다
그때 그 자그만 자취방 창에 젊은 서릿발을 치고 부유했던 탄광촌을 이야기하며 우리는 또 새해 점심을 먹었다
생각해 보니 친구야 젊었던 둘만의 비밀 아름다워할 겨를도 없이 우리 벌써 이만큼 왔네
지금에도 문득 그때 그 나이 자두처럼 붉었던 그 나이 아, 뛰는 가슴 어찌 하리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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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통 그 여자
질펀한 시장바닥에 앉아 몇 안 되는 손님 발끝을 보내며 이제 막 육십을 돌아 못이 되어 박힌 그 여자 어젯밤 꿈에선 따뜻한 구들에 배를 붙이고 벽을 뚫고 들어온 바람일랑 한바탕 뒹굴어도 좋았다 지나가던 햇님이 들르는 시장 모퉁이 시시한 농담으로 끼니를 채우면 바다를 휘돌아 숨이 찬 생미역의 몸짓과 아직 나를 버리지 못한 잔멸치의 소태 같은 마음이 옛적 엄마 등 같아 어린 날이 너무 그립다 시장통 여자야 남편일랑 어디에다 숨겨두고 못이 되어 박혔느냐 추워지면 바람에 살을 내어주고 더워지면 하루살이처럼 맥을 놓다가 하늘에다 눈물 꿈같이 쏘아 올려 그 눈물 다시 진눈깨비로 가는 길 휘청거리게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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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 계수나무 아래서
시간아 괜찮다 흘러가도 괜찮다
비워내는 열 가지 마음 안에 꼭 죽어야만 하는 그 준비를 너의 뒷모습에서 보았으므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몸을 함부로 떨구어도 남루하지 않은 너로 인해 그 길은 내 것이 되었으므로
싸늘한 떨림으로 너처럼 되돌아온 골목길 온통 구름뿐인 하얀 하늘은 걸어 자정을 넘는다
다시 어제가 될 오늘 너의 죽음은 여전히 아름답게 시작되고 보아라, 나는 또 얼마나 애쓰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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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채
배나들에는 그녀가 운전하는 버스가 있다 하루에도 하염없이 파도를 싣고 바다를 달린다 사람들이 두고 간 상처와 사람들이 두고 간 사연들이 함께 버스를 탄다 오늘은 또 몇 사람이나 버스를 탔을까 봄이 오면 냉이 대신 미역을 길게 말아 주는 여자 종일 그렇게 바다를 달리며 번 돈으로 집도 절도 잃은 고양이들 양식이 되는 뜨거운 여자 낯선 이의 전화 한 통에도 당장 달려가고야 마는 영채,
그녀는 천상 시인이다 그녀의 남편 그녀의 아들딸은 진짜 시인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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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安
술 한 잔에 둥둥 떠다니던 헝겊 위의 단상들
먼저 간 노동의 냄새와 내 몸 섞여 낡은 흑백 사진 속으로 숨는데
소주를 나르던 둥근 사람아 바람 되어 비워지고 다시 돌아오고 그 바람처럼 홀로 왔다 가는 당신은 행복한 것이냐
쏟아낸 말言들 한 그릇 촛농으로 넘치는 절박한 이 시간 틈에 밖은 이미 어둡다
우리 별 하나의 무게로 지하를 떠나자 그 安을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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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공전1)다리 아래 내 어린 속옷 말려주던 오십천 흘렀지 오시오 상점의 다리 저는 소년과 국숫발에 배불렀던 통배기 첫 입새 그리고 꿈의 삼흥문구사 태백여관 안주인 예쁜 얼굴도 젊었던 그때 봉황촌을 지나가던 기차소리 코끼리산 넘어 정라진에 들었지 언덕배기 첩첩한 판잣집 그곳은 나릿골 동두고개 어디쯤이면 도깨비불 번쩍였다고 누군가 말했지
분진을 쓴 오분리 그 바다 곁으로 또 누군가의 우물인 듯 길이 났지
여고 긴 복도 창 너머 벚꽃 지는데 오십천에 추억처럼 내려앉은 백로 한 마리 -------------------- 1) 삼척공업고등전문학교, 현재의 삼여교 옆 남양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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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
마른 풀들은 또 한 계절에 밀려 겨울을 앓아야만 그저 그렇게라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봄의 길목에서 알았다
벌써 시집간 딸년이 퍼 나른 양식도 제법 두둑하게 자기 배를 불렸고 성근 눈발에 앉아 오곡밥에 나물을 비벼 먹던 마음도 달빛처럼 하얗다
햇쑥이나 냉이쯤으로도 충분히 가슴 떨릴 수 있는 날 산은 아직 수줍고 고요한데
봄이 왔다는 소문으로 구름은 들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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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섬 연가
은사시나무 계수나무 붉은 꽃으로 걸어보고 싶었네
아득한 첫사랑 아까시로 하얗게 피우고 산딸나무로 살다가 꽃잎마저 연두인 전나무에 들고 싶었네
그 길에서 날 저물면 상수리 노란 품에 잠들다가 갈대에서 잠을 깨는 붉은 단풍이고도 싶었네
사랑은 꽃이고 나무라네
그리하여 길이라도 잃어 초록 풀로 다시 깨어날 수 있다면 사랑 다시 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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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루사
마을은 물이 되었고 길은 길을 잃었다 시작인 듯 끝인 듯 알 수 없이 모두가 다 떠나려고만 했다 아니 이제는 이별해야 한다고 억지를 쓰는 것 같았다 어릴 적 오십천을 둥둥 떠나가던 어느 집 세간 살이며 뜨거웠던 여름날이며 그때처럼 지금도 농부의 거친 손을 잡지 않으려 안간 힘을 썼다 남겨진 것들 속에 여전히 부끄러운 나 온전히 진흙무덤을 지키는 하룻밤이어야 했고 마른하늘 날리는 바람이어야 했다 우리는 그렇게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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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었다
그 섬은 여전히 내 사치를 틀어쥐고 많은 인파 속에 있었다 식구들은 단풍 한 줌씩 허공에 날리며 사진을 찍었다 보트를 타며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다 간간이 깨어나듯 더 깊이 가는 길 나는 몸에 좋다는 물을 끓였고 엄마는 소나무가 사는 산속으로 이리저리 아버지를 몰고 다녔다 뚱뚱한 제부의 웃음도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새벽 밭을 다녀오는 엄마 발자국 소리 서둘러 깨어났다 아버지는 꿈 속에서 아직은 건장한 사내였다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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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해무
엄마의 봄
어느 산모퉁이에 앉아 엄마는 내 전화를 받는다 곁에는 젊은 꽃이 벙글고 쑥을 뜯는 엄마 목소리가 노곤하다 올해도 엄마를 위해 쑥은 바다처럼 피었다 올 봄엔 유난히 쑥물이 짙어 딸년 갱년기가 남루해졌으면 좋겠다며 엄마는 또 봄길을 나선다 쑥버무리가 솥에서 김을 내는 동안 마당가 엄마가 심어놓은 작약에도 살짝 쑥빛이 돈다
엄마는 꽃보다 아름다운 봄이라는 이름으로 저물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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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꽃
꽃은 잠 못 들던 밤에도 하염없이 피었다 어제는 정자가 그 꽃 기름을 매년 사 먹는다고 했다 머잖아 팔십을 바라보는 몸에도 밤마다 달이 뜨고 꽃이 피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했다 정자를 생각하며 아니 내 딸들을 생각하며 여름을 견딘 강하고 여린 마른 꽃대를 꺾었다 손바닥만 한 마당에서 그 작고 까만 채송화 같은 씨앗들은 바람에 날아가고 새들에 내어주고 그렇게 말라갔다 나이 들어도 고운 단풍처럼 나도 곱게 늙고 싶었는데 벌써 세월 저만치 가고 없고 아침 꼬드겨 짜는 달맞이꽃 기름 세월없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떨어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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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 씨가 좋다
미자 씨가 좋다 농사짓는 농부 미자 씨가 좋다 마흔 넷 하얀 머리 제법인 기가 센 여자 그래서 더 좋다 남자처럼 일하고 남자처럼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미자 씨가 너무 좋다 입만 열면 줄줄이 포도알처럼 영그는 그 수많은 재미들 같이 밤도 새고 싶고 감춰둔 얘기도 훔쳐내고 싶다 천장 낮은 방 우리가 먹는 푸성귀 우리가 먹는 닭백숙에서 미자 씨 냄새가 난다 툇마루에 별이 쏟아지는 밤 층층나무 옆 돌담 너머 올가을 미자 씨 희망이 될 푸른 옥수수를 본다 나는 미자 씨가 좋다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았는지 캄캄한 오늘 밤처럼 모르고 있을 미자 씨 나는 정말 미자 씨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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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무
옹색하게도 나는 가까운 곳조차 볼 수 없는 해무가 되기로 했다 오늘도 그러했고 그래서 섬이 된 바위의 꿈만으로도 바다인 줄 알기로 했다 사람들은 한낮 땡볕을 문신처럼 새기길 희망하며 쫓기던 시간의 한쪽 귀퉁이를 어깨에 둘러메고서도 힘들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그들이 풀어놓은 들꽃 같은 자유를 나도 밟으며 내가 죽을 것을 알고 사는 것처럼 그들 또한 그러하리라고 해무가 아니어도 날 저물도록 술잔에 실리는 언어들의 행색으로 주저 없이 사랑을 하게 되리라고
지금도 버스터미널에는 다 벗은 바다 위 별을 찾아 떠나온 사람들로 북적이는데 나는 가까운 곳조차 볼 수 없는 부끄러운 해무가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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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길은 보이지 않았다
숲길 밖에서 별이 달이 침묵으로 서성였다
벌레가 되어 몸으로 말하며 풀들의 이름을 불렀다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것들 그 속에 내가 있는데
사랑을 알지 못하고는 숲을 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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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쑥내가 가시지 않은 방 안에서 엄마는 아버지의 엄마처럼 하루를 산다 아버지는 누워 있는데 엄마는 여전히 장을 담그고 아버지는 누워 있는데 엄마는 더덕을 까고 새끼들에게 먹일 생각을 한다 최고의 절정으로 나를 만든 내 엄마 내 아버지의 젊디젊었던 날들 늙어간다 자꾸만 늙어간다 아버지 옛날처럼 바람이라도 피우면 이젠 멋진 공범이 되어 줄 수 있는데 아버지는 누워 있다 그저 누워만 있다
산다는 건 뭐 큰 일도 아니었던 것을 산다는 건 자잘한 걸음걸음이었던 것을 아버지 누워 있으니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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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빛 짙은 날
뮌헨에는 보자기를 쓴 혜린이 살고 예쁘지 않은 혜린이 살고 나도 혜린처럼 예쁘지 않고
혜린이여! 사랑이 그토록 고독일 수 있다는 것 비가 되지 않을 만큼 눈물일 수 있다는 것 사랑이 그토록 문학적일 수 있다는 것
구름 빛 짙은 날 나도 혜린처럼 마음에 이끼가 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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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있을까
사십 줄에 있던 엄마를 보고 무슨 낙이 있을까 생각한 적 있다 아직도 젊은 척 하는 내 오십 줄을 아들녀석이 그때 나인 것처럼 묻는다 지금처럼 아까시 향 짙을 때면 자주 가슴 떨린다는 것을 소쩍이 울음에 내 그리움 더한 다는 것을 그렇게 몇 해 갱년기를 메달고 여자로 산다는 것을 아들도 그때쯤이면 알 수 있을까 꽃들도 봄 끝자락을 놓지 않으려는 강릉 가는 버스 안에서 주름 깊은 할머니 입심이 오늘따라 구슬픈 까닭은 무슨 낙이 있었을 그 할머니 사십 줄이 그리운 까닭이겠다 바깥은 정말 눈물꽃 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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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찻집 이야기
가던 길 멈추고 잠시 쉬어가도 좋겠다 단 둘이 오래도록 누워봐도 좋겠다 한 뼘 우물진 곳에 마음 내리고 광태리 마지막 주소 시처럼 읽어보면 어떨까 밤새 시누대에 내린 바람으로 찻집 문 열고 들어가 몇 안 되는 사람 속에 끼어도 좋겠지 풍경에 가려진 바느질 소리와 처마 끝에 메달린 메주만으로도 충분히 날 것 같은 겨울 봄이면 꽃바람 속에 장맛 일궈내고 남루했던 풀숲사이 흙냄새로 파란 창틀 흔들겠다 그래서 돌아서면 왠지 더 그리울 것만 같은 머리 묶은 남자와 그 집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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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은 피는데
만개한 벚꽃 아래 육십은 됨직한 남루한 남자가 손짓발짓 뭐라고 떠든다 앳된 여자의 감출 수 없는 눈물 꽃잎은 바람에 날리다가 여자얼굴에 가 앉는다 그 꽃잎처럼 여자는 외롭게 날아와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밤이면 나이 많은 남자와 자기도 하면서 아이도 만든다 내가 아는 오빠는 나이가 꽤 있는데도 멋지게 혼자 살아가는데 남자는 우리말도 어눌한 먼 나라 처녀를 데려다 울리며 산다 아직 첫사랑도 해보지 않았을 여자 벚꽃은 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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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밭에서
한때 몸에서 돋았던 하얀 꽃으로 시작했던 사랑
하늘 푸른 그 곳 키 작은 아이 여럿 낳고 달다가 시다가 혹은 어느 아낙들 질퍽한 농으로 좀 더 자라났을 그 붉은 것들
마지막 사십 줄에 매달린 내 몸부림 같은 과즙으로 사내 같은 나비를 들이고
다시 곁에서 꽃사과 몇 곁눈질 하던 그 붉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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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가리라
천천히 가리라 나도 어느 노시인처럼 푸른 기차를 타고 그 마을까지 가는데 백 년이 걸리길 원한다
마당 가득 금잔화만 피었다 지면 어떠랴 잠시 꾸미지 않은 얼굴이면 또 어떠랴 하루를 바쁘게 살았던 죄 그러다가 조금 더 욕심을 부렸던 죄 그 죄로 인해 가끔 병원을 오간들 어떠랴
다시 천천히 가리라 나도 그 노시인처럼 삼십여 편으로도 충분히 시집 하나 만들어 세상에 내보낼 수 있기를 원한다
삶은 무겁다가도 가볍게 늘 허무 뒤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지만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살아보니 알겠다
그리하여 그저 천천히 가는 것도 꽤 괜찮을 법도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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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막에 가자
농막에 가자 청보리 밟으며 농막에 가자 소똥 냄새 서성이는 밭을 지나 바람에 부풀린 소리 귓속으로 들이며 농막에 가자 등 굽은 두타산 자락 잡으며 가다가 매화향이라도 꼬드기며 농막에 가자 그러다가 농막에 닿으면 비좁게 앉아 봄나물을 먹고 글쟁이들끼리 하찮은 냄새에도 감동하자 놀러온 아랫동네 몽실이 텅 빈 뱃속처럼 다 채워지지 않은 오늘을 위해 외로움 덜하게 대들보 높이 깊은 사랑을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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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산 오르며
걷히는 것이 아니더라 젖는 것도 아니더라 턱으로 숨이 가려지는 것이더라
암자 하나 까치발에 숙연하고 따라 오르는 꿈의 고원아
인생도 그러하듯 꿈을 위해 시간을 오르고 꿈을 위해 길을 내리고
산천이 방목한 약수 새울음으로 흐르더라
소나무도 얼싸안은 그 형상의 길 막고선 스님에게 향내 자욱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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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으면 좋겠다
한 일 년을 좋다는 풍경 따라 다니다가 어느 한적한 외딴집에 집을 풀어도 좋겠다 오랜만에 나를 방치해두고 당신 혼자만 그 외딴집 방 한 칸 세 들어 먹고 자고 했으면 좋겠다 혼자여도 참 괜찮네 생각하며 좋아하는 낚시도 하고 매일 노을져도 좋겠다 어느 먼 허름한 곳에서 살림을 차려 얼마를 사셨다는 배를 탔던 당신의 아버지처럼 가끔은 우렁각시가 차려놓은 늦은 저녁상을 마주하면 어떨까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렌다는 청춘을 지난 지도 오래
우리 산 만큼 다시 살 수 있다면 그간의 삶은 어쩌면 잃은 것도 섭섭함도 아니겠다 그저 조금 아쉬운 그래서 혼자 외딴집에 풀어도 좋을 짐 하나의 무게쯤이겠다 다시 살아갈 수 있는 무게쯤이겠다
모든 것 그러면 좋겠다 모든 것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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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
재 너머 외나무다리 하나 내 아버지가 묻힌 그 마을 그 마을 하얀 집에 민들레 같은 부부도 산다
해마다 그들의 붉고 푸른 자두와 그들의 젊은 푸성귀들 무성하면 그 마을 더욱 미로 같아지고
별 무성하던 마당에서 시를 읽던 어느 늦여름은 그들 부부가 우리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기도 했으니
안개 낀 새벽길 밭둑길에서 흙과 뒹굴며 詩를 고민했을 사람 그래서인가 요즘 그 사람은 아프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아픔이고 용기인데 이제 그는 아픔 하나 더 얹고 아내랑 다시 용기를 내는 중이다 내 갱년기가 자두나무 아래를 서성일 때처럼 그의 詩도 사월 꽃눈처럼 여전히 이리저리 그 마을 미로를 탐내고 다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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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슬퍼야 한다고 아파야 한다고 그 슬픔 안에 일찍이 벚꽃도 안개처럼 조용히 만개하리라
너는 언제나 처음인 것처럼 그렇게 시작 되다가 남겨진 이별 같은 마음으로 사랑한다 외치며 유행가 가사처럼 젊음을 막 시작 하곤 하지
그러나 그래도 녹지 않은 눈 있거든 이별대신 참아야 할 내 슬픔 같은 것이라고 말해야 하리라
너를 들이는 세상에 한때는 내 힘이었던 청춘도 함께 더하나니 이제 곧 나에게도 너로 인해 얻은 행복이 바람 되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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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골 지나며
강바람이 되는 길
어둠 속에서 사내는 도심의 귀퉁이를 잡고 새벽인 양 흔들린다
저 멀리 물안개 오르는 소리 내 몸도 이제 강바람에 철저히 섞여야 하는 시간
나지막한 오십천 갈증이 올려다보는 철교 철교를 건너는 사람들의 발에서 쇳소리가 난다
소쩍새 숨어든 지금 수은등 창백하고 오십천은 一月처럼 떨며 흐르는데 나는 건지골 어디쯤에서 이렇게 헤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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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꽃
멀리 있어도 가까운 듯 저리도 확연히 아무런 말도 없이 꽃이고자 한다면 나도 너처럼 꽃이 되어도 좋겠다
청보리였을 적 설렘과 아까시 향을 사르던 이별도 벌써 추억이라면 길 어디쯤에서 나도 누군가를 그리워 그리워해도 좋겠다
세상은 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멀리 있어도 가까운 듯 밤꽃 너도 어쩜 그리 확연히 행복할 것만 같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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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엄마네집
엄마네 집
저 계수나무의 발목도 자기 풀집 바라보는 새들의 무릎도 푹푹 눈에 빠지는 오후
꽃무늬 장화 사들고 엄마네 집으로 간다 엄마 사는 월계골에 간다
방금 손자 졸업식에 다녀간 하얀 장화 노인정 여럿 신발에 섞여 잠깐 놀고 있구나 다행히 엄마는 놀고 있었구나
여전히 연탄재 내리는 좁디좁은 골목 한때는 아버지도 살아 우리 다 짝지어 보냈던 엄마네 집 허름한 집에 눈만 많이 와 있었구나 눈이 먼저 와 있었구나
오늘도 담을 넘는 눈처럼 아버지 저 설산 넘어 엄마네 집으로 어서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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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오십
겨우 저녁밥을 짓고 햇살 마를까 마당 가득 빨래를 널었던 한 달여 동안 덩달아 장맛비도 내렸다 누구는 살을 뺀다고 법석을 떨고 나는 꿈속에서조차 깨어나 떨어져 나가 남루해진 내 살점을 그리워하며 밤을 이겨내지 못했다 비를 맞으면 더 많이 슬플 것만 같아 연잎 같은 우산을 펼쳐들고 여자에게 좋다는 붉은 자두나무 곁을 자꾸만 서성거렸다 그때, 칠월 같은 부황자국을 등허리에 업고서 아무렇지도 않게 목욕탕을 활보하던 그 여자들이 생각나 슬픈 유행가를 꺼이꺼이 숨죽여 불렀다 이쯤이면 詩 한 편도 읽을 수 없었던 나른한 내 몸뚱이를 누군가 끌고 가서는 툭하고 떨어지는 어린 감처럼 내동댕이쳤어도 좋았을 것을 내 나이 오십 그래서 더 잠들 수 없었던 내 나이 오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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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 법정스님을 보내고
그 오두막은 그리 멀지도 깊지도 낯설지도 않은 좀 더 편안하고자 했던 내 노년의 욕심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오두막에 기침소리 그치던 날은 후드득 봄비 몰래 다녀가고 매화마저 하얗게 몸살 앓던 아주 고요하고 편안한 밤이었습니다 당신에게 달빛은 밤이요 벌레 우는 가을이었지만 당신의 뒷모습 아득해지고서야 당신을 진정 더 알게 되었음을 고백 합니다 비워내는 일도 너무 과하면 병이 된다는 사실을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건가요 사루비아처럼 당신의 몸에 불을 사르기까지 나는 내 오두막에서 마당 멀리 코스모스도 방목하며 기르던 개와 함께 아주 행복하기를 꿈꾸며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내 소박한 꿈마저 이 봄에 수줍고 부끄러워 함부로라도 필 수 없는 꽃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젯밤 내 후회들이 그렁그렁 바람에 매달려 이불을 흔들고 있습니다 누군가 일구어놓은 문명 덕에 편히 사는 나는 당신의 무소유를 안고 뒹굴며 한동안 괴로워할 것입니다 무소유의 한계는 도대체 어디까지 입니까 당신의 무소유를 원하는 사람들의 수도 한없이 늘어만 갑니다 당신을 대신해 산수유를 보고 당신을 대신해 동백을 보고 한순간 참 설레이겠지요 사는 동안 당신이 남기고 간 그 숙제를 다 풀 수 있을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아름다운 봄마저도 당신을 버리고 갔으니 아니 당신이 이 봄마저 버리고 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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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둥산
험하고 독한 능선이었지
초로의 행색으로 허기졌지만 단단한 무언가에 여물기도 하면서 고단한 노동으로 마른 숨을 쉬고 있었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처럼 부정할 수 없는 어디쯤에서 마른 이승 버릴 구실로 슬퍼도 했을 테지
능선처럼 질기고 단단한 고비마다 풀풀 나는 먼지에도 꼭 가야만 하는 민둥산
억새로 누운 여인에게로 가는 길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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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인
크림트의 포옹과 까막바위 전설로 차려진 찻집 하나 있었네
멀리 배 한 척 띄워놓고 우리는 나그네처럼 차를 마셨네
시인은 말했네 풀은, 뽑고 또 뽑아도 뽑혀 아쉬운 것들은 비위틈을 찾아 다시 살고자 한다고 당신보다 젊은 우리더러 그러니 나이 백세를 위해 풀처럼 살자 하였네
시인은 서산의 빈 집으로 또 소풍 간다 하였네 돌아와 지천인 마가렛에 들 거라 어여쁘게도 말했네
그 시인이 참 좋았네 푸른 스카프를 한 그 시인은 바다 같았네 자그만 몸짓에도 넘치지 않은 그 시인을 참 닮고 싶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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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대리로 가세요
사랑 떨치지 못해 아직 서성인다면 세상에 내가 처음 되던 그 떨림으로 시월, 용대리로 가세요 사랑도 이별도 아닌 시작이 되는 마음으로 넓은 마당을 이리저리 날리는 백담사 낙엽이 되어도 좋아요 그곳은 침묵마저도 온 몸에 쟁이는 고인돌이 된 시인의 마을 종일 놀아도 지치지 않는 바람벽 같은 곳 온종일 시월처럼 단풍들다가 용대리 그 곳이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님의 얼굴에 눈멀어 돌아오셔도 좋아요 얼른 용대리로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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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도
어제도 그제도 꿈을 꾸었네 꿈은 나더러 아직 이르다 하는지 복사꽃조차 피워주지 않았네 오늘도 나는 로또를 사러 갔네 로또를 산 날 벼랑을 넘어 한없이 쫓기는 꿈을 꾸었네 밤이 다 가도록 그저 쫓기기만 했네 마음도 몸도 돌보지 않았을 나이 내 나이 한창일 때 대상포진을 앓았네 그동안에도 나는 도원을 만나지 못하고 벼슬도 재산도 마다한 꿈 같은 꿈을 꾼 사람만 만났네
무릉도원 그 꿈을 꾸는 사람은 무덤도 몸도 제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세상에 없어야 한다는 것을 내 나이 오십 넘어 알았네 오늘도 나는 그 꿈을 원하지만 그 꿈을 꿀 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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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어느 날
바람만 불었다 비가 내릴 거라 사람들은 말했지만 바람은 부지런히 비를 막아내고 있었다 서둘러 떠난 동무를 그리워 할 때마다 꽃은 용감하게 향을 뿜어내고 어둠은 물안개 얼싸안고 있었다 사람들은 떠도는 낙엽이 되었다가 아까시 냄새에 갇히기도 했다 감당할 수 없던 5월이 떨어질 때까지 사람들은 한없이 자유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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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동두고개 어디쯤이면 좋겠다 오랫동안 기억나지 않는 길을 버리고 낮고 자그만 오두막이면 좋겠다
허름한 짐을 풀면 이름도 모를 새가 날고 바람소리에 흐느끼는 내 생각들이 조곤조곤 꿈을 꾸는 그런 오두막이면 좋겠다
내가 키우던 개도 데려다가 더러는 마당에서 잠을 청하고 쏟아지는 별에 사랑을 키우며 마당 그 건너 멀리까지는 코스모스도 방목해야지
저녁밥에 김을 올리는 아까시 그 먼 냄새도 거두어 아무도 모르게 꽃잎을 따야지
억새가 밤을 울고 있는 동안 곤한 잠을 자는 내 곁으로 사람들은 몰래 지나가고 나는 그렇게 오두막을 손질하며 오래도록 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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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지쳐 돌아오던 길 우리의 유희는 흙빛으로 잠들곤 했지 온통 바람과 씨름하던 꿈은 시누대 억센 사투리로 가득했고 하얗게 놀란 눈마저도 밤새 술주정에 쫓겨난 순이 가족의 걸음에 녹아내렸지 내일을 기다리던 웬수 같은 단짝이며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사는 순이 엄마의 붉은 입술도 좁은 골목마다 부끄럼이 되어 박히곤 했지 백열등이 꺼지고 그 집에 어둠이 켜지는 밤이면 라디오 연속극을 들으며 가끔은 울기도 했을 내 단조로움이 행복이었다는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 그리움은 다시 자라나고 엄마를 기다리던 생각들이 새벽별로 빛나는 모퉁이 누군가의 시간들도 서성거리다 지쳐 돌아가기도 했을 팔순의 하얀 강을 건너고 있을 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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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도심 한가운데 사람들은 여전히 파도를 타고 다닌다 때마침 바다는 그들을 에워싸며 처음 본 나를 따뜻하게 맞는다 내 바다 아니 그 바다는 지겹지도 않은지 여기서도 억센 사투리를 쓰고 다닌다 불빛에 익어가는 남포동 골목 꼼장어가 아니어도 사는 냄새로 북적이는 밤 꿈속에서도 우리는 술을 마시고 내 고향 곰치국으로 해장을 한다 나쁜 남자 대세라는데 부산이면 바다를 뚫고 선 절벽만큼이나 남자는 나쁘겠다 나쁜 남자 하나 만나 올해는 연애 한 번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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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아
5월이 그리도 싫었던가 때도 아니게 이승을 떠난 사람아 내가 알던 사람아 굽이굽이 대관령이듯 소문이었으면 좋겠구나 죽어서 다시 사는 들풀 같은 그대의 억센 몸짓 같은 추억이 된 사람아 한 번은 그곳에서 또 한 번은 내 고향 오십천에서 소쩍새 울음으로 그리움 하나씩 낳았으면 좋겠구나 그대 웃음만 기억하며 다시 불러보는 사람 사람아 지금은 아까시 향으로 산천이 행복해 할 때 이제 그대도 5월 만큼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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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아래 서거든
파출소 뒷골목 참 크고 오랜 은행나무 산다네 오가는 사람들 종일 지켜보며 노래도 부르다가 헐한 뱃속 순대로 채운다네 가끔은 지네 같은 술꾼의 역정도 들어주고 고단했던 리어카와 시간에 치였을 오토바이 행색을 보살피며 밤을 부려놓는다네 오늘따라 나는 노랗게 떨어지는 은행잎의 남루와 많이도 닮았네
사람들아 11월처럼 서 있는 은행나무 아래 서거든 잠시 청춘처럼 흔들리다 귀향하는 눈물이 되어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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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거기는 수도 없는 발자국 모아 만든 길 그 녀석이 저 끝에서 몰래 훔쳐보다 다녀가던 길 던진 돌에 배를 불린 순이네 장독 만큼이나 철철 꽃이 넘쳐나던 그래서인가 그 언니 배도 불러 어느 날인가 아이도 낳고
길이랑 나란했던 지붕 위로 소복했던 감알들 경자 아버지 욕설로 채워져 가던 담벼락
그래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낯이 붉어지는 나이 그 언니는 그 녀석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경자 아버지 욕설은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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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진산에서
풀이 깨어나던 길 고라니의 뒤태를 보았다 이슬을 달고 뛰던 몸에서 초록물이 떨어졌다 까맣게 윤이 나던 똥에서 푸른 숲 냄새가 났다 오늘 같은 안개 날이면 다시 만날 수 있는 걸까 고라니 사는 여기는 수묵화 첩첩한 산도 자라나고 내 그리움도 자라나고 산을 오를수록 아침 그 뒤태에 숨어 덩달아 푸르러가던 내 몸 그 숨소리로 내내 하루를 살 수 있다는 건 슬프지만 행복한 일이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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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서루에서
몇 날이면 시월도 다 가고 말아 죽서루 너른 마당으로 친구여 너를 부른다 회화 그 자잘한 꽃잎들 사이 꽃 진 자리에서 울음 우는 새들을 보아라 마주한 세월만큼 떨어져 누운 느티나무 밀림 같은 단풍도 만져보아라 친구여 너는 오십천에 흐르고 절벽을 아우르는 회화 그 큰 나무를 다시 만날 일이다 빈 의자에 비가 내리고 떨어진 사랑마저 내리면 너럭바위에 한참을 서성여도 좋을 터 더러는 변하지 않는 대나무처럼 그냥 그대로 살다가 차라리 밑둥에서 차오르는 몇 알의 붉은 잎새가 되는 것도 좋으리 친구여 너도 나처럼 내 몸 하나 마당 깊숙이 눕혀 그 후로도 오래 누워 오가는 숱한 사랑 노래 몰래 들어 보아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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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은
유월은 새들의 눈총을 받으며 뽕잎에 매달려 산다 그 덕에 식구들은 오디똥을 싼다
유월은 온통 절정이다 산딸기에 감성이 흐르고 한 겹씩 장미가 비밀을 벗는다
유월은 마늘이며 양파며 그 씨앗들 속으로 흐뭇하게 해가 뜬다
유월은 꽃 진 자리에서 태어나 그 사랑으로 한창 다시 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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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여행
무릉계에서 절실했던 둘의 눈을 봤을 때 나는 꼬물꼬물한 아들 둘을 두었고 둘이 한집에서 살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알아버렸다 그녀는 보따리도 없이 집을 나와 사랑이라는 혁명으로 꿈을 이뤘다 결혼은 이성을 잃어야 한다고 다들 얘기했다 둘만 잘 살면 될 일이라고 그렇게 절실했던 둘의 사랑도 몇 해 추석을 보내고 보름달을 혼자 뜨도록 내버려 두었다
살며 용서 받지 못할 일 살며 용서 하지 못할 일 어디 있으랴
어미는 오늘도 먼 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아들내외를 내 잘못인 양 아파한다 오래도록 그리움만 키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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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루비아
늦은 만남이어서 좋다
불 지르는 황혼을 돌아 마주하니 더 귀하다
그리움이 더 아픔인 것을 너는 아는지 종일 바람 불어도 종일 비가 내려도 그 자리에 선 너의 모습 볼 수 있어 좋다 그 속에 붉게 타들어 한 줌 재가 되어도 좋다
돌아서면 긴 시선으로 붙잡아 두는 너
바라보는 나의 떨림아 나의 사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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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아버지
엄마는 하느님이었다
하느님을 몰랐다 그런데도 엄마는 하느님 같았다 힘이 센 것 같기도 제주가 뛰어난 것 같기도 못하는 것 없이 다 잘하는 하느님인 줄 알았다 엄마는 연탄이 반인 비좁은 부엌에서 밥을 하고 반찬을 하고 추워 곱아진 손으로 옷을 뜨고 나뭇단을 무겁게 이고 산을 내려오고 그렇게 우리 몸을 불리며 하느님 행세를 했다 추웠던 바람벽도 엄마 곁이면 아무렇지 않았다 엄마는 하느님 같았다 파놓은 모래 속에서 찜질을 하던 여름 같았다 엄마는 하느님이었을까 아니, 정말 하느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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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장지에서 돌아와 제부는 아버지 모자를 쓰고 아버지 시계를 차고 아버지 흉내를 내며 다녔다 아버지 냄새를 그대로 지닌 방 안을 들락거릴 동안 봄은 우리가 흘린 눈물로 꽃피기 시작했다 꼬박 하루를 울며 아버지는 마지막 편지를 썼고 우리는 그 마지막을 붙잡고 통곡했다 아버지는 싸늘한 얼굴을 만지게 하고 끝내 하얀 생쌀로 끼니를 때우며 서둘러 우리 곁을 떠났다 먼저 간 아버지 식구들이 깔아놓은 햇살 밝은 날
사느라 수고 했다며 찰진 황토방도 한 칸 내 놓으신 할머니 곁에 엄마자리도 꼭 비워두라는 칠십일곱의 건장했던 내 아버지 친구 같았던 내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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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화는 지고 있는데
할머니 몇이 수증기로 자욱한 이천 원짜리 목욕탕에 간다 늙은 동무들은 때수건에 비누를 넣은 허름한 가방을 메고 목욕탕으로 소풍 간다 한여름 엄두도 못 내고 돌아선 그 바다 대신 조가비 같은 해수탕에서 밥풀처럼 동동 떠다니며 논다 주름 깊이 짭조름한 바다 맛이 출렁이는 그곳에서 한때 산다고 살았던 젊은 수영복도 벗은 채 맨 몸으로 당당히 논다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늘어진 배를 욱신거리는 뼈마디를 퉁퉁 불리며 논다 지금쯤 지고 있을 해당화도 잊은 채 아까시 하얀 꽃도 잊은 채 늙은 동무들은 이팝꽃처럼 흐드러지게 논다 모진 세월 다 벗겨내지 못하고 이천 원짜리 목욕탕만 덩그러니 남는 오후 해당화는 지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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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당신 4월의 맨발
흙을 뒹구는 마음 밭 하나
창조가 어디 별거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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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다
단칸방에서 비좁게 나던 겨울 한 뼘 마루에 내리치던 그 눈발이 그립다 걸레도 얼고 마루도 얼고 늘 얼어 있던 아침 그때 삼십 줄을 살던 엄마가 그립다 달빛 거랑에 치맛단을 띄우던 내 어릴 적 그 여름이 그립다 대숲 무성한 화장실 문밖 별도 달도 없이 떨며 기다려주던 어린 동생들이 그립다 철길을 달리던 용기와 그 꿈들이 그립다 그 여러 날이 그립다 내 사춘기가 그립다
그 모든 것 함께했던 내 오랜 친구 아버지는 더 많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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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에서
파도 수십 번 오갈 동안 민박집 구들장에 누은 오랜 벗들과 달빛
아껴둔 그간의 말言들이 새벽으로 달렸다
어제는 꿈의 궁전에서 참 오래된 저녁밥을 먹었고
연잎에 든 아침 주름진 얼굴에 화장을 하고 모처럼 우리는 바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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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폴
어릴 적 아들녀석을 폴이라 불렀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우리는 그저 그렇게 부르며 놀았다 폴은 이제 대학생이 되었고 어느 날 불쑥 찾아온 개에게 자기 이름을 물려주었다 멀미를 달고 부산으로 간 아들은 대학생활이 재미있다고 말했다 이제 폴은 늙은 개가 되었고 내 갱년기 살점을 핥으며 산다 겁 많던 내 여름밤 열어둔 문을 지키며 산다 검버섯 한창인 폴을 그렇게 내게 내어주고 남편은 안방에서 홀로 잠을 잔다 한때는 나도 젊은 폴을 따라 바람난 듯 이리저리 헤매고 다닌 적 있었지 달 뜬 오십천을 걸으며 소쩍이 울음도 같이 듣곤 했었지
코를 골며 자는 남편 같은 폴아 내 사랑 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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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타산
그냥 올라봐야지 막 시작한 갱년기 어질한 몸 앞세우고 갈 때까지만 가봐야지 몇 번을 쉬었는지 알 수 없지만 천천히 올라봐야지 막 산성이 보이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욕심이 생기고 댓재 쉰움산 찍고 벌써 내려오는 사람들 나와 그들의 숨이 서로 만나는 두타산
많이도 만났다 풀 꽃 나무 눈물 대신 땀이 흐르고 빗물 대신 구름이 흐르는 하늘 더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내 히말라야 살아 몇 번을 더 오를 수 있을까 내 히말라야 같은 두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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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기리 밤
소쩍새 울음 키워내는 까만 밤 장작 불빛에 피어난 개망초의 풍요와 달빛 대신한 달맞이꽃에 앉아 아무렇게나 차려진 늦은 저녁밥을 먹는다
적당한 습기와 안개보다 굵은 비 가까이 내려앉은 하늘로도 충분히 염세적인 밤
하루를 사느라 애썼던 날벌레도 습기 찬 몸으로 모여들고 서로의 삶 얘기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얼굴로 시를 읽고 풀냄새 묻힌 몇은 떠나가고 남은 몇은 어두운 내내 누에고치 같은 삶 뽑아낸다
무쇠솥에 둘러앉은 활기리 밤
사랑할 날들 손꼽아 세며 피지 않은 별 쏟아지니 좋다 부슬부슬 비가 내려주니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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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 ― 한 해 산 부부
오십 해 수절한 주름진 여자 몸이 품으로 쓰러진다
“어떻게 헤어져”
자꾸만 비가 울며 내렸다
“통일 되면 만나자우”
자꾸만 울며 비가 내렸다
여자를 버스 안 깊이 밀어 넣을 때 자꾸만 비는 강물이 되었다
차창에 매달린 눈물은 분단이고 이별 여자는 아직 열아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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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그저 마른 잎 굴러가는 소리나 듣자며 빗질하는 할머니 꼬드긴다
먼저 들어와 일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저나 나나 똑같다고 자리 비운 늙은 동무 나무라는 모양새가 아직도 젊은 여우만 같다
덩달아 갖은 아양 떨다 이리저리 마른 잎 굴러가는 소리에 나도 섞이는데
슬며시 할머니 곁에 와 앉는 햇볕 한 줌 제법 예뻤을 할머니 젊은 날 대신 그리워해 보며 미래의 당신 같은 나를 떠올려 보는 것이다
녹을 먹는데 눈치 보인다며 얼른 자리 뜨는 할머니 등 뒤로 은행나무회화나무참죽나무가 그때처럼 곱다
막 가을 시작한 죽서루 마당 늦은 낮잠 즐기려는 할머니 비좁은 자리에 노을이 오려는지 미리부터 단풍 하나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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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에서 ― 석류차를 마시며
잇속이 붉다
그 빛은 발갛게 익어 처음을 부끄러워하는 소녀의 신비를 닮았구나
그 꽃 다시 찻 속에서 일렁일 동안
저 멀리 빈 몸으로 선 나무 나의 세월아
나도 누군가에게 붉게 다가가는 한 잔의 차이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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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경역
할머니는 가끔 산허리 지나 어두운 굴 속 말없이 나오던 손녀의 용감한 행색을 즐기곤 했지 홍시처럼 노을이 지던 마을 허기진 내 어린 뱃속처럼 낮게 엎드린 지붕 그래 매번 기차를 놓치곤 했지 상정 지나 미로 다시 돌아온 기적소리 도경은 내 완행 같았던 마을 이제는 하얗게 분칠한 도경역에서 다시 누군가를 기다릴 것만 같은 정씨네 문패들 잠시 쉬고 있는 내 과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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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
입 하나 덜자고 자주 큰 집에 보내지면 그때마다 촌티나는 아이가 되었는데
이 꽃 저 꽃 참 많은 잎사귀들 창호지 문살에서 오래도록 살고 내가 재 넘어 큰집으로 가던 길 거기에 부엉이도 살고
밤이면 부엉이 소리 내어 울고 하얀 밤 나도 따라 울고
이제는 나도 촌티나는 어른으로 살지
오늘처럼 잠 안 오는 날 그 부엉이 어서 내게로 오면 좋겠다 그때처럼 많이 울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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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회
지금도 그때처럼 어리고 왁자한 소리구나 막 피어난 꽃들처럼 시작은 늘 어렸지
우리의 소리는 강을 거슬러 오르는 은어떼
문 열고 들어오는 헝클어진 모습 방금 일손 놓은 너에게서 아버지 냄새가 난다 엄마 냄새가 난다
이제 제법 커버린 우리를 위해 잔을 들자
한 잔은 돌아오지 않을 어린 꿈들을 위해 또 한 잔은 그리움이었을 우리들을 위해 마지막 잔은 잉걸불처럼 우리 남아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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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골목에는
자목련 잎사귀 떨어지는 날 할머니는 자기 집으로 떨어지는 잎들이 싫다며 떼를 쓰곤 했다 그러는 동안 나도 설잠을 자야만 했다
그 자목련 매년 우리 담을 넘지 못하고 싫다는 할머니만 애를 먹였다 나이 들면 나도 자목련 잎이 그리 싫어질까
쌓여 곰삭은 나이 든 잎이 좋은데 나이 든 그 잎 냄새가 좋은데
내가 사는 골목에는 계수나무 잎 가득한 가을이 있고 손주 몇씩을 둔 어른들이 오십 넘은 나를 새댁이라 부르며 산다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은 풀 위로 또 가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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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안개처럼 서성이다 돌아선 한 잎의 사랑이 이렇듯 가슴 떨릴 줄 몰랐다
오늘도 강은 흐르고 수없이 실려 보낸 나의 고뇌도 누군가의 그리움이 된다
늘 그렇듯이 화장을 하고 저만치 아픈 가슴에 누워보다가
짧은 행복도 긴 삶이 될 수 있겠다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가끔은 너처럼 빛을 잃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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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오후는 뜨거운 도로를 걸어 그렇게 집을 비웠고 팥빙수 두 그릇이나 비워내던 그의 손은 가랑잎처럼 가벼웠다 그는 늙어 오랜만에 혼자였다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아내는 사는 집에서 없는 듯 밥을 팔며 산다 그들은 같은 집에서 늘 혼자처럼 살며 나이 먹었다 그의 초라한 걸음 뒤로 한때는 잘 나갔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가랑잎으로 떨렸던 그의 손처럼 그해 여름은 땀에 절은 몇을 저승으로 보내기도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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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세상은 하얗게 들떠 가슴마다 꽃물 들게 했다 너나없이 바람이 났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입을 다물고 그들처럼 침묵하다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때
오랜만에 가슴 풀고 꽃비를 맞으면 종일 몸에서 비밀처럼 소름이 돋는다
나는 긴 겨울 나목이었고 그대의 사색이고 싶었는데
꿈에도 꽃비는 내리고 꼬들꼬들 집들 말라가고 사월은 끝내 나를 불러내 아쉬운 사랑을 한다
나는 긴 겨울 나목이었고 그대의 사색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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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문·해설|박문구 소설가 상실과 그리움, 그리고 탈출의 허상
1. 시를 읽는 행위. 시 속으로 차분히 들어가는 걸음에는 항상 ‘막막한 두려움’이 나를 가로막곤 했다. 시를 수십 년 써 온 시인도 아니고, 평소 마음의 날개 틈에 듬성듬성 박혀 있는 병든 수탉의 깃털처럼 어설프게 문학을 대해 온 내가 이런 ‘술술 읽을 수 있는 시’에 대해 해설을 한다는 사실이 그렇다. 나는 시인이 아니다. 가끔 시 언저리를 맴돌며 숨 쉬기를 반복하는 생활이었고 주위 시인들의 술자리에 몇 번 참석해서 그들의 언어를 귀동냥으로 들어본 적은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해설에 해당하는 글을 쓰게 되면 바로 그 어떤 의미가 나를 가로막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나에게만 적용되는 현상은 아닐 것이다. 대체로 소설의 걸음에는 매우 다양한 풍광이 펼쳐져 비교적 글읽기의 훈련이 덜 된 사람들도 시간 메우기로 이럭저럭 그 풍광을 감상하기에 큰 어려움은 없지만 이 거대한 한 음절의 단어 ‘시’에 이르러서는 문제가 달라진다. 단 몇 행의 시에서 거대한 장편소설의 핵심을 건져 올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시 읽기’는 많은 훈련과 삶의 여분을 음미하는 진지함이 도사리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흔히 읊는 많은 시가 다 오랜 훈련과 삶의 의미를 담보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미 기초적 의미로의 접근은 청소년 시절 학교에서 흐릿한 윤곽의 내음을 음미한 적이 있었으므로. 또 자연과 삶의 접근을 비교적 넓고 깊게 바라보았던 시간을 각자의 내면에서 키우고 있으므로. 시에 대한 인식이 나도 그렇게 깊은 바가 없으나 달 전에 우연히 바닷가 찻집에서 쓴 커피 한잔 같이 마시다가 이 자리에 차출된 것일 뿐이니 애초에 심도 있는 그림은 이 자리에서는 사양할 수밖에 없다. 난 ‘시’라는 언어덩어리에 대한 충실한 읽는 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어차피 차출된 것이니 충실한 ‘읽는 자’의 입장에서 감상과 시인과의 인연, 우리들이 함께 숨 쉬는 그 공간에 대해서 풀어갈밖에.
2. 시인 서순우. 이 시인과 나와는 인연이 깊다면 깊다. 같이 술자리를 몇 번 한 적도 있고 실없이 차를 홀짝거린 경험도 좀 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십 몇 년이 지났다. 그를 처음 본 적이 십 년도 훌쩍 뛰어넘으니 그간 강산도 변하고 나도 변하고 서순우 시인도 변했든가. 아니다. 시내에 거주하는 인구가 채 오만도 안 되는 소도시는 아직 그대로 엎드려 있고 그가 항시 강바람을 타고 거닐던 오십천 향기도 그대로. 한여름 밤이면 천변의 어둠을 헤집고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도 변하지 않았다. 단 하나만 빼고는. 그는 변했다. 그에게 죄송하지만 나는 첫 대면의 그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냥 어쩌고저쩌고하는 잡담과 아마 취한 김에 내뱉는 고리 삭은 언어의 찌꺼기가 난무하는 그런 자리였을 것이다. 나는 그를 기억하고 담아 낼 어떤 소쿠리도 없이 그를 보았을 것이다. 그런 정도로 그는 내 기억에 자리하지 않았다. 이 대단히 실례되는 말을 이 자리에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달력 표지가 몇 번 바뀐 틈에 그는 시의 바닥에서 아주 천천히 자양분을 섭취하며 마음을 키우고 있다가 어느 날 ‘나는 나요!’하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서순우, 그는 별다른 특징을 찾을 수 없는 사람이다. 항상 걸치고 다니는 입성도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거리를 스치는 평범한 여인네들과 다르지 않다. 이 ‘다르지 않다’는 것도 그를 위한 언어적 장치임을 말해야겠다. 사실 그는 그보다도 평범하다. 숲속의 작은 소나무처럼 그저 산에 있으니 소나무거니, 사람들 숲에 숨 쉬고 있으니 사람이거니, 여인들 사이에서 밥하고 집 정리하고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니 여인이거니 그렇게 이해하면 되겠다. 시 감상을 풀어나가는 자리에서 이렇게 그를 표피적으로 슬쩍 폄하하는―사실 이런 자리에서는 입술에 약간 침을 바르고 말해야 하는 게 아닌가―충분한 이유가 그의 바탕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를 만난 지 십 몇 년이 흐르는 동안 내면에 쌓은 삶의 내공이 만만치 않게 꿈틀거리고 있음을 근래의 시편을 보면서 알았다. 일부 독자들은 지방에서 생활하는 시인들을 은근히 내려다보는 경향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윤전기에서 눌려 흐르는 여러 시편들을 한눈으로 훑고는 주간잡지 표지처럼 구겨버리곤 한다. 좋다. 구겨버리든 흘려버리든 그건 독자의 마음이지만 적어도 오늘, 서순우의 시에 이르러서는 잠시 그런 행위를 멈추는 것이 마땅하리라. 연전에 대학물을 먹고 있는 친구에게 주정 비슷하게 떠든 적이 있었다. 내가 사는 바닷가에 시 잘 쓰는 세 시인이 있다 운운. 그 친구 왈, 아마 세 분이 다 여자겠지…? 웃자고 잠시 하는 말을 울면서 듣지 말기를 바란다. 당시 나는 이미 서순우를 염두에 두고 대화를 풀어나갔던 기억이 새롭다. 그처럼 그는 풀잎 스카프를 날리며 저 건너편에서 슬슬 걷고 있었다. 그 후 이곳의 몇 사람들과의 주석에서도 그의 변신을 안주로 밤늦게까지 통음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는 사회 활동도 활발하다. 무슨 동문회, 문학회, 독서회… 아마 나도 잘 모르는 잡다한 모임이 십여 개가 넘으리라. 이따금 심심해서 전화라도 하면, 그저 일 때문에 바쁘단다. 뭘 그리 바쁘쇼? 몰라요. 가만히 있어도 일이 생기네요. 그렇다고 그가 창작에 게으르다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 지역에서 매월 발간되는 소책자에서 그의 시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또 매년 발간되는 지역 문학지에서도 그는 빠지는 일이 없다. 그러니 다양한 사회활동과 인간관계가 그의 시 창작에 도움이 될지언정 시간의 한 축을 도려내는 일은 없을 터. 그는 대담하다. 평범한 외모에서 툭 튀어나오는 간단한 몇 마디 언어는 우리들을 머쓱하게 한다. 그와의 흔치 않은 주석에서 사회 현실에 대한 거친 공격적 언어나 인간 병리현상에 구겨진 지저분한 욕설을 주변에서 만류하면 그는 간단히 뱉는다. 뭐 어때요? 그럴수도 있죠. 그의 시 창작은 분명 그러한 잡다한 인영들과의 사건 속에서 섞고 볶고 비비고 다듬은 후 자신의 결코 평범하지 않은 독특한 체를 사용해 걸러낸 언어일 것이 분명하다. 이 시집에서 독자들은 체에서 걸러 나오는 희디 흰 쌀가루를 직접 만져볼 수 있을 것이니까. 그리고 그는 효녀다. 뭐 이런 단어는 개인의 속살이라 굳이 끄집어내지는 않겠다. 단지 그가 나에게 툭 던진 한 마디의 말. 엄마는 나예요.
시인은 전쟁 중이다. 서순우의 시를 읽다보면 그의 시들의 많은 부분이 그 스스로의 모습에 받쳐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떠한 시에서도 ‘나’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응축될 수 있는 단일한 자화상을 그릴 수 없다. 시인 스스로 시공간을 답사하며 섭취한 다양한 자양분의 결과이리라. 여기 첫 시집에서 그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 자체가 얼마나 치열한 전쟁이며 얼마나 끈질긴 인내와 부지런함의 결과인지를 우리는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는 현실에서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며 그의 손아귀가 뻗어내는 일상에서의 탈출을 그린 자아와의 전쟁의 기록이다. 앞으로 어떤 치열한 삶의 그림이 다시 펼쳐질지.
3. 저녁을 먹은 후 한가한 산책길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건강에도 좋고 하루의 피로를 발걸음에 감아버리는 맛도 좋다. 그 역시 저녁 시간이면 오십천 방둑을 걸으며 하루의 흔적을 채색하는 괴로움에 빠진다. 왜 즐거운 맛을 날려버리고 굳이 괴로움 속으로 자신을 집어넣을까. 여기 해답이 있다.
강바람이 되는 길
어둠 속에서 사내는 도심의 귀퉁이를 잡고 새벽인 양 흔들린다
저 멀리 물안개 오르는 소리 내 몸도 이제 강바람에 철저히 섞여야 하는 시간
나지막한 오십천 갈증이 올려다보는 철교 철교를 건너는 사람들의 발에서 쇳소리가 난다.
소쩍새 숨어든 지금 수은등 창백하고 오십천은 一月처럼 떨며 흐르는데 나는 건지골 어디쯤에서 이렇게 헤매는가
― 「건지골 지나며」 전문
삶의 복잡성에 따른 사유의 상품화가 이 시대의 일반적 대세로 매김되는 현실에서, 저녁 산책의 여유를 보듬고 있는 그의 귀는 오십천의 풍족하고 여유 있는 물길 위에 강바람만 아니라 ‘쇳소리’의 세밀한 소리까지 걸러낸다. 오십천 철교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길에서 비롯된 상품화된 삶의 비애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 ‘쇳소리’로, 하루 일과를 마감하는 시간과 작업의 무게를 이렇게 치환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하루가 거칠고 차가운 강철 이미지로 치환되기에 생성과 풍족의 오십천은 이다지도 흔들리는지 시인은 짐짓 모른 척하며 벗어난 길을 헤매는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하루를 마감하는 천생만민들의 발걸음에서 여유와 즐거움 대신 강철의 쇳소리를 흘리고나 있지는 않은지. 그러나 그의 오감은 그렇게 쉬 식지 않는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는 효녀다. 절명의 순간 선인들의 단지의 효행을 본받는 행위를 기대하지는 않지만, 이 얼마나 다정다감한 시인의 발걸음인가. 어머니를 찾아가는 그의 발걸음은 쇳소리가 아닌, 진정 평범한 딸자식의 다사로움을 볼 수 있으니,
꽃무늬 장화 사들고 엄마네 집으로 간다 엄마 사는 월계골에 간다
방금 손자 졸업식에 다녀간 하얀 장화 노인정 여럿 신발에 섞여 잠깐 놀고 있구나 다행히 엄마는 놀고 있구나
여전히 연탄재 내리는 좁디좁은 골목 한때는 아버지도 살아 우리 다 짝지어 보냈던 엄마네 집 허름한 집에 눈만 많이 와 있었구나 눈이 먼저 와 있었구나
― 「엄마네 집」 부분
아마 낮에 시인의 아들 졸업식에 엄마와 같이 참석했을 때 엄마의 겨울장화가 눈발에 차갑고 낡아 보였던 모양이다. 엄마는 삶의 원형질로만 채워진 생명체다. 그 원형질에서 갈라져 나온 그는 이러한 장화를 견딜 수 없었다. 다분히 설빔을 연상하는 꽃무늬 장화를 사들고 엄마네 집, 즉 동네 노인정으로 가는 그의 머릿속은 어떤 상념으로 가득 차 있을까. 평소 엄마의 새 장화를 미처 챙기지 못한 자책의 한도 있을 것이고, 졸업식 전날에 내린 눈이 쌓였음을 미리 알아채지 못한 죄스러움도 꿈틀대고 있을 것이다. 가는 곳이 또한 노인정이라 비슷한 또래 노인들 속에 엄마의 초라한 신발을 생각하면 다 큰 딸은 견디기 어려운 속쓰림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서 산 것이 꽃장화. 어릴 때 설빔으로 엄마에게 선물 받은 꽃장화를 반포의 행위처럼 무의식적으로 사서 엄마의 투박하고 쭈그러진 발에 신겨드릴 요량이다. 이때 시인의 한 마디. ‘다행히’라는 부사어는 단연 빛을 발한다. 물론 다분히 수사적 언어로 읽힐 수도 있지만 이 부사어는 시 전편을 통해서 가장 빛나는 언어의 마술을 펼친다. 이 ‘다행히’ 한 마디로 시인의 근심과 걱정은 봄눈 녹듯이 사라지고 마을 노인들과 따뜻한 노인정 방에서 손자 졸업식의 또렷한 눈초리를 맘껏 자랑하며 즐거움을 나누는 엄마를 확인하는 중년의 딸! 언어의 묘미는 시인의 번득이는 혜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서순우에게 부모는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까. 그의 정신과 육체를 채우고 있는 힘의 원형이 부모임에 틀림없지만 그는 현실의 서순우와 미래의 부모 사이를 넘나드는 특별한 재주를 가슴에 품고 있음은 놀랄 일이 아니다. 다음의 몇 부분을 살피면,
하느님을 몰랐다. 그런데도 엄마는 하느님 같았다. 힘이 센 것 같기도 재주가 뛰어난 것 같기도 못하는 것 없이 다 잘하는 하느님인 줄 알았다. 엄마는 연탄이 반인 비좁은 부엌에서 밥을 하고 반찬을 하고 추워 곱아진 손으로 옷을 뜨고 나뭇단을 무겁게 이고 산을 내려오고 그렇게 우리 몸을 불리며 하느님 행세를 했다 추웠던 바람벽도 엄마 곁이면 아무렇지 않았다 엄마는 하느님 같았다 파놓은 모래 속에서 찜질을 하던 여름 같았다 엄마는 하느님이었을까 아니, 정말 하느님이었다
― 「엄마는 하느님이었다」 전문
시인에게 엄마의 의미를 극명하게 표현한 어휘가 ‘하느님’이다. 다분히 종교적 색채가 가미된 이 어휘는 인간을 가르치고 먹이고 덕을 베푸는 단 하나의 존재로서의 하느님이며 그것은 바로 엄마 몫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엄마의 가족에 대한 베풂은 아무런 보답이 없는 그대로의 베풂일 뿐이다. 풍경을 그린다. 연탄이 가득 쌓여 있는 좁은 부엌에서 가족의 양식을 다듬고, 아이들의 옷도 깁는다. 시간 나면 뒷산에 가서 건넌방 아궁이를 먹일 나무도 하고 날이 추우면 아이들의 바람벽도 되는 그야말로 전능한 엄마의 표상, 그 아래에서 성장한 그의 의식에서 ‘엄마는 바로 나’를 불쑥 뱉을 수 있는 시인, 그의 유년기에 잠겨 있는 부모의 잔재는 너무 뚜렷해서 슬프다. 다음 여러 시편에서 변형된 상상의 언어를 살펴보자.
쑥내가 가시지 않은 방 안에서 엄마는 아버지의 엄마처럼 하루를 산다 엄마는 여전히 장을 담그고 아버지는 누워 있는데 엄마는 더덕을 까고 새끼들에게 먹일 생각을 한다 최고의 절정으로 나를 만든 내 엄마 내 아버지의 젊디젊었던 날들 늙어간다 자꾸만 늙어간다
산다는 건 뭐 큰일도 아니었던 것을 산다는 건 자잘한 걸음걸음이었던 것을 아버지 누워 있으니 알겠다
― 「산다는 건」 부분
올봄엔 유난히 쑥물이 짙어 딸년 갱년기가 남루해졌으면 좋겠다며 엄마는 또 봄 길을 나선다. 쑥버무리가 솥에서 김을 내는 동안 마당가 엄마가 심어놓은 작약에도 살짝 쑥빛이 돈다
엄마는 꽃보다 아름다운 봄이라는 이름으로 저물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 「엄마의 봄」 부분
그는 세월의 흐름을 직시하고 있다. 대책 없이 흘러가는 ‘우리들’이 아니라 1분 1초의 흐름도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포착하는 사냥꾼의 눈초리가 살아 있다. 엄마의 한평생. 할머니가 그랬고 엄마 역시 그렇게 살아가는 이 땅에서, 나 역시 살아간다는 것을 ‘자잘한 걸음걸음’으로 비유한 시인의 감각은 너무 평범해서 일견 그냥 넘길 수도 있지만, 그러나 ‘삶의 걸음걸음’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냐. 숱한 아픔과 풍파가 그 걸음걸음 위를 훑고 지나갔음이니 그 자취의 쌓임이 시인의 발바닥 밑에서 눌어붙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픔과 상처를 통해 아름다움으로 통하는 길을 개척하는 것이 이 시인의 능력이다. 쑥을 뜯고 딸의 갱년기를 걱정하며 온 집안 곳곳을 봄빛으로 치환하는 엄마의 능력은 이제 ‘꽃보다 아름다운 봄’ 이 되어 시인의 마음에 새겨져 있다. 그는 유년기에 찍힌 엄마의 그림을 자신의 시선으로 변형시키며 그 엄마의 영상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조망한다. 결국 엄마를 통해 시인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 줄로 꿰어 봄빛 아래서 이리저리 뒤적이는 삶의 조련사로 숨 쉬고 있는 그의 모습은 그리움과 상실의 텃밭에서 그의 시선을 덧붙여 새로운 미래를 변형시키고 있는 것이다. 자, 이젠 시선을 바꾸자. 그는 삶의 순환을 바라보며 앞뒷집 인영들의 일상을 유니크하게 다듬어 가는 여유를 선사한다.
할머니 몇이 수증기로 자욱한 이천 원짜리 목욕탕에 간다 늙은 동무들은 때수건에 비누를 넣은 허름한 가방을 메고 목욕탕으로 소풍 간다 한여름 엄두도 못 내고 돌아선 그 바다 대신 조가비 같은 해수탕에서 밥풀처럼 동동 떠다니며 논다 주름 깊이 짭조름한 바다 맛이 출렁이는 그 곳에서 한때 산다고 살았던 젊은 수영복도 벗은 채 맨몸으로 당당히 논다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늘어진 배를 욱신거리는 뼈마디를 퉁퉁 불리며 논다 지금쯤 지고 있을 해당화도 잊은 채 늙은 동무들은 이팝꽃처럼 흐드러지게 논다 모진 세월 다 벗겨내지 못하고 이천 원짜리 목욕탕만 덩그러니 남는 오후 해당화는 지고 있는데
― 「해당화는 지고 있는데」 전문
여자목욕탕 풍경이 펼쳐진다. 여인들의 목욕장면은 항시 흥미진진한 연상을 자아내는 면이 강하지만 여기서는 삶의 편린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모습이다. 프랑스 화가 르노와르의 ‘블론드의 욕녀’에 나오는 젊은 여인의 저 풍만하고 농염함을, 혹은 모딜리아니의 ‘누워 있는 나부’의 꿋꿋한 관능미를 상상한다면 이 시에서 눈을 떼시라. 여기는 여인들의 한을 ‘늘어진 배’에 메달고 유유하게 조가비처럼 좁은 해수욕탕에서 오후를 보내는 이웃집 할머니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욕탕의 여인들을 그린 시는 매우 희귀하다. 이 작품은 ‘그냥 드러냄’의 관습적 표현이 아니라 삶의 아픈 흔적을 은유로 비틀어 표현했다는 점에서 감상하는 즐거움을 준다. 한때는 산다고 살았던 젊음도 세월의 뒷길에서 머뭇대는 저 인영들의 모습은 매우 순박하고 평화스럽게 그려지는데 이는 시인의 미래를 폭넓게 바라보며 삶을 긍정적으로 관조하는 자세와 관련이 있다. 서순우. 그는 유년기의 아름다운 기억을 자신의 삶에 비비고 볶아서 밝고 건전한 미래로 부지런히 옮겨가는 와중이거니와 앞으로도 어두운 현실을 탈피해서 어느 방향으로 흐를지 기대된다. 그의 독특한 시선으로 여인들의 일상을 세밀히 스케치하는 다른 작품을 보자.
질펀한 시장 바닥에 앉아 몇 안 되는 손님 발끝을 보내며 이제 막 육십을 돌아 못이 되어 박힌 그 여자 어젯밤 꿈에선 따뜻한 구들에 배를 붙이고 벽을 뚫고 들어온 바람일랑 한바탕 뒹굴어도 좋았다 지나가던 햇님이 들르는 시장 모퉁이 시시한 농담으로 끼니를 채우면 바다를 휘돌아 숨이 찬 생미역의 몸짓과 아직 나를 버리지 못한 잔멸치의 소태 같은 마음이 옛적 엄마 등 같아 어린 날이 너무 그립다 시장통 여자야 남편일랑 어디에다 숨겨두고 못이 되어 박혔느냐 추워지면 바람에 살을 내어주고 더워지면 하루살이처럼 맥을 놓다가 하늘에다 눈물 꿈같이 쏘아 올려 그 눈물 다시 진눈깨비로 가는 길 휘청거리게 하느냐
― 「시장통 그 여자」 전문
서사적 성격이 강한 이 작품은 어느 겨울, 시장터 구석에 좌판을 벌이고 여러 푸성귀를 파는 여인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남편을 여의고 훌쭉해진 뱃구레를 쓸어내리며 오가는 사람들의 발끝이 좌판 앞에서 멈추기만을 기다리는 여인의 삶이 한눈에 펼쳐진다. 단 4연으로 구성된 백석의 ‘여승女僧’이 한 여인의 비극적 삶을 통째로 보여준다면 이 ‘시장통 그 여자’ 역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끝에서 일어나는 먼지에 채이고 밟히는 여인의 한 맺힌 삶이 ‘못’으로 단단히 고정되어 더욱 쓸쓸하게 다가온다. 더구나 그 못은 벽에 붙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재래시장의 차가운 포장도로 한 켠 바닥에 박혀 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부감에 의해 더욱 초라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이 여인도 젊었을 시절, 한때 잘나가던 때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자식은 떠나고 지아비는 사라진 바닥 모를 인생추락의 과정과, 한줌 희망의 상승이미지 〔하늘에다 눈물 꿈같이 쏘아 올려〕와 하강이미지 〔그 눈물 다시 진눈깨비로〕로 은유된 장면은 이 여인의 비극성을 더욱 고조시킨다. 이런 유의 시가 요즘 보기 드문데 시인은 한눈에 포착하는 순간적 예지를 풀어 독자들에게 삶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위에서는 인간의 삶을 주로 그렸다면 다음은 그의 빛나는 시 한편을 감상해 보자. 진실로 말하건대 이 시 한 편으로 서순우는 시인의 반열에 오를 필요충분조건을 갖추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터.
옹색하게도 나는 가까운 곳조차 볼 수 없는 해무가 되기로 했다 오늘도 그러했고 그래서 섬이 된 바위의 꿈만으로도 바다인 줄 알기로 했다 사람들은 한낮 땡볕을 문신처럼 새기길 희망하며 쫓기던 시간의 한쪽 귀퉁이를 어깨에 둘러메고서도 힘들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그들이 풀어놓은 들꽃 같은 자유를 나도 밟으며 내가 죽을 것을 알고 사는 것처럼 그들 또한 그러하리라고 해무가 아니어도 날 저물도록 술잔에 실리는 언어들의 행색으로 주저 없이 사랑을 하게 되리라고
금도 버스 터미널에는 다 벗은 바다 위 별을 찾아 떠나온 사람들로 북적이는데 나는 가까운 곳조차 볼 수 없는 부끄러운 해무가 되기로 했다.
― 「해무」 전문
사람은 항상 영원한 꿈 하나는 갖고 있다. 그것이 비록 이룰 수 없는 꿈이라도. 역설적으로 말하면 이루어지는 꿈은 꿈이 아니다. 잡을 수 없는 무지개가 있으므로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니까. 여기서는 ‘섬이 된 바위’로 등장한다. 해무로 가려진 그의 마지막 종착역인 ‘섬이 된 바위’는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피안의 세계, 그의 피닉스가 살고 있는 곳. 그의 이니스프리가 그곳이다. 아무리 현실의 삶에 부대끼더라도 그가 꿈꾸어 온 영원의 표상으로서 존재한다. 여름이면 벌거벗은 해수욕객으로 북적이는 해변이지만, 그 해수욕객들에게는 일회성이고 한계적 의미의 해변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인의 가슴에는 이니스프리가 살아 숨쉬고 있다. 위에 나오는 문신, 언어, 별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한계적 속성에 물든 순간의 존재로 나타나지만 시인은 겸손하게도 ‘부끄러운’ 해무로 변신해서 그만의 영원을 키우고 있다. 언제 우리들에게 그 섬이 된 바위를 보여줄 것인가. 보여준다면 우리는, 까막눈을 눈으로 착각하며 살아온 우리는 그 섬이 된 바위를 볼 수나 있을 것인가. 감상 잘 했다. 가끔 서술적 이미지의 껄끄러움이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좁은 대상을 향한 관념의 사유화와 개인의 사유에 집착하는 면도 보인다. 사회 병리현상에 대한 외면도 그는 유의해야 할 부분이다. 개인의 사유도 삶의 공간이 피폐해지면 여위게 마련인 것. 어차피 사람은 사회적 동물로 살아가는 것이니까. 그러나 첫 시집을 독자들에게 시집보내는 그 언어들의 숨소리가 살아 꿈틀거리고 있음을 확인하는 작업은 흔쾌하다. 이로써 서순우는 반쯤 발가벗기고 찢어졌지만 그의 손은 다시 무명을 비단으로 바꾸는 날카로운 변신의 칼을 다시 준비하리라. 그 칼로 다가올 미래와의 치열한 전투를 경험하게 되리라. 그는 진정 이곳 ‘나릿가’ 변방의 무사로 살아남을 준비가 됐다. 살아남아라, 변방의 무사여. 바삐 뛰지 마라. 백 년을 기대하며 천천히 걸어라.
천천히 가리라 나도 어느 노시인처럼 푸른 기차를 타고 그 마을까지 가는데 백 년이 걸리길 원한다
마당 가득 금잔화만 피었다 지면 어떠랴 잠시 꾸미지 않은 얼굴이면 또 어떠랴 하루를 바쁘게 살았던 죄 그러다가 조금 더 욕심을 부렸던 죄 그 죄로 인해 가끔 병원을 오간들 어떠랴
다시 천천히 가리라 나도 그 노시인처럼 삼십여 편으로도 충분히 시집 하나 만들어 세상에 내보낼 수 있기를 원한다
삶은 무겁다가도 가볍게 늘 허무 뒤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지만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살아보니 알겠다
그리하여 그저 천천히 가는 것도 꽤 괜찮을 법도 하리라
― 「천천히 가리라」 전문 |
첫댓글 서순우 시인님,첫시집 출간을 축하합니다.
시인의 길에서 첫 흔적 첫시집 2~3년 후에는 제2시집을 ^^
서순우 회장님, 시집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시인님의 싯귀 중 부엉이의 한귀절을 기억합니다.
중략 내가 재 넘어 큰집으로 가던 길 / 거기에 부엉이도 살고 / 밤이면 / 부엉이 소리 내어 울고 / 하얀 밤 / 나도 따라 울고
이제는 나도 / 촌티나는 어른으로 살지 중략
읽고 또 읽어 보았습니다. 마음에 와 닿은 싯귀에 매료되었습니다. 거듭 축하합니다. ~~~
축하드립니다.....서 시인님...
감추어 두었던 싯귀들이 가슴팎을 끄집어 냅니다...
아련한 향수에 젖어듬은 시어들이 좋다는 것.....고생 많으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