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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다케다신겐, 그리고 도모유키
2005년 올해, 봄을 지나 여름 끝까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달군 뜨거운 현상, 혹은 화두 하나는 ‘이순신’이었다. 물론 이 신드롬은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방영으로 시작되었지만 올해 들어 더욱 방자해진 일본 총리를 비롯한 일본 보수정객들의 잇단 망언으로 우리 국민들의 감정아 치솟아 더욱 충무공 이순신의 불패의 신화에 열광하게 된 것이 아닐까? 부활 조짐을 보아는 일본의 신군국주의에 대하여 대통령은 수위 높은 대일본 발언을 하였고, 경북경찰청장은 독도수비대를 격려 방문하였다. 유례없던 일로 일반인들의 독도 방문을 막았던 몇 해 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교과서 왜곡, 식민지개발론, 자발적 위안부론 등 일본의 잇단 극우적 망언에 많은 국민들이 분노하다가 주말이 되면 23전 23승 무적의 이순신 함대에 열광하게 되었다. 명랑해전이 방영될 주말을 앞 둔 8월 12일 금요일 밤에는 조오련 3부자가 울릉도를 출발하여 독도까지 93㎡를 맨몸으로 헤엄쳐 횡단하며 일본에게 한국인의 의지를 무언의 메시지로 전달하였다.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 원작이 된 ‘칼의 노래’ 작가 김훈은 후에 쓴 한 에세이에서 ‘난중일기’를 본 후 30년 만에 이순신을 소설로 쓴 소회를 밝혔다. 그는 “이순신의 칼은 인문주의로 치장되길 원하지 않았고, 당대 현실 속에서 정치적 여백이 없는 칼”이라고 하였다. 이는 이번 드라마가 그 전 영웅주의 사관으로 그려낸 성웅 이순신 영화들에 비하여 ‘고뇌하는 인간 이순신’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을 되새겨 보면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김훈은 동시대의 일본 무장 다케다 신겐의 사후를 그린 영화 ‘카게무샤’를 본 느낌을 이순신의 엄숙한 정신세계와 비교하면서 소설의 제목을 ‘칼의 노래’로 정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였다.
‘카게무샤’는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과 함께 그 해 수입된 몇 편의 일본 영화 중 하나였는데, 그 해 필자는 원주지원에 근무하고 있었던 때이고, 시내 아카데미극장에 걸린 영화간판 속 일본 무장의 화려한 쌍뿔 마에타데(투구에 꽂는 장식물) 그림은 지금도 떠오른다. (본 드라마 속에서 보았던 왜장 와키자카의 화려한 투구를 떠 올려도 좋다.) 극장영화를 놓치고 나중에 비디오를 빌려서 본 기억은 나지만 일본 전국시대 역사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본 영화는 화려한 색감 외에는 생각나는 내용이 별로 없다. 당시에는 일본 전국시대 무사들의 정신세계 보다는 동양 영화감독으로는 최초로 황금사자상과 황금종려상을 받은 일본 최고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미장셴을 더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1980년 칸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이다.
아무튼 김훈은 이 영화에서 본 일본 전국시대 무장들의 화려한 갑주와 투구를 이순신의 갑옷과 투구에 비교하여 본다. “16세기 일본 무사들의 갑주는 놀랍게도 장식적이였다. 그들의 갑옷은 온갖 색깔과 문양을 교직한 정교한 공예품처럼 보였다. 무사의 지위가 높아질수록 그 장식적 현란함은 더욱 심해져서, 전투 지휘관이나 영주들의 갑옷은 군대의 유니폼이 아니라 독자적인 개성과 위엄의 상징체계를 드러내는 개인 패션이었다.” 그리고 “강력하고 세련된 웅성(雄性)의 삼엄한 기상을 표출하는 것이 그 갑옷들의 공통적 지향점이겠지만 창검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한 실용적 목적으로는 그 갑옷의 탐미적 열망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카게무샤의 배경을 말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다케다 신겐은 일본 전국시대에 무적의 기마군단을 거느린 당대 최고의 맹주였다. 후지산과 비와호가 있는 가이지방의 다이묘(大名)로, 다케다 가문의 기마군단은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천하무적 군단이었다. 1998년 상영 당시 영화선전문구에 나오는 것처럼 이 기마군단은 ‘신속함은 바람과 같이 하고 더딘 움직임은 숲속과 같이 하고, 빼앗은 행동은 불과 같이 하고, 움직이지 않을 때는 산과 같이’ 하는데 ‘숲속같이 고요히 접근하여 질풍노도, 바람처럼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 벼락 치듯 적을 섬멸’한다.
(올해 수많은 남성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또 다른 역사드라마, 해상왕 장보고의 일대기를 그린 ‘해신’의 원작가 최인호는 장보고가 죽은 훗날 일본에서 신라명신으로 부활하여 추앙을 받았다고 하는데, 바로 이 다케다 가문의 수호신으로 받들어 모셔졌다고 한다. 다케다 가문의 시조 미나모토 요시미쓰는 이 신라명신상 앞에서 성인식을 올리고 이름을 ‘신라사부로’로 개명한다. 그러므로 다케다 가문의 정신적 아버지는 신라명신, 즉 장보고라는 것이다. 다케다 신겐은 신라사부로의 21대 후손이 된다. 신라명신을 모신 ‘신라선신당’과 ‘신라명신좌상’은 현재 일본의 국보라고 한다.)
오다 노부나가(울지 않는 새는 죽이라고 한 용장의 대명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군으로 일본 천하통일을 거의 이룰 무렵 가신의 배신으로 죽음)가 일본 천하를 통일하여 나가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다케다 신겐은 어느 날 오다 노부나가 - 도쿠가와 이에이스 연합군 성 아래서 피리 소리를 듣다가 철포(조총)에 저격당하여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한다. 다케다 신겐의 죽음은 천하를 노리는 오다 노부나가, 우에스기 겐신에게는 절호의 기회이고, 다케다 가문의 위기였다. 다케다 신겐은 자신의 죽음을 사후 3년 간 알리 말 것과 수성을 유언하였다. 신겐의 장자 가쓰요리와 그 가신들은 신겐과 모습이 흡사히 닮은 좀도둑을 찾아내 신겐의 자리에 앉힌다. 그림자 무사, 가짜 무사 즉, 카게무샤인 것이다. 좀도둑은 완벽한 다케다 신겐 연기 수업을 받아 잠자리를 같이 하는 소실들도 카게무샤의 정체를 알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카게무샤는 다케다 신겐의 흑마를 타고 전군을 사열하다가 그만 낙마하고 만다. 길들인 야생마, 신겐의 애마는 소실들도 알아보지 못한 카게무샤의 정체를 알아챈 것이다. 소식을 접한 오다 노부나가와 신겐의 평생의 경쟁자 우에스기 겐신은 다케다 신겐의 죽음을 눈치 챈다.
1597년, 오다 노부나가 - 도쿠가와 이에이스 연합군은 다케다신겐의 장남 기쓰요리의 무적 기마군단을 철저히 궤멸시킨다. 20세에 오다 노부나가가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의 뒤를 이어 오와리 지방의 영주가 되었을 때만 해도 오다 가문은 다케다 가문에 도전할 꿈도 꾸지 못하였다. 천하통일의 의지를 굳힌 오다 노부나가는 포루투갈 상인들을 통하여 신식 무기 철포를 수입하고, 장인들을 키워 수많은 조총을 제작하여 철포대를 조직하였다. 화약을 재고 불을 당기는 화승총의 단점을 보완한 3단식 일제 사격 전법은 유효 사거리 내의 적들을 한순간에 궤멸 시킬 수 있었다. 천하무적 다케다 기마군단의 숲 같고, 산 같고, 바람 같은 전술도 오다 노무나가의 삼열 조총부대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조일전쟁(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7년 전의 일이고, 이순신이 32세에 훈련원봉사로 무관이 된 바로 전해의 일이었다.
앞으로 이 가공할 전력을 갖춘 군사력을 온 몸으로 맞이해야 할 사람이 바로 이순신이었다. 쿠키 요시타카(드라마에서 수장(水將) 와카자키와 도도의 상좌에 앉아 교활한 눈빛 연기를 하던 왜장)는 해적 출신으로 오다 노부나가에 복속한 후, 그의 사후 다시 풍신수길(豊臣秀吉-토요토미 히데요시) 밑으로 들어 가 임진왜란에 일본 수군 총수로 출전한다. 큐슈지방의 번주인 시마즈 요시히로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복속한 후 자기 함대를 이끌고 출전한다. 제1군을 이끈 고니시 유키나카와 제2군을 지휘한 가토 기요마사는 풍신수길이 가장 신임하는 가신들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풍신수길이 경계하여 그의 영지를 내륙 깊은 곳으로 옮기도록 하는 바람에 조선 출정을 하지 않아 고스란히 영지와 전력을 지키고 300년 도쿠가와 막부정권의 초석을 다질 수 있었다.
김훈에 의하면, 카게무샤가 상영되었던 1998년 올해의 문화인물이 이순신이었는데, 그 해 세종로 네거리에 동상으로 서 있는 이순신을 보면서 느낀 단상을 앞에서 말한 일본 무장들의 화려한 갑옷의 장식미와 비교하면서 의미심장한 평가를 했다. 일본 무장들의 갑주는 공격적 기상을 조형화 하여 날아오르고 있지만, 이순신의 갑주는 다만 적을 죽이기 위하여 죽지 않아야 하는 사람의 자기방어의 실용성만으로 고요하고, 투박하고 단순하지만 시대와 역사를 혼자서 책임져야하는 사람의 한없는 경건성이라고 말한다. 고독한 영웅 이순신의 정신세계를 공격적이고 화려한 왜장들의 갑주와 투구에 비교하여 그 정신의 엄숙한 경건성을 고양시키다니 탁견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도모유키’는 순천성에 갇힌 고니시 유키나카의 제17군 막장이다.
순천 앞바다로 퇴각하다가 낙오하여 죽고 마는 이 하급 지휘관은 실존 인물이 아니다. 올해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소설 ‘도모유키’의 주인공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올해 이순신 신드롬의 한 현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기자 출신의 조두진이라는 작가가 왜군 하급 장교의 시선으로 정유재란 끝 무렵 벌어지는 전쟁의 참상과 죽음을 앞 둔 절망적 인간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낸 것이다. 평론가들은 이 소설을 평하기를 ‘전쟁이라는 치열한 상황을 전달하기 위하여 형용사와 부사를 배격하고 밀도 있는 문체로 일관’하고, ’조선 수군에 퇴로를 차단당한 극한 상황 속에서 왜군 병사들의 처지를 냉혹하리만큼 간결하고 명징한 문체와 분방한 상상력으로 그려 낸 역작‘이라고 한다. 김훈의 냉소적 세계관과 과잉된 자의식이 미문 속에 숨어 있는 ’칼의 노래‘와 분명 비교할 수 있는, 인간적인 또 다른 전쟁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도모유키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벚꽃이 눈처럼 날리던 날 쌀자루에 팔려가는 여동생 이치코를 본다. 그리고 이치코의 절망적인 눈빛을 잊지 못한다. 동생을 다시 찾아오겠다는 일념으로 다이묘(大名)의 이시가루(최하급 보병 병졸)가 된다. 도모유키의 아버지는 칼 찬 사람은 죽이거나 죽을 뿐이라며 아들을 말린다. 하지만 병졸이 된 도모유키는 몸을 아끼지 않고 충성을 다하여 하급지휘관이 되었고, 정유재란 때 조선으로 출병한다.
주군 고니시 유카나카가 순천성을 점령하였을 때만 하여도 도모유키는 곧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귀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하면서 전세는 어렵게 되었다. 순천성에 고립되었고, 수맥이 차단되어 모든 병사들이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린다. 부장 사사키 휘하의 무사들은 말먹이 쌀뜨물을 훔쳐 먹은 조선인 역무의 가슴을 찌르고, 식량을 축낸다고 다친 조선인 포로의 목을 아무 표정 없이 내리 친다. 목 잘린 조선인의 머리통이 때구루루 구르며 밥알이 흩어진다.
보급 투쟁에 나간 도모유키는 살상의 현장에서 한 여자를 만난다. 조선인 여자의 이름은 명외, 그 여자의 눈빛에서 여동생 이치코의 눈빛을 느낀다. 수하 졸개들이 그녀를 강간하려는 순간 도모유키는 그녀를 살려낸다. 퇴로가 차단된 순천성 내 다친 조선인 역부들은 무참히 칼에 찔리고, 목이 잘리고, 조선인 여자들은 병졸들의 위안부가 되는 아수라에서 도모유키는 명외를 지키기 위하여 갖은 애를 쓴다.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꿈속에서는 고향으로 돌아 와 이치코의 기둥서방에게 돈을 주고 동생을 찾아 온 후 온 가족들과 함께 따뜻한 된장국에 밥을 먹는 꿈을 꾼다.
고니시 유키니카가 마지막 퇴각 결정을 내린 밤, 도공, 기술자, 힘센 장정을 제외한 순천성 내 모든 조선인들의 죽음이 결정되었다. 도모유키는 생각한다. 명외를 기술자로 추천한다고 하여도 사사키 부장의 눈을 속일 수는 없을 것이고, 설령 속이고 함께 일본으로 간다고 하여도 금방 탄로나 명외는 사창가로 팔려 갈 것이다. 도모유키는 감추어 두었던 도자기를 보자기에 싸가지고 성문을 지키는 위병대장을 찾아간다. 도모유키는 명외와 그녀의 늙은 아버지를 데리고 성문을 빠져 나온다. 달빛에 비친 여자의 얼굴이 시리도록 고와서, 그는 명외를 와락 껴안았다. 그녀는 “같이...... 도모유키님 같이 가요.”하고 도모유키의 눈을 붙들지만 그는 “명외, 나는 돌아가야 한다. 집으로 돌아 가야한다.”며 눈물을 흘린다.
다음 날 퇴각하는 고니시 유키나카의 함대는 노량에서 조선 수군함대에 산산이 부서진다. 격침하는 함선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도모유키는 다른 낙오병과 합류하여 해안의 산과 마을을 유랑한다. 주먹밥 한 덩이에 죽이고 죽고, 시체에서 옷을 벗겨 입는 이비규환에 절망한 도모유키는 죽음을 예감한다. 수하 다다오키의 간청을 뿌리치고, 명외를 찾아 눈 내리는 발판을 가로 질러 혼자 걸어간다. 굶주리고 지친 그가 언젠가 다녀 간 듯한 낯익은 마을에 기어서 도착한다. 명외를 처음 만난 움막 마당에 얼굴을 처박고 엎드린 채 도모유키는 조용히 눈을 감는다.
올 봄과 여름 내내 ‘불멸의 이순신’에 온 마음을 빼앗겨 주말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분들에게 필자의 얻어 들은 이야기로 역사의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그런데 욕심이 지나쳐 ‘도모유키’까지 끼워 넣어, 어쭙잖게 도도한 역사와 전쟁에 깔린 이름 없는 사람들의 절망을 이야기 하려고 하였다. 덕분에 제목으로 쓴 3인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못하고, 나열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더욱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한 배경이 너무 짧아 일본 전국시대 역사와 허구의 소설 도모유키의 내용만 서술하고 말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그렇지만 당시의 조선 역사와 이순신의 내면세계는 이번 드라마와 김훈의 ‘칼의 노래’를 통하여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한다.
지면 상, 조일전쟁이 끝난 후 당시 동아시아 역사 질서에 끼친 이순신의 역할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불멸의 이순신’을 정리하여 본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한 일본 수군 제독 도고는 누군가 그를 이순신과 비교하자 자신을 넬슨 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순신 장군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하였다고 한다. 여간한 존경심이 아니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었으리라.(실제 도고는 정치과 관계를 맺지 않고 평생 순수 군인으로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생을 마쳤다고 한다,) 러시아 발틱함대를 무력화 시킨 이 해전을 쓰시마해전이라고 부르는데, 당시 도고 제독은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 전법을 썼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와키자카 함대를 궤멸시킨 바로 그 진법이다.
혹자는 이순신 장군이 그의 사후 300년 동아시아 질서를 자리 잡게 하였다고 한다. 당시 조선 수군이 서남해 제해권을 장악하지 못하였으면, 일본 수군 함대는 질풍처럼 서남해를 휩쓸고 올라가 중국의 산동반도에 상륙하였을 것이고, 그렇다면 조선의 안위는 물론 명(明)의 몰락도 훨씬 빨리 진행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1598년 8월, 순천성에 갇힌 소서행장(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카)은 풍신수길(豊臣秀吉-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부음을 듣고는 엄청난 조바심에 시달렸을 것이다. 전력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일본으로 돌아가 자신의 영지를 지키고 주군의 유훈을 받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력을 거의 잃고 돌아간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항하다가 패하여 참수된다. (조일전쟁 내내 그와 앙숙이었던, 독전 세력 카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재빨리 도쿠가와 편에 섰다가 고니시의 영지를 챙긴다.) 수군 대장 구키 요시타카 역시 자신의 함대를 거의 잃고 돌아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항하다가 패퇘한 후 자살하고 만다. 큐슈이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는 고니시 유키나카를 구출하려고 노량으로 발진하였다가 자신의 함대 500척 중 450척을 잃는 대참패를 겪는다. 일본으로 돌아 간 그 또한 토요토미군이 되어 도쿠가와 군에 대항하다가 패하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 와 명맥만 겨우 유지하게 된다.
일본의 역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300년 막부 정권을 열게 된 이 전투를 세키가하라대회전이라고 부른다. 1600년, 울지 않는 새는 죽이지 않고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지장(智將)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에도막부가 이렇게 문을 열었다. 그렇지만, 고니시, 구키, 와키자카, 시마즈 등 왜장들이 자신들의 전력을 그대로 유지한 채 본국으로 귀환하였다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과연 세키가하라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덕천가문의 300년 에도막부시대를 열 수 있었을까?
역사에 함부로 가정을 그려보면 안 될 일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시선으로 역사를 살피는 사람들은, 일본이 천하통일 후 안정된 300년의 도쿠가와 에도막부시대를 연 뒤에는 이순신 함대의 명량, 노량해전의 빛나는 승리가 있었다고 한다. 이 300년은 청(靑), 조(朝), 일(日) 3국의 평화시대였다. 필자의 생각도 그렇다.
- 2005년 늦가을 서성옥.
첫댓글 서성옥 시인이 의도했던 본래의 뜻과는 좀 다른데로 흐는는 경향이 있었지만, 일본 무사들에 대한 박식함이 <불멸의 이순신>을 보는데 많은 참고가 되리라 여겨지네요.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