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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에서 하룻밤 (천장암 홈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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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법어 스크랩 [鏡虛集] 경허선사
천장암 추천 0 조회 116 13.06.18 10:43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경허선사 성우(鏡虛禪師 惺牛) (1849∼1912)


선종(禪宗)을 중흥시킨 대선사(大禪師). 성은 송씨. 속명은 동욱(東旭), 법호는 경허(鏡虛). 전주출신. 아버지는 두옥(斗玉).

 

태어난 해에 아버지가 죽었으며, 9세 때 과천의 청계사(淸溪寺)로 출가하였다. 계허(桂虛)의 밑에서 물긷고 나무하는 일로 5년을 보냈다. 그뒤 계룡산 동학사의 만화강백(萬化講伯) 밑에서 불교경론을 배웠으며, 9년 동안 그는 불교의 일대시교(一代時敎)뿐 아니라 <논어>·<맹자>·<시경>·<서경> 등의 유서(儒書)와 노장(老莊) 등의 제자백가를 모두 섭렵하였다.

 

1879년에 옛스승인 계허를 찾아 한양으로 향하던 중, 심한 폭풍우를 만나 가까운 인가에서 비를 피하려고 하였지만, 마을에 돌림병이 유행하여 집집마다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비를 피하지 못하고 마을 밖 큰 나무 밑에 낮아 밤새도록 죽음이 위협에 시달리다가 이제까지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이치를 문자 속에서만 터득하였음을 깨닫고 새로운 발심(發心)을 하였다. 이튿날,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모두 돌려보낸 뒤 조실방(祖室房)에 들어가 용맹정진을 시작하였다. 창문 밑으로 주먹밥이 들어올 만큼의 구멍을 뚫어놓고, 한 손에는 칼을 쥐고, 목 밑에는 송곳을 꽂은 널판자를 놓아 졸음이 오면 송곳에 다치게 장치하여 잠을 자지않고 정진하였다.

 

석달째 되던 날, 제자 원규(元奎)가 동학사 밑에 살고 있던 이처사(李處士)로부터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라는 말을 듣고 의심이 생겨 그 뜻을 물어왔다. 그 말을 듣자 모든 의심이 풀리면서 오도(悟道)하였다. 그뒤 천장암(天藏庵)으로 옮겨 깨달은 뒤에 수행인 보임(保任)을 하였다. 그때에도 얼굴에 탈을 만들어 쓰고, 송곳을 턱 밑에 받쳐놓고 오후수행(悟後修行)의 좌선을 계속하였다. 1886년 6년 동안의 보임공부(保任工夫)를 끝내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다.

 

그 당시 일상적인 안목에서 보면 파계승이요 괴이하게 여겨질 정도의 일화를 많이 남겼다. 문둥병에 걸린 여자와 몇 달을 동침하였고, 여인을 희롱한 뒤 몰매를 맞기도 하였으며 술에 만취해서 법당에 오르는 등 낡은 윤리의 틀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행적들을 남겼다.

 

그는 생애를 통하여 선(禪)의 생활화·일상화를 모색하였다. 산중에서 은거하는 독각선(獨覺禪)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선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선의 혁명가로 평가받고 있다. 법상(法床)에서 행한 설법뿐만 아니라 대화나 문답을 통해서도 언제나 선을 선양하였고, 문자의 표현이나 특이한 행동까지도 선으로 겨냥된 방편이요, 작용이었다. 그의 이와같은 노력으로 우리나라의 선풍은 새로이 일어났고, 문하에도 많은 선사들이 배출되어 새로운 선원들이 많이 생겨났다.

 

오늘날 불교계의 선승(禪僧)들 중 대부분은 그의 문풍(門風)을 계승하는 문손(門孫)이거나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는 근대불교사에서 큰 공헌을 남긴 중흥조이다. 승려들이 선을 사기(私記)의 형식으로 기술하거나 구두로만 일러오던 시대에 선을 생활화하고 실천화한 선의 혁명가였으며, 불조(佛祖)의 경지를 현실에서 보여준 선의 대성자이기도 하였다. 근대 선의 물결이 그를 통하여 다시 일어나고 진작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의 마조(馬祖)로 평가된다.

 

만년에 천장암에서 최후의 법문을 한 뒤 사찰을 떠나 갑산(甲山)·강계(江界) 등지에서 머리를 기르고 유관(儒冠)을 쓴 모습으로 살았으며, 박난주(朴蘭州) 라고 개명하였다. 그곳에서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임종게를 남긴 뒤 입적하였다. 나이 64세, 법랍 56세이다. 저서에는 <경허집>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큰스님> (법보신문사. 1992).

 

글출처: 부타피아 http://bud.buddhapia.com/person/goseong/kyongher.asp






 鏡虛集 (1942년, 중앙선원 刊)

 


1942년 비매품으로 간행된 중앙선원 판본 ?경허집? 표지와 이 판본에 수록된 경허선사초상

 

 경허는 1912년 4월 머리를 기르고 속복을 입은 채로 북방의 고원에서 입적한다. 일년 뒤 이 소식이 수덕사의 제자들에게 알려지고 혜월과 만공은 곧장 그곳으로 달려가 난덕산에서 다비에 붙였다. 그때가 1913년 7월이었다. 이후 만공은 경허의 행적을 따라 각처에 흩어져 있던 경허의 유고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1935년에 수집한 유고를 만해 한용운에게 넘기며 혹 글자의 누락이나 그릇된 점을 고쳐 교열하여 주기를 부탁한다. 그러나 문도가 좀더 완벽을 기하기 위해 경허 만년의 원고까지 포함하기로 하여 인쇄를 미루다가, 1942년 봄에 갑산, 강계 및 만주 등지에까지 가서 유고를 수집한 뒤 1942년 여름에 간행하였다. 각 선원은 5원, 각 개인은 50전 이상씩 연조금을 모아 인쇄한 것이다. 이것이 1942년 중앙선원 판본 ?경허집鏡虛集?으로 당시 비매품으로 배포되었다.

 

 ?경허집?의 표제는 남전한규가 제자하였으며, 속표지를 뒤이어 <열반송>, <경허선사초상>, <경허선사필적>이 실려 있다. 그리고 한용운의 <서序>와 <약보> 및 <목록>, 본문 순으로 이어진다. <목록>은 목차를 뜻한다. <목록>을 살펴보면 옛 글의 체제를 따라 법어, 서문, 기문記文, 서간, 행장, 영찬, 시詩, 가歌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歌의 일부만 한글일 뿐 나머지는 모두 한문으로 쓰였으며, 한용운의 序부터 시작하여 한적본의 면수로 60면, 즉 오늘날의 면수로 120면에 이른다.  

 

글출처:  http://www.gosinga.net/archives/1588





 

세계를 향해 사자후를 포효하다!-경허집 영문판 출간

 

한국근대불교 중흥조, 경허선사의 법문과 선시를 담은 경허집 영문판 출간

한국불교를 되살린 경허 선사의 원력이 세계를 향해 외치다.


조계종 출판사는 한국 근대불교의 중흥조로 일컬어지고 있는 경허선사의 법문과 선시를 담은 경허집 영문판을 출간하였습니다. 이번 번역 사업은 한국불교의 세계화에 있어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일이며 앞으로 있을 한국사상서 번역사업의 효시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 번역사업은 문화관광부의 한국문화체험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으며 1년간의 노력을 기울여 드디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경허집 영문판은 통도사 극락선원 명정 스님이 한글로 번역한 「경허집」을 모본으로 충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박영의 명예교수가 번역을 맡고, 미국 미시건대 한국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매티 베게하우프트와 미국 UC버클리 종교학 박사출신으로 현재 해인사 승가대학장 소임을 맡고 있는 법진 스님이 감수를 맡아 진행되었습니다.


혼란의 시기였던 19세기 말, 어떤 경계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자재한 삶을 살았던 경허선사(1846~1912)는 선(禪)을 걸망에 짊어지고 나라 구석구석을 만행하며 깨달음에 목말라 하던 구도자들에게 새로운 길과 희망을 제시하였으며 그 와중에 벌어졌던 선객으로서의 일화, 혹은 수월, 혜월, 만공, 한암 등 제자들과의 대화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경허스님의 탁월한 사상과 행장이 지금까지 국내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번 출간을 계기로 한국 불교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본 경허집 영문판The Collected Writings of Gyeongheo」은 각각 250쪽이 넘는 산문집과 시집의 2권 1질로 구성되어 있만? 시집의 경우는, 5언절구, 7언절구 등 다양한 형식의 한시와 오도송, 행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산문집은 법문, 서문, 스님들과의 편지, 선사들의 행장 등이 실려 있어 경허스님의 사상과 당시 불교계의 정서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번 경허집 영문판을 제작한 조계종 출판사는 “전 세계 불교단체와 해외 사찰에 우선 배포될 예정이며, 추후 해외시장의 진출도 고려하고 있다.”고 전하며 “이로서  2년 전 번역 출간했던 백운화상의 「직지」(영문명 Jikji), 금년 3월 출간된, 한국불교를 빛낸 25분의 선사행장을 소개한 「선사행장」(영문명 The Great Seon Masters of Korea), 이번에 개정판이 나오는 한국불교 가이드북인 「What is Korean Buddhism?」등을 연속 출간하게 되어 한국불교의 국제화에 큰 동력을 갖추게 되었다.”며 간화선 대중화와 더불어 한국불교 세계화를 모토로 각종 사업을 전개하여 종단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전 세계를 무대로 전법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경허집 영문판 문의: 대한불교조계종 출판사 남원근 팀장 (전화 02-733-6390)

 

글출처:대한불교조계종홈페이지 http://www.buddhism.or.kr/news/board/view.aspboard_type=2&board_seq=13&article_seq=41642&page=1&temp_fl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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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靈鷲叢林 극락선원 석명정 스님의 경허집 한글 번역본 (1990판)


끝 사진의 명정스님의 후기에서 보듯이 한암선사(漢岩禪師)의 육필본 [鏡虛集]을 텍스트로 하였다 한다.

경허선사의 한문 원문과 한글 번역으로  되어있다.

 

명정스님은 입적하신 영취총림 경봉선사의 맞상좌로, 한시와 선시에 일가견을 이룬 학승으로 통도사 극락암 원주, 극락선원장을 하셨으며

경봉선사께서 계시던 극락암 삼소굴(三笑窟)을 돌보시며 노화상들의 법문과 말씀을 번역 출간하고 저서를 출간 하기도 하였다.

경허집, 한암집, 경봉집, 경봉스님 말씀 법해 등을 번역 출간 하였으며, 저서로는 茶이야기 禪이야기 등이 있으며,

茶에도 일가견을 이루신 분이다. 

 


 


한용운 선사의 한문 序 

 

한글번역 

 



경허집발간취지서 한문 원문 

 

한글번역 

 



 

만해의 경허스님 약보 한문 원본과 한글번역

 



통도사 극락암 석명정 스님의 후기

  

 

 


달마조사가 禪風을 이룬 후로 선은 북방 대승불교의 근간을 이루었다.

禪家의 맥을 지금에 까지 이루워 온 나라는 중국이나 일본이 아닌 한국이라 한다.

면면이 이어져 오던 禪家의 맥이 조선조이후 배불숭유의 정책으로 침잠하였으나

조선조말 경허선사께서 선풍의 르네상스를 이루시었다.

경허선사 이후, 명정스님이 후기에서 말하였듯이,  근대에 여러 큰스님들께서 독특한 가풍을 떨치시며 禪宗의 부흥기를 이루었으나,

노화상들께서 입적하신후 현대에는 크게 발호하여 한 선가의 가풍을 이룬 스님들이 드문듯 한것도 사실이다.

 

경허집을 틈틈이 읽어 보려한다.

책은 위의 명정스님이 번역한 경허집(1990년), 이 책을 십수년간 가지고 있었으나 간혹 들춰 보았을뿐 아직 정독하지 못했다.

읽으며 이곳에 소개하려 하는데, 그 뜻이 심오하여 감히 내 생각과 느낌은 쓰지 않으려 한다.

혹 관심이 있는 분들은 같이 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옮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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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3.06.18 17:29

    첫댓글 http://blog.daum.net/maninblue/15971103 에서 겨온 글들입니다.

  • 작성자 14.01.15 08:39

    이능화,민족사 왜곡과 식민사학 확립의 주도자 - 이이화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iaptng&logNo=150110068172

  • 14.09.04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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