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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④]충남논산明齋윤증古宅-宗學堂
역사.인물
2005/05/29 20:31 http://blog.naver.com/joba34/140013415949 |
[한국의 명가④]충남논산明齋윤증古宅-宗學堂
조선 선비정신 精華 배어든 소박한 사대부의 삶터
조용헌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충남 강경과 논산 들판. 김제·만경 평야도 넓기로 유명하지만, 기차를 타고 가다 보면 강경·논산 평야도 시원하게 넓다. 전남의 장성에서 충남의 논산에 이르는 구간은 중간중간에 몇 개의 야산만 제외하면 거의 들판으로 이어져 있다.
한반도에서 가장 시원하게 터진 공간이기도 하다. 그 강경·논산 들판의 끝에는 명산인 계룡산이 자리잡고 있다. 산지가 아닌 평평한 들판에서 바라보는 계룡산은 태산교악(泰山喬嶽)의 느낌을 준다. 평지에서 돌출한 화형(火形)의 바위산인 계룡산은 힘차고 단단하게 다가온다. 한 주먹이 있는 산이다.
그 계룡산의 지맥이 논산의 들판쪽으로 내려올 때는 단단한 노기(怒氣)를 풀고 둥글둥글한 모습의 야산들을 만들어 낸다. 명재(明齋) 윤 증(尹拯·1629~1714) 고택의 뒷산에 해당하는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의 노성산(魯城山·350m)도 둥그런 모양의 야산이다. 충남의 산세들은 둥글둥글한 야산이 많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한 느낌을 준다.
노성산도 그러한 충청도 산세의 전형적인 모습을 한 야산이다. 노성산 밑에는 그보다 작은 금형(金形:둥그런 모습)의 옥녀봉이 연결되어 있다. 풍수가에서 말하는 옥녀봉은 보통 바가지 모양의 조그마한 금형 봉우리를 지칭한다.
윤 증 고택은 이 옥녀봉을 뒷산으로 한다. 앞으로는 비산비야(非山非野)의 평평한 언덕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옥녀탄금’(玉女彈琴)의 명당이라고 한다. 옥녀가 거문고를 연주하는 형국이다. 뒷산의 옥녀봉을 옥녀라고 한다면, 거문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거문고는 통상 무릎에 놓고 연주한다.
그러므로 옥녀탄금은 좌측 무릎의 위치에 해당하는 지점에 자리잡은 평평한 야산을 거문고라고 생각한다.
거문고 모습의 야산(둔덕)은 엇비슷한 각도로 또는 대각선 방향으로 놓여 있는 경우가 많다. 좌청룡의 자리에 끝모습이 평평한 야산이 가로 놓여 있으면 옥녀탄금이라고 이름 붙인다. 초보자는 언뜻 보아서 이 모양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비슷한 형국을 여러 군데 답사하다 보면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윤 증 고택의 경우도 멀리서 보면 몇 채의 집들이 들어서 있는 좌청룡 부위가 평평한 야산으로 이어졌다. 이것을 거문고로 간주한다. 주변 10리의 산세를 한 장면으로 집약시킬 수 있는 거시적 안목이 필요하다. 산세와 인간이 교감할 때 거시적 안목이 확보된다.
윤 증 고택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고택이다. 건축 관련 잡지나 여성잡지들이 단골로 다루는 집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전통미를 간직한 아름다운 고택 중 하나로 꼽히는 집이기 때문이다. 전통미를 간직한 고택으로는 대체로 강릉의 선교장(船橋莊)과 논산의 윤 증 고택을 꼽는다.
선교장이 웅장한 장급(莊級) 고택이라면 윤 증 고택은 소박하면서도 조선 사대부가의 품위가 어려 있는 고택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는 이 집을 방문할 때마다 꼭 가 보는 곳이 있다. 안채 뒤의 대숲 아래에 있는 장독대다. 집 뒤켠의 석축 위에 간장독과 된장독 그리고 김치독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독대를 보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귀소본능을 충족시켜 주는 한국적 후원의 보편적인 풍경이다.
1년 답사객 1만5,000명에 달해
이 집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고 한다. 고건축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나라 전통 고택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된 집이 충남 논산의 윤 증 고챨? 경남 함양의 일두(一?) 정여창(鄭汝昌·1450~1504) 고택이라고 한다. 일두 고택은 요즘 비어 있지만, 윤 증 고택에는 아직까지 후손이 거주해 사람의 훈김이 배어 있다. 목재로 지은 한옥은 사람이 거주해야만 오래 가는 법이다.
또 한 가지 비결은 목재를 항상 여분으로 30% 정도 더 비치해 놓는 방법이었다. 어느 부위가 훼손되면 응달에서 말려 놓은 목재로 곧바로 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윤 증 고택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보존도 잘 된 고택이어서 많은 고건축 연구가들, 전통문화 마니아들이 수시로 다녀가는 필수 답사 코스에 든다. 1년 답사객만 대충 헤아려도 1만5,000명 가량 된다고 하니, 한 달에 1,000명이 넘는 셈이다. 그만큼 명소다.
집도 집이지만 사람들이 이 집을 주목하는 더 큰 이유는 조선의 선비정신 때문이다. 건축이라는 하드웨어 못지않게 이 집에는 선비정신의 전형을 보여주는 묵직한 소프트웨어가 담겨 있다. 윤 증이 남기고 간 삶의 궤적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이 한 세상 살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책잡히지 않고 살기 힘든 법인데, 명재는 책잡히지 않고 사는 삶을 후세인들에게 모범적으로 보여주었다.
그가 보여준 처신의 중심에는 철저한 일관성이 자리잡고 있다. 일관성이란 아이큐(IQ)가 모자라는 백치이거나 수학적 엄밀성을 타고난 천재들이나 보여주는 초식이다. 보통사람은 결코 보여주지 못하는 초식이기도 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은 왔다 갔다 하면서 그때그때 편한 대로 살게 마련이다.
명재의 삶에서는 처음과 끝이 일치하는 일관성이 감지된다. 명재는 간단한 인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우선 벼슬 문제를 보자. 그는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스무 번이나 벼슬을 준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거부했다. 감투 제의가 오면 낼름 잡아채는 사람도 있지만, 보통 서너 차례 거절하다가도 대여섯 번 제의가 들어오면 수락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명재는 86세로 천수를 다할 때까지 벼슬을 수락한 적이 없다.
그의 벼슬 거부 이력을 살펴보자. 38세에 공조좌랑, 39세에 세자익위, 40세에 전라도사, 41세에 사헌부 지평, 44세에 사헌부 장령, 45세에 집의, 53세에 성균관 사예, 54세에 경연관, 55세에 장악원정·호조참의, 57세에 이조참판, 68세에 공조판서·우참찬, 69세에 제주, 70세에 이조판서, 73세에 좌참찬, 74세에 좌찬성, 81세에 우의정, 83세에 판중추부사였다. 우의정을 사양하는 상소는 열여덟 번이었고, 판중추부사 사임 상소는 아홉 번이었다고 한다.
명재의 말년은 벼슬과의 싸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의정 자리까지 거부하는 그를 보고 당시의 인심은 ‘백의정승’이라는 칭호를 붙여줄 정도였다. 명재는 인조대에 출생하여 효종·현종·숙종을 포함해 4대 임금을 모셨다. 하지만 임금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않고 정승의 반열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라고 한다. 조선 역사를 통틀어 명재처럼 벼슬을 많이 제수받았으면서도 그것을 끝까지 거절한 인물은 발견하지 못했다.
벼슬이란 과연 무엇인가. 조선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인생 최고의 가치가 벼슬이었다. 벼슬하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였고 목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공의 기준이 다원화된 요즘에도 장관 자리 한번 하려고 이 사람 저 사람이 서로 떼밀면서 머리가 터지는 판이다.
벼슬하지 않고 살았던 明齋의 일생
입신양명(立身揚名)이라는 일원화된 가치관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던 조선사회에서 벼슬이 차지하는 비중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과거에 합격하지 못해 벼슬을 못 하면 사람 취급 못 받던 사회가 조선사회였다. 벼슬을 하면 무엇이 좋은가. 남들이 알아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富)와 귀(貴)를 한꺼번에 몰아다 주어 더 좋다.
벼슬하고 있으면 자존심 굽히고 누구에게 굽신거릴 만한 상황이 별로 발생하지 않는다. 자존심을 지키면서 살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먹고 살 만큼의 녹봉도 들어온다. 요즘에는 어떤가. 돈을 벌기 위해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 사업하는 사람이 자존심 세우고 행동했다가는 되는 일이 없다.
즉 돈(富)을 위해 자존심(貴)을 파는 것이 된다. 돈이 모여 부자가 되었다 싶으면 선거에 나간다. 군수 선거에도 나가고 국회의원 선거에도 나간다. 선거는 돈을 써야만 하는 작업이다. 국회의원이라는 귀를 얻기 위해 그 대가로 부를 지불하는 것이다. 초장에는 부를 위해 귀를 버리지만, 나중에는 귀를 위해 부를 버리는 셈이다. 현대인의 인생에는 엇박자가 많다.
반대로 조선 시대의 벼슬 자리는 한꺼번에 부와 귀를 모두 잡을 수 있는 자리였던 것이다. 벼슬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이렇게 좋은 벼슬 자리를 명재는 죽을 때까지, 그것도 20여 차례나, 나중에는 우의정 자?리를했다. ‘NO’라고 말할 줄 아는 선비였다.
그가 죽기 전에 후손들이 “묘비명에 직함을 어떻게 쓸까요” 하고 물으니 “징사(徵士)라고 써라”라는 대답을 남기고 갔다. 징사란 ‘불러도 나가지 않았던 선비’라는 의미다. 스스로를 징사로 규정했던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조선 시대 가장 유명한 처사(處士)는 남명 조 식이 되고, 가장 유명한 징사(徵士)는 명재 윤 증이 된다.
왜 명재는 이처럼 벼슬을 거부하였는가. 그 배경에는 현실적인 원인도 작용했다. 그가 주로 활동했던 시기는 숙종 시대(1674~1720)였다. 숙종 시대는 당쟁이 가장 극심한 기간이라고 여겨지는 시기다. 비교적 공정한 시각에서 조선 시대 당쟁을 다루었다고 평가받는 이건창(李建昌·1852~98)의 ‘당의통략’(黨議通略)을 보면, 숙종 시대에 대한 설명 부분이 유난히 많다. 다른 임금들보다 2~3배에 가까운 분량이다.
분량이 많다는 사실은 숙종조에 일대 난타전이 벌어졌음을 말해준다. 조선 후기 당쟁의 하이라이트인 기해예송(己亥禮訟·1659)과 갑인예송(甲寅禮訟·1674)이 있었다. 갑인예송을 통해 정권을 잡았던 남인들은 경신환국(庚申換局·1680)으로 다시 서인들에게 정권을 빼앗긴다.
그러다 9년 뒤에는 기사환국(己巳換局·1689)이 발생한다.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이 실권하고 남인이 다시 집권한다. 이때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89)이 사약을 받고 죽는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5년 뒤 갑술년에는 갑술환국(甲戌換局·1694)이 기다리고 있었다. 노론의 반격으로 인해 남인이 다시 몰락하는 정변이었다. 이 시기는 계속되는 예송과 환국이라는 정변으로 인해 여야 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전개되던 시기였다.
언제 무슨 꼬투리를 잡혀 사약을 받거나 유배당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는 살벌한 시기였다. 환로(宦路)에 나간다는 것이 세상에 경륜을 펴기 위한 참여가 아니라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서로 물고 뜯어야만 하는 아수라판에 정식으로 데뷔하는 격이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이런 판에는 들어가지 않는 법. 사각의 링 밖에서 사태의 추이를 냉철하게 관망할 뿐이다. 명재의 태도가 이 노선이었을 성싶다.
명재가 벼슬을 거부한 또 한 가지 이유는 사상적인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명재는 알려져 있다시피 노론의 우암 송시열과 대립했다. 우암과의 대립은 명재의 아버지인 윤선거의 비문 내용 때문에 발단이 되기는 하였지만, 그 이면을 좀 더 파고들어가면 사상적인 차이가 작용했다.
우암이 철저하게 주자의 노선을 따르는 주자학파였다면, 명재는 기호유학을 계승하면서도 주자학과는 다른 노선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노선이라고 하면 이(理)보다 마음(心)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압축된다. 이름 붙이자면 심학(心學)이다. 명재의 심학은 양명학과도 연결된다.(김길락, ‘명재 윤 증의 심학’, 93쪽)
明齋의 가문과 불교의 영향
조선 양명학의 대가인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1649~1736)가 바로 명재의 지도를 받았다는 사실에서도 그 연결고리가 드러난다. 겉으로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명재는 양명학을 좋아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양명학의 3대 골격은 심즉리(心卽理), 지행합일(知行合一), 치양지(致良知)다. 이 중에서 치양지가 핵심인데, 마음 그 자체가 곧 양지(지혜)라는 주장이다.
주자학에서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성격의 이(理)를 중시한다. 예를 들면 사단칠정 가운데 사단은 이이지만 희·노·애·락과 같은 인간의 감정은 이가 아닌 것이다. 이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보면 마음(心)은 희노애락과 같은 (제거되어야 할 인간의) 감정까지 포함되어 있으므로, 마음을 중시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된다. 말하자면 이는 순선(純善)이지만, 심은 선악이 함께 혼합되어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심을 인정한다는 것은 악까지 용인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주리(主理)를 위주로 하는 주자학파에서는 심을 배척하였다. 하지만 양명학에서는 이러한 선악의 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심 그 자체가 곧 양지이고 지혜라는 주장이다. ‘이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라는 선가(禪家)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명재가 불교에도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다.
집안의 구전에 의하면 명재의 중부(仲父)인 윤상거(尹商擧)가 불경에 심오한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 명재는 집안 어른이었던 윤상거와 자주 접촉하면서 불경을 공부하였고, 자연스럽게 불교 사상을 소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이 집안 사람들의 주장이다. 명재가 주자학적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심을 강조하는 양명학을 좋아했던 배경에는 유가(儒家) 집안이면서도 불교에 우호적이었던 명재 집안의 독특한 분위기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마음이 곧 양지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내면세계에 침잠해야 한다. 밖을 향해 貧??마음을 잡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벼슬이나 쓸데없는 명예에 집착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실심(實心)과 실공(實功)이 쌓인다고 명재는 주장한다. 명재가 말하는 실심과 실공은 후에 등장하는 실학(實學)과도 무관하지 않다.
공통적으로 실(實)을 강조하는 실자 돌림인 것처럼 서로 관련이 있다. 유명종 선생의 지적에 의하면 홍대용·박지원·박제가와 같은 실학자들의 사상적 기반에는 양명학이 들어 있다고 한다.(劉明鍾, ‘한국의 양명학’, 233~250쪽)
명재 이후 소론의 학풍이 대체적으로 명분보다 실질과 실용을 중시하는 실학적 기풍을 띤 것도 이런 맥락에서 조명해야 한다는 것이 이 분야 전공자들의 지적이다. 뿐만 아니라 하곡 정제두 이래 구한말의 이건창(李建昌)·이건승(李建昇)·김택영(金澤榮)을 비롯한 양명학파(江華學派)들이 독립운동에 대거 뛰어든 것도 실천을 중시하는 심학적 전통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해방 전후의 박은식(朴殷植)·정인보(鄭寅普)·송진우(宋鎭禹)도 모두 심학의 세례를 받은 인물들임은 물론이다. 단순화시켜 말한다면 명재의 심학적 노선은 하곡을 거쳐 강화학파에 이어졌고, 다른 한 줄기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까지 그 연줄이 이어지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명재가 벼슬을 거부한 이유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실심과 실공을 닦는 데 벼슬살이가 방해된다고 보았던 탓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벼슬을 하다 보면 잡사(雜事)에 시달릴 수밖에 없고, 잡사에 시달리다 보면 공부할 시간이 없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南溪와 밤샘토론한 명재
그렇다면 명재는 벼슬을 원초적으로 거부했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벼슬이란 현실에서 경륜을 펼 수 있는 기회이자 방법이기도 한데, 벼슬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세속 사회와는 담을 쌓은 은둔자였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명재는 벼슬을 거부하기는 했지만, 현실참여에 의미를 두지 않는 은둔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가 딱 한 번 벼슬에 응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55세 때인 숙종 9년(1683)이었다. 그에게 내려진 벼슬은 정3품 호조참의였다. 명재는 벼슬을 받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가던 도중 과천에 잠시 짐을 풀었다. 과천에는 동문수학한 사이인 나량좌(羅良佐)의 집이 있었다. 여기에 머무르면서 벼슬을 해도 좋을 만한 상황인가를 신중하게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괜히 얼굴마담이나 하는 자리에 뭣도 모르고 나갔다가 별다른 성과도 없이 벼슬을 그만두면 괜히 스타일만 구길 수 있기 때문이다. 과천에서 그가 만난 인물은 당대의 논객이었던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1631~95)였다. 남계는 명문세족으로서 박세당(朴世堂)·박태유(朴泰維)·박태보(朴泰輔)와 집안간이기도 하였다. 송시열의 손자 송순석(宋淳錫)이 남계의 손자사위였던만큼 정치적으로 그는 서인의 노선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후일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서게 되는 사건인 회니분쟁(懷尼紛爭)이 일어났을 때는 중간에서 탕평론을 주장하였으며, 끝내는 윤 증의 입장을 두둔하여 소론쪽으로 기울었던 인물이다. 노론과 소론이 갈라서게 된 계기인 회니분쟁이 일어난 때가 1684년이었으니 남계가 명재를 과천에서 만난 1683년은 회니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의 시점이었다.
명재는 과천에서 남계와 만나 조정에 입각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밤을 새워 토론하였다. 명재가 남계를 과천에서 만난 것도 까닭이 있었다. 숙종으로부터 ‘삼인동사’(三人同事)의 명을 받았던 탓이다. 송시열·윤 증·박세채 3명에게 정치를 전담하게 하는 왕명이 바로 ‘삼인동사’였다. 각기 개성이 다르면서도 당대의 일급 인물로 평가받았던 3명이 협력하여 멋진 정치를 해보라는 주문이기도 하였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좌청룡·우백호가 각각 윤 증·박세채였던 셈이다.
과천에서 명재가 남계와 토론하면서 입각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한 3대 명분이 있었다.
첫째, 서인들은 남인들의 쌓인 원한을 풀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외척의 세도를 막지 못하면 안 된다. 셋째, 당이 다른 자는 배척하고 순종하는 자만 등용하는 풍토도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가장 역점을 두었던 첫째 조건이 지역감정의 해소였다. 당시의 남인들, 즉 영남학파의 경상도 사람들은 경신환국을 당해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을 달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달랠 방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근래의 지역감정의 피해자는 호남이었지만 17세기 지역감정의 피해자는 영남이었다.
역사는 돌지 않는 것 같아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국 돌고 도는 장면을 많이 보여준다. 왜 역사가 반복되는 것일까. 우리가 역사로부터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 아닐까. 누군가의 표현대로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을 배워야 하는지도 모른다.
종합 교육기관 宗學堂의 면모
명재는 가해자쪽인 기호지방을 대표하는 명문세족이자 명망 있는 학자이면서도 영남 남인들의 상처를 깊이 고민했던 것이다. 명재는 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될 수 있는지 박세채에게 물었고, 박세채는 아무 말 없이 한참 있다 모두 불가능하다고 대답하였다. ‘이 세 가지 조건이 불가능하다면 나도 벼슬에 나갈 수 없다’며 명재는 집으로 되돌아와 버렸다(公之能乎 世采默然良久曰 皆不能 拯曰三者不可爲吾不可入).
명재의 결론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던 박세채도 출사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던 송시열도 역시 그 결과를 전해 듣고 속리산 뒤의 화양동(華陽洞) 계곡으로 낙향하였다. 3명이 각각 낙향해 버리자 삼인동사의 정치실험 계획은 와해되었다. 이 사건 이후 서인은 송시열의 노론과 윤 증의 소론으로 확연하게 갈라선다.
벼슬을 거부한 명재가 고향에서 한 일은 무엇인가. 현실 문제와 담을 쌓고 한가하게 놀기만 한 것인가. 아니다. 재야에 머무르면서 그가 가장 역점을 두었던 일은 교육이었다. 명재의 후진 교육은 ‘종학당’(宗學堂)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종학당은 명재의 집안인 파평(坡平) 윤씨(尹氏) 노종파(魯宗派)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교육기관이다. 윤씨들이 세운 일종의 사립학교라고 보면 된다. 즉 윤씨들의 내(內)·외(外)·처(妻)가 3족 자제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중서당,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문중 사립학교의 성격을 지닌 교육기관이었다.
한양의 성균관을 제외한 조선 시대 지방교육기관을 보면 향교·서원·서당으로 나뉜다. 향교가 관에서 세운 관립 교육기관이었다면 서원은 양반들의 사립 교육기관이었고 서당은 초학자를 위한 초급교육 시설이었다. 그런데 윤씨 집안에서 설립한 종학당은 향교도 아니고 서원도 아니고 서당도 아니었다. 윤씨 집안 사람들을 위한 사립학교였던 것이다.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종학당과 같은 성격의 교육 시설은 다른 데서는 찾아보지 못하였다. 유일하게 논산의 윤씨 집안에만 남아 있는 학교다. 교육과정을 보면 중·고등학교 과정은 물론 대학 과정까지 포함하는 규모였다. 그러니까 종학당에 입학하면 중학교에서 대학까지 모두 마칠 수 있었다고 보면 맞다.
종학당이 자리잡은 위치는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다. 윤 증 고택에서 승용차로 5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거리다. 언덕 아래쪽의 조그만 건물이 초·중 과정의 종학당이다. 대청 마루 위에는 학생들이 지켜야 할 생활지침들이 편액에 적혀 있다. 생활지침을 보면 일용(日用:하루에 할 일)·야애(夜寐:밤에 잠자는 것)·지신(持身:몸가짐의 방법)·사물(四勿:하지 말아야 할 네 가지)·독서지서(讀書之序:독서의 순서)·독서지법(讀書之法:독서의 방법) 등이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모두 명재의 글씨라고 한다.
종학당에서 중등 과정을 마치면 위로 올라갔다. 언덕 위로 올라가면 있는 ‘오가백록’(吾家白鹿)이라는 현판이 걸린 건물에서 대학 과정을 밟는다. ‘우리 집이 곧 백록’이라는 뜻이다.
‘백록’이라는 명칭은 주자로부터 유래하였다. 중국의 주자가 살던 곳의 지명이 백록동(白鹿洞)이고, 주자가 직접 가르치던 서원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이었다. 학문의 본향임을 자부하는 문구가 바로 ‘오가백록’이다.
본격적인 과거 시험인 문과시험을 준비하는 곳이었다. 건물과 바로 연결된 누(樓)가 하나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정수루’(淨水樓)다. 정수루는 오가백록의 바로 앞에 연결되어 있는 누각이다. 2층 높이인데, 그 크기가 커서 70~80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이다. 보통 누각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
문과 급제자만 42명 배출한 宗學堂
여름에 공부하던 학생들이 이 정수루에 앉으면 전망이 그만이었을 것 같다. 한가롭고 평화로운 충청도의 전형적인 산세로 둘러싸여 있다. 앞을 바라보면 저수지 너머로 윤씨 집안 어른들의 묘소가 있는 병사리가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이기도 하다. 아침에 학교에 오면 멀리 조상들의 묘를 향해 망배를 드리고 나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고 한다.
정수루를 한참 바라보다 보니 문득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의 만대루(晩對樓)가 생각난다. 정수루와 만대루는 여러 가지 면에서 흡사하다. 본채 건물 앞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 규모도 보통 누각보다 크다는 점,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한 용도의 누라는 점에서 그렇다.
종학당은 언제 세워졌는가. 명재의 중부(仲父)가 되는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1596~1668)가 문중의 힘을 모아 1618년에 세웠다. 동토는 벼슬을 해서 이름을 날리는 인생을 사양하고 뒤에 남아 주변 공동체의 배려에 힘을 쏟은 인물이다.
뒤에 설명할 ‘의전’(義田)도 그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노성리 윤씨들이 배출한 걸출한 인물은 명재이지만, 윤씨 집안의 300년 장기발전 계획을 입안한 인물은 동토였다. 학교 설립은 동토가 하였지만 종학당의 학문적인 지도는 동생이었던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1610~69)가 주로 담당하였다.
윤선거는 송시열과 학문적 논쟁을 벌였던 일급 학자였다. 노서 이후에는 아들인 명재가 맡으면서 종학당은 한층 탄탄한 기반을 갖추게 된다. 종학당 건립은 결과적으로 파평 윤씨 노종파가 기호지방의 명문세족으로 널리 알려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종학당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면서 사계 김장생을 배출한 연산(連山)의 광산(光山) 김씨(金氏), 우암 송시열을 배출한 회덕(懷德)의 은진(恩津) 송씨(宋氏) 그리고 노성(魯城)의 파평 윤씨 세 집안이 솥단지의 세 다리처럼 정족적(鼎足的) 형국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17세기 이래 조선사회를 움직였던 메인스트림이 영남보다 기호지방의 양반들이었음을 감안하면, 이 세 집안은 조선 후기에 가장 널리 알려진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종학당이 전국적 명성을 얻게 된 보다 현실적인 계기는 과거 합격자를 다수 배출했다는 부분이다.
종학당은 1618년 개교 이래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하여 강제로 폐교될 때까지 292년 동안 유지되었는데, 이 기간에 배출된 문과 급제자가 42명이다. 문과 급제자란 대과 급제자를 말한다. 요즘의 고시 합격자와 같다. 42명은 오로지 윤씨만 따졌을 때 해당하는 수다.
윤씨가 아닌 타성씨도 일부는 종학당에서 배웠다고 하는데, 타성 합격자까지 합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난다고 한다. 종학당 설립 이전에 대과에 합격한 5명까지 포함하면 47명이 된다고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한국 사람들은 고시 합격자를 검증받은 인재로 생각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에도 대학은 나오지 못해도 대통령이 될 수 있지만, 고시를 합격하지 못하였으면 아마 대통령이 되기 어려웠지 않았을까. 한국 여론지도층의 핵심부에는 고시 출신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출세하려면 고시에 합격하는 방법이 가장 현실적이다. 그만큼 고시 합격자를 공식적으로 우대하는 한국사회의 지적 전통은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다.
한 집안에서 세운 사립학교인 종학당에서 고시 합격자가 42명이나 배출되었다는 것은 기록이다. 필자는 영남·호남·충청의 유수한 집안들을 답사해 보았지만 이러한 사례를 발견하지는 못하였다. 이 집안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조선 시대 대과 합격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집안은 왕족인 전주 이씨이고, 그 다음으로 파평 윤씨라고 한다. 파평 윤씨가 460명을 배출하였다.
돈을 관리하는 방법까지 가르친 파격
전국에 거주하던 파평 윤씨 460명 가운데, 약 10%에 해당하는 47명(42+5)이 논산 노성리에 살았던 명재 집안 사람들이다. 종학당과 정수루 기둥에는 졸업생들이 대과 합격후 모교를 방문하여 적어 놓은 낙서들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집안 사람들이 기억하는 그 낙서들을 보면 ‘등과후초상루’(登科後初上樓:대과에 급제한 후 처음 누에 오르다) ‘인걸재재’(人傑在齋:인걸이 이 공부방에 있도다) ‘남풍만포’(南風萬抱:남풍을 한아름 안았다 - 큰 뜻을 품는다는 뜻) 등이다. 조선 후기 전국 최고의 명문 사립학교였던 종학당에서 이루어졌던 교육체제가 과연 어떠했나를 살펴보자. 시스템과 커리큘럼을 간추려 보면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해볼 수 있다.
1. 10세 이상의 어린 자제들을 모두 한곳에 모아 스승을 세우고 학문을 강의하여 훌륭한 인재로 양성한다.
2. 택사장(擇師長) : 종인(宗人) 중에 재주가 있고 학문에 깊은 사람을 스승으로 삼고, 자제 중에 글의 의미를 잘 터득한 자를 장(長)으로 택하여 자제를 가르치게 한다.
3. 서책(書冊) : 오경(五經)·사서(四書)·주자가례·소학(小學)·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비치한다.
4. 섬양(贍養) : 스승에게 매월 쌀 9말을, 장에게는 쌀 7말을 지급한다. 수학자(受學者)는 매월 쌀 6말과 소금·간장·채소를 바치고 학생의 의복과 급식은 의곡(義穀 : 종중 토지에서 수입되는 곡식)에서 유사가 맡아 처리한다.
5. 과독(課讀) : 10세 이상은 하루마다 과제로 공부하게 하고 30세 이상은 한 달마다 과제를 주어 학문하게 한다. 독서의 순서는 율곡 선생이 가르치시던 법에 따라 소학을 가르치고 차차 대학·논어·맹자 등으로 나가는 순서를 밟는다. 독서할 때는 본과목은 100번 암송하고 부독본(副讀本)은 30~40번 암송한다. 사서(史書)는 반복해서 날마다 사장(師長) 앞에서 암송한다. 책 한 권을 외우고 난 뒤 의문점이 없게 된 다음에라야 다른 책으로 옮긴다. 시험은 월강(月講)이라고 하여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실시한다. 학생은 독서한 책을 들고 이른 아침에 사장을 뵙고 시험을 본다. 성적이 나쁘면 벌하고 좋으면 칭찬한다. 강(講)이 끝나면 바른 행실, 중요한 일, 가정을 다스리는 일, 재화를 유리하게 운용하는 일(理財), 종회의 예법 등에 대해 토의하는 시간을 갖도록 되어 있다.
6. 재의(齋儀) : 매일 스승과 당장은 아침 일찍 기상하여 의관을 정제하고 자제들을 인솔하여 선조 산소를 향하여 재배한다.(尹鋌重, ‘파평 윤씨 魯宗 五宗派의 由緖와 傳統’, 122쪽).
여기서 네번째 항목의 섬양(贍養)이라는 표현이 재미있다. 섬(贍)자는 ‘넉넉하다, 풍부하다’는 의미인데, 봉급 또는 급료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하였다. 학장인 사(師)는 매월 쌀 9말을, 지도교수인 장(長)은 7말을 받았다고 나온다.
학생들이 매월 쌀 6말을 수업료로 내야 했다고 하니 요즘 시세로 환산하면 어느 정도나 될까. 보통 쌀 10말을 1가마라고 보면 6말은 반 가마가 조금 넘는 액수다. 학장이 월급으로 받았던 9말은 수업료인 6말에 비해 그렇게 큰 금액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섯번째 항목의 과독(課讀)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재화를 다루는 이재를 가르쳤다는 사실이다.
돈을 관리하는 법을 학교에서 가르쳤다는 사실은 당시 분위기로 보아 매우 파격적이었지 않나 싶다. 실학적 분위기가 감지되는 대목이다. 종학당이 가장 전성기를 누렸던 시기는 명재가 학장으로 있던 시기였다. 예나 지금이나 석학이 있는 학교에는 학생이 몰리는 법이다.
‘血子’와 ‘法子’
또 하나 특기할 사실은 명재의 문호 개방이다. 명재는 종학당에 윤씨뿐만 아니라 주변의 중인 집안 자제들도 받아들였다고 한다. 명재는 배움에 신분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양반·상놈 따지던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 사회적 통념을 깨고 중인 계층 자식들에게 문호를 열어 공부시켰다는 사실은 신념의 소산이다. 신념 없이는 통념을 깰 수 없다.
명재는 벼슬길에 대해서는 과도할 만큼 철저함을 보였지만 후학들의 교육길에 대해서는 과격할 만큼 개방적이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보면 명재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었던 부분은 제자 양성이었다. ‘장미의 이름’을 썼던 움베르토 에코에 의하면 인간이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저술을 남기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자식을 낳는 일이라고 한다.
필자가 보기에 자식은 두 가지 차원으로 나뉜다. 혈자(血子)와 법자(法子)다. 혈자가 피를 이어받은 자식이라면 법자는 사상을 이어받은 자식이다. 사상을 이어받은 자식인 법자는 제자에 해당한다. 피가 본능이라면 사상은 문명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논리대로라면 혈자는 죽음을 극복하는 본능적 방안이고, 제자는 죽음을 극복하는 문명적 방안이 된다.
한 지역에서 수백 년 동안 명문 집안으로 회자된 집안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심을 얻었다는 점이다. 답사를 다녀보면 인심을 얻지 못한 명문가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한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사회는 법보다 인심이 위에 있다. 설령 법망은 피해갈 수 있어도 인심의 평가는 피해갈 수 없다.
인심이 드러나는 시기는 평상시가 아니라 난리가 발생했을 때다. 인심을 얻으려면 베풀어야 한다. ‘이불가독식’(利不可獨食:이익이 생기면 혼자 먹지 않는다)의 원리다. 복잡한 사회정의 이론보다 ‘이불가독식’이 훨씬 간단하면서도 효과는 직방이다. 노성의 윤씨 집안은 주변 공동체에 대한 배려 방안으로 의전(義田)과 의창(義倉) 제도를 운영하였다.
종학당을 설립했던 윤순거는 의전 제도를 마련하였다. 윤씨 노종파는 다시 오방파(五房派)로 나뉜다. 윤순거는 이 다섯 집에 각각 논 7마지기씩을 나누어 주었다. 자기 재산 35마지기를 내놓은 것이다. 다섯 집에서는 매년 농사를 지어 소출의 일정량을 문중에 기금으로 적립하였다. 이 기금이 의전이다. 의로운 일에 쓰는 전답이라는 의미다.
이 제도는 중국 북송(北宋)대의 명재상으로 일컬어지는 범중엄(范仲淹·989~1052)이 창안한 제도다. 어떻게 보면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부의 재분배 방법이기도 하다(조선 시대에도 몇몇 사대부 집안에서 이를 실행한 사례가 나타나는데,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전북 김제 서도리(西島里)의 장씨(張氏) 집안도 18~19세기에 걸쳐 의전 제도를 운영한 바 있다). 윤씨들은 의전에 적립된 기금을 문중의 제사 비용과 각종 부조금에 사용했다. 부상(賻喪:초상집에 돈이나 물건을 보냄)으로 이불 2벌을 보낸다거나, 아이를 출산하였는데 생활이 어려운 집에는 여러 가지 쓸 밑천과 양식을 넉넉히 보내기도 하였다.
윤순거는 또한 선묘(先墓) 주변 동네사람들에게도 솔선수범을 보였다. ‘동네에 윤씨들은 입주하지 말 것(동민을 괴롭히기 쉬우므로)’ ‘동민의 집 대지와 채마밭의 소작료는 면제한다’ ‘동민이 생활을 지탱할 만큼의 전답을 임대해 준다’ ‘동민의 경조사에는 종중에서 상당량을 보조하고 대여해 준다’ ‘흉년·우환 등의 재난을 당할 때는 상당한 재원을 보조 또는 대여한다’였다.
明齋의 빈민 구휼 사업
주변 공동체에 대한 이러한 배려는 윤씨들이 당연히 이행해야 할 의무이기도 하였다. 사회적 대접과 사회적 책임은 서로 비례하는 법이다. 이후 윤씨 집안은 의전을 좀더 확대개편한 의창(義倉) 제도를 시행하기도 한다.
의전 제도는 명재가 생존했던 40년은 비교적 잘 유지되었으나 명재 사망 후에는 유명무실해진다. 그러다 1799년(정조 23)과 1802년(순조 2)에 큰 흉년이 들었다. 많은 사람이 굶어 죽고, 총각은 30세가 되어도 장가가지 못하고, 처녀는 20세가 되어도 시집을 못 가고, 초상이 나도 염을 못 하거나 출상할 기일이 되었어도 장례를 치르지 못 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에 윤광저(尹光著)·윤광형(尹光炯) 등이 발의해 의전보다 좀더 큰 규모인 의창을 설립한다. 문제는 기금이었다. 기금 조성하는 데 윤씨 집안이 거족적으로 참여한다. 윤씨 가운데 군수·현감·현령 직에 나가 있는 사람, 서울에 관직이 있는 사람, 넉넉하게 지내는 집들이 돈이나 곡물을 내놨다.
그리고 고향인 노성 현내의 크고 작은 18개 종계(宗契)에서도 돈을 갹출해 적립한 기금에서 나오는 쌀이 매년 200석이었다고 한다. 적지 않은 규모였다. 매년 200석의 쌀로 수해나 가뭄 또는 빈민 구휼 사업에 나섰던 것이다. 의창이 세워졌던 자리는 노성의 중심지인 덕보(德洑)라는 곳이다.
의창은 근래까지 유지되다가 6·25 이후 토지개혁이 이루어지면서 해체되었다고 한다. 곡물을 쌓아 놓던 의창의 창고 건물은 없어졌지만 그 자리에는 현재 의창비(義倉碑)가 서 있어 그 역사를 말해 준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이덕일 저). 역사평론가 이덕일이 17세기를 송시열의 시대로 규정하고 쓴 책이름이다. 17세기 조선의 상층 엘리트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그리고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송시열의 영향권 내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17세기의 송시열에 대항한 인물이 또한 윤 증이다.
그가 송시열에 맞서면서 소론의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는가. 도덕적 카리스마라고 본다. 카리스마 없이도 참모는 될 수 있지만 지도자가 되기는 어렵다. 카리스마 가운데 최고의 카리스마, 가장 오래 가는 카리스마는 무엇인가. 도덕성이다. 명재의 도덕적 카리스마는 그가 일상생활에서 보여준 처신에서 풍겨져 나왔다.
‘종족(宗族)이 촌민을 부역시킴으로써 원망을 사게 되면 선생은 글로 타일러 말씀하시기를 ‘노성은 곧 선대 이래 100여 년간 일찍이 남에게 원망이나 미움을 사며 산 일이 없다. 지금은 족인(族人)이 많고 사람이 여럿이어서 혹 시골에는 눈치껏 폐를 끼치는 이가 없지 않으나 아무쪼록 크게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심조심해서 우리 선세(先世) 때 남기신 유훈을 더럽히지 않게 하기 바란다. 장사(葬事)지낼 때 사람의 힘을 빌리는 일은 진실로 부득이한 일이나, 사사로운 부역은 지금부터 일절 중지하고 자기 극기 정신을 발휘하여 가법(家法)을 지키도록 하기 바란다’고 하였다.’(‘明齋言行錄’, 62쪽)
‘양잠하는 것을 금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利)를 따라 행하면 원망이 많다. 우리 가문이 선대 이래 남에게 원망을 듣지 않은 것은 추호도 남의 일을 방해하지 않았던 데 있다. 이는 자손들이 마땅히 삼가 지켜야 할 일이다. 요즘 민원(民怨)의 큰일은 양잠하는 일이다.
집에서 뽕나무를 심지 않고 양잠을 한다면 노비를 시켜 뽕나무 있는 집으로 나가 훔치고 약탈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니, 이것이 자기만 이롭고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는 일이라 아니하겠는가. 이번에 종중과 더불어 약속할 것은 지금부터 뽕나무를 심지 않은 집은 양잠을 하지 않아야 훔치는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모름지기 동네 사람들의 원망과 단절하는 일이 되게 하라. 양잠을 안 하면 도적질의 폐단도 끊을 수 있을 것이고, 향민(鄕民)들의 원망도 그칠 것이다. 각자 조심하고 생각해서 가법을 잃지 않게 하라’ 하였다.’(‘明齋言行錄’, 63쪽)
보리밥에 볶은 소금으로 연명하기도
‘남에게 원망이나 미움을 살 행동을 하지 말라.’
‘자기만 이롭고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는 일을 하지 말라.’
명재는 집안의 어른으로서 친족들에게 엄명을 내린 것이다. 양반이라고 해서 힘없는 민초들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명재의 결단력. 마음 속으로부터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카리스마다. 명재의 일상생활도 그러하였다.
명재가 평소 거주하던 집은 현재의 윤 증 고택이 아니다. 4km 정도 거리에 위치한 유봉영당(酉峰影堂)의 바로 옆 공터가 그가 살던 집터였다. 명재는 초가삼칸을 짓고 소박하게 살았다. 하루는 제자가 찾아가 보니 그 초가삼칸마저 무너져 긴 나무로 떠받쳐 지탱하고 있었다. 그러한 집에 거처하면서도 책이 선반에 가득 차 있고, 주변에서 제자들이 나열해 모시니 은은한 기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평소의 식사도 보리밥에 반찬으로는 볶은 소금과 고춧가루만 먹는 때도 많았다. 인근의 관리들이 인사드리러 찾아와 식사하는 경우에는 꽁보리밥과 볶은 소금을 명재와 같이 먹어야만 하였다.
차마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 거친 음식이었지만 어른이 잡숫고 계시므로 어쩔 수 없이 먹어야만 하였다. 관리들은 식사를 마치고 나서 동구밖 느티나무쯤을 지나갈 때면 모두 토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맛있는 반찬에 길들여진 관리들의 위장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명재의 영정만 해도 그렇다. 명재는 평소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지 못하게 하였다. 초상화는 돈이 많이 들어가는 사치스러운 작업이라고 여겼다. 현재 전해지는 두 종류의 초상화는 어떻게 그릴 수 있었는가. 명재의 모습을 화가가 문틈으로 몰래 보고 그려야만 하였다. 문틈으로 보면서 그리다 보니 측면 얼굴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후손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면의 얼굴 모습은 옆 얼굴 그림을 보고 다시 그린 작품이다. 측면도가 실물그림이고 정면도는 2차 작업이었던 셈이다. 그래서인지 측면과 정면의 두 가지 명재 초상화 가운데 측면도가 정면도보다 훨씬 잘 그린 것 같다.
명재의 관상 중에서 무엇보다 코가 인상적이다. 힘이 있으면서도 길게 내려왔다. 관상에서 말하는 용비(龍鼻)의 전형적인 형태다. ‘마의상서’에 보면 용코는 대귀할 상이라고 나온다. 결단력이 탁월함을 상징한다.
그의 삶은 어려운 결단의 연속이었고, 그 결단력이 난세에 자신은 물론이고 노성의 윤씨들이 품위를 잃지 않는 밑바탕이 되었다. 그 용코가 상징하는 이미지를 잘 포착한 초상화가 측면에서 그린 얼굴 모습이다.
명재 집안의 당당한 가풍은 윤 증 고택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현재의 윤 증 고택은 명재가 살았던 집이 아니다. 명재의 첫째 아들인 윤행교(尹行敎)가 살았던 집이다. 명재의 말년 즈음에 둘째인 윤충교(尹忠敎)가 장손이자 형님인 행교를 위해 1709년에 지어준 저택이다. 명재가 죽기 5년 전인데, 명재는 유봉에 살면서 이 집을 가끔씩 왔다 가는 정도였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한다면 윤행교 고택이라고 해야 맞다.
6·25때 폭격을 면한 사연
그런데 이 고택의 특징은 담장이다. 건축 전문가들에 의하면 윤 증 고택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사랑채의 담장이 없다는 점이다. 담장이 없으므로 외부인이 곧바로 사랑채에 도달할 수 있는 개방적 구조다. 담장을 없앤 까닭은 무엇이겠는가.
‘누구든 올 사람은 다 오라’ ‘누구든 보고 싶으면 모두 와서 보라’는 무언의 메시지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금전적 손해를 보더라도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양잠을 하지 말라’는 평소의 처신이 담장을 없애버리는 자신감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담장이 없는 사랑채를 보면서 동학과 6·25는 어떻게 넘겼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명재의 12대 후손인 윤완식(尹完植·1955~) 씨. 서울 강남에서 물류업체(남양물류)를 운영하고 있다. 종손이었던 형님이 몇 년 전에 작고하는 바람에 현재 봉사손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문중회의에 의하여 그의 아들인 형섭(炯燮:현재 중학교 1년)이 작고한 형님의 양자, 즉 13대 종손으로 입양될 예정이다. 완식 씨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주 서울에서 논산까지 내려가 고택에 머무른다. 집안에 일이 있을 때는 1주일에 두세 번도 마다않고 서울에서 내려와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명문가의 후손 노릇 하기도 쉽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동학이나 6·25때 피해는 없었습니까.”
“어른들로부터 거의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좀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시죠.”
“동학 때는 동학군들이 양반들 잡아다 주리를 많이 틀었다고 합니다. 평소 양반들에게 맺힌 것이 많았던 것이죠. 하지만 저희 집에는 동학군이 가까이 오지 않았다고 해요. 가까이 오면 집사람들이 놀라니까 놀라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였던 것이죠. 6·25 때는 저희 집이 큰 집이라서 인민군들이 사무실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미군 비행사들도 이 사실을 알았다고 해요.
그런데도 미군으로부터 폭격당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저희 동네에 살았던 박희동(朴熙東)이라는 사람이 당시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는 공군 장교였습니다. 후일 장군도 지내는데, 당시는 제트기 조종사이기도 하였죠. 이 사람이 같이 근무하는 미군 조종사에게 윤 증 고택은 절대 폭격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합니다. 인근에서 존경받는 어른 집이니 폭격하면 안 된다고 사정했다고 해요. 6·25때 저희 집안 사람들 가운데 다친 사람은 없습니다. 조상들이 쌓아 놓은 음덕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명재 이후에도 집안의 가풍이 쭉 이어져 왔다고 보십니까.”
“이어져 왔죠. 저의 증조부인 윤하중(尹昰重) 할아버지가 구한말에서 일제 시대에 걸쳐 살았던 분입니다. 1939년 흉년이 들어 주민들의 생활이 어려웠답니다. 이를 돕기 위해 일부러 공사를 벌였습니다. 노성과 상월의 신작로에 석축을 쌓는 공사였습니다. 석축을 쌓는 데 참여한 동네사람들에게 노임으로 쌀을 주었습니다.
그냥 쌀을 주기보다 노동을 한 대가로 주는 방법이 서로 부담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일종의 구호사업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가 하면 가을 추수철에는 저희 집 들어오는 진입로에서 집 앞까지 며칠 동안 나락을 쌓아 두었습니다. 밤에는 동네 사람들이 가져가도 일부러 모른 체 했습니다. 밤에 가져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이 어른의 적덕(積德)으로 저희 집안이 6·25때 전혀 인명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봅니다.”
천문학을 연구했던 9대손 윤하중
명재의 9대손인 윤하중은 천문학을 연구한 독특한 인물이다. 호도 이은시사(離隱時舍)다. ‘세속을 떠나 은둔하면서 천시(天時)를 연구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현재 사랑채의 편액 글씨로 걸려 있는 ‘이은시사’도 알고 보면 그의 호다. 그는 1910년에 24시간제 해시계를 독자적으로 제작하였고, 한문으로 된 ‘성력정수’(星曆正數)라는 천문학 저서를 내기도 하였다.
성력정수는 동양과 서양의 역법을 꼼꼼하게 대조한 책이어서, 전문적인 천문학 지식이 없이는 이해하기 어렵다. ‘동아일보’ 1938년 12월16일, 19일, 24일자 기사에서 연거푸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그 요지는 서기 원년 1월1일부터 병자년(1936년) 말일까지 현행 역법은 1일 8시간 16분의 착오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1년이 365일 5시간 50분이 원래 맞는데, 365일 5시간 49분으로 계산한 데서 생긴 착오라고 주장한다. 1분의 오차가 누적된 결과라는 이야기다.
그는 2000년대가 오면 환경이 오염될 것을 걱정하였고, 주판의 시대가 끝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고 한다. 주판의 시대란 아날로그 시대를 말한다. 후손들은 아날로그가 끝나고 디지털 시대가 온다는 예언으로 해석한다. 사랑채 앞의 댓돌 옆에는 네모진 모양의 시멘트로 만든 표석이 하나 있다.
글씨가 약간 지워지기는 하였지만 ‘일영표준’(日影標準)이라고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해시계의 영점을 잡는 용도였다는 설명이다
윤 증 고택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사랑채 앞의 조그만 석가산(石假山)이다. 사랑채에 앉아 마당쪽을 내려다보면 40~50cm 정도 크기의 돌들을 세워 놓았다. 그냥 돌이 아니고 석가산이다. 수석들을 조성해 놓고 이를 산으로 여기고 감상하도록 되어 있다. 후손들의 설명에 의하면 이 석가산은 금강산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한다. 사랑채에 한가하게 앉아 이 석가산을 보면서 금강산을 생각하였다는 말이다.
이 집의 사랑채에 붙어 있는 마루는 유난히 높다. 전망을 감상하기 위한 배려가 숨어 있다. 여름날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마루에 앉아 멀리 동남쪽을 바라보면 계룡산의 암봉들이 눈에 들어오고, 눈을 내리깔고 정원쪽을 보면 금강산이 들어오도록 장치가 되어 있는 셈이다. 멀리 보면 계룡산이요, 가까이 보면 금강산이 아닌가. 그래서 사랑채 옆에 걸린 편액 글씨도 ‘도원인가’(桃源人家)로 되어 있다.
‘무릉도원에 사는 사람의 집’이라는 의미다. 대단한 호기가 느껴지는 작명이다. 어째서 이 집이 무릉도원이냐고 물어 보니 “금강산 봉우리의 구름 위에 떠 있는 집이니 무릉도원 아닙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 대답을 들으면서 ‘소이부답심자한’(笑而不答心自閑)이 되었다.
이 집에는 금강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원의 화단을 둘러싼 돌들도 자세히 세어보니 12개다. 그 돌 하나하나는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을 상징하는 돌이라고 한다. 무산십이봉에 맞추어 12개의 수석들을 배치한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중국의 무산십이봉을 직접 가보지는 못하였겠지만 그 명성은 식자층 사이에 널리 알려졌던 것 같다.
나는 우샤(巫峽)을 보기 위해 몇 년전 충칭(重慶)에서 출발하여 이창(宜昌)에 이르는 양쯔(揚子)강 크루즈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양쪽으로 깎아지른 절벽들 그리고 급박하게 흐르는 황토 빛 강물을 보면서 장강삼협(長江三峽)을 정처 없이 흘러가다 보면 무협지의 강호(江湖)라는 표현이 가슴으로 절절히 다가온다.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삼협 가운데 구탕샤(瞿塘峽)이나 시링샤(西陵峽)보다 무협이 주는 풍광이 가장 압권이라고 느꼈다.
옛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사랑채 앞의 무산십이봉 옆으로는 샘이 하나 보인다. 윤 증 고택의 중심부와 거의 일치하는 지점이다. 이 샘은 풍수적으로 보면 아주 좋은 자리다. 혈구(穴口)에 해당하니 말이다. 혈구가 있어야 터에 기운이 모인다고 본다.
“밥은 안 먹어도 청소는 하자”
그 위치도 좌우로 치우친 지점이 아니고 정중앙에 있어서 제대로 된 혈구다. 건축학자는 집의 구조를 보고, 조경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석가산을 보지만, 풍수가는 샘의 위치를 본다. 관점이 각기 다르다. 한 사람이 통·반장 다 하기는 어려운 일 아니겠는가. 현재 이 고택은 12대 종부인 신정숙(申貞淑·59) 씨가 살림을 하고 있다. 부지런히 고택을 관리하는 탓에 집에서 윤기가 난다. 3,000평의 대지에 50여 칸에 이르는 한옥을 관리하는 일과는 매우 고단한 일이다.
명재 집안 종부라는 사명감 하나로 이 고단한 일과를 감수하고 있다. 종부의 신조를 물어보니 “밥은 안 먹어도 청소는 하자. 남의 눈에 나지 않게 살자”는 것이란다. 옛날에야 하인도 많고 전답도 많았지만, 전답도 사라지고 하인도 사라진 시대인 지금은 종부들이 직접 쓸고 닦고 방문하는 손님들을 맞아야만 하는 상황이다. 프라이드와 사명감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명재 집안의 여러 가지 일들을 재정적으로 가장 많이 뒷받침해준 사람은 한국야쿠르트 윤덕병(尹德炳·77) 회장이다. 종학당·유봉영당 등을 비롯한 문중 건물들을 수리할 때면 거의 윤회장이 사재를 털어 기금을 마련하였다. 그는 명재의 8대 후손이다. ‘백의정승’으로 당당하게 살았던 명재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특히 명재의 소탈하고 깔끔한 처신을 닮으려고 노력해 왔다는 것이 문중 사람들의 평가다. 후손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양중(亮重·前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장) 호중(豪重·(주)한국야쿠르트 전무) 석영(錫永·前삼성그룹 전무) 석근(錫根·컴퓨터프로그램심의조정위원회 위원장) 석하(錫夏·(주)한국제분 사장) 석만(錫萬·(주)거산 사장) 여경(汝慶·前동일방직 전무) 여황(汝璜)·前서울시보건환경연구원 과장) 여상(汝相·(주)위드공영 부사장) 여환(汝煥·前공영사) 여준(汝俊·Lotus International Co (U.S.A) 이사) 여원(汝元·현대증권 지점장) 정호(廷鎬·(주)삼성테스코 매니저) 원식(元植·(주)논산농산물수출물류센터 사장) 홍식(洪植·태종개발(주) 부사장) 영식(榮植·(주)한성운수 부장) 종식(宗植·국민은행 지점장) 완식(完植·(주)남양물류 이사) 춘식(春植·연세대 의대 교수) 면식(勉植·한국은행 차장) 호식(湖植·공학박사(Inntone co, Ltd. U.S.A)) 의식(義植·원자력연구소 연구원(공학박사)) 현식(賢植·삼성전자) 용섭(龍燮·농협중앙회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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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의 명가④]충남논산明齋윤증古宅-宗學堂 |작성자 맘착한 토끼아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