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가시고기
푸른 5월의 마지막 주말 오후 8시, 서울역 만남의 장소에는 눈에 익은 얼굴들이 삼삼오오 모여 벌써 동해의 푸른 파도 위에 이야기꽃을 두둥실 띄우고 있었다.
‘아빠와 함께 추억여행 5학년 희망 홍길동’이라고 또렷하게 인쇄된 이름표가 아빠들 목에 걸려 있으니 눈으로 통성명은 되었기에 금세 다정한 이웃사촌들의 모습들이다. 배웅 나온 엄마 얼굴이 하나 둘 셋.......
멋쩍은 듯 뒷전에서 엉거주춤 하더니만 순식간에 넷 ,다섯, 여섯.......
어느새 한 집단을 이루어 응원부대의 당당한 모습이다.
어쩌랴. 가장(家長)이 아이 데리고 무박2일의 대장정에 출정하면서 모처럼 꿀맛 같은 휴가 보너스를 받은 처지에 현관에서 다녀오라 배웅할 수 는 없는 일 이었을까?
고작 이틀 동안의 별리건만 이역만리 머나먼 여정으로 출발하는 가족을 보내는 마음인양 개찰구를 빠져나와 계단을 내려가는 내 자식과 남편의 머리끝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는 응원부대들의 뜨거운 배웅에 콧잔등이 찡하였다. 목에 걸고 있는 명찰 뒷면마다 열차 호수와 좌석을 찾아 앉으니 인솔교사들은 할 일이 없어 민망해 하는 모습들이다. 아이들과 나란히 앉자마자 의자를 회전시켜 마주 앉아 친숙한 가족처럼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아빠들의 지혜로움으로 기차 안은 한결 따뜻해졌다.
‘우리 열차는 정동진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우리 기차에는 신광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아빠와 함께 동해바다에서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본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낭랑한 안내방송과 함께 기차는 기운차게 달렸다.
그림자들이 길게 누워 석양을 향해 작별인사를 한다. 고갯마루를 치닫는 기차의 거친 숨소리가 애처롭다. 그래도 기차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에서 힘을 얻어가며 달리고 또 달렸다. 다정스럽게 책을 펼치고 있는 부자, 레시버를 나누어 귀에 꽂고 음악 감상에 심취되어 있는 부녀, 환한 얼굴로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이웃사촌들도 ‘아빠와 함께 하는 기차여행’을 만끽하고 있는 모습들이다.
그들은 KTX의 경쾌한 속도감에 익숙해져 있을 터이지만 거북이걸음 하는 야간열차가 어둠속을 숨 가쁘게 달리는 동안에도 지루하지 않은 모양이다. 꺼질 줄 모르는 아이들의 즐거운 재잘거림을 들으며 학창시절 수학여행의 향수에 젖은 듯 차창 밖으로 시선을 놓아버리며 침묵하다가도 아이들과의 대화에 진지하게 참견하는 아빠의 모습이 아름답다.
칠흑 같은 어두움을 용을 쓰며 버겁게 기어오르는 기차의 신음소리가 몇 번이나 거듭하는 동안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뒷덜미가 뻐근해 진다. 도착역을 알리는 안내방송마저 졸리는 목소리에 시계바늘은 자정을 넘어 있었다. 아빠들의 목소리도 지쳐갔다.
지쳐있는 아빠 곁을 슬쩍 빠져나와 끼리끼리 모이는 아이들. 뭐가 그리 재미있으며 무슨 얘기가 그렇게 많이 쌓여있는지 모를 일이다. 기차좌석 틈바구니에 들어가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듯 재잘거리는 사이에도 기차는 쉬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렸다. 샘물처럼 솟아나는 아이들의 활력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정동진(正東津)’ 종착역을 알리는 안내방송에 눈을 뜨고 커텐을 젖혀보니 어두움 속에서 졸고 있던 등대가 반갑게 손짓한다. 기차가 멈추었다. 아빠의 어깨를 잡아끌며 아이들이 재촉한다. 새벽 4시10분을 가리키는 시계탑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부터 자유스럽게 아침식사를 하시고 6시 50분까지 버스주차장에 모여 주십시오.”
귀에 익은 선생님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새벽공기를 가른다.
넓은 바다가 출렁이며 토해내는 잿빛 물보라와 모래밭이 잿빛 하늘과 이어져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 주는 여명이다. 어느새 훨훨 날아갔는지 바닷물에 손을 담그거나 모래밭을 거니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칙칙하게 드리워진 하늘은 일찌감치 해님을 감추고 있었다. 일출의 장엄함은 삼대가 적선하지 않고서는 보기 어렵다 했으니 일찌감치 포기해야 할 일인 듯싶었다.
동해물이 마르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신 우리의 조국’ 불현듯 애국가를 불러보았다.
새벽바다 수평선, 희미한 여명과 아스라이 출렁이는 까만 용틀임을 보며 아, 이곳이 아침이 아름다운 우리 조선의 땅이로구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행여 일출의 기대를 어느새 시꺼먼 구름천막이 부지런히 덮어버린다. 잿빛 하늘을 뒤로하고 아침식사를 위해 뿔뿔이 흩어졌던 일행들이 다시 모여 아홉 대의 버스에 오를 때까지 동해물 위로 아침 해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슬라의 예술정원’ ‘하늘전망대’와 ‘시간의 광장’을 돌아보는 동안에도 아이들의 정력은 식지 않았다.
오히려 이리 저리 아빠의 손을 이끄는 모습들이다. 새벽하늘의 맑은 공기는 시들어가는 이파리의 단비처럼 우리 일행들에게 활기를 넣어 주었다.
‘천곡 천연동굴’을 향해 버스에 올랐다. 천곡동굴까지는 한 시간이 소요된다는 안내를 듣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 눈을 감는다. 조용했다. 눈을 무겁게 감아버린 아빠에게 미안했던지 아이들의 목소리마저 꺼져가는 촛불처럼 하늘하늘 거렸다.
그새 꿈나라로 유영했던 아이들을 깨우는 아빠들이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천곡동 동굴,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아이들마다 제법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숙연해진다. 다리가 아프다면서 아빠의 등에 업혀 다니던 아이들도 동굴을 빠져 나와 핼멧을 벗어 반납하는 얼굴에는 오지의 탐험이라도 한 듯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동해역에서 서울행 기차를 타는 시각까지 3시간이 남은 여유로운 자유시간이다. 교사들이 아이들만을 인솔한 움직임이었다면 자유 시간을 주는 일이 가당치나 할 일인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아빠 손을 잡고 제각기 음식취향 따라 흩어졌다. 동해역 주변에는 여러 종류의 음식점이 널찍하게 퍼져있어 다행스러웠다. 세 시간이나 되는 자유 시간을 어디서 보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시간 맞춰 기차에 올라와 보니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었다. 역시 아빠들은 훌륭한 인솔자들이었다.
기차가 미끄러진다. 하룻밤 쉬면서 기운을 차렸는지 힘차게 움직인다. 달린다. 서울로. 또 7시간동안 기차를 타야 한다. 자야지. 충분히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차창을 뚫어오는 햇빛을 차단하기에는 눈꺼풀이 너무나 얇았다. 이리 저리 뒤척거려보았지만 도무지 깊은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있는 몇몇 아빠의 모습이 한없이 부러웠다. 오죽이나 피곤하랴. 자식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어 엉겁결에 주말을 잃어버린 아빠들의 속마음을 아이들이 알고 있을까?
쉿! 아이들아. 떠들지 말고 소곤거려라. 깊은 잠 흔들어 일으키지 마라라. 지난 어린이날엔 너희들을 위해 뛰었고 어버이날엔 할머니를 위해 뛰었단다. 그것뿐이랴. 너희들 앞에선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잠을 빼앗겨도 피곤치 않다면서 너희와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덩달아 걷고 또 뛰어야만 했단다. 깊은 잠 흔들어 깨우지 마라. 아빠들은 5월을 잔인한 달이라 한단다. 너희가 어른이 될 때까지 아빠는 알맹이 다 빼 주고나면 부석부석 껍질만 남을 가시고기가 될 터, 할아버지가 아빠에게 하셨던 것처럼..........
집안의 어른을 뜻하는 (家長)이라는 말이 요즘은 가장 힘들고 가장 고생을 많이 한다는 뜻에서 가장이라 한 듯싶구나. 제발 조용하거라.
아빠들이 단꿈을 꾸고 있으니 아이들은 어쩌랴. 어느새 인가 활기를 찾은 아이들이 의자를 돌려 등받이가 마주하면서 생겨난 세모모양 굴속이 숨바꼭질의 안방인 것을. 해처럼 밝은 아이들은 시간가는 줄 모른다.
원주역에 도착했다는 방송과 함께 나누어주는 도시락이 꿀맛이었다.
어느새 청량리를 거쳐 용산역을 지나 서울역에 도착하여 개찰구로 빠져나오니 눈에 익은 얼굴들의 마중행렬이 즐비했다.
한꺼번에 우르르 쏟아져 나왔기에 정겨운 마지막 인사는 눈으로 마음으로 주고 받았지만 아이들 눈망울 속에는 아빠와 함께 했던 기차여행은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되어 있었다.
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아이들과 함께 대합실을 빠져나가는 아빠들의 등 뒤로 소리 없는 박수를 많이 보내 드리고 서울역 광장에서 바라보는 남산너머로 5월의 끝자락이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었다.
전 금 종 (全 金 鍾) 신광초등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