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청운의 꿈 고 3 때 대학진로로 고민하는데 아버지는 돈이 없으니 막내 작은 아버지처럼 육사나 가면 돈도 안 들고 좋겠다고 하셨 다. 둘째형은 약사이시니까 앞으로 국민소득이 높아지면 설탕류를 많이 먹어 치과치료를 많이 받을 것이니 치과대학이 전망 있다고 하셨다. 하지만 생명이는 1973년 미국의 닉슨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침술 마취하는 장면을 TV로 보 는 순간 한의과를 가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큰 누나네 한의원에 근무하시는 한의사 우 선생님을 찾아가 한의과 대학을 가 고 싶다고 하니 잘 생각했다며 적극 추천하셨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1차, 2차 낙방을 하고 서울 동숭동 둘째 큰집에 무작정 찾아가 여기서 재수를 하겠다 고 같은 재수생인 사촌과 함께 재수학원을 다녔다. 더운 여름 어느 날 머리를 감는데 영국제 하얀 아이보리 비누가 너무 좋아 보여 그것으로 머리를 감았다가 큰어머니에게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호되게 혼난다. 그게 얼마나 비싼 비누인데 그 걸 썼다고 저녁 내내 혼났다. 그 후로 입술을 깨물며 “3당4락” 즉 3시간 자면 대학에 가고 4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각오로 열심히 재수를 하여 3번 만에 경성대학 한의과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대학교 1학년 때는 위암에 걸리신 둘째 큰 아버지를 간호하며 어떻게 하면 집안의 내력인 암을 치료할 수 있을까 고민 을 하였다. 생명의 고모 큰아버지 작은 아버지 오촌 당숙들이 모두 같은 종류의 암은 아니지만 사고 외에는 모두 암으로 돌아 가셨다. 결국은 스트레스가 주범이라고 느껴 정신과를 전공하여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연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당시엔 미팅에 나가 다른 대학 여대생에게 한의학과를 다닌다고 하면 한문을 배우는 데냐? 며 무엇을 공부하는 과 인지 모를 정도로 인식이 낮았다. 어느 친구는 시골서 공부를 잘 했는데 할머니한테 한의학과 들어갔다니까 왜 하필이면 침쟁이냐? 며 부엌에서 불을 땔 때 쓰는 나무인 부지깽이를 들고 다니며 계속 혼내시더라고 할 정도로 그 당시엔 인기가 없었다. 또 한의학을 전공하며 동양철학에 바탕을 둔 한의학과 과학을 바탕으로 하는 의학 사이에 갈등을 수없이 겪으며 방황했다. 그러다가 어떤 친구는 결국 다른 과로 전과하거나 다시 재수해서 의대로 가는 친구들도 많았다. 1학년 때는 셋째 형님 댁에서 대학을 다녔다. 그 당시 학생이 여행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여행이 라곤 정주와 곶대골을 벗어나지 못하고 20여년을 살아온지라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대학생이 되면 자유롭게 여행을 하고픈 소망이 강했다. 여름방학에 친한 친구 장현빈과 약 20일간 무전여행을 계획하고 짐을 싸는데 셋째형수는 밥 굶지 말라고 쌀을 1말 정 도 싸 주시는데 배낭을 메고 일어서자 허리가 휘청할 정도였다. 제1목표는 설악산 대청봉을 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영동 고속도로도 없어 완행버스를 타고 아침 8시에 마장동에서 출발하여 오색 약수터에 도착했다. 가는 도중 비가 오다 개기를11번은 반복을 하며 무지개가 떴다 억수같은 비가 오기도 하기를 반복하다 저녁 6시경에 도착하였다. 우선 내설악 개울 가에 텐트를 치고 저녁을 해먹고 누우니 하늘이 맑아져 밤하늘에 별들이 가득 차 나에게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튿날 설 악산 등정에 올랐다. 중턱 쯤 올랐을 때 현빈은 배가 아프다며 걷지를 못한다. 한참을 쉬었다가 진정이 되고서야 정상을 오를 수 있었다. 산을 넘어 외설악에 도착하여 하룻밤 자고 다시 소백산에서 한문공부를 하고 있는 ‘고전독서동아리’를 찾아 희방사로 출 발하였다. 기차를 타고 어둑어둑해 질 무렵 암자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천문대를 올라갔다가 내려 오기도하고 2일후 현빈은 더 이상 여행을 못하겠다며 눌러 앉았다. 3일후 혼자 영주로 나가 완행열차를 타고 대전에 내려 3시간을 해남까지 가는 기차를 타고 19시간 만에 새벽 4시에 도착했다. 너무 어두워 해남역 대합실에서 잠시 눈을 붙인 후 혼자서 우물이 있는 곳을 찾아 나섰다. 마침 석수장이가 있는 돌간에 새벽에 도착하여 밥을 지어 먹고 또 버스를 타고 땅 끝 마을 다른 친구들과 진교수가 이끄는 무의촌봉사단을 찾아 갔다. 겨우 겨우 도착하니 전라도 사투리로 뭐 라고 뭐 라고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천천히 알아보니 봉사활동은 끝나고 섬으로 배타고 놀러 갔단다. 저녁에 돌아 올 것이라고 하여 3-4시간을 기다린 끝에 일행을 만났다. 정말 힘들게 조우하여 반갑게 회포를 나누고 하룻밤을 자고 배로 목포로 나왔다. 목포에는 같은 동급생 진우가 산다, 진우가 부둣가에 나와 맞아주었다. 육지에서 살아 생선을 말 모르는 생명은 다른 사람들이 회 초밥을 시키는데 덩달아 회 초밥을 시켰다가 너무 매워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고추냉이를 빼고 먹으라고 하나 빼내도 역시 맵기는 마찬가지다. 저녁 식사 후 들어간 여관방은 2층이었는데 부둣가에서 불어오는 비린내에 속이 미식 거린다. 결국은 그 비린내보다는 화장실 냄새가 더 낫다고 생각되어 화장실에 머물기도 했건만 결국은 2층 창가에서 바람을 쐬다 속의 내용물이 분출하여 땅으로 쏟아 내렸다. 여관주인은 깜깜한 밤이라 무엇이지 모르고 거 2층에서 쓰레기를 밖으로 버리면 안 된다고 소리를 친다. 그 러자 "네 버리지 않을 게요" 라고 대답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이어 봉사단에서 만난 광종과 함께 백양사를 넘어 내장산을 넘기로 하고 일행과 또 헤어졌다. 산을 넘어 부여에 도착한 생명은 백마강 강변에 텐트를 치고 점심을 먹고 나니 광종이 부여에 사는 친척을 만나러 간다고 시내로 나갔다. 혼자서 저녁 을 해먹고 기다리고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자 “백마강 달밤에...”라는 유행가가 절로 나온다. 강가에 어둠이 짙게 깔리고 10시가 다되어 헛기침 소리가 들리고 광종이 돌아왔다. 이튿날 서울행 열차를 타고 거의 20여 일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경성대학 2학년 봄에 생명의 부친 이복환의 회갑잔치를 벌렸다. 요즈음은 60살인 회갑에도 청년 같아서 창피하다고 잔 치를 안 하지만 그때 늘 병약하던 아버님이 60세를 넘기셨다는 것은 잔치를 성대하게 할 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부친은 85세에 자전거를 타고 밭에를 갔다 오시다가 동네 분을 만나 자전거에서 내려서 걸어오시다 방심하신 사이에 자 전거의 핸들에 가슴을 받쳐 갈비뼈가 5개나 부러져 합병증으로 폐렴이 오시기 전까지 건강하게 오래 사시다 돌아가셨다. 옛날 말에 부자가 떵떵 거리며 산다고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잘 살아 잔치를 할 때 장구를 칠 때 떵 떵 거리는 소리를 많이 낸다 하여 떵떵거린다고 했다. 회갑잔치를 3일간 잔치를 성대하게 치렀으니 부친은 시조를 잘 읊어서 좌중을 즐겁게 해드렸다. 또 국악을 하는 소리꾼 을 3명, 국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도 3명 불러 흥을 돋우었다. 문제는 국악기에 맞추어 창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 국악기로 대부분의 친척이나 동네 분들이 뽕짝을 연주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서울에서 생명의 동창들이 남자3명 여자 2명이 내려왔다. 그 당시 곶대골에 전기는 겨우 들어왔지만 버스는 저녁에 들 어와 자고 아침에 나가는 정도 1회뿐이었다. 그래서 이 친구들이 낮에 도착하여 버스를 기다릴 수 없으니 6 Km를 걸어서 도착하였다. 이 친구들은 생명이 '정말 개천에서 용이 났다' 며 이 정도 시골 출신인지 몰랐다며 골려댄다. 저녁을 먹고 사 랑방에 앉아 전북 완주 시골에서 자란 김칠수의 어린 시절의 추억담을 밤새도록 이야기 하는데 배꼽을 잡고 웃었다. 시골 에서 흔히 있는 참외서리 하다 들켜 맞은 이야기, 들에 나가 종달새 알을 주어다 구워 먹으려다 깨뜨린 이야기, 밤에 참새 를 잡으려고 처마 밑의 구멍에 손을 넣었더니 구렁이가 잡혀 기겁한 이야기 등을 들었다. 그에 비하면 생명은 어린 시절 늘 애 늙은이처럼 모범생으로 자랐다. 기껏 형님들이 배우고 난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서들을 호기심에 읽어 보는 정도일 뿐 겁 많고 착실하기만 했던 초 중고등학교 생활이 좀 후회스러웠다. 어린아이 때는 개구쟁이처럼 뛰어 놀며 추억을 간직 했어야 하는데... 생명은 국제적인 한의학자가 되려면 미리 외국어 공부를 잘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이미 배운 영어, 독일어, 불어 외에 중국어, 일본어, 스페인어를 교육방송 라디오를 통하여 독학으로 배웠다. 군대에 가서도 아침에 업무가 시작되기 전에 일찍 일어나 라디오를 통하여 계속 공부하였다. 이는 훗날 기공에 관련된 중국책을 번역하여 책을 3권 내게 되었고 한의 학을 세계에 알리고 세미나에 참여하여 학자들과 학문적 교류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또한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은 대 뇌에서 운동을 할 때처럼 혈액순환을 풍부하게 해준다는 소신을 갖고 열심히 하였으며 심지어 나중에는 러시아어에도 도 전하게 된다. 또한 ‘훌륭한 한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동서양 철학을 다 해야 한다.’ 고 믿고 서양철학에 관심을 갖고 철학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심리학 쪽의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특히 동서양을 아우르는 문학인 헤르만 헷 세의 작품에 빠져 전집을 독파하게 된다. 큰 누나 네는 영등포에서 한의원을 하는데 2학년 때는 그 집에서 학교를 다니며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6살 아래인 쌍둥 이 조카들의 과외를 해주고 떳떳하게 밥을 얻어먹고 용돈을 받게 되었다. 한의원에서 만난 재야 유학자출신 한의학자 신 선생님을 만나 한의서 <의학입문>을 도제 형식으로 사사받게 되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설명을 듣고 원문을 외우는 옛날 서당식 공부를 하게 되었다. 특히 <의학입문>의 구절 가운데는 주역공부를 한 이후에 한의학공부를 해야 한다는 구절에 감명을 받아 실제로 주역 공부에 나섰다. 마침 겨울 방학에 특강으로 한문 공부를 겸해서 <대학>과 <중용>을 가르쳐 주신 성균관 대제학을 지내신 유명하신 서선생님에게 공부를 하였다. 이어 따로 그룹을 지어 종로의 학원 같은 서당에서 선생님에게 논어 맹자 주역을 차례로 학습하게 되었다. <주역>은 사실 아무나 보는 점이 아니고 임금님이 국정을 베푸시는데 어찌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에 당면하면 임금님 만 나무젓가락(산까치)으로 점을 쳐보고 통치의 방향을 정하던 던 것이었다. 그러나 공자님이 벼슬을 하셨다가 반대파 학 자들에게 몰려 감옥을 가시게 되었을 때 감옥에서 모든 64가지 괘의 형상들을 수양서로 만들어 모든 상황에서 지혜롭게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하신 글들이었다. 하지만 결론은 “재수 없는 꿈을 꾸거든 남을 돕는 일을 하여 그 때 그 때 잊어버리 고, 어려운 일이 닥치었다고 점을 치러 다니기보다는 덕을 쌓으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는 결론을 얻고 수양서로 만 공부를 끝냈다. 군자는 어려움이 닥치면 피하지 말고 근신하며 덕을 쌓고 기회가 오면 자신의 능력을 펼치어 발전을 도모하라는 스승의 가르침에 충실한 삶을 살게 되었다. 2학년 겨울 방학에 박시라는 봉사동아리를 따라 40여명이 무의촌인 부여의 외곽 시골로 40여명이 갔다. 때 마침 장발 단속에 걸려 파출소에 끌려가 삭발을 당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돌아 와서 있는데 지도교수님께서 호출하였다기에 가보니 생명이 낙제를 당했다고 한다. 생명의 고향은 그래도 500 여 호나 되는 커다란 시골마을인데 그 중에 대학생은 5 명 정도 밖에 안 되는데 그 당시 서울에 유학하는 사람은 혼자였으며 그도 의대에 다닌다는 것은 제일 부잣집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생명의 형님 누님들이 서울에 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한의과 대학을 다니고 있었는데 낙제 라니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사실인 즉 알고 보니 프랑스 유학을 하고 오신 의과대학의 의사는 아니신 생화학담당 진 교수님이 문제였다. 워낙 머리 가 좋으셔서 4개 외국어 정도는 유창하게 말하시고 번역하시는 훌륭한 분이신데 천재다보니 다소 괴짜 교수님이시었다. 강의시간에도 점심에 소주를 한잔 하시고 시뻘건 얼굴로 강의를 하시며 담배는 늘 필터도 없는 독한 새마을 담배를 피시 기로 유명하셨다. 그런데 다소 게으르셔서 한의대생도 알아 듯 든 못 알아 듯 든 원서로 강의를 하시고 시험은 그냥 백지 를 주시고 생화학회로를 그려 내라는 것이 시험이었다. 그런데 시험이 이론과 강의를 따로 따로 작성하여 제출하라는 것 을 생명이는 한 장에 앞부분은 이론을 뒷부분은 실험답안을 작성하여 제출한 것이 문제가 되어 실험이 0점 처리된 것이 다. 그러면 학생을 불러 확인을 하셨어야 하는데 그냥 성적을 제출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경성대학교 학칙에는 의대생은 평균점수가 D이하이거나, 한과목이라도 F학점이하가 나오면 자동 낙제이고 두 번 낙제하면 퇴학처분을 받았다. 생명은 진교수를 수소문하니 지금 하남시에 농장에 가 계신다고 한다. 부랴부랴 찾아가니 솜바지 저고리를 입으신 교수는 그제 서 야 잘못된 것을 발견하고 시험지를 찾아보니 없는 것이 아니고 작성을 잘못한 것을 발견했다. 뒤늦게 진교수도 발견하고 당시 주임교수였던 의사이며 기생충학을 담당했던 지 교수에게 찾아가 성적을 정정해달라 고 부탁했다. 이유는 이 진 교수님이 게을러서 몇 년에 걸쳐 여러 번 비슷한 문제를 야기하는데 이젠 용서할 수 없다는 것 이다. 그 후로 며칠을 찾아가 사정해보지만 지 교수는 완강했다. 학생을 봐서는 정정해주고 싶은데 교수를 봐서는 정정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한의대 교수들도 의대교수들도 의사와 비의사의 감정싸움까지 겹쳐있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 에 묵묵부답으로 처분만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에 생명이 정식재판을 청구하면 이길 수 도 있으나 졸업은 못한다는 결론 이었다. 너무나 괴로웠던 생명은 사실을 편지로 써서 총장관사에 직접 찾아가 비서에게 전했다. 그러나 비서실에서도 낙제가 불가피하다고 했다. 생명은 다른 성적은 썩 잘한 것은 아니지만 평균이 전혀 문제가 안 되는데 단지 한 과목 그것도 0.5학 점인 생화학실험 때문에 낙제를 당하게 되었다. 생명은 죽고 싶었다. 막내가 귀여움을 받을 때는 한없이 좋은데 잘못하면 여기저기서 혼나다 보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자신의 공부는 안하고 남의 봉사활동만 다니면 최고냐? 정말 쥐구멍을 찾 아 다녀야했고 심지어 자살을 하고 싶었다. 심지어 셋째형님은 그렇게 힘들게 한의학과를 다니느니 그냥 화학과로 전과 해서 편하게 다니라고 하시기도 한다. 몇 번인가 고민하던 끝에 다시 2학년을 다니기로 했다. 이렇게 방황을 하던 끝에 한의학과 1년 선배 32살의 복학생 박상철을 만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박시봉사동아리에 정 이 떨어지는데 ‘삼정’이라는 이념서클이 있는데 네가 한의사로 큰일을 하려면 민족주의 이념 서클에 와서 많은 공부를 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요령장이 박 선배는 대전에서 아버님이 한약방을 하시어 어려서부터 임상을 하는 법을 배워 많은 경험방을 가르쳐주셨다. 특히 담배에 제독시킨 수은을 섞어 말아 그 연기로 피부병을 치료하는 것이 특기였다. 정말 복학생이기도 하지만 모든 일에 능수능란하고 가끔 포장마차에 끌고 가서 술을 사주며 중국 주나라 문왕을 도 와 대국을 건설한 태공망의 전술서인 <육도삼략>에 따라 여러 가지 처세에 대하여 강의도 해주시는 인생의 멘토이셨다. 박 선배와 둘이서 갔던 울릉도 여행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둘이서 배낭을 메고 무작정 출발했다. 서울을 출발 하여 박선배의 집 대전을 거쳐 포항에 도착하였다. 무조건 한의원이라고 걸린 간판만 보고 들어가서 “경성대 한의과 후배 라고 하고 무전여행에 나섰으니 차비 좀 보태 주세요” 하면 학생증을 보여 달라고 하시고는 적어도 2-3만원을 내주셨다. 큰돈이었다. 그 당시 한의사는 모두 경성대한의과 대학 출신이시니 지방에 게시며 서울서 학교 다니는 후배가 너무 사랑 스러우셨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고마우신 분들이다. 포항 부둣가를 출발하여 배를 타고 울릉도까지는 8시간이 걸렷다. 그곳에 도착하니 역시 한의원이 있었다. 다짜고짜 찾아가 경성대 한의과 후배라고 하니 너무 환대를 해주시었다. 알고 보니 그 선배님은 학교 다닐 때 청강생이라 하여 정원이 40명인데 정원 외 160명을 뽑아 청강생이 더 많던 시절에 학교는 이름만 올리고 정치판에 뛰어들어 국회의원 비서를 하느라 공부를 못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포항서 오토바이를 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요양차 울릉도에 왔다가 눌러 앉게 되었노라고 하셨다. 그래서 임상에 밝은 박 선배님을 붙들고 1달간 우리 집에 묵으며 임상강의를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신다. 하지만 성인봉을 올라가고 섬을 둘러본 뒤 아쉬운 대로 2박 3일 동안 열심히 환자치료법을 가르쳐 드리고 다시 포항으로 배를 타고 나왔다. 박 선배를 따라 삼정학회모임에 가보니 다들 민족주의 이론에 철저히 무장되어 있었고 대부분 시골출신들로 프로레타 리아 계급의 불만세력 들이 모인 콤플렉스 집단이었다. 선배들은 그 당시 유신 반대 데모나 지하활동에 참가하다 감옥에 가거나 수배중인 분들이 몇 명 있는 전위대 같은 이념 서클이었다. 겁 많고 유순하고 생명은 일단 마음에는 안 들지만 한 의학 공부를 하다 보니 철저하게 우리나라 민족정신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다시 다니는 2학년 때 여름방학에 강원도 영월의 동강초등학교로 봉사를 따라갔다.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영월에 내려 다시 또 시골 버스를 타고 40여분 남짓 달려가 동강에 그 당시엔 다리가 없지만 물이 적어 버스가 강을 건너 초등학교 앞 에서 일행은 내렸다. 남학생이 6명, 여학생이 3명, 모두 9명이 갔는데 모두가 특공대였다. 아침에 6시에 일어나면 운동장 에 모여 “구령 조정 삼회실시!” 로 시작되는 일과는 나중에 군대를 가보니 군대서 하는 것 이상이었다. 애국가는 4절까지 끝까지 불러야했고 아침에 동네 청소를 하고 당번을 정하여 아침 점심 저녁을 해먹고 낮에는 노력활동에 밤에는 계몽활 동에 참가하여야 했다. 낮에 3명은 한의대생 2명과 간호학과 1명이 무료진료, 3명은 초등학생 과외, 나머지 남학생 3명은 논밭에 나가 노력동원이었다. 저녁에는 3명이 청년들은 4H정신에 따라 농촌을 부활해야 한다며 특수작물 재배법등을 교 육하고, 3명의 여학생은 젊은 주부들을 모아 부업으로 할 수 있는 교육, 의료진 3명은 노년층을 모아 놓고 민간요법을 강의하였다. 저녁 10시쯤 일과가 끝나면 부리나케 목욕을 하고 또 일과 점검과 가장 힘든 반성회가 시작된다. 억지로 자아비판을 하 는데 예를 들면, 나는 오늘 주민이 주는 고구마를 절대 먹지 말아야 하는데 배가 고파 얻어먹었다. 반성하는 뜻에서 운동 장 10바퀴를 돌겠다고 나가면 자동으로 나도 음료수를 받아먹었다 며 따라 나선다. 결국 모두가 운동장을 함께 한 두 시 간이나 돈다. 그리고 겨우 1,2시가 되어서야 잠이 들고는 했다. 봉사활동 첫날 점심 식사 당번에 같은 조가 된 2년 후배인 의상학과 정다운 학형(남자든 여자든 늘 선배든 후배든 학형 이라고 했다)과 학교 급식소에서 점심을 함께 짓게 되었다. 다운 후배는 키가 크고 날씬하며 피부가 뽀얀 것이 도회적이 고 이국적인 외모에 마음이 끌렸을 뿐 만 아니라 첫인상이 너무 청순하고 누군가를 늘 그리워하는 듯 한 모습에 생명은 구신에게 홀린 듯 빠져 들었다. 생명은 솔가지등의 나무를 때서 가마솥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다운후배는 호박을 썰어 된 장국을 준비하였다. 생명은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부엌일을 포함한 허드렛일도 잘하는지라 칼질하는 모습만 보 아도 다운이 부잣집 딸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마침 유급으로 우울증에 빠진 생명에게도 마음이 통하는 이성의 후배에게 넋을 잃고 빠져 들었다. 9박10일간의 봉사활동을 마치고 돌아가던 날 며칠간 내린 비로 버스가 끊겼다. 일행은 집을 들고 영월까지 40리 길을 걸어 나와야만했다. 생명과 다운은 둘이 한손엔 각자의 가방을 들고 또 둘이서 커다란 짐을 다른 한손으로 들고 많은 이 야기들을 하며 걸어 나왔다. 동강을 건너는데 여학생들은 업어 건너자고 했다. 생명은 다운을 업고 건너는데 물 중간에 쯤 왔을 때 많은 가방을 들었던 다운이 그만 생명의 구두 한쪽을 물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둘둘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떠 서 내려가는 구두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구두를 잃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생명에게 함께 갔던 윤선배가 마침 멋으로 신고 다니던 흰 고무신을 내 놓으셨다. 그것을 신고 근처에 있는 제천으로 엠티를 갔다. 도담삼봉을 돌아본 여관에 짐을 풀었다. 저녁을 먹고 봉사활동을 무사히 끝낸 기념으로 막걸리 파티가 있었다. 경비가 얼마 남지 않은 관계로 막걸리에 푸른 고추 푸른 오이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정말 맛있고 정겨운 추억의 시간이었다. 생명은 봉사가 끝나고 곶대골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그 비싼 구두를 잃어버리고 왔다고 야단을 치셨다. 부모들이 그렇게 힘들게 농사를 지어 등록금을 마련해주건만 공부를 못하여 유급을 당하고 정신을 어디에 팔고 다니면 신고 다니는 구두까지 잃어 버렸다 노발 대발하셨다. 생명은 정말 면목이 없었다. 하지만 학교로 돌아가 다운을 다시 만날 날이 기다려졌다. 캠퍼스에 단풍이 막 붉게 들어가던 어느 날 도서관 앞에서 다운을 만났다. “생명형 내가 구두를 잃어버려 너무 미안해 요” “나 형 구두하나 사주고 싶은데...“아냐 괜찮아 이미 사 신었잖아” 다운은 어디 가서 카피라도 먹자고 한다. 둘은 남의 시선을 피해 학교 뒷문을 빠져 나와 어두컴컴한 커피숍으로 갔다. 생명은 커피 두 잔을 시켜 놓고 거의 4시간 동안 봉사활 동에서 있었던 소감으로부터 자신이 자라 나온 배경 등을 끊임없이 떠들었고 다운은 간간히 대답만 하고 있었다. 다운의 아버지는 서울에서 뼈를 맞추는 접골원을 하시어 돈을 잘 버셨는데 고2때 돌아가셨단다. 아버지가 딸 셋에 아들 하나를 너무 자상하게 보살펴주시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잠시 어려워 자기의 성적이 더 좋은 대학에 갈수도 있었는데 경 성대에 장학생으로 들어 왔고 삼정학회 학생과 직원이신 선배님의 권유로 들어 왔단다. 그런데 대부분의 선배들이 시골 서 올라와 가난하고 불만에 찬 반항아들이라 맘에 안 든단다. 그런데 생명은 한의대생이니 잘사는 줄 알았는데 역시 가난 한 의대생이라 실망한 듯하다. 하지만 열정적인 모습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