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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새 이정표 518 광주민주화운동
박정희 살해와 신군부 12.12 쿠테타
박정희가 살해당한 다음 날인 1979년 10월 27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날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군부 고위 장성들은 10월 29, 30일 양일간 회합을 갖고, 유신헌법을 폐기하기로 합의 했고, 새 대통령이 가능한 빨른 시일 내에 헌법을 개정할 것을 밝혔다. 이로써 유신체계가 박정희 일인의 영구 집권을 위해 만들어진 박정희 일인 체제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민주화 운동 세력은 10.26사태에 즉각 대응하지 못했다. 11월 22일 서울 대학교 학생들이 유신체제의 완전 철폐를 외치며 조기 개헌을 주장하는 시위를 벌였다. 11월 24일 400여 명의 민주 인사들은 서울 YMCA 강당에 모여 ‘통일주체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선출 저지를 위한 국민선언’ 을 발표하여 거국 중립내각 구성과 조기 총선을 요구했다. YMCA 집회는 안개 속에 싸인 권력의 실체를 탐색해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민주화 요구에 대한 권력층의 답변은 싸늘했다. 최규하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어 12월 21일 추임했다. 더 확실한 대답은 신군부로부터 왔다. YMCA 회합 참가자들은 ‘YMCA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신군부가 포진하고 있는 보안사로 끌려가 말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하고 고문을 받았고, 권력의 실체가 어디에 있는가를 실감케 했다.
박정희 정권 말기 군부에는 두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10.26 사태가 벌어지자 양자는 주도권 싸움을 벌렸다. 정승화 등 상층부는 유신체제가 박정희에게만 맞는 의복이므로 이를 바꾸려고 했고, 전두환 등 군 내부 비밀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중견층은 유신체제의 뼈대를 유지하려고 했다. 이 후 박정희가 키워온 하나회 멤버 중심으로 12.12 쿠테타가 일어났다. 12월 12일 보안사령관으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 소장이 노태우 소장 등과 함께 쿠테타를 일으켜 육군 참모총장인 정승화 대장을 대통령 재가도 없이 체포하는 하극상이 벌어졌다. 미국은 쿠테타 진압 세력보다 12.12 쿠테타 세력에게 은연중 호의를 보였다.
12.12 신군부쿠테타가 성공한 이틀 후인 1979년 12월 14일 보안사령부 현관 앞에서 기념촬영, 전두환과 노태후가 맨 앞줄에 나란히 앉아 있다.
하나회 :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등 주로 영남 출신의 육사 11기생 중심으로 조직된 군부 내의 비밀 사조직. 유신시대 박정희의 비호를 받으며 군부의 실세로 성장했고, 10.26 직후 12.12쿠테타를 일으켜 군권을 장악했으며,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이후 6공 시절까지 군부와 권력의 모든 요직을 독차지 하면서 끊임없이 조직을 확대하다가 김영삼 정권의 군내 사조직 척결에 따라 해체되었다.
'서울의 봄’ 을 침물시킨 5.17 군부 쿠테타
12.12 쿠테타로 군부를 장학한 전두화 등 신군부는 상당 기간 권력의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정부는 1980년 2월 29일 윤보선과 김대중 등 687명을 복권시켜 ‘서울의 봄’에 허응하는 듯했다. 그렇지만 5월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서리가 된 것은 불길한 조짐이었다. 신군부는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961년에 쿠테타 음모세력이 4.19 1주년을 맞아 시위가 격화될 것을 예상하고 쿠테타를 일으키려고 했던 것처럼, 신군부도 그와 같이 기회를 찾고 있었다.
‘서울의 봄’ 은 불안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단합된 힘을 보여주지 못했다. 학생들들은 우선 미약한 학생운동 역량을 강화하는데 주력했다. 그런 가운데 4월 21일 사북사태가 일어났다. 사북탄광에서 어용노동조합 집행부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광부들이 21일 오후부터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과 충돌했다. 22일 시위에 광부 부인들이 합세했고, 23일 시위 군중은 3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 기간 내내 지서를 점령하고 한때 사북역과 철도가 점거되는 등 공권력이 마비되다시피 한 사북사태는 권력이 노동문제를 억압 일변도로 대처하려고 할 때 얼마나 무서운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4월 26일 서울의 14개 대학교수 361명이 학원사태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학원 민주화를 요구했다. 1960년 4월 25일 대학교수단의 시위 이후 최대 규모 였다. 학생운동은 4월 말에서 5월 초에 전방 군부대 병영교육 거부투쟁을 통해 활성화되었다. 5월 10일 23개 대학 총학생회장들은 비상계엄 해체를 요구했다. 이들은 비폭력 교내 시위 원칙을 다짐했다. 군부 쿠테타 반발의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서 였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서울 지역대학생들
5월 13일 서울 지역 총학생회장단이 가두투쟁을 결정하고 연세대학교를 비롯해 여섯 개 대학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14일에는 전국에서 6만여 명이 시위를 벌였고, 다음 날 시위는 절정에 이르렀다. 이날 서울역 앞에서 10만 명 가까운 학생들이 계엄 해체와 조기 개헌을 요구했다. 서울역 집회에서 각 대학 총학생회장단은 우리의 뜻을 알렸으므로 학교로 돌아간다는 회군(回軍) 결정을 내렸다.
5월 15일 서울역 집결은 계엄군이 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왜! 계엄군은 소극적으로 나왔을까? 5월 16일 전국총학생회장단은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파악하고 시위를 일단 중단할 것을 결의 했다. 그러나 이미 몇칠 전부터 군대가 이동하고 있었다.
5월 17일 오전 군 지희관들은 계엄의 전국 확대, 비상기구 설치, 국회 해산을 결의했다. 이것은 명백히 국가 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쿠테타 결의였다. 계엄사령부는 김종필과 이후락 등을 부정축재 혐의로, 김대중과, 문익환 등을 소요 조정 혐의로 연행했다. 이날 밤 소집된 국무회의에서 찬반토론 없이 10분만에 18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 선포 지역을 전국 일원으로 변경한다고 발표 했다. 그와 함께 정치활동 정지, 언론, 출판, 방송 등의 서전 검열, 각 대학 휴교를 골자로 한 계엄포고 10호를 발표했다. ‘서울의 봄’ 을 침물시킨 5.17 군부 쿠테타가 일어난 것이다.
공수부대 유혈진압으로 광주 금남로에 뿌려진 피
5.17 군부 쿠테타에 대한 저항은 광주에서 일어났다. 5.17 군부 쿠테타와 휴교령에 만발한 전남대학교 학생 200여 명이 5월 18일 교문 앞에 서 있는 군인들과 실랑이를 벌이면서 시위는 확산 되었으나 경찰 병력으로도 진압할 수 있는 규모였다. 그런데 돌연히 오후 4시에 특전사 공수부대원들이 광주 시내에 나타나 학생들을 마구 구타하면서 팬티만 남긴 채 옷을 벗겨 400여명을 군 트럭에 실었다. 이때 8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등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군인들은 시위 학생들에게만 과잉 진압 작전을 편 것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휘둘렀다. 그날 오후 공수부대 11여단의 광주 증파 지시가 떨어졌다. 신군부는 김대중을 제거하고 광주 저항을 공포의 유혈 진압으로 완전 ‘제합’ 하여 제2의 유신체제 권력을 확고히 다지려고 한 것 이다.
5월 17일 학교 정문에서 전경과 대치하고 있는 전남대생들.
19일오전 금남로 일대에서 시민, 학생 5000여 명이 각목 등으로 무장하고 공수부대원과 싸웠다. 공수부대 군인들의 진압은 전날 못지않게 잔인했다, 사태는 오후 2시경 군중이 2만여 명으로 늘어나면서 바뀌었다. 군인들의 유혈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성난 민중, 능공적.적극적 민중이 되어 싸웠다. 거대한 해일처럼 노도와 같은 항쟁의 물결이 광주 곳곳을 뒤덮었다. 4시 30분경 장갑차 총구에서 총알이 날아와 고교생이 쓰러졌다.
20일 광주 거리거리가 분노한 민중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시민. 학생들은 증파된 공수부대 군인들과 일진일퇴의 ‘접전’ 을 벌였다. 특히 오후에 200여 대의 차량에 탄 택시 운전사들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시위를 벌이며 공수부대의 방어선을 뚫은 것은 시위대를 고무시켰다. 그날 밤 광주시청과 광주경찰서, 서부 경찰서가 시위대에 점거되었고, MBC 건물이 전소되었다. 자정을넘기면서 광주는 공권력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이날 신현확 내각이 총 사퇴했다.
전남 도청 앞 광장에서는 분수대를 중심으로 2만 여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열고 대대적인 횃불행진을 벌였다.
석가탄신일인 21일 오전부터 광주시내는 시민들로 ‘사람의 강물’을 이루었다. 오후 1시가 지나서 총성과 함께 5~6명이 쓰러졌다. 오후 3시쯤 공수부대의 집단 사격으로 금남로 일대가 피바다가 되었다. 시민들은 나주와 목포를 비롯한 각지의 무기로를 습격해 무장했다. 오후 5시가 지나 공수부대가 외곽으로 철퇴했다. 시민들은 도청을 접수 했고, 광주는 해방구가 되었다. 근대 역사 이래 초유의 사태였다.
전남 도청 앞 광장에서 시민, 학생들을 잔이하게 유혈집압하는 공수특전단
22일 관료, 신부, 목사 등으로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어 사태 수습전에 계엄군을 투입하지 말고 과잉 진압을 인정할 것 등을 요구 했다. 그러나 계엄사령부는 학생 시위를 배후 조정했다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해 광주 시민을 더욱 분노케 했다. 위컴 한미연합군 사령관은 20사단(사단장 박준명)의 병력 이동을 승인했다.
23일 시위대가 탄 소형 버스가 주남마을 앞길에서 공수부대의 사격을 받아 탑승자 18명 중 17명이 사망했다. 22, 23일에 시위대가 계속 무기를 반납했다. 25일 새로 구성된 시민수습위원회는 정부의 잘못 시인 등 4개 항을 제시했다. 최규하는 상무대에 와서 담화문만 발표하고 사태 수습을 외면하고는 서울로 돌아갔다. 26일 열린 제5차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에서는 최후까지 싸울 것을 결의 했다.
항쟁기간 전남도청앞 광장은 사태의 추이를 알고자 하는 시민들로 가득 메워졌고, 항쟁지도부는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통해 사태의 본질을 알리는 한편 시국을 성토하였다.
27일 오전 1시 상무충정작전이 개시되었다. 이 시각 도청 사수대는 200여명이 채 안되었고, 시내에 저항 세력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을 갖고 경찰로 하여금 대처하게 했다면 사태는 해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신군부는 항쟁세력과 그 동조자들을 초강경 조치로 본때를 보여주려고 했다. 그리하여 3.7.11공수여단, 20사단, 31향토사단 등 대규모 병력이 이 작전에 투입되었다. 새벽 4시경 도청 앞에서 항복 권유 방송이 나왔고, 5시경까지 도청 사수대와 한 시간 동안 교전이 있었다. 5시 10분경 군은 도청을 장악했다. 5월 26일부터 6월 18일까지 광주지방검찰청에서 확인한 사망자는 161명 이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1960년대 후반기 이래 호남이 지역 차별 정책의 상징적 지역이었다는 점에 배경을 이룬다. 호남 차별 정책은 박정희의 성장제일주의 경제 정책과 지역분할 통치정책의 산물로 , 유신 독재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다. 따라서 10.26은 유신독재와 함께 지역 차별 정책이 사라지고 민주주의 사회가 도래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12.12쿠테타, 5.17쿠테타로 또 다시 특정 지역 출신 유신 잔당이 권력을 장악하고 ‘서울의 봄’을 무참히 짓밟아버리는, 생각지도 않았던 공수특전단이 파견되어 공포의 유혈 작전으로 나오자 분노한 광주 지역 학생과 시민이 궐기한 것이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김대중 의 연행과 내란음모 사건 발표였다.
광주시내 부녀자들이 나와 주먹밥을 만들거나 음식을 만들어 시민군들에게 제공했고, 부상자들로 초만원을 이룬 광주시내 각 병원에서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광주시민들이 팔을 걷어부치고 헌혈에 앞장섰다.
학생뿐만 아니라 광주 시민 모두를 분노케 하여 궐기하게 한 직접적인 요인은 특전사의 과도한 진압 작전이었다. 신군부는 자신들의 파쇼권력 장악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폭압으로 압살하려고 했고, 특별히 주목하고 있던 광주에서 “전두환 유신 잔당 물러가라” 는 시위가 일어나자 본때를 보여주고 제2의 유신체제 권력을 확고히 다지려고 한 것이 참혹한 학살극을 초래했다. 그것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중간 발표, 도청 탈환 작전 에서도 드러난다.
미국은 광주 참극에 명백히 책임이 있다. 미국은 5.17쿠테타를 용인하고 방조했다. 또 20사단의 광주 출동을 승인했으며, 참혹한 진압 작전, 학살을 전혀 제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어서 신군부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해서 파쇼권력을 행사할 때 이를 지지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갑오년 농민혁명, 3.1운동, 4월 혁명의 역사적 전통을 이어받았다. 특히 학생과 시민이 일체가 되어 궐기한 것은 역사적으로 드문 일이다. 진압 훈련으로 다져진 특수부대를 도시 밖으로 내몰고 시민들이 차지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계엄사와 전두환 신군부는 오래동안 광주민주화운동과 학살의 진상을 오랫동안 왜곡하고 은폐했다. 그러나 제도언론을 통한 왜곡과 은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천주교 광주대교구가 진실을 알리기 위해 고분분투 했다. 여러 경로로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된 학생과 지식인, 일반 시민은 양심의 고통으로 괴로워했고, 그럴수록 진실을 위해 싸우고자 했다.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로 전개된 1980년대 민주화 투쟁의 정신적 힘의 원천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부터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 중반에 들어가면서 대학가는 4월혁명을 기르며 출정가를 불렀고, 5월이 오면 타오르는 분노로 광주의 그날을 상기하며 최루탄 자욱한 투쟁의 거리로 나섰다.
1980년 5월 29일 망월동에서 일제히 진행된 1백 29구의 장례식, ‘폭도’라는 이름으로 진실이 왜곡되고 통제되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유족들의 슬픔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1970년대까지 금기시되었던 반미 자주화 운동을 촉발했다. 광주 참극에 대한 미국의 책임이 그 이전의 불평등한 한.미 관계, 전두환 정권에 대한 레이건 미 정부의 지지와 오버랩되었다. 이미 1982년에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나 세인을 놀라게 했지만, 1980년대에 자주화 운동은 민주화 운동과 함께 양대 축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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