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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쌍/둥이] Triplets. 세 쌍둥이 - # 11
누군가가 그랬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어 살만한 것이라고...
# 11
“ 란이 선배~ 우리 왔어요~ ”
“ 아- 우리 꼬맹이들 왔구나. ”
란이, 정혁이와 함께 아지트 - 알고 보니 정식명칭은 ‘창조부실’이었다 - 에서 중간고사
준비를 하고 있자, 문이 열리며 잘생긴 두 남학생이 들어왔다.
“ 안녕하세요? 정혁이 형. ”
“ 그래~ 꼬맹이들 공부는 잘 되가냐? ”
“ 네. 어??? 이 분이 혜성이 형??? ”
“ 응. 인사해. ”
둘이 정혁이와 인사하다가는 깜짝 놀라 날 보며 란이에게 묻자 란이가 웃으며 말했다.
“ 안녕하세요? 전 전진입니다. ”
“ 안녕하세요? 전 이선호예요. ”
“ 아... 안녕. 난 신혜성. ”
란이의 말에 90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두 학생.
연한 갈색빛 피부에 날렵한 콧날. 정말 잘 생겼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진이와 우유같이
뽀얀 피부에 왕자님 같은 웃음을 짓는 선호의 인사에 난 우물쭈물- 대답을 하며 고개를 숙
였다.
“ 미리 인사 갔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
“ 아... 아냐... ”
“ 뭐. 시험 끝나고 정식으로 인사할 꺼니까...
아직 선배님들하고도 인사 안 했어. ”
“ 네- ”
상냥하게 말하는 란이에게 둘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아. 이거. 시험지 족보면 되겠어?... ”
“ 흠... 필기 내용도 보는 게 좋겠죠? ”
“ 그래. 아직 시간도 있는데... ”
“ 네. 그럼 필기 내용도 가져갈께요. ”
“ 그래. 여기. ”
란이는 말하고는 두툼한 파일 두 권을 전해주었다.
“ 와~ 진짜 많다... ”
“ 그게 중간고사까지 범위다. 기말고사 되면 더 많아. ”
“ 윽- 알겠습니다. 저희 가볼께요~ ”
“ 그래. 시험 끝나고 모임 공지할게. ”
“ 네. 시험 잘 보세요~ ”
진. 선호라는 두 학생은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두툼한 파일을 각자 한권씩 안고는 아지
트를 빠져나갔다.
“ 저게... 뭐야?... ”
“ 아. 저거. 우리 창조부 족보. ”
“ 족보?... ”
내가 아는 족보란 건 부계(父系)를 중심으로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도표식으로 나타낸 한
종족의 계보(系譜)다. 근데 학교에도 그런 혈연관계가 존재하는 건가???
란이의 말에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자 책을 들여다보던 정혁이가 다시 테이블
에 긴 다리를 올리고는 입에 펜을 문 채 상체를 뒤로 젖히고는 말했다.
“ 란이가 말한 족보는 선배들이 모아놓은 시험문제랑 답이야.
뭐... 선배들이 시험 기간에 정리해 놓은 내용도 있고... ”
“ 아!... ”
“ 지금 우리가 보는 것도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족보야. ”
란이의 말에 우리가 각자 나눠보고 있던 종이들을 내려다 보았다. 시험 일정이 공지되고
나자 란이가 들고 나타난 A4용지 한 묶음은 전 과목들의 간략한 내용들과 문제들이 있었
다. 그게 바로 족보였나 보다.
“ 암튼 저 결벽증 환자가 지난겨울에 컴퓨터로 완벽하게 정리해 놓은 물건이다. 그게... ”
정혁이의 말에 다시 한번 내려다 본 것은 깔끔하게 프린트된 새하얀 A4용지.
어쩐지... 선배들이 준 문제라면 오래됐을 법 한데...
“ 선배들이 준 시험지는 다 철해서 저쪽에 있어. ”
나의 궁금증을 알기라도 하듯 란이가 가리킨 책장에는 커다란 파일이 여러 개 꽂혀있었다.
“ 후훗... 이게 우리 창조부가 전교 탑을 놓치지 않는 비법이지. ”
란이의 말에 난 다시 한번 란이가 건네준 종이들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고 보니 방학 때면 형은 이와 비슷한 종이들을 내게 가져오곤 했다.
일주일마다 하루씩 과목별로 돌아가며 오는 가정교사와 함께 공부하던 나였지만, 형은 시
험이 끝나고 나면 꼬박 꼬박 이와 비슷한 종이를 가져오곤 했다. 하지만 그 종이에는 내가
더 알아보기 쉽게 여러 가지 설명과 형이 직접 그린 그림이 덧붙여져 있기도 했다.
형은... 날 위해 이것들을 다시 정리한 걸까?...
[세쌍/둥이] Triplets. 세 쌍둥이 - # 12
순수 배양된 화초.
필요한 것 이외에는 주어지지 않아, 어쩜 현실에는 적응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꽃.
정상적으로 자란 열여덟 살의 남자아이라면 당연히 알아야할 것을 모르는 꽃.
순수 배양된 화초.
# 12
“ 이제 가니? ”
“ 형은 벌써 나와도 돼요? ”
“ 내가 몸이 좀 안 좋아서... ”
“ 우혁이 형은요? ”
“ 내가 또 깜박하고 휴대폰을 놓고 왔지 뭐야.
가지러 올라갔어. ”
“ 네. ”
모르는 걸 물어보러 간다며 신혜성의 손을 끌고 뛰어간 란이 일행을 기다릴 겸 담배나 한
대 필 겸 내려온 건물 현관에는 승호선배가 있었다. 현관 앞에 혼자 멀뚱이 서있는 모습이
낯설어 묻자 베시시- 웃으며 하는 말. 또 무언가를 놓고 왔단다. 승호선배가 아지트에 한
번 왔다 가면 잠시 후, 우혁 선배가 다시 오는 건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 다른 애들은? ”
“ 모르는 거 묻는다고 갔어요. ”
“ 후훗... 민우는 아는 건가보구나? ”
“ 아뇨. 이해되면 저한테 설명하러 달려 올 거예요. ”
내가 승호선배가 혼자인 모습이 낯설 듯 승호선배 역시 내가 혼자인 게 낯설었는지 다른
녀석들의 행방부터 묻는다. 란이와 정혁이가 갔다면 굳이 내가 가지 않아도 알아서 달려와
설명할 선우 란.
“ 하하... 언제 봐도 너희는 사이가 참 좋아. ”
“ 선배들도 그렇잖아요. ”
“ 우리도 그렇지만, 너희는 유난히 더 그런 것 같아.
너희 기수에 인원수가 적어서 그런가?... ”
“ 그럴지도 모르죠. ”
“ 그런데 유성이도 없어서 많이 허전하겠구나. ”
“ 네. ”
“ 새로 들어온 혜성이는 어때? ”
“ 뭐... 유성이랑은 달라요. ”
“ 그래? 쌍둥이라더니 성격은 많이 다른가보구나? ”
“ 네. ”
“ 시험 끝나면 보겠네. ”
“ 네. ”
“ 너 지갑도 놓고 갔더라. ”
승호선배의 뒤로 들리는 저음의 목소리에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현관에서는 승호선배의 휴대폰과 지갑을 들고 걸어오는 우혁 선배가 보였다.
“ 아. 또???
아... 아까 매점 갔다 와서 그냥 책상위에다 뒀나보다... ”
우혁 선배의 말에 승호선배가 어린애처럼 웃으며 뒤통수를 긁자, 우혁 선배가 손을 들어
그 곳을 한번 쓸어주고는 날 돌아봤다.
“ 혼자 뭐하냐? ”
“ 애들 기다린대. ”
우혁 선배의 물음에 승호 선배가 대신 대답하며 자기 머리를 쓰다듬는 우혁 선배의 손을
살며시 잡아 쥐었다.
“ 그래? 승호 몸이 안 좋다니까, 우리 먼저 간다. ”
“ 네. 안녕히 가세요. ”
“ 민우야. 조심해서 가~ ”
선배들에게 고개를 숙이자 승호선배는 밝게 웃으며 손을 열심히 흔들고는 우혁선배를 따라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는 사람 중 신혜성과 가장 닮은 모습이 승호선배 같다.
애 같은 웃음하며...
“ 민우야-. 오래 기다렸지??? 드디어 알아냈다. 그 문제. 후훗... ”
생각을 가르는 소리는 선우 란의 목소리와 애 같은 웃음소리.
막 교정을 가로질러갈 때쯤 여전히 따불따불- 떠들어대는 정혁이와 동완이 녀석 사이에 끼
인 신혜성을 바라보며 입가에는 뿌듯한 미소를 띠우고는 천천히 걷고 있는 란이의 모습이
보였다.
란이 녀석은 신혜성이 나타난 이후로 자기가 무슨 엄마라도 되는 듯 행동했다.
신혜성 녀석 또한 그런 란이를 엄마처럼 따르기도 했다.
길게 찰랑이는 머리.
가느다란 어깨.
천천히 움직이는 팔.
교복 아래로 보이는 손목.
손목...
“ 뭐... 뭐야. 이민우!!! ”
“ 그냥 뭐가 좀 궁금해서. ”
나의 행동에 화들짝 놀라 불쑥- 고개를 돌리는 란이 녀석을 보며 손을 떼고는 귀를 후비적
-거리며 대꾸했다.
“ 궁금하다고 허락도 없이 불쑥 숙녀 손목을 잡냐??? ”
“ 아. 네가 여자라서 잡아본 거였지... 잠시 깜빡했다. ”
“ 죽는다- ”
생각해보니 란이 녀석이 여자라서 잡아봤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솔직한 나의 대답에
란이는 그 녀석보다 조금 커 보이는 주먹을 들어 내 얼굴 앞에 들이 밀고는 입가를 씰룩거
렸다.
“ 여자들은 다 손목이 너만 하냐? ”
“ 손목?... 흠... 나 정도면 평균보다 좀 가는 편일 걸?... 왜??? ”
“ 됐어. ”
“ 되긴 뭐가 돼!!!! 야!!!! 뭔데???!!!! ”
볼일이 끝나 몸을 돌리자 아직 분이 덜 풀린 건지 날 따라오며 밤거리가 울리도록 소리쳐
대는 란이의 목소리에 골이 울렸다.
[세쌍/둥이] Triplets. 세 쌍둥이 - # 13
누군가가 그랬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어 살만한 것이라고...
# 13
“ 자. 시험이 끝난 것을 축하하며- 건배~ ”
승호 선배의 말에 따라 아지트를 가득 채운 멤버들은 각자 자신의 음료수 잔을 높이 들었
고 많은 잔이 부딪히며 테이블 위로 여러 색의 음료수 방울이 방울- 방울- 떨어졌다.
“ 자. 그럼 난 이만 물러서고 우리의 여장부. 선우 란 양의 진행이 있겠습니다~ ”
건배를 마치고 나자 귀엽게 웃은 승호 선배는 란이를 부르며 슬쩍 뒤로 빠지셨다.
“ 흠- 그럼 우선 이번 학기 들어 최고의 중요 사안이자 관심의 대상이었던
신혜성군의 창조부 영입에 따른 정식 인사가 있겠습니다- ”
란이의 말에 멀뚱이 서있던 나는 란이의 손짓에 따라 더듬더듬 자리에서 일어서 란이의 옆
에가 섰다.
“ 얼굴만 척-봐도 왠지 친근하죠?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여기 신혜성군은
전 부장이었던 신유성군의 쌍둥이 동생으로 우리 창조부 30기의 부원예정이었습니다.
뭐... 좀 늦긴 했지만 예정대로 입부했고요.
신혜성 군의 입부는 이미 혜성군이 전학 오기 전에 정해졌기 때문에
다른 과정은 없이 전학 수속을 마치자마자 바로 시행되었습니다.
그리고 문제시되었던 신혜성군의 성적은 아직 비공식적인 성적이긴 하지만
이번 중간고사에서 신유성군보다는 쬐-금 못하는 성적으로,
이 선우 란과 동점입니다.
그럼 오늘 처음 얼굴 보신 선배님들 질문 있으신가요? ”
란이가 웃으며 고개를 돌려 소파에 앉아 계신 선배들에게 묻자, 승호선배가 웃으며 고개를
살랑살랑 흔드셨다.
“ 그럼 신혜성군의 소개는 이쯤에서 마치고 선배님들 소개.
여긴 29기 부장이신 안승호 선배. ”
“ 안녕하십니까? ”
란이의 소개에 난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승호 선배는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로 손에 들고
있던 잔을 흔들며 말했다.
“ 하하... 뭐 그렇게 격식 차릴 것 없어.
이젠 은퇴해서 뒷방 늙은이 취급 안받는 게 다행이지...
안 그래? 우혁아?- ”
승호 선배는 부드럽게 웃으며 옆에 앉아 계신 무서운 표정의 선배 어깨를 가볍게 치고는
묻자 그 선배는 승호 선배를 살짝 돌아보며 약간의 미소를 지어주셨다.
“ 그 옆은 장우혁 선배.
우리 창조부의 숨은 주.먹.이지... 후훗...
누가 괴롭히면 승.호. 선배한테 가서 일러.
그럼 우.혁. 선배가 손 볼테니까... ”
“ 또 까분다. 선우 란. ”
“ 에이- 선배와 승호선배의 공.생.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예였다고요...
뭐 우리 기에도 이민우라는 주먹이 있다고요.
말이 안통해서 그렇지... ”
우혁 선배의 무서운 말투에 란이는 다시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나의 어깨에 팔을 두
르며 말했고, 그런 란이의 말에 모두가 슬쩍 돌아본 민우는 그런 란이의 말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무서운 눈으로 란이를 째려보았다.
“ 다음은 우리 창조부 엄마. 이화정 선배. ”
우혁 선배 옆에 앉아서 빙그레- 웃고 있는 단발머리의 여자 선배를 가리키며 말하는 란이
의 손짓에 따라 고개 숙여 인사하자 가볍게 웃음 소리를 내며 목소리가 들렸다.
“ 그때 얼핏 보기는 했는데, 정말 유성이 판막이구나. 하지만 성격은 전혀 딴판이네...
혜성이 네가 더 귀엽다. 너 내 동생 안 할래??? ”
“ 누나는 어째 신씨 집안 형제들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예요?... ”
“ 암튼 저거는 꼭 낀다니까... 문정혁 너는 줘도 안 가지니까, 걱정 마셔~ ”
화정 선배는 웃으며 정혁이를 향해 들고 있던 과자 한 조각을 던지며 말했다.
“ 또 여기는 이세린 선배.
우리 학교 메이 퀸. 후훗... ”
란이가 말한 선배는 란이보다 더 가날픈 선에 투명하리만치 뽀얀 얼굴.
약간의 움직임에도 부드럽게 찰랑거리는 연한 갈색의 긴 생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 그리고 여긴 내가 가장~ 애정 하는 우리부 마스코트 문희준 선배. ”
희준 선배는 커다란 눈에 세린 선배만큼 뽀얀 피부를 하고는 자기를 가장 애정 한다는 란
이의 말에 란이에게 달려들어 란이를 꽉- 안아주었고, 그 모습에 아지트는 온통 웃음바다
가 되었다.
“ 마지막으로 안칠현 선배. 사실 난 화정 언니보다 칠현 오빠가 더 엄마 같아~ ”
두 손을 볼에 가져다 대고는 애교스럽게 말하는 란이의 행동에 칠현 선배는 얼굴이 빨개져
서는 ‘야!!!’라고 소리쳤지만, 그런 칠현 선배의 행동에 모두들 더 크게 웃어댔다.
“ 오늘은 사정상 선배 두 분이 빠지신 관계로 이제 후배로 넘어갑니다.
여기 진이하고 선호는 지난 번에 봤지? ”
란이의 말에 내게 씩- 웃는 진이와 손을 흔드는 선호에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 그리고 저긴 이재원. ”
란이의 말에 따라 시선을 돌린 곳에는 정혁이만큼이나 큰 키의 남학생 한명이 서있었다.
희고 잘생긴 얼굴로 장난스럽게 웃으며 불쑥 내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모습에 나도 얼떨
결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 저긴 이채린. ”
재원이 옆에는 란이 만큼이나 늘씬하고 예쁜 여학생이 풍성한 컬이 들어간 긴 머리를 하고
서 있었다. 란이의 손짓에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하자 그 풍성한 머릿결이 찰랑이며 움직
였다.
“ 마지막으로 저긴 우리 부 귀염둥이 세트 조연주. 정아미 ”
채린이의 옆에 서있던 작은 여자 아이 둘은 귀엽게 웃으며 재빨리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란히 커다란 눈망울에 포동포동 귀여울 정도로 오른 볼 살이 깜찍했다.
“ 마지막으로 2학년. 나 선우 란이야 전학 온 날부터 붙어 다녔으니까, 잘 알테고...
문정혁 저 바보도 슬프지만 우리 반이니까... 그리고 민우 역시...
그리고 동완이는 다른 반이지만... 뭐 그래도 이미 알지??? ”
나란히 앉아있는 정혁이와 민우, 동완이를 돌아보고는 란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이게 선배 두 분이 빠진 우리 창조부의 전원입니다.
자~ 그럼 피자가 올 때까지 놀자~ ”
란이의 말을 끝으로 울려 퍼지는 박수소리가 채 그치기도 전에 노크소리가 들리며 피자가
배달되어왔고, 그때부터 시험 얘기, 학교 얘기, 취미 얘기 등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갔고,
또 끊임없이 게임들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워낙에 게임들도 처음 해보고 이렇게 사람이 많은 것은 적응이 안 되서 곧 지쳐버
린 나는 비어있는 커다란 소파로 가서 털석- 앉았다. 그러자 내 옆에 느껴지는 또 다른
무게.
“ 아... 민우 너도 게임 못 해? ”
“ 안. 해. ”
친근해진 기분에 반갑게 묻는 나의 질문에 민우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곁에서 녹차를 타던 화정 선배가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 너나 우혁이나 꼭 안.하.는.거.라.고. 우기는 데 내 의견은 못.하는 거야. 하하... ”
화정 선배의 말에 저쪽에서 승호 선배의 곁에 앉아있던 우혁 선배가 무서운 눈초리로 이쪽
을 바라봤지만 화정 선배는 상관하지 않는 듯 했다.
[세쌍/둥이] Triplets. 세 쌍둥이 - # 14
순수 배양된 화초.
필요한 것 이외에는 주어지지 않아, 어쩜 현실에는 적응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꽃.
정상적으로 자란 열여덟 살의 남자아이라면 당연히 알아야할 것을 모르는 꽃.
순수 배양된 화초.
# 14
정신없는 파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교문에 서서 각자 나뉘기 시작했다.
“ 그럼 각자 가던 대로 가면 되는 거지?... ”
화정 선배가 그렇게 물으며 모두를 둘러보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 난 오늘 이쪽으로 가. ”
나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 어?... 무슨 일 있어? ”
“ 어디 들렸다 가야해. ”
“ 그럼 난?... ”
또다시 들린 가느다란 목소리.
“ 음... 그럼 세린이는 우혁이랑 승호가 좀 데려다 줘라. ”
화정 선배의 말에 승호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세.린.의 얼굴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
았다.
“ 그럼 혜성이는 우리가 안 데려다줘도 되겠네.
민우야. 오늘은 네가 혜성이 좀 데려다주고 가. ”
정혁이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기대있던 란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곧 모두 뿔뿔이 흩어
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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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 째 아무 말 없이 톡톡-거리는 발걸음 소리만을 내며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담배를 피기위해 멈춰 서자 곧 멈추는 또 하나의 발걸음 소리.
- 치익-
익숙한 불빛과 향기가 골목에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 뒤를 따르는 것은 익숙치 않은 소리.
“ 콜록- 콜록- ”
“ ................. ”
“ 콜록- 콜록- 콜록- ”
“ ............ 야. 신혜성. ”
계속 기침을 하는 모습을 손을 까닥-해서는 불렀다.
“ 콜록- 왜?... 콜록- ”
작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계속 기침을 하면서도 새끼 강아지마냥 통통-거리며 뛰어온다.
“ 너... 유성이가 담배 피는 거 본 적 있냐? ”
“ 형 담배 펴????!!!!!! ”
나의 심술 섞인 질문에 지나치게 당황하는 모습.
커질 대로 커진 다갈색의 눈은 작아질 줄 몰랐고, 파르르- 떨리기까지 하는 작기만 한
붉은 입술은 벌어져서는 다물지를 못한다.
“ 훗- 아니다. 아냐. ”
기침도 잊은 채 입을 벌리고는 멍-하니 멈춰서는 마네킹마냥 꼼짝도 못하는 녀석의 태도에
유성이의 유난스런 금연 활동이 떠올라 심술은 그만두기로 했다.
“ 유성이 형... 담배 폈니?... ”
그 어벙한 표정에 담배 맛이 뚝- 떨어져 피다만 담배를 꺼버리고 말자, 녀석은 드물게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물어왔다.
“ 넌 본 적 없냐? ”
- 끄덕
나의 질문에 금방 눈물이라도 쏟을 듯한 표정으로 입을 앙-다물고는 고개를 크게 끄덕.
“ 그럼 안 폈겠지. ”
“ 민우야- ”
나의 대답에 습한 목소리로 애절하게 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가 언젠가 술에 잔뜩
취해 나의 이름을 부르던 유성이의 목소리와 너무 똑같아 순간 가슴이 서늘-해져왔다.
“ 그렇게 부르지 마. 넌 니 눈에 본 것만 믿어.
니가 뭘 보고 뭘 들었든, 니가 직접보고 들은 것만 믿어.
세상은 다른 사람의 말까지 믿다가는 점점 혼란 속에 빠지기 마련이거든. ”
“ 하지만.... ”
“ 유성이가 네게 거짓말 하든? ”
“ 아니. ”
“ 그럼 유성이를 믿어. 그럼 되잖아. ”
- 끄덕
괜한 장난을 쳤다 싶었다.
유성이의 과잉보호가 우습게 생각되어 장난을 좀 쳐보려한 것뿐인데, 지나치게 진지하게
나오는 녀석의 태도에 유성이 녀석의 진지했던 모습이 떠올라 그만두었다.
“ 네 어리버리함은 어디서 온 인자인지 모르겠다.
순수하게 좋은 양분만 줘서 배양했다더니. ”
지나치게 솔직함이 묻어나오는 표정.
내가 아는 가장 뛰어난 위.장.술.의 신유성과 한배에서 나온 녀석인가 싶다.
아니. 어쩜 그게 너희의 진.짜. 모습이었을지도...
[세쌍/둥이] Triplets. 세 쌍둥이 - # 15
누군가가 그랬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어 살만한 것이라고...
# 15
*** 2학년 중간고사 성적 ***
- 전교 1등 : 신혜성 99.6753
선우 란
전교 3등 : 문정혁 98.7632
전교 4등 : 이민우 98.5426
전교 5등 : 유한상 98.2103
.
.
.
.
.
.
전교 38등 : 김동완 90.8246
“ 와... 혜성이 너도 그 사회문제만 틀렸구나.
역시 선생님께 다시 한번 반항 하는 게 어떨까?
이번 기회에 우리 평균 100점으로 발돋움하는 거야. ”
“ 후훗... 응. ”
“ 재수 없어. ”
란이와 나의 웃음소리 뒤로 들리는 살벌한 목소리에 게시판 앞에 몰려있던 수십 명의 시선
이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쏠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역시나 살벌한 표정의 이민우.
정혁에게 질질 끌려왔는지 정혁의 한손에는 민우의 팔이 잡혀있었고, 정혁은 ‘아싸~ 내가
이민우 앞이다~’라는 소리를 내며 신나하고 있었다.
그런 민우의 싸늘한 표정을 본 아이들은 슬슬 민우에게서 멀어졌고, 순간 민우와 눈이
마주친 나는 차갑게 시선을 돌려버리는 민우의 모습에 가슴이 찡-해져 서둘러 아이들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내가...
1등인 게... 그렇게 싫었을까?...
아... 아님... 란이랑 같은 등수인 게?...
아... 민우... 란이를 좋아하는구나...
그래... 그 날 모두 다함께 공부를 마치고 집에 갈 때 란이 손을 잡아줬고...
그래... 란이는 예쁘니까....
내가 지금까지 본 어떤 여자애보다도...
서울에 와서도 그렇게 예쁜 여자애 본적이 없으니까...
그래... 란이는 예쁘고... 똑똑하고... 착하고...
민우는... 란이를 좋아하겠구나....
그렇겠구나....
아는 곳이라고는 아지트 밖에 없어 이 곳으로 도망쳐오기는 했지만 이곳에 있자 란이와
민우... 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 왜 이러지...
학교에 온 이후로 자꾸 민우 생각만 해...
모두들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형보다 내가 더 낫다고 말해준 최초의 사람.
비록 거창한 말은 아니었지만 또렷하게 기억해.
- 좋은 눈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 아니, 신유성보다 더...
그 이후로 너만 생각해.
마치 껍질을 막 깨고 나온 아기 새가 처음 본 존재를 어미라고 여기는 것처럼.
내 눈에는 너만 보이고 난 항상 너만 생각해.
나... 왜 이러지...
서둘러 눈물을 닦고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손잡이에 손을 댔다.
순간 열리는 문에 놀라 바라 본 곳에는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 아... 미안... 나가려고 했어. ”
민우를 살짝 피해 나가려고 몸을 옆으로 돌려 빠져나갔다. 하지만 곧 나의 손목을 감아
오는 강한 힘에 끌려 다시 안으로 들어와졌고 문은 쿵-하는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 아. 나... 나가려고 한 건데... ”
“ 왜 울어. ”
의문문이 아닌 평서문으로 물어오는 민우의 낮은 목소리가 방안에 가득 울렸다.
희고 고운 얼굴을 잔뜩 굳히고는 서있는 모습에 서둘러 눈물을 꾹- 삼켰다.
“ 안... 울어... ”
민우의 말에 손을 들어 눈을 쓱쓱- 비비고는 말했다.
“ 왜 울어. ”
“ 안 울..... 아악!!! ”
다시 들려오는 평서문의 질문에 다시 한번 같은 대답을 하자 나의 어깨를 강하게 눌러오는
커다란 손에 악-소리를 내며 얼굴을 찌푸렸다.
“ 왜 울어. ”
올려다 본 얼굴은 화가 난 듯 무서운 표정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너무 멋져 도리어
서러워졌다.
“ .... 흐흑.... 네가... 재수 없다며.... ”
“ ....... ??? ...... ”
“ 성적표 앞에서... 나.... 재수 없다며... ”
“ ......... 하- 누가 과대망상증에 피해망상증 형제 아니랄까봐....
누가 너 재수 없대? ”
“ .... 흐흑... 그럼?.... ”
민우의 말에 놀라 얼른 눈물을 닦고는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민우의 교복 셔츠를 꼭-
잡고는 민우를 올려다보았다.
“ 4자. 4자가 재수 없다고.
나 4자 싫어해. 근데 4등 했잖아.
씨발- 다음번엔 백지로 내던지 해야지.
아. 씹- 더 재수 없으면 444등 할까봐 그러지도 못한다니까. ”
얼굴을 잔뜩 구기고는 말하는 민우의 모습에 놀란 내가 입만 벙긋거리고 있자 다시 한번
얼굴을 돌려 날 바라보며 물었다.
“ 그것 땜에 여기 와서 훌쩍이고 있는 거냐? ”
민망함에 차마 입으로 대답하지는 못 하겠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 아무튼 너희 형제 덜 떨어진 건 끝이 없다. ”
민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의 어깨를 놓고는 그대로 소파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아서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순간 붉게 타오른 하얀 담배가 참 예쁘게 보였다.
“ 또 콜록대려고 거기 그러고 서있냐? ”
“ 아... 나갈게... ”
담배를 그 붉은 입술에 물더니 깊이 빨아들이고는 다시 길게 하얀 연기를 내뿜은 민우는
내게 물어왔고 난 성급히 방을 빠져나왔다.
“ 근데... 거기서 담배피면 란이가 싫어할 텐데... ”
아지트의 문에 살짝 기대어 중얼거리자 다시 란이의 일이 생각났다.
아... 란이...
민우가 좋아하는 란이...
란이 얼굴은... 어떻게 보지?...
[세쌍/둥이] Triplets. 세 쌍둥이 - # 16
순수 배양된 화초.
필요한 것 이외에는 주어지지 않아, 어쩜 현실에는 적응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꽃.
정상적으로 자란 열여덟 살의 남자아이라면 당연히 알아야할 것을 모르는 꽃.
순수 배양된 화초.
# 16
“ 재수 없어. 4자는... ”
멀어지는 신혜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가에 맴도는 말을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 암튼 독특하다니까... 뭐든 신경 안 쓰는 녀석이 4자는 왜 그렇게 싫어하냐?... ”
“ 그냥 싫어. ”
“ 암튼... 특이하다니까...
야!!! 어디가???~ ”
뻔히 알면서 꼭 챙겨 묻는 문정혁의 말에 대꾸해주고는 녀석이 사라진 곳으로 따라갔다.
놀란 강아지마냥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는 날 바라보더니 그 눈에 그대로 눈물을 매달고는
황급히 사라진 모습.
정말 신경 쓰이는 녀석이라니까.
“ 야. 근데 신혜성은 왜 또 저기압이야?...
너랑 동점인 게 짜증이래??? ”
“ 됐어!!!! ”
혜성을 따라가려는 란이의 팔을 잡고는 떠드는 정혁의 농담에 란은 정혁의 뒤통수를 콩-
치고는 학생들 틈을 빠져나왔다.
귀에 익숙한 발걸음 소리를 따라가지 않아도 복도에 한가득 서있는 녀석들의 시선만으로도
녀석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지 알 수 있었다.
굳게 닫힌 아지트의 문.
“ 아... 미안... 나가려고 했어. ”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붉어진 눈을 하고는 놀란 듯 날 바라보는 녀석.
강아지마냥 몸을 움츠리고는 나와 문 사이를 빠져나가려는 녀석을 잡아들였다. 지나치게
가벼운 녀석은 적은 힘으로도 쉽게 끌려왔고 문에 닿는 소리 역시 콩-하고는 작게 났다.
“ 아. 나... 나가려고 한 건데... ”
“ 왜 울어. ”
붉어진 눈가가 보기 싫어. 물었다.
나의 물음에 꿀꺽- 소리가 나도록 침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삼키고는 대꾸한다.
“ 안... 울어... ”
야구공만한 주먹을 들어서는 눈을 쓱쓱- 비비고는 말했다.
하지만 이미 젖은 목소리.
“ 왜 울어. ”
“ 안 울..... 아악!!! ”
뻔한 거짓말을 하는 녀석이 짜증나 작게 떨리는 어깨를 잡자 악-소리를 내며 작은 얼굴을
찡그렸다.
“ 왜 울어. ”
마지막 질문에 결국 펑펑- 눈물을 쏟으며 하는 말.
“ .... 흐흑.... 네가... 재수 없다며.... ”
“ ....... ??? ...... ”
“ 성적표 앞에서... 나.... 재수 없다며... ”
“ ......... 하- 누가 과대망상증에 피해망상증 형제 아니랄까봐....
누가 너 재수 없대? ”
“ .... 흐흑... 그럼?.... ”
한심한 대답에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고 작은 손으로 눈물을 쓱쓱- 닦고는 두 손으로 나의
교복 셔츠를 꼭- 잡고는 나를 올려다보는 폼이 슈렉2에 나오는 새끼 고양이 같다.
“ 4자. 4자가 재수 없다고.
나 4자 싫어해. 근데 4등 했잖아.
씨발- 다음번엔 백지로 내던지 해야지.
아. 씹- 더 재수 없으면 444등 할까봐 그러지도 못한다니까. ”
가뜩이나 4등을 한 재수 없는 날인데, 이 성가신 녀석까지도 날 거슬리게 한다.
“ 그것 땜에 여기 와서 훌쩍이고 있는 거냐? ”
대답도 없이 가느다란 고개만 열심히 끄덕여 연한 갈색의 머리칼이 찰랑인다.
“ 아무튼 너희 형제 덜 떨어진 건 끝이 없다. ”
그 모습에 순간 한쪽 가슴이 철렁-해 소파로 가서는 니코틴을 섭취했다.
젠장. 이게 다 4등을 해서 재수가 없어서 그래.
“ 또 콜록대려고 거기 그러고 서있냐? ”
“ 아... 나갈게... ”
녀석이 서둘러 문을 쿵-소리가 나게 닫고 나가자 빠르게 뛰던 심장이 좀 가라앉았다.
“ 정말 재수 없는 날이야. ”
[세쌍/둥이] Triplets. 세 쌍둥이 - # 17
누군가가 그랬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어 살만한 것이라고...
# 17
“ 엄마- 나 이번 주말 생일파티는 혜성이 별장에 가서 하고 싶은데... ”
“ 어머. 왜??? 엄마가 멋지게 파티 해준다니까... ”
“ 애들이 혜성이 보고 싶어 하기도 하고... 나도 가고 싶고...
또... 혜성이 생일이기도 하니까... ”
“ 흐음... 그래. 그럼... 혜성이 생일이기도 하니까...
엄마도 갈까? ”
“ 아... 친구들 많이 가는데, 뭐... ”
“ 그래. 그럼... 엄마가 다 준비해 줄테니까, 넌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놀다와... ”
“ 네... ”
유성이 형인 척 엄마에게 별장으로의 여행 허락을 맡고는 엄마의 침실에서 나왔다.
마음이... 아파.
.
.
.
“ 와~ 그럼 혜성이 네가 지내던 별장에 가는 거야??? ”
“ 응. 엄마가 다 준비해 주신다고 했으니까, 너희는 간단히 너희 옷만 준비해 오면 돼. ”
“ 와~ 재미있겠다. 그치? 그치??? ”
나의 주말 생일파티 초대에 오늘은 긴 머리를 양갈래로 예쁘게 따서는 동그랗게 말고는 빨
간 앵두 같은 머리끈을 예쁘게 단 란이가 탁구공처럼 통통- 뛰며 좋아하자 곁에 있던 정혁
이, 동완이도 꽤 재미있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 혜성아. 또 누구 부를 거야? ”
“ 글쎄... 누구 부를까?... ”
“ 흠... 민우. 갈까? ”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앵두 같은 머리끈의 방울을 만지작거리던 란이가 오늘도 긴
다리를 테이블 위에 올리고는 의자에 앉아있는 정혁이를 돌아보며 묻자 정혁이는 어깨를
한번 으쓱- 해보이며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 민우한테는... 내가 말할게. ”
“ 그래. 그럼... 그럼 또 누구? ”
“ 글쎄... 누가 좋을 거 같아? ”
“ 흠... 선배들은 바쁘니까 못 갈 거 같고...
1학년 애들 부를까?... ”
“ 근데 부 모임도 아니고 너무 왕창 가는 것도 실례지 않을까? ”
“ 그치? 흠... 그럼. 혜성이, 나, 정혁이, 동완이, 민우는...
안갈 것 같지만 간다고 치고... 5명? 괜찮은 숫자인가?... ”
“ 여섯이 놀기는 딱 좋은데... ”
“ 그래? 그럼 또 1학년 중에 누구 부르기도 뭐하네.
1학년 부르려면 다 불러야지... ”
“ 민우한테 물어봐서 간다고 하면 우리끼리 가고,
안 간다고 하면 1학년들이나 3학년 선배들께 물어보자. ”
“ O.K. 괜찮지? ”
내가 민우에게 어떻게 말해야할지 곰곰이 고민하고 있는 사이 란이와 정혁이, 동완이가 능
숙하게 상의를 끝내고는 란이가 눈을 찡긋-하며 내게 묻자 그 모습이 참 예뻐 웃으며 고개
를 끄덕여주었다.
“ 와~ 이 깜찍한 꽃미소. 아무한테나 보여주기 싫다니까... ”
오늘따라 머리 스타일 때문인지 귀여운 란이가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꼭- 잡고는 크게 웃으
며 말하자, 곧 옆에 있던 정혁이와 동완이는 성추행이네 어쩌네 하며 다투기 시작했다.
.
.
.
“ 저... 민우야. ”
오늘따라 유난히 늦는 수학 선생님을 모시러 란이 -알고 보니 유성이 형이 반장이었던 반
이어서 형이 없는 지금 부반장이었던 란이가 대임을 하고 있다고 한다- 가 교실을 빠져나
가고 수학 문제집을 꺼내어 노려보고 있는 -푸는 것이 아니라 노려보고 있었다- 민우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다행히도 꽤나 작고 낮은 목소리로 불렀지만 민우는 들었는지 수학 문제집을 들여다보던
나른한 눈을 돌려 날 바라봤다. 검은 색이나 갈색이라고 하기엔 뭔가 다른 독특한 색깔을
지닌 민우의 눈동자에 잠시 내가 민우를 불렀다는 사실 조차 잊고 멍-하니 있었다.
“ 용건 있어서 부른 거 아냐? ”
“ 아... 응. 그래.
저... 이번 주에 내... 생일이라서....
나... 전에 지내던 별장에 가려고 하는데 너도.... 같이 갈래?
저기, 란이랑 정혁이, 동완이도 가... ”
“ 란이 녀석은 기집애가 안 끼는 데가 없어. ”
“ ............................. ”
한 팔을 의자 등받이에 올리고는 내 쪽으로 몸을 돌린 채 나의 말을 들은 민우가 불만어린
말투로 중얼거리자 나의 제안을 거절할까 두려워 가만히 민우의 눈을 들여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 ...... 뭐? 대답? ”
- 끄덕. 끄덕.
“ 알았어. ”
“ 헤헤- 넌 아무 것도 준비할 필요 없어.
그냥 너 입을 간단한 옷... 아니, 그것도 귀찮으면 안 가져와도 돼.
거기 옷도 있거든... ”
민우의 허락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나불나불- 떠들어댔고, 그런 나의 모습에 피식- 웃던
멋진 민우의 웃음은 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오는 란이의 모습과 앞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수
학 선생님의 모습에 사라졌다.
“ 하하... 내가 또 깜박했다.
란아- 다음에는 5분만 늦으면 바로 교무실로 와라- ”
“ 네. ”
수학 선생님의 말씀에 교실은 한바탕 웃음이 번졌고, 곧 수학 수업이 시작됐다.
오늘따라 왠지 수학 수업이 더 즐거웠다.
- 저의 카페인 cafe.daum.net/loveinX 에 오시면 소설 이미지 컷이 있습니다. ^^
[세쌍/둥이] Triplets. 세 쌍둥이 - # 18
순수 배양된 화초.
필요한 것 이외에는 주어지지 않아, 어쩜 현실에는 적응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꽃.
정상적으로 자란 열여덟 살의 남자아이라면 당연히 알아야할 것을 모르는 꽃.
순수 배양된 화초.
# 18
점점 따뜻해져가는 날씨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초록빛을 더해가는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지
나 드러난 별장을 본 녀석들은 크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 와아- 이건 별장이 아니라 거의 저택 수준인데??? ”
한달에 한번씩 있는 자율 등교 토요일이기에 새벽부터 서둘러 나서서인지 점심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별장에 도착했다. 별장을 본 정혁이와 란이 동완이는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별장은 정혁이의 말대로 별장이라기엔 꽤 커다란 외형이었다. 깔끔한 대리석으로 꾸며진
외관은 별장 뒤로 서있는 산의 푸르름과 잘 어울려있었다. 커다란 창으로는 눈부신 햇살이
스며들었고, 별장 앞에 넓게 퍼진 푸른 잔디는 전원이라는 느낌을 물씬 주는 풍경이었다.
아팠던 녀석이 지내기엔 좋은 곳으로 보였다.
“ 전에는 그 옆에 있는 작은 구관만 썼는데,
내가 오래 있게 되는 바람에 신관을 다시 지은 거야... ”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는 녀석들의 사이에 선 신혜성은 밝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별장에 오자고 말한 이후로 처음 듣는. 아니. 녀석을 본 뒤로 처음 듣는 밝은 목소리였다.
그런 녀석의 끝없는 수다 사이로 들리는 목소리.
“ 어이구- 혜성군 왔어요?...
많이 좋아지셨네... 걱정 많이 했어요... ”
“ 잘 지내셨죠? ”
“ 우리야 뭐 별일 있나.
혜성군 올라가고 우리 내외 적적하게 지냈죠.
이렇게 오니, 이 큰 집도 활기차고 좋네요... ”
“ 여긴 이 별장 관리해주시는 분들.
여긴 제 친구들이예요. ”
“ 안녕하세요???!!!! ”
신혜성의 소개에 귀가 멍멍하도록 인사를 하는 녀석들의 목소리에 귀를 막았다.
“ 구관도 청소 해놓기는 했지만,
사용하기 불편하시니까 모두 신관에서 지내세요. ”
“ 방이 몇 개 였지?... ”
친절하게 웃으며 말씀하시는 분들의 모습에 고개를 까딱이며 눈동자를 동글동글 굴리는
녀석에게 별장지기 아주머니가 상냥하게 말한다.
“ 침대가 있는 방은 도련님 방과 손님방 두개. 모두 세 개입니다. ”
“ 아... 그렇구나... 나머지는 침대가 없지... ”
갑자기 당황한 표정으로 우물대는 녀석.
“ 저... 저기... 별장지기 아저씨 내외분은 구관에서 지내셔서...
신관에 침대가 있는 방이라고는 내 방이랑 보모 할머니께서 쓰시던 방.
주치의 선생님께서 쓰시던 방. 유성이 형이 올 때 쓰던 방 뿐이거든?
근데... 근데 보모할머니 방은 내가 서울로 올 때 집 옮기신 할머니를 따라서
할머니 가구들도 모두 옮겨드렸거든? 그래서...
그래서 그 방은 그냥 빈 방으로 남아있거든?...
그게... 그게... 그래서... ”
거의 울 듯이 우물대며 횡설수설 대는 녀석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자 정혁이 녀석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 그럼, 뭐. 혜성이는 주인이니까 혼자 쓰고,
나랑 동완이랑 쓰고, 란이랑 민우랑 쓰면 되겠네- ”
“ 뭐어어엉????? ”
그 말이 농담인지 모르는지 눈이 커져서는 어벙하게 소리치는 녀석이었지만, 다른 녀석들
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정혁이에게 옷가방을 던지고는 말했다.
“ 니 농담 재미없어.
차라리 혜성이랑 같이 자고 말지, 내가 왜 민우랑 같이 자냐??? ”
“ 나도 너 취미 없다. ”
자기보다 한 뼘은 작은 혜성이 녀석을 뒤에서 꽉- 끌어안으며 하는 란이 녀석의 말에
한마디 해주었다.
“ 하하... 그럼 난 정혁이랑 한방 쓸래. 정혁아- 너도 그러고 싶지?- ”
“ 응. 응. 아저씨- 저희 방 좀 알려주세요- ”
동완이 녀석의 어설픈 애교에 정혁이 녀석 역시 장단을 맞추며 별장지기 아저씨의 안내에
따라 방으로 걸어 들어갔고 란이 역시 별말 없이 둘을 따라가 어느 방에서 잘지를 고르고
있었다.
“ 두 방 다 도련님 방보다는 좀 작지만,
각각 욕실도 딸려있고 창도 커서 지내기엔 편하실꺼예요.
그럼 전 내려가서 점심 식사 준비할께요.
짐 정리하고 내려오세요. ”
“ 와아- 나 여기서 잘래. 여기서 잘래!!! ”
“ 아무튼 선우 란. 안 어울리게 공주취향이라니까... ”
“ 저 방은 유성이 형이 올 때면 자던 방이야.
근데 인테리어는 엄마가 하셔서 엄마 취향이야. ”
정신없이 떠들어대는 녀석들과는 멀찍이 떨어져 내 곁에 서서는 밝은 목소리로 설명하는
녀석.
녀석의 작은 어깨 너머로 들여다본 방은 선우 란이 난리 칠만한 방이었다. 온통 흰색으로
칠해진 방에는 가구는 물론이고 침대시트까지 흰색이었다 게다가 연한 핑크색 벽지와 다양
한 채도의 핑크색 소품들이 장식된 방은 란이가 좋아할 만큼 공주풍의 방이었다.
유성이 녀석이 저기서 잤다고??? 푸훗~
“ 생긴 걸 봐라. 딱! 공주 같지 않냐??? ”
“ 니가 공주면 난 왕이다!!! ”
“ 푸하하- 너희가 공주와 왕이면 난 황제다!!! ”
“ 미친- ”
동완이 녀석이 다른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고풍스런 방이 보였다.
“ 저긴 예전 주치의 선생님께서 쓰시던 방이야.
의사선생님 취향이 고상해서 바로크 시대 방을 그대로 재현해 놨어. ”
루이 14세 때의 프랑스 왕실을 재현해 놓은 그 방은 흑단으로 만든 튼튼하고 아름다운 침
대와 옷장, 책상와 콘솔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침대를 덮고 있는 시트 역시 황금색의 최고
급 실크로 만들어져 있었다. 붉은 침대 시트가 눈에 확 띄는 방이었다.
란이와 정혁이, 동완이 세 녀석은 나란히 붙어있는 침실을 두고 시끄럽게 싸우기 시작했다.
“ 저기... 내방은 이쪽이거든?... ”
그런 녀석들을 보며 머리 속을 울려오는 한심함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자 녀석은 쭈뼛쭈뼛
내게 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달칵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방 한쪽을 차지한 커다란 침대.
커다란 침대 위의 하얀색과 푸른색의 시트.
그 위로 길게 드리워져 침대의 사방을 막고 있는 캐노피.
넓은 창으로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하얀 커튼.
발치의 부드러운 소재의 콘솔.
푹신해 보이는 흔들의자.
여러 가지 색의 쿠션이 놓인 하얀 소파.
녀석과... 어울리는 방이었다.
“ 저기... 이방이 이 집에서 가장 크고, 침대도 가장 크니까...
하루 자기에는 별로 안 불편 할 거야... ”
“ 그래. ”
킹 사이즈보다 오히려 커 보이는 침대를 가리키며 말하는 녀석의 조심스런 설명에 침대 위
에 길게 늘어진 하늘하늘한 소재의 새하얀 캐노피를 손으로 잡아 올리며 물었다.
“ 근데 너... 이런 취향이었냐? ”
나의 말에 몸이 굳어서는 되묻는 녀석.
“ 응?... ”
“ 아니... 이런 건... 좀 여자애들 취향이 아닌가 해서... ”
“ 아... 그건 엄마가 좋아하셔서...
별장 인테리어는 모두 엄마가 하신 거거든... “
녀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녀석은 당황했는지 한껏 얼굴을 붉히고는 더듬더듬 황급히 말을 꺼냈다.
“ 저기... 그게... 여긴 방마다 다 있거든... 그래서... 그게... ”
“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
녀석의 말에 자미 떠올린 아까의 두 방에도 침대 위로 길게 늘어진 다양한 디자인의 캐노
피가 있는 것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녀석은 아직도 잔뜩 얼굴을 붉히고는
불편한 걸음으로 걸어 다니며 방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 저기... 저쪽 문이 욕실이고, 저게 옷장이거든?
필요한 거 있으면 아무거나 꺼내 입어.
별로 입을 건 없겠지만... ”
“ 그래. ”
녀석의 설명에 꽤나 푹신해 보이던 흔들의자에 털썩 앉아서는 방안을 돌아보자 여전히
안절부절하는 녀석의 목소리.
“ 저기... 근데.... 정말 캐노피는 여자애들이 하는 거야?... ”
“ 뭐? 아... 뭐, 꼭 그러라는 법은 없지만.
게다가 너희 엄마가 하신 거라며? ”
“ 응... ”
별 말도 아닌 것을 가지고 여전히 신경을 쓰는 건지 무심한 나의 대답에도 어쩔 줄 몰라하
며 그대로 서서는 셔츠의 끝자락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녀석에게 다시 입을 떼는 순간.
- 혜성군~ 다들 점심 식사하세요~
아래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녀석은 황급히 뛰어나갔다.
내려간 정원 식탁에는 점심 식사가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고급스럽고 깔끔한 한정식으로
준비된 점심은 오랜 여행으로 지친 모두에게 맛있게 느껴지는 듯 했다.
“ 와아~ 진수성찬이네요~ ”
“ 사모님께서 도련님 생일이라고 특별히 준비 부탁하셨어요.
점심 간단히 드시고, 저녁에는 바베큐도 준비했으니까, 재미있게들 노세요. ”
“ 우와~ 이거 창조부 다 데려왔어야 하는 거 아냐??? ”
“ 다음엔 다같이 오자. ”
동완이 녀석의 말에 신혜성이 밝게 웃으며 말하자 정혁이도 좋다며 박수를 치고는 얼른
점심이 차려진 야외 식탁 앞에 앉았다.
“ 잘 먹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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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의 카페인 cafe.daum.net/loveinX 에 오시면 소설 이미지 컷이 있습니다. ^^
[세쌍/둥이] Triplets. 세 쌍둥이 - # 19
누군가가 그랬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어 살만한 것이라고...
# 19
오늘 점심은 내가 이 별장에서 먹어 본 것 중 가장 맛있는 점심이었다.
이 곳에 있을 때는 건강을 위해서 꼬박꼬박 시간 맞춰 운동을 했지만, 점심이든 저녁이든
입맛이 없었다. 점심은 각 과목을 선생님들과 함께 하는 것이기에 그런대로 들어갔지만,
혼자 먹는 저녁은 특히 맛이 없었다.
하지만 학교에 다니며 먹는 밥은 별장에서 한 것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늘 맛있었
다. 식당에 자리가 없어 아지트의 커다란 테이블에 모여서 다같이 먹는 점심은 내가 먹어
본 어떤 만찬보다도 더 맛있었다. 또 점심을 먹은 후, 아지트에서 란이가 끓어주는 따뜻한
차나 매점의 500원 짜리 탄산음료도 어떤 비싼 유기농 과일 주스보다 맛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별장에서 먹는 밥도 맛있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 저쪽으로 나가면 작은 호수도 있고, 산책로도 있으니까 천천히 산책해요. ”
하나 둘. 점심 식사를 끝낸 우리가 둘, 셋이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거나 앉아있자 딸기와
복숭아, 메론 등의 과일과 치즈 케잌, 커피와 차를 후식으로 내어오는 아주머니께서 말씀
하셨다.
“ 와~ 호수요? 어딘데요??? ”
“ 이쪽으로 나가서............. ”
아주머니의 설명을 들은 란이와 정혁이, 동완이는 두 손 가득 아주머니께서 담아주신 과일
과 케이크를 들고는 호수 쪽으로 사라졌다.
“ 혜성이 넌 안가? ”
“ 나야 매일 가던 곳인데, 뭐...
난 이 뒤에 산책로나 천천히 돌고 올게.... ”
란이의 물음에 난 집 뒤에 심어놓은 꽃들을 보기 위해 살짝 거절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
다. 민우는 그런 우리와는 다른 세상의 사람처럼 티 테이블에 따뜻한 커피 한잔을 놓고는
느긋하게 앉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 와아~ 너희들 잘 자랐구나- 아주머니께서 잘 돌봐주셨네... ”
여기서 지낼 때 심심해서 키우기 시작한 이런 저런 화초들과 꽃들은 커다란 온실 속에서
잘 자라고 있었다.
꽃이 모두 개화한 채 입구를 가득 메우고 있는 붉은 빛깔의 야생장미 넝쿨 사이를 지나자,
부끄러운 듯 연한 핑크빛으로 물든 모란이 보였고, 그 옆으로 나까지도 깨끗해지는 듯한
하얀 백합. 핑크색과 흰색의 연산홍은 아직까지 꽃이 활짝 핀 채 남아있었다. 한쪽을 가득
채운 팬지꽃은 환상적인 보라색으로 시선을 사로잡았고, 로즈마리와 타임, 레몬 그라스, 레
몬 밤, 애플민트, 바질, 오레가노, 제라늄 등 내가 즐겨 사용했던 각종 허브들도 그대로 싱
싱하게 자라나있었다. 허브들에 코를 대고 향기를 맡자 내가 떠나던 그날과 다름없는 향기
가 느껴졌다.
아마도 죽었거나 시들거릴지 몰라 아이들에게는 말 안 했지만, 이렇게 싱싱하고 예쁜 모습
이라면 자랑해도 되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온실에서 빠져나왔다. 란이에게는 어떤 허브 화
분을 선물하고, 정혁이와 동완이에게는 또 어떤 화분을 선물해 줘야할지, 또 민우는 어떤
꽃을 좋아할지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꽤나 긴 장미넝쿨 사이를 걸어 나왔다.
바쁘게 뛰어나온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전혀 상상치도 못한 인물.
“ 미... 민우야?... ”
방금 전까지 이 세상과는 격리된 듯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민우가 아까의 무표정함
그대로 서 있었다.
“ 여긴... 왜?... 아... 산책 하려고?
산책로는 여기가 아니라... “
“ 산책하러 온 거 아냐. ”
“ 아니야?... ”
“ .............. ”
민우는 특유의 차갑고 투명한 눈으로 날 뚫어지게 바라봤다.
아름답지만 아프도록 아름답지만 두려운 눈.
그 눈이 무서웠지만 피할 수도 없었다.
- 사각
날 꽤 오랫동안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민우는 내게 한 걸음 다가왔고, 발밑의 푸른 잔디가
밟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게 다가온 민우는 나의 손목을 가만히 쥐어왔다.
“ 넌... 신유성이 아니야. ”
민우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고 다음 순간
내 입술에는 따뜻한 것이 느껴졌다.
“ 아.... ”
어떻게 된 것인지 생각할 수 없어 내가 눈을 깜박이는 사이 내 목 뒤로는 뜨겁고 커다란
손이 느껴졌고 나의 입안으로 뜨겁고 물컹한 것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순간 가슴이 바
닥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고 어지러워졌다.
“ ...... !!!!!!.... 신혜성! 신혜성!!!!!!! ”
[세쌍/둥이] Triplets. 세 쌍둥이 - # 20
순수 배양된 화초.
필요한 것 이외에는 주어지지 않아, 어쩜 현실에는 적응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꽃.
정상적으로 자란 열여덟 살의 남자아이라면 당연히 알아야할 것을 모르는 꽃.
순수 배양된 화초.
# 20
순간적인 기분에 의해서였다.
내 스스로도 내가 이렇게 충동적인 녀석인지 몰랐는데 그 순간 나의 행동은
정말 충동적이었다.
날 가만히 바라보는 다갈색의 예쁜 눈동자를 보는 순간.
나의 손에 잡혀온 따뜻하고 연약한 손목의 맥박이 느껴지는 순간.
붉고 말랑해 보이는 그 입술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냥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작고 부드러운 입술이 닿는 순간,
가볍게 느껴지는 오렌지의 향기에 미소를 짓기가 무섭게 무너져 내리는 몸.
“ ...... !!!!!!.... 신혜성! 신혜성!!!!!!! ”
파리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약하게 숨을 내쉬고 있는 모습에 당황했다.
작은 몸을 안아들자 느껴지는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가벼움.
그 여린 몸을 안아들고는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 저기!!! 혜성이가. 혜성이가!!!! ”
“ 무슨 일.... 혜... 혜성군!!!!!! ”
앞치마를 한 채 주방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던 별장지기 아주머니께서 나의 품에 안긴 혜성
이를 보고는 크게 소리치셨고, 그 소리에 뛰어 들어오신 아저씨께서는 재빨리 전화기를 들
어 전화를 거셨다.
침대에 눕혀진 혜성이는 아까보다는 화색이 도는 듯 보였지만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다.
.
.
.
“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예요.
오히려 몸은 여기 있을 때보다 더 좋아진 걸요.
좀 쉬고 나면 깨어날 겁니다. ”
왕진 오신 마을 의사 선생님께서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그 말에 의사선생님을 따라 나가시는 부부.
하얀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하얀 얼굴에 심장이 무거웠다.
단지... 단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유성이와 똑같은 얼굴을 한 녀석에게 유성이와는 다른 느낌이 드는 것이 화가 나서.
조금. 아니 꽤나 많이. 심술이 났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심술을 지속할 수도 없을 정도로 솔직한 녀석의 감정 표현에 짜증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하지만 또 한편으로 녀석이 나타난 이후로 한순간도.
단 한순간도 녀석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녀석에게 화가 났다.
심술과 짜증 그리고 화가 나는 감정.
또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감정에 혼란스러워진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녀석을 만나려던
것뿐인데. 녀석을 만난다면 해결되지 않을까 싶어서 간 것뿐인데.
나도 모르게 한 행동에 그대로 쓰러지는 녀석.
내가... 그렇게 싫었냐?
내가 널 싫어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그렇게 내가 싫었냐?
- 쾅!!!
“ 혜성아!!!! ”
커다란 문소리를 내며 뛰어 들어오는 란이 일행이 시끄럽게 소리쳤다.
“ 어떻게 된 거야??!!! ”
“ ........................... ”
“ 어떻게 된 거야. 이민우? ”
“ ........................... ”
“ 야! 야! 이민우!!!! ”
그대로 방을 나와 버렸다.
아직도 눈 뜨지 못한 녀석도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소리치는 란이도 걱정스럽게 나와 녀석
을 번갈아 바라보는 정혁이와 동완이도 보기 싫어 아무 말 없이 나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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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의 카페인 cafe.daum.net/loveinX 에 오시면 소설 이미지 컷이 있습니다. ^^
Written by. love
첫댓글 혜성이 어머나 정신 놓으셨군요. 얼마나 충격이였을가요?....
민우의 심술은 왜죠? 유성이 좋아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