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스위트 홈
한 홍 지음
두란노/2001년 10월/173쪽/6,500원
▣ 저자 한 홍
서울에서 태어난 한홍 목사는 열 네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미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동서양의 문화를 골고루 체득한 그는, 목회하시는 아버지와 신앙심 돈독한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났다. 버클리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면서(B.A), 위대한 리더들의 흥망성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지금의 세계 정세에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유럽과 미국 현대 외교사의 매력에 빠져들면서 시대의 흐름에 대한 날카로운 안목도 기를 수 있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 학위를, 풀러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교회와 사회라는 두 축을 역사적, 신학적, 성경적 관점에서 꿰뚫어 볼 수 있는 넓은 시야를 갖게 되었다.
교회 강단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리더십 강의를 해 오면서 성경적 리더십 전파에 힘써 온 한홍 목사는, 2000년에 『거인들의 발자국』이란 베스트셀러를 출간한 후, 교회 강단에 서는 것보다 세상 속에서 성경적 리더십을 강의하는 횟수가 훨씬 많을 정도로 활발하게 리더십 강의를 해 오고 있다. 리더십 명강사라는 호평과 아울러 한홍 목사는 어떤 주제보다 가정에 대한 설교에 큰 비중을 싣고 있다. 성경적 가정관을 명확하게 제시할 뿐 아니라 스스로도 그 원칙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홍 목사는 무엇보다도 가족간의 사랑과 믿음이야말로 오늘의 자신이 있게 한 바탕이라고 고백한다. 어릴 때는 자신의 열렬한 팬이 되어 환호성을 아끼지 않은 아버지와 기도하는 어머니, 자상한 누나, 성실한 형이 있었고, 지금은 상황이 어려울 때나 감사할 때를 막론하고 인내와 지혜를 잃지 않고 현명하게 내조해 주는 아내와 삶의 기쁨이 되는 두 자녀, 지수와 지섭이가 곁에 있다.
현재 그는 온누리 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기며, 새신자 예배 담당 목사, 두란노 바이블 칼리지 학장, 한동대 겸임 교수, 리더십 세미나 강사로 맹렬히 뛰고 있다. 또한 국제 산업디자인 대학원의 최고 경영자 과정에서 2년째 리더십 특강을 해오고 있고, 그 외에도 세브란스 병원 간부 리더십 훈련 특강, 아태 재단 국제 지도자 모임 리더십 특강 등을 맡아 왔으며, MBC 신우회 모임을 이끌고 있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저자 특유의 명쾌한 논리로 거침없이 써 내려간 가장 달콤하고 가슴 뜨거운 '스위트 홈' 스토리! 이상적인 가정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여기 성경적인 아버지와 어머니, 남편과 아내, 아들과 딸의 역할 모델을 제시한다.
본서의 제목인 "홈, 스위트 홈(Home, Sweet Home!)"이란 말은 원래 미국 사람들이 오랜 여행이나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야, 역시 집이 최고야!"라는 뜻으로 쓰는 표현이다. 가정이란 바로 우리에게 이렇게 편안한 쉼을 제공해주는 하나님께서 주신 보금자리인 것이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만드시고, 인간을 만드신 후 그들이 가정을 이루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가정 안에서만이 얻을 수 있는 행복과 가족이라는 특별한 공동체를 우리에게 허락하심으로 우리에게 커다란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이다.
세상을 둘러보면 이름만 가족일 뿐 남처럼 딱딱하고, 어색하고, 냉랭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한 부부들이 조그만 문제만 생겨도 서로를 멀리하고, 이혼이라는 방법을 택하는 경우가 갈수록 많아지고 있으며, 그 사이에서 상처받은 자녀들은 자아정체감을 확립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 아무리 화려한 물질문명 속에 산다고 해도 어느 사회에서나 그 기본이 되는 가정이 흔들리면 그 사회는 오래 가지 못한다. 바로 그 무너진 가정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은 책이 바로 여기 있다. 본서에서는 가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이 담긴 말씀이 가득 담겨 있다.
▣ 차 례
1. 아들아, 네가 아버지 마음을 아느냐? (누가복음 15:11-32)
2. 아빠, 하나님을 보여 주세요 (야고보서 1:17)
3. 딸아, 부드러운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켜라 (에스더 4:13-16)
4. 어머니, 목숨보다 진한 사랑의 비전 (누가복음 1:30-33, 35)
5. 결혼: 만남의 법칙 (창세기 2:19-25)
6. 현숙한 아내의 아름다움 (베드로전서 3:1; 잠언 31:10-31)
7. 남편이 불러 주는 노래 (베드로전서 3:7; 에베소서 5:25-28)
8. 다음 세대를 위해 기도하라 (사무엘상 1:26-28)
홈, 스위트 홈
한 홍 지음
두란노/2001년 10월/173쪽/6,500원
아들아, 네가 아버지 마음을 아느냐? (누가복음 15:11-32)
집(home)은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일 때부터,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속삭이시는 아버지의 따뜻한 음성이 있는 곳이다. 믿음이란 언제나 우리에게 영원한 집이 있다는, 그리고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는 집이 있다는 사실을 의심치 않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음성만 듣고 자라던 어린아이가 좀 철이 들면서 다른 이상한 목소리들을 듣기 시작한다. "집을 나가서 너의 존재 의미를 입증해라. 너도 아버지 없이 뭔가 할 수 있음을 보여 줘라. 그럼 아버지도 놀랄 거야. 아버지도 너를 만만히 보지 못할 거야."
왜 이런 소리에 귀가 솔깃해서 넘어갈까? 헨리 나우웬은 우리가 세상 사고방식과 구조에 길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부모의 사랑을 포함하여 이 세상의 사랑에는 항상 조건이 달려있다. 사랑받을 조건을 갖추면 사랑을 받는다. 세상의 사랑은 완전히 조건부 사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불나방처럼 그런 세상으로 계속 날아든다. '아버지 같은 것은 없어도 살 수 있다.'는 무서운 반역의 생각으로 발전하게 된다. <가시나무>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내 속에 내가 너무나 많아 당신의 거할 곳이 없는" 것이다.
세상은 빼앗을 것이 있고 이용 가치가 있는 한, 인간을 잘 대해 준다. 그러나 내가 주고 또 주어서 더는 줄 것이 없으면 세상은 아주 야멸차게 나를 버린다. 비로소 그때, 탕자는 이때껏 사람들과 맺어 온 인간관계가 얼마나 얄팍하고 가식적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렇게 한 발짝만 내딛으면 인생이 완전히 끝장나고 말겠다는 위기감이 작은아들을 엄습한다.
광야는 이렇게 우리가 완전 파멸에는 이르지 않도록 경고해 주는 인생의 경고등 역할을 한다. 제정신을 차린 작은아들은 자신이 도망쳐 나온 아버지 집의 풍요로움을 비로소 떠올린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이 인간보다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 천국이 이 땅보다 얼마나 풍성한 곳인지를 깨닫는 데서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이 아들은 아버지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 아들임을 포기할 테니 종으로라도 받아 달라고 애원할 참이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기를 두려워하는 것도 하나님을 이렇게 무섭고 어려운 분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자기와 같은 사람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본질적으로 우리와 다른 분이다. 하나님의 용서를 어린아이처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완전한 자유를 만끽하기가 어렵다. 하나님의 치유와 용서와 새롭게 하심은 엄청나고 완전한 것이다. 이 지상의 어떤 지식과 경험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차원 높은 거룩한 용서를 흡수하고 의심치 말고 아버지의 넓은 품에 뛰어들라.
그래도 작은아들은 파멸하기 직전에 깨닫고 돌아왔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몸은 살아 있어도 영혼은 완전히 죽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흑암의 목소리는 항상 뭔가 노력해야 사랑받고 인정받을 수 있다고 부추긴다. 그래서 우리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바쁘고 정신없게 살아간다. 이 흑암의 목소리에 취해 있으면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하고 받아 주시는 아버지의 부드러운 음성을, 사랑의 추적자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
요한일서 4장 19절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는데, 돌아온 탕자 이야기만큼 이 사실을 드라마틱하게 입증하는 말씀도 없다. 내가 하나님을 찾아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하나님이 나를 찾아다니신 것이다.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를 찾아 먼저 손 내미신 사실을 강조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버지 따위는 없어도 살 수 있다.'고 무례하게 집을 나갔지만, 헐벗은 옷과 몸으로 비참하게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아버지는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는다. 그냥 측은히 여기고, 불쌍해 할 뿐이다. 아들은 이미 자기 잘못을 뼈저리게 알고 있다. 자기 죄를 아는 죄인에게 이제 필요한 것은 용서뿐이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안다면 전도를 안 하고는 못 배긴다. 이것만큼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도 없다. 그래서 그런지 전도하는 사람만큼 영성이 살아 있는 사람은 없다. 잃어버린 영혼을 계속 주님께 인도하는 사람 중에, 신앙이 메말라 있는 사람, 눈물이 없는 사람, 힘이 없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하늘 아버지는 그 기쁨을 우리와 공유하고 싶어하신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이 잃어버린 영혼을 환영할 때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영혼을 사랑의 추적자이신 하나님과 함께 추적해서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사람의 가슴에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 있다.
형의 경우에는 문제가 다르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이 사람의 죄의 실체가, 돌아온 동생을 맞아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를 보며 분노하는 모습에서 여실히 드러나 버린다. 그는 평소에 아버지의 집에 있으면서도 자유함이 없고, 기쁨이 없고, 감사함이 없는 노예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아들이므로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마음은 바로 바리새인들의 율법적인 신앙의 본질이며, 믿은 지 오래된 기성 신자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 뒤에는 엄청난 악의 세력이 흑암처럼 도사리고 있다. 이 '집안의 탕자'도 '집 나간 탕자'와 마찬가지로 혼자 의지로는 도저히 끝없는 내면적인 방황과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 그도 사랑의 추적자의 초자연적인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맏아들의 무례함에 분노하거나 꾸짖지 않고, 놀라운 사랑과 이해와 부드러움이 가득 찬 언어로 부자지간의 친밀한 관계를 상기시킨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You are always with me)." 아버지의 것이 다 자기 것임을 알았다면 큰아들은 넉넉한 마음으로 동생을 품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넉넉한 사랑을 내가 풍성히 누리지 못하면, 결국 다른 사람을 품을 여력도 없게 되고, 이들을 아버지의 품으로 데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돌아온 아들 이야기가 가장 기초적으로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은 우리가 작은아들이든 큰아들이든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가장 궁극적으로 도전하는 것은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아버지가 되라는 것이다. 우리는 잃었던 아들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품어 주어야 한다.
어머니, 목숨보다 진한 사랑의 비전 (누가복음 1:30-33, 35)
한 인간이 태어나 성장할 때, 어머니의 역할은 실로 엄청나다. 사람의 외모나 키, 지능 지수, 감성 등 여러 부분이 아버지보다는 어머니한테 유전받을 확률이 훨씬 높다고 한다. 성장하면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어머니와 함께 보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군대에 가서 누가 제일 보고 싶은지 물으면, 거의 대부분 서슴지 않고 '어머니'라고 말하면서 덩치 큰 병사들이 눈물을 글썽이곤 한다.
모든 어머니들은, 특히 하나님을 믿는 어머니들은 어떻게든 자식을 잘 키우고 싶어한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일까? 요즘 세상에서 어머니들을 유혹하는 수많은 교육자료와 방법들 중에 과연 어떤 것이 옳은 것일까? 오늘 우리는 일단 다른 생각들은 모두 접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이 땅에서 낳고 키운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그 대답을 찾고자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자식들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키울 수 있는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마리아는 가난했지만 대단히 용기 있고, 결단력이 강한 여인이었다. 솔직히 말해,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이 주신 아기를 잉태할 것이라고 말했을 때 마리아가 얼마나 놀랐을까?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가 아이를 낳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러나 마리아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천사가 말해주자, 조용히 그러나 결연히 순종한다. 마리아가 이토록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순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했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제사장 집안인 친척 엘리자벳의 집에 머무르면서 태교를 할 때 순간적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는 시를 지었는데, 일명 '마리아의 노래'라는 이 시는 놀랍게도 10절밖에 안 되는 짤막한 싯귀 속에 창세기, 욥기, 신명기, 이사야, 스바냐 등 약 47개의 구약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 이것은 마리아가 평소에 늘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이었음을 말해 준다. 가장 확실한 태교는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다. 어머니가 늘 찬양과 말씀과 기도가 있는 환경에 거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자기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 아들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들려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리아의 반응이다. 성경은 마리아가 자기 아들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사건과 말들에 놀라고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겨 깊이 생각하였다."(눅 2:19)고 말한다. 연약한 인간이기에 이 일의 정확한 의미를 당장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대충 보아 넘기거나 여기저기서 함부로 떠벌리지도 않았으며, 그 모든 말과 사건들을 깊이 마음속에 각인했다. 오늘날 우리 믿음의 어머니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이미 우리 주위에 있는 좋은 사람들과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 자녀들을 향한 당신의 뜻을 끊임없이 보여 주고 계신다는 것이다. 어머니들이여, 자녀들을 키우면서 일어나는 일들, 주위의 믿음의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그냥 넘기지 말고 마음 깊이 새기고 생각해 보라.
비전을 품는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우리는, 목숨을 걸고 이집트로 도망해야 했던 마리아와 같은 고난의 순간들을 많이 만난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어두운 골짜기들을 지나가게 될지도 모른다. 이 아이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실 비전을 파괴하려는, 수없이 많은 공격들과 위기들을 믿음의 어머니들은 목숨을 걸고 넘겨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난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환난 속에서도 지켜 주실 것이고 인도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내 아이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가난한 살림에 매년 어린 자식들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전에 간 마리아는 자식들, 특히 예수에게 살아 있는 신앙 교육을 한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예수를 잃어버리고 사흘이나 찾아다니던 마리아는 성전에서 당대 최고의 예루살렘 대학자들과 함께 성경을 놓고 토론하고 있는 예수의 모습을 발견한다. 놀랍게도 틴에이저인 예수의 지혜와 성경 해석은 그 노학자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로 수준이 높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때도 성경은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새겨 두었다."고 말한다. 마리아는 침착하게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늘 하던 대로 조용히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신비하게도 성경은 예수의 서른 살 이전의 성장 과정을 자세히 언급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서른 살이 되기까지, 목수인 아버지 요셉 밑에서 목공일을 하면서 자랐다는 사실이다. 인생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그 시기에 대해 성경이 침묵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는가? 아마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비전을 감당하려면 어느 정도 기다리고 침묵하고, 준비하고, 숨어 있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택하신 자를 쓰시기 전에 하나님은 항상 그 날개 밑에 숨기시고, 광야로 보내어 다듬으시고, 준비하게 하신다.
그토록 정성스럽게 키운 아들이 서른 셋 젊은 나이에 십자가형이라는 당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당할 때, 어머니 마리아는 그 현장에 서 있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잉태한 아들인 예수의 존재는 마리아에게 절대적이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그 가련한 어머니의 모습을 본 십자가의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마리아를 어머니처럼 모실 것을 부탁한다. 놀라운 것은, 그 힘든 상황에서도 마리아는 아무 원망 없이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들 예수의 '탄생의 충격'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받아들인 마리아는 아들의 '죽음의 충격' 또한 그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자식을 하나님께 믿고 맡긴다는 것은, 그 자식이 겪을 어떤 아픔이나 실패나 좌절에도 하나님의 위대한 뜻이 담겨 있음을 믿고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결국 아들 예수의 죽음, 그 십자가는 온 인류의 죄를 구원하는 엄청난 일을 했다.
우리가 믿음의 어머니로서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마음을 여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지나치게 인간적인 간섭으로 자식의 삶을 좌지우지하려 들면, 어느 연로한 어머니의 고백처럼, "자식은 만지는 만큼 망가지고 말 것이다." 직접 아이를 낳아서 키워 본 아동 교육 전문가들도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한다. "이론대로, 내 맘대로 잘 안 된다." 그렇다. 좋은 어머니가 되는 왕도는 따로 없다. 그저 매일매일 자신의 자녀가 내 자식이 아닌 하나님의 자식임을 인정하고, 그들을 그분의 뜻대로 키우시도록 맡겨 드리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다. 바로 그것이 믿음의 어머니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목숨보다 진한 사랑이다.
현숙한 아내의 아름다움 (베드로전서 3:1; 잠언 31:10-31)
좋은 아내를 만나는 것은 정말 큰 복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아내가 좋은 아내일까? 베드로 전서 3장 1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아내 된 여러분은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의 위치에 충실하라는 의미를 강조하는 말이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보다 열등하기 때문이 아님은 순종의 참 모델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이 증명한다. 아내의 순종의 가장 아름다운 모범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님이다. 당신도 자신의 어줍잖은 능력 휘두르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순종한다면, 상상도 못할 기적이 임할 것이다.
남편과 아내는 미래에 하나님 앞에 서서 함께 동등하게 상을 받게 되어 있다. 7절을 보면, 남편과 아내는 "은혜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함께 누릴 반려자"라고 명시하고 있지 않는가?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남편이라도 말없이 실천하는 여러분의 행동을 보고 하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벧전 3:1). 복음을 입으로 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말로 꾸짖고 빈정대고 몰아붙인다면 절대 남편을 변하게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빌리 그레이엄의 아내 루스 그레이엄이 이런 말을 했다. "내 남편을 변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고, 내가 할 일은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또한 "남편들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깨끗한 생활을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벧전 3:2). 아내의 삶은 마치 '침묵의 설교'와 같다는 것이다.
베드로 전서 3장 3-5절에는 아내가 자신의 겉모양을 꾸미는 것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하나님은 이 세상이 주는 화장법과 패션은 유한하지만 하나님이 주는 화장법과 패션은 영원할 것이라 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화장법은 무엇일까? 성경은 "유순하고 정숙한 마음가짐(a gentle and quiet spirit)으로 속 사람을 아름답게 하십시오."(벧전 3:4)라고 말한다. 이것은 마음이 조용하고 차분하며 산만하지 않아 아주 평안한 상태를 가리킨다. 속 사람을 썩지 않을 하나님의 영으로 단장한 사람은 차분하고 안정되어 있다. 진짜 힘은 조용하다. 진짜 능력은 부드럽고 안정된 능력이다. "옛날 하나님에게 희망을 두었던 거룩한 여자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함으로 자기를 꾸몄습니다."(벧전 3:5)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외모에 신경 쓰지 않고 아무렇게나 하고 다니라는 말은 아니다. "그녀는 자기 침실을 아름답게 꾸미며 아름답고 고운 모시옷과 자색 옷을 입는다."(잠 31: 22). 즉 현숙한 아내는 대단히 깔끔하고 세련된 단장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녀는 자신뿐 아니라 집안 식구들의 외모나 옷도 깔끔하고 풍성하게 유지한다. "그녀는 모든 가족에게 입힐 따뜻한 옷을 마련해 놓았으므로 겨울이 닥쳐도 염려하지 않는다."(잠 31:21). 본질적인 아름다움인 인격의 아름다움을 충실히 닦은 뒤에 포장인 외모의 아름다움도 가꾸라는 것이다.
지혜의 보고라고 일컫는 잠언의 마지막 장은 현숙한 아내가 가져오는 복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여기서 '현숙하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도덕적으로 덕이 있고 심지가 굳으며, 재능이 탁월하다."는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잠언 31장은 아내의 탁월한 집안 살림 경영 능력을 다룬 부분이 상당히 많은데, 그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부지런하다. 둘째, 미래를 위해 투자하고 예비한다. 셋째, 열린 마음으로 여러 사업을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진행한다. 넷째, 지혜롭게 말하고 가르친다. 다섯째, 식구들의 삶을 풍성하게 한다. 여섯째,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돕는다.
현숙한 아내는 순종하는 아내이면서 동시에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살림 경영 능력이 있는 아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런 아내를 만난 남편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리더가 되어 존중받는다고 한다. 여자는 남자를 '주(Lord)'라고 부르기까지 순종해야 하지만, 동시에 남자가 사회에서 리더로서 존경받고 인정받는 위치에 오르는 것도 아내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남자들은 기억해야 한다. 또한 좋은 아내를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전제로 하는 것임을, 또 내가 잘나서 이렇게 좋은 아내를 만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선물로 그녀를 만난 것임을 우리는 늘 명심하고 살아야 한다.
아름다움의 비결(Beauty Tips)
당신이 매력적인 입술을 갖기 원하면, 친절한 말을 하세요.
사랑스런 눈매를 갖기 원하면, 사람들 안에 있는 선(善)을 찾으세요.
날씬한 몸매를 원한다면, 당신의 음식을 배고픈 이들과 나누세요.
아름다운 머릿결을 원한다면,
당신의 아이가 그 귀여운 손가락으로 당신의 머리를 하루에 한 번씩 만지게 하세요.
멋진 자세를 원한다면, 당신은 절대 혼자 인생을 걸어가지 않음을 기억하고 걸으세요.
이 세상 그 어떤 것들보다 사람들을 회복하고, 새롭게 하고, 살려 내야 합니다.
그 누구도 함부로 무시하고 버리지 마세요.
기억할 것은 당신이 만약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되거든,
당신의 옆에 언제나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인의 아름다움은 그녀가 입은 옷이나,
그녀의 몸매나 그녀가 머리를 빗는 스타일에 달린 게 아닙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여인의 눈에서 나타나는데
그것은 눈이야말로 그녀의 마음으로 통하는 문이기 때문이며,
그녀의 마음이야말로 사랑이 넘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여인의 영혼 속에 투영됩니다.
그것은 그녀가 기꺼이 베푸는 보살핌이며
그녀가 늘 간직하고 있는 열정일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이런 여인의 아름다움은 더욱 영글어 갈 것입니다.
- 오드리 헵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