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논쟁끝에 드디어 국기제정
영-불계 간의 감정으로 지연, 피어슨수상이 밀어붙여
67년 몬트리얼 엑스포서 국가상징으로 인정 받아
캐나다 무대에 오르다
1867년 연방제도를 이룩한 후 국민들은 국기 제정의 필요성에 대해 논의해왔다. 1892년, 영국 해군본부는 캐나다 상선들이 캐나다 문장(紋章)을 테두리에 붙인 영국 해군의 붉은 깃발 사용을 허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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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도안을 결정했던 하원위원회는 회의를 41번 차례나 가졌고 2000여개의 도안을 검토했다. 도안은 국민각계각층에서 나왔다.
위원회는 전문가들의 조언도 듣고 자체 토론을 거쳐 최후의 결정을 내렸다. 현재 사용중인 국기 '메이플리프'(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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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켄지 킹(Mackenzie King) 수상은 1924년 이 깃발을 비공식적인 국기로서 국회의사당 에 게양할 것을 명령했다.
이듬해인 1925년 킹 수상은 새로운 국기를 제정하기 위해 국회내 분과위원회를 결성했으나 강한 반대 여론에 부딪혀 계획을
취소했다. 1, 2차 세계 대전에서 캐나다는 영국 국기(유니언 잭) 아래에서 싸웠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영국 국기를 자유의
상징으로 보았던 것이다. 1962, 선거철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새로운 캐나다 국기의 제작 가능성이 다시 심각하게 고려되었다.
1964년 피어슨 자유당
출신 수상은 선거공약대로 국기제정을 강행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퀘벡에서는 ‘조용한 혁명’(Quiet Revolution:
캐나다로부터 분리독립을 위한 혁명)이 진행되고 있어 피어슨은 새 국기가 캐나다의 단결을 촉진시킬 것으로 희망했다. 그는 하얀
바탕에 세 개의 단풍나무 잎들이 중앙에 있고 양 테두리에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를 상징하는 파란색 줄이 세로로 그어져있는
디자인을 선택했다. 마침내 그는 가장 완고하고 국수적 단체였던 캐나다재향군인회의 연례모임에서 새 국기를 선보였다.
새 국기 디자인을 보자마자
한 퇴역군인이 소리쳤다: "당신은 캐나다를 프랑스놈들(*역주: 프랑스계 캐나다인. 주로 퀘벡 사람들을 뜻함.)에게
팔아먹는거요!" 건국이래 사용된 국기는 영국적이었으므로 많은 영국계 국민은 피어슨이 프랑스계 쪽의 환심을 사려는 것으로 느꼈던
것이다. 반면 대다수의 프랑스계는 국기논쟁을 영국계 민족주의자들과 영국 제국주의자간의 해묵은 투쟁의 연장선상이라고 보았다.
프랑스계는 자신들을 영국계통과 완전히 분리되어 구별되기를 열망했기 때문에 새로운 국기에 영국의 잔재가 전부 제거되기를 원했다.
퀘벡주민들이 국기 논쟁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있다. 주민 극소수만 이에 관여했고 피에르 트루도(전 수상)는 "퀘벡은 국기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건 절대 관심 밖"이라고 말했다. 다른 지역의 국민들은 새 국기에 대해 격렬하게 반응했다. 자유당
간부회의에서 뉴펀들랜드 출신 터커 의원은 눈물을 흘리면서 영국기 유니언 잭의 영광을 노래한 16절의 시를 낭송했다. 같은 주의
주수상 조이 스몰우드는 유니언 잭이 제외되지 않기를 요구했다. 역시 뉴펀들랜드의 또 다른 의원인 잭 픽커스질 역시 “만약
합의되지 않으면 의원직을 사임하겠다”고 위협, 스몰우드의 요구를 지지했다.
결국에는 캐나다의 영 연방
일원 사실을 상징하기 위해서 유니언 잭을 특정시기에만 게양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그러나 디펜베이커는 "두 국기" 정책에 대한
그의 반대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잭 피커스질을 놀렸다. "...두 깃발의 잭, 하나는 정치적 쇼를 위한 것, 또 하나는
조(*역주: 뉴펀들랜드 수상 조이 스몰우드를 지칭한 것.)를 위한 것."
1964년 길고도 무더운
여름이었다. 국회의원들은 국기에 대한 논쟁을 계속 하기 위해 여름 휴가까지 취소했다. 피어슨은 논쟁을 끝까지 지켜보기로 단호하게
마음을 굳혔다. 1964년 12월, 마침내 논쟁은 극적으로 끝을 맺었다. 12월 9일 보수당 일원인 레온 벨커는 정부가 논쟁이
끝을 맺도록 하는데 도왔다. 토론은 국기의 도안을 최종 결정하는 15명의 당파초월 위원회로 넘겨졌다. 투표는 일주후인
12월15일 하오 1시로 정해졌다. 보수당은 지연전술을 썼으나 16일 새벽 2시, 새 국기를 결정하는 투표는 163명의 찬성표와
78명의 반대표로 마침내 종결되었다. 캐나다는 새로운 국기를 갖게 됐다.
캐나다의 축제 엑스포 67
캐나다인들은 캐나다 건국 100주년되는 해를 복잡한 심정으로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은 건국기념식을 열정적으로 고대했지만 캐나다의
미래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캐나다가 앞으로 100년동안 단일국가로 머무를 것인가? 그 해, 캐나다는 엑스포 67이라는 세계적인
박람회를 퀘벡의 몬트리얼에서 가졌다.
박람회는 60여개
국가로부터 5천만명의 관람객을 끌어 모았다. 평소 겸손했던 캐나다는 일년간 아주 자랑스러운 행사를 선보였다. 국기는 엑스포에서
캐나다의 상징으로 등장했고 세계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엑스포에서 상영된 캐나다 영화 미궁(迷宮: the
Labyrinth)는 캐나다의 미래가 미로 속의 여행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했다. 캐나다는 이 해에 많은 어려운
도전들에 직면했다. 그것은 어느 한 정당에게는 시의적절한 시기였다.
결론
60년대는 캐나다에서
사회정의(Social justice)가 가장 두드러진 화두였다. 이것은 결국 모든 종류의 차별을 거부하는 인권헌장(Bill of
Rights) 제정과 프랑스계 국민들을 위한 2중언어와 2중문화를 위한 국립조사위원회 설치를 성사시켰다. 정부의 역할이 사회의
부정의와 불평등 문제 시정까지 로 확대 되자 주정부들의 권한이 커졌다. 헌법역할을 한 BNA(British
North-American Act) 법에 의하면 여러 사회적 문제는 주정부 소관이었다. 이같은 권력의 분할은 지방분권화를 초래,
연방과 주정부간의 쉼없는 투쟁 가능성을 내포했다. 국외 정세는 좀 더 위험했다. 세계가 동/서부 진영으로 갈라져 핵전쟁 위험을
힘의 평형으로 겨우 막고 있었다. 자유진영측은 캐나다가 방위전략상 중요역할을 수행할 것을 기대했으나 국민들은 세계 핵무기 개발이
핵전쟁 위험성을 가중시킨다고 보고 이에 반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