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김씨(金海金氏)의 연원(淵源)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가락국기(駕洛國記) 등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서기 42년 3월 가락국(駕洛國)의 아홉 촌장(九村長)이 구지봉(龜旨峯)에 모여 나라를 통솔할 군장(君長)을 얻기 위해 하늘을 향해 의식(儀式)을 올리자 한줄기 빛이 내려와 함께 달려가 보니 금합(金盒)에 여섯 개의 알(卵)이 담겨 있었다.
얼마 후에 알 속에서 여섯 동자(六童子)가 나왔는데 그 중 제일 먼저 나온 자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다. 금란(金卵))에서 나왔으므로 성(姓)을 김씨(金氏)라 하였고 제일 먼저 나타났으므로 이름은 수로(首露)라 하였으며 국호(國號)를 대가락(大駕洛)이라 하였으니 이분이 바로 김해김씨의 시조(始祖)이신 김수로왕(金首露王)이시다.
서기 44년(甲辰年) 2월에 도성(都城)을 건축(建築)하고 궁실(宮室)을 조영(造營)영하였고 서기 48년(戊申年) 7월에는 아유타국(阿踰陀國) 공주(公主)인 허씨(許氏)를 맞아들여 왕비(王妃)로 삼았다.
거등왕(居登王), 마품왕(馬品王), 거질미왕(居叱彌王), 이시품왕(伊尸品王), 좌지왕(坐知王), 취희왕(吹希王), 질지왕(銍知王), 겸지왕(鉗知王)을 지나, 10대 구형왕(仇衡王)이 서기532년 신라에 양국(讓國)하고 상등(上等)의 위(位)와 가락국을 식읍(食邑)으로 받았으며, 그의 아들 세종(世宗) 과 무득(武得) 무력(武力) 모두가 각간(角干)을 역임(歷任)했다.
무력(武力)의 아들 서현(舒玄)은 백제(百濟)와 여러 번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소판(蘇判) 대량주도독(大良州都督)을 역임하고 629(眞平王51)년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함락시키고 각간(角干)으로 제수 받았으며 서현(舒玄)의 둘째딸 문희(文姬)는 태종무열왕비(太宗武烈王妃)가 되었다.
구형왕(仇衡王;仇亥)의 증손(曾孫)이고 서현(舒玄)의 아들인 유신(庾信)은 신라 무열왕과 함께 삼국통일의 대업(大業)을 달성한 명장(名將)으로 무열왕의 딸 지소부인(智炤夫人)과 혼인했다.
김해는 경상남도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하는 고장으로 고대국가인 여섯가야(六加耶)중 금관가야(金官加耶)가 종주국(宗主國)이였으나 서기532년 신라에 병합된 후 금관군(金官郡) 또는 금관소경(金官小京)이라 불리웠다. 김해김씨는 신라김씨의 알지계(閼智系)와 함께 우리나라 김씨의 양대산맥(兩大山脈)을 이루어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변성하여 왔다. 특히 김해김씨는 족세(族勢)가 크게 번창해짐에 따라 148여파로 분파(分派)되었으며 그 중에서 금녕군파(金寧君派=京派)와 감무공파(監務公派=四君派),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三賢派), 문경공파(文敬公派)의 후손들이 가장 많다.
각파별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금녕군파(경파)의 중조(中祖) 금녕군(金寧君) 목경(牧卿)의 아들 보(普)는 공민왕(恭愍王)이 세자(世子)로 연행(燕行;국가의 사절로서 중국의 북경에 감)할 때 시종(侍從)한 공으로 충근량절보리공신(忠勤亮節輔理功臣) 수시중(守侍中)에 이르렀고 목경(牧卿)의 6세손 영견(永堅) 영서(永瑞)․영정(永貞)․영순(永純) 4형제가 빼어났으며 숙종(肅宗)때 명신(名臣) 우항(宇杭)은 영정(永貞)의 후손으로 1713년(숙종 39)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감무공파(監務公派)에서는 중조(中祖) 익경(益卿)의 손자 진문(振門)이 고려말에 예의판서(禮儀判書)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올랐으나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이 색(李 穡)․박자검(朴自儉)등과 함께 은거하여 절의(節義)를 지켰으며, 그의 둘째 아들 추(錘)는 도총관(都摠管)을 넷째 아들 석(錫)은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막내 조(銚)는 세종때 집현전(集賢殿) 수찬(修撰)을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올랐으며,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할 때 장영실(蔣英實)과 함께 간의대(簡儀臺)․자격루(自擊漏)․혼천의(渾天儀) 등을 만든 것으로 전한다.
특히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그에게 평소의 소원을 묻자 “백년동안 날마다 어탑(御榻;임금이 앉는 제구)을 모시고 금규화(金葵花) 앞에 진퇴를 엎드려 묻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한 것으로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전한다.
한편 진문(振門)의 5대손 극희(克禧)가 명사수로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막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한산도 싸움에서 전사했으며, 그의 조카 완(完;학천군 극조의 아들)은 역전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임진왜란 때 남원대첩(南原大捷)에 공을 세웠던 그는 1624(仁祖 2)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平定)할 때도 창성(昌城) 방어사(防禦使)로 길마재 결전에서 공을 세우고 진무3등공신(振武三等功臣)에 올라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우 우(宇)는 병자호란 (丙子胡亂)때 벽동성(碧潼城)을 사수했던 명장(名將)으로 이름이 높았다.
우(宇)의 아들 여준(汝峻)은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인평대군(麟坪大君)을 호종(護從)한 18장사(壯士)의 한 사람으로 심양(瀋陽)에 갔을 때 옥하관(玉河關)에서 세자(世子)를 소리내어 울렸다는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읊어 더욱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용력에 힘을 뽐내며 목숨을 건 결투를 신청해 온 청나라 장수 우가(禹巨)의 코를 문질러 이김으로써 병자호란의 굴욕과 인질로 잡혀가는 세자를 호종하는 비애 등 백성들의 원한을 풀었다고 한다.
그 후 세자가 돌아와 즉위한 다음에도 이 슬픈 기쁨과 옥하관의 달밤 일을 못 잊어 과거의 시제(詩題)에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자주 출제하였다 한다.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삼현파)의 중조(中祖) 관(管)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학교를 건립하여 유학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玄孫) 극일(克一)은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극일(克一)의 아들 맹(孟)은 세종 때 문과에 올라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밤에 용마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준손(駿孫)․기손(驥孫)․일손(馹孫)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 김씨삼주(金氏三珠)로 일컬어졌다.
1486년(中宗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김일손(金馹孫)은 일찍이 당대의 거유(巨襦)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감사(全羅監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燕山君)이 등극하여「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이 당상관(堂上官)으로 참여하여 사초(史草)를 살피게 되니 김일손(金馹孫)의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이극돈이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商)․한치형(韓致亨)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일손은 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 등과 함께 참수(斬首) 당하였고,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되었다.
김일손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조(中宗朝) 영의정 남 곤(南袞)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濯纓;김일손 의 호)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그의 문장(文章)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계천에 지나지 못하다.”라고 김일손의 짧은 생애(生涯)를 애석하게 여겼다.
삼현(三賢)의 한 사람인 김대유(金大有)는 김일손의 조카이며 김준손의 아들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숙부 김일손이 참수당하자 부자(父子)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中宗)때 풀려나와 평생을 강개한 지절(志節)로 살았으며, 3개월간의 칠원현감(漆原縣監)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 청도의 운문산(雲門山)속 삼족당(三足堂)에서 73세의 일생을 마쳤다.
김일손의 증손 언유(彦諭)는 고양(高陽)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으로 명망이 높았고, 시(詩)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여 공사의 비와 병풍․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언유의 아들 현성(玄成)은 광해군(光海君)때 폐모론(廢母論)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하게 여생을 마쳤으며, 시(詩)․서(書)․화(畵)에 모두 능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김경서(金景瑞)장군과 소전공(少佺公) 김덕승(金德承;春秋館編修官). 예직(禮直;三道 水軍統制使) 홍도(弘道; 朝鮮風俗畵의 祖宗) 진희(晉熙;忠孝旌閭를 賜額받음) 외 <해동가요(海東歌謠)>를 남기고 「청규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한 김천택(金天澤)등이 명문거족의 김해김씨를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