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내인出家內人
이종희
금만평야로부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벼 이파리가 노릇해진다. 한해가 저물기 시작한다는 신호인가? 여기서 푸드덕 저기서 푸드덕 뛰는 메뚜기가 맞장구를 치는 가을이 한가롭다. 이 한가로움을 방해하는 훼방꾼이 논 가운데로 끌어들인다. 잘나지도 못한 주제에 우뚝 서서 으스대고 있는 피 때문에 시름을 달랠 겨를이 없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꼬박 피사리를 하고 집에 돌아왔다. 큰딸과 막내딸 가족이 추석 전날 내려왔는데 파김치가 되어 들어온 아비의 몰골이 싫었나보다. 아직도 3분의 2나 남아 있는 일을 돕겠다고 나선다. 큰딸은 밭일을 가끔 올 때마다 도와주었지만 막내딸은 경험이 없는데도 강한 의지를 보였다. 애기 같이 생각했던 자식들이 아비의 힘든 일을 도와주겠다니 기특하기 짝이 없었다.
오후 3시쯤 두 딸을 태우고 논으로 나갔다. 큰딸은 엄마의 장화를 신었으나 막내딸은 운동화를 신을 수밖에 없어서 일의 강도에 따라 역할을 주었다. 큰딸은 장화를 신었으니 논두렁에서 삼분의 일 정도 들어오게 하고 막내딸은 논두렁 둘레를 따라가며 가장자리를 맡겼다. 예년에 없던 장마로 논바닥이 마르지 않아 발이 빠지면 빼는 시간이 만만치 않기에 자리 배정을 해주었다 .
작업이 시작되었다. 한 손으로 피 이삭을 잡고 가위로 베어 비료포대에 담는다. 오전에 해본 터라 발이 빠지면 바로 빼려들지 말고 좌우로 흔들면서 빼기를, 막내딸에게는 논바닥을 잘 살펴 신발이 빠지지 않기를 수시로 점검했다. 발이 빠지고 벼 포기 아랫도리에서 감겨지는 젖은 벼 이파리가 괴롭혀도 딸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노년의 아버지가 늦둥이로 태어난 중학교 2학년 아들이 농약 통을 짊어지고 무게를 주체하지 못할 때 어떠셨을까? 환갑이 넘은 아버지를 돕겠다고 나섰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아 어서 몸이 불고 힘이 생기기만을 기도했다.
딸을 먼저 낳고 아들을 얻고 나서 가족계획을 하려고 맘먹었다. 아버지가 언제 아셨는지 벼락천불이다. 독신의 몸인데 당치 않다며 호통을 치는 바람에 우리 부부의 가족계획은 접고 말았다. 삼신할미는 아버지의 심중을 못 읽었는지 셋째도 딸, 넷째도 딸이었다. 넷째 때는 임산부의 몸가짐이 분명 아들이라고들 해서 철썩 같이 믿었건만 기대를 외면했으니 아내와 갓 태어난 막내딸에 대한 시선이 싸늘했다. 남아선호사상이라는 사회풍습이 보낸 대우였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딸, 아들, 딸의 순서였으니 아들이라는 확신이 컸다.
일남삼여一男三女가 출가해서 수도권에 셋, 광주에 큰딸이 살고 있고, 아홉 손자를 안겨주며 나름대로 살고 있다. 부모가 늙어가는 것이 읽히는지 관심이 많아지는 눈치다. 만날 때마다 살갑고 생활용품도 아끼지 않고 사들이는 것을 볼 때마다 딸이라고 서운했던 지난날을 숨기고 싶어진다. 가끔 막내딸이 자기를 낳고 서운해 했고 구박했다고 토라진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가 낳기 잘하지 않았느냐며 가족들의 박장대소를 끌어낸다. 움찔하면서도 이런 것이 행복인가 싶어진다.
큰딸에 대한 일화는 잊을 수가 없다. 어릴 때 별명이 3만 10원이다. 식사만 마치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번갈아 가며 손녀를 업고 나가셨다. 하루는 동네 사랑방에서 10원짜리 동전을 가지고 누워서 놀다가 삼켰다는 어머니의 걱정 어린 말씀이었다. 주변에서 알려주는 말에 따라 큰 밥숟가락을 멱이고 대변으로 나오길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걱정은 쌓여 가는데 임실에 체를 잘 내는 사람을 알려 주기에 찾아갔다. 여인의 행동이 수상했으나 동전이 빠져 나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다려 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어 전주ㅈ병원으로 데리고 갔는데, 아기를 전신마취를 시키고 헤매기를 1시간여. 마취가 깨어나지 않은 아기를 업고 인척의 소개로 ㅅ병원으로 갔다. 원장은 마취가 깨어나야 시술을 할 수 있다며 기다리라는 것이 아닌가. 축 늘어진 딸이 그때처럼 안쓰러운 적이 없었다. 깨어나니까 불과 1분도 걸리지 않아 동전을 꺼내는 것을 보고 온몸이 풀렸다. 이렇게 모아진 동전이 유리병에 가득했다. 주변의 말만 믿고 고생시킨 못난 아비였다.
이제는 출가외인이라는 말도 박물관 사전에나 보관해야 할 듯싶다. 명절날이면 귀성객 행렬에 기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는 8,9시간의 지친 운전과 보채는 어린것들을 데리고 빠지지 않고 찾아온다. 이들에게는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도 두렵지 않은지 이번 추석에도 예외는 없었다. 올봄에는 제 아비 피부과 소견으로 종양 확인을 위한 수술을 할 때 비상이 걸려 자식들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 미안함도 잊히지 않는다. 키울 때 좋아하는 자장면 한 그릇, 통닭 한 마리 원 없이 먹여주지 못한 것이 내내 걸린다. 그런 일들이 못내 아쉬워 손자들에게는 잘해 주고 싶어 용돈을 아끼고 아끼며 지갑 깊숙이 넣어둔다.
남들은 손자 보느라 허리가 굽어지고 자식들 집에 매여 사는 일이 보통이다. 우리 딸들은 제 어미가 잔병치레를 알고 있어서인지 도움 요청이 없으니 고맙기 그지없다. 그런 자식들의 마음을 읽고 남편의 식단은 대충이지만, 자식들이 온다면 냉장고 깊이 들어 있는 반찬까지 꺼내어 들고 나오는 아내다. 속으론 서운해도 자식들 먹이려니 생각하고 모르는 척 한다. 사위도 손자들도 맛있다며 오물거리는 입이 너무나 예쁘다. 사위도 성씨가 다른 남이라고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술도 사위의 기호에 맞게 찾아오라고 내준지 오래다. 사위들이 주방에서 설거지 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면 이게 행복인가 싶어진다.
오로지 늦게 얻은 아들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았던 부모님이었다. 객지를 전전하다가 직장이 안정되어 모실 기회를 얻었는데,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역하지 못한 부모님이 오늘따라 그리워진다. 당신의 네 손자에 증손자 아홉 명이 집안 가득 웅성거리는 모습을 하늘나라에서 내려다보시면서 흐뭇해하실까? 다행히 아들이든 딸이든 넷이나 두고, 더하여 손자를 아홉이나 두었으니 포근하다. 다만, 우미만 행복을 누리는가 싶어 부모님께 죄스럽다.
논에 줄줄이 심어진 벼를 보면서 어디까지가 우리 논이냐고 묻는 막내딸이다. 그야말로 농사에 대하여 맹탕인 딸과 3만 10원짜리 큰딸이 아비를 돕겠다는 기특한 마음에 끊어질 듯한 허리 통증이 사라진다. 아비와 두 딸들이 도운 피사리 작업이 우리 가족사에 또하나의 일화가 되리라. 부모 걱정에 여념이 없는 딸들, 출가내인出家內人이라는 단어로 국어사전에 입력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