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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목사 이원영 : 유림 선비에서 기독교 목회자로
임희국 지음, 조이웍스, 2014년
이 책을 펴내면서
이원영의 생애에서 좀 특이한 사실이 발견되었는데, 그는 안동을 장기간 떠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잠깐 동안 외지에 다녀온 것 말고는 평생 동안 항촌에서 살았습니다. 또한 그는 초등교육과정에서부터 최고학부(구한말시대)까지 자기가 사는 고장에서 마쳤으며, 신학수업도 평양에 있던 장로회신학교에서 받음으로써 외국에 나가 공부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항촌에서 시작한 교역활동 역시 그 곳에서 마감했습니다. 소위 '서양 물' 을 마시지 않은 신학자며 목 회자였습니다. 이 점은 조금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외국 유학을 선호하고, 더욱이 연구자 자신도 서유럽(스위스)에서 수년 동안 유학을 했던 사람인 데, 이와 다르게 일평생 ‘삶의 자리와 교역의 현장’을 떠나지 않은 이원영이야말로 예사로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통해
'한국적 교역자' 의 이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높아졌습니다.
목회자이자 신학교의 선생이었던 이원영은 제자들의 가슴속에 아직도 ‘영원한 스승’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는 머리가 허옇게 센 제자들이지만 저마다 스승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회상하며 다시 한 번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스승에 대한 제자들의 애틋한 그리움을 본 순간, 퇴계 이황 선생이 만년에 주희를 사모하며 읊은 시한 수가 떠올랐습니다.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오니/고인을 못 뵈어도 예던 길 앞에 있네" 그런데 현재까지 머물러 있던 이원영의 사랑이 제자들을 다시 모이게 하여 드디어 ‘봉경 이원영 목사 제자모임(회장, 문은식 목사·배흥직 목사)’을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원영 연구의 또 다른 열매입니다.
이 연구작업은 결코 한 사람의 힘과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코 그렇게 될 수도 없었습니다. 1998년 6월 21일에 안동 서부교회에서 '고(故) 봉경 이원영 목사 40주기 추모예배' 를 드리고 나서 그를 기리는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봉경기념사업회(위원장, 김기수 목사)’ 가 조직되었습니다. 기념사업회는 그의 생애를 환히 밝혀내는 일에 기념사업의 우선순위를 두기로 하고 이 일을 추진했습니다. 기념사업회의 재정분과(부장, 이정순 권사)는 연구진행에 필요한 모든 것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하였습니다. 이 연구에는 이원영의 육필 유고를 하나하나 정성 들여 읽고 현대말로 옮겨 주신 김수영 장로님(이원영의 사위)의 노고가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자료수집을 위해 안동을 비롯한 경상북도 북부지역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모든 경험을 함께 나눈 최영재 전도사님과 김규태 전도사님의 수고와 노력이 무엇보다도 컸습니다. 그리고 여러 도서관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뒤지고 정부기록보존소(대전)까지 방문한 전진은 목사님의 수고로 연구가 진척되었습니다.
자료수집에서 가장 큰 보람으로 와 닿은 이원영 목사님의 ‘유고 설교모음’과 애써 모은 귀중한 ‘사진자료’도 책으로 엮어 함께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인연으로 이 목사님을 기억하시는 분들(제자·후손·친척·동료·지기 등)이 ‘추모의 글’을 써서 이것도 책으로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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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1886~1958)은 1886년 7월 3일에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원촌동에서 아버지 이관호와 어머니 김영 사이에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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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퇴계 학풍을 이어온 많은 선비들은 퇴계의 가르침대로 도학실천에 그 뜻을 모았다. 이들은 학문을 닦고 학식을 쌓되 중앙정치권으로 나아가 관료가 되고 권력추구의 길을 모색하기보다는 고향에 묻혀 지내는 산림처사로서 자기 자신을 살피고 덕행(德行) 닦는 일을 더욱 중시했다. 이들은 퇴계의 정치철학인 난진이퇴와 학우사우의 영향으로 정치현실이 바른 길에 서 있지 않으면 현실 정치에서 언제든지 물러나기를 원했다.
그런데 안동의 선비들이 중앙정치권으로 나아가지 않은 또 다른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정치 정황이 이들에게 관직으로 들어서는 길을 쉽게 터주지 않은 것이다. 조선시대의 정국 구도를 안동의 선비들이 중앙관직에 들어가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들이 정치적으로 남인(南人) 계열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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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말에는 노론 정권이 득세함에 따라 이들 은 정계 진출의 기회조차 잃을 때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들은 관료로 진출하는 과거시험에 소극적인 입장을 갖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 그 시험 자체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과거제도의 폐단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그리면서 이들은 벼슬길에 연연하지 않고 향촌에서 학문증진과 후진양성을 위해 힘썼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이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정치적 무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정치현실의 바깥에서 중앙정치권을 면밀하게 살피다가 때가 되면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많은 안동의 선비들이 산림처사로서 중앙정치권에서 밀리 떨어져서 향촌에 묻혀 지내는 듯했지만, 이들은 재지사족으로서 향촌을 지배했다. 이들은 향촌에서 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향안과 향약을 만들어 이민()을 교화·통제했고, 고결한 인품과 깨끗한 도덕성으로 향촌을 지도했다. 이러한 지도력을 동해서 이들의 품위와 위엄이 드러났는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은 자신의 권력을 믿고 이들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이들의 향촌 지도력과 지배는 이런 식으로 조선시대 후기까지 잘 유지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서울 공덕리에 있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한 이원영은 1920년 3월18일에 출감했고, 옥중에서 기독교인으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약 10년 뒤에 이원영이 장로교회의 목회자가 된 점을 고려하면, 옥중생활은 그의 인생에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원영은 옥중에서 장로 이상동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가 기독교인이 된 배경과 동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의 정황을 살펴보건대,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함께 수감된 장로 이상동은 ??ㅠ님 출신의 교회장로였기에 그의 간증이 섞인 기독교 진리에 대한 소개가 이원영에게 큰 감화를 주었고 이것이 그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둘째, 감옥생활은 이원영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심리상태로 만들어 주었을 것으로 본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그는 경술국치 이래로 사회진화론 속에 숨어 있는 제국주의 논리를 극복하지 못한 채 일제의 식민지배를 놓고 고뇌하다가 인도주의에 기초한 세계개조론에 다시 힘을 얻어 3·1 만세 시위를 주동하고 민족독립을 위해 싸웠다. 그런데 그 결과, 곧 오리라 기대했던 민족독립은 아직 저만큼 멀리 떨어져 있고 자신은 잡힌 몸이 되어 차디찬 감방으로 내던져졌다. 이 상황에서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좌절감이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이미 심한 좌절감에 빠진 그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온 것이 기독교 신앙이었을 것이다. 셋째, 감옥에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은 이원영 혼자만이 아니었다. 즉 그와 함께 보문의숙을 다녔고 또 함께 3 . 1만세 시위에 가담하여 감옥에 함께 수감된 친구들(이중무· 이운호· 이맹호 등)도 옥중에서 기독교 신앙인이 되었다. 따라서 그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이 친구들과 새로운 삶을 모색하면서 나눈 대화와 토의의 결과였을 것이다.
이러한 추정을 바탕으로, 이원영이 기독교인이 된 것은 갑작스런 회심이 아니라 오랜 기간 기독교를 살펴보면서 나름대로 파악한 결과라고 판단된다. 이미 그는 사립 봉성측량강습소와 보문의숙 재학 기간에 기독교를 문화적인 차원에서 경험했다.
그는 교과서를 동해 서양의 과학시식과 역사를 배우면서 기독교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윤곽을 잡았으리라 본다. 또한 안동 선교부가 설치된 1908년 이래로 개신교회의 선교가 활발해지면서 그가 사는 동네에도 분명히 복음이 전해졌을 것이다. 그가 3.1만세 시위를 준비하는 동안에 동네 교회(만촌교회)의 교인들이 민족독립을 위해 현신적으로 만세 시위를 준비했고, 이런 모습을 목격하면서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경험들이 이원영으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크고 작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원영은 1921년 1월 8일에 선교사 권찬영( John Y. Crothers)에게 세례를 받았다. 권찬영은 미국 북장로교회 소속 목사로서 1909년 9월에 한국에 도착해서 그 이듬해 1월에 안동으로 왔고, 일제시대 말기에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1947년에 다시 들어와 은퇴하던 1952년까지 일생 동안 이 지역의 선교사로 일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터줏대감격 선교사’ 혹은 ‘미스터(Mr.) 안동’으로 통했다. 이 두 사람은 그때부터 일생의 동역자와 친구로 지내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권찬영은 3.1운동과 관련된 한국 사회의 현실과 이원영의 처지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이해했을 것으로 본다. 그 당시에 선교사들은 일제 당국과 같등관계에 있었는데, 그 까닭은 일제가 ‘사립학교규칙’(1915)을 만들어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사립학교의 교과과정에서 성경시간을 없애게 함으로써 선교사역에 차질을 빚게 했기 때문이었다. 선교사들은 본래 정교분리 원칙 아래 조선인의 민족운동에 대해 깊이 관여하지 않고 있다가, 3.1운동 기간에는 극소수의 선교사를 제외하고 모두 이 운동을 적극 지지했다.
이원영이 세례를 받고 나서 맞이한 새봄에 하늘로부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의 선물을 받았다. 4월에 맏이 정동이 태어났던 것이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자식의 탄생을 이제 비로소 경험한 그에게는 이것이야말로 인생 최대의 기쁨이요, 집안의 경사였다. 아기 예수가 탄생했을 적에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듯이 이원영도 정동을 안은 채 하나님을 찬송했다.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을 거부
이원영은 일제의 황민화정책인 조선교육령 개정· 신사참배 강요. 창씨개명을 모두 거부했다. 이 가운데서 하나만 거부해도 대단히 힘겹고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그는 셋 다 거부했다. 이로 말미암아 그와 가족들에게 매섭고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시무하던 안기교회에서 쫓겨났고, 노회에서 목사직을 면직당하고, 사택에서 쫓겨난 그와 가족들은 인적마저 드문 –지금의 태화동 안동방송국 근처-산골로 들어가야 했다.
사회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상황에서 이들은 소외와 경제적인 고통으로 하루하루를 마치 천년처럼 견디며 살아야 했다. 이원영은 이때부터 광복이 될 때까지 무려 4차례나 경찰서에 구금되었고, 그때마다 매번 혹독한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병보석으로 잠시 풀려나 있는 기간도 감금생활과 다름없었다. 그의 생활은 낱낱이 감시당했으며, 행동반경을 거주지에서 5리(2km) 이내로 제한시킨 까닭에 소위 ‘앉은 징역’을 참아내야 했다. 게다가 고등계 형사들이 그 골짜기로 들어가는 길목과 근처 산을 감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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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의 신사참배 거부는 일본인에 대한 증오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안기교회 일지에 보면, 그해 가을(1937. 9. 5)에 나라를 위한 예배를 드리고 교인들에게는 가정 예배시간에 나라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했다. 개인적인 대화 자리에서도 어떤 이가 ‘왜놈’이란 말을 내뱉으면 ‘일본인’이라고 부르도록 고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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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황민화정책에 대한 이원영의 거부와 항거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38년 3월에 일제가 조선교육령을 개편하면서 학교교육 내용이 크게 달라지자 이원영은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보통학교 4학년이었던 정신과 2학년이었던 정길이 등교를 중단했다. 곧 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될 정군 과 정옥은 입학식조차 참석하지 못했다. 학교수업 대신에 이원영이 학교의 교과과정에 따라 집에서 교육을 시켰다.
그가 가르친 과목은 성경(암송) · 국문 · 한문 · 산수· 수신· 습자 등이었다. 이때 그는 일본어 교과서를 구해서 자녀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일본을 알아야 일본 식민지 상황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같은 해 6월 초순에 이원영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안기교회의 목회를 그만두어야만 했다. 교회 밖에서 밀고 들어오는 ‘시무 중지’의 압력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6월 8일 수요일 저녁기도회에서 그는 마지막 설교를 했다. 강단에 올라선 그는 신약 히브리서 4장 14~16절을 본문으로 ‘믿는 도리를 굳게 잡자’는 제목의 말씀을 선포했다. 일제의 황민화정책이 이제 곧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고 신앙정신을 허물어뜨리게 되므로 교인들은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말고 신앙 진리를 군게 잡아야 한다는 선포였을 것이다. 이 설교 후에 그는 교인들에게 떠난다는 인사말 한마디조차 하지 못한 채 교회를 훌쩍 떠나야만 했다.
강제로 시무 중지를 당한 이원영은 최소한 1년 전부터 자신에게 이런 사태가 오리라고 예상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 해 전에 노회석상에서 선지자 요나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그는 이런 일이 언젠가 오리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일제 당국이 느닷없이 압력을 행사해 갑자기 시무를 중지하게 한 배경에 궁금증이 간다.
안기교회의 일지를 찾아보면, 그해 6월 3일부터 8일까지 유재기 목사가 ‘경안제직수양회’를 인도한다는 교회알림이 적혀 있다. 예정대로 유재기는 안기교회에서 수양회를 인도하고 마지막 날인 6월 8일에 ‘농우회사건’으로 당국에 체포되어 구속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원영도 이날 저녁 설교를 마지막으로 안기교회를 떠나야만 했다. 이처럼 6월 8일에 한 사람은 경찰에 체포되고 다른 한 사람은 마지막으로 강단에 오른 점을 주시하게 되면, 이원영의 교회 시무 중지는 그가 농우회와 관련 있다는 일제 당국의 혐의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농우회는 유재기가 의성교회 안에서 만든 농촌연구모임이자 농촌협동과 소비를 위한 조합운동단체였다. 그런데 당국은 이 단체가 기독교 사회주의를 퍼뜨리면서 조선 독립을 달성하려 한다고 보고 유재기에게 ‘조선 기독교도’의 독립음모를 뒤집어씌워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했다. 그런데 이원영의 경우는 유재기처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할 만한 단서는 잡히지 않았으나 적어도 독립음모를 위한 모임장소(경안제직수양회)를 제공한 자라는 빌미에 잡혀 교회의 시무를 중단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농우회사건은 일제가 ‘날조한 음모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농우회사건과 관련되어 유제기 외에 주기철, 이유택, 송영길. 박학전이 체포되었고, 이 사건이 있기 바로 전에 정일영. 권중하가 의성 경찰서에 구속되었다. 권중하는 이때의 고문으로 사망했다. 앞장에서 서술한 대로, 일제는 장로교회의 농촌운동이 독립운동으로 발전되어 간다고 보았다. 유재기는 총회 농촌부 간사로서 농촌 운동의 핵심인물이었고, 박학전은 유재기와 농촌연구회를 조직했다. 이원영 역시 경안노회 농촌운동의 지도자로서 감시의 대상이었다. 이렇게 일제는 항일 전력이 있는 교회지도자들을 감시해 오다가 앞으로 본격화될 황민화정책에 저항할 인물들을 가려내어 미리 차단시켰을 것이다.
이원영과 가족들은 교회 사택을 떠나 시내에서 10리(4km) 정도 떨어진 사람 사는 집이라곤 거의 없는 골짜기로 들어갔다.
산을 끼고 돌아 한적한 곳에 들어 있는 이 골짜기의 이름을 그는 ‘오복사골’로 지었다. 이곳은 낮에도 사람의 발걸음이 뜸했고 밤에는 여우나 들짐승이 나타나 농작물을 파헤쳐 놓는 한적한 곳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자녀들과 함께 흙벽돌을 찍어서 방 두 칸에 마루가 달린 초가집을 지었다. 경제생활의 쪼들림이 그와 가족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뿐만 아니라 그의 가정은 소위 ‘요시찰 인물의 집’으로 몰려서 자녀들이 친구 없이 지내야 했는데, 이 고통도 경제적인 궁핍 못지않게 견디기가 힘들었다.
1938년 2월 일제는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을 세워 교회를 향해 노골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제의 압력 아래 1938년 2월에 장로교회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했고, 그해 9월까지 전국 23개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그 달에 모인 제27회 장로교회 총회는 신사참배를 가결했는데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 국가의식’으로 인정하며 이제부터는 '황국신민'으로서 그 본분을 다하기 위해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기로 다짐했다. 이에 장로교회는 비록 일제의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결의한 것이긴 해도, 일제의 황민화정책에 적극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장로교회는 이제부터 일제의 황민화정책에 대한 협력은 물론이고 일본의 전쟁 수행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게 뇌었다. 이러한 총회의 결의를 경안노회는 제33회 정기노회(1938. 12)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경안노회는 이와 함께 노회의 이름을 조선 예수교장로회에서 ‘기독교 조선장로회’로 바꾸기로 결의했다.
이때 정기노회는 이원영에 대해 대단히 심각한 결의를 했다. 경안노회는 비록 ‘당국의 명령’이라는 단서를 붙였지만 그를 목사직에서 ‘시무 사면’시키도록 결의했다. 이미 교회에서 쫓겨 나 오복사골로 들어가 교회와 교류를 끊은 채 지내고 있는 그에게 일제는 노회의 손을 빌어, 그와 교인들 사이에 있는 마지막 남은 한가닥의 연결고리를 끊어 버렸다. 교인들에게 떠난다는 인사말조차 하지 못하고 쫓겨난 그가 목사직마저 강제로 빼앗긴 것이다. 목사직 면직은 그에게 사형선고보다 더 심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동안에 기독교 신앙을 통해 나라와 민족의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고 그 희망 안에서 목회자가 되어 오늘까지 왔는데, 일제는 교회에서 쫓아낸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목사직까지 박탈해 버렸다. 그는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빼앗겼다.
1939년 : 제1차 예비검속
1939년 5월에 이원영은 ‘예비검속 형태’로 안동경찰서에서 약 3개월 동안 구금되었다.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는 그를 일제가 구속했던 것이다. 그는 경찰서에서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해 초주검이 되어 풀려났다. 제1차 구금시 이미 순교를 각오한 이원영은 식사를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몸이 쇠약해지자 경찰은 가족에게 음식을 들여오도록 했으나 그는 밖에서 들여오는 음식에 아예 입조차 대지 않았다. 이미 53세의 나이로 초로에 집어든 그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다. 게다가 고문(특히 구타)을 견디다 못해 늑막염에 걸렸으나, 중병을 앓고 있는 그에게 고문과 구타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몸은 이제 축 늘어져 버렸다.
경찰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유치장 복도로 끌어 내놓고 그 위에다 마대를 덮어 놓았다. 그리고 가족에게 시체를 가져가라고 통지했다. 놀라고 당황한 가족들은 경찰서로 달려와 시체를 가져다가 성소병원으로 옮겼는데, 다행히도 이원영의 목숨은 아직 가늘게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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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은 임종예배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이원영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찬송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을 불러 달라고 청했다. 모두들 눈물로 찬송을 불 렸다. 이원영은 아이들을 곁으로 가까이 오도록 하더니 물었다.
“너희들은 내가 유치장에서 나오기를 위해 기도했느냐, 아니면 거기서 죽기를 위해 기도했느냐?” 자녀들이 대답했다. “우리는 아버지가 풀려 나오시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이원영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니 회개하라”고 말했다.
성소병원에서 약 20일 동안 입원치료를 하는 동안 이원영의 건강은 조금씩 회복되었다. 그런데 건강을 되찾아 가면서 그는 오히려 안타까워했다. 왜냐하면 유치장에서 순교당하지 않고 살아나왔지 때문이니. 게다가 주변 사람들은 이원영의 고통과 고난을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차라리 신사참배를 해서 자유의 몸이 되라고 권유했다. 이에 이원영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고함을 쳤다.
이원영은 대략 그해 7월에 석방되었으리라고 보여진다. 많은 사람들이 8월 31일에 석방되었다고 알고 있으나, 그가 8월 6일(주일)에 안기교회를 방문했고, 이보다 앞서 그의 건강이 회복되기까지 병원에 압입원한 기간을 계산해 보면, 아무리 늦어도 7월 중순 이전에는 석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경찰서에서 풀려 나면서 안기교회를 방문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는 점이다. 오복사골로 쫓겨가고 1년 이상 얼굴조차 보지 못한 교우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쁨이 경찰서에서 당한 고문 후유증을 간신히 눌러 주었을 것이다. 그날의 예배가 끝난 다음에, 예배당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던 이원영은 ‘5분 동안만’ 시간을 달라고 간청해서 “이 사람이 1년 동안 교우 여러분을 뵙지 못했으나”라는 인사로 서두를 꺼내며 비로소 교인들과 작별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유치장에서 풀려난 이원영은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처가에서 마련해 준 500평 정도의 복숭아밭을 일구었다. 그는 여기에서 생산된 복숭아를 자신이 오복사골 바깥으로 나갈 수 없으 므로 상인에게 팔았다. 복숭아를 팔고 나면 이원영은 반드시 십일조 헌금을 떼어 놓았는데, 이 돈을 한밤중에 찾아오는 어느 신학생에게 주었다. 또한 복숭아나무 사이에 땅콩이나 파를 심어서 일부는 식량으로 사용하고 나머지 일부는 팔았다.
이웃과 단절된 채 늘 감시를 당하고 살고 있었으나, 이러한 가운데서도 살그머니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김선지 이광호 등)은 한밤중에 살며시 찾아와서 이원영과 함께 날 이 새기까지 교회와 나라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드렸다. 안기교회의 교인들 가운데도 감시의 눈을 피해 계란 꾸러미나 생선을 들고 방문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선교사들도 한밤중에 산을 넘어오기도 했다.
병보석으로 풀려난 이원영은 자녀교육에 힘을 쏟았다 앞에서 조금 언급한 대로, 그는 자녀들에게 오전에 조선어· 일본어· 산수· 한문· 습자(붓글씨). 신앙(십계명, 사도신경). 성경요절 암송(특히 요 3: 16; 갈 5:22-23 ; 고전 13 : 13) 등을 가르쳤다.
그는 아이들에게 주일학교 공과책에 나오는 52주간 요절을 암송하게 하고, 이것을 잘 외웠는지 시험을 쳤다. 자녀들은 이 시험에 통과하면 상급으로 복숭아를 받았고, 통과하지 못한 경우에는 복숭아밭에서 풀을 뽑아야 했다. 이렇게 학과 공부가 끝나면 그는 자녀들에게 밭과 들로 나가서 채소를 가꾸고 나물을 뜯어 오게 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낮에 얼마나 잘 배웠는 지 시험을 치고 자녀들을 서로 경쟁시켜서 배운 것을 잘 암기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서 하루의 생활에 대해서 각자 얘기하게 하는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안기교회 교인들 가운데 몇몇이 담임목사의 뒤를 따랐다. 이원영이 작별인사를 하고 나서 일 주일 뒤(8월 13일), 동생 원세와 조카 동창이 이제까지 맡고 있던 교회 직분(반장, 유년부 선생)을 스스로 사면했다. 원세와 그의 동생 원식은 경주 남양면에 있는 영명학교에서 선생으로 일하다가 일제의 황민화교육을 반대한 이유로 강제퇴직을 당했다. 또한 이 교회의 집사 이수영, 수원 형제도 담임목사의 뒤를 따랐다. 이수영은 신사참배 거부로 말미암아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착란을 일으켰고, 수원도 같은 이유로 고문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불구의 몸이 되었다. 이원영과 뜻을 같이한 동료들도 여럿 되었다. 그해 9월에는 박충락(당시 영주 제일교회 장로), 10월 21일에는 김진호(영주 제일교회 목사)가 경찰서에 구속 수감되었다.24) 전계원,. 권수영, 임학수 등 여러 교역자들이 그와 함께 고난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1939년에 열린 장로교회의 총회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결성하고 일제의 국책 수행에 협력할 것을 다짐했다. 또한 총회는 각 노회별로 지부연맹을 만들어 일제의 정책에 협력하도록 했다. 총회의 결의에 따라 안동의 경안노회도 1939년 12월에 열린 제34회 정기노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경안노회 연맹’을 결성했다. 이 결성식은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찬송가· 기도· 성경봉독· 내빈축사· 천황폐하만세 3창· 국방헌금· 축도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이번 회기의 노회에서 이원영과 그 가족들이 살던 목사 사택(대지 180평)이 경안노회 유지재단에 기부되었다.
1940년 : 창씨개명 거부, 제2차 예비검속
일제는 1940년 2월에 창씨개명을 시행했다. [중략] 이 법령을 거부할만한 용기를 가진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 법령이 제시한 기한(1940. 8. 10)안에 약 80%(약 322만 호)의 조선 가정이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꿔서 당국에 제출했다.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1940년 12월에 모인 제35회 경안노회 회의 참석자들은 창씨개명한 이름을 불렀다.
이원영은 창씨개명도 거부했다. 그런데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들 가운데 창씨개명에는 순응한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한상동·주남고·안이숙 등이 그러한 경우다. 이들은 신사참배는 철저하게 거부했던 반면에 창씨개명에는 순응해서 각각 이름을 서원상동, 신무남고, 안천이숙으로 바꾸었다. 심지어 신사참배 거부로 말미암아 고문을 당했던 주기철도 이름을 신천기철로 바꾸었다. 이들은 아마도 신사참배는 제1 계명을 범하는 죄악이라고 생각했던 반면에 창씨개명은 신앙의 차원이 아니라 개인 양심의 문제로 여겼던 것 같다. 이러한 해석이 신사참배만 거부한 기독교인들에 대한 폄하로 이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즉 이들에겐 민족의식이 박약하고 민족독립에 대한 의지가 결핍되었고 오로지 신앙 양심만 지키려는 데에만 국한되었다는 해석이다. 그렇지만 이원영과 이들 사이에는 그 신념체계의 범주에 있어서 차이가 난다, 교회의 사회참여나 정치개입을 삼가면서 신앙 양심에 위배되고 성경의 가르침(제1 계명)에 위배되는 신사참배만 거부한 인물들과, 신앙 양심과 성경 진리를 지키는 일은 민족의 씨를 말리는 창씨개명과 민족의식을 뿌리쎄 뽑아가려는 조선교육령 개정을 거부하는 것도 포함된다는 이원영의 입장은 그 신념체계에 있어서 차이가 난다. 이로써 확인되는 점은 이원영에게 3.1운동의 민족독립 소신이 여전히 내면 속에 살아있었다는 것이다.
이원영은 1940년 8월 20일에 또다시 제2차 예비검속을 당했다. 일제 당국이 그렇게 한 까닭을 자세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그의 황민화정책 거부 때문이었다고 짐작된다. 일경은 가족과의 면담을 금지시켰고 음식도 들여보내지 못하게 했다. 이 시기에는 이제까지 그와 가족을 경제적으로 돌봐주고 정신적으로 격려해 주던 미국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유치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성경읽기뿐이어서 그는 성경 묵상에 몰두했다. 일경은 그러한 그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지난번처럼 온갖 종류의 고문과 구타를 가했다.
만년필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서 비트는 고문, 고춧가루를 코에 집어넣는 고문, 물 고문, 거꾸로 매다는 고문 등 온갖 고통스런 고문은 결국 그의 몸을 망가뜨렸다. 고문으로 인해 폐렴까지 걸린 그는 그해의 마지막 날(12월 31일)에 병보석으로 경찰서에서 풀려났다.
이즈음 장로교회의 총회는 1940년 8월까지 731개의 애국반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서 총회는 전승축하회· 무운장구기도회· 전사병 위문금· 전상자 위문· 유족 위문. 국방헌금· 훌병금 . 유기 헌납·시국강연 등의 사업을 벌여서 전시시책에 협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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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배례문제
국기배례는 이원영에게 신사참배나 다를 바 없었다.[중략]
국기배례도 신사참배처럼 우상숭배라고 보았다.
따라서 우상숭배인 용서반을 수 없는 죄를 범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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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배례가 강요되자 이원영은 또다시 자녀들에게 학교에 그만 다니도록 명했다. 일제시대에 조선교육령 개정(1938)으로 말미암아 등교를 중단하고 집에서 교육을 받아오던 넷째(정길)와 다섯째(정순) 그리고 여섯째(정옥)는 광복과 함께 각각 저학년을 거치지 않고 4, 5학년으로 복학해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또다시 아버지로부터 둥교금지 명령을 받았다. 정순은 초등학교 4학년에 복학했고 그 이듬해에는 안동여중으로 월반했는데, 국기배례문제가 일어나자 여기에 대한 강요가 없는 대구의 신명학교로 전학했다.
또한 안동농림고등학교에서 국기배례를 거부한 학생들이 학교로부터 정학처분을 당하자 이원영은 마음에 충격을 받고 학교장(이흥원)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는 “국기에 경배하는 일이 신앙인으로서는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동일하므로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다. 처벌당한 학생은 어떤 처벌이라도 각오하고 신앙 양심에 따라 국기경배를 거부한 것이다. 그 용기와 신념이야말로 국가가 위기에 처하게 되면 참 애국자가 되는 것이다. 또한 양심에 어긋한 것을 ‘아니오’라고 거절하는 정신을 길러 주는 것이 참 교육이 아니겠으며, 다른 민족이 우리 민족을 유린할 때 용감히 항거할 줄 아는 인물을 길러내는 것이 학교교육이 맡은 중요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엄하게 따졌다.
성수주일에 대한 이원영의 방침은 특별히 엄격했다.
주일엔 빨래도 하지 못하게 하고 식사준비를 위해 텃밭의 고추를 따도 혼을 내고 회개하게 했다.26) 물론 자기 자신도 주일성수를 엄격하게 지켰다. 1953년 어느 주일 설교시간에 그는 교인들에게 자신이 주일성수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음을 고백하고 회개하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회개의 내용인즉 “여러분, 저를 용서하시오. (오늘) 오후에 들에 나갔습니다. 나도 모르게 논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여름철 모를 심어 놓은 윗논도 그 아래 논도 모두 내 논인데, 윗논에는 물이 가득 한데 아래 논은 물이 말라 있었습니다. 도구를 갖고 가지 못해서 물 내려가는 물길을 발로 자근자근 밟으니 물이 아래 논으로 내려갔고, 이것을 보고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녁 설교를 준비하려고 책상 앞에 앉았을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야, 원영아 주일날 어디에 갔다가 왔느냐, 일제 6년 동안 말씀대로 살려고 고생한 네가 이제는 그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네가 왜 주일에 들에 나갔더냐. 나가지 않았더라면 논에 물 대는 일을 하지 않을 텐데.’ 저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회개했습니다만 저의 설교를 듣는 모든 성도 앞에서도 회개합니다. 여러분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절약과 절제생활도 이원영의 목회에 포함되었다. 그는 가족들에게 절제와 철두철미한 절약이 몸에 배도록 했다. 가령 자녀들도 하여금 쓰던 연필을 마지막까지 다 쓰고 나서 그 몽당연필을 종이에 돌돌 말아서 끝까지 쓰게 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새 연필을 꺼내 주었다. 세숫물도 반(半) 대야의 물에 3명이 씻게 하고 비누도 한 번만 문지르라고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