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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 도청 탈환 [해방 광주] 세워
3,711공수.20사, 시위대 저항 밀려 철수
전남대 의대 옥상에 LMG설치 위기 증폭
시민군, 계엄군 재진입에 대비 조선대 뒷산 중심으로 방어 나서
69 게엄군 퇴각
21일 새벽 육군본부에서 개최된 계엄사 대책회의에서 결정된 [계엄군 광주 시내에서 외곽으로 전환 재배치]는 항쟁사에서 새국면을 낳는다. 도청과 전남대 등에 주둔하면서 시위 조기진압을 노리던 계엄군의 계획이 근본적으로 방향전환 한 것이다.
외곽지역을 철저히 봉쇄.광주를 고립시킨다. 그 다음 고립무원 상태의 광주에서 다시 들어가 시위대를 소탕한다. 그 중간기간이 시민들에게 [해방기간]이었다면 계엄군 입장에서는 [소탕준비기간]이었던 셈이다. 오전 10시. 군 헬기 4대가 전남대와 도청 등지에서 오르락내리락하며 장비와 서류를 실어 나른다.
도청앞 광장을 가득 메운 군중들은 [계엄군 철수]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도 이것이 계엄군 철수 예비작업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렇게 쉽게 물러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때문이다. 그러나 계엄군들은 이미 상당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15만명이라는 엄청난 군중의 위세에 상당부분 눌려 있었던 것이다.
도청을 지키던 11공수여단 3개 대대는 증파된 제 20사단으로부터 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태다. 위기 상황을 보고하고 대책마련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여단본부에 계속 날아든다.
헬기로 서류,장비 날라
무장시민군이 등장하고 특히 전남대의대 옥상에 LMG 2대가 설치되면서 위기감이 한층 증폭된다. 오후 2시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각군 참모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국방부 장관 주재 회의에서 계엄군 외곽철수가 최종결정된다.
같은 시간, 전남대에 주둔하고 있던 3공수여단에 철수 명령이 떨어진다. 광주외곽을 차단하고 31사단 병력과 교대해 교도소를 방어하라는 것이다. 특전사 전투상보는 철수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전남대앞 시위대와 대치중 오후 4시에 교도소로 이동명령을 접수하고 철수 준비. 철수준비가 완료되자 전차량은 출발 대기선에 집결. 본부 및 1개 대대는 후문 배치. 1개 대대는 차량의 엄호를 위해 선두에서 이동하는 계획을 수립.
오후 4시 30분 철수준비가 완료되자 선두부대의 차량의 출발과 동시에 정문지역의 폭도들의 공격을 받고 공격하여 2 Km 지점까지 퇴각시키고 후문으로 이동하여 교도소로 철수 완료. 선두인 15대대는 폭도의 사격으로 1명 경상.]
서명원씨(당시 전남대 근무)의 증언. [오후 6시께 학교에 있던 계엄군이 철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음날 학교에 나가보니 종합운동장에는 계엄군들이 불피웠던 자리가 남아 있고 여기저기 난리가 아니었다. 가정관한 강의실에 가보니 허리띠 5백여개, 신발 1백여 켤레 정도가 쌓여 있었다. 사람 머리털과 옷가지도 수북했으며 강의실 바닥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도청에 있던7,11공수 여단에 철수 지시가 내려진 시간은 오후 4시께.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공수부대의 시외곽 철수를 승인받아 7,11공수여단에 철수명령을 내린다. 1차 철수지점은 조선대. 11공수여단 3개대대와 7공수여단 35대대등 4개 대대병력은 APC를 앞세우고 사격을 하면서 조선대로 철수한다.
철수상황에 대해 윤광장씨 (당시 교사)는 [몹시 서두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시위군중과 시민군, 특히 전남대 의대 옥상에 설치된 LMG가 위협적인 존재로 작용한 것 같았다]고 말한다. 조선대로 철수한 공수여단은 또다시 병력을 차량제대와 도보제대로 편성, 외곽 철수에 들어간다.
다시 특전사 전투 상보 [차량제대는 APC 를 선두로 조선대 - 도청 - 15번 도로를 따라 철수하던 중 전남대병원 남광주 시장 숭의실고등에서 사격을 받았다. 도보제대는 오후 7시 40분께 11지역대가 통로를 개척하면서 철수 개시.]
사격 가해 퇴로 열어
시민군은 차량제대에 공격을 가한다. 위성삼씨 (당시 대학생)의 증언. [학동시장옆 사진관 건물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데 도청쪽에서 장갑차 1대가 기관총을 쏘면서 질주해 왔다. 같이 있던 시민군과 함께 그들을 향해 사격했다. 장갑차는 잠시 후퇴하더니 길 양쪽을 향해 총을 쏘면서 쏜살같이 달아났다. ]
도보제대는 조선대 뒷산 학동-지원동을 경유하여 산악능선을 따라 주남마을로 향한다. 오후 4시 30분 도청 상황실이 폐쇄된 데 이어 5시 15분에는 도경상황실도 폐쇄된다. 도경 지휘부가 공항으로 이동하면서 경찰병력도 철수를 시작한다.
먼저 전투경찰들이 운동복 차림으로 도청을 빠져 나갔고 경찰서 직원들이 뒤를 잇는다. 얼굴에는 공포가 짙게 깔려있다.
시민들 얼싸안고 감격
송기숙씨 (당시 전남대 교수)는 서울에서 광주로 되돌아오던중 충장사 인근에서 이들중 일부를 만난다. [운동복에 잠바를 걸치거나 운동화에 신사복을 입기도 하는 등 차림새가 뒤죽박죽인 사람들을 만났다. 그중 한사람이 아랫도리에 군복을 입고 있는것을 보고 이들이 지방에서 차출된 경찰인것을 알았다.
신분이 노출될 것을 염려해서인지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서 그동안 광주에서 어떤일이 벌어졌던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계엄군이 도청에서 물러갔다.] 시민들이 총을 쏘며 도청으로 들어간다. 도청안은 텅비어 있고 여기저기 잡동사니들만 굴러다니고 있다. 도청건물은 어둠에 잠긴채 묵묵히 서있고 한순간 무거운 정적이 흐른다.
잠시후. 시민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환호성을 지른다.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우리가 계엄군을 몰아 냈다. 우리가 이겼다.]
실로 4일만에 맛보는 승리의 즐거움 있었다. 한편 시민군은 퇴각한 계엄군이 언제 또다시 진주할지 몰라 지역방위는 조선대 뒷산을 중심으로 한다. 그쪽으로 계엄군이 후퇴했기 때문.
문장우씨(당시 회사원)의말. [계엄군이 진주할때 통과하게 돼 있는 길목에 사람들을 집중배치 했다. 되돌아올지도 모를 계엄군을 막는 것이 그날의 최대 과제였다. ] 그러는 사이 시간은 흐르고 날짜는 21일에서 22일로 바뀐다. 이른바 본격적인 [해방기간]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