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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동리 전투 마산 서남방의 관문 지대를 형성하는 이른바 3전지구 가운데 마산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인 진동지구에 위기가 고조된 시기는 낙동강 공방전이 바야흐로 가열되기 시작한 1950년 8월상순경 이었고, 이 지역으로 침공했던 적은 마산을 공략하기 위해 호남지구를 석권한 다음 진주와 사천 및 고성지구로 기동한 방호산 소장이 지휘하는 북괴군 6사단, 그리고 이 지역에 투입이된 아군 부대는 "킨" 소장이 지휘하는 미육군 제25사단과 긴급 배속된 미 제24사단의 1개 연대와 미해병 제5연대(1여단), 그리고 서부지구 전투사령부에 배속된 한국해병대의 김성은 부대와 육군의 민기석부대 및 최천 경무관이 지휘하는 경찰부대 등이었다.
한편 진동지구에 투입이 된 미 제25사단과 그 배속부대들은 8월 7일부터 진주를 탈환하기 위한 개전 이래 최초의 반격작전을 개시했는대, 마산지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감행했던 그 반격 작전 기간중 8월 1일 새벽고사리 지구에서 북괴군 6사단의 기동정찰부대를 요격하여 거둔 혁혁한 전공으로 8월 6일 부로 전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누린 김성은부대 장병들은 야반과 수리봉 (557) 서북산(739) 등 진동리 서북방에 있는 중요한 고지를 사력을 다해 공격 점령했고, 8월 12일 에는 중암리(-함안군 군북면)로 기동하여 패퇴한 적이 집결해 있는 오봉산과 필봉을 북에서 남으로 공격하여 일부 목표를 점령하는 등 부여된 공격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 함으로써 해병대의 감투정신을 빛내었다. 그런데 12일까지 계속된 미육군 킨 특수부대의 반격작전에도 불구하고 장사동에서 한국군 제3사단이 적에게 포위를 당하고, 북괴군 4사단은 낙동강 돌출부의 박진에서, 북괴군 3사단은 대구 서북방에서 낙동강을 건너오는 등 낙동강전선에 절박한 위기가 조성되었다. 미8군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8월 13일을 기해 방어작전으로 전환이 되고 말았는데, 그와 같은 조처는 미8군의 기동예비대로 확보하고 있던 미해병 제5연대를 영산지구에 투입하고, 배속된 한국해병대를 포함한 한국군부대를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등 병력의 전용을 단행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이 작전계획을 끈질기게 요청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작명의 변경을 승인받게 된 김성은 부대장은
P.C-703호와 소해정 504,901,320,307호 등 해군함정의 지원하에 적으로 하여금 시가지 남쪽 해안으로 상륙하는 것처럼 가장하기 위해
그 일대에 포화를 집중시키는 가운데 기습적인 상륙전을 감행, 계획대로 그 이튼날 새벽 1개 중대를 원문고개로 진출시키는 한편 망일봉을 선제
점령하여 한발 뒤늣게 그 봉우리로 올라오는 100여명의 적을 요격하여 승기를 잡게 되었고, 그날 오후 해군통제부로부터 탄약과 1개 중대의
증원병력을 지원받고, 그 다음날 (19일) 미명을 기해 총공격을 감행한 끝에 그날 오전 10시경 드디어 적 수중에 들어가 있던 그 통영시가지를
완전 탈환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이었다.
"당신들은 정말 귀신도 잡을 만큼 놀라운 일을
해내었소." 이 말은 전광석화와도 같은 그 작전의 묘수에 경탄을 금치 못한 외신 기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외신 기자들은 이
작전의 성공을 보도하는 기사에 "귀신잡는 해병대"라는 찬사를 썼다. "무적해병대"의 이름을 온세계에 널리 전파한
"통영상륙작전" 한편 통영시가지를 탈환한 김성은 부대는 9월 10일경까지 적 후속 부대와 원문고개 공방전을 치르는 동안 일부 병력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부산항으로 떠나고 본대는 해군방위부대에 진지를 인계하고 9월 22일 김성은 부대장의 지휘하에 수도탈환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인천으로 출항했다.
인천시가를 평정하고 경인가도를 거쳐 적의 서울 외곽 방어선인 104고지와 연희고지를 탈환한 해병대는 1950년 9월 25일 북아현동, 영천동, 마포방면으로부터 시가로 일제히 진출하여 26일 오후에는 제2대대가 시청에 태극기를 올리고 다시 전진하여 27일 오전 6시경 중앙청 옥상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감격을 누렸다. 이어서 29일 중앙청 중앙홀에서 역사적인 환도식(還都式)을 거행하였다. '수도 서울 탈환작전 비화' 9월 22일, 미8군은 총반격을 개시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하기
시작했는데, 25일까지는 상륙군인 미10군단과 서울 남쪽 오산에서 합류할 계획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철상(slash)'과
망치(hammer)작전'으로서 한반도의 적을 인천 상륙작전으로 양단 격파함으로써 북진하는 유엔군이 이를 포위·섬멸한다는 것이다. 한편, 미해병대
제1연대는 영등포로부터 한강을 건너 서울 서남으로 진입하고, 미해병대 제15연대와 한국해병대 1대대는 일산,수색 쪽으로 접근하며 인천에 대기중인
미해병대 제7연대는 북한산 경유 미아리 쪽에서 남으로 압박함으로써 서울을 9월 25일까지 점령할 계획을 했다. 그러나 서측으로 접근한 미해병대는
당인리, 와우산, 인왕산을 연하는 험준한 고지일대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공격이 돈좌됨으로써 23일까지도 서울 서대문을 돌파하지 못한 채
고전하고 있었다.
익일 9시를 기해 미해병대 제1사단장이 서울 중심가 진격명령을 내리자, 작전구역별로 시가전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배속된 한국해병대 제2대대는 새벽부터 벌써 행동을 개시하였다. 서울 탈환은 누구보다도 한국군이 선두에서 성취해야한다는 열망을
미해병대 지휘관이 묵인해 준 것이다. 미해병대 복장을 한 한국해병대 장병이 서울역으로 진격하는 동안 공산치하에서 3개월간 신음하던 시민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환호하였다. 서울역 청사 안에는 북한군 일부가 남아 완강히 저항 하였으나, 해병대원이 화염방사기로 전원을 소사시켰다. 이날
오후 동경에서 맥아더 원수는 '서울이 다시 유엔군 수중에 들어왔다'는 성급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서울시내는 아직도 시가전이 산발적으로
전개되고 있어 완전탈환은 못한 상태였다. "내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은 상금이 아니라, 태극기를 꽂을 사람은 결국 나밖에 없다는 집념이었다."
박소위는 곧바로 대대장에게 자기의 뜻을 전하고 중앙청 돌진허가를 상신하였다. 대대장은 신현준
연대장의 승인을 얻은 다음에 박소위를 격려하였다. 박소위는 9월 27일 새벽 3시경, 호텔 보이를 시켜 구해놓은 대형 태극기를 몸에 감고 소대를
진두지휘, 중앙정으로 접근하였다. 세종로 일대에는 군데군데 북한군이 구축해 놓은 사낭진지로부터 간헐적으로 총탄이 날아왔다. 그는 수류탄 공격으로
수개의 진지를 격파하고 2시간 만에 연기가 자욱한 중앙청에 도착하였다. 우선 청내의 잔적을 소탕, 제압한 다음, 2개 분대를 중앙 돔입구에
배치하고, 1개 분대를 근접호위케 하여 2m길이의 깃봉을 든 최국방 견습수병과 양병수 2등병조르 대동하고 돔 계단으로 올라갔다. 태평양 전쟁시 최대의 격전지 유황도 상륙작전에서 4인의 해병이 성조기를 세우는 장면인 아링톤
국립묘지에 있는 전쟁기념비는 미해병대의 상징이다. 서울 탈환에 앞장 선 미해병대는 곳곳에 성조기를 꽂고 승리를 기념하였으나, 국권의 상징인
중앙청만은 한국 해병대가 태극기를 올리도록 아량을 베품으로써 형제 해병대의 혈맹관계를 확인하였다. 9월 28일 한·미 해병대는 서울의 잔적을
거의 소탕하게 되었으며, 익일 거행될 이승만대통령과 맥아더 원수가 참석하는 서울 수복기념식 준비를 하는 사이에, '수도 완전 탈환'이라는 제하의
대형활자 신문호외가 이날 오후에 전국에
'好戰必亡 忘戰必危'(전쟁을 좋아하면 반드시 망하고,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로워진다)
솔산지구작전(1951.6.4~19) 도솔산지구작전 적의 춘기공세를 분쇄하고 북상한 우리 해병대는 1951년 6월 3일 화천저수지일대까지 진출하였는데, 여기서 맡은 전투지역은 38선 이북의 양구와 인제 간에 있는 태백산맥 가운데서 가장 험악한 지역 이었다. 이 지역은 도솔산지역으로서 일찍이 유엔군이나 우리 국군이 한번도 진격하지 못한 곳이었고 적이 또한 난공불락임을 호언하던 천연 요세 이기도 하였다. 적은 이 곳에 틀어박혀 발악을 하였는데, 이 지역은 좌우로 양구와 인제에서 북상하는 도로를 끼고 있으므로 만약 이 지역을 확보하게 된다면 우리 해병대와 좌우에 있는 우군의 계속진출이 매우 용이 하며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적에게 포위 당할 우려도 적지 않았다. 더욱이 우리 해병대가 담당한 도솔산지구일대는 양양에서 철원을 3각의 저변으로 하고 원산을 정점으로 하는 중동부의 이른바 철의 3각지대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적은 이 일대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아군의 공격을 저지 하려 하였는데, 여기에 배치된 적은 인민군에서 최강을 자랑하는 제5군단 제12사단과 제32사단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군의 공격목표인 23 및 24고지를 두고 2, 4, 9, 11 및 18고지를 연하여 주저항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주저항선에는 견고한 진지가 구축되고 막대한 수량의 지뢰가 매설되어 거듭된 공격이 좌절되었다. 그러나 우리 해병대는 끝까지 감투정신을 발휘하여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고지들을 모두 점령하였다. 이 도솔산지구작전은 최초 미해병 제1사단의 제5연대가 담당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6월 4일 이른 아침 우리 해병대와 임무를 교대하였다. 미해병대에서 8목표전방 약2km지점의 고지를 점령하는데 무려 500명의 사상자를 내게 되어 부대정비 및 재편성의 기회를 갖기 위해 우리 해병대 제1연대와 임무를 교대하게 된 것이다. 당시 인접 우군으로서는 좌측에 미해병 제7연대, 우측에 제1연대가 있었고, 미해병 제1공병대대의 제2중대 제3소대와 제11연대 제3대대(포병)가 우리 해병대를 직접 지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임무를 교대할 우리 해병대에 미해병대 제1사단으로부터 6월 3일 24시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명령이 하달 되었다. 1) 제1대대는 6월 4일 오전 8시 이전에 680고지, 910고지 부근에서 목표1을 점령할
준비를 하고 이어서 목표2를 점령할 준비를 갖추라.
당시 우리 해병대 중간보급소는 광사동 부근에 있었고, 연대본부는 원동지곡, 그리고 의무대는 죽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6월 4일 새벽 총공격에 앞서 연대장 김대식대령은 [어떠한 난관이라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자만이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훈시를 내렸다. 우리 해병대는 1951년 6월 4일 오전 8시에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고 일진일퇴하는 가운데 6월 12일에 이르러 Kansas Line 안의 16개 고지 전부를 점령하였다. Kansas Line 이남의 전략적인 요지를 상실한 적은 완전히 사기를 잃게 되어 나머지 17부터 24까지의 8개 고지는 비교적 용이하게 점령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 해병대 정면에 포진되었던 적은 인민군 12 및 32사단이었으며 우리 해병대가 점령한 14목표와 그앞에 있는 17목표 사이의 대암산봉 능선일대에 집결되어 있었다. Kansas Line내의 1목표에서 16목표까지를 점령한 우리 해병대는 이어서 Badger Line의 17에서 24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제2단계 작전을 6월 13일부터 개시하게 되었다. 제1대대는 11고지를 근거지로 삼고, 제2대대는 9 및 10고지의 진지를 강화하면서, 제3대대는 13고지에서 도솔산에 이르는 능선을 따라가각 정찰을 실시하는 가운데 제2대대가 6월 15일 오전 8시에 공격 을 개시하여 17, 18 및 19고지를 점령하게 되어 있었다. 이같은 작전계획은 이후 제3대대가 목표 20, 21 및 22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할 때, 측면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같은 계획 밑에 제2대대는 17일 8시 31분에 임무를 완수하고 제3대대가 공격할때, 능률적으로 지원 하였다. 적은 고지 후면 암석에 잠복하여 저항해 왔기 때문에 육박전을 감행한 끝에 6월 17일 12시 30 분 20고지를 점령하고 다음 날에는 21고지, 그리고 19일에는 22고지를 차례로 탈환하여 드디어 도솔산을 완전히 점령 하였다. 이어서 제1대대는 11고지와 14고지로 이동하여 23 및 24고지를 점령할 준비를 갖추고, 19일 7시에 22고지부근까지 전진하여 8시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9시 30분에 23고지를 점령하였다. 한편 미해병대 제7연대는 우리 해병대의 좌측에서 24고지를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였고, 6월 20일 제3대대가 24고지를 인수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솔산 일대의 산악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우리 해병대의 찬란한 공훈에 대하여 당시의 국회의장(신익희)은 감사문을 신현준 사령관에게 보내왔고, 또한 미국 대통령은 참모장 김성은 대령과 제1연대장 김대식 대령에게 미국 은성훈장을 수여하였다. 도솔산 24개고지를 점령한 우리 해병대는 이 고지들을 위협하는 적 3개 대대 병력이 배치되어 있는 대우산을 7월 8일부터 2일간 걸쳐 공격하여 다대한 전과를 올린 다음, 7월11일부터 17일까지 방어전에 임하였다. 이와같이 6월 4일부터 7월17일까지 40여일동안 대규모의 산악전을 수행한 우리 해병대는 전선을 미육군 제2사단 제38연대에 인계하고 홍천지방으로 이동하여 차기작전을 수행할 준비에 임하였다. 김일성고지전투 북한 인민군 제3군단 예하의 정예부대인 제3연대가 924고지를 김일성고지로, 1026고지를 모택동고지로 명명하면서까지 사수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을 때, 우리 해병대 (제1연대 연대장 대령 김대식)는 1951. 8. 31 첫 공격을 개시한 이래 적의 완강한 저항과 매설된 지뢰에 의해 사상자가 속출 하였으나 맹렬한 공격으로 혈전을 거듭하여, 1951. 9. 2 924고지를 점령하고 이어서 1951. 9. 3 마침내 1026고지를 점령하여 한국 해병대의 임전무퇴 정신을 국내외에 과시하게 되었다.
도솔산 고지전을 수행 후 홍천지방의 철정리에서 부대를 재편성한 제1연대는 8월 27일에 다시
새로운 임무를 띠고 출동하게 되었다. 우리 해병 제1연대가 출동한 지역은 중동부전선에서 가장 험준한 산악지대인 펀치볼일대의 고지였다. 제
1연대는 8월 28일 평촌에 집결한 후 거기에서 Kansas Line의 방어를 위하여 전선으로 이동하여29일 Kansas Line에서 미해병대와
임무를 교대하고 즉시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1951년 6월 10일 개성에서 열린 정전회담 이후 피아가 서로 소규모의 정찰행동을 반복하고
있었으나, 이번에 우리 해병대가 맡은 임무는 적의 주저항선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우리 해병대가 공격할 목표는 도솔산을 출발점을 삼고 만대리
분지를 둘러싼 지단의 능선일대에 있는 주봉들인데, 이 일대를 우리가 확보하게 되면 금강산을 가까이 바라보면서 북한땅 깊숙히 들어가게 되는
것이었다. 이 지점의 924고지와 1026고지를 점령하는 일이야말로 앞으로 중동부전선의 전세를 전반적으로 유리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큰 것이었다. 924고지와 1026고지에는 인민군의 최강부대인 제3군단 제1사단 제3연대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 예하 제1대대(약 500명)가
924고지에, 제2대대(약500명)가 1026고지에 각각 포진하고 제3대대가 예비대로서 그 후방에 대기하고 있었다. 적은 소련제 중화기로
장비되어 있었으며, 각 대대는 82미 박격포 8문과 중기관총 6문을 장비하고 있어 화력면에서 우리 해병대보다 훨씬 우세한 상태였다. 또한 적은
휴전회담중의 소강 상태를 이용하여 방어진지를 견고하게 구축하였고, 진지전면에 막대한 수의 대인지뢰를 매설해 놓았다. 그러면서 도솔산에서 패배한
치욕을 여기에서 만회한다고 호언하면서 924고지를 '김일성고지' 그리고 1026고지를 '모택동고지'라고 명명하고 있었다.924고지를 공격할
부대는 제2대대였는데, 8월 31일 공격 대기지점인 월산령에 집결하여 공격을 감행하여 고지전방 100야드지점까지 이르렀으나, 날씨가 불순하여
관측착오로 말미암아 아군지원 사격포탄이 공격부대 주변에 낙하하고 또한 적의 지뢰에 의한 부상자가 속출함으로 부득이 공격을 중지하고 일단
철수하였다. 이날 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제3대대의 최전방중대인 제11중대를 시찰 격려하고 돌아가다 지뢰를 밟아 부상당하자 부연대장인 김동하
중령이 임무를 대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목표를 점령한 우리 해병대는 924고지, 1026고지및 1056고지 등
일대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방어태세로 전환하였다. 이 작전의 성공적인 수행으로 우리 해병대의 이름이 또다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혹한과 싸우면서 방어임무를 수행하던 우리 해병대는 1952년 3월 17일 수도서울의 방어를 위하여 서부전선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해병대는 원산만을 제압하기 위하여 여도를 비롯한 동해상의 도서들을 점령하여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이 때 적진 깊숙이 위치한 북위 40도 40분, 동경 129도 30분에 위치한 양도에 1951년 8월 28일 우리 독립 제43중대(중대장 최청송 중위)가 상륙하여 첩보공작을 수행하고 있었다.
양도는 3개의 작은 섬인 길주양도, 명천양도및 강후의도로 되어 있는데, 강후의도는 암석으로 된 무인도였다. 양도의 대안은 함경북도 명천군 상가면으로서, 양도와의 거리는 4,000야드에 불과하였다. 이 양도대안에는 약 1개중대의 인민군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그후 인민군 총사령부 직속의 독립 63보병연대가 배치되었다. 1952년 2월 20일 우리 해병대는 대안의 적으로부터 105미리 직사포 3문과 120미리 박격포 3문의 맹렬한 포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날 오전 1시 40분에는 길주양도에 적이 접근하여 아군의 보초를 사살한 후에 상륙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명주양도 전면에도 적의 발동선 2척이 접근해 왔다. 날씨는 몹시 흐려서 가까운 거리도 분별하기 곤란한 가운데서도 아군은 세심하게 적의 그림자를 찾아 포화를 퍼부어 적발동선 2척을 격침시켰으나, 적의 주력은 끝내 길주양도 70고지와 명천양도 47고지에 기어 올라 만세를 부르며 아군의 사기를 제압하려 하였다. 당시 아군이 생포한 적대장의 진술에 의하면 대안의 적은 연대지휘소를 청진에 두고 양도 2개 도서를 기습할 목적으로 전투경험이 많은 장병을 선발하여 1개대대를 편성후 함경북도 부령군에서 1개월간 상륙작전훈련을 실시하고 나서 다시 나진해안에서 모의연습을 마쳤다는 것이다.
적은 약 200명의 병력으로 기습을 감행하여 길주양도 70고지와 명주양도 47고지를 일단 점령하였다. 그러나 해병 독립 43중대는 열세한 전투력임에도 매복과 기습으로 상륙한 적주력을 하루만에 유인 격멸하고 일부 범선을 타고 도주하는 적을 해상에서 격침 소탕 하였다. 이 작전의 승리에 대하여 미 태평앙함대 사령관으로부터의 극진한 찬사가 있었고, 중대장 최청송 중위와 이영덕 병조장, 정진영 2조는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은성훈장을 받았으며, 중대선임장교 황병호 소위는 미동성훈장을 받았다. 또한 우리 정부에서도 중대장에게 을지훈장을 수여하였고, 그 밖에도 10명에 대하여 충무훈장과 30명에 대하여 화랑훈장을 각각 수여하였다. (-을지훈장:최청송 중위, 이영덕 상사, 정진영 하사 -은성훈장:최청송 중위, 정진영 하사 -동성훈장:황병오 소위)
이 독립43중대는 그 후 철통같은 양도경비에 임하던 중, 1952년 10월 5일 양도부대로 재편되었다. 그리고 휴전후 동해부대 철수계획에 따라 1953년 7월 27일 철수를 개시하였고, 동년 8월 4일 진해에 도착하여 제2연대에 편입되었다. 장단지구전투 1952년 3월 중순경이었다. 그동안 924고지 일대를 점령 방어하고 있던 해병 제1연대와 펀치볼 지구에서 작전중이던 미해병 제1사단은 미8군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수도 서울의 관문인 장단지구 전선으로 이동했다. 미8군사령부의 그와 같은 조처는 휴전회담의 진전에 따른 서울 방어를 위한 전투부대 재배치계획의 일환이었는데, 해병 제1연대가 배치된 곳은 판문점 동북방의 고랑포지구였다. 그런데 북으로는 휴전회담이 진행중인 판문점, 방어정면인 서쪽에는 사천강, 방어선의 배후인 동쪽과 남쪽은 임진강에 접해 있었다. 해병 제1연대가 맡은 새로운 작전지역은 적으로부터 철저히 감제 당하고 있는 지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판문점과 휴전협상 대표들의 안전을 보장해야하는 특수한 상황하에서 작전행동에 제약을 받는 불리한 지역이었다. 그 유례없는 제한조처란 이른바 중립지대로 규정해 놓은 판문점을 중심으로 한 반경 100m 이내와 양측 휴전협상 대표단의 숙소와 연락사무소가 있는 개성-문산 간 도로, 이른바 평화도로로 명명이 된 그 도로 양쪽 200m 이내 지역에서의 적대 행위나 사격의 금지 및 심지어는 착탄까지도 금한 것이었다. 이같은 제한조처에도 불구하고 적은 야간을 이용해서 야포나 탄약 또는 병력 등을 그 중립지대나 평화도로 근처에 비밀 이동, 은닉 배치하거나 저장해 둠으로써 우리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한편 장단지구 전선으로 이동한 직후 해병 제1연대는 1951년 3월 중수경부터 김포지구에 투입이 되어 있던 독립 제5대대와 105밀리 포병대대를 중심으로 전차중대, 공병중대 등이 증강된 연대전투단으로 증편되어 10월 1일부터 정식으로 작전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전투단으로 승격된 바로 그 다음날인 10월 2일 밤(추석전야) 정면의 중공군(제65군 제113사단)은 약 1개 연대의 병력으로 대공세를 취했다. 적은 사천강변에 있는 눈의 가시와도 같은 3개의 해병대 전초기지를 수중에 넣기 위함이었는데, 불의의 기습을 당한 해병대는 중과부적으로 우일선 대대(1대대)의 36고지와 67고지, 좌일선 대대(2대대)의 86고지 등 그 3개의 최전방 전초진지를 모두 잃고 말았다. 연대전투단(단장, 김석범대령)은 67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6차에 걸친 역습전을 실시했으나, 중공군 포부대의 정확한 탄막사격으로 인해 번번이 실패하고 사상자만 늘어나자 결국 그 외곽전초선을 포기하고 일단 제2의 전초전으로 이동하여 주저항선을 방어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0월 31일 밤에 감행된 중공군의 제2차 추기공세를 맞아 연대전투단은 패배를 설욕하고도 남음이 있는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이때의 전투단장은 진동리지구 전투와 통영상륙작전 그리고 영월지구 전투를 지휘했던 지략이 뛰어나고 무운이 좋기로 소문난 김성은 대령이었다. 10월 16일부로 전투단장으로 취임했던 그는 제1차 공세 때의 패인을 면밀히 분석하는 한편, 추석 전야에 한번 재미를 본 중공군은 수중에 넣은 그 전초진지들을 기반으로 하여 다음 만월야에도 반드시 공세를 취하여 주저항선을 유린할지 모른다는 예상 하에 진지강화 작업을 서둘렀다. 그리고 전차부대를 전진 배치하고 우일선인 미해병 사단과 협조하여 적의 예상 접근로를 철저히 강타하기 위한 탄막 사격을 빈틈없이 계획해 놓았다. 드디어 10월 31일 밤 10시 5분부터 15분간 계속된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격준비 지원사격과 함께 1개사단 규모의
병력으로 31,33,39고지등 3개의 전초진지를 일제히 공격해 왔다. 사전계획된 지원화력의 지원하에 사투 끝에 주저항선을 지켜낸 3대대
11중대(중대장 임경섭 중위)와 전초진지(86고지)를 고수했던 2대대 6중대(선임장교 이창수 소위)는 날이 밝자 수백구의 적 시체가 가을 들녁의
집단처럼 뒹굴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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