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의 제48대 황제. 364년부터 375년까지 재위했으며, 여섯 번째 세습왕조인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의 창건자이다. 전통적으로 정규군의 병참기지이자 수많은 군단병들을 배출한 동네인 판노니아 속주 출신으로 일개 병졸에서 능력 하나로 장교를 거쳐, 율리아누스, 요비아누스 밑에서 부관과 장군까지 지낸 뒤, 로마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다. 즉위 후, 동생 발렌스를 공동황제로 지명해 본인은 서방을, 동생에게는 동방을 담당하도록 한 뒤, 제국을 침입한 이민족들과의 전쟁에 일평생을 바쳤다.
2. 생애[편집]
2.1. 즉위 이전[편집]
그라티아누스 푸나리우스(혹은 대 그라티아누스)의 아들로 321년 판노니아의 키발라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대 그라티아누스는 원래 밧줄을 만들어 팔던 사람이었는데, 힘이 세기로 소문이 자자했다.[2] 이후 그는 군에 입대하여 아프리카 코메스 둑스의 지위까지 이르렀다. 어린 발렌티니아누스는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다니면서 자랐다. 대 그라티아누스는 배움이 짧은 것이 한이 되었는지 아들에게는 교양 교육을 시켰는데, 단순히 읽고 쓰는 것뿐만 아니라 예술이나 고전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에 입대했다. 그러나 그의 군 경력은 그다지 평탄하지 못했다. 356년 그는 율리아누스와 콘스탄티우스 2세 간의 정치적 대립에 휘말려 해임되었고, 일설에 의하면 율리아누스가 즉위한 후 등용되었다가 종교적 문제로 또 해임되었다고 한다. 그가 다시 군에 들어온 것은 요비아누스 황제 때였다. 요비아누스는 발렌티니아누스의 용맹을 높이 사 스콜라이 스쿠타리오룸의 장교로 임명했고, 발렌티니아누스는 요비아누스의 장인을 따라 갈리아에 다녀오기도 했다.[3]
그 이후 제국 동방으로 돌아온 발렌티니아누스는 안키라에 파견되어 있었다. 364년 초, 요비아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던 길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고위 문무관들은 니케아에 모여, 다음 황제로 누구를 추대할 것인가를 놓고 회의를 열었다. 그들이 두 명의 후보를 제치고 선택한 사람은 다름아닌 발렌티니아누스였다.
2.2. 즉위 이후[편집]
발렌티니아누스는 자신이 황제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니케아로 달려왔다. 앞서 율리아누스와 요비아누스의 잇따른 죽음을 목격한 병사들은 새 황제에게 공동황제를 지명할 것을 요구했고, 발렌티니아누스는 자신의 친동생 발렌스를 공동황제로 임명했다.[4] 발렌티니아누스가 제국 서방, 발렌스가 제국 동방을 통치하게 되었으며, 두 형제는 같은 해 8월경까지 제국을 나누어 다스리는 데 필요한 준비들을 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발렌티니아누스는 제국 서방의 밀라노로 향했고, 그곳에서 본격적인 제국 통치를 시작했다.
2.2.1. 군사정책[편집]
발렌티니아누스는 치세 대부분을 라인 강 - 다뉴브 강 유역의 변경 지대에서 보냈을 정도로 제국의 방어에 힘썼다. 집권 초기~중기에는 무어인들이 북아프리카를, 알라마니족이 갈리아 변경지대를, 색슨족과 프랑크족이 갈리아 해안 지대를 침략하는 일이 잦았으며, 브리타니아에서도 소요 사태가 발생했다. 집권 후기에는 주로 다뉴브 강 유역의 사르마티아족과 콰디족이 판노니아와 발레리아의 변경지대를 침략했다. 황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알라마니족과 사르마티아족, 콰디족에 대한 원정에 나섰으며, 다갈라이푸스, 세베루스, 요비누스, 테오도시우스 등 휘하의 유능한 장군들을 파견하여 멀리 떨어진 속주나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침략에 대응했다.
이민족의 침략에 더해서, 제국 내부에서 반란도 발생했다. 365년 발생한 프로코피우스의 반란은 발렌티니아누스의 정통성이 언제든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369년에는 브리타니아에서 발렌티누스의 반란이, 372년에는 아프리카에서 피르무스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두 반란 모두 대 테오도시우스(테오도시우스 1세의 아버지)가 진압하였다.
한편으로 발렌티니아누스는 변경 지대에 적극적으로 요새를 쌓고 보수하기도 했다. 황제가 세운 요새들은 적군을 감시하고 강을 순찰하는 선단들을 보호하기 위해 지어졌으며, 어느 정도는 황제의 군사적 업적을 선전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2.2.2. 행정정책[편집]
거의 변경지대에 머물러 있었던 것과는 별개로, 서민을 위한 정책에도 비교적 관심을 보였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일종의 국선변호사 제도인 '데펜소레스 플레비스'를 조직하여 농민이 따로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도 법적인 변호를 받을 수 있게 했고, 로마 백성에게 빵과 포도주를 공급하는 정책을 보완했다. 한편으로 양돈 농가, 광부 조합, 도시의 짐꾼과 소방대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그들의 권리를 보장해 주었다. 에드워드 기번에 의하면, 황제는 갓난아기를 버리는 것을 금지하고 로마에 학교와 의료소를 세우기도 했다.
2.2.3. 종교정책[편집]
발렌티니아누스는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인이었으나, 종교적으로는 중립과 관용을 지킨 것으로 평가받아 왔다. 그는 희생 제의나 남을 저주하는 의식만 하지 않는다면 이교 제의를 수행하는 것도 허용했다. 한편으로, 그는 사제들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 사제들이 과부에게 유산을 받거나, 과부나 고아의 집에 분별없이 드나드는 것을 금지했다.
2.3. 원로원과의 대립[편집]
아우구스투스의 제정 수립 이후, 역대 로마황제들은 늘 원로원과 신경전을 펼치고 대립했다. 이는 원로원에게 평이 좋았던 아우구스투스도 마찬가지였는데, 발렌티니아누스는 원로원과 가장 치열하게 대립했던 황제들 중 한 명으로 유명하다. 원로원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티베리우스,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 하드리아누스와 마찬가지로 로마 황제가 활용할 수 있는 두 가지 무기(반역법, 간통법)를 활용했다. 이때 그는 역대 로마황제 중 원로원이 극도로 미워한 도미티아누스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측근 막시미누스를 로마에 파견하여 마술이나 간통 혐의를 빌미로 원로원 계층을 대거 숙청했으며, 이 과정에서 원로원 의원의 특권이었던 고문 금지도 무시했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황제의 측근들이 고위 관직을 장악하고 원로원에까지 진입하게 되니, 원로원의 불만은 컸다. 따라서 그들은 로마의 행정정책을 두고 황제와 사사건건 대립했다.
물론 발렌티니아누스는 도미티아누스처럼 전적으로 원로원을 배척하고 탄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런 모습을 생각해보면 티베리우스나 하드리아누스와 더 비슷했고, 칼리굴라처럼 원로원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은 케이스와 더 비슷했다[5]. 특히 군사정책이나 종교정책은, 그가 어느 정도 원로원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나 황제와 원로원 간의 반목은 상당히 깊었고, 그것은 황제의 이미지가 사후 고대기록 작성자인 원로원 계층에게 상당히 왜곡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원로원 측이나 도시 지식인들이 기록한 사료에는 황제와 그 측근들을 주로 '폭력적이고 잔인하며 무식하고 탐욕스럽다'고 비판하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과장되었거나 왜곡된 것도 적지 않다. 후대의 유물, 유적 발굴과 금석문 해석 등으로 그 평가가 바뀌고 있는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 하드리아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갈리에누스의 사례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 발렌티니아누스는 그리스어는 잘 하지 못했지만, 고대 기록의 설명처럼 함량미달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같은 진짜 문맹의 무식하고 잔인한 황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는 모국어 라틴어는 읽고 쓸 줄 알았으며 그 수준도 고전도 어느 정도 습득했던, 상당히 상식적이고 건강한 교양을 갖춘 황제였다. 이는 그의 인사 정책도 마찬가지인데, 당장 황제가 로마에 파견한 막시미누스는 마르켈리누스의 비판을 엄청나게 받고 있지만, 변호사 경력이 있는 인물로 원로원의 주장처럼 어디서 굴러들어온 못배운 사람이 아니었다. 또 황제가 세금을 철저하게 걷은 측면은 있지만, 국가 유지에 필요한 군비 충당을 위한 목적이 강했으므로 그것을 황제 개인의 탐욕으로 보기는 어려운 일이다.
2.4. 죽음[편집]
375년 겨울, 황제는 콰디족 사신단을 만나고 있었다. 사신들은 황제에게 "변경을 약탈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떠돌아다니는 도적떼이며, 우리 영토에 먼저 요새를 세운 것은 당신들이지 않느냐" 고 변명했다. 이에 분노한 황제는 사신단에게 욕을 퍼부으며 꾸짖다가, 갑자기 뇌졸중을 일으켜 쓰러졌다. 신하들은 급히 의원을 찾았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황제가 역병에 걸린 병사들을 치료하라며 의사들을 다른 데로 보냈고 근처에 의사가 남아 있지 않았다. 마르켈리누스는 이후 의사가 오긴 왔으나 황제의 병을 나아지게 할 수는 없었다고 말한다. 황제는 그날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해는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성 사도 성당에 안장되었다.
황제의 죽음 직전에 혜성이 떨어지는 전조가 나타났다고 한다. 혹은 황제가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황후가 상복을 입은 채 울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3. 평가[편집]
'최후의 서방 대제'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유능한 군인황제였다. 율리아누스,요비아누스 두 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혼란스러운 제국을 안정시켰고 연이어 쳐들어오는 이민족들을 격파하고 변방 지역들에 요새를 세워 대비했다. 다만 375년에 발렌티니아누스가 서거하면서 다시 서방이 크게 약화되었고,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를 수습하려 했지만 그 역시 급사하고 만다.
4. 기타[편집]
두 명의 부인과의 사이에서 2남 3녀를 두었다. 첫 번째 부인 마리나 세베라와는 황제가 되기 이전에 결혼했는데, 369-370년경 이혼하고 두 번째 부인 유스티나와 재혼했다. 일설에 따르면, 세베라 황후와 유스티나는 서로 아는 사이였는데, 어느 날 함께 목욕을 했다고 한다. 그날 저녁에 황후는 별 생각 없이 황제에게 "유스티나는 정말 아름답다" 고 칭찬했고, 그 말을 들은 황제는 도대체 얼마나 예쁜 아가씨인지 보고 싶어졌다고 한다.
자녀들은 거의 요절했다. 두 아들 그라티아누스와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황제가 되기는 했지만 젊은 나이에 암살당했고, 딸 플라비아 갈라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황후가 되었으나 셋째아이를 낳다가 난산으로 사망했다. 나머지 두 딸 그라타와 유스타는 결혼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요절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키가 크고 강건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으며, 금발에 잿빛 눈이었다고 한다. 대단한 다혈질로 유명했다. 마르켈리누스는 황제가 전쟁에는 신중하며, 기억력이 좋고 글씨를 잘 쓰며, 새로운 병기를 고안하는 것을 좋아하고, 방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만 욱하는 성격과 잔인함, 신랄한 말투 등에 대해서는 비판했다.
에드워드 기번에 의하면, '인노켄티아' 와 '미카 아우레아'라는 이름의 곰 두 마리를 키우며, 죄인을 잡아먹게 했다고 한다.
아프리카누스라는 이름의 지방 지사가 더 큰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로 승진하고 싶어했다. 이 말이 황제의 귀에 들어갔고, 테오도시우스도 아프리카누스의 뜻을 지지했다. 그러자 황제는 테오도시우스를 향해 "그러면 갔다 오시오, 코메스. 그 자가 다스리는 지방을 바꾸고 싶다고 하니, 그대가 가서 그 자의 머리도 바꾸어 놓으시오." 라고 하는 일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