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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교실 스크랩 시간의 철학적 성찰(소광희)
樂而忘憂 추천 0 조회 180 08.08.27 23:1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시간의 철학적 성찰(소광희)

  ** 이 글은 소광희 시간의 철학적 성찰을 보고 요약 정리한 글임

  출처: http://blog.naver.com/thetree1/50011852051


  

시간은 가장 익숙하면서도 가장 기괴합니다. 심지어 공포를 느끼게 만듭니다. 시간은 가장 익숙합니다. 일체의 삶이 시간에 의거해서 영위되기에 삶의 깊숙한 바탕에서부터 순간적인 삶의 편린에 이르기까지 시간은 늘 그리고 이미 한 치 빈틈도 없이 삶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시간은 가장 기괴합니다. 전혀 사유의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마치 발로 밟으려고 하면 발 위로 올라와 발을 뒤덮어버리는 그림자처럼, 사유의 손 안팎을 완전히 채우면서 뒤덮어버리는 것이 바로 시간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시간이 사유를 통해 스스로를 사유하는 꼴이 되는 지경을 떠올릴 정도입니다.


여러 방식으로 시간을 사유합니다. 물리학적으로 사유할 수도 있고, 생리심리학적으로 사유할 수도 있고,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도 있습니다. 신화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사유할 수도 있고, 사회학적으로 사유할 수도 있습니다. 시적으로나 회화적으로 즉 예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물론입니다. 라는 식으로써 시간은 거리를 속도로 나눈 것이라는 식으로 간단하게 사유할 수 있습니다. 생체 리듬이나 생체 시간을 바탕으로 시간의 분할과 지속을 생각할 수도 있고, 의식 활동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생성된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결단에 의해 생성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시간을 신으로 여겨 생각할 수도 있고, 신의 섭리가 펼쳐지는 과정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시간에 대한 사회적인 규정에 따라 사회가 어떻게 변하는가를 따질 수도 있습니다. 감각의 더없는 응축이 일어날 때 시간이 얼굴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모로 시간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시간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둘러싸고서, 그러니까 인간의 삶 안팎에서 그저 결코 해명할 수 없는 가장 포괄적인 비의로서 늘 그리고 이미 일체의 존재 방식을 예외 없이 뒤덮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시간을 철학적으로 사유해 보고자 덤벼든 우리는 어쩌면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지도 모릅니다. 시간을 사유한다는 것은 삶 전체뿐만 아니라 존재 전체를 건드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시간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여느 영역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는 달리 사유 자체의 운명을 건드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다행하게도 소광희 선생님이 『시간의 철학적 성찰』이라는 책을 저술해 놓았습니다. 우리가 노리는 ‘수직적 시간’은 결국 예술적 시간이 될 것입니다만, 그 시간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선생님의 책이 중요한 몇몇 이정표 역할을 할 것입니다. 

   


*****************

제2강 플라톤: 카오스/코스모스와 시간


(1교시) 



3. 플라톤이 본 시간의 탄생



이제 위대한 철학자들이 시간을 어떻게 보았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플라톤입니다. 플라톤이 시간에 관해 말한 곳은 주로 『티마이오스』(박종현 / 김영균 공역, 서광사)입니다. 그 중에서도 얼마 되지 않은 지면 37c-39e에 개진되어 있습니다. 지면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 내용은 결코 만만찮습니다. 앞서 시간의 세 양상에 관한 이야기는 플라톤의 시간론에서 이미 상당 정도 제시되어 있습니다.


『티마이오스』는 플라톤의 우주론을 담고 있는 책으로 유명합니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라고 하는 실존 인물인지 어떤지 알 수 없는, 어쨌든 천문학에 밝은 인물을 내세워 우주의 기원과 구조를 밝힙니다. 우주(kosmos)를 만드는 데에 우주를 만든 신으로 데미우르고스(Demiourgos)가 있고, 데미우르고스가 우주를 아름답고 조화롭게 만들기로 하는 이상 본(paradeigma)으로 삼을 수 있는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 즉 영원한 존재(aidion ousia)인 이데아가 있고, 데미우르고스가 우주를 만드는 재료를 만들기 위한 원 재료인 필연(ananke)라고 불리기도 하는 생성(genesis)이 있고, 또 생성의 유모라고 불리는 공간(chora)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존재, 공간, 생성이 있고, 이 셋이 세 가지로 있으며, 천구(우주)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다는 겁니다.”(52d, 역본 147쪽) 필연인 생성은 제멋대로 운동을 하고 있어 전혀 균형이 잡히지 않은 힘들로 가득 차 있고 그저 뒤흔들리는 방식으로 있는데, 이 필연인 생성에게 데미우르고스가 지성으로써 설득하여 질서(taxis)를 부여함으로써 조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것이 우주라고 합니다. 그런데 플라톤은 우주의 몸은 가시적인 것이어서 그 자체 균형과 조화를 간직하지 못한 것으로 보고 데미우르고스가 우주의 혼을 만들어 우주의 몸에 집어넣음으로써 우주가 조화롭고 아름답게 되는 것으로 봅니다. 말하자면 온 우주는 살아 있는 것이 되는 셈입니다. 해와 달 그리고 다섯 개의 행성인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모두 신들로 취급되는 것은 그것들이 각기 나름의 질서 정연한 안팎의 운동을 하는 것으로 보아 우주의 혼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천체의 운동은 천체의 몸이 운동하는 것이라기보다 천체의 혼이 운동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시간입니다. 시간에 관한 이야기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이렇습니다. “우주를 생기게 한 아버지가 이것이 영원한 신들의 상으로서 생겨나 운동하게 되고 살아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경탄하며 기뻐한 나머지, 그것을 그 본에 대해 한결 더 닮은 것으로 만들어 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본이 살아 있는 영원한 것이듯이, 그는 이 우주도 그처럼 가능한 한 그런 것이도록 만들어 내려고 꾀했습니다. 그런데 그 살아 있는 것의 본성은 영원한 것이어서, 이를 생성된 것에 완전히 부여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는 어떤 영원(aion)의 모상(eikon)을 만들 생각을 하고서, 천구에 질서를 잡아 줌과 동시에, 단일성(일자 hen) 속에 머물러 있는 영원의 [모상], 수에 따라 진행하는 영구적인 모상(aionion eikon)을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간(chronos)이라 이름 지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구가 생겨나기 전에는 낮과 밤 그리고 연월이 없었는데, 그것이 구성되는 것과 동시에 그가 그것들의 탄생을 궁리했기 때문입니다. 이것들 모두는 시간의 부분이며, ‘있었음’[과거]과 ‘있을 것임’[미래]은 생겨난 시간의 종류들인데, 바로 이것들을 우리는 부지중에 영원한 존재에 잘못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그야 물론 우리가 ‘있었다’거나 ‘있다’ 그리고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지만 영원한 존재에는 ‘있다’(esti)만이 참된 표현으로서 적합하고 ‘있었다’와 ‘있을 것이다’는 시간 안에서 진행되는 생성에 대해서나 말하게 되는 것이 적절하기 때문입니다.”(37c-38a, 역본 102-103쪽)


이 글을 보면, 플라톤은 일단 시간을 낮과 밤 그리고 연월 등으로 측정될 수 있는 것, 즉 셀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시간의 부분들이라 하는 것으로 보아서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시간의 종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말하자면 시간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데미우르고스가 시간을 만들게 된 이유가 자못 흥미롭습니다. 천체 내지는 우주를 만들어 놓고 보니 천체가 신들의 상으로 나타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여 너무 좋은데 뭔가 부족하다 이겁니다. 그래서 우주의 본인 영원한 존재를 더욱 더 완벽하게 닮게 만들어야 하겠다고 욕심을 냅니다. 생성된 것인 우주만으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고요. 그 결과 생각해서 새롭게 만든 것이 시간이라는 이야깁니다. 시간은 영원한 하나의 존재에 대한 영구적인 모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들어진 우주가 영원한 일자인 이데아를 닮을 수 있는 것은 시간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식입니다. 소광희 선생님의 표현에 따라 달리 말하면, “시간은 영원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덧없이 생성, 소멸하는 현상계로 하여금 이데아를 지향하도록 한 것이다.”라고 하겠습니다.(소광희, 217쪽)


플라톤이 내린 시간의 정의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수에 따라 진행되는 [영원한 존재인 일자에 대한] 영구적인 모상’이라는 표현입니다. 소광희 선생님은 ‘수에 따라 진전되는’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적절히 잘 해석하고 있습니다. “ ‘수에 따른다’는 것은 시간과 수가 그 본성을 같이 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의 일반적 특성은 ‘헤아리고 헤아려진다’는 데 있다. 즉 수는 의식 관련적이다. 그리고 수는 단절과 연속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단절 즉 비약이 없으면 전진할 수가 없고, 연속성이 없으면 헤아림의 기본인 서열이 서지 않는다. 수의 본질은 비연속적 연속성이다. 시간이 헤아려지려면 수와 마찬가지로 단절되면서 동시에 연속되어야 한다. 그것이 밤과 낮, 연월일이다. 수와 시간은 그 본질을 같이 한다.”(소광희, 218쪽)


플라톤이 기하학과 수학을 중시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실상 『티마이오스』에서 우주의 생성을 소상하게 설명하는 대목을 보면 우주의 몸을 만드는 재료인 흙, 불, 물, 공기는 원재료인 기하학적인 도형들에서 생겨나고, 우주의 혼은 수학적인 비례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수의 계열이 지닌 연속성과 비연속성의 통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1, 2, 3, 4 등으로 이어지는 자연수의 계열은 비연속적입니다. 그 사이에 확실한 간극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리수와 무리수를 포함한 실수 전체를 놓고 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실수의 계열은 그 자체로 보면 완전한 지속으로서 그 사이에 불연속의 간극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실수 중 어느 하나의 수를 지목할 수 있습니다. 자연수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일정한 수를 지목하는 순간 그 수는 완전한 지속에서 빠져나와 독립성을 띠게 됩니다. 수라고 하는 것이 어차피 이러한 불연속적인 독립성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순수 지속을 수로 분할해서 양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정한 하나의 수와 무한소의 간극을 지닌 바로 그 옆의 일정한 하나의 수 사이의 무한을 실수의 연속이 포섭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연속체로서의 실수, 즉 지속과 완전히 닮은 실수를 생각하게 됩니다. 문제는 오히려 단위 개념입니다. 수의 체계에서는 단위가 필수적입니다. 시간 지속을 단위로 분할한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입니다. 하지만 수학에서도 무한 개념이 있고, 그 무한은 결코 단위가 아닙니다. 그래서 무한 분의 1과 무한 분의 10000은 크기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튼 플라톤의 시간 개념은 영원을 닮아 있으면서 동시에 연월일시분초 등으로 측정할 수 있는, 이른바 수학적으로 양화될 수 있는 이중배리적인 측면을 지닌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영원’을 닮은 점에서는 양화될 수 없는 지속을, 하지만 ‘닮아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수를 따라 진행되고 따라서 양화될 수 있는 시간을 말한 셈입니다.



4.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매개인 시간


플라톤의 시간론에서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카오스를 코스모스로 끌고 가 코스모스를 영원한 일자에 최대한 닮도록 만드는 데 시간이 필수적이라 본 것입니다. 요컨대 카오스에서 최대로 완전한 코스모스로 나아가는 데 시간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흔히 우리는 시간이야말로 생성 즉 발생과 소멸을 거듭하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간을 극복하고 영원의 상태로 올라가고자 노력합니다. 시간을 극복하는 자, 시간을 통해 생겨나는 탄생과 죽음을 극복하는 자야말로 위대한 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플라톤은 발생과 소멸의 원인은 오히려 필연이라 불리는 생성의 본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고, 시간은 영원으로 올라가는 사다리인 양 말하는 셈입니다. 천체를 지배하는 시간은 영구적인 반복의 시간입니다. 그것을 플라톤은 수평으로 오른쪽으로 원운동을 하는 같음(동일성)의 궤도와 대각선으로 왼쪽으로 원운동을 하는 다름(타자성)의 궤도라고 지칭합니다. 그러면서 동일성과 한결같음을 유지하는 회전 운동에 주도권이 있다고 말합니다.(36c, 역본 98-9쪽 참조.) 말하자면, 시간에 의거해 일어나는 천체 운동과 천체 운동을 통해 드러나는 시간을 고려함으로써 영원한 일자인 이데아 세계를 가늠할 수 있고 거기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식으로 말하는 셈입니다.


반복적인 원 운동으로서의 시간은 플라톤이 염두에 두고 있는 윤회설과 무관한 것 같지 않습니다. 히브리적인 직선적 시간관과 대립되는 그리스적인 순환적인 시간관 역시 이러한 플라톤적인 시간관과 그대로 일치합니다. 중요한 것은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나아가는 데 시간이 개입해 있다는 것입니다. 성급하게 말하면, 카오스적인 인생을 벗어나 코스모스적인 인생을 되찾는 데에는 시간을 타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 시간은 도대체 어떤 시간인가요? 발생과 소멸의 덧없는 계속을 벗어나 영원한 영역으로 비약해 가는 그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요?


이에 관해서는 엘리아데의 시간관과 니체의 영겁회귀의 시간을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두 사람의 시간관을 들여다봄으로써 플라톤에서 연원하는 영원을 향한 시간을 더욱 실감나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

제3강 영원회귀-창세의 반복: 제논, 엘리아데, 니체 I


1. 제논의 역설과 영원


“쏜 화살은 날아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정한 거리를 지나야만 날아가는 것이고, 일정한 거리를 지나기 위해서는 그 거리의 중간 지점을 통과해야 하고, 그 중간 지점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그 중간 지점까지 가야만 하고, 그 중간 지점까지 가려면 출발점과 그 중간 지점 사이의 또 제 2의 다른 중간 지점까지 가야만 하고, 그 다른 중간 지점까지 가려면 출발점과 그 다른 중간 지점 사이의 제 3의 다른 중간 지점까지 가야만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제 4의 중간 지점까지 가야만 하는데, 이러한 과정은 무한하고, 그 무한개의 중간 지점을 하나하나 다 거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쏜 화살은 날아가지 않는다.”

아무튼 제논의 이러한 역설은 일상적인 삶을 사는 우리에게는 대단히 낯설고 이질적이고 그래서 한편으로 대단히 공격적이고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합니다. 논리적 사유가 평범한 일상을 치고 들어와 뒤집어 엎어버리는 폭력적인 힘, 이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요?


제논은 고대 헬라스 지역의 엘레아학파의 거두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520-440, B.C.)의 제자입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최초로 정교한 변증법을 안출해 발휘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는 어떤 주장을 부인하면 필연적으로 모순에 빠지게 되며, 따라서 그 부인이 논리적으로 지지될 수 없다는 것을 제시함으로써 그 주장을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여러 변증법적 논증들이 있습니다만, 한 가지 즉 변화(운동)에 관한 것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변화(운동)는 시간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나간 속된 시간의 폐지는 일종의 ‘세계의 종말’을 의미하는 여러 의례들을 통해 실현되는데 그 내용이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그 내용들은 대체로 인간의 삶을 통해 정착된 각종 관행들을 일순간 폐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코스모스에서 카오스에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불을 끄는 것, 죽은 자의 혼의 귀환, 사투르날리아제에서 볼 수 있는 사회적 혼란, 성애(性愛)의 자유, 오르지(痛飮亂舞) 등은 모두 코스모스의 카오스에로의 되돌아감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해의 마지막 날에 우주는 원초적인 물 가운데로 융해되었다. 어두움, 형태가 없는 것,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상징하는 바다의 괴물 티아마트가 부활하여 다시 위험을 가한다. 일년 동안 존재했던 세계는 실제로 소멸하였다. 티아마트가 다시 출현했기 때문에 우주는 소멸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르두크는 티아마트를 다시 한 번 정복한 후에야 그것을 다시 한 번 창조하게 되었다.”(같은 책, 96쪽)


엘리아데는 매년 반복되는 코스모스의 카오스에로의 복귀 그리고 카오스로부터 새로운 코스모스의 창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과정은 신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재현됩니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신성한 존재가 됩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물론 신들이 의례를 통해 인간들에게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신과 인간의 뒤섞임을 봅니다. “축제에서 생명의 성스러운 차원이 회복되고, 그 참여자들은 신의 창조물로서 인간 존재의 신성성을 체험한다.”(같은 책, 103쪽) 니체가 디오뉘소스 극을 사튀로스 극이라 말하면서 사튀로스로 분장한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관객들이 모두 스스로 사튀로스가 된다고 여긴다고 말하는 것은 허투로 과장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고대인들의 축제의 정신이 그대로 내려온 것이겠습니다.

문제는 카오스로 되돌아가는 것을 인간들이 직접 재현한다는 것입니다. 카오스가 도래하는 시간은 분명 신성한 시간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이루어지는 행위는 흔히 디오뉘소스적이라 일컫기도 하는 통음난무와 난교 등입니다. 오늘날 문명의 세속적 시간에서 보면 타락한 것으로 여겨지고 더러운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하는 열정적이고 무질서한 에너지의 분출이 고대인들에게는 도리어 신성한 행위였던 것입니다. “남신과 여신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비시간적인 순간, 영원한 현재에서 이루어진다. 한편 인간의 결합은―의례적 결합이 아닐 때―속된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같은 책, 103쪽) 제우스의 바람기 넘치는 열정적인 간음이 떠오릅니다. 우주의 창조와 성적인 에너지의 분출의 연결, 프로이트가 원초적인 본능인 리비도를 강조한 것이 떠오릅니다. 중요한 것은 세속적 시간의 질서는 신성한 시간의 무질서보다 더 더럽다는 것입니다.


제5강 아우구스티누스 : 시간의 역설에서 시간 의식으로 I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영원 개념과 신을 참다운 존재라고 할 때 존재의 개념이 과연 아무런 무리 없이 결합될 수 있는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영원이라는 개념은 존재라는 개념을 증기로 만들어 날려버립니다. 물론 오히려 그런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신이라는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고 마치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와 비슷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만약 신이 존재하는 자라면 도대체 영겁조차 아닌 영원을 띨 수 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유가 완전히 막혀버리는 지경입니다. 사유가 막힐 때 우리의 의식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 건가요? 너무나도 감각이 충일하게 의식을 채우면 의식은 사유의 여지를 갖지 못합니다. 그 어떤 감각도 없이 의식이 텅 비어버리면 의식은 역시 사유의 여지를 가지지 못합니다. 물론 의식이 무슨 그릇과 같아서 꽉 채워지거나 텅 비어버리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점적인 감각의 영도(零度)를 붙들고 그 점적인 영도를 넘어서 마이너스의 허수 세계로 상승해 올라가야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구체적인 감각의 만도(滿度)를 향해 여기 이 무진장한 세계로 내려와야 하는 것인가요?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아주 재미있는 영겁 이야기는 ‘어두움의 심연’ 즉 대체적인 우주 창조의 신화의 구도로 볼 때 ‘카오스’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에 관한 이야깁니다. 번역서에서는 ‘꼴이 없는 두루뭉수리’라고 하는 멋진 역어를 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정형적인 것이어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무는 아니고 무에서 창조되어 나온 것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347쪽 참조) 그리고 시간의 변화는 사물의 변전으로 이루어지고, 사물의 변전은 형상이 변전하는 것이라고 봅니다.(349쪽 참조)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변화 가능의 모든 것은 그 어느 틀 잡히지 않은 것을 우리 머리에 시사하는 것으로, 이것으로 어느 형을 받기도 하고, 바뀌기도 뒤바뀌기도 한다는 것도 진리입니다. / 한편 변화 불가능한 형에 달라붙어 있는 것은 원래는 변화 가능의 것일지라도 변화를 받지 않아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음도 진리입니다. (…) 끝으로 두루뭉수리에서 틀이 잡힌 모든 것은 먼저 두루뭉수리이다가 다음 틀이 잡힌 것이 진리입니다.”(360-361쪽)    


이렇게 보면 시간은 결국 크게 두 존재 즉 영원의 신과 신에 의해 창조된 카오스 사이에서 탄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명백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모든 형상은 궁극적으로 신에 귀속될 수밖에 없을 터이니, 카오스 즉 순수 질료와 신 즉 순수 형상들(질서들)의 결합에 의해 사물이 형성되고 비로소 사물이 변전하는 차원에서 시간이 성립하는 것임을 말하는 셈입니다.



2. 아우구스티누스가 본 시간의 역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무도 묻는 이가 없으면 아는 듯하다가도 막상 묻는 이에게 설명을 하려 들자면 말문이 막히고 마는” 것이 시간이라고 말하면서,(324쪽) 시간문제의 아이러니한 점을 우선 지적합니다. 그러한 아이러니는 우선 몇 가지 중요한 역설들로 나타납니다.


“흘러가는 무엇이 없을 때 과거의 시간이 있지 아니하고, 흘러오는 무엇이 없을 때 미래의 시간도 있지 않을 것이며, 아무것도 없을 때 현재라는 시간도 있지 아니할 것이다. (…) 그 과거가 있지 않게 되는 적은 언제이며, 미래가 아직 있지 아니한 때는 또 언제이냐? 현재가 늘 현재로 있다면 과거로 지나갈 리 없으니, 따라서 시간은 없고 영원만이 있게 될 것이다. 이런즉 만약에 현재가 시간이기 위하여 과거로 흘러가버려야 될 수 있다 치면 어찌 이것을 ‘있는 것’이라 일컬을 수 있겠느냐.”(324쪽)


‘현재여서는 안 되는 현재의 역설’이라 이름붙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거로 흘러가버려야 현재일 수 있다면, 현재가 아니라야만 현재인 셈이니 이런 역설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의 예리한 통찰이 번뜩이는 장면입니다. 이 역설은 ‘틈이 없는 현재의 역설’로 이어집니다.


“만일 시간을, 찰나의 찰나로 쪼갤 수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만을 현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이것마저 미래에서 과거로 흐르는 움직임이 너무나 빨라서 순간도 쉬는 틈이 없는 것이다. 쉬는 틈이 있어야 과거와 미래로 나뉠 수 있는데, 현재란 사실 아무런 틈이 없는 것이다.”(326쪽)


미래에서 과거로 흘러가는 흐름이 조금이라도 쉬어야 거기에서 현재가 성립할 터인데 도대체 그런 틈이 없으니 현재가 성립할 수 없고, 현재를 기준으로 해서 과거와 미래가 구분될 것인데 현재가 성립되지 않으니 과거와 미래를 나눌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현재니 과거니 미래니 하니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과거는 지나갔기 때문에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기 때문에 없고,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간격이 전혀 없는 사이이니 없다’라는 역설이 성립됩니다.


이와 관련해 또 하나 아우구스티누스가 제기하는 역설 중의 하나는 시간 측정의 역설입니다.


“시간을 재고 있는 줄은 아옵니다만 그것은 미래가 아닙니다, 아직 있지 않으니까. 현재도 아닙니다, 어떠한 길이로 연장되어 있지 않으니까. 과거는 더욱 아닙니다, 이미 없는 것이니까. 그럼 도대체 무엇을 잰다는 것입니까?”(336쪽)


하지만 우리는 시간을 잽니다. 두 소리가 이어져 날 때, 앞소리가 뒷소리보다 길다고 하고, 내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너는 춤을 추었다고 하면서 ‘동안’이라는 말을 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놓고서 ‘동안’이라 하고 ‘더 긴 시간’이라 하는가 하는 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묻고 있습니다.


3. 아우구스티누스가 밝히고 있는 시간의 의식 의존성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에 관한 역설들을 제시하는 것은 결국 자기 나름의 시간론을 전개하기 위한 것입니다. 물론 논리의 순서로 보면, 이러한 역설들이 분명히 성립하고 따라서 이 역설들을 해결하기 위해 자기 나름의 시간론을 안출한 것이지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야 비로소 똑똑히 밝혀진 것은 미래도 과거도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가지 시간이 있다고 말함이 옳지 못할 것이요, 차라리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 이렇게 세 가지 때가 있다 하는 것이 그럴 듯할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영혼 안에 있음을 어느 모로 알 수 있으나 다른 데선 볼 수 없사오니 즉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요, 현재의 현재는 목격함이요, 미래의 현재는 기다림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세 가지 때를 내가 볼 수 있고, 사실 셋이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329-330쪽)


이 대목은 아우구스티누스 시간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소광희 선생님은 목격함을 ‘직관’으로, 기다림을 ‘기대’라 약간 달리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내용은 같습니다. 그리고 어찌 보면 이 내용은 아주 간단합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현재밖에 없는데, 그 현재가 세 가지 때 즉 과거의 현재와 현재의 현재와 미래의 현재로 나누어진다는 것이고, 그것들 각각이 기억, 목격함, 기다림이라는 영혼의 세 가지 활동에 연원한다는 것입니다. 즉 시간은 원리상 인간 정신의 산물로서 의식 내부에서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미리 말하자면, 현대 철학적 시간론의 확립자인 훗설의 시간론은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을 극한적인 미분을 적용해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 만큼 훨씬 더 정교한 것이지요. 칸트가 시간을 감성의 형식이라고 한 것도 결국 따지면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을 발판으로 한 것이라 할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이러한 의식 내적 시간론을 앞서 잠시 언급한 시간의 측정 문제를 통해 더욱 공고하게 입증하려 합니다.


“공간이 없거늘 현재의 시간을 어떻게 재리이까? / 그러기 지나가는 동안에 재는 것이니 지나가버린 뒤면 잴 것이 없어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다면 재는 동안의 시간은 어디로부터, 어디로 해, 어디로 지나가는 것입니까? (…) 공간이 없는 것은 재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 또 ‘어디로’ 지나가는 그 과거를 재리이까? 그러나 이미 있지 않은 것은 잴 수도 없는 것입니다.”(330-331쪽)


이렇게 시간 측정의 아포리아를 제시한 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선 이렇게 말합니다.

“짧은 구절이라도 장단을 길게 뽑아서 부르면 오히려 긴 구절을 빠르게 부르는 것보다 더 오래일 경우가 있는 까닭입니다. 시나 각운이나 음절이 모두 이와 같습니다. / 내가 시간을 연장으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그럼 무엇의 연장이냐고 한다면 나는 모릅니다. 아마도 내 영혼의 연장일 성싶습니다.”(335쪽)


‘시간의 연장’ 즉 시간의 길이가 있다는 것은 확실한데 하지만 길이란 공간에 해당되는 것이니 여기에서 말하는 길이란 결코 공간적인 길이는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의 연장이냐고 물어보면 자신도 잘 모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추측컨대 ‘영혼의 연장’ 즉 마음의 길이일 듯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광희 선생님의 번역에는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시간이란 연장입니다. 그밖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엇의 연장인가? 마음 자신의 연장이 아니라면 이상합니다.”(소광희, 296쪽)


최민순 신부님의 번역에 비해 훨씬 더 단정적인 어조로 되어 있습니다. 복잡하게 문헌학적인 따짐을 일삼을 겨를은 없습니다. 소광희 선생님의 해설을 참조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할 것 같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의 연장을 ‘마음의 분산’(distentio animae)이라고 한다. distentio는 dis-(분산)와 tendere(향하다)의 합성어로 그 반대를 그는 ‘마음의 집중’(extendo animae)이라 한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방향으로 분산하여 퍼지는(연장하는) 마음이다. 예컨대 어떤 노래를 부른다고 하자. 1) 부르기 전에 마음은 노래 전체에 tendere(향)한다. 2) 부르기 시작하면 이미 부른 부분에 대해서는 기억이 향한다. 3) 아직 부르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기대가 향한다. 그리하여 2)와 3)의 ‘향함’(tendere)은 마음이 분산(dis-)되어 향하는 dis-tendere이다. 현재는 직관(attendere)으로 tendere함으로 결국 마음은 세 방향으로 dis-tendere(분산)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시간은 마음의 분산’이다.”(소광희, 296쪽)




소광희 선생님의 해설이 아주 친절하기 때문에 이해하기에 어려운 점이 없다 하겠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마음의 분산’과 ‘마음의 집중’에 관한 관계가 드러나 있지 않아 과거 현재 미래로 분산되는 것과 이 셋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이에 관해 소광희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영원에의 길은 따라서 ‘분산’과 반대되는 길, 즉 마음의 ‘집중’(extentio, extentus)이라야 한다. 시간으로의 길은 무적(無的)인 것의 방향으로 향하는 마음의 분산이며, 영원에의 길은 일자(一者)에로의 마음의 집중이다.”(소광희, 303-4쪽)


마음의 집중은 영원으로 올라가기 위한 길을 여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마음이 분산되지 않기에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이른바 ‘영원한 현재’를 획득하는 방책이 곧 마음의 집중인 것이지요. 그런데 ‘extentio’를 굳이 ‘집중’이라고 번역하는 이유를 설명한 소광희 선생님의 각주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낱말의 뜻으로만 본다면, extentio는 distentio와 동의어로서 streching out, extention을 의미한다. 또 집중을 나타내는 낱말로는 in-tentio가 있다. 그럼에도 아우구스티누스가 사전적 의미를 무시하면서 ‘집중’이라는 뜻으로 extentio를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현재의 성격에 있다. 그에게 있어서 현재는 단순히 시간 양상의 하나가 아니라, 영원이 수직적으로 임현(臨現)하는 곳이다. 따라서 영원인바 현재에 이르는 것은 (과거 미래는 물론이요) 시간 양상의 하나로서의 현재 밖으로 나아가서(ex-) 즉 초월해서 영원한 현재(현재의 영원성)에 향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distentio와 대비해서 사용한 extentio를 ‘집중’이라고 번역하는 것이다.”(304쪽 각주)



‘수직으로 선 시간을 찾아서’라는 본 강좌의 제목에 직결되는 내용이 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영원이 수직적으로 임현하는 곳’을 찾으면 수직으로 선 시간을 찾는 것으로 됩니다. 다만, 우리로서는 그 영원의 출처마저도 우리네 삶의 내재적인 영역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 다르다 하겠습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tendere’(향함)가 훗설 현상학의 지향성에서 근본적인 것이고, 훗설의 시간론에서 핵심 개념인 ‘Retention’(把持)과 ‘Protention’(豫持)에 그대로 들어있다는 사실입니다. 파지는 ‘다시 향함’이고 예지는 ‘미리(앞으로) 향함’인 셈인데, 훗설은 향할 뿐만 아니라 ‘잡는다’라는 뜻을 보탭니다.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훗설 시간론을 할 때 소상하게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튼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이 내적인 의식의 결과물임을 입증하려는 과정에서 시간 측정의 문제를 소재로 삼습니다. 그 결과 이러한 결론을 내놓습니다.



“내 다시 말하노니 네 안에서 시간을 재노라. 지나가는 사물들이 너 안에 이뤄놓은 인상 - 즉 그것들은 지나가도 남아 있는 그 인상 - 을 나는 현재하는 것처럼 재는 것이니, 인상이 생기기 위하여 지나가버린 그 사물을 재는 것이 아니다. 이러므로 이것이 곧 시간이요, 아니면 나는 시간을 재는 것이 아닐 것이다. (…) 아직 없는 미래가 오랜 시간일 수 없고, 다만 미래의 오랜 기다림이 오랜 미래일 것이요, 이미 없는 과거가 오래일 수 없고, 다만 과거의 오랜 기억이 오랜 과거일 수 있는 것이다. (…) 이렇게 연거푸 진행이 되어갈수록 ‘기다림’이 짧아지는 반면 ‘기억’이 길어지고, 드디어는 ‘기다림’이 아주 없어지고 나면 전행동이 끝나 ‘기억’으로 옮겨지고 마는 것이다.”(338-339쪽)


결국 시간의 경과는 기다림에서 기억으로 넘어가는 것이고, 시간의 길이는 기다림에서 목격함을 거쳐 기억으로 넘어가는 마음(영혼)의 길이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기다림에서 목격함까지의 마음의 길이가 미래 시간의 길이일 것이고, 목격함에서 기억까지의 마음의 길이가 과거 시간의 길이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길이가 어떻게 성립하는가가 궁금해집니다. 하나의 기억과 현재의 목격함 사이에 놓여 있는 더 ‘빠른’ 기억들의 개수를 셈으로써 마음의 길이가 성립하고, 하나의 기다림과 목격함 사이의 더 ‘빨리 다가오는’ 기다림의 개수를 셈으로써 마음의 길이가 성립하는 건가요? 이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세한 설명은 없는 것 같습니다.


마음의 길이가 있으니 ‘마음의 운동’ 내지는 ‘마음의 변화’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마음의 운동 자체를 시간이라고 하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마음의 운동 역시 여느 물체의 운동처럼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게 되면 이야기가 복잡해집니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물체의 운동(변화)이 시간이 아님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334쪽 참조) 만약 마음을 일종의 물체로 혹은 물체 비슷한 실체로 보면, 실체의 운동(변화)이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의 운동(변화) 역시 시간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의는 없습니다.


이 문제, 즉 마음의 운동 자체가 시간이냐 아니면 마음의 운동 역시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시간을 의식 내적인 것으로 봄으로써 은폐되어 버린 시간의 객관성 문제를 다시 불러일으킵니다.


이 문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마저 당신이 내신 바니 당신께서 아무것도 하시지 않은 그 시간이란 도시 없는 것입니다.”(323쪽)라고 말한 것과 연결됩니다. 만약 시간을 인간의 마음에서 연원하는 것으로 본다면, 이 말은 신이 인간의 마음을 창조했기 때문에 시간이 있게 되었으니 결국은 시간을 신이 창조한 것이라 말하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시간 자체를 신이 창조한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렇게 신이 창조한 시간은 심지어 인간의 마음마저도 어찌할 수 없이 타고 흐르지 않으면 안 되는 객관적인 그 무엇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체의 운동(변화)과 시간을 확실하게 분리한 아우구스티누스, 시간을 인간의 마음 내부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보아 의식 내적인 시간을 정초한 아우구스티누스, 그럼으로써 인간의 마음에 의존해 있는 시간과 신의 영원을 확실하게 구분함으로써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한 현재로 올라가 사랑을 중심으로 한 신이 주는 지혜를 얻는 길을 제시하는 아우구스티누스. 남은 문제는 앞서 잠시 살펴본 ‘수직으로 선 시간’ 즉 ‘영원한 현재’를 어떻게 내재적 초월로서 확립해 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미제로 남겨져 있는 객관적 시간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7강 뉴턴, 아인슈타인: 물리적 시간 개념의 변천 I


1. 뉴턴의 절대적 시간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의 의식 의존적 성격을 밝혔습니다만, 천체의 주기적인 변화와 여러 물체들의 운동들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른바 객관적인 시간을 그런 의식 의존적 성격의 시간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간의 의식 의존적 성격과 더불어 시간의 객관적인 성격과의 관계가 문제 중의 문제입니다만, 이에 관해서는 칸트적인 설명을 기다려야 할 것 같고 우선은 물리학에서 시간이 어떻게 설명되는가, 그리고 그러한 물리학적 설명이 어떻게 변천해 왔는가를 살펴봄으로써 다시 한번 시간의 신비적인 성격을 실감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아무래도 물리 공부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알아보아야 할 인물은 뉴턴(Isaac Newton, 1643-1727)입니다. 가장 많이 활용하게 되는 참고 문헌은 호킹(Stephen W. Hawking, 1942- )이 쓴 『시간의 역사』(1987, 국역본 현정준 역, 삼성이데아, 1988)와 『시간은 항상 미래로 흐르는가』(1991, 국역본 과학세대 역, 우리시대사, 1992), 그리고 『호두껍질 속의 우주』(2001, 국역본, 김동광 역, 까치, 2001) 등 세 권입니다. 그리고 쓰즈키 다쿠지가 쓴 『시간의 불가사의』(손영수 옮김, 전파과학사, 1993)도 참고가 되었습니다. 


1687년 뉴턴의『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가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뉴턴의 물리학 제1법칙, 제2법칙 그리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담고 있습니다.


제1법칙은 관성에 관련된 것으로서 힘이 주어지지 않는 한 물체는 동일한 속도로 직선 운동을 계속하게 된다는 법칙입니다. 사실 이 뉴턴의 생각은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의 생각을 발전시킨 것입니다. 갈릴레이는 그 이전의 역학을 지배하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뒤집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체의 자연스러운 상태는 정지하고 있는 상태며, 힘이나 충격을 받을 때에만 운동이 일어난다고 주장했죠.(참고, 부동의 원동자 개념) 그래서 무거운 물체는 가벼운 물체보다 더 빨리 떨어진다고 믿었고, 그 까닭은 무거운 물체가 더 큰 인력을 받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 밝혀지는 빛의 정체


1) 빛의 유한 속도


뉴턴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이르기까지의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빛에 대한 새로운 발견들입니다.


빛은 무한한 속도로 즉각 달려온다고 믿고 있었는데, 빛의 속도는 무지 빠르지만 유한한 속도로 달린다는 것을 처음 발견한 것은 1676년이었습니다. 그 주인공은 뢰머입니다. 1609년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발명하여 목성 주위에 위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뢰머는 목성의 위성이 목성의 뒤로 돌아가는 시각이 같은 시간 간격으로 되풀이되지 않으며, 목성의 위성이 일정한 속도로 돈다는 기대와 어긋남을 관측했습니다. 지구와 목성이 태양 둘레를 도는 데 따라 그들 사이의 거리는 달라지지요. 뢰머는 우리가 목성에서 멀어질수록 목성의 위성이 가리워지는 것이 지체되어 나타나는 데 유의하였고, 이것이 목성의 위성에서 오는 빛이 우리에게로 오는 데 시간이 더 걸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빛의 속도가 약 초속 22만km라고 했는데, 1897년 마이컬슨(Albert Michelson, 1852-1931)과 몰리(Edward Morley, 1838-1923)가 정밀한 실험에 의해 밝혀낸 빛의 속도는 초속 299,793km로 일정했습니다. 흔히 초속 30만km라고 하지요. 이를 거꾸로 길이로 말하면 1m는 빛이 0.000 000 003 005 640 952초 동안 달린 거리입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시간을 세슘 원자시계로 측정합니다.


2) 빛의 전달 방식

빛이 어떻게 전달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1865년 영국의 물리학자인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이 지금까지 인정되고 있는 이론을 세웠습니다. 맥스웰은 전기력과 자기력을 통일적으로 결합시켜 설명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오늘날 전자기력이라는 용어를 쓰도록 만든 인물입니다. 맥스웰의 방정식에 따르면, 통일된 전자기장에는 파동과 같은 변동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연못에 난 물결처럼 일정한 속도로 전달된다고 합니다. 지금은 만약 파장이 1m 정도면 전파(라디오파)로 불리고, 파장이 보다 짧아 몇 cm이면 마이크로 파, 1만분의 1cm 이상이면 적외선, 가시광선은 100만분의 40-80cm이고, 더 짧은 것은 자외선, X선, 감마선 등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시광선 중 파장이 긴 빛일수록 멀리서도 잘 보입니다. 그래서 위험을 알리는 신호등은 멀리서도 잘 볼 수 있도록 파장이 긴 빨간 빛을 쓰는 것입니다.


맥스웰은 전파나 눈에 보이는 빛이 일정한 속도로 달리는 파동임을 밝힌 셈입니다. 그러나 뉴턴의 이론은 절대적 정지 상태란 것을 없애버렸으므로 빛이 일정한 속도로 달린다고 생각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 속도인지를 말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설정된 것이 골치 아픈 ‘에테르(ether)’라는 빛의 매질입니다. 에테르가 진공을 포함한 도처에 있으며, 파동은 마치 소리의 파동이 공기를 매질로 해서 전달되는 것처럼 에테르를 매질로 해서 에테르 속을 달리고, 따라서 빛의 속도는 이 에테르에 대한 속도라고 설명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에테르는 그 어떤 실험으로도 존재를 입증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3) 관측자의 운동 방향과 무관한 빛의 일정한 속도


에테르가 빛의 속도에 대한 기준이 되는 바탕일 경우, 빛이 전달되는 방향에 관련하여 만약 빛이 오는 역방향으로 달려가면서 빛 속도를 재면 빛의 속도는 빨라질 것이고, 빛이 오는 순방향으로 달려가면서 빛 속도를 재면 빛의 속도는 늦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1887년 앞서 정확한 빛 속도를 잰 마이컬슨과 몰리의 실험에 의하면 빛의 속도는 관측자의 속도 방향과는 무관하게 동일한 값을 지니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밝혀냄으로써 마이컬슨은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최초의 미국인이 되는데요. 그것은 지구의 운동 방향 즉 우리가 다가오는 빛을 향하여 갈 때 잰 빛의 속도와 지구의 운동 방향과 무관한 남북 수직으로 잰 빛의 속도를 비교한 것이었습니다. 마이컬슨과 몰리의 실험 결과는 만약 관측자가 빛이 오는 방향으로 빛 속도의 2분의 1 정도로 빠르게 운동하면서 측정하거나 빛이 오는 반대 방향으로 3분의 2 정도로 빠르게 달아나면서 측정하거나 빛의 속도가 일정하게 측정된다는 것입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지요. 정말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일정한 유한 속도를 지니고 있는데 어떻게 상대 속도를 지니지 않고 일정한 일종의 절대 속도를 갖느냐 하는 것이지요. 여러 가지 설명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에테르의 존재를 제거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3.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위대한 이름을 날리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문제 즉 관측자의 운동 속도와 무관하게 일정한 것으로 측정되는 빛 속도의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1905년 <운동하고 있는 물체의 전기 역학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통해 아인슈타인은 만약 모든 관측자가 동의하는 보편적 시간이라는 관념을 버린다면 관측자들이 서로 다른 조건에서도 같은 빛의 속도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되면 에테르란 입증되지도 않은 개념이 전혀 필요가 없을 것임을 지적했습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우선 간단할 수도 있습니다. 빛의 속도란 빛이 거리가 떨어져 있는 두 곳 a와 b를 진행한 거리를 빛이 처음에 a에서 출발할 때의 시각과 나중에 b에 도달한 시각 차 즉 시간 간격으로 나눈 것입니다. 그런데 두 지점 간의 거리를 어떻게 측정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예컨대 달리는 기차 안에서 사람이 기차 칸의 이쪽 문에서 저쪽 문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기차 안에서 보면 기차 한 칸의 거리이지만 기차 밖에서 보면 그보다 훨씬 더 먼 거리일 것입니다. 기차의 속도가 더해지기 때문이지요. 요컨대 빛의 속도를 재는 관측자의 속도가 어떠하냐에 따라 빛이 두 지점을 통과한 거리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빛의 속도가 일정하기 위해서는 시간 간격이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빛 속도를 c라 하고, 빛이 진행한 거리를 r이라 하고, 빛이 출발하는 지점의 시각과 빛이 당도하는 지점의 시각 간의 시간차를 dt라 합시다. 그러면 라는 식이 나올 것입니다. r이 변하는데도 c가 일정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dt가 변해야 합니다. dt가 변한다는 것은 달리 표현하면 시간의 밀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아인슈타인의 공식이 (는 물체의 속도, 는 빛의 속도)입니다. 물체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거기에는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것이지요. 빨리 달리면 그만큼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것이지요. 호킹의 계산에 의하면, 비행기를 타고서 1초를 줄이려면 지구를 4억 바퀴 돌아야 한다고 합니다. 


아무튼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은 절대 시간의 개념을 순식간에 깨버렸습니다. 절대 시간이 깨지자 당연히 동시성 문제도 부조리해졌습니다. 뉴턴에서 동일한 위치를 말한다는 것이 무의미한 것처럼, 이제 아인슈타인에서는 동일한 시각을 말하는 것이 무의미해졌습니다. 여러 물체들의 속도와 사람들이 움직이는 속도도 다 다르고, 여러 물체들과 사람의 운동에 의해 일어나는 사건의 속도 역시 다 다르기 때문에 각자뿐만 아니라 모든 물체들에서 ‘시간의 밀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같은 시각이라 하려면 동일한 밀도로 진행되는 절대 시간을 전제로 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한 사람은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있는데 에스컬레이터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합시다. 그리고 그 에스컬레이터가 바로 각자의 시간이라 해 봅시다. 그때 동시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이 특수상대성이론과 관련하여 세계의 역사를 바꾼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질량과 에너지의 동등성 관계를 나타내는 이라는 식입니다. 이에 관련된 식이 이라는 식입니다. 물체의 속도가 빛 속도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질량이 커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핵폭탄도 나옵니다만, 빛 속도 이상으로 물체가 달릴 수 없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만약 물체가 빛 속도로 달리게 되면 질량은 무한대가 됩니다. 그리고 질량이 무한대인 물체를 움직이는 데는 무한대의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무한대의 에너지는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빛 속도와 같은 속도로 물체가 달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질량이 없는 빛이나 다른 전자기적인 파동만이 빛의 속도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4.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시공간이 결합되어 있으면서 모든 물체들의 운동 즉 사건이 발생하는 데에 있어서 변치 않는 배경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물체들의 질량이나 에너지의 상태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영원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특수상대성 이론은 중력 가속도를 감안하지 않은 등속도로 움직이는 물체와 관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뉴턴의 중력 이론은 한쪽 물체를 움직여 다른 물체와의 거리가 달라지면 두 물체 간에 작동하는 중력이 순간적으로 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무서운 결과를 낳습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물체라 할지라도 순식간에 두 물체 간에 작동하는 힘이 달라진다는 것이고, 이는 중력의 효과 즉 힘 차이의 전달이 빛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는 관측자를 중심으로 부정했던 절대시간 또는 보편 시간의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따라서 특수상대성 이론과 모순됩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때로는 2주일씩이나 아예 방에서 나오지 않으면서 고민한 끝에 드디어 1915년에 일반상대성 이론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 뒤로 아인슈타인은 몰라보게 늙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중력에 관한 전혀 새로운 해석이었습니다. 1911년 쯤 아인슈타인은 가속도와 중력의 관계를 생각했습니다. 갑자기 솟아오르는 로켓 속에 있으면 아래로 향한 중력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만약 자기가 로켓 속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면 지구의 중력에 의해 끌어당겨지고 있는지 가속 상승하는 로켓 속에 있는지 구분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중력과 가속도 간의 등가성을 찾아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둥근 지구에서는 이러한 중력과 가속도의 등가성이 성립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만약 지구가 편평하다면 물건이 중력 가속도로 떨어지는 것을 지구가 중력 가속도로 위로 솟구친다고 하면 될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둥근 지구나 태양에서도 중력과 가속도가 등가적이려면 시공간이 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낸 것입니다. 그것이 1913년이었는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친구인 마르셀 그로스만의 도움으로 추상적인 수학의 한 분야로 개발되었던 리만의 휜 공간과 표면에 대한 이론을 연구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시공의 곡률과 그 속에 들어 있는 질량과 에너지의 관계를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는 방정식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늙어버릴 정도로 엄청난 궁리 끝에 1915년 11월 그 방정식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핵심은 중력이란 단지 고정된 시공의 배경에서 작용하는 힘이 아니라, 시공에서 물질과 에너지에 의해 야기된 시공의 휘어지는 것(또는 구부러지는 것)이라는 혁명적인 발상입니다. 시공이 휘어진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대단히 힘듭니다. 예컨대 지구 표면은 구부러진 2차원의 공간입니다. 지구 표면에서 두 점 사이의 가장 가까운 거리 즉 직선은 곡선이지요. 이렇게 구부러진 시공간에서 직선에 가장 가까운 곡선을 측지선(測地線 geodesic)이라 합니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구부러진 타원형의 궤도를 움직입니다. 일반상대성 이론이 나오기 전에는 태양과 지구를 둘러싼 중력 때문에 그렇게 구부러진 궤도를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태양 주위의 시공간이 태양의 질량에 의해 구부러져 있고(휘어져 있고) 그 구부러진 시공간을 지구가 직진을 하는데 3차원에서 관측하면 타원형으로 곡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는 언덕이 많은 지면 상공을 나는 비행기를 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비행기는 3차원 공간에서 직선을 따라 날지만, 그 그림자는 2차원의 지면에서 곡진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유사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아인슈타인의 중력 개념은 뉴턴 식의 중력 개념보다 더 정밀해서 실제로 일어나는 행성의 궤도를 더 정밀하게 계산해 낼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빛도 시공간의 측지선을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시공간의 구부러짐 때문에 빛이 3차원 공간에서 직선으로 달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빛은 직진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과연 빛이 직선으로 달리지 않는 것처럼 보일까요? 그것을 입증한 일이 1919년 5월 29일에 일어났습니다. 서부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일식에서 영국 원정대가 별빛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이 예언한 것처럼 휘어져 있음을 관측해서 밝힌 것입니다. 그 이후 빛의 구부러짐은 많은 관측에서 더욱 정밀하게 확인되었습니다.


일반상대성 이론은 공간의 3차원에 시간이라는 차원을 더해서 시공이라고 불리는 것을 형성했습니다. 이 이론은 우주 속의 물질과 에너지의 분포가 시공을 휘고 비틀리게 만든다고, 즉 시공이 편평하지 않다고 말함으로써 중력 효과를 통합시킵니다. 이러한 시공 속에 들어 있는 물체는 직선방향으로 움직이려고 시도하지만, 시공이 휘어지기 때문에 그 경로는 휘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물체는 중력장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것처럼 움직이게 됩니다.


호킹이 곧이곧대로는 받아들이지 말하고 하면서 제시하는 고무판 비유가 있습니다. 고무판에 커다란 공을 올려놓는다고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때 그 공을 태양이라 여긴다는 것이지요. 공의 무게가 고무판을 누르기 때문에 고무판은 태양 근처에서 휘어집니다. 만약 이 고무판 위에 작은 볼 베어링을 굴린다면, 그 볼 베어링은 반대방향으로 직선을 그리며 굴러가지 않고 무거운 공 주위를 회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행성들의 궤도이지요. 


여기에서 다시 시간문제가 생겨납니다. 그것은 공간을 휘려면 반드시 시간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시공(space-time)이 휘는 것이지 공간이 시간에 의해 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일반상대성 이론에 의해 시간은 형태를 띠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공간도 그러하지만 이제 시간은 우주와 별개로 존재하지 않으며, 서로에 대해 독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을 휘게 함으로써 일반상대성 이론은 시간과 공간을 사건들이 일어나는 수동적인 배경에서 능동적이고 동역학적인 참여자로 변화시킵니다. 시간이 우주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뉴턴 이론에서는 우주 창조 이전의 시간을 상상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나왔던 것처럼 신이 우주를 창조하기 전 그 기나긴 시간 동안에 무엇을 했나? 하는 식의 물음은 이제 아예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우주를 창조하기 전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영겁이라 불릴 수 있는 시간조차 아예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호킹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이 대단히 현대적이라고 말합니다.



제9강 칸트: 감성의 형식인 시간과 상상력의 시간 도식 I


칸트의 시간론


1. 칸트의 종합과 시간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시간론의 핵심은 시간이 인식 주체의 내면과 외부의 인식 대상 전체를 일관되게 관철하면서 인간의 의식 변화에 상관없이 절대적인 방식으로 균일하게 흐른다는 것을 보이는 데 있습니다. 동시성(Zugleich)은, 동일한 시간 계기성(Nacheinander)은 다른 시간들을 떠받치는 기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칸트의 시간론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들어 있는 선험적(초월론적) 인식론을 어느 정도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칸트의 시간론에 집중해 있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서는 간략하게 요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칸트는 감성(Sinnlichkeit)과 지성(또는 오성 Verstand)을 구분하지요. 감성은 도무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물자체(Ding an sich)인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아 감각적인 직관(sinnliche Anschuung)을 수동적인 방식의 종합을 통해 형성해 내는 기능을 합니다. 그리고 지성은 감성에서 형성된 감각적인 직관을 개념과 연결시켜 인식(Erkenntnis)을 만들어 내는 기능을 합니다.


인식을 만들어낸다는 데에는 인식 대상을 일정하게 다른 것들과 구분해서 고정시키는 일이 들어 있습니다. 일상적으로는 우리가 이렇게 인식 대상들을 구분해서, 이것은 칠판지우개이고 이것은 교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교탁에 속한 다리 네 개를 따로 구분해서 대상화하기도 하고, 색깔이나 모양만을 따로 구분해서 대상화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뚜렷하게 구분되는 여러 대상들을 인식적으로 구분해서 그것들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아는 인식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첫째는 바깥에서부터 오는 것으로 여겨지는 감각적인 내용들을 하나로 통일시켜야 합니다. 예컨대 이 칠판지우개를 빙글빙글 돌리면 돌릴 때마다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색깔이 다르기도 합니다. 순간순간 주어지는 모습들 하나하나를 현출(현상 Erscheinung)이라 하고, 그것들을 양적으로 한꺼번에 지칭하기 위해 다양한 현출들(mannigfaltige Erscheinungen) 또는 다양(das Mannigfältige)이라고 합니다. 이 다양한 현출들이 하나로 종합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 인식 기능을 하는 우리의 심성이 도대체 분산되면서 순간순간 따로 놀 수밖에 없고 그럴 경우 어떤 인식도 애당초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설사 바깥에서 종합 통일된 대상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인식하는 나의 내적인 심의 능력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보이는 것을 보는 의식과 조금 있다가 같은 것을 본 의식이 만약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고 따로 논다면 두 의식 각각은 다른 것을 본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칸트는 선험적(초월론적) 통각(transzendentale  Apperzeption)이라고 하는 인식 능력 전체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원리를 설정합니다. 말하자면, 선험적 통각은 자기 통일적인 기능을 한없이 끌고 가는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은 이 두 가지 요건 모두에 필수적인 역할을 합니다.


첫 번째 요건에 대해 칸트는 세 가지 종합, 즉 직관에서의 각지(覺知, Apprehension), 구상 작용에서의 재생(Reproduktion)의 종합, 개념에서의 재인(再認, Rekognition)의 종합을 제시합니다.


각지의 종합은 직관을 형성하는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감성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시간적인 계기(nacheinander)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현출들을 일단 한데 끌어 모으는 종합입니다.

“이제 이러한 다양으로부터 직관의 통일성이 되기 위해서는 맨 먼저 다양성의 관취(貫取 Durchlaufen)와 그러한 관취의 집결(Zusammennehmung)이 필수적이다. 그러한 작업을 나는 각지의 종합이라 부른다.”(A. 99)





이렇게 집결시키되 그 현출 다양은 어디까지나 계기적인 방식으로 나란히 연이어지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각지의 종합에는 기본적으로 시간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을 한데 관취하고 집결시키기 위해서는 지금 있지 않고 앞서 지나갔던 현출 다양의 부분을 다시 되살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간순간 완전히 새로운 현출이 나타날 뿐이기 때문이고, 그럴 경우 관취하고 집결시킬 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칸트는 지나간 현출 다양의 부분을 다시 되살리는 종합이 필요하다고 보았는데 그 능력이 감성에 있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직관에 있어서 현재를 지니지 않는 대상을 표상하는 능력”(B. 151)인 구상력(또는 상상력 Einbildungskraft)을 설정합니다. 지금 주어지는 현출 다양의 부분과 관련해서 지나간 현출 다양의 부분들을 재생해서 지금의 현출 다양과 결합하는 종합을 재생의 종합이라 합니다. 그러고 보면 각지의 종합은 재생의 종합이 없이는 불가능하고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각지의 종합은 재생의 종합과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각지의 종합은 모든 인식 일반(경험적인 인식뿐만 아니라 순수하고 아프리오리한 인식 또한)을 가능케 하는 선험적인 토대를 형성하기 때문에, 구상력의 재생의 종합은 심성의 선험적인 작업들에 속한다.”(A. 102)


아무리 현출 다양을 재생하고 시간적인 일렬로 관취하여 집결시킨다 할지라도 방금 전에 내가 생각했던 것이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는 의식이 없으면 헛수고가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현출 다양의 차원에서 동일한 하나의 대상으로 되는 비약이 있어야 합니다. 칸트는 이를 위해 개념에서의 재인의 종합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 예로 셈과 수를 들먹입니다.


“가령 수를 헤아리는 경우 지금 내 머리에 떠오르는 단위들을 내가 순차적으로 보탠다는 것을 내가 잊어버린다면, 단위들을 하나씩 계기적으로 보탬으로써 양이 생긴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요, 따라서 수도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수의 개념은 종합의 이러한 통일의 의식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A. 103)


칸트가 통일된 대상의 성립과 개념의 성립을 같은 차원에서 보는 것이 이채롭습니다.


“개념이라는 말은 이미 그 스스로 우리를 이러한 생각으로 이끈다. 왜냐하면 이 하나의 의식은 다양이고 차례차례 직관되는 것이고 또한 재생되는 것이 하나의 표상으로 통일되는 것이기 때문이다.”(A. 103)


말하자면 개념의 출발은 현출 다양이 하나의 표상으로 통일될 때 처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칸트가 말하는 세 가지 종합에서 시간이 근본적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간단합니다. 이렇게 세 가지 종합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근본 원인이 바로 시간이라는 것이지요. 본래 시간이 현출 다양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인식을 하기 위해서는 종합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칸트는 애초 시간을 감성의 형식이라 했습니다. 감성이 물자체로부터 촉발될 때 이미 시간적인 방식으로 촉발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촉발된 내용인 현출 다양은 시간적인 운명을 타고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시간적인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은 칸트의 시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구에 따르면 1차원적인 선적인 계열을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이 내적 직관은 아무런 형태도 주지 않는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부족을 유추들을 통해 대신하고자 한다. 그래서 시간경과(Zeitfolge)를 무한히 나아가는 하나의 선으로 표상한다. 이 선에서는 다양(das Mannigfaltige)은 1차원만을 갖는 하나의 계열(Reihe)을 형성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선의 속성들로부터 시간의 모든 속성들을 추론한다.”(A.33)


시간적인 운명을 타고났기에 현출 다양은 아차 하는 순간에 순간순간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동시에 시간적인 운명을 타고났기에 계열화되어 일렬로 배열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러한 배열을 하는데 이미 직관에서의 각지의 종합이 필요하다는 것이고요. 그 각지의 종합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먼저 구상(Einbildug)에서의 재생의 종합이 필요하다는 것이고요. 아울러 그런 바탕 위에서 이제 시간의 부분들을 하나로 엮는 개념에서의 재인의 종합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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