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해원으로부터 바람 들어와 꽃싹 틔우는 봄이 오면 경남 남해사람들은 일렁이는 윤슬 따라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인간과 자연이 예술적으로 어우러지는 곳,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숨겨진 보물섬, 남해로 간다.
예전의 우리네 논밭은 전부 이 모습이었다. 가천다랭이마을의 다랭이논이 여행 상품화된 건, 직선화된 현대인의 삶을 역설하는 것이다. © 박정훈
나는 그들을 생각하며 다시 섬,으로 들어간다. 섬 사람들은, 거기 함께 동락하는 나무와 풀꽃들은 뭍의 동종(同種)과 삶의 양태가 딴판이다. 본시 악하게 태어났을 리 없는 뭍의 사람들은 자라고 또 자라면서 자본주의의 달콤한 맛에 귀 기울이다 저도 몰래 늪에 빠져들지만, 한 치 떨어져 사는 섬 사람들은 그 헛된 삶에 한눈 팔지 않고 제들끼리 서로 돕고 마음 풀며 오순도순 살아 간다. 그들에게 나무, 풀꽃은 또한 사람과 다르지 않다. 먹고 살아 갈 곡식 밭을 일궈야 할 때도, 키우던 송아지 멀리 보낼 때처럼 애닯은 마음 저미면서 최소한으로 나무와 풀을 접수하는 것이다. 참다운 인간과 자연의 동거, 그 모습을 보고 배우러 가는 길이 어찌 설레지 않을까.
나른한 윤슬 제주도, 거제도, 진도에 이어 한국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인 남해군은 본 섬인 남해도와 그보다는 좀 작은 창선도, 그보다 더 작은 조도, 호도, 노도 등 유인도 5개, 무인도 7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그림 같은 곳이다. 한반도 남단 한려해상국립공원의 한 가운데에서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 역할을 하면서 5만여 명의 주민과 수많은 수초화(樹草花)가 해양성 기후의 품에 안겨 따스하게 살아간다.
다리를 건너면서 건설교통부가 2006년에 발표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 대상으로 선정되었던 3번∙77번 국도가 연
결된다. 남해군을 이루는 두 개의 큰 섬인 창선도를 관통하고 남해도를 에돌아가는 이 도로는 이 섬을 돌아다니는 내내 나의 눈과 정신을 호사시킬 남해 여행의 안내자다. 여기에 꼼꼼한 보조 안내자까지 더하니 날아갈 듯하다. 1024번 지방도로다. 나는 동대만을 왼쪽으로 끼고 가다 남해도로 바로 들어가는 직선의 국도 대신 창선도 사람들을 만나러 지방도를 택한다. 언뜻 보면 남해는 아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어르는 어미 모양을 닮았는데, 그 아이에 해당하는 곳이 창선도다. 마침 창선도의 동쪽 지방도로는 남해군이 지정한 ‘바래길’ 2, 3, 4코스와 맞물려 있어 의미가 남다르다. 남해 바래길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소쿠리와 호미를 들고 갯벌로 나가던 삶의 길이다. 동대만은 호수처럼 잔잔하다. 차 세우고 길가에 서면 발 앞에 바닷물이 차 있다. 적벽(赤壁)의 강보다 고요한 바다에선 봄 부르는 윤슬이 한창이다.
동대만 넘어 동쪽으로 가는 고갯길의 양산(兩山)에는 나무가 없다. 그러고 보니 모든 산에는 그늘막 나무 군데군데에 듬성할 뿐이다. 마을로 들어가 어르신들에게 물어 보았다. “그건 고사리 산이라예. 하모, 고사린 시설재배가 안 되니까네 산에다 심는기지. 3월 말부텀 5월까정은 고사리 끊는다 아입니꺼. 그기루 뽀스 타고 삼천포까정 가서 약도 타다 묵고 생활비도 합니더.” 예순여덟의 이말순 할머니가 굴 캐러 가던 길을 멈추고 외지인에게 반갑게 말씀을 건넨다. 젊은 축들 도회로 떠나고 30여 호 남짓 남은 언포마을엔 집마다 한두 분씩 노인네만 산다. 힘 다한 그들이지만 혼자 사는 법을 모르기에 모여서 굴을 캐고, 고사리를 끊고, 무화과를 따고, 굴을 깐다. 날물 기다리는 할머니들의 얼굴에 렘브란트 빛이 아득히 떨어진다.
남해도와 창선도를 잇는 창선교를 건널 때는 다리 밑을 봐야 한다. 전통방법으로 멸치를 잡는 죽방렴 스물두 개가 장관으로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간만의 차가 크고, 물살이 센 물목에 참나무 말뚝을 V자형으로 세우고 대나무 발을 쳐 물고기를 잡는 방법인데, 창선교 아래에선 4월부터 멸치가 제철이다. “그물로 잡는 멸치는 비늘 뻬껴지고 고기가 마이 상한다 아입니꺼. 근데 여기 죽방렴 멸치는 뜰채로 뜨기 땜에 고기가 곧고 말짱하지예.” 죽방렴 주인 이기준 씨의 말에 자부심이 단단하다.
물건마을과 미조마을의 앞자를 따서 이름 붙인 물미해안도로는 남해 해안도로의 절정이다. 그 초입에 독일마을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150호인 물건방조어부림과 푸른 남해를 마주한 언덕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잘 알려졌다시피 1960년대에 외화 벌러 독일로 건너갔던 우리네 부모가 40여 년의 세월을 뒤로하고 다시 건너와 조국의 품에 안긴 곳이다. 독일에서 직접 들여온 건축자재로 지은 독일식 집 30여 동이 모여 있어 풍광이 이국적이다. 붉은 지붕과 하얀 벽, 깔끔한 정원과 어우러지는 지척의 녹빛 남해는 오색의 향연이다.
언덕 위의 하얀 집. 1960년대 독일로 일하러 나갔던 한국의 간호사들이 정년을 지나 고국으로 돌아와 남해의 푸른 품에 안겨 있다. 독일마을에 이어 남해군에는 미국마을도 생겨 났다. © 박정훈
따스한 인심 여기서 산만 넘으면 원예예술촌이 있다. 여기에선 한국손바닥정원연구회 회원 스무 명이 개인별로 집과 터를 구입해 세계 각국의 정원을 정성 들여 가꾸며 산다. 채소정원(스위스풍), 풍차정원(네덜란드풍), 풀꽃지붕(프랑스풍) 등의 개인정원을 꾸며놓았는데, 예술과 자연의 향취가 독특하고 빼어나다. 이곳에서 핀란디아풍 통나무집과 스파정원을 만들어 살고 있는 연기자 맹호림 씨는 “남해는 숨겨진 보물섬”이라면서 “이렇게 따스하고 아름다운 곳에서 맘에 쏙 드는 정원을 꾸미고 사니 서울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긴다”고 이야기한다.
원예예술촌을 빠져 나오면 가까이에 또 하나의 예술촌인 해오름예술촌이 있다. 버려진 폐교를 인수해 2003년 봄에 문을 연 이곳은 정금호 촌장 한 사람의 땀이 오롯이 배어 있는 곳이어서 더욱 정이 간다. 남해에서 태어나 25년여 간 교편생활을 하던 정 촌장은 개발주의 시절 공사판에 버려진 건축 자재들을 하나 둘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야외전시장에 마련된 요강 1000여 개로 만든 ‘작품’이 이를 반증한다. 모두 주운 것이란다. ‘~하지 말라’는 푯말이 없는 것도 특이하다. 이곳에선 잔디밭에 맘대로 들어 갈 수 있고, 촬영도 아무데서나 할 수 있으며, 전시된 작품을 만지거나 타 봐도 된다. “세상에 내 것이 어딨능교? 아무것도 갖고 갈 수 없는데 누가 만지든 가져가든 무슨 상관이겠능교?” 그의 호가 ‘불이(不二)’인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물미해안도로를 달리며 듣는 루이스 암스트롱의 맛은 독특하다. 빨간 스포티카는 아니지만 오가는 차 별로 없는 놀 무렵에 재즈 들으며 에메랄드 뿌려놓은 바닷가를 달리는 게 반가우니 나도 쁘띠부르조아임에 틀림없는 듯하다. 케이프타운 돌 듯 3번 국도의 종점 미조항을 돌아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면 국내 3대 기도도량의 하나인 보리암이 있는 금산에 오를 수 있다. 소백산맥의 준령이 마지막 몸을 풀어놓아 남해의 산들은 좀 험악하다. 기암으로 이루어진 금산 정상의 봉수대 꼭대기에 앉으니 대한해협이 한눈에 들어 온다. 그리고 얼굴에 비벼 대는 바람. 온종일 걸터앉아 남해와 독대하고 싶으나 갈 길이 멀다.
앵강만을 돌아 다시 1024번 지방도를 타면 설흘산 자락 끝에 다랭이마을이 깃발처럼 달려 있다. 마추픽추와 흡사한 논과 밭 다랑이에선 지금 마늘과 시금치가 한창이다. 산비탈을 농경지로 쓸 방법을 찾던 우리네 조상들은 많이 나던 돌로 축대를 쌓아 이렇게 지혜로운 생활과학을 발명했다. “딱 108개 있는 게 신기하지예. 것도 몬 의미가 있는가…, 어쨌든 우리 논밭이 명승지로 지정됐다니께 기분은 좋으요.” 밭에서 일하던 김학봉 씨가 맛보라며 시금치를 한 광주리나 건네 준다. 몇 만 원어치는 족히 될 양이다. 서쪽 해안길을 달리는 내내 입 다물어지지 않는 절경과 섬 사람의 따스한 인심에 나는 의자왕이 부럽지 않았다.
남해대교를 건너면서 남해 여행은 끝이 난다. 우리 민족의 영원한 우상인 충무공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 바다가 바로 앞에 있다. 오고 가던 연락선은 모두 사라진 지 오래. 주홍빛 다리 위에서 진정으로 나는 소망해 본다, 섬 사람과 자연의 무구함이 뭍 사람들로 인해 상처받지 않기를.野
Travel Detail
Way 비행기편으로 남해를 가려면 진주공항이나 여수공항에 내리면 된다. 두 공항에서 버스를 이용해 남해로 들어가는데, 여수여객선터미널에선 배로 남해여객선터미널까지 이동할 수도 있다. 남해읍에 산재한 렌터카업체에서 자동차를 빌려 여행한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가려면 경부고속국도를 타다 대전 지나 비룡분기점에서 통영대전중부고속국도를 갈아타고 달리다 사천IC에서 내려 3번 국도를 타면 된다.
Food 해안 고장이니만큼 먹을 거리는 주로 해산물이다. 이 중에서도 죽방렴에서 원시어업 형태로 잡는 멸치로 요리하는 멸치쌈밥과 멸치회무침이 입맛을 당긴다. 죽방렴 근처 삼동면에 있는 우리식당(055-867-0074)은 35년 간 한곳에서만 장사를 해 신망이 두텁다. 화학조미료를 넣지 않는 것도 믿을 만하다.
Accomodations 해안에 즐비한 펜션이나 어촌의 민박, 독일마을이나 산림청에서 운영하는 남해편백휴양림에서의 색다른 숙박 등 묵을 곳은 다양하게 마련돼 있다. 이 중에서 하이 퀄리티의 특별한 휴식을 원한다면 힐튼 남해 골프&스파 리조트(055-860-0555)를 권한다. 서울 힐튼 호텔에서 직영하는 이곳은 그림 같은 남해안의 풍광과 스파 풀, 골프 코스가 어우러져 지중해의 어디쯤 되는 듯한 착각을 들게 한다.
Spectacle 국제탈공연예술촌 동국대 예술대학장이던 김흥우 교수가 평생 모은 세계 탈 700여 점, 영상자료 3000여 점, 영화포스터 3000여 점 등 총 25만여 점의 예술자료를 전시∙보관하고 있다. 아름답게 꾸며놓은 나무 정원이 예술촌의 향취를 더욱 짙게 만들어 준다.
남해유배문학관 남해 노도로 유배 온 <구운몽>의 저자 서포 김만중을 비롯한 여섯 명 유배객의 문학을 기리기 위해 만든 문학관이다. ‘유배’라는 절망적인 삶 속에서도 문학과 예술을 꽃피웠던 우리 선조들의 참살이를 음미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다.
어촌체험마을들 300여 킬로미터의 긴 리아스식 해안선을 따라 형성된 어촌들은 사는 사람에겐 삶의 터전이요, 찾는 사람에겐 소중한 체험 공간이다. 바지락 캐기, 굴 채취, 쏙 잡기 등 갯벌 체험과 문어를 잡는 통발 체험, 정치망 체험 등은 여행객에게 향수 어린 추억을 선사한다.
첫댓글 대으니 성님, 근데 편집하는 게 넘 어려워...사진좀 많이 올리라 했는디, 쉽게 올라가질 않네...특히 세로컷을 사이드로 배치하는 건 안 되는데, 혹시 어떻게 하는 건지 아시면 가르쳐 주우...
저도 좋아하는 곳임다, 남해.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