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빠사나 금정선원 토, 일 집중수행 프로그램
1. 2013. 7. 13(토) 오전 10시 입제식
2. 10: 30 걷기명상 방법 안내 및 실습
3. 11: 30 실습소감 표현 및 수행이론 강의
(정혜쌍수, 지관겸수)
4. 오후 1시 점심공양 및 다담, 휴식
5. 오후 2: 30 코어운동 소개 및 실습
6. 오후 3:30 숲속 길 걷기명상
(금정산 범어사 뒤 숲속길)
7. 오후 6:30 저녁 공양 및 다담
8. 그동안 각자의 불교신행담 발표
9. 8:00 귀가
1. 7월 14(일) 오전 10시 선원 내 걷기명상
2. 오전 11시 아나빠나사띠 좌선지도 및 좌선
3. 오전 12; 30 좌선 소감 및 인터뷰
4. 오후1:00 점심공양 및 차명상
5. 오후 2:30 야외 걷기명상
(금정체육공원)
6. 오후 4;00 수행소감 발표 및 특강
7. 오후 6:00 회향식,
*삼학(三學):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없애기 위해 반드시 닦아야하는 불교의 세 가지 공부; 계(戒), 정(定), 혜(慧)
1. 계[戒, (산) sila]
계의 본래 의미는 그릇됨을 막고 악업(惡業)을 그치게 하는 것.(防非止惡)
불자가 악업, 즉 공부에 해로운 행위를 하지 않기 위해 지켜야 하는 행동규범을 정해 놓은 것. 나쁜 습관을 끊고, 좋은 습관을 익혀, 선업(善業)이 쌓이게 하는 게 목적.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마음이 거칠고, 부도덕하게 되어, 마음이 산만하여 선정에 들지 못하고, 지혜가 밝아지지 않는다. 戒의 반대 개념은 貪(탐), 欲(욕) 등이다.
불교의 규율에는 계와 율이 있다. 계(戒, śila)는 규율을 지키려는 자발적 노력으로서, 소극적으로는 그릇됨을 막고, 악업을 그치게 하기 위한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선업을 낳게 하여 그것을 지켜 가기 위한 것이다. 이에 반해 율(律, vinaya)은 승가라고 하는 집단생활을 위해 출가자에게 강요되는 타율적 규범으로서, 이것을 어기면 고백, 참회, 교단추방 등의 벌칙이 가해진다. 재가자에게는 계만 있고, 율은 없기 때문에 재가자가 계를 어겼다고 벌을 주는 경우는 없다.
1) 오계(五戒): 불자가 지켜야하는 다섯 가지 기본 계율
(1)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겠습니다[不殺生].
(2) 주지 않는 물건을 취하지 않겠습니다[不偸盜].
(3) 삿된 음행을 하거나 음란물을 보지 않겠습니다[不妄語].
(4)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不邪淫].
(5)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약을 먹거나 술을 마시지 않겠습니다[不飮酒].
2) 십계(十戒): 오계+(6) 꽃다발을 쓰거나 향을 바르지 않겠습니다. (7) 노래하고 춤추지 않겠습니다. (8) 높고 큰 평상에 앉지 않겠습니다. (9) 때가 아닌 때에 먹지 않겠습니다. (10) 금, 은 등의 보화를 갖지 않겠습니다.
대승보살의 십선계(十善戒)
(열 가지 악업을 참회함, 十惡懺悔)
살생한 죄를 참회합니다.[殺生]
훔치고 빼앗은 죄를 참회합니다.[偸盜]
간음한 죄를 참회합니다.[邪淫]
거짓말한 죄를 참회합니다.[妄語]
교묘한 말로 겉과 속이 다른 말을 한 죄를 참회합니다.[綺語]
이간질한 죄를 참회합니다.[兩舌]
욕하고 험담한 죄를 참회합니다.[惡口]
욕구를 일으켜 애착한 죄를 참회합니다.[貪愛]
화내고 미워한 죄를 참회합니다.[瞋恚]
어리석었던 죄를 참회합니다.[痴暗]
2. 정[定, (산) Samādhi, 삼매, fix]
정(定)은 ‘선정(禪定)’ 또는 ‘삼매’라는 뜻.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것, 부동심(不動心) 또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고도 한다. 마음이 하나의 대상을 취하고 있는 것,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고정돼 있는 것, 마음이 산란하지 않는 것, 집중, 정신통일, 고요함, 평온, 정서적 안정, 마음이 편안히 머물러 있는 것, 생각을 쉼, 감각기관을 통제함, 번뇌를 항복받음 등의 특징이 있다. 定의 반대개념은 들뜸[掉擧], 산란(散亂), 散動(산동), 散漫(산만), 정서불안, 번뇌망상, 화냄[瞋] 등이다.
대승보살장정법경(大乘菩薩藏正法經) 33권 선정바라밀품에 선정의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사리자여, 선정바라밀다는 어떤 것을 특징으로 하는가? 이른바 움직이지 않아 단단히 고정된 마음[決定心]을 특징으로 하고, 하나의 대상을 취하고 있는 마음, 산란하지 않는 마음, 편안히 머무는 마음, 사마타의 마음,........감각기관을 한 결 같이 지켜 통제함[根等持],........번뇌를 항복받음 등을 특징으로 한다. 사리자여, 이와 같은 고요한 법을 ......선정바라밀다의 특징으로 한다.”
867c22║復次舍利子。禪定波羅蜜多以何爲先。所謂
867c23║決定心爲先。一境心爲先。不散亂心爲先。安
867c24║住心爲先。奢摩他心爲先。.......根
867c25║等持爲先。..........降伏煩惱怨賊爲先。.....舍利
867c29║子。如是寂靜之法。........於禪定波羅蜜多爲先
잡아함경 803경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
“촌락에 들어가 걸식할 때 그 몸에 주의(注意)를 집중하여 잘 지켜보고, 모든 감각기관의 문[根門]을 지켜, 마음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잘 묶어 매어 머문다. (入村乞食。善護其身。守諸根門。善繫心住)”
3. 혜[慧, (산) Jāña, jñā 若那, prajñā 般若, (빨) paññā)
혜(慧)는 ‘지혜’ 또는 ‘반야’라는 뜻. 그럼 여기서 말하는 지혜(智慧)란 어떤 것인가?
지혜란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그것들의 작용에 대해 밝게 아는 것. 내관(內觀), 즉 자기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을 말한다. 지혜의 반대개념은 無明, 無知, 자신에 대해 깜깜하게 어두운 것, 痴暗(치암), 昏沈(혼침) 등이다.
jñā 若那를 번역하여 智, prajñā 般若를 번역하여 慧라고 한다. 또 決斷(결단), 즉 단호히 끊어버림을 智, 簡擇(간택), 즉 선택함을 慧라고 말하는 곳도 있다. 또 大乘義章九(대승의장구)에는 “照見(조견), 즉 밝게 관찰하는 것을 智(지)라 하고, 解了(해료), 즉 관찰한 결과 그 대상의 특성을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을 慧(혜)라고 말하는데, 통(通)하면 뜻이 같다”고 했다. 法華經義疏二에 “경론 가운데 慧門으로는 空을 비추고, 智門으로는 有를 비춘다 함이 많다”고 했다. 瑜伽論記九에는 “범어 반야prajñā는 ‘慧’라고 번역되는데, 第六度가 됨을 알아야 하고, 범어 jñā는 ‘智’라고 번역되는데, 第十度가 됨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智와 慧를 어원 분석을 통하여 좀 더 정확하게 알아보자.
智에 해당하는 (산) jñā는 살펴보다[檢], 알다, ~을 관찰하여 알다[察知], 모르던 것을 알게 되다[覺], 깨닫다[悟, 證], 경험하다, 확인하다, 시인(是認)하다, ~라고 알다, 어떻게 할 것인지를 알다 등의 뜻이 있고, 이것은 知, 能知, 解, 證, 能識, 明達, 了達, 能明了, 了, 了知, 能了知, 明知 등으로 한역돼 있다.
또 慧에 해당하는 (산) prajñā는 위와 같은 의미의 jñā에 ‘최상의[極上]’ 또는 ‘뛰어나다[勝]’는 의미의 접두사 pra가 붙어, 완전한 이해, 요해(了解), 최상의 지식, 궁극적 앎 등의 뜻이 되고, 慧, 明, 慧明, 妙慧, 勝慧, 覺慧, 智, 智慧, 極智 등으로 한역돼 있다.
즉 智는 우리가 알아차림 수행을 할 때 몸의 움직임이나 감각 등 어렵지 않게 알아차려지는 대상들을 밝게[日] 아는[知] 것이고, 慧는 그렇게 알아차림을 많이 닦은 결과, 알아차리는 감각이 극도로 예리해져, 찰라 순간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미세한 변화들, 즉 무상(無常)까지 알아차리는 정도의 대단히 빠르고 밝은[彗] 혜성(彗星)과도 같은 알아차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智가 극도로 계발되면 慧가 나온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慧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 원어 prajñā를 極智(극지)로 한역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四慧: 문혜(聞慧), 사혜(思慧), 수혜(修慧), 증혜(證慧)
집중과 지혜
집중은 움켜잡음을 특징으로 하고, 지혜는 밝게 비춰봄을 특징으로 함
밀린다왕이 나가세나 존자에게 물었다. “존자이시여, 주의집중(注意集中)은 무엇을 특징으로 하며, 지혜는 무엇을 특징으로 합니까?” “주의집중은 움켜잡음을 특징으로 하고, 지혜는 끊어버림을 특징으로 합니다.” “수행자는 주의집중에 의해 자신의 마음을 움켜잡고, 지혜에 의해 자신의 번뇌를 끊습니다.”
“또 지혜는 밝게 비춰봄[光照]을 특징으로 합니다.” “어찌하여 지혜의 특징이 ‘밝게 비춰봄’입니까?” “대왕이시여, 지혜가 생겨날 때 지혜는 무명(無明)의 어둠을 깨고, 밝게 아는[明知] 광채를 발하여 지식의 등불을 밝히고, 성스러운 진리[聖諦]를 드러냅니다.” “이리하여 수행자는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바른 지혜로써 모든 존재를 비춰보는 데 온 정력을 쏟습니다.” 왕이 말했다. “존자이시여, 비유를 들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대왕이시여, 어떤 사람이 어두운 방에 등불을 들고 들어오면 어둠을 깨고, 광채를 발하여, 밝은 빛을 비춰, 방안에 있는 온갖 사물을 밝게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행자는 밝은 지혜로 모든 존재를 바로 비춰 봅니다.”
*空寂靈知(공적영지): 생각이 없어 고요하면서도 또렷이 깨어있는 상태. 반대말은 散亂昏沈(산란혼침). 산란은 온갖 생각으로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고 산만한 상태. 혼침은 마음이 술에 취한 것처럼 깨어있지 못하고 멍하거나 흐릿함, 또는 졸림, 졸음, 수면 등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 우리는 평소 산란 아니면 혼침 상태에 머물러 있는데 그것을 공적영지의 상태로 돌려놓는 게 수행.
*惺寂等持(성적등지): 고요함과 깨어있음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 惺惺寂寂(성성적적)
*定慧雙修(정혜쌍수):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아감.
운허스님 불교사전의 정혜(定慧)-“정은 마음을 한 곳에 머물게 하고, 혜(慧)는 현상(現象)인 사(事)와 본체인 이(理)를 관조(觀照)하는 것”이라고 정의. 이 사전에는 ‘지혜’는 단어목록에 아예 수록조차 되어 있지 않음.
‘禪定(선정)’은 ‘禪(선)’과 ‘定(정)’이 결합된 단어다. 또 한자 ‘禪(선)’은 ‘볼 시示 watch’와 홑 단 ‘單 one’이 결합된 글자로서 ‘줄곧 하나의 대상을 지켜 본다’는 의미다. 그리고 ‘定(정)’은 ‘固定(고정)’의 의미로, ‘마음이 다른 데로 달아나지 않고, 줄곧 하나의 대상에 고정돼 있음’을 의미한다.
智慧(지혜): 관응 스님이 감수한 홍법원의 불교학대사전에는 지혜가 다음과 같이 정의돼 있다.
“지혜: 범어 jñāna. 육바라밀의 하나. 일체제법(一切諸法)을 통달하여 得失(득실)과 사정(邪正)을 분별하는 마음작용.”
위의 ‘일체제법’이란 오온, 십팔계를 의미함을 알아야 한다. 그 근거로서 다음 경을 보자.
"고타마께서 말씀하시는 ‘일체(一切)’란 어떤 것을 일컫는 말입니까?"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말했다. "‘일체’란 십이처를 일컫는 말이다. 눈과 형상[色],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피부와 촉감, 마음[意]과 마음에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여러 현상들[法]이 곧 그것이다. 이런 것들을 일컬어 ‘일체’라고 말한다.” <잡아함경 제319 일체경(一切經)>
"사문 고타마께서 말하는 ‘일체법(一切法)’이란 어떤 것을 일컫는 말입니까?"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말했다. "눈과 형상[色], 눈의 아는 작용[眼識], 눈의 접촉[眼觸], 눈 접촉을 통하여 생긴 느낌들, 즉 괴롭거나, 즐겁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귀, 코, 혀, 몸, 의식 및 의식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들[法], 의식[意識], 의식의 접촉[意觸], 의식의 접촉을 통하여 생긴 느낌들, 즉 괴롭거나, 즐겁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이러한 것들을 일컬어 ‘일체법’이라고 말한다.” <잡아함경 제321 일체법경(一切法經)>
止觀兼修(지관겸수): 멈춤[止]과 관찰[觀]을 함께 닦아감.
1) 멈춤[止], 사마타(śamatha), 선정(禪定), 고요함, 생각의 쉼, 번뇌에서 벗어나 있음, 止息, 편안함, 집중(集中), 안정(安定).
(산) śamatha는 止(지), 寂止(적지), 寂滅(적멸), 消滅(소멸), 等靜(등정), 定心(정심), 禪定, 攝寂靜(섭적정) 등으로 한역돼 있다.
멈춤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치유, 신통이 생겨남.
*요가수트라에 “심(心)작용의 지멸(止滅)이 요가다”고 말한다.
yoga는 ‘묶다’, ‘결합하다’, ‘합일(合一)’의 의미.
2) 관찰[觀], 위빠사나(vipassanā),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멸현상을 지혜의 눈으로 보아, 밝게 아는 것.
위빠사나의 관찰수행을 많이 하면 지혜가 밝아짐.
(산) vipaśyana는 중성 명사로서 ‘바른 지식’이라는 뜻으로, 見(견), 勝觀(승관), 等觀(등관) 등으로 한역돼 있고, 毘婆舍那(비파사나)로 음사돼 있다. (산) vipaśyanā는 여성 명사로서 觀, 慧, 妙觀, 正見 등으로 한역돼 있다.
멈춤→ 관찰→ 알아차림 해감→ 지혜계발→ 꿰뚫어 봄→ 무상, 고, 무아를 깨달음→ 열반을 이룸→ 육도윤회에서 벗어남[해탈].
*번뇌(煩惱):
*선정(禪定):
*삼매(三昧, samādhi): ~에 주의(注意)를 기울이는 것, 최고아(最高我)에 대한 깊은 명상, 깊은 專心.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여 일심불란(一心不亂)의 상태가 되어 30분 이상 지속되는 것. 定, 禪定, 正定, 寂定(적정), 等持(등지) 등으로 한역되어 있다.
*지혜(智慧): 1) 계정혜 삼학(三學)을 잘 닦은 결과, 지금 이 순간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밝게 아는 것. 알아차림 수행을 통하여 지혜가 밝아짐. 2) 사성제, 십이연기법 등에 대해 밝게 아는 것.
대강백으로 최초의 우리말 불교사전을 펴낸 운허스님은 불교사전에서 定慧(정혜)의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해놓았다.
“定(정)은 마음을 한 곳에 머물게 하는 것이고, 慧(혜)는 현상(現象)인 事(사)와 본체(本體)인 理(리)를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위에서 定(정)의 설명은 이해할 수 있지만 慧(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말로 설명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강백 중의 대강백인 운허스님이 무식해서 이런 식으로 설명해놓은 것이 아니다. 慧(혜)가 이렇게 어렵게 설명돼 있는 까닭은 중국 선불교에서는 定(정)의 개념만 있을 뿐, 慧(혜)는 그 개념 자체가 아예 없기 때문이다.
중국 선불교의 실질적 원조(元祖)라고 할 수 있는 육조혜능대사는 <육조단경>의 정혜품에서 定(정)과 慧(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혀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선지식들이여, 나의 이 법문은 선정[定]과 지혜[慧]로써 근본으로 삼나니, 대중들은 어리석게도 ‘선정과 지혜가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선정과 지혜는 하나[一體]요, 둘이 아니다. 선정은 지혜의 본체요, 지혜는 선정의 작용이라서 지혜로울 때는 선정이 지혜에 있고, 선정에 들어있을 때는 지혜가 선정에 있느니라. 만약 이런 뜻을 알면 그것이 곧 선정과 지혜를 함께 공부하는 것이니라. 도를 배우는 모든 사람들은 ‘먼저 선정을 닦은 뒤에 지혜를 계발한다’는 말과 ‘먼저 지혜를 얻은 뒤에 선정을 계발한다’는 이 두 말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그런 잘못된 소견을 내는 자는 법에 두 가지 모습[相]을 갖게 되는 것이니, 입으로는 옳은 말을 하지만 마음 가운데는 옳지 못하기 때문에 공연(空然)히 선정과 지혜를 따로 가져, 그 둘이 같지 않는 것이니라. 만약 마음과 입이 함께 옳아, 안팎[內外]이 하나면 선정과 지혜는 같은 것이다. 스스로 깨달아 수행하는 것은 논쟁하는 데 있지 않으니, 만약 [선정과 지혜의] 선후를 따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곧 어리석은 사람이라, 이기고자 하는 승부심을 끊지 못하고, ‘나’라는 존재만 키워나가, [끝내] 사상(四相)을 여의지 못하리라.”
육조혜능 스님은 이 법문을 통하여 대중들에게 ‘선정[定]과 지혜[慧]는 같은 것’이라고 하면서 중국 선(禪)불교는 지혜는 닦지 않고, 선정만 닦는다. 오온에 대한 관찰수행은 없고, 오직 ‘화두’라고 하는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고정시켜 사마타수행만 하고 있는 것이다. 육조 혜능 스님은 심지어 좌선을 통한 사마타조차 닦지 않고, 오직 견성(見性)만 강조했다.
운허스님은 중국불교에는 이와 같이 慧(혜)의 개념이 아예 없는데 그것을 억지로 설명하려 하니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 선불교의 실질적 원조라고 말할 수 있는 육조혜능은 “보리반야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본래 그것을 가지고 있지만 단지 마음의 어두움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깨닫지 못할 따름이다.”...... “반야란 중국말로 지혜인데, 이것은 모든 곳, 모든 때에 항상 어리석지 않아, 언제나 지혜를 행하면 그것이 곧 반야행이다. 한 순간 어리석으면 반야가 끊어지고, 한 순간 지혜로우면 반야가 생겨나거늘,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어, 반야를 보지 못한다. 입으로는 반야를 말하지만 마음 안은 언제나 어리석어, 늘 말로만 자신이 반야를 닦는다고 하며, 늘 공(空)을 말하지만 진짜 공은 알지 못하도다.”
현대 중국의 석학 남회근 선생은 그의 <원각경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혜라는 단어는 불법의 심오한 뜻을 담고 있는 것이라서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그래서 ‘지혜’로 번역하지 않고, ‘반야(般若)’라는 원음을 그대로 사용한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중국불교에는 지혜를 닦는 위빠사나 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지혜의 개념이 없다. 따라서 남회근 선생은 지혜에 대해 잘 몰랐고,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불교에는 번뇌가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사마타의 멈춤수행만 있을 뿐 지혜를 계발하는 위빠사나의 관찰수행이 없는 까닭에 지혜는 말로만 있을 뿐 실제로는 없다. 사마타수행은 염불, 다라니, 화두 등의 방법으로 번뇌가 올라오지 못하게 하는 수행법으로서, 대승불교는 주로 이 사마타법에 의해 닦는다.
|
첫댓글 어리석게도 저는술을잘마시는 범부입니다. 아마도 물러가야될것같은생각이듭니다.
물러가지 말고 수행하세요. 수행을 하면 술 마실 필요가 없어집니다. 고통스럽거나 긴장상태에서 벗어나 좀 풀리고, 이완되고 싶을 때 술을 마시죠. 수행을 하면 마음이 만족스러워,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다른 데서 엉뚱한 방법으로 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케생각하고있습니다.그런데 무심산원에서는술을죄악시아니하고 술도하시는걸로알고있네요음식도안가리고요.위빠사나연방죽선원원장스님은 대놓코 우리들앞에서 담배도피우더군요 (좀의하했습니다. 스님이당당하게피우시길래 제가글써도괞찮을듯 )
글 잘 읽었습니다.
아, 유리님 대개 반갑네요. 위의 글 다시 읽어보십시요. 더 명료하게 돼 있을 겁니다. 보내준 책은 지난 금요일 잘 받았습니다. 근데 그 책은 중론이 아닌 것 같아요. 다시 면밀히 봐야 하지만. 남의 나라에서 항상 몸 조심하시고
양준님, 견성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이나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깊은 깨달음을 체험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알콜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돈, 명예, 성욕, 애욕에 깊이 빠져 있는 자들을 여러 명 봤습니다. 모두들 불교의 기초 개념이 부실한 데서 오는 문제라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갖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불교의 삼학, 즉 계, 정, 혜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건 불도가 아니라, 사도(邪道)를 닦는 것입니다. 비슷하긴 한데 아닌 것을 사이비(似而非)라고 하지요.
오늘 정주스님이라는분이10명의 대형주지스님들이억대도박판벌인것을 폭로했더군요..ㅋㅋ내노라하는사찰의스님들이더군요.
휴~~돌중이판을칩니다.
몇일 전 포항에서 기자회견 했던 그 스님이 정주 스님이었던가요?
네...
수행에는 애당초 관심이 없었던 자들이 모여 도박판을 벌인 것은 크게 이상한 것은 아닌데 자기도 거기 끼여 함께 해놓고 기자회견 하는 주지 스님은 정신과에 입원조치해야 할 듯. 마음만은 세속에 사는 사람들이 사는 게 심심하고, 재미가 없고, 힘드니까 짜릿한 것을 찾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출가자든 재가자든 도를 닦지 않으면 이렇게 되기 쉽습니다. 이젠 수행을 해서 불법을 지켜나가는 게 우리 재가자들의 몫이 아닌가 합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