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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부정관사 사용에 대한 불안
김 병 총
복도의 벽에 붙은 사진을 보고서야 에델바이스 산장을 3년 만에 다시 들리게 되었단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둘째 줄 중앙에는 내가 웃고 있었다. 그 옆에는 스키복 차림의 혜은이가 무엇 때문인지 약간 어둔 표정을 띄고 있었다.
“어저께 일 같은데 이 사진은 벌써 추억 속의 낙인처럼 남아버렸어요!”
그새 미망인이 된 주화백은 어느새 내 등 뒤로 다가와서 얼마큼은 고즈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추억 속의 낙인요?”
“3년 밖에 안됐는데 그 동안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버렸어요!”
대꾸 대신 나는 죽은 주화백의 남편을 단체 그림 속에서 찾았다. 우리는 그를 족장이라 불렀다. 그는 부인 주화백 곁을 멀리 떠나 맨 뒷줄 왼쪽 끝에 서 있었다.
“저분은요, 나하구 함께 사진 찍는 걸 너무 싫어했어요!”
나는 대화의 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쪽 벽에 여사님의 붉은 장미꽃 작품이 걸려 있었는데…”
“아, 그거요. 그 그림 도둑맞았어요. 차족장 장례식 북새통에 없어진 거 같애요.”
“주여사의 그림 중 내가 제일 좋아하던 작품이었는데!”
“그럴 줄 알았으면 장선생께 기증할 걸!”
주화백은 붉은 색을 좋아했다. 특히 야생화 그리기를 즐겼는데, 어떤 경우에는 초록 잎사귀까지 온통 붉게 칠하기까지 했다.
“단순히 화가의 취향인가요?”
“그럴 걸요?”
그래놓고는 그녀가 웃어버리는 통에 이상 더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주화백은 파리8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부전공으로 서양미술사를 전공했기 때문에 당시 주여사의 빨강색 선호에 대해 제법 고답적인 질문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일본이 명치유신 때 서구와 개항을 했을 때 네델란드와 국교를 튼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그렇지요. 그건 왜요?” “반 고호가 네델란드 화가 아니었던가요?”
“그렇죠.”
“서양화를 눈여겨보면 대체로 벌건 일본색은 찾아볼 수가 없는데, 고호의 특징적인 붉은색은 네델란드가 일본과 무역을 했기 때문일까요?“
“생각해 보니 그럴 것도 같네요. 네델란드가 일본 색깔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었겠네요.”
그런 대화 말고도 나는 주여사와 서양미술사에 대해 많은 얘기들을 나누었다.
주화백은 오후 늦게 도착하는 팀을 위해 저녁 준비를 서둘러야 된다면서 주방 쪽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나는 에델바이스 산장에 결코 어울리지 않는 대형 교회당에 대한 유감과 사진 속의 혜은이에 대한 질문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내가 혜은이를 처음 만난 것은 학보로 군대를 다녀와 그 가을학기에 복학 등록을 끝내고 한참을 지났을 때였다.
아직 군대를 가지 않았던 새파란 후배들이 우리 노털들을 E여대 서양화과 학생들과 미팅을 할 때 끼워넣어 주었다. 학기 초에 S여대 무슨 학과인가와 미팅 때 노털들을 제외시킨 데 대한 미안함 때문에 이번에는 합세시킨 걸로 우리들은 알고있었다.
“어이, 아우님들, 이번 미팅 티켓이 안 팔리니까 쓰레기 취급하던 형님들에게 강매하는 거지!”
“형님들, 그건 큰 오산입니다! E여대 서양화과입니다! 사전 미팅을 해봤는데, 얘들 모두가 삼삼하게 빠졌어요. 한 해 반 동안 국가에 몸 바치고 무사히 귀교하신 형님들에게 특별히 보상의 의미로 마련한 미팅인데, 어찌 그리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경영학과 여섯 번째 학기생들 중 노털은 다섯 명이었다. 우리 끼리 의논할 수밖에 없었다.
“학과의 총화를 위한다는 명분이 있으니까 티켓을 팔아주도록 하지 뭐. 알 수 있어? 평생 짝을 만나게 될지 모르잖아!“
학보로 다녀온 1년 반 동안 미팅 방법도 많이 변해 있었다. 그런데 후배들은 처음 시도하는 방법이라면서 우리 노털 다섯 명한테 파트너에게 먼저 선택받는 특혜를 주었다. 노털들 가슴에 번호를 1번부터 5번까지 붙이고, 여학생들한테 선택권을 주어 우리가 뽑혀나가도록 되어 있었다.
어쨌건 당시에 혜은이는 나를 선택했다. 내 앞으로 걸어오고 있는 혜은이를 처음 보는 순간 나는 가슴이 덜컥했다.
‘이상한 인연의 여자가 될 것 같다!’
내 본래 취향의 여성상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아름다웠고 당당했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비어있는 내 옆자리로 와서 조심스럽게 앉았다.
“미팅 파트너가 된다는 건 어차피 운명이니까요! 저 조혜은이라고 해요.”
“장수일입니다.”
“제가 왜 댁을 선택했는지 물어보실래요?”
“아가씨께 그런 질문을 해도 되나요?”
“아가씨요?”
“그럼 뭐라 불러야 되죠?” “참 군대 갔다 이제 복학한 분이라 모르시겠다…"
“혜은씨라 부를게요.”
“저도 수일씨라 부르죠.”
우리들은 거기서 1차 미팅을 끝낸 후 선택의 여지도 없이 애프터로 합세할 수밖에 없었다. 가는 곳은 춤추는 곳이었다. 우리 쪽 대표와 여학생들 대표가 의논한 결과라면서 그 쪽 대표가 간절한 목소리로 전달했다.
“경험한 바로는 1차로 끝낸 뒤 개인 사정에 따라 고고장 행을 자의로 맡긴 적이 있는데, 미팅 행사 자체가 산만하게 끝난 경험이 있어요. 때문에 다소 불만이 있으시더라도 모두 댄스파티에 반드시 참석하는 것으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양해하시고 우리의 결정에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그 때 누군가가 틈을 넣었다.
“파트너끼리 사라지는 행위도 금하고 있습니까?”
잠깐 생각하던 눈치더니 곧 실행위원들을 소집해 의논에 들어가고 있었다.
드디어 우리 쪽 남자 대표가 큰 목소리로 발표했다.
“반드시 오늘의 파트너와 바람처럼 새어나가는 행위는 용서해 주기로 했습니다!”
젊은이들의 춤방을 고고장이라 부르던 시대였다. 나는 혜은이를 데리고 스테이지로 올라가 열심히 고고를 비볐으며, 새로 수입된 디스코를 더욱 격렬하게 추었으며, 곡이 끝나고 조용히 블루스 타임으로 변조되는 순간 나는 혜은이의 손목을 잡아 이끌며, 더욱 흐려진 조명 밑으로 밀려들어가 ‘비 이트’와 ‘칭키스칸’과 ‘스파이’ 등을 접속곡으로 흔들며 땀에 절었던 몸을 식히느라고 ‘엔드레스 러브’ 블루스 리듬에 안겨들어 나는 눈을 감았다. 혜은이의 심장이 가늘게 뛰고 있었다.
우리는 그날 저녁 춤 이상의 좋은 프로그램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헤어질 때까지 디스코와 블루스를 번갈아 추었고, 좌석으로 잠깐씩 돌아와서는 우리들은 잔을 부딪치며 맥주로 목을 축였다.
“집까지 바래다 드릴까요?”
내가 말했다.
“괜찮아요. 같은 방향으로 가는 과 친구들은 많아요. 그 대신…”
혜은이는 내 오른쪽 점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말했다.
“꼭 전화 주세요…”
저녁이 되자 한 대의 버스가 도착해 방 배정을 받느라고 산장 전체가 복작거렸다. 벌써 중년이 되어버린 버스 회사 최상무 말고는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아! 정말 많은 세월이 가버렸네!’
가장 자주 산장을 드나들었던 우리가 당연히 에델바이스 산장의 주인처럼 굴었던 게 어제 같았는데, 벌써 몇 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세월의 빈 공간이란 쓸쓸한 것이리라.
‘황태자의 첫사랑’이란 음악영화가 생각났다. 원제는 ‘알토 하이델 베르크’이다. 사랑의 약속을 깬 황태자는 맥주집 여자 캐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약혼녀를 만나러 가는 도중 하이델베르크 대학,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대학의 낭만이 스며있는 대학가로 들린다. 그러나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다. 대학은 신입생들로 꽉 차서 대학 시절의 낭만을 즐기고들 있다. 다만 술집만 그대로의 풍경이다.
사랑했던 여자, 캐시의 뒷모습이 보인다. 황태자는 다가가 캐시에게 말한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금 왔습니다.”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부자 나라의 공주와 결혼하신다구요?”
사랑도 추억도 낭만도 모두 가을 낙엽처럼 이별을 예비하고 있었기에 아름다웠던 것일까.
저녁을 먹은 후 혼자서 슬로프가 있는 근처까지 가서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리프트는 멈춰 서서 묵묵한 공허 속으로 잠겨가고 있었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별들은 그 황홀한 빛깔을 너무나 이마 가깝게 뿌려놓고 있었다. 겨울의 함성들은 스키 철이 올 때까지 조용히 잠자고 있을 것이다.
카페에 들러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으려니까 주여사가 들어섰다.
“산장 베치카 앞은 새 손님들이 독차지해 버렸어요.”
“우리들 젊은 시절과 똑 같은 풍경이지요. 기타 소리에 맞춰 노래 부르는 모습까지도요. ‘알토 하이델 베르크’ 영화 장면이 생각나서 잠시 울적했습니다.”
주여사는 잠시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린 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혜은씨는 작년 겨울에 왔었는데…” “저는 혜은씨를 잊은 지 오랩니다. 헌데요. 저쪽 미니 온실 뒤쪽으로 붙은 교회당 말인데요…”
“교회당이 왜요?”
“이런 산속에 지은 교회당 치고는 나무 크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그야 돌아가신 애 아빠의 결정이었어요. 지금 유학 가 있는 작은애가 갑자기 경기가 들어 죽음 직전에 있었어요. 그 때 애 아빠가 기도해 애를 살렸는데, 애를 살려만 주시면 몇 평짜리 교회를 짓겠다는 약속을 하나님과 했어요.”
“그 약속 때문에 교회당을 저토록 크게 지었다는 얘깁니까?”
“공회당으로도 사용하겠다면서 고집을 피우니 전들 어쩝니까.”
“크기는 산장과 언밸런스지만 중세 서구풍의 아름다운 교회당 건축물로서는 성공적인 것 같아요.”
“유럽 사람들도 놀러와서는 감탄하고 가곤 하지요. 산장 엽서들 중에선 가장 많아 팔려요.”
스키 철이 아닌 때에도 에델바이스 산장에는 손님들이 많다. 물론 대부분이 젊은 학생들이지만 노소 가리지 않고 추억을 만들기 위해 소위 팬이 되어 사철 드나들었다.
내가 대학 상담실장 K교수를 면담키 위해 청원서를 넣은 것은 졸업을 두 달 앞둔 어느 날 오후였다.
당시의 나는 대한민국 교육부 시행 미국 유학생 시험에 합격한 상태였다. 어차피 경영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경영학이 강세인 예일대를 목표해 국내에서의 잡다한 준비사항을 마무리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유학에 하나의 걸림돌로 등장한 것이 조혜은의 문제였다.
그녀는 내게 집요하게 집착했다. 그에 비해서 나는 혜은이에 대해 무덤덤한 편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어느 날 내가 혜은이의 가정환경을 우연히 감지하면서 기절하게 놀랐던 사건이 일어났다.
우선 나의 가정환경부터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부친이 내가 어려서 돌아가신 후 나는 시골 초등학교 교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편모슬하에서 외동아들로 성장했다.
내가 혜은이의 가정환경에 대해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던 게 문제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혜은이 역시 나에게 가정환경을 묻지 않았고, 자기의 가정사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혜은이의 전화번호를 첫 미팅 때 받았던 나는 그만 그 쪽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차라리 잘 됐지 뭐. 아무 소식이 없으면 혜은이도 나를 잊어버리고 말겠지!’
그런데 한 달쯤 지나서였다.
오후 수업을 끝내고 긴 운동장을 돌아 대학 정문으로 다가가고 있는데 매우 낯익은 여대생이 내 바로 앞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아!” “어머, 기적처럼 여기서 만나게 됐네요!”
혜은이었다. 나는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잃어버려서 전화를 걸지 못했다면서 정중하게 사과했다.
“사과하는 뜻으로 제가 저녁을 사겠습니다.”
혜은이는 가타부타 않고 내 왼팔을 끼며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부자가 아니어서 약소한 저녁 밖에 대접하지 못합니다.”
“함께 저녁을 먹는다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네요? 그리고 앞으로는 제 전화번호를 잃어버리지 않기예요!”
우리들의 데이트는 한 주간에 두 번 정도는 만남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혜은이는 내게 더 다가오지 않았고, 나 역시 그녀에 대한 뜨거움이 덤덤하였으므로 미래를 약속하자는 따위의 연애질을 하지 않고 있었다.
졸업식을 나흘 앞둔 월요일 오후였다. 미 대사관 전화번호를 찾느라고 학교 도서관 만남의 방 앞에 진열된 그 두꺼운 전화번호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우연이였다.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재벌회사 회장의 집 전화번호가 박스 안으로부터 내 동공 안으로 확 달려드는 것이었다.
내가 악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옆 공중전화통 안에서 다이얼을 돌리고 있던 남학생 하나가 놀란 나머지 송수화기를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틀림없었다. 그 전화번호는 혜은이가 다시 적어주었기 때문에 내 두뇌 속으로 입력되어 꿈에서라도 잊을 수가 없는 바로 그 번호였던 것이다. 그 회사의 회장 역시 조씨였다.
‘아, 혜은이는 내게 재벌의 딸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있었구나!’
참으로 묘한 감정이었다. 그런 감정은 확실히 배신당했다는 감정과 너무도 흡사했다.
‘혜은이는 왜 내게 비슷하게라도 가정상황을 한 번도 발설하지 않았을까?’
온갖 생각이 내 머릿속을 때리기 시작했다.
‘배신 당했다는 내 느낌은 자격지심 때문일까? 콤플렉스 때문일까?’
그런데 산장의 주여사까지도 혜은이를 아끼는 후배라며 치켜올리면서도 재벌의 딸이라는 얘기는 어째서 비치지 않았던 것일까.
그 누구와라도 이런 상황에 대해 대화를 나누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썩거렸다. 그 때 학교 상담실장과의 대화가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다. 얼마 후에는 재학생이 아니기 때문에 상담 자격까지 없어지게 된다고 생각하니 면담을 서둘러야했다.
상담실 조교에게 신청서를 내고 두 시간 후에야 K교수와의 상담이 이루어졌다.
“곧 졸업인 것 같은데, 직장 문제에 관한 상담이겠군!”
“아닙니다. 애정문제 입니다!”
“뭐?”
불쑥 튀어나온 내 대답도 우스꽝스럽지만 K교수의 반응 역시 우습긴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 학교 재직 30년 만에 애정문제를 상담하기는 처음일세! 애정문제 상담은 내 전공이 아니지만 일단 꺼내놓기부터 하세.”
심리학과 교수이기도 한 K교수는 내 연애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를 우선 궁금해 했다. 그런데 나와 혜은이가 지금 처해 있는 사정을 그대로 고해바치자 K교수는 더욱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띠었다.
“여보게!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면서, 그나마도 결별을 통고받은 사정도 아니면서 이런 문제를 어떻게 판단한단 말인가!”
적어도 반시간 정도는 내가 야단을 맞고 나서야 나는 K교수로부터 생각지도 못했던 해답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내용은 별것이 아닌데도, 내 귀에는 사형선고같이 섬뜩한 생경함으로 다가왔다.
서구 선진국에는 세습 재벌이라는 가문에는 적어도 3대 이상의 경력이 쌓여 있다. 그래야만 ‘명문’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대한민국에는 세습 재벌이 아직 없다. 대부분 단대에서 그친다. 부침이 심하다는 것이다. 결국 명문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명문과 서민이 교류할 수 없는 게 서구다. 우리는 알거지가 금새 재벌이 되고, 재벌이 금새 알거지도 된다. 세습재벌이나 명문이 없는 건 단단한 기초가 쌓인 재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일세. 한국에서도 재벌가 끼리 결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일세. 그것만 서구를 닮았지! 우습지. 많이 우습지. 어쨌건 자네는 그 여자와 결혼 할 수 없네. 김칫국 미리 마시지 말고 서둘러 헤어지게. 그렇지 않았다간 자네만 불행해지네!”
K교수의 단언이 진실이 될 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내게는 진리처럼 내 뇌리를 파고들었다.
‘그렇다! 이를 핑계로 혜은이와 헤어져야 한다!’
단호하게 혜은이와의 소통을 끊어버린 나는 일단 시골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네가 나를 속인(?) 벌이다!’
비행기를 타고 유학길에 오르기 사흘 전이었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들 네 명이 내 하숙집으로 들이닥쳤다.
“당신이 장수일씨요?”
“그렇습니다만?”
“잠깐 봅시다!”
“실컨 보시오. 그런데 당신들은…?”
“당신, 조혜은씨를 알지!” “알지요.” “관계를 끊으시오!”
와잠 부위에 깊은 칼자국이 있는 사내가 소리 질렀다.
벌써 끊었노라 말하려다가 나는 화가 났다.
“왜요?”
“죽고 싶어?”
칼자국 사내의 주먹이 내 왼쪽 뺨을 때렸다.
‘우린 관계를 가진 적도 없고, 결혼하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나는 그날 네 사내들한테 실컷 얻어맞았다. 그들은 떠나기 전 한 마디를 남겼다.
“계속 집적거렸단 봐라!”
어느새 3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는 그 사내놈들과의 약속(?)을 지켜 유학을 떠났고, 무사히 예일에 입학했으며, 3년을 채운 뒤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참으로 인간의 운명이란 기묘하다는 느낌이었다. 혜은이와의 관계가 아니라 내 직업에 관한 일이다. 추리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기 때문인지 나는 경영학 예일 석사 학위를 가지고, 전부터 호기심을 가졌던 한국에서의 첫 직장을 흥신소로 잡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한국에 흥신소라는 게 있는지조차 몰랐는데, 귀국 후 고등학교 동창회를 나갔다가 그런 직장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어느 날 흥신소 안상무가 나를 그쪽 방으로 불렀다.
“불렀습니까?”
“이제 이곳 일에도 자리가 잡혔을 테니까 슬슬 업무를 맡으셔야지요!”
내 학벌이 두려워서인지 안상무는 나에게 항상 최고의 존칭을 썼다.
“저도 언제부터 실무에 투입될 것인지 그게 궁금했습니다.”
“이번에 맡으실 일은…”
나는 안상무가 내린 첫 업무 지시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조장천 회장의 기업 S실업 있지요?”
“예에?”
“이런 내용의 사건은 장선생이 감당하기에는 참으로 안성맞춤이라 생각하는데…”
나는 일단 조혜은과의 관계를 숨기고 가만히 들을 일 밖에 없었다.
“그 조회장의 따님이 증발했답니다. 그래서 우리더러 찾아달라는군요. 엄청난 사례금이 걸린 일입니다!”
“증발이요? 그런 내용이라면 경찰에게 맡겨야 되는 일이 아닙니까!”
“집안일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아 서지요.”
“알겠습니다. 가장 최근에 그 따님의 상황을 알만한 자료가 있습니까?”
“여기 최근에 촬영 되었다는 사진이 있습니다. 잘 간직하세요. 이 일은 극비에 진행되어야함을 잊지 마십시오.”
어째서 조혜은을 찾는 일이 내게 떨어졌는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전날 나와 혜은이와의 인연을 감지하고 내게다 이 일을 맡기지 않았나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우연일 뿐인 것이다. 혜은이와의 인연은 끈질겼다.
‘우선 어디서부터 일을 시작해야 하지?’
나는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사진속의 혜은은 나에게 아무런 표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결국 우리들 추억의 잔설이 남아있는 에델바이스 산장 말고는 혜은이의 존재를 연관시키는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주여사가 카페로 들어왔다.
“요즘 혜은이 소식 있습니까?”
“글쎄요. 내일 한 패거리가 산장으로 들어온다는데 거기에 묻혀 들어올 것같지만…”
“간혹 그런 식으로 이곳에 오는군요!”
“장선생과 친했던 사이로 알고 있는데…!”
“한 때의 추억이지요.”
“금강유통의 김회장 아들과 정략결혼 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게 잘 진행되지 않는가 봐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게 모두 장선생과의 관계 때문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었거든요.”
“전연 그게 아닐 겁니다. 우린 사실 연인관계도 아니었거든요. 그냥 미팅 때 인연이 되어 잠시 만났던 사이였어요.”
“그렇지만 장선생과 혜은이를 잘 알고 있던 많은 분들은 둘 사이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우린 별일이 없었는데…”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랐는데…!”
혜은이는 주여사와는 연락하고 있다는 느낌이 왔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혜은이를 만났을 때 나는 그녀를 어떻게 체포(?)할 것이며, 어떤 방법으로 그녀 부친에게 안전하게 인도할 것인가를 미리 생각해 두어야 한다.
나는 시침을 뚝 따고 있었다.
‘혜은이를 만날 수 있는 장소는 이곳이 아니면 없다…!’
역시 혜은이는 버스 한 대에 묻혀 왔다. 나를 보자마자 감정의 날을 세웠다.
“소식 한 마디 없이 미국으로 도망친 건 무엇 때문이죠!”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깡패들을 불러 나에게 린치를 가한 사건은 누구의 기획이었나요?”
“네예?” “난 그래도 한 때 혜은씨를 사랑하고 그리워한 시절도 있었죠. 그러나 관계의 벽은 그토록 높았습니다!”
“말도 안 돼! 린치를 하다니…!”
혜은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혜은씨의 신분은 정략결혼의 희생양이라는 걸 알게 된 나로서는 혜은씨로부터 도망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서울 본사로 전화를 걸어 혜은이를 잡고 있다는 사실과, 다음 조치를 문의한 후 통화를 끊었다. 물론 혜은이 몰래였다.
이튿날 서울로부터 그녀 부친이 일단의 수행비서들과 함께 산장으로 들이닥쳤을 때 혜은이는 과히 놀라지도 않았다.
내가 안상무로부터 내 첫 일처리를 두고 칭찬을 받고 있을 때, 조회장이 밖으로 나오며 나를 불렀다.
“내 딸년이 자네를 잠깐 만나고 싶어 하네!”
그러면서 산장의 특실 쪽을 가리켰다.
나는 혜은이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지만 어차피 치러야 할 곤욕이라면 매를 먼저 맞는 게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특실 쪽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낙엽이 지는 것은 한여름 추억의 아픔 때문이라는 싯귀(詩句)가 문득 내 뇌리를 스쳤다.
김병총: 통영산. 마산에서 성장. 고려대학교 철학과 졸업. ≪문학사상≫ 제1회 신인상 ‘빨간우산’ 당선. 작품 ≪달빛자르기≫ ≪불칼≫ ≪내일은 비≫ ≪춤추는 맨발≫ ≪화요일의 사내들≫ ≪검은 휘파람≫ ≪사라지는 것은 아름답다≫ ≪사마천의 사기 전10권 평역≫ ≪ 소설史記≫ ≪소설 吳子兵法≫ ≪소설 우륵≫ ≪희곡 우륵≫ ≪四月革命(전3권)≫ ≪황금우산≫ ≪시라소니평전≫ 등 70여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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