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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나를 꺼내라
스티븐 프레스필드 지음
2006년에 개봉된 영화 〈300〉의 원작소설 『불의 문Gates of Fire』을 쓴 소설가이다. 그는 또한 2000년에 개봉된 영화 <배거 밴스의 전설The Legend of Bagger Vance>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배거 밴스의 전설』은 삶의 의미를 잃은 한 골프 선수가 배거 밴스라는 캐디를 만나면서 자신의 ‘영역’을 찾는 이야기다.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이 책 속에서 ‘영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이다. 그의 다른 작품으로는 『전쟁의 흥망성쇠Tides of War』, 『마지막 아마존Last of The Amazons』 등이 있다. 지금 그는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다. www.StevenPressfield.com
▣ Short Summary
영화 〈300〉의 원작소설 『불의 문Gates of Fire』의 작가 스티븐 프레스필드가 쓴 자기계발서. 마흔이 넘어서야 겨우 시나리오 작가로 데뷔했고, 그 전에는 ‘꽉 막힌 캘커타의 하수구’처럼 인생의 출구를 찾지 못해 고통을 맛보았던 작가답게, 책 속에는 치열한 작가정신이 빚어낸 놀라운 영감과 사정없는 일침이 호소력 짙은 문장 속에 녹아 있다.
저자는 우리에게 일을 하지 말라고 속삭이는 온갖 방해세력에 대한 개념정리와 그에 맞서 싸워서 이기는 법, 그리고 내 안에 잠든 창조성을 일깨워 진정한 성공에 이르는 차원 높은 방법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간다. 인생에서 원하는 바를 실천하지 못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그대로 방치해둔 채 답답해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저항Resistance’의 존재를 깨닫고 결연히 맞서 싸울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 차례
추천의 글
내가 하는 것
내가 아는 것
미처 살아보지 못했던 삶
제1부 저항 - 적을 바로 알기
제2부 저항과 싸워 이기기 - 프로가 되는 법
제3부 저항을 벗어나서 - 보다 높은 차원으로
. 저항
적을 바로 알기
저항은 자신 안에 있다
우리는 저항은 밖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배우자나 직업이나 상사의 아이들이 자신의 일을 방해한다고 생각한다. LA 레이커스 농구단의 감독이었던 패트 라일리는 이러한 저항을 ‘주변에 있는 반대자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저항은 주변에 있는 반대자들이 아니다. 저항은 우리 자신 안에 있다. 저항은 우리 안에서 생겨나며 우리 자신에 의해서 지속된다. 저항은 내부에 있는 적이다.
저항은 막바지에 가장 거세진다
오디세우스는 집에 돌아오기 위해 20여 년 동안을 방랑해야 했다. 그런 그에게도 일찍이 집에 돌아갈 기회가 있었다. 한번은 그의 배가 고향 이타카의 해안까지 다가간 적이 있었다. 그의 부하 선원들은 해안에 있는 고향집에 켜진 등불을 보았다. 오디세우스는 이제 고향에 다 왔다고 안심하고 드러누워 졸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이 엉뚱한 짓을 저질렀다. 그의 부하들은 오디세우스의 소지품 중 하나인 소가죽으로 만든 자루 안에 금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자루를 훔쳤다. 그들은 자루를 찢고 안을 열어보았다. 그러나 그 자루 안에 든 것은 금이 아니라 역풍이었다. 오디세우스가 방랑하다 아이올로스 왕이 다스리는 축복 받은 섬에 도착했을 때, 아이올로스 왕은 오디세우스의 순조로운 항해를 위해 역풍을 잡아 자루 속에 가둬 놓았던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이 자루를 열자, 거센 역풍이 그 안에서 풀려나왔다. 그 역풍 때문에 오디세우스의 배는 고향집을 눈앞에 두고 다시 바다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 후 오디세우스는 다시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서 전보다 더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마지막에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을 다 잃고 혼자가 되었다. 결국 집에 돌아간 것은 오디세우스 한 사람뿐이었다.
결승점이 눈앞에 보일 때, 위험은 가장 커진다. 저항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쉽게 방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저항은 이런 우리의 약점을 놓치지 않는다. 저항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다해 우리를 거세게 공격한다. 우리가 자신의 일에 프로가 되려면 이러한 역습을 경계해야만 한다. 마지막까지 주의를 게을리 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역풍이 든 자루가 열린다.
저항과 자기 치료
우울증과 불안 혹은 다른 심리적 장애를 완화시키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약을 먹거나 다른 치료법을 사용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내가 경험한 이야기를 해줄까 한다. 한때 나는 뉴욕에 있는 큰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한 적이 있다. 사장은 우리에게 항상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병들을 만들어라. 그럼 우리는 그 병을 치료하는 상품을 팔 수 있다.” 주의력 결핍장애, 계절성 정서장애, 대인 공포증……. 이것들은 병이 아니다. 단지 상품을 팔아먹기 위한 책략이다. 의사는 이러한 병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카피라이터들이 이러한 병들을 발견했고 마케팅부서가 이러한 병들을 전염시켰다. 그리고 제약 회사가 이러한 병들을 치료하는 제품을 판다. 우울증과 불안이 실제로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일을 못하게 만들려는 저항의 방해공작일 수도 있다. 우리가 자신의 소명을 다하는 대신 약에 의지할 때, 우리는 훌륭한 시민이자 모범적인 소비자가 된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TV광고나 물질주의적인 대중문화는 계속 우리에게 세뇌작업을 해왔고 우리는 충실히 세뇌 받은 대로 행동하고 있다. 우리는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훈련하고 힘든 일을 하는 대신, 그저 상품들을 소비하고 있다. 많은 보행자들이 저항과 상업주의가 만나는 교차점에서 불구가 되거나 살해당하고 있다.
저항과 근본주의
사실, 예술가나 근본주의자가 다루는 주제는 동일하다. 예술가나 근본주의자는 모두 개인의 존재가 가지고 있는 신비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같은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아직 진화하지 않은 미개한 상태에서, 인류는 이러한 질문을 진지하게 다룰 수 없었다. 원시인 상태에서, 중세시대에서, 부족이나 씨족사회에서, 개인의 위치는 공동체의 규율에 따라 정해졌다.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은 근대에 등장한 것이다. 물론 이런 질문을 처음 던진 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었다. 근대에 공동체가 정한 신분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개인들이 등장함에 따라 이러한 질문이 전면에 부각되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의 답을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더 이상 공동체가 우리에게 정해준 신분에 메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는 부족에 묶여 있었다. 그리고 집단의 일부로서 활동했다. 수만 년 동안 우리는 사냥이나 채집을 통해서 먹고 살았고, 그 덕분에 우리의 심리 또한 이러한 작업에 맞게 진화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자신이 속한 씨족사회가 어떤 곳인지 안다. 또 무리나 부족 안에서 적응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어떻게 하면 혼자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어떻게 하면 자유로운 개인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예술가와 근본주의자는 서로 다른 발달 단계에 있는 사회에서 발생한다. 예술가는 근본주의자보다 발달된 사회에서 나타나는 개인들이다. 예술가는 풍요롭고 안정적이고 구성원들이 자기탐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사회에서 나타난다. 예술가는 자유라는 토대에서 자라난다. 그는 자유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예술가는 행운아들이다. 그들은 올바른 사회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근본적으로 자신을 신뢰하고 어떤 경우에도 결코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인류나 사회가 진화, 발전한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는 실수와 착오를 반복해도 결국 인류는 보다 좋은 사회로 발전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는 자유나 진화 같은 개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근본주의자는 과거의 상태가 더 좋았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타락했다고 생각한다. 진리는 앞으로 밝혀질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에 다 밝혀진 것이다. 과거에 신은 진리를 말했고, 예수, 모하메드, 칼 마르크스 같은 예언자들은 그 말을 기록했다. 근본주의는 무기력하고 굴종적인 사람들의 철학이다. 또한 근본주의는 추방당하고 박탈당한 사람들의 신앙이다. 대체 근본주의자들은 무엇에 절망한 것일까? 그들이 절망한 것은 바로 자유이다. 부족이나 씨족, 마을과 가족의 울타리에서 얻을 수 있는 친밀함과 안정감을 잃은 개인들은 자신의 존재의 뿌리를 잃고 무기력해진다. 그것이 현대의 삶이다.
근본주의자는 자유를 견뎌내지 못한다. 그는 미래로 나가는 출구를 찾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로 돌아간다. 그는 과거 그의 민족이 번영했던 시절의 꿈속으로 돌아간다. 그는 그의 민족과 자신을 순수하고 보다 도덕적인 방식으로 재건하려고 한다. 그는 근본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렇게 그는 근본주의자가 된다. 근본주의와 예술은 서로를 배척한다. 그래서 세상에는 근본주의자의 예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근본주의자들이 전혀 창조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은 창조성을 그릇된 방식으로 발휘한다. 그들은 파괴를 창조한다. 그들은 건물을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조직망을 형성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건설한 모든 것들을 적과 그 자신을 소멸시키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근본주의자들은 악마를 만드는 데 자신의 가장 위대한 창조성을 사용한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자신의 삶의 의미를 얻기 위해서 적을 창조한다. 예술가들처럼 근본주의자들도 저항을 경험한다. 그들은 저항을 종교적인 죄악으로 여긴다. 근본주의자에게 저항은 그를 도덕적으로 타락시키려는 악마의 장난이다. 근본주의자는 상품처럼 악마를 소비한다. 그는 악마를 사랑하는 만큼 죽음을 사랑한다.
휴머니스트는 개인이 신과 함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믿는다. 휴머니스트가 인간의 삶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휴머니스트의 견해에서 사물은 진보하고 생명은 진화한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각각의 개인들은 가치를 지닌다. 적어도 그들은 가치 있는 삶을 살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 다른 의견을 갖는다는 것은 범죄일 뿐만 아니라 배교 행위이다. 그것은 이단적인 행위일 뿐만 아니라 신과 맞서는 죄악이다. 근본주의자들이 승리할 때, 세계는 암흑시대로 변한다. 그러나 우리는 근본주의에 끌리는 사람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내가 근본주의에 끌리지 않는 것은 내가 살아온 환경 덕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경제적으로 넉넉했고 가족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으며 운 좋게도 미국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율적인 개인으로 존재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구레나룻을 빼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내가 잃은 것을 메우기 위해서 세상을 증오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직 인류는 자유를 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자유의 공기는 우리가 숨쉬기에는 너무 희박한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자유를 누리고 사는 것이 쉬운 일이라면, 나는 이 책에서 자유라는 주제를 다루지 않았을 것이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자유를 누린다. 사실, 자유는 그렇게 역설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을 지배해줄 주인이나 자신이 지배할 노예들을 찾아 그들을 비난한다.
저항과 합리화
저항의 정체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저항은 너무나 교활해서 쉽게 자신의 정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왜 저항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것일까? 만약 우리가 저항의 정체를 분명히 알게 된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분명히 그 사실에 수치심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수치심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에 맞서 다시 일을 시작할 것이다. 저항은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일에 전념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저항은 합리화를 끌고 온다. 합리화는 저항의 변호인이다. 저항은 합리화의 뒤에 숨어서 자신의 정체를 숨긴다. 저항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두려움을 깨닫지 못한다. 저항은 우리에게 우리가 일을 할 수 없는 설득력 있고 합리적인 근거들을 제시한다. 저항은 우리에게 제시하는 합리화가 위험한 것은, 그 합리화는 상당 부분 진실이기 때문이다. 저항이 내놓는 합리화는 정당하다. 그러나 저항이 아무리 변명을 해도 그것은 우리가 일을 멈추어야 하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우리는 저항을 몰아낼 수 있다
만약 저항을 몰아낼 수 없다면 세상에는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운명>과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과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저항을 물리치는 것은 여자들이 아이를 낳는 것과 비슷하다. 저항을 물리치고 싶다면 반드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하라. 여자들은 그녀의 출산을 도와줄 사람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지난 50만년 동안 아이들을 출산해왔다.
02. 저항과 싸워 이기기
프로가 되는 법
프로와 아마추어
작가가 되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저항 때문에 실패한 사람들은 보면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그들은 모두 아마추어처럼 생각한다. 그들은 아직 프로가 되지 못했다. 예술가가 프로가 되는 순간은 첫 번째 아이를 낳는 것만큼이나 획기적인 사건이다. 그 한순간에 모든 것이 변한다. 나는, 내 인생은 프로가 되기 전과 프로가 된 후로 구별된다고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프로라는 말을 보다 명확하게 정의해보자. 내가 프로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 직종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프로인 사람들이라고 말할 때 그들은 자신의 직종에서 모범이 되는 이상적인 전문가를 말한다.
프로는 아마추어와 반대된다. 그 차이를 고려하자. 아마추어는 재미를 위해 경기를 한다. 그러나 프로는 생존을 위해서 경기를 한다. 아마추어에게 게임은 취미이지만 프로에게 있어서 게임은 직업이다. 아마추어는 시간이 나면 경기를 하지만 프로는 하루 종일 경기를 한다. 아마추어는 주말에 경기를 하는 선수다. 프로는 일주일에 이레 동안 경기를 하는 선수다. 아마추어라는 말은 ‘사랑한다’는 뜻을 가진 라틴어에서 비롯되었다. 흔히들 사람들은 아마추어를 그 게임을 사랑해서 경기에 참여하는 사람이라고 해석한다. 반면 프로는 돈을 위해서 경기에 뛰어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 관점에서 볼 때, 아마추어는 아주 절실히 게임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의 사랑이 절실했다면, 그는 취미 삼아 게임에 임하는 대신 그 게임을 자신의 직업으로 삼았을 것이다. 프로는 그 게임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그 게임에 헌신한다. 그는 자신의 모든 시간을 게임에 바친다. 내게 프로가 된다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분야에 내 모든 인생을 바치는 것을 뜻한다. 저항은 우리가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전향하는 것을 증오한다.
일에 대한 사랑
자, 이제 프로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해보자. 프로란 일을 해서 돈을 벌기는 하지만, 그는 돈 때문이 아니라 그 일을 사랑해서 일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일을 사랑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그 일에 바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프로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일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지나치게 일을 사랑하면 그는 질식하게 된다. 프로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며 냉정한 태도를 취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자신의 사랑에 질식해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일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기 위해 돈을 위해서 일한다. 아니, 돈을 위해서 일하는 척 한다.
우리가 이 책 앞부분에서 두려움, 사랑, 저항에 대해서 배워왔던 것을 기억해보라. 우리가 자신의 예술, 자신의 천직, 자신의 사업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 일이 우리를 진화시키는 데 꼭 필요한 일일수록, 우리는 그 일에 겁을 먹게 되고 저항은 어떻게든 우리의 일을 망치려고 설친다. 프로가 돈을 위해서 일한다고 할 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프로가 된 뒤에도 돈을 벌지 못할 수도 있다. 프로는 심리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돈 때문에 일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프로는 일에 대한 심리적 부담에서 벗어나 보다 프로답게 행동하게 된다. 프로는 그렇게 일에 대한 부담으로 무거워진 마음을 푼다. 프로는 눈이 오는 날에도 비가 오는 날에도 어두운 밤에도 일을 해야만 한다. 우리는 날마다 어려움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딱딱하게 굳은 마음으로는 그렇게 길고 고된 여행을 견딜 수가 없다.
작가는 보병이다. 그는 한 번에 적을 내쫓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란 것을 잘 안다. 그는 적을 하루에, 한 시간에, 일 분에, 한걸음씩 후퇴시키기 위해서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예술가는 군화를 신고 있다.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병사와 비슷하다. 기억하라. 뮤즈는 굳세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일하는 예술가를 좋아한다. 뮤즈는 프리마돈나를 싫어한다. 뮤즈가 제일 싫어하는 죄는 오만이다. 자신을 용병이라고 생각하라. 돈을 받고 고용된 병사라고 생각하라. 그리고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라.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은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저항은 오만과 특권을 사랑한다. 저항은 우리 귀에 이렇게 속삭인다. “자, 내게 너무 훌륭해서 이런 일도 저런 작업도 못 맡는 작가를 소개시켜줘. 그러면 내가 그를 호두처럼 부숴버릴 테니까.” 겉으로 프로는 일한 대가로 돈을 받는다. 겉으로 프로는 돈을 위해서 일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일을 한다.
프로는 끈기가 있다
저항은 아마추어를 무너뜨리기 위해 그가 가진 일에 대한 열정을 이용한다. 저항은 아마추어를 실현되기 힘든 거대한 야망이 담긴 기획이나 일정이 너무 촉박한 계획에 밀어 넣는다. 저항은 그가 그렇게 높은 강도로 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는 벽에 부딪히고 결국 무너진다. 반면 프로는 보상이 금세 돌아오지 않는다고 초조해하지 않는다. 그는 베짱이가 아니라 개미다. 그는 토끼가 아니라 거북이다. 실베스터 스텔론에 관련된 신화를 들어본 적 있는가? 그는 사흘 밤 만에 <록키>의 시나리오를 완성했다고 한다. 나는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아직 프로가 되지 못한 아마추어 작가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신화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아마추어 작가는 그 신화를 그대로 믿고 고통이나 노력 없이 쉽게 작품을 써서 크게 성공할 수 있다고 착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프로는 금방 성공하지 못한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고 끈기 있게 일한다. 그는 언젠가 자신의 시나리오에 스타들을 캐스팅하겠다는 꿈을 위해 끈질기게 일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못하고 망가지는 것이 싫어 끈질기게 일하는 것이다. 그는 모든 일이, 그것이 소설 쓰는 일이건 부엌을 수리하는 일이건 상관없이, 생각보다 시간도 경비도 두 배로 늘어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인다. 프로는 어떤 기획을 시작할 때, 그것이 50미터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길고 긴 개썰매 경주라는 것을 알고 각오를 단단히 한다. 그는 자신의 에너지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길고 긴 경주에 대해서 마음을 다진다. 그는 알고 있다. 만약 썰매를 끄는 허스키들을 계속 달리게 만든다면, 늦건 이르건 결국은 그의 썰매가 목표지점에 도착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무리 힘들어도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프로는 절제할 줄 안다
아마추어는 저항이 얼마나 교활한지 모르고 저항을 과소평가한다. 그래서 그는 감기가 걸리면 글쓰기를 쉰다. 저항은 뱀처럼 교활하게 그의 머릿속에서 속삭인다. “하루쯤 글쓰기를 쉬면 좀 어때. 중요한 것은 빼먹지 않고 쓰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걸작을 쓰는 거야.” 그러나 프로는 저항이 얼마나 교활한지 잘 안다. 그는 결코 저항을 무시하지 않는다. 저항이 아무리 그럴듯한 핑계를 댄다고 해도 말이다. 만약 오늘 그가 저항의 유혹에 넘어가 글을 쓰지 못하게 되면, 내일도 저항의 유혹에 넘어가 굴복하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프로는 저항이 통신판매원과 비슷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일단 우리가 전화를 받고 여보세요, 하고 말한다면 우리는 통신판매원의 설득에 넘어가게 되어 있다. 프로는 아예 전화를 받지 않는다. 전화가 와도 그는 자기 자리에 앉아서 일을 한다.
프로는 미리 대비한다
나는 일하는 기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작정이다.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프로는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철저하게 준비한다는 사실을 밝혀두고 싶다. 프로는 매일매일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게으름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한다. 프로는 저항이 우리 일을 방해하기 위해 얼마나 다양한 전략을 세우는지 알고 있다. 저항은 항상 전에 우리가 경험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전략으로 우리를 방해한다. 프로는 저항의 방해를 견디며 그에 맞설 정신적인 준비를 한다. 프로의 목표는 그날 자신에게 할당된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는 저항에 맞서 신중하게 할 때는 신중하게, 과감해야 할 때는 과감하게 승부를 준비한다. 또 필요하다면 저항에 두들겨 맞을 각오도 해둔다. 그는 험난한 협곡을 지나갈 마음의 준비를 한다. 그는 우리의 전쟁터가 매일 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프로의 목표는 승리가 아니다. 성공이란 자신이 원할 때 찾아오는 법이다. 프로가 목표로 삼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다. 그는 될 수 있는 한, 자신의 각오를 변함없이 단단하게 유지하려고 한다.
프로는 도움을 구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타이거 우즈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골프 선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지도해줄 스승을 모시고 있다. 그는 부치 하몬의 지도를 받는다. 물론 타이거 우즈는 부치 하몬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지도 않는다. 또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때때로 스승의 가르침에 반항한다. 타이거 우즈가 프로가 되어서 누리는 가장 큰 즐거움은 부치 하몬과 함께 연습용 티셔츠를 입고 함께 골프를 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치 하몬과 함께 연습함으로써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골프에 대해서 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이거 우즈는 세계 최고의 골프 선수다. 그러나 아마추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가 골프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타이거 우즈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스승을 찾았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게임을 배우려는 학생들은 골프에서처럼 예술에서도 한 경지 너머에 또 다른 경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 때문에 배움에는 끝이 없다.
결코 포기하지 마라
왜 저항은 우리가 프로로 전향하는 것을 방해하려는 것일까? 그것은 저항이 약자를 괴롭히기 좋아하는 망나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항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힘이 없다. 저항은 전적으로 우리의 두려움에서 힘을 얻기 때문이다. 가장 왜소한 얼간이라도 그가 자신의 자리에서 굳게 버티고 서 있으면 망나니는 그를 괴롭히지 못하고 물러서게 마련이다. 프로 정신의 본질은 일하는 데 필요한 사항보다 일 자체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른 관심사를 모두 접어두고 일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고대 스파르타 인은 자라면서 자기 자신을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는 적처럼 주시하라고 배웠다. 다시 말해, 스파르타 인은 만약 그들이 자신의 일을 한다면 지구상에 어떠한 세력도 그들에게 맞설 수 없다고 믿었다. 프로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틴다. 그는 저항과의 싸움에서 승리한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는 저항보다 더 단호하고 더 무자비하기 때문이다.
프로가 되는 특별한 방법은 없다
프로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작업이 필요 없다. 프로가 되기 위해서 결코 저항에게 굴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그것을 실천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프로라고 생각하고 프로답게 행동하기만 하면 된다. 프로가 된다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03 저항을 벗어나서
보다 높은 차원으로
추상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천사들
나는 앞으로 몇 장에 걸쳐, 자기를 찾으러 가는 우리의 모험 길에서 우리를 지원해주는 보이지 않는 심리적인 힘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나는 우리를 도와주는 이 보이지 않는 심리적인 힘들을 ‘뮤즈’나 ‘천사’라는 이름으로 부를 작정이다. 아마도 천사와 뮤즈 같이 우리를 도와주는 심리적인 힘들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천사나 뮤즈를 구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추상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이러한 심리적인 힘들이 중력처럼 비인격적인 형태라고 생각해도 좋다. 실제로 천사와 뮤즈는 사람의 형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력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 또 모든 새끼 고양이나 망아지는 뛰놀고 배우려는 본능을 갖고 태어난다. 천사나 뮤즈가 이러한 성장이나 배움을 돕는 힘과 본능이라고 한다면, 천사나 뮤즈를 믿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물론 나는 저항을 인격화해서 저항은 이런 행동을 좋아하고 저런 행동은 싫어한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우리는 저항을 비인격적인 힘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저항은 엔트로피나 분자붕괴처럼, 비인격적인 자연의 힘으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장하려는 힘을 다이몬이나 천재 혹은 천사나 뮤즈로 의인화해서 생각할 수도 있다. 또는 성장하려는 힘을 썰물과 밀물 혹은 금성의 주기처럼 비인격적인 자연의 힘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는 성장하려는 힘을 인격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비인격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 두 가지 방식 중에서 편한 것을 선택하면 그만이다. 그도 저도 싫다면, 우리는 성장하려는 힘을 진화하기 위해 우리 유전자 속에 프로그램된 재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핵심은 우리에게는 우리의 성장을 도와주는 동맹군이 있다는 사실이다. 저항은 우리가 태어날 때 가져온 재능을 발휘할 수 없게 막는다. 그러나 저항과 맞먹는 힘이 존재한다. 그 힘은 저항에 맞서서 우리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 힘이 바로 동맹군이며 천사들이다.
비전에 대한 신앙 고백
‘영원은 시간의 창조물과 사랑에 빠졌다.’ - 윌리엄 블레이크
윌리엄 블레이크는 비전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이따금씩 시간 속으로 들어오는 반쯤 미친 신의 화현 중 하나인 것 같다. 시간 속에 들어온 신의 화현들은 뛰어난 석학이 되어 순식간에 신의 의도를 엿보고 그것을 지상에 있는 동료들에게 전해준다. 그건 그렇고, 위에 있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윌리엄 블레이크는 영원이라는 단어로 무엇을 의미하려고 했던 것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영원이라는 단어는 차원의 현실을 의미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영원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 차원을 초월한 이념의 세계를 뜻하는 것 같다. 이 ‘영원’ 안에서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원’ 안에는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영원 속에서 상위 차원의 존재들은 이념이나 개념의 형태로 살고 있다. 상위 차원의 존재들은 순수한 의식이나 정신의 형태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형태가 어떻든, 블레이크에 따르면 고차원의 존재들은 다른 존재들은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블레이크는 이념의 형태로 존재하는 사위 차원의 존재를 육체 없는 존재로 보았다. 그들은 물리적인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상위 차원의 존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과 연결될 수 있다. 이러한 신들이나 혼령들은 우리가 사는 시간 속에 참여한다. 그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나는 ‘영원은 시간의 창조물과 사랑에 빠졌다’는 구절을 이렇게 이해한다. 웬일인지 상위 차원의 존재는 시간에 묶여 있는 우리에게 아이디어를 주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그 아이디어가 물리적 세계에서 구체적인 형태를 가지고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걸 좋아한다는 것이다. 시간의 창조물이란, 시간을 초월한 아이디어가 시간 속에 들어와 물리적인 형태를 입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만약 상위 차원의 존재가 시간의 창조물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아이디어를 물리적 형태로 구체화시키라고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상위 차원의 존재가 시간의 창조물을 좋아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뮤즈가 왜 그렇게 애써서 예술가의 귓가에 영감을 속삭여 주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시간에 묶이지 않은 존재는 시간에 묶여 있는 존재와 의사소통을 시도한다.
내가 이해한 블레이크의 이론에 따르면, 베토벤이 앉아서 5번 운명 교향곡을 작곡하기 전에, 이미 상위 차원의 현실에서는 5번 교향곡이 존재하고 있었다. 베토벤은 상위 차원에 있는 5번 교향곡을 받아 적은 것이 아니다. 바바바 바암! 바바바 바암! 상위 차원에 있는 교향곡은 물리적인 형태 없이 존재한다. 말하자면 상위 차원에 존재하는 교향곡은 아직 음악이 아니다. 우리는 그 교향곡을 연주할 수 없다. 우리는 그 교향곡을 들을 수 없다. 상위 차원에 존재하는 교향곡이 우리가 들을 수 있고 연주할 수 있는 형태로 바뀌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상위 차원에 존재하는 작품이 물질 차원에서 형태를 갖기 위해서는 육체를 입고 있는 한 인간의 중개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한 명의 예술가가, 혹은 한 명의 천재가 필요하다. 상위 차원에 있는 교향곡을 물질 차원에 내보내기 위해서, 뮤즈는 베토벤의 귓가에 교향곡을 흥얼거렸다. 아마도 그녀는 베토벤말고도 수만 명의 다른 사람들의 귀에도 같은 음악을 흥얼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뮤즈의 음악을 듣지 못했다. 오로지 베토벤만이 뮤즈가 흥얼거리는 음악을 들었던 것이다. 그는 그 음악에 형태를 부여했다. 그는 시간의 창조물, 다시 말해 5번 교향곡을 만들었다. 영원은 이러한 시간의 창조물과 사랑에 빠진다…….
영원이 그러한 것처럼, 신들도 시간의 창조물과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신을 순수의식, 무한한 지성, 전능한 정신과 같은 추상적인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또 우리는 신을 의인화해서 여러 신들이나 정령들, 화신들로 이해할 수도 있다. 신을 하나라고 생각하거나 여러 개로 생각하거나 상관없이, 신은 지상의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를 즐겁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초상
마지막으로 나는 이제 진정한 예술가의 모델을 세워볼까 한다. 진정한 예술가는 신의 계획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예술가는 신의 계획의 옳고 그름을 증명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자신의 노동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통해 신의 계획을 실현하는 사람이다. 신은 우리와 소통을 시도한다. 블레이크는 영원이 시간의 창조물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했다. 이 시 구절에서 영원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순수한 잠재력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 이 시 구절은 아직 잠재력 상태에 있는 신의 계획이 시간과 공간에 묶인 이곳으로 내려와 구체적인 형태로 실현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의 계획이 땅에 실현되기 위해서는 예술가라는 도구가 필요하다.
예술가의 적은 시야가 좁은 자아이다. 자아는 저항을 낳는다. 저항은 창조성이라는 황금을 지키는 용이다. 예술가는 창조성이라는 황금에 접근하기 위해서 용과 싸우는 전사가 되어야만 한다. 모든 전사들처럼 예술가는 절제와 겸손을 배워야 한다. 공연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중 앞에서 화려하고 멋지게 자신의 재능을 펼쳐 보인다. 그러나 그런 그들조차 혼자일 때는 수수하고 겸손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작품을 만들지만, 그 작품의 원천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은 단지 창조를 촉진시킬 뿐이다. 그들은 그 작품들이 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도왔을 뿐이다. 예술가는 그가 모시는 신에게 기꺼이 봉사하는 잘 훈련된 도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