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귀가 사는 집
- 서하나
내 앞집에 아귀가 산다. 언제부터 살았는지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 들어왔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냥 어느 날 그게 앞집에 나타났다.
제주도 산 아귀는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 그게 이상했다. 제주 바다에서 태어나 내 앞집으로 옮겨오기 전까지 제주도를 벗어 난 적이 없다던 아귀가 서울말을 똑 부러지게 쓰다니, 참으로 이상했다.
“사투리?”
“응. 사투리.”
“제주도 사투리라…….”
박 군에게 그렇게 물은 건, 몇 주 만에 만나 뽀얀 국물이 깊게 우러나 특별히 간을 하지 않아도 감칠맛이 나는 탕으로 늦은 점심을 먹을 때였다. 탕에 밥을 말아 맛나게 몇 술을 뜨던 박 군은 내 질문에 곰곰이 생각을 하더니 곧 제주도 사투리를 술술 꺼냈다.
“혼저옵서, 편안 하우꽈, 제주도엔 오난 어떵 아우꽈, 혼저 왕 먹읍서, 맨도롱 홀 때 호로록 들여 싸붑서, 제주엔 참 종거 만쑤다양. 전복죽 쒀줍서양. 내가 아는 건 이 정도.”
짧지만 나름 유창한 그의 실력에 나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제주도 사투리를 한 번도 들어 본 적은 없었지만 발음도 완벽한 것 같았다.
“우와, 마치 외계어 같아. 근데 무슨 뜻이야?”
“그냥 뭐. 어서 오세요, 편안 하십니까, 제주도에 오니 어떠하십니까. 어서 와서 먹으십시오, 따뜻할 때 후루룩 마셔 버리십 시오. 제주엔 참 좋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전복죽을 쒀주세요. 뭐 이런 뜻이야.”
“근데 뭔가 의무적인 말들뿐이네.”
“응. 사실 제주도에서 칼국수 집을 하고 싶었거든.”
박 군이 안 어울리게 수줍어하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내가 아는 박 군은 칼국수를 싫어했기에 칼국수 집을 하고 싶었다던 그 말에 공감할 수 없었다.
“칼국수?”
“응. 3년 전에 내가 제주도에서 지낸 적 있었잖아. 그때 거기가 진짜 좋아서 눌러 앉고 싶었어. 바지락 칼국수를 만들면서.”
“왜?”
“그땐 바지락 칼국수를 좋아했으니까.”
지금은 아니야- 하고 묻자 박 군은 피식하고 웃었다. 나로썬 피식 웃은 그 의미를 알 수 없었기에 궁금했다. 박 군이 갑자기 대구와 아귀 중 뭐가 더 맛있냐는 엉뚱한 질문을 해댔다. 둘 다 별로란 내 대답에 박 군은 아귀의 살이 더 쫀득쫀득하다며 아귀에 대해 예찬하기 시작했다. 박 군은 유명한 대구탕 집에서 대구의 살을 발라먹으며 아귀가 더 맛있다는, 대구가 들으면 분명히 기분 나빠할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난 혹시나 식당 주인이 듣진 않을까 눈치가 보였다.
박 군은 대학 동기로 남자로 보이지 않는, 남자의 성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대학 동기라 해서 같은 과였던 건 아니고 같은 동아리였다. 등산동아리를 가장한 술 퍼마시는, 얼마든지 몸이 만신창이가 될 수 있는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를 하는 날, 나는 알바 때문에 남들보다 늦게 도착했다. 신입생들은 한 명씩 일어나 동아리에 들어온 포부에 대해 힘차게 말하고 있었다. 신입생 중 유일한 여학생이었던 나는 내 차례가 되자 선배들을 포함한 남자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한 몸에 받았다.
“산이라면 아직 서울대 근처에 있는 관악산 밖에 안 가봤어요. 그래서 전국에 있는 모든 산에 가보고 싶어요. 특히 한라산에 꼭 가보고 싶어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어울리지도 않는 국방색비니를 눌러 쓰고 구석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그래서 난 박 군이 선배인 줄 알았다. 모든 신입생들은 경직된 모습이었는데 그는 선배들 사이에 앉아 농담 따먹기를 하며 거침없이 술잔을 기울였으니까- 박 군이 여전히 서 있는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런 포부는 네가 처음이다.”
박 군의 그 말에 와- 하고 모든 사람들이 웃었다. 나는 창피한 것보다 왜 웃는지에 -물론 나중에 집에 가서 생각해보니 날 웃음거리로 만든 박 군이 괘씸했다- 의문이 들었다. 등산동아리라며?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그 실체가 밝혀졌다. 여름엔 덥다고, 겨울엔 춥다고, 봄엔 벚꽃놀이가 더 좋다고, 가을엔 갈대숲이 더 운치 있다고, 동아리 사람들은 그렇게 산을 피해 다녔다. 대신 그 시간들을 술로 채워갔다.
그래도 사람들은 등산동아리라는 걸 잊지 않으려는지 등산복을 입고 술을 마셨다. kx, 블xx크, x레, x팔x, xxx인, 몽x등 죄다 외국 브랜드만 쳐 입고는 막걸리를 마셨다. 그렇게 모여 있는 것을 볼 때면 등산동아리가 아니라 등산인 코스프레를 하는 술꾼들 같았다. 하지만 곧 나도 그 속에 껴들었다. 살을 빼기 위해 마음먹고 가입한 동아리에서 난 노x를 입고 마음 놓고 살을 찌웠다.
“너 보기보다 소심하구나.”
소심한 나는 신입생환영회 이후로 박 군을 철저히 무시했다. 남들과는 웃어도 박 군과는 절대 웃지 않았고, 교내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자리가 없어 서서 먹을지언정 박 군의 옆엔 앉지도 않았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면 나는 내가 아니었고 내가 그를 불러야 할 때면 다른 사람을 시켰다. 박 군은 나와 화해를 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나는 나에게 야유를 보냈던 그날이 선명하게 떠올라 짜증이 났다.
그랬던 우리가 이렇게 친해질 수 있었던 건 그 해 여름 방학 때 박 군이 한라산은 정말 좋은 곳이네- 라는 간단한 쪽지와 함께 보낸 제주도 한라봉 때문이었다. 굵고 알찬 한라봉의 비주얼에 마음이 흔들렸고 새콤달콤한 한라봉의 맛에 나는 그를 용서했다. 그 다음 날, 나는 박 군에게 전화를 걸어 한라산에 대해 이야기 해달라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박 군과 나를 화해의 장으로 이끌었던 그 한라봉이 직접 제주도까지 가서 산 게 아니라 인터넷으로 주문한 거라는 걸 한참 뒤에 알았지만 그땐 박 군과 너무 친해진 뒤였다. 화를 내기엔 삶의 반을 차지한 친구였기에 소주 세병과 족발 한 접시와 화를 바꿨다.
“갑자기 제주도 사투리는 왜?”
아귀가 더 맛있다던 박 군이 대구탕을 싹싹 긁어 먹으며 말했다. 나는 반도 안 먹은 내 대구탕을 박 군에게 밀어주며 내 집 앞에 살고 있는 아귀에 대해 신나게 말해 주었다. 아귀에 대한 이야기가 박 군에겐 별다른 감흥을 주진 않았는지 그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박 군은 역시나 건성으로 물었다.
“근데 왜 그 할머니를 아귀라 불러?”
그러게, 난 왜 그녀를 아귀라 부르는 거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그 질문에 나는 입이 막혔다. 아귀 같이 생겼냐는 물음에 나는 폰으로 아귀를 검색했다. 아귀의 사진은 죄다 참 거시기 했다. 음… 아귀를 간단한 도형으로 치면 ▽ 이런 느낌이었다. 그 여자도 ▽ 이런 느낌이니 아귀라 불러도 되겠지. 아 마?
“입이 커?”
“그런 것 같아. 아니, 확실히 그래. 축구공도 한 입에 삼킬 수 있을 것 같아.”
그 말이 박 군의 흥미를 잡아끌었는지 그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눈을 빛냈다.
“와……. 쩐다. 사진 찍어 보내. 해외 토픽에 보내게.”
나는 수저를 들어 박 군의 이마를 강타했다. 수저에 묻어 있던 고춧가루가 박 군의 이마 중앙에 들러붙었다. 내가 먹은 흔적을 바라보려니 민망해져 살짝 눈을 내리 깔았다.
“야. 뭐 하러 해외토픽까지 가냐? 우리나라에도 세상에 이럴 수가 가 있는데. 꼭 없는 것들이 외국 브랜드 따지지.”
나는 다시 한 번 수저로 박 군의 이마를 강타했다. 그건 박 군 이마위의 내 흔적을 없애기 위한 행동이었다. 다행이 흔적은 발자취를 감췄고 난 마음 놓고 박 군을 바라 볼 수 있었다. 박 군이 벌게진 이마를 양 손으로 벅벅 문지르며 말했다.
“안 돼. 꼭 해외토픽에 보내야해. 이건 우리나라에만 머물기에는 스케일이 너무 커.”
꼭 사진을 보내란 박 군의 당부를 안고서 집으로 돌아온 나는 이불 속을 헤맸다.
아귀가 멀리 제주도에서 흘러 왔다는 건, 제주도 은갈치 때문에 알게 됐다. 앞집에 사람이 없어서 그런데 택배 좀 맡아 달라는 택배 기사의 말에 은갈치는 내 집 거실에 들어앉았다.
처음엔 내용물에 관심이 없었지만 ‘즉시 냉동요망’이라고 굵게 쓰여 있는 글씨를 보자 호기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테이프를 조심히 뜯어 스티로폼상자의 뚜껑을 열자 굵고 통통한 갈치들이 일렬로 누워 있었다. 은빛 비늘은 냉동 상태였는데도 아름다웠고 우아했다.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생선은 싫어했지만 갈치만큼은 엄청 사랑했던 나였기에 그 갈치가 보통 갈치는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특중에서도 특특상품인 녀석들. 비록 내 것은 아니었지만 내 집으로 이런 것들이 들어오다니, 나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눈물이 났다.
나는 상자 구석에 놓여 있는 갈치토막팩을 하나 들었다. 심호흡을 하고 조심히 비닐을 걷어 냈다. 비닐이 구겨지지 않게 하려면 고도의 기술과 집중력이 필요했다. 한 면을 떼고 다른 한 면을 떼어내니 손은 땀으로 금세 축축해졌다. 옷에 땀을 닦은 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 큰 토막을 꺼내고 싶었지만 그러면 그 부분의 비닐이 푹 꺼져 들통이 나므로 제일 작은 토막을 골라 들었다. 비닐을 덮고 토막의 빈자리가 티가 나는지 여러 번 확인을 한 뒤, 스티로폼의 뚜껑을 닫았다.
아귀가 갈치를 찾으러 오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당당하게 상자를 건넸다. 아귀가 집에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뒤 갈치토막을 구웠다. 갈치가 다 구워지자 저녁때는 아니었지만 나는 상을 차렸다. 김치와 무장아찌뿐인 초라한 밥상에 특특상품의 갈치가 올라와 있는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드디어 갈치의 살을 발라 쌀밥위에 얹었다. 하지만 한지 오래돼 살짝 누리끼리해진 밥 때문에 모양이 나지 않았다. 얼른 밥을 할까, 그러면 갈치가 식을 텐데. 그냥 갈치만 발라 먹을까, 그래도 고슬고슬한 밥이랑 함께 먹는 게 최고인데. 아 어쩌지- 고민을 하는데 초인종 소리가 났다.
아귀는 쟁반을 들고 문밖에 서 있었다. 갈치를 대신 받아줘 고맙다며 내민 것은 통갈치 두 마리였다. 입 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려는 걸 억지로 눌러 앉혔다. 이럴 필요 없는데, 부담스러워요 비싼 것 같은데- 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이 멋대로 튀어나왔다. 나는 잠시 놀랐지만 이미 한 말이라 주워 담을 수 없어 안 받겠다는 의미로 두 손을 뒤로 했다. 산 게 아니라 제주도에 있는 지인이 보내 준 거니까 부담스러워 할 필요 없어요. 실은 내가 쭉 제주도에서 살아서 제주도에 아는 사람이 많거든. 그래도 내가 쭈뼛거리자 아귀는 갈치가 든 쟁반을 내게 떠넘기듯 문 앞에 두고 돌아섰다.
작게 고맙다고 말한 뒤, 문을 닫으려는 순간 아귀가 큰소리로 말했다. 갈치에 밀가루를 입히지 말아요. 그냥 굽는 게 훨씬 맛있으니까- 내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 실종된 한 토막의 갈치가 내 집에 있다는 걸 눈치 챈 건 아닐까. 밀가루를 입힌 상위의 갈치가 나를 보며 웃고 있는 듯 했다. 나는 밀가루를 벗겨 갈치를 하수구로 밀어 넣었다. 그리곤 갈치 두 마리를 냉동실에 처박아 버렸다.
아귀를 처음 마주한 건 무더운 여름이었다. 그 여름엔 방송에서 백년 만에 찾아오는 무더위라며 하루를 멀다하고 난리를 쳤었다. 하지만 그 전에도 그 전전에도 몇 년째 계속 백년만의 무더위는 우리 곁에 있었다. 개뿔. 이제 그 백년만의 더위, 그만 좀 우려먹어라 쫌.
첫 직장을 그만 두고,
실은 잘렸다. 취직이 안 돼 빌빌대던 나는 결국 원하는 일을 포기하고 다소 늦은 나이에 ‘회사 돈을 내 돈처럼 아껴 쓰자’란 포부를 안고 경리 계에 입성했지만 마음처럼 되지는 않았다.
나와 사장을 포함해 직원이 열다섯 명뿐이었던 중소중 소에 가까웠던 그 회사는 가족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너무 가족 같은 분위기가 문제였을까. 그래 그랬던 것 같다. 손버릇이 나쁜 직원이 있었는데 아무도 그에게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 그의 손이 내 등에 닿았을 땐 단순한 실수로 여겼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더러운 손은 엉덩이를 슬쩍, 허벅지를 슬쩍하더니 끝내는 허리춤으로 과감하게 들어왔다. 창피함과 수치심에 혼자서 끙끙대던 나는, 손버릇이 갈수록 심해져가자 나보다 먼저 들어온 언니에게 일러 바쳤다. 평소에 언니 동생하며 잘 지내던 사이였기에 그게 아니더라도 같은 여자이니까 편을 들어줄 주 알았는데 언니는 자신도 다 겪었다며 코웃음을 쳤다. 기가 막혔지만 한편으론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언니도 나처럼 힘이 없었으니까. ‘을’중에서도 제일 말단인 ‘을’들끼리 뭉쳐 봤자니까. 그래서 난 그 보다 힘 있는 사람을 찾기로 했다.
다이렉트로 사장을 찾아가 낱낱이 고발했다.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던 사장은 여동생 같아서 장난 좀 친 것 가지고 뭘 그렇게 화를 내냐며 오히려 나를 꾸짖었다. 결국 난 회사와 그 직원을 고소하고 당당하게 잘렸다.
아무튼 그래서 백수가 된 나는 틈만 나면 시원한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집 앞 편의점에서 팔백 원짜리 쭈쭈바를 먹으며 더위를 피했다. 아귀를 처음 만난 그날도 쭈쭈바를 먹으며 편의점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었다. 때마침 키 작은 노부인이 자기보다 큰 짐을 양 손에 들고 지나가고 있었다. 이 더운 날 참 고생하시네- 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말했다.
“젊은 사람이 짐 좀 들어 드리지. 이렇게 보고만 있어요?”
나한테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하고 있었는데 그 목소리의 주인이 내 등을 쿡쿡 찔러댔다. 누군가 하고 돌아봤더니 내가 살고 있는 원룸 건물의 주인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닌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한 번 내게 짐 좀 들어드리라 명령했다. 내가 왜요 하는 표정을 짓자,
“왜긴, 그게 다 사람 사는 인정이니까 그렇지. 게다가 저분은 얼마 전에 그쪽 앞집으로 이사 오신 분이잖아요. 어머, 몰라요? 쯧쯧. 젊은 사람이 그렇게 무심해서야.”
하며 기분 나쁘게 혀를 찼다. 주인아주머니는 말마다 ‘젊은 사람’ 타령을 해가며 내가 젊다는 걸 강조했다. 젊으면 뭐. 모르는 사람 짐도 들어줘야 하나. 자기도 젊었을 때 안 그랬으면서 안 봐도 훤하다 뭐. 쳇. 그렇게 신경 쓰이면 말로만 그럴게 아니라 자기가 가서 들어주면 되잖아. 노부인보다 훨씬 젊으면서. 쳇. 왜 나를 시켜. 지가 뭔데. 내가 지 말을 들을 것 같나. 쳇.
하지만 난 속마음과는 다르게 재빨리 노부인에게로 달려갔다. 세입자로써 집주인에게 밉보이기 싫었으니까.
저기요, 짐 좀 들어 드릴게요. 노부인의 손에서 짐을 낚아채자 그녀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진정하세요. 전 앞집 사람인데요. 무거워 보이셔서 들어 드리려고 그랬던 거예요. 그러니 제발 진정하세요. 차근히 설명하자 그제야 노부인은 입을 다물었다. 미안해요 내가 귀가 좀 어두워서… 앞집에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사는 줄은 몰랐네요.
짐을 들고 5층까지 올라가자 겨드랑이에 땀이 흥건히 찼다. 나이도 많으신 분이 엘리베이터도 없는 이곳으로 왜 왔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물어 보지는 않았다.
노부인의 현관문에 다다르자 그녀는 짐 속에 손을 넣어 뒤지더니 뭔가를 꺼내 내 손에 쥐어줬다. 신문으로 둘둘 싼 그것이 뭔지 알 수 없어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햇김이에요. 아주 맛이 좋을 거예요. 내가 직접 만든 거라 장담할 수 있어요. 고마워서 주는 거니까 사양 말아요- 하며 환하게 웃는 노부인을 보자마자 난 생선가게에서 본 아귀가 떠올라 등골이 서늘했다. 그 후로 아귀는 나를 보면 친한 척 말을 걸었지만 난 나를 삼켜버릴 것 같은 그 입이 두려워 아귀를 피해 다녔다.
딩동- 거침없는 초인종 소리에 잠에서 깼다. 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하니 정확히 8시였다.
휴대폰엔 아귀의 사진은 언제 찍어 보낼 건지, 왜 아직도 깜깜 무소식인건지, 혼자 해외토픽에 제보하려고 꼼수를 쓰는 건 아닌지 등을 묻는 박 군의 문자들이 빽빽이 들어와 있었다.
딩동- 또 한 번 초인종이 울렸다. 아휴, 귀찮아. 없는 척하면 그냥 가겠지. 잠에 더 취하고 싶어 이불속에서 꼼짝을 안했다. 두어 번 더 초인종 소리가 나더니 조용해 졌다. 갔나 싶어 마음이 편해지려는 찰나에 아직 자요? 하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벽을 타고 들어왔다.
아귀는 그런 식으로 매주 일요일마다 내 집의 문을 두드렸다. 나는 할 수 없이 잠옷위에 카디건을 걸쳐 입고 현관문을 열었다. 자는데 깨운 건 아니죠? 아귀찜이에요. 탕으로 할까 하다가 젊은 사람들 입맛엔 찜이 더 좋을 것 같아서 겸사겸사 찜으로 만들어 봤어요. 식기 전에 꼭 들어요. 어이구, 눈이 부었네. 정말 내가 깨운 건 아니죠? 아귀는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처음에 가져온 음식은 찐 옥수수였다. 그 다음엔 찐 고구마와 감자였다. 그 다다음엔 김치부침개였다. 그 다다다음엔 잡채였고, 불고기였고, 낙지찜에 해물탕까지 많은 음식들을 쉬지 않고 일요일마다 제 집에서 내 집으로 날라 왔다. 찐 감자까지는 그런 대로 이해가 갔다. 불고기와 낙지찜, 해물탕, 순대볶음 등등 등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대체 왜 아침 8시부터 이 음식들을 만드는 걸까. 정확히 8시면 가져왔으니까 음식은 그 전부터 만들었다는 소리인데 대체 재료를 언제 다듬고 언제 양념하고 언제 익혔을까. 전날 미리 모든 걸 손질해 놨다고 쳐도 일어나자마자 이것들을 만든다는 건 좀 납득을 할 수 없었다. 나의 아침은 언제나 식빵 한 조각이었고 엄마 밥을 얻어먹었던 지난 24년 동안의 아침도 겨우 식빵 한 조각이었으니까.
아귀가 아귀찜을 만들다니. 아귀가 아귀를 다듬는 장면을 상상하다 피식하고 웃음이 번졌다. 웃는 걸 보니 아귀찜을 좋아하는 모양이네요 다행이다. 아귀는 그 웃음을 오해하고 돌아섰다. 쟁반을 싱크대에 올려놓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한참 뒤에 일어난 나는 아귀찜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라면을 끓였다. 라면을 다 먹고 설거지를 하려다 싱크대에 놓인 그것을 발견하곤 뚜껑을 살짝 들쳤다. 푹 익은 미나리가 엉겨있는 식은 아귀찜은 참 흉물스러웠다. 오랜만에 친했던 과 동기들을 만나기로 했기에 서둘러 그것을 처리하고 집을 나왔다.
3년 만에 다 모인 십여 명의 동기들은 각자의 삶을 자랑하느라 바빴다. 나는 한 번도 못간 해외여행을 서너 번씩 다녀 온 동기도, 애인이 사준 명품 백을 자랑하는 동기도, 다이어트에 성공해 뼈다귀뿐인 동기도 부럽지 않았다. 부러운 건 오직 다음 달에 시집을 간다며 청첩장을 돌리는 동기였다. 그것도 제일 안 예뻤던, 미팅에 나가면 거침없이 폭탄으로 격리됐던, 내가 유일하게 기를 펼 수 있었던 그 동기가 다 제치고 가장 먼저 시집을 간다니… 난 재재취업도 얼마 전에 겨우 했는데… 문득 서러움과 불만이 마음에 넘쳐흘러 앞에 놓인 술을 닥치는 대로 입에 부었다. 계집애들은 내가 병째 들이부어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서러웠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고소한 냄새에 고개를 들었다. 그곳은 내 집과 구조가 똑같았지만 한 쪽 벽면이 책으로 가득 채워진 걸로 보아 분명 내 집은 아니었다. 낯선 곳이었다.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술집 다음의 기억들은 하나도 없었다.
여기는 어디인가 싶었을 때, 아귀가 밥상을 들고 곁으로 왔다. 일어났어요? 잘 됐네요. 안 그래도 깨우려고 했는데… 이거 북엇국인데 호로록 마시고 다시 자요. 속이 편할 거예요. 내가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자 아귀는 가까이 다가와 손에 수저를 쥐어줬다. 괜찮아요. 젊었을 땐 다 그러는 거니까. 그리고 젊었을 때 그래보지, 늙어서 그러면 주책이라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해요.
속이 많이 쓰린 나는 북엇국을 한 술 떴다. 시원하고 맑은 국물이 가슴께까지 밀고 들어와 쓰린 속을 달래주었다. 북엇국을 먹으며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자 아귀는 입을 귀까지 활짝 벌리고 껄껄 웃는 특유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게… 새벽에 어디선가 쿵쿵대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자세히 들어보니 앞집에서 나더라고요. 혹시 도둑이 든 건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삐삐삐삐삑하는 사이렌 소리가 들리잖아요. 슬쩍 내다보니까 아가씨가 아가씨 집 문을 발로 차고 있더라고요. 제가요? 네. 계속 그러고 있으면 누군가가 신고할까봐 우리 집으로 데리고 들어 왔어요. 잠들기 전까지 계속 나한테 집 비밀번호에 대해 묻더라고요. 번호가 안 눌린다면서. 민망해진 나는 그릇째 들고 북엇국을 마셨다.
그런데 아가씨. 이렇게 차려 입으니까 참 예뻐요. 아귀는 동기들을 만나기 위해 차려입었던 -간밤에 술에 취해 망가질 때로 망가진 모습인데도- 모습을 보고 예쁘다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만날 추리닝만 입고 머리도 아무렇게나 동여매기에 좀 안타까웠는데. 물론 그것도 예뻤지만요. 재재취업을 했으니 이젠 만날 보실 수 있을 거예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재재취업이 쪽팔려 입을 꽉 다물었다.
참 아귀찜 맛은 어땠어요? 이상하지 않았어요? 아뇨 맛이 아주 좋았어요. ‘아주’에서 뜸을 한 번 들였다. 젊은 사람이라 단걸 좋아하나 봐요. 소금을 넣는다는 걸 그만 설탕을 넣었지 뭐예요. 늙으면 다 이런다니까요. 단맛의 아귀찜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지만 장단을 맞추기 위해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집으로 건너온 나는 새벽의 흔적들을 보며 -문 앞에 선명히 찍혀 있는 신발자국과 열려 있는 번호 키의 뚜껑, 더러운 침- 기억에 없는 새벽이 오히려 고마웠다. 삑삑삑삑삑삑 띠리링. 문은 잘 열리는데… 어제도 잘 열렸다면 아귀의 집에서 잘 일 따위는 없었을 텐데. 그래도 북엇국은 참 맛있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박 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하는 박 군의 목소리는 아직 잠에 취해 있었다. 아귀의 집에서 잔 사실과 아귀의 방엔 한자로 된 책들이 가득했다는 이야길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간간히 박 군은 그래? 하는 추임새를 넣어 듣고 있다는 걸 확인시켜줬다. 나는 문득, 일요일 아침부터 전화를 건 내가 일요일 아침부터 초인종을 누르는 아귀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쉬는 날에 귀찮게 해서 미안해- 하고 전화를 끊으려 하자 박 군이 물었다.
“근데 왜 그렇게 그분을 싫어해? 해외토픽에까지 나갈 수 있는 멋진 분인데.”
“날 귀찮게 하니까. 난 혼자 있고 싶은데 자꾸 나를 건드려.”
그 말을 하며 아귀를 떠올린 나는 또 다시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외로워서 그러시는 게 아닐까.”
할 말이 있다며 나를 갈빗집으로 불러낸 박 군은 고기를 뒤집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그랬잖아. 아무도 없는 것 같다고. 남편도 자식도 형제도 하물며 친구도 없는 것 같다고 그랬잖아.”
내가 그런 말까지 했던가. 하긴, 아귀를 찾아오는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 박 군은 나에게 갈비를 밀어 주었다.
“그러니 잘해드려.”
“어떻게?”
“음. 그냥 귀찮게 생각하지 말고 말동무도 해드리고 일요일 아침에 문 두드리면 웃으면서 맞이하고 가끔 들여다보고 그러면 되지 않을까.”
나는 푸른 상추에 살짝 탄 고기를 얹고 마늘을 넣을까 말까 고민을 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에이, 귀찮게. 우리 엄마한테도 일주일에 한 번 전화할까 말깐데.”
“너도 나중에 그럴 수 있어.”
그 말에 화가 났다. 내가 왜? 남편도 자식도 친구도 아무도 찾지 않는 외톨이가 왜 돼.
“내가 왜. 좀 현실성 있는 이야기를 할 순 없어?”
상추의 꼭지를 따던 박 군이 내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다소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잘 들어봐. 넌 여태껏 연애를 한 번도 못해봤으니 노처녀로 늙을 확률이 아주 높다. 대부분의 모태솔로들이 그 길을 걷고 있으니까. 운 좋아서 결혼한다 치자, 청상과부가 될 수도 있고 자식을 못 낳을 수도 있고 아님 남편과 자식을 앞서 보낼 수도 있는 일이고. 당연히 부모님은 너보다 먼저 가시지, 게다가 넌 형제도 없잖아. 그럼 넌 혼자가 되는 거야. 끔찍하지 않냐?”
그런 끔찍한 상황들이 나한테도 올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자 두려움에 아랫니가 덜덜 떨렸다. 나는 애써 두려움을 감추고 박 군의 얼굴에 삿대질을 했다.
“잡소리 좀 하지 마. 난 절대 그렇게 안 돼. 나한텐 네가 있잖아. 평. 생. 친. 구. 박. 흥. 민.”
그렇게 말하면 당연히 맞아 내가 있잖아 걱정 마- 할 줄 알았다. 적어도 지금까진 그랬으니까. 하지만 박 군은 어두운 낯빛으로 다소 무겁게 말했다.
“얌마. 난 결혼 안 하냐?”
결혼이란 단어가 박 군 입에서 나오자 이상하게 섭섭했다. 박 군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박 군과 결혼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혼하면 나 안 만날 거야?”
“부인이 싫어하면 그래야지.”
그 말에 나는 욱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참았다. 미래의 부인을 질투하는 것도 우습게 느껴졌고 왠지 이 상황에서 욱하는 모습을 박 군에게 보이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치사한 놈. 벌써부터 있지도 않은 부인 치마폭에 싸여 있다니. 이 누나는 가슴이 아프다. 근데 할 말이란 게 뭐야?”
“뭐?”
“할 말이 있다고 만나자고 한 거였잖아.”
“내가? 아, 내가 그랬구나. 아냐, 나중에 할게.”
학교를 졸업하고 국산 브랜드를 입고 진짜 산악인이 된 박 군은 건강에 좋지 않다며 술을 멀리했다. 그랬던 그가 이상하게 술을 마구 마셨다. 무슨 일인지 물어도 그저 나중에 이야기 해주겠다고만 할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가다가 박 군의 그 말이 생각나 두려웠다.
‘혼자 죽는 거만큼 고통스러운 건 없을 거야. 너도 그럴지도 몰라.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친구 좀 사귀고 연애도 하고 그래. 반려동물을 키우는 건 어때? 아… 넌 동물도 안 좋아하지. 그러지 말고 금붕어라도 키워 보는 건 어때? 그거 키우는 재미도 나름 쏠쏠한데.’
아귀네 집에 슬쩍 노크를 했다. 똑. 똑. 똑. 계세요……, 똑. 똑. 똑 저기요……, 똑. 똑. 똑. 아귀씨 계시나요-, 하지만 굳게 닫힌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노크 소리가 너무 작았나 싶어 쾅하고 발로 세게 문을 찼다. 하지만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초인종을 눌러 볼까하다 아귀의 웃는 모습이 떠올라 그만두고 집으로 들어갔다.
일요일이 돼도 아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8시를 10분이나 넘기자 나는 문을 열고 얼굴을 빠끔히 내밀었다. 아귀네 집 앞에 전단지가 수북이 쌓인 걸로 봐선 아귀는 집 밖을 배회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됐다. 혹시 제주도까지 내려간 건 아닐까. 혹시나 전단지를 보고 도둑이 들까 싶어 모조리 뗐다. 아귀를 생각해서라기보다는 그게 앞집의 도리 같았으니까.
며칠 뒤, 나는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아래 아래층에 사는 사람이라고 밝힌 사내는 옥상에 가려고 지나가다가 5층에서 이상한 악취를 맡았다고 했다.
그리고 또 며칠 뒤, 이번엔 집 주인아주머니가 직접 찾아 왔다. 사람들이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자꾸 항의를 한다며 나에게 청소 좀 하고 살라고 했다. 무슨 냄새요? 하며 반문하는 내게 아주머니는 눈썹을 찡긋댔다.
“지금 이 냄새가 안 나요?”
“제가 요즘 코감기에 걸려서요. 그렇게 심해요?”
“어휴, 생선 썩은 내 보다 더 한 것 같아.”
나는 심하게 찡그리는 아주머니의 표정을 보고서 그 냄새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짐작 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냄새가 아귀의 집에서 난다는 걸 깨닫고는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문득, 난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아주머니도 나와 같았는지 경찰에 신고를 했다.
경찰과 함께 문을 따고 들어가자 악취는 더 진동을 했다. 경찰은 우리에게 나가 있으라고 했다. 빨리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내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휴대폰이 주머니에서 울리지 않았다면 나는 꼼짝없이 아귀의 마지막을 확인 할 뻔했다.
“왜 이렇게 목소리가 처져 있어.”
박 군의 목소리가 가슴께를 후볐다. 전혀 다정스러운 목소리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지… 지금 나올 수 있어? 나 너무 무서워.”
“왜 무슨 일인데.”
“아귀가… 아니 앞집 노부인이 돌아가셨어. 그것도 혼자 비참하게……. 난 앞집에 살면서도 몰랐어. 며칠 안 보이시는 것도 그냥 그런가 보다 했고, 일요일에 안 찾아와도 그냥 그런가 보다 했어. 며칠 어디 갔나보다 했지, 누가 집에 죽어있을 줄 알았겠어? 내가 사는 층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대. 그 냄새가 아니었다면 아귀가 죽었을 줄은 평생 몰랐을 거야. 그렇지? 끔찍해. 정말 끔찍하다고.”
“진정해. 진정하고……”
박 군이 차분히 나를 달래려고 애썼지만 내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엄마 아빠는 지금 여행 가셨어. 그래서 지금 함께 있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 네 말대로 내 주변엔 너 말고는 아무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빨리 와. 나 너무 무섭단 말이야.”
내 목소리에 점점 울음이 번졌다.
“어쩌지. 나도 지금 멀리 나와 있어.”
“그래봤자 서울 안 일거 아냐.”
“아냐.”
“그럼?”
수화기 너머에서 박 군의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네팔이야.”
“뭐? 거긴 왜 갔어?”
“히말라야에 오르려고. 내가 말했잖아. 올해엔 꼭 가고 싶다고.”
그게 왜 하필 지금이냐고 화를 내려다 참았다.
“언제 오는데?”
“아직 계획에 없어.”
“너 정말 이러기야?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말하려고 했는데… 미안. 왠지 말하면 너한테 붙잡혀서 나올 수가 없을 것 같았어.”
내가 쓸쓸히 혼자 죽으면 다 네 책임이다- 버럭 소리를 치고 전화를 끊었다. 박 군에게서 바로 연락이 없자 약간은 두려웠다. 이젠 박 군마저 떠나버린 걸까.
이불 속에 누웠다. 한기가 느껴져 절로 이가 떨렸다. 지난 5년 동안은 홀로 누워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휴대폰을 들어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아무 용건 없이 만나자고 하면 두 말 없이 나올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귀의 웃음이 떠올랐다. 등골이 서늘하지 않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 문득,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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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부문
당선작 심사평
제2차 <창작콘테스트> 소설부문에 이름을 올리게 된 작품은 서하나 씨의「아귀가 사는 집」이다.
소설의 총체적 위기가 거론되고 있는 암울한 문화적 현상 속에서도 응모된 작품들이 그 양으로 보나 질로 보나 풍성했다는 것은 큰 기쁨이아닐 수 없다. 당선자는 물론이고 최종심에서 안타깝게 제외된 분의 정진을 빈다.
서하나 씨의 당선을 축하한다.
소설가 김영찬 / 소설가 김충근
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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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부문
찔레꽃 내 언니
- 장미자
이 가을, 때 아닌 봄 찔레꽃 액자 앞에서 글썽글썽 눈물이 고인다. 얼마 후가 언니의 기일이라 그럴 거다. 여섯 살 어린 나를 업어 키웠고, 내가 신은 양말에 고무줄을 묶어주었고, 실밥을 뜯고 미싱을 돌려 번 봉급으로 공납금을 대 주던 언니.
찔레꽃 천지로 화사하고 핏방울 똑똑 산딸기가 붉던 유월의 어느 날, 열 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가 다문 한 해도 못 다니고 연필 대신 호미를 손에 쥔 채 밭이나 메던 열네 살 언니는 부산이라는 먼 도시의 봉제공장으로 보내졌다. 정선 읍내로 두부를 팔러갔다 온 어머니는 언니를 하루아침에 잃고 처마 밑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나에게 5원짜리 엿 하나 던져준 뒤 부엌으로 쌩하니 들어갔다.
한 달 뒤 첫 봉급을 탔다는 누런 편지와 함께 나에게는 스케치북, 남동생에게는 자동차 장난감이 왔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는 빨간 내복이 왔다. 그러나 언니는, 언니가 심어놓은 뒤란의 봉숭아꽃이 빨갛게 피어나고 언니가 가꾸어 놓은 사립문 곁 코스모스가 살랑살랑 흔들려도 단 한 번 오지 못했다.
이듬해 1980년, 낡은 보따리 몇 개 싸들고 우리 식구들은 부산행 열차에 올랐다.
부산역에 도착해서 버스를 탔고 또 버스를 갈아탔고, 마치 피난민이 엉켜 사는 듯 보이는 열두 가구 판잣집 단칸방에 들어가 보따리를 풀었다. 금사동 산14번지, 뛰어 놀 마당도 그 곳에는 없었고 놀러 다닐 숲속도 그 곳에는 없었다. 단지 파란색 페인트 여기저기 벗겨진 녹슨 철대문과 구더기 바글거리는 공동변소 두 칸만이 냄새 구역질나도록 진동하고 있었을 뿐.
심장병에 천식 걸린 아버지는 곰팡이 핀 다락방으로 철저히 유폐되었고, 주야 식당 설거지를 하러 다녀야 했던 어머니는 콩쥐 같은 언니를 대우실업 기숙사에서 꺼내 단박 집으로 오게 했다.
신발공장 잔업을 마친 뒤 동생들에게 나누어 줄 국화빵 봉지를 가슴팍에 안고 옆 집 스무 살 전라도 못생긴 언니가 철대문 안으로 들어설 때, 우리 언니는 언제 올까 가난한 동네일수록 별은 많던 밤하늘만 심심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올 줄 모르고 식구들 모두가 단잠에 빠져 있는 새벽이 되어서야 머리카락에 실밥을 그대로 붙인 채 언니는 터벅터벅 집으로 왔을 것이다. 동생과 내가 학교에 갈 시간도 되기 전, 언니는 다 찌그러진 삼립빵 한 개를 똑같이 반으로 나누어 남동생과 내게 먹으라며 주었다. 그리고 몇 시간도 자지 못한 퀭한 몸을 일으켜 다시 공장으로 일을 나갔다.
겨우 빵 한 개가 눈꺼풀 고된 철야노동 간식으로 나왔다는 것을, 하물며 그 빵이나마 동생들 주려고 배가 꼬르륵 아무리 고파도 결코 먹지 않고 품에 가져왔다는 것을, 철없는 남동생과 내가 알 리 만무했다.
철야 일을 하고 새벽에 왔던 바로 그런 날도 언니는 저녁 7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왔다. 영락없이 언니 손에는 콩나물 50원 어치나 두부 100원 짜리가 들려있었다. 언니는 곧장 단무지 몇 조각만 찬장 안에 넣어놓고 식당으로 간 어머니 대신 무치고 끓여 아버지와 우리들에게 저녁밥을 해 먹였다.
언니는 자꾸만 기침을 했다. 모두 잠이든 밤에도 새벽에도 잦은 기침을 했다. 그런 언니에게 어머니는 호통을 쳤다.
‘저 어린년 목구멍에 늙은이 귀신이 씌었나. 아가리 안 다물어?’
어머니의 호통에 언니는 미친 듯 터져 나오는 기침을 참느라 이불로 입을 막고 고향에서 키우던 복실이 개처럼 킁킁댔다. 기침을 참을수록 가래 끓는 소리는 드글드글 더 났고 어머니는 언니의 머리통을 후려갈기며 죽일 듯 소리쳤다.
‘이 년이 어디 닮을 게 없어서 지 애비 가래까지 닮았나? 징그러워. 이 화상들 진짜로 징그러워.’
목구멍 안으로 삼키는 기침소리와 구더기 끓듯 하는 가래소리가 섞이고 울음마저 한데 또 섞인 채로 언니는 부엌 시멘트 바닥으로 쫓겨 나가 쭈그리고 앉아 밤을 샜다. 독한 감기에 걸린 언니는 식은땀을 줄줄 쏟으면서도 아침이면 공장으로 일을 갔고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고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새벽까지 공장에서 미싱을 돌렸다.
언니의 기침소리는 갈수록 자주 들려왔고 가래 끓는 소리도 더 크게 났다. 그러했으므로 언니를 다그치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철대문 밖에까지 나가도록 무서웠다. 어김없이 또 언니는 부엌바닥으로 쫓겨났고 아침이 왔다. 아침이 밝자마자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이 다 깨도록 소리를 질렀다.
‘저...저년이 이불에다가 피까지 쏟아? 아랫도리여 아가리여?’
열네 살 언니 부산으로 오는 기차 안에서 창자가 끊어질 것처럼 아프게 초경을 시작했다고 일기에 써 놓은 것을 우연히 보았으므로, 아무리 어린 나였지만 대충 짐작에 피의 흔적은 분명히 아랫도리라고 생각을 했다. 어머니가 당신의 달거리 때마다 빨래판에 대고 피 묻은 헝겊 빠는 것을 여러 번 보았으니까 아마 언니도 그런 걸 하는 거겠지 싶었다. 뻔히 알 텐데도 왜 어머니는 아가리냐고 윽박지르는 걸까?
언니의 기침과 가래 끓는 소리는 밤이 되면 더욱 더 심해져 갔고, 아침이 되면 이불에 여지없이 핏자국이 있었다. 무슨 감기가 그렇게 오래가고 게다가 어머니의 달거리는 한 며칠이면 끝났던 것으로 짐작이 되었는데 언니의 달거리는 참으로 유별나게 길다고 여겼다. 아무튼 그래서인지 몰라도 언니는 하루가 다르게 몸이 말라갔고 밥을 먹기만 하면 체했다.
‘아이고 내 팔자야. 큰딸이 살림밑천이라는 말 다 헛거여. 다락방에 누워있는 즈그 애비도 신물 나 죽겠는데 저것도 이렇게 빌빌거린다니. 아이고 내 팔자야.’
어머니는 소다를 한 숟가락 떠 언니의 입 안에 쳐 넣었다. 눈물 그렁그렁하며 언니는 소다를 받아먹었고 아버지의 피 묻은 이불과 언니의 피 묻은 이불을 찬물에 빨았다.
-언니야, 다시 기숙사로 돌아가. 여기서 살지 말고 빨리 기숙사로 돌아가.-
하지만 나는 이 말을 언니에게 입 밖으로 절대 하지 않았다. 언니가 없어지면 콩나물도 두부도 내가 무치고 끓여야 하니까. 그리고 아버지의 골마지 같은 더러운 이불도 내가 대신 빨아야 하니까.
잔업을 하고 밤이 늦어서야 퇴근해 온 언니는 방구석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어머니의 눈치만 살폈다. 구정물 잔뜩 묻은 옷 그대로를 입고 대자로 누워있던 어머니는 그런 언니를 쏘아보며 말했다.
‘복 나가게 시리 웬 눈치여? 지껄일 거 있으면 푸딱 지껄여.’
어머니의 말에 언니는 고개를 더 푹 숙인 채 한참을 있다가 어머니의 재촉과 성화에 하는 수 없이 도무지 떼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입을 열었다.
‘엄...엄마. 저...오늘 보...보건소에 갔었는데요.’
‘보건소? 보건소는 왜? 무슨 병이라도 걸렸다냐?’
‘그...그게...’
‘저년이 사람 복장 터지게 하는 데는 뭐가 있다니까. 빨리 안 지껄일래?’
‘그...그게...결핵이었는데...이제는 폐...폐결핵...이라고…….’
‘뭐? 폐병? 아이고...아이고...하다 하다가 이제 딸년이 돌림병에 걸렸네.’
‘..........’
‘아이고 조상님요. 우리 식구는 인제 줄줄이 다 송장되것소. 아이고 징그러워. 징그러워.’
‘..........’
그날 밤 언니는 가재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누웠고 어머니는 웬일인지 조용했다. 결핵이었는데 이제는 폐결핵이라고? 그렇다면 결핵은 고칠 수 있었다는 말인 건가? 그래서 이제는 폐결핵으로 병이 커졌으니 못 고친다는 말인가? 아니면 언니가 죽는다는…….
언니가 폐결핵에 걸렸다는 말을 들은 그날 후부터, 남동생과 나는 언니가 무슨 말을 시켜도 입을 가린 채 아무런 대꾸하지 않았고, 언니가 만들어 놓은 콩나물무침과 두부찌개도 먹지 않았다. 하다못해 철야근무를 마치고 언니가 가져온 삼립빵도 받아먹지 않았다. 어머니는 언니의 밥그릇과 숟가락 젓가락을 부뚜막 위에 따로 놓아두었고, 언니만 덮을 헌 이불을 어디서 구해왔다. 그리고 언니는 몸을 90도로 구부려야만 겨우 되는 아버지가 누워있는 다락방으로 기어 올라가 아버지와 같이 곰팡이 섞인 밥을 먹었다.
언니는 매일같이 약을 한 움큼이나 먹었다. 하지만 아무리 약을 먹어도 도무지 차도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노래를 부르듯 우리 식구들 줄줄이 이제 송장을 치를 거라던 어머니가 그래도 자식이라고 불쌍했는지 웬 약초뿌리며 짐승들을 닥치는 대로 언니에게 먹였다.
어느 날은 고양이 목구멍을 따다가 달여 먹였고, 또 어느 날은 독버섯을 특효라며 생으로 먹게 했다. 절대 복종할 수밖에 없는 서슬 시퍼런 어머니 앞에서 언니는 그것들을 사약처럼 꺼억 꺼억 받아먹어야만 했다. 저러다 언니가 눈이 멀겠지, 아니면 귀가 멀겠지, 또 아니면 벙어리가 되겠지, 강제로 먹여대는 어머니와 억지로 받아먹을 수밖에 없는 언니 옆에서 나는 이미 언니를 병신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언니는 끊임없이 각혈을 해대며, 기침과 가래를 뱉으며, 기운 하나 없는 몸으로 공장을 다녔고, 어머니는 저녁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을 가져와서는 약이라며 언니에게 먹였다. 아버지는 다락방에서 여전히 쿨럭 거렸고 남동생과 나는 언니로부터 전염되지 않으려 가능한 언니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나마 언니의 폐결핵은 좋아졌다 나빠졌다 수없이 반복하더니 조금씩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언니가 보건소에서 타온 약 때문 이였는지 어머니가 강제로 먹인 그것들 때문 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서서히 나아져 가고 있었고 우리도 언니에게서 옮지 않았다. 하지만 폐결핵의 후유증 탓으로 눈에 포도막염이 걸린 언니는 고름 나오는 눈에다가 연신 안약을 넣으며 눈썹을 뽑아냈다.
간지러워서 도저히 견딜 수 없다며 눈썹을 뽑아내고 또 뽑아내고 거의 문둥이처럼 언니의 속눈썹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던 어느 날, 어머니는 갑자기 쿵 하고 쓰러져 오른쪽 가슴팍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마구 뜯어내다가 끝내 혼절하여 병원으로 실려 갔다.
간암 말기였다. 언니가 먹던 고양이 목구멍도 독버섯도 다 소용이 없어진 시한부.
어머니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2개월도 채 되지 않은 겨울비가 얼음가시처럼 따갑게 내리던 새벽, 그렇게 눈 한 번 뜨지 못한 채 죽었다. 그리고 아버지도 얼마 후 죽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장례식을 연이어 치른 후 한참이 지날 때까지도 언니는 서럽게 울었다. 눈썹 하나 없는 언니의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그 날은 밤 9시도 훌쩍 넘어서야 언니가 집에 왔다. 집에 오자마자 tv에 정신이 팔려있던 나를 불러 앉혔다. 그리고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뜬금없이 내 두 손을 잡고 말을 했다.
‘내 꿈이 뭔 줄 아나? 너 서울대학교 보내는 거야. 우리 동생 공부 잘 하잖아. 비록 공장에서 미싱이나 돌리고 있지만 이 언니가 너만은 꼭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서울대학교에 보내고 말 거다.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알았지?’
그러며 종이가방에서 꺼내 내게 준 것은 동아전과와 참고서였다.
당시 나는 서울대학교가 대체 어디에 붙어 있는지 알기나 알고 이러냐고, 이깟 전과와 참고서 한 권으로 되는 줄 아냐고, 못돼 처먹은 내 주둥아리가 언니를 향해 피식거리기나 했다.
이 날 후 나는 언니에게 문제집을 사야 한다며, 혹은 공책을 새로 사야 한다며 거짓말로 돈을 뜯어냈다. 때마다 줄 나간 비둘기색 판탈롱 스타킹을 다시 겹쳐 덧신으면서도 언니는 내게 두 말 없이 꼬깃한 돈을 내어 주었다.
언니가 주는 돈으로 몰래몰래 떡볶이나 과자 사 먹을 줄만 알았지 공부는 제대로 하지 않았다. 언니에게 내 거짓말이 들킬 염려도 하등 없었다. 대충 친구에게 빌려 이게 새로 산 문제집이다 공책이다 하면 언니는 그런 줄 알았으므로. 성적표 역시 대충 위조하여 보여주면 문제없었다. 한글도 제대로 떼지 못한 무식한 언니였으므로.
언니의 기대와는 반대로 갈수록 엇나가기만 하던 나는 결국, 서울대학교 입학은커녕 대학교 들어가는 시험도 보지 않았다. 언니는 부엌 타일부뚜막에 앉아 펑펑 울었다. 쓰러질 듯 잔업과 철야를 반복하며 그 흔한 스타킹 하나 새로 사 신지 못하고 공장을 다녀 모은 제형저축통장을 움켜쥐고.
언니는 공장을 다닐 때 걸린 폐결핵을 앓고 난 후부터 심장이 나빠져 툭하면 한숨을 내쉬었다.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언니의 속눈썹 역시 자라나지 않았다. 나이와는 도무지 어울리지도 않게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노래를 십팔번으로 부르던 언니.
그런 언니는 몇 해 전 창밖으로 몸을 던져 버렸다. 언니 나이 지금 딱 내 나이인 마흔넷 이었다.
언니가 쓰던 조그만 책상 위에는 항우울제와 수면제가 가득했고 신경정신과라는 병원이름이 선명하게 적힌 종이도 있었다.
언니의 장례식을 마친 후 언니의 방 농 안 깊숙이 들어있던 낡은 일기장 몇 권을 찾았다. 일기는 무려 1978년부터 1989년까지 드문드문 쓴 것이었다.
-나도 빨리 시다에서 미싱사가 되도 싶다. 그러면 봉급도 지금보다 많아질 거야. 고향에는 지금쯤 찔레꽃이 피었겠지? 봉숭아도 아마 빨개졌을 거야.-
-반장님께 혼이 났다. 옆줄보다 내가 일을 늦게 한다며 무서운 얼굴로 마구 욕을 해댔다. 미싱사 언니도 덩달아 나를 나무랐다. 점심도 안 먹고 공장 담벼락에 기대어 울었다.-
-드디어 미싱사가 되었다. 그런데 자꾸만 기침이 나고 피를 토해서 보건소에 갔더니 폐결핵이라고 했다. 엄마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전염병이라고 나를 쫓아내겠지?-
-동생에게 줄 전과와 참고서를 사며 중학교 검정고시에 관한 책도 샀다.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너무 어려워서 무슨 내용인지 도통 모르겠다. 그래도 열심히 공부해서 중학교 검정고시를 쳐 봐야지. 고등학교 검정고시도 마칠 거야. 그 다음에는 대학교에도.
-그렇게 소원했는데 여동생이 대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다. 아마도 내가 남들처럼 더 해주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조금만 더 신경 써 주었더라면…….
언니의 일기장을 보자 찔레꽃 가시에 온통 찔린 듯 가슴이 아파왔다. 그랬구나. 그 시절 언니는 이렇게도 가엾고 불쌍했구나.
지금쯤 하늘나라 어디에선가 찔레꽃 내 언니, 단풍 고운 가을바람을 미싱에 돌리며 중학교 검정고시도 고등학교 검정고시도 벌써 끝내고, 나도 그때 못 간 대학교에 진학해 기침 없이 찔레꽃처럼 하야니 웃으며 마음껏 공부하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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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부문
당선작 심사평
제2차 <창작콘테스트> 수필부문에서 당당하게 당선작으로 이름을 올린 작품은 장미자 씨의「찔레꽃 내 언니」이다.
허리띠를 질끈 졸라매고 억척같이 일을 해야했던 과거 산업드라이브시대의 노동자들과 그들의 암울한 삶을 조명하고 있어 읽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하는 글이었다.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수필가 유미숙 / 수필가 정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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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당선자들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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