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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서 십년사 (2)
2. 고별 :
告別
참새 한 마리도 그냥 떨어지는 법이 없다고 하지요. 이제 모든 논쟁을 벗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때인 것 같네요. 논쟁은 논쟁을 부르고 신뢰감이 상실된 관계에서의 서로간의 해명은 면피 성 변명에 불과하여 쌍방에 상처만 남길 뿐 ,문제 해결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네요. 목사님과 저는 근본적으로는 다른 것이 별로 없어요.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 이랄까, 아니면 목회에 대한 철학이 다르다나 할까요. 누가 맞고 틀린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이라는 시각에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아요. 다만 문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너무 커져 버렸네요,
그냥 조용히 말없이 여러 성도들과 이별을 고하려고도 생각을 해 보았지만 그 동안 여러분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저희가 여러분들에게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몇 자 이별의 변을 고하기로 하였습니다. 제가 이 교회에 온지가 10년이 넘었네요. 이 기간은 부족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과분하게 받았고, 성도 여러분들로부터 도 과분한 사랑의 빛을 너무나 많이 진 세월 이었네요. 또한 이 십 년은 우리 한국교회의 잘못으로 만신창이가 된 예수님으로 인하여 심한 가슴앓이를 하면서 조금이라도 교회를 세상이 다시 신뢰하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로 만들어 주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조금이라도 회복해 보고자 몸부림 치면서 살아온 세월 이었노라고 自評 해봅니다.
이 교회 좋은 교회인 줄 잘 알고 있어요. 저는 목사님의 인격과 온유하고 순수한 성품에 대해서도 귀하게 생각하고 존경합니다. 목사님 성품이나, 또 다른 교회와 달리 재정의 투명성의 측면이나 , 제대로 훈련만 잘 시키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교인들의 영적인 자질 등 다른 교회가 가지지 못한 장점들이 많은데 走馬加鞭 이라, 한가지 더 추가해서 진정 하나님이 쓰실 만한 새로운 교회로 만들어 보고자 했는데 의욕이 과한 연고인지,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아니하였는지 원치 않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네요. 당사자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 하는 자 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지요 ( 롬 8:29 )
이번 문제는 화요 성경공부가 도화선이 되긴 했지만 사실은 이것이 본질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목회의 방향 또는 철학의 차이라고 보아야 겠지요 . 특히 사모의 역활에 대한 생각은 저와 목사님과의 괴리가 너무 컸어요. 그런데 이것은 선택의 문제이지 누가 옳고 ,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간에 차이의 문제인 것이지요. 일반적인 생각이나 견해의 차이는 좁혀 질 수도 있고 타협하고 바꾸어 갈수도 있지만 철학이나 방향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해소 하기가 어렵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서로간에 윈.윈이 아닌 에너지 소모로 갈 뿐이라고 생각됩니다.
무엇보다도 목사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힘들어 하시고 우리 역시도 그 동안 함께 하는 것이 상당히 힘이 들었다는 것이 솔직한 이야기가 되겠네요. 저와 저의 아내는 지난 9월 7일 부로 교회 내의 모든 직분에 대한 사임의사를 밝혔고 목사님도 우리의 사임 건을 절차에 따라 조속히 처리해 주시기로 회신을 받았습니다. 조금 서두른 감이 있지만 바로 후반기 사역이 시작 되는 시점이라 , 교회 후반기 사역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 하기 위하여 좀 서둘렀습니다. “함께 함” 의 중요한 의미는 서로간의 부족한 부분이 보완되고 , 장점이 합쳐서 시너지 효과가 나는 것인데 서로간에 불필요한 갈등만 일으키게 된다면 오히려 따로 가는 것도 하나의 해법이 되겠지요. 사도행전에도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 하면서도 마가 문제로 서로 격렬히 논쟁하고 결국은 서로 갈라져 따로 선교 여행을 떠난 바울과 바나바 사건이 있었지요. 꼭 같이 가는 것 만이 하나님 앞에 유익한 것 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와 함께 할 수가 없다는 목사님의 뜻이 밝혀진 이상, 교우 여러분들께서도 이제 저희들을 조용히 놓아 주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서로 비난하거나, 논쟁 하거나, 날카로운 멧세지 보내고 하지 마세요. 어떤 의견을 가졌던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서로가 받아들이세요. 실망하신 교우들도 많으실 텐데 참으로 미안 합니다. 조속히 상처가 치유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이런 문제가 불거지면 교회에 처음 나온 어린 성도들이 가장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많은데 이런 분들의 신앙에 교회가 좀 더 세심하게 신경을 써 주시면 좋겠네요. 會者定離라, 만나면 헤어질 날이 있다는 뜻이지요. 이것이 인간사 이겠지요. 또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요. 성도 여러분. 그 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사랑합니다. 주님 안에서 늘 강건하십시요. 2007.9.13
우리는 “ 고별 “ 이란 제목으로 된 이 한 장의 메세지를 교회 홈피에 올리고 10년 이상 모든 것을 바쳐 섬기던 교회를 조용히 떠났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제 개인적인 이야기 일수도 있지만 너머서 교회의 탄생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라 생각되고 , 또 이 교회에서의 경험이 새 교회를 설계 하는데 많이 녹아 있다는 점에서 한번 쯤 정리를 하고 넘어 가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거의 쫒겨 나다시피 나온 교회였으니까 우리에게 많은 상처와 여한을 남긴 교회였지만 또 이 교회에서 지금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평생의 신앙 동지들을 만났으니 우리의 인생 여정에 있어서 참으로 잊을 수 없는 교회이기도 합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역사는 기록자 중심의 주관적 견해일 수 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전 교회와의 결별 사건도 역시도 제 중심의 견해 일수 도 있고, 본능적으로 제게 유리한 방향으로 쓸 수도 있다고 생각 합니다. 이런 한계성을 인정 하면서도 지금 우리 교회에도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최대한 객관적으로 기록 해 보겠습니다.
이 교회는 1997년 말 우리가 싱가폴에서 3년간의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일산에 정착하면서 다니게 된 교회입니다. 성도 수가 약 200여 명 . 담임 목사님이 처음 사모님과 함께 개척하셨고 이때는 종교 부지에 건축까지 완료하여 자가 건물을 가지고 있는 상당히 안정된 교회였지요. 그리고 이 교회에서 약 3년 후인 2000년에 저는 장로로, 아내는 권사로 피택이 되어 임직을 하게 되었고, 정말 열심히 이 교회를 섬겼습니다. 목사님도 상당히 인격적 이신 분이셨고 교회의 분위기도 그런대로 괜찮았습니다. 이 교회는 그 당시 제왕적 담임목사들의 재정 전횡이나 교회에 대한 권력을 남용 등의 문제는 없었습니다. 담임목사가 처음부터 개척하여 이 정도 까지 성장을 이룬 교회로서 , 담임 목사님도 이 정도 선에서 욕심 부리지 않고 적당히 안주 하시는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이런 류의 교회가 가질 수 있는 몇 가지 문제는 잠재되어 있었습니다
초기 개척역사에서 담임 목사와 함께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계속 함께 하고 있었던 개척 멤버들이 호위 무사처럼 담임 목사님의 주위에 포진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들은 서로가 육신의 패밀리들로 연결되어 있어서 강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목사나 교회에 대한 불평이나 반대 의견을 무조건 분쇄하는 것이 목사님을 지키는 길이고, 하나님의 역사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개척 멤버가 아닌 외부에서 들어온 제가 목사님과 생사고락을 같이한 분들을 앞서서 3년 만에 이 교회 두 번 째 장로로 피택이 되자 그 때부터 이들은 저라는 존재에 대하여 은근한 경계가 시작되었습니다. 나중에 이 부분이 문제를 확산 시키는데 일조를 하게 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만 , 저는 가급적 기득권, 즉 주류가 아닌 비주류 편에 많이 서 있었던 편입니다. 교회에서도 목사가 아닌 성도들 편에 서려는 노력을 의도적으로 많이 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목사나 장로에 비해서 늘 “을” 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당시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대한 불평이나 문제 제기를 저를 찾아와서 하는 빈도가 점점 많아 지게 되었고 저는 자연스럽게 당회원으로서 교인들의 불평과 교회에 대한 건의 사항을 수렴하여 당회에 올리는 민원 창구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회에서 목사님에게 쓴 소리도 자주 하는 편이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혁신적이라고 할 수 담임 목사 연봉제를 주장 하기도 하고 , 표절 설교라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문제 제기도 하였습니다. 다른 당 회원들은 좋은소리만 하는데 반하여 악역만 계속하는 제게 아무리 마음씨가 좋은 목사님이라도 좋은 감정이 있을 수 없었겠죠. 특히 “호위무사들”이 목사님께 제공한 저에 대한 허위, 날조된 정보들이 목사님과 저 사이에 불신의 골을 깊게 하는데 일조를 해 온 것을 제가 교회를 나오고 난 뒤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나올 무렵에 목사님과 주고 받은 이 메일을 보니까 이런 구절도 있었네요
( 중략 ) 또한 우리 교회 현실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도 저와 목사님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저는 현장에서 교인들과 부딪히면서 듣고 느끼는 정보를 통하여 현상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고, 목사님은 몇몇의 한정된 사람들로부터 듣는 제한된 정보를 통하여 현상을 인식하고 있는 것에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것이 제가 그 동안 계속해서 목사님이 다양한 성도들을 만나보고 ( 특히 의견을 달리 하는 남자 성도들 ) 그들의 소리도 균형 있게 들어보시라고 수없이 건의해 온 이유이기도 합니다 ( 중략 )
두 번째는 이 교회에도 비선 실세가 있었지요. 그것은 사모님의 존재 였습니다. 사모님은 목사님과 함께 초창기의 그 어려운 시절을 온갖 고생을 감수하면서 오늘의 교회로 까지 성장 시켜온 공신이기 때문에 교회를 거의 자기 소유처럼 여기는 분 이셨죠. 그 주위에도 사모님의 의견에 거의 무 조건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순종으로 여기는 분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저는 비선 실세의 가장 큰 폐해가 공조직의 무력화로 보고 있습니다. 사전에 결정권을 가진 공조직에 자기의 의견을 충분히 개진 하고, 권한을 가진 공조직으로 하여금 결정 하게 하는 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그러나 아무 공식적인 권한이 없는 분이 공조직이 결정한 사실을 사후에 뒤집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자주 발생하게 되면서 사모와 그 당시 총 여전도회 회장 이었던 우리 아내 사이에 한랭한 긴장감이 형성되었고 , 우리는 내외가 함께 주류들에겐 점점 미운 오리 새끼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때의 경험이 하나의 교훈이 되어 지금은 거의 유야 무야 되어 버렸지만 너머서 교회를 시작할 때 “사모”라는 존재를 별도로 인정하지 않고 공조직에 편입시켜 , 사모에게도 집사의 직분을 주고 , 그 직분에 맞는 권한 행사를 하도록 제도화 했었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 특히 자기 목회에 자신감이 결여된 분들이 이런 두려움에 많이 빠지지요. 누군가가 자기의 자리를 노리고 쿠데타를 일으켜 죽도록 고생 하여 세운 교회가 그들의 손에 넘어갈 수도 있다는 소설 같은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정치 판과 마찬가지로 이런 분들은 늘 근거 없는 불안에 떨다가 후계자나 2인자를 키우지 않는 것은 물론 그런 기미가 보이면, 어릴 때 삯을 잘라 버리는 방법을 씁니다.
자기보다 능력이나 영향력이 많은 사람이 생기면 그들을 교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내 보내는 것입니다. 해고 하는 것이지요. 그 대상은 주로 부목사 들이었습니다. 부 목사는 담임 목사에게 인사권이 있으니 내어 보내면 그만이지만 반면에 장로는 교회 밖으로 내 보낼 수가 없으니 성도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장로들은 그 영향력을 축소 시키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 중에 하나가 교회 내에서 교인들과 성경 공부를 못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파벌이 조성 되느니, 교인들끼리의 화합에 방해가 되느니 어쩌니 하면서 장로가 성경을 통하여 교인들과의 자연스럽게 접촉 할 수 있는 창구를 막아 버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많은 담임목사님들이 장로가 교인들과 성경을 공부하는 것을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당시 이 교회에서 제가 담당하고 있던 화요 성경 공부의 폐지가 수면에 올라오게 된 것이 바로 이런 문제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교회를 나오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 교회에 갔을 때 교회에 성경공부 모임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단지 구역 장들을 대상으로 목사님이 교재를 가지고 미리 준비 공부 해주는 형식적인 성경 공부 모임 단 한 개 뿐 이었습니다.
제가 장로가 되고 난 후에 교인들에게 성경 공부 반을 개설해 주어서 교회가 교인들의 영적 성장과 신앙에 구체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건의를 하였고, 결국 목사님은 이 건의를 받아 들이셨지요. 각 요일마다 한 반씩 , 신.구 약을 골고루 배분하여 4개의 저녁 성경 공부 반이 개설 되었습니다. 목사님과 부목사, 그리고 저와 또 다른 장로 한 분이 강사가 되고 교인들은 자유롭게 4 개 반 중에서 선택을 하여 성경을 공부를 할 기회를 열어 준 것입니다. 그 때가 2002년쯤으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같이 출발 했지만 3개 성경 반은 희망자가 점점 없어지면서 얼마 가지 않아서 자동적으로 폐강이 되고 제가 인도하던 성경공부 반 만이 제가 나올 시점에 5년 이상이나 계속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모님의 눈에 영향력의 확대라는 관점으로 비추어지게 되면서 , 제가 나올 때 쯤은 이 성경 공부 반을 와해 시키기 위한 사모님의 방해 공작이 다 방면으로 시도 되고 있었습니다.
매 주 화요일 저녁 8시부터 개설 된 이 반에 제가 정말 올인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성도들도 열심이었습니다. 서소문에서 퇴근하여 전철로 마두 역에 내리면 교회까지 성경공부시간을 맞추기가 늘 빠듯했습니다. 역에서 내리면 교회까지 약 십 분거리. 겨울에는 붕어 빵 한 봉지 , 일반 계절에는 카스텔라 한 봉을 사서 교회까지 걸어 가면서 먹고, 바로 성경 공부를 시작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피곤 하다거나 힘들다는 느낌을 가진 적은 없습니다. 성도들의 너무나 갈급한 심정으로 이 공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겐 힘은 들었지만 교우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제공 한다는 의미에서 참으로 보람과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2008년 그 다음해 사역을 위하여 당회가 열렸고, 장로들의 교회 업무 분장이 협의가 시작 되었습니다. 회의라고 해 봐야 목사님이 미리 짜가지고 온 각 당 회원의 업무 분장 안 을 통보하는 형식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목사님께서 뜬금없이 화요 성경공부 폐지안을 불쑥 이야기 하신 것입니다. 5년 동안 이나 아무 말썽 없이 잘 진행되고 있는 성경공부를 당사자인 저와는 사전에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폐지안을 내 놓은 것입니다. 파벌 조성의 우려가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는 것에 너무나 화가 났었지요. 이때부터 목사님과 저 사이에 목사님의 안을 철회 하라는 주장과 철회 할 수 없다는 주장이 첨예하게 부딪힌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제가 목사님께 보낸 이 메일의 한 구절입니다.
( 중략 ) 변명 아닌 변명을 좀 하겠습니다. 화요 성경공부는 목사님이 생각하시는 대로 저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도구가 아니라, 학창시절에 사도행전 Q.T를 하는 도중에 ( 행 28 : 30. 31 ) 하나님께서 제 가슴에 선명하게 새겨주신 필생의 사명입니다. 사도 바울이 꿈에도 그리던 선교지 로마에서 연금 상태에 있는 죄수의 몸으로 셋방에 유하면서 이태 동안 자기에게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영접하고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던 그 장면에 가슴이 뜨거워져서 일생 동안 말씀을 가르치는 이 일에 헌신하기로 서원한 적이 있습니다. 1세기 초 바울 한 사람에 의하여 이태 동안 가르친 이 말씀사역이 AD 313년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는 거대한 열매가 되어 나타난 것을 보고 이것이 말씀의 능력 이구나 . QT를 통하여 제게 전해진 이 충격을 통하여 인생을 변화시키고,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사역이나 일이 아니라 말씀 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부터 저는 제게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심는 이 사역을 어느 한 순간도 중단 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열매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도 저는 지금까지 한국과 세계 곳곳에 흩어져 헌신하는 저의 제자들을 통하여 생생하게 목도하고 있습니다. ( 중략 ) 당회원이 된 이후에도 저는 파벌과 라인이 판을 치는 정치가 싫어서 노회에도 첫 해에는 멋모르고 참석했지만 그 다음 부터는 직장을 핑계 대고 한번도 참석하지 않았던 것을 목사님은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셨는지요. 제가 또 지금 제 파벌을 만들어서 어디다 쓰겠어요. 저는 몇 년 후에 퇴직금 받은 것 떨어지면 미련 없이 낙향 할겁니다. ( 중략 )
뒤에 알았지만 이 때는 벌써 우리를 교회에서 내 보내야 하겠다는 것을 사모님과 합의를 하고 목사님도 배수의 진을 친 상태였습니다. 그만큼 저의 확대된 영향력에 대하여 모든 주류 세력들이 견제와 경계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이 교회에서의 사역이 불가능 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래도 차마 결단을 못 내리고 고뇌의 밤을 보내고 있는 우리 부부에게 이미 사모님이 여러 가까운 사람들에게 “ 장로님 댁은 목사님께 도움이 안되니 좀 나가 주었으면 좋겠다 “ 라는 말을 흘리고 다닌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우리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 말이 우리의 결단을 앞당기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에게 아내와 제가 모든 직책에 대한 사임서를 제출 하였습니다. 목사님도 한 번의 만류나 전화도 없이 절차에 따라 조속히 처리 하겠다는 이 메일 한 장으로 정리를 하셨지요. 10년의 세월이 마감되는 순간 이었습니다. 그 이 메일 말미에 목사님이 이런 콤멘트를 다셨습니다. ( 중략 ) 장로님 , 교회는 선교 단체와는 다른 것입니다. 장로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과 한국교회를 걱정하는 마음이 많으신데 그 비젼을 이루시려면 제가 주제넢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제라도 신학을 하셔서 목회를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중략 )
그러나 문제는 그 후에 표면화 됩니다. 제직회에서 목사님에게 우리의 떠남에 대한 경위설명의 요구가 이어 지고 , 그 과정에서 목사님의 이 메일 한 장으로 10년이 넘게 봉사한 장로를 내어 보낸 것이 밝혀졌고, 더구나 장로의 사임에 대하여 그 사임을 철회 시키기 위한 심방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교인들의 반발이 일어나게 되고, 이런 과정에서 위기의식을 느낀 호위무사들과 교인들간에도 여러 가지로 찬반 양론의 공방이 벌어지게 된 것 입니다. 그래서 제가 홈피에 양자 간의 부질없는 공방을 멈추시라고 말씀 드렸던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의 사임과 함께 교회를 떠남으로 모든 문제가 일단락 될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처음 에는 목사님도 우리만 떠나 보내고, 시간만 좀 흘러가면 모든 것이 종결 되고 정상화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홈피에서도 여러 가지로 찬,반 공방이 벌어지긴 했지만 참여자의 수가 그렇게 많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홈피의 공방에 참여한 자는 소수였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거대한 쓰나미가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사실 미래에 대하여 어떤 생각도 , 계획도 없이 무작정 교회부터 나와 버린 우리는 이런 소동들이 있는 줄도 모르고 일단 광성 교회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예배만 드리고 돌아오는 신앙생활을 시작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온 이후로 교회는 더욱더 격랑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고별 메시지를 남기도 교회를 떠난 것이 기폭제가 되어 시간이 흘러 가면서 점차 교인들의 이탈이 가속화 되기 시작된 것입니다. 전 교인의 3/1이 넘는 60-70명의 이탈이 생겨 난 것이지요. 의외의 사태에 당황하신 목사님은 어느 날 저녁에 저의 집에 심방을 오셔서 자기가 잘 못 생각했다고 사과를 하시고 다시 돌아와 달라고 우리의 합류를 권하셨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 교인들 중의 일부는 다른 교회를 찾아 가고 , 나머지 교회를 정하지 못하여 헤매든 사람들 중의 많은 분들이 나중에 너머서교회를 시작 하게 됩니다. 저는 이 교회에서 얻은 교훈을 너머서 교회 창립 과정에 많은 부분 반영 하게 됩니다.
제가 이 때에 얻은 경험은 집단 지성에 대한 신뢰입니다. 선거가 끝나면 흔히 신문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유권자는 현명 하였다. 그렇습니다. 민중이 어리석어 보여도 어쩌면 어리석다고 하는 사람들 보다 도 훨씬 더 똑똑합니다. 너머서 교회의 의사 결정 구조는 집단 지성에 대한 신뢰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 이겠지요. 대부분의 신도들은 어떤 일에 대하여 자기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 하는 사람보다 침묵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나 표현 하지 않는다고 그들이 생각마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침묵 하고는 있지만 사물을 정확히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모님이나 호위 무사들이 저에게 대하여 무수한 흠집내기를 시도 했지만 성도들은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후에 너머서를 시작 할 때, 이 경험이 바탕이 되어 성도들의 생각을 기반으로 하는 교회 운영, 즉 성도 민주주의를 과감하게 도입하였습니다.
교회 내 목사님과 몇몇 리더들의 생각을 기반으로 교회를 운영해 가는 것보다 속도는 느리더라도 성도들의 일치된 생각을 기반으로 교회를 운영해 가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고, 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너머서가 처음 시작될 때 안목사님과 저는 우선 목사와 장로가 가지고 있던 교회에 대한 의사 결정권을 먼저 내려놓기로 한 것입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교인들과의 치열한 토론과 소통을 통하여 , 때로는 설득과 양보를 통하여 어떤 일을 추진 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의사 결정구조가 대부분 3/2 이상의 찬성으로 되어있는 이유 입니다. 또3/2 이상의 동의라는 점에서 우리 교회는 단순 과반수로 의사를 결정 하는 일반 민주주의 와는 차별성이 있습니다. 다만 성도 민주주의는 교인들의 성숙도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 또한 교인의 성숙도가 단기간에 이루어 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교회는 천천히 가자는 것이고 , 속도 보다는 방향성을 중요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어 오고, 또 지금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방향이 실패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여전히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에 대해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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