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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형문화재 실태
가. 거진어신제(巨津漁神祭)
1) 유래
거진(巨津)은 약 500년 전에 한 선비가 이곳에 들렀다가 산세가 클 "거(巨)"자와 같은 형국이며 거부장자(巨富長者)가 불어날 것이라고 하여 거진리(巨津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옛 기록(古記)에는 거탄진리(巨呑津里)라 하였으며, 1915년 행정구역 조정으로 수외리(水外里)가 거진리(巨津里)에 편입되었는데 구.수외리(현 거진10,11리) 앞에 있는 자산천이 바다와 멀지 않은 곳에서 양분(兩分)되어 이 마을 앞에서부터 해안 안쪽에 있는 원래의 도로 옆을 따라서 거진1리 선착장까지 약1㎞를 길게 돌아서(우회) 흘렀기에 수회리(水廻里)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이렇게 형성된 거진항(巨津港)은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동해의 중앙에 위치해 1960년대∼1970년대 겨울철 명태, 여름철 오징어의 주산지로서 많은 어업인들이 만선의 조업을 기대하며 철새처럼 모여들었다. 이에 따라 조업중 해난사고가 잦아 어업인들에게 풍어와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 일상의 소망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생활 속에서 민간신앙인 비손 또는 고사, 푸닥거리 등이 자연스럽게 성행하였고, 마을단위 치성 굿으로 규모가 점차 크게 변해 오늘 어신제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특히, 옛날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죽은 남편을 언덕 위애서 기다리가 지쳐 죽은 젊은 여인의 외로운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서낭당을 짓고 여기에서 제의식을 올리던 것이 지금의 거진어신제이다.
2) 특징과 의미
현재까지 어촌지역에 전래되는 대표적인 민간신앙(民間信仰)이다.
어신제의 기본적인 제의절차는 유형화되어 있고, 무가(巫歌), 무무(巫舞), 무복(巫服) 등은 정형화되어 있지만 환경과 여건, 무당의 판단에 따라 임의적으로 적용되기도 한다.
거진어신제의 주사(主祀)는 여성황으로서 남편을 기다리다 죽은 젊은 여인의 외로운 영혼이 마을의 풍어와 안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된 것이다.
어업인들은 생활터전인 바다 속에서 자연에 대한 남다른 경외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과 신에게 의지하려는 의식이 높았기 때문에 치성과 굿과 같은 민간신앙이 어촌지역에 크게 발달한 것이다.
거진어신제는 용왕신과 성황신에게 풍어와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 전형적인 어촌지역의 마을단위 굿이다.
3) 내용
매년 음력 정월 15일에 거진1리에 위치한 성황당에서 거진 항포구에 선적을 둔 전체 어업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신과 토지신, 여역신 등 삼신에게 마을의 풍어, 제액(除厄), 조복(調伏)을 염원하는 토속 신앙제를 올린다.
여성황신에게 바치는 많은 음식·술·옷·지전(紙錢)장식을 차려 놓고 신을 청하여 무당의 춤·노래·축원·촌극·묘기·재담 등으로 구성된 종합적인 제의식으로 진행된다.
아침부터 시작하여 밤중까지 연3일간 거행되는 굿마당에는 별신무와 강신무가 있으며 이들이 펼치는 춤과 노래, 빠른 장구리듬과 징, 꽹과리 등의 굿거리 장단은 문화시설이 적은 이 마을 남녀노소에게 좋은 구경거리가 된다. 제사는 제주(祭主 )가 주관하는 제례와 무당들이 성황신과 용왕신을 모시는 당맞이굿에서 가장 중요한 성황신을 함께 모셔다가 그들을 위로하는 순서로 진행된다.
4) 전승실태
거진어신제는 1983년 강원도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하였다.
거진어신제는 어민들의 생업 속으로 각종 치성과 굿거리는 서구문화에 의해 미신으로 밀려나긴 했지만 마을 어촌계를 중심으로 매년 어신제를 계속 올리고 있어 주민들에게 토속적인 민간신앙으로 비교적 잘 전승되고 있는 무형문화이다.
1990년대까지는 관내 무속인들이 많아 어신제를 주도했지만 최근 그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다른 지역의 유명 무당을 초빙하여 매년 제의식을 지내고 있다.
나. 삼포지정(地釘)다지기
1) 유래
삼포마을은 옛날에는 순포리(蓴浦里)라고 하였는데 순포리(荀浦里)라고도 하였으며, 지금으로부터 520년전(1415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순포 서북방 300m지점에 3㏊의 넓은 늪(개)이 있었는데 그 주위에 풀이 무성하여 풀이름 "순(荀)"자에 호수"포(浦)"자를 써서 순포라고 불렀다. 현재 그곳은 논으로 변하고 인근 산야 및 집 주위는 대나무가 무성하다. 후에 포월, 황포, 순포 등으로 부락이 분산되어 행정구역 분할시 삼포(三浦)로 개칭되었다.
지정다지기의 전래 시기는 명확치 않지만 마을 주변의 늪지 등 지형적인 영향으로 땅이 견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을 짓기 위해 집터를 다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따라서,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와 동네사람들과 함께 밤늦게까지 횃불을 들고 집터 다지는 일을 했던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2) 특징과 의미
삼포지정다지기는 일과 노래가 잘 어우러진 고성군의 대표적인 생업속(生業俗)이다.
지정(地釘)다지기는 호수와 늪이 있어 땅이 견고하지 못해 집터를 단단하게 다져 가는 옛 풍습을 재현한 것이다.
힘겨운 일을 하면서도 노동의 피로를 덜기 위한 방언 섞인 소리꾼의 구성진 노랫말과 지정다지는 일꾼들의 후렴을 통해 공동체 의식을 일깨우고 생활 속에서 조상들의 상부상조 정신과 협동심, 삶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풍습의 노동과 노동요라고 볼 수 있다.
소리꾼의 즉흥적인 노랫말과 사설(辭說) 속에는 서민생활의 희로애락과 해학, 세시풍속이 함께 녹아 있어 시대상황과 순박한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민속자료가 평가된다.
3) 내용
먼저 집사의 주도하에 경건한 마음으로 지신(地神)에게 제례의식을 갖는다. 그리고, 소리꾼의 선창과 후렴으로 지정다지는 일꾼들의 힘과 흥을 북돋우는 농악을 곁드린 지정다지기를 시작한다.
선소리꾼의 징소리와 노래가락에 맞추어 지정다지는 일꾼들이 잡은 줄을 당겼다 놓으면 돌이 떨어지면서 땅을 조금씩 다져나가는 것이다.
출연인원은 남자 50과 여자 8명으로 모두 58명이며, 집사 2명, 선소리꾼 1명, 지정잡이 30명, 농악패 17명, 아낙네 8명으로 구성된다.
<노랫말>
가을철이 얼른 되니
저 농부 거동 보소
낫자루 꽁무니 차고
검정 소 앞세우고
이리 툭 쳐 썩나가니
나갈 적엔 빈말이요
돌아 올 제 찬 말이라
말마 같은 상노놈은
질빵을 걸머 저들이고
비오기 같은 종년들은
따바리 받혀 드리니
앞마당 노적이와
바깥마당 노적이라
노적갈이 좋을 시고.
4) 전승실태 및 과제
1984년 강원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해서 우수상을 받았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집터 다지는 우리들의 옛 모습으로 마을 자체에서 보존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선소리꾼에 의해 후렴으로 이어지는 노동요는 최근 죽왕면 삼포1리 어재조씨(2000년 1월 사망), 어명례씨(2001년10월 사망), 김기권씨(2002년 8월 사망) 등 소리꾼들이 노환으로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면서 후대들에게 이어지지 않고 있으며 이농현상과 노령인구로 인해 그 전승이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마을단위로 보존할 수 있도록 지원대책이 절실하고 정례적인 재현행사를 통해 보존 전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 삼포혼인잔치
1) 유래
혼례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행하여졌던 고유의식이며, 여기에 고려말 주자학(朱子學)이 전래되면서《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해 유입된 유교적 의식이 혼합된 것이다. 이러한 혼인잔치는 인생의 통과의례(通過儀禮)인 사례(四禮 ; 冠·婚·喪·祭) 중의 하나로, 생활공동체 속에서 남녀 두 사람의 결합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는 의식을 축하하는 것을 잔치로 승화시킨 것이다.
잔치의 기원은 고대 농경사회의 제천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사람들이 농경생활에 익숙해지며 엄격한 자연의 질서에 눈을 뜨게 됨으로써 함께 즐기는 것이다.
2) 특징과 의미
삼포혼인잔치는 일반적인 혼례의식과 마을잔치가 결합된 민속이다.
자연발생적인 혼례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유교문화가 사회를 지배하면서 혼례는 유교적인 의식으로 정형화되었다.
혼례의 의식과 절차는 일반적으로 다른 고장과 큰 차이가 없으나 삼포혼인잔치는 일상생활 속에서 점차 잊혀져 가는 통과의례인 전통혼례의식과 사회공동체의 풍습을 보여주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고, 축하잔치를 통해 삶의 지혜와 온정을 나누고, 화합과 상부상조의 정신, 풍요와 다산, 그리고 그러한 사회 질서에 순응하는 삶의 모습과 습속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3) 내용
마을에서 계속되어 왔던 인생의 통과의례 중의 혼례를 재미있게 재현하고 있다.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행하는 절차로서 초행·전안례·교배례(交拜禮)·합근례·신방(新房)·동상례(東床禮) 등이 있다.
초행은 혼인날 신랑 일행이 신부집으로 가는 것을 말하며 신랑 외에 조부(祖父) 등 근친 3∼4명이 동행한다. 신부 측은 신랑 일행을 신부집 근처에 정방(일명 사초방)에서 맞이하여 간단히 대접하는데, 여기서 신랑은 사모관대(紗帽冠帶)하고 목화(木靴)를 신고 신부집으로 가서 혼례를 치르게 된다.
신랑은 신부의 혼주에게 신부를 맞이하여 부부로서 의리와 정절을 지키겠다는 서약의 징표로 기러기를 전하는 전안례를 치른다.
이어 신부와 마주보고 2차례에 걸쳐 절을 주고받는 교배례와 술잔을 나누는 합근례가 행하여진다. 합근례는 술잔을 사용하여 3번에 걸쳐 행하는데, 술을 교환함으로써 하나가 된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의식이다.
식이 끝나면 하객들이 대례상(大禮床) 위의 밤·대추 등을 신랑 주머니에 넣어주는데, 밤은 자식을 많이 낳으라는 뜻이며, 대추는 늙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다.
저녁때가 되면 신방을 꾸미고 첫날밤을 보낸다. 족두리는 반드시 신랑이 풀어주어야 하며, 촛불은 입으로 불면 복(福)이 달아난다고 하여 신랑이 옷깃이나 이불자락을 이용하여 끈다. 신방 엿보기라 하여 가까운 친척들이 신방 창호지를 뚫어 엿보는 무례한 풍습이 있으나 불이 꺼지면 물러난다.
다음날 아침 가장 먼저 장인, 장모와 가까운 친척들에게 먼저 인사를 올린다. 점심때를 전후해서 신부 측 젊은이들이 신랑 다루기를 하는데, 먼저 신랑을 대들보에 거꾸로 매어 달아놓고는 신부에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한다. 이 때 신부가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몽둥이로 신랑의 발바닥을 때리는데, 그 정도가 지나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혼례가 끝난 다음 신랑이 신부집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데, 이를 동상례라고 한다. 혼례 속에는 동상례(東床禮)는 의례가 아니고 혼인잔치를 축하하는 재미있는 놀이로 연출한 것이다.
4) 전승실태 및 과제
1985년 강원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품했던 작품이다.
1970년대까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습이었다. 하지만, 최근 유교의 복잡한 의식과 절차를 기피하는 신랑 신부들이 서구적인 예식장에서 편리한 서양식으로 대부분의 혼례를 치르게 됨으로 전통혼례의식은 우리 주변에서 점차 사라지고 다만, 서양식 혼례(결혼식)이 끝나고 신부가 신랑의 시댁 조상과 어른들에게 인사하는 폐백은 일부 전통의례가 아직 남아 있는 흔적이기도 하다.
고유한 옛 삶의 지혜와 풍습이 담긴 전통혼례의식을 무형문화 유산 보존차원에서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정례적인 재현행사를 통해 체계적으로 보존하도록 지원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라. 명파리돌다리놓기
1) 유래
민통선 마을로 동해의 맑은 물과 긴 해안선의 하얀 백사장을 낀 아름다운 경관 때문에 명파리로 불리우게 되었으며 광산천(鑛山川)과 명파천(明波川)이 흘러 마을이 형성되었기에 전답이 비옥하고 각종 어족이 풍부하다.
이처럼 광산천과 명파천을 주축으로 많은 지류가 흐르고 있어 우기가 되면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마을을 양분하여 주민의 왕래가 불편하여 큰돌을 목도로 운반하여 영구적인 돌다리를 놓았다. 이러한 행사는 오랜 옛날부터 해방 전 까지 행해 졌으며 지금도 쌍개미 등의 마을에 여러 개의 돌다리가 남아 있고 건봉사 능파교 가설 때도 이러한 방법이 이용되었다고 한다.
이 돌다리놓기는 마을이 형성된 이후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계속되어 왔던 것으로 노동요는 구전에 의해 지금까지 전해 진 것이다.
2) 특징과 의미
돌다리놓기는 사회공동체의 협동심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노동요(勞動謠)다.
민속학적 가치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러한 노동요는 영북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민속자료로 평가된다.
명파돌다리놓기와 같이 무거운 돌을 옮기는 힘겨운 작업과정을 통하여 마을 주민들은 스스로 사회공동체 구성원으로서 협동정신과 상부상조 의식을 길러왔던 것이다.
하천을 가로지른 돌다리를 놓기 위해 선소리꾼의 즉흥적인 소리 메김에 따라 목도하는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쳐 일사불란하게 돌을 옮기는 과정에서 노동의 피로를 덜기 위해 부르는 노래와 후렴이 명파돌다리놓기의 절정을 이룬다.
여기에서 "허야차" 함께 힘을 모으기 위한 기합소리, "하자"는 빠른 동작을 소리에 맞춰 움직이게 함으로서 일의 능률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허기영차"는 신체에 무리가 없도록 천천히 힘을 내리는 동작을 소리에 맞춘 것으로 보여진다. 행동에 따라 사설(辭說)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목도는 기중기와 중장비가 없었던 산과 오지에서 채취한 목재와 같이 무거운 짐을 옮길 때도 여러 사람이 이러한 목도를 함께 이용했다고 전한다. 구성진 노동요를 악보에 채록하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다.
3) 내용
명파돌다리놓기 순서는 제액 조복을 기원하는 지신제가 마을주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되고, 다리를 놓기 위해 땅을 고르고 기초를 다지면서 발목하여(필요한 돌을 엮어) 목도틀을 만든다.
그 다음 받침돌을 2인조, 4인조, 8인조의 목도로 운반하면서 큰 반석에 64인조 목도로 소리꾼의 소리에 맞춰 돌을 옮겨 다리를 놓는다.
완공된 다리가 영구히 보존되고 주민들에게 편리하게 이용되기를 바라는 다리고사를 지내고, 마을 원로들이 가마를 타고 이 다리를 건너는 시연과 함께 한마당 놀이를 펼쳐지는 순서로 진행된다.
출연인원은 남자 79명, 여자 6명 등 모두 85명으로 기수 1명, 제관 3명, 소리꾼 1명, 목도꾼 64명, 농악패 10명, 새참 여인 6명 등으로 구성된다.
<발목(돌을 엮는) 소리>
에이허 에헤히어 에헤야 어야야차
허야차 하자
지구도 어히여 걸어야 가지
허야차 하자
<목도메기 소리>
내 품에 안긴 님이 어이 이리 가벼운가
하여차 하자
객지두 18년 언제나 돈 벌어서 하차
하여차 하자
고향 찾아 처자식 먹여 살리니 하차
허야차 하자
에히어 금강산을 들어가자 하차
허야차 하자
저기 가는 저 처녀 하차
허야차 하자
엉덩이 맵씨를 보자 하차
허여차 하자
실구등 얄구둥 하는구나 하차
허야차 하자
절씨구두 그렇지 잘하지 하차
허야차 하자
금강산 일만 이천봉 해지기전 돌아가세
허야차 하자
산수갑산 돌아가자 명파리로 돌아가자
허야차 하자
가자가자 어서가자 고향 찾아 어서가자
허야차 하자
해지기 전 돌아가세 달뜨기 전 돌아가세
허야차 하자
고향 찾아 처자식 먹여 살리나 하차
허야차 하자
<목도 내려놓기 소리>
허여히 영차 허기영차
어영차 허여 놓고
4) 전승실태 및 과제
1988년도 강원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종합최우수상을 수상해 1989년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재연되었던 민속이다.
사회공동체 협동심이 돋보이는 가치 있는 무형문화유산으로 평가된다. 마을단위로 보존 전승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이에 대한 보존 지원대책이 전무하다는 이유로 마을자체에서 관리되지 않고 있어 향후 제도적·체계적인 보존·전승 지원대책이 필요하고, 정기적인 재현행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전승 관리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마. 반바우후리질
1) 유래
반바우마을은 해안이 돌아가는 모퉁이에 위치하였기에 옛적에는 돌구미 또는 회진리(回津里)로 부르기도 하였으며 마을 지하에 암반이 있다 하여 반바우라고도 불러오다 그후 마을 주변에 암석과 해중(海中)의 평평한 반석이 널려있기 때문에 반암리(盤岩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마을 서쪽에는 국난이 있을 때마다 통신수단으로 이용되었던 정양산(正陽山) 봉수봉이 있다.
전형적인 반농반어의 산업구조를 가진 반암 마을에서는 매년 풍어와 풍년, 안녕을 기원하는 성황제를 지내고 3년마다 용왕제를 지낸다.
후리질은 마을 포구에서 연안으로 근접하는 멸치떼를 몰아 그물을 놓고 동네 사람들이 함께 그물을 당겨 끌어올리는 어획방법 중의 하나로서 전래시기는 명확치 않다. 1960년초까지 동네사람들이 대부분 직접 작업에 참여했기 때문에 이곳 어민들은 그 작업과정은 물론 어요(漁謠)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2) 특징과 의미
반바우후리질은 해안마을에서 후리그물을 이용해 고기를 잡는 생업속(生業俗)으로서 후리질 소리는 작업과정에서 함께 불렀던 영북지방 어촌의 희귀한 어요(漁謠)로서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재담에 가까운 즉흥적인 노랫말과 3·4박자의 단조로운 가락으로 선소리(先唱)과 뒷소리(後唱)로 분창(分唱)하는 후리질 소리중 노 젓는 소리 "지어"는 신속한 행동에 맞춰 선원들이 함께 빠른 템포로 받는 뒷소리이며, "에-싼냐" "에-싼지"는 특별한 의미보다는 여럿이 그물을 당기면서 힘을 모으는 기합소리로 인식된다.
당겨진 그물 속에서 고기를 퍼 담을 때 부르는 가래소리 "에라소-오"는 만선과 풍어에 대한 기쁨과 여유로움으로 신명난 가락을 어부들과 동네사람들이 함께 하는 흥겨움과 풍요의 노래이다.
이처럼 후리질 소리는 영북 해안지방의 특색있는 어요(漁謠)로써 민속적, 음악적 가치가 높은 무형문화 유산이라 할 것이지만 악보 채록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
3) 내용
멸치잡이 풍어, 가족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성황제와 용왕제를 지내고, 후리질의 순서에 따라 부르는 어업 노동요를 작업의 동작에 곁들이는 한편 풍어를 자축하는 한마당 등으로 구성된다.
그 순서는 후리그물을 어장(해변)에서 옮겨 배에 실으면서 부르는 그물을 배에 싣는 소리, 바다를 향하여 용왕고사를 지내며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제와 성황제, 망꾼 이 망대에서 멸치 떼를 발견하고 소리치면 선수의 지시에 따라 고깃배를 저어 바다로 나가 고기떼를 둘러싸고 그물을 놓고 돌아오면서 부르는 노젓는 소리, 해변에서 수십명의 동네 어부들과 주민들이 양쪽에서 벼릿줄을 당기면서 부르는 후릿소리, 당겨진 그물을 조이면서 부르는 그물을 터는 소리, 잡혀온 멸치를 가래를 이용해서 지게소쿠리에 퍼 담아 옮기며 부르는 가래 소리로 이어지며, 가래질을 마친 후 어부와 마을사람들이 풍어에 즐거워하며 흥겨운 한마당 잔치를 펼치는 순서로 진행된다.
<후리그물 놓으며 노 젓는 소리>
고기다 고기!
그물을 놔라 그물
이물에 사람 발을 놓고
그물을 들어 발을 놔라
우리 배는 잘도 간다.
겨울지나 봄이 오고
밝은 해가 솟아나네.
오는 고기 마중 가세
노를 저어라. 돛을 올려라
고기 떼가 번쩍인다.
(후렴) 지어- 지어- 지어- 지-어-
<후릿그물 당기는 소리>
젊은 사람 나(나이) 많은 사람
잘도 한다 잘도 하네
이물에 사람 살펴보고
가볍게 댕기고 빨리 댕겨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
일진 광풍 불지 마라
아까운 청춘 다 늙는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
에-싼야
기운내기 손발시려 못하겠네
에-싼야
잘도 당긴다. 잘도 당겨
후세미를 바짝 춰서
물밑으로 몰아 오너라
(후렴) 에-싼지 에-싼야 에-싼니
<고기 퍼낼 때 가래질 소리>
에라소-오 가래-로구나
가래- 가래로구나
에라소-오 가래-로구나
먼데사람 보기 좋게
곁에 사람 보기 좋네
먼데사람 뜨기 좋게
후리는다 후리느니
물밑에서 고기가 올라온다
이번 가래는 용왕님 가래요
이번 가래는 선주님 가래는
(후렴) 에라-소오 가래-로구나
4) 전승실태
1990년도 강원도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종합 우수상을 받은 바 있다.
마을단위로 보존 전승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보존에 따른 지원대책이 전혀 없고 관리되지 않아 보존실태가 매우 열악하다.
멸치잡이에 필요한 어망, 어구와 작업의 방법을 보존하고 있으나 근래 조류의 이상난동으로 멸치어장이 형성되지 않아 후릿그물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사장되어 있다.
후리소리는 서재호(70세, 거진읍 송포2리)씨가 목청과 사설이 좋아 대표적인 선소리꾼이었지만 그를 이을 사람이 정해지지 않아 보존이 어려운 실정이다.
영북해안의 유일한 생업속으로 마을단위로 보존할 수 있도록 재정적인 지원대책과 정기적인 재현행사를 통해 전승하도록 적극 지도해야 할 것이다.
바. 순포마을 풍년농요
1) 유래
순포마을은 지금의 삼포리(三浦里)로서 옛날에는 순포리(蓴浦里, 荀浦里)라고도 하였으며, 지금으로부터 520년전(1415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래 순포 서북방 300m지점에 3㏊의 넓은 늪(개)이 있었는데 그 주위에 풀이 무성하여 풀이름 "순(荀)"자에 호수"포(浦)"자를 써서 순포라고 불렀다. 현재 그곳은 논으로 변하고 인근 산야 및 집 주위는 대나무가 무성하다.
마을의 주산업인 농사일을 통해 서민의 애환과 희노애락, 그리고,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잠재된 고대의 제천의식에서 비롯된 무형문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2) 특징과 의미
전통적으로 논농업을 주업으로 했던 마을에서 풍년기원제례, 가래질과 논갈이, 모심기, 김매고, 벼베기, 한마당잔치 등 일련의 전통적인 농사방법을 정리한 대표적인 농촌의 생업속(生業俗)이다.
즉흥적이며 구성진 선소리꾼의 방언이 섞인 노랫말 속에 일상생활의 습속과 재미있는 해학, 그 농촌의 정취와 토속적인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다.
무사안녕 기원의 제사에 이어 기(技) 시범교육과 소리꾼의 선소리 경연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선법을 단정하기 어렵지만 상행시에 4음 음계, 하행시에 5음계를 무반음 음계로 구성되는 계면조로 부르는 노래 속에는 서정적인 농촌의 풍경이 그대로 옮겨온다.
3) 내용
온 마을 사람들이 제액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의식을 지낸 다음 선소리꾼의 즉흥적인 농요에 맞춰 뒷소리를 받으며 삼삼오오 가래질을 하고, 소와 쟁기를 이용해 논갈이와 써래질을 한다. 그리고 김매기는 메나리를 부르고 벼 베기를 끝으로 농악패에 신명난 농악에 맞춰 한마당 놀이 순서로 진행된다.
출연인원은 남자 59명, 여자 11명으로 모두 70명으로 제관 3명, 소리꾼 3명, 농부 57명, 서래질 2명, 아낙네 6명으로 구성된다.
<가래질 소리>
다섯이 퍼내는 모래박줄 가래요
어허둥둥 가래요
셋이서 하는 논두렁 가래요
어허둥둥 가래요
외양깐 치는 마구간 가래요
어허둥둥 가래요
불담는 불가래요
어허둥둥 가래요
<김매기 메나리>
천하지 대본 농사라니 풍년농사 지어보자
농사 한철 지어보자 풍년농사를 지어보자
앞뜰도 천석 뜰이요 뒷 뜰도 천석들이요
이천석을 지어 보라
훈자가 먹어라 돼지벼요 인간 70노인찰이요
휘휘 둘러 상모찰이요
우물 밑의 샘 다래기요
여기 저기 다 심었구나
가을철이 얼른 되니 저 농부 거동 보소
낫자루 꽁무니 차고 검정 소를 앞세우고
이레 툭쳐 썩 나가니 나갈 적엔 빈말이요
들어 올 땐 찬 말이라
말마 같은 상노 놈은 질 빵을 걸머져 들이고
비호같은 종년들은 따바리 맡에 여인들이니
앞마당에 노적이요 뒷마당에 노적이라
노적이라 노적갈이가 좋을 시고
미나리
심신하고 염여한데 지구나기를 붙어보세
양구양천 흐르는 물에 배추 씻는 저 처녀야
겉의 겉잎을 다 제쳐놓고
속의 속잎을 나를 주소
4) 전승실태
1992년 강원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이 마을의 어재조씨, 어명례씨 등 독보적인 소리꾼이 노환으로 세상으로 떠나면서 사실상 농요와 전래 무형문화유산이 전승되지 못하고, 구성진 메나리를 보존하지 않아 토속적인 농요가 사라질 위기에 있다.
그리고, 영농 기계화 등 농업의 발달과 함께 농사법이 크게 바뀌면서 전통 농사방법도 주변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