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글로비전
 
 
 
카페 게시글
문화유산답사기 스크랩 1. 경희궁을 가다. - 2편
visionmaker 추천 0 조회 33 08.02.29 00:4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지난번에 시간도 많지 않고, 사진도 올리는데, 제한이 있어서, 2편으로 나눴습니다.

 

지난번에 숭정전까지 갔었는데요.

 

이번에는 자정전으로 갑니다. 자정문은 숭정전 바로 뒤편에 위치하고 있답니다.

숭정전뒤에 있어서 잘 안보이죠. ^^

 

옆으로 계속 늘어져있는 기와들이 참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사진을 확실히 찍어오지 못해서 그런데, 기와장에 보면 무엇인가 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건은 바로 공장에서 만들어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시였다.

허걱... 이런일이.. 어찌 이런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아무리 최근에 만들어졌다는 말을 듣고,

기초돌들이 깨끗해서 얼마 안됐다는 것을 알수 있었지만, 이런식으로 표시를 내야했는가? 라는 질문에

참 할말을 잃었다. 아니면, 안보이도록 쌓아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이렇기에 우리의 전통유산에 대한 오래된 역사적 가치를 다시한번 되새겨보아야 할 것 같다.

이곳은 자정전이다. 자정전은 경희궁의 편전으로 1617~1620에 건립되었고, 국왕이 신하들과 정사를 의논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개인적으로 옛궁은 단청이 참 아름답다. 물론, 옛날 그당시의 것은 아니지만, 이런 멋스러움이 참 우리의 자랑이 아닐까 생각한다.

뒤쪽으로는 쪽문이 나있다. 물론 쪽문을 나가면, 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공터와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기와에는 봉황과 용무늬가 있다. 새들의 배설물과 먼지로 인해서, 정말 지저분하게 관리되고 있는 것 같다.

요부분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결국, 정말 조선시대 당시 그대로 가지고 있는 부분은 이부분밖에 없는 것인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바닦의 토판 수십장이 지금까지 이어온 우리의 문화유산을 대변해주는 것 같다.

결국, 저 틀안에 있는 부분만이 고유의 부분인 것이다. 참 안타깝다.

 

음. 이곳은 태녕전이다. 이곳은 본래 특별한 용도가 없는 곳이었지만, 영조때(지금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이산의 할아버지)영조의 초상화가 모셔졌던 곳이다. ^^*

 

이곳은 모양은 이렇게 만들어놨지만, 금방지어진 것이 표가 날 정도로 깨끗하고 반듯하게 만들어 진것이 보였다. 

이곳을 앞에서 촬영하지는 못했지만, 아마 이분이 바로 태녕문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문을 통해 들어와서 태녕전으로 이동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이것에 대한 궁금증은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이렇게 현장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조금씩 알게 되는것 같다. 이것은 바로 잡상(어처구니)이다. 궁의 화를 막아주는 역할을 해주는 토우이다.

(대당사부 끝까지 숭례문을 지키다. - 편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개의 잡상이 놓여져있다.

 

정-향로같이 생긴 청동항아리, 왕권을 상징하며, 나아가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고 하늘의 복을 기원하는 상징물로 여겨짐. 쓰레기통 아니니까 쓰레기 버리지 마세요.

드무 - 정의 아래 계단에 있으며, 그 안에 물을 담아둬서, 소방수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화마가 궁궐에 침입했다가 드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 달아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청동 그릇이다.

 

역시 단청마루의 가지런함과 정돈됨, 일정함은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멈출수가 없다.

오히려 '예전의 선조들이 건축기술과 디자인기술이 뛰어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늘 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경희궁이 좋았던 시절만 있었을까? 여기에서 경희궁의 시련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근세에 이르러 일제가 침략해 와서 한일합방이 체결될 무렵 경희궁은 숭정전(崇政殿), 회상전(會祥殿),  흥정당(興政堂),  흥화문(興化門) , 황학정(黃鶴亭)만이 남아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들어온 뒤로 숭정전(崇政殿)은 1926년 남산 산록에 이치(移置)되어 조계사(曹谿寺)의 본당으로 사용되었고, 흥정당(興政堂)은 1928년 광운사(光雲寺)로 이건하였으며, 황학정(黃鶴亭)은 1923년 사직단 뒤로 옮겨졌다. 흥화문(興化門)은 1932년 이토오히로부미를 위하여 짓던 절, 박문사(博文寺)의 북문으로 쓰였으며 최근까지는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경희궁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경희궁 자리에는 1910년 일본인 자제를 교육하는 경성중학교(옛 서울중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고종의 강제 퇴위와 일제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접어들면서 일제는 일본인들의 거주지역을 경희궁 근처로 잡고 통감부 중학교를 경희궁 터에 세우고 지형도 높은 곳은 깍고 낮은 곳은 메꿔 버리는 등 그 만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들의 만행은 1922년 6월에는 경희궁의 동편에 전매국 관사를 지으면서 그 부지로 25,500평을 떼어냈고 1927년에서 1928년에는 경희궁 남쪽 도로를 확장하면서 일부를 도로로 편입시킨다. 거기에 건물들은 대부분 매각 시켜 버리고 만다. 중학교 교실로 사용되던 숭정전(경희궁의 정전)은 1926년 3월 일본불교 종파인 조동종의 조계사에 매각 이건 되었다. 대내 정전인 회상전은 1911년 임시소학교 교원양성소의 교실과 기숙사로 그리고 편전인 흥정당은 1915년 소학교 교실로 사용되다 1928년 용산의 광운사로 팔려나갔다. 이렇게 1920년대를 지나면서 경희궁의 건물들은 완벽하게 소멸되고 만다."

 

이런 아픔을 겪으면서, 이곳은 다시 세워진 것이다. 이런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지않는다면, 우리는 똑같은 역사적 반복을 하지 않으리란 법이 있을까?

 

이렇게 경희궁의 모든 부분을 돌아보고 나왔다. 경희궁내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단 몇 사람만이 점심식사를 하고 운동 겸 산보를 하기 위해서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우리의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서 오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우리는 옛 과거를 금방잊길 잘한다고 한다. 우리는 그 역사를 잊어가고 떠나보내고 있지만, 저 뒤에 있는 인왕산은 경희궁과 서울의 모든 역사를 바라보며, 지키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며, 글을 마무리 한다.

 

다음편은 보신각편입니다. 많은 관심가져주세요.

 
다음검색
댓글
  • 작성자 08.02.18 23:57

    첫댓글 " " 안의 내용은 <우리궁궐이야기, 청년사, 홍순민 지음> 발췌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