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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역사와 유래 (공주)
公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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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혁
가. 금강과 공주
공주는 금강의 산물이다. 곰나루의 전설을 지닌 공주는 그 북쪽에 동서로 흐르는 금강과 함께 역사 를 만들어 왔다.충청도에서 금강을 빼놓고 역사를 말할 수 없듯이,공주 역시 금강을 빼놓고 말할 수 없을 만큼 금강과 공주는 서로 밀접한 연관과 역사가 있다.
한강이 서울의 젖줄이고,낙동강이 김해 가야국의 젖줄이었다면 금강은 공주의 젖줄이며 충청지방의 젖줄이다.
금강은 멀리 전북 무주군과 長水郡사이에 있는 德裕山에서 발원하여 충북 沃川과 충남 錦山을 거쳐 서 연기군을 지나서 공주,부여를 가로질러 전북 群山과 충남 長項을 사이의 연장 401킬로에 이르는 국내 제 6위의 큰 강이다.
금강은 대전 대덕구 문평동 앞에서 대전시내를 관통하는 대전천,유등천과 합친 甲川과 만나고,다시 연기군 동면 합강리에서 충북 내륙에서 흘러나오는 美湖川과 합류되면서 큰 강으로 변한다.
미호천은 충북 음성군 芙蓉山에서 발원하여 충북 진천과 청주 등 충북의 내륙지방을 거쳐오다가,연 기군 동면과 충북 청원군의 道界를 이루고,그 아래로 내려와서는 연기군 전동면에서 발원하여 조치 원과 충북 청원군 강외면의 도 경계를 지어주는 연장 19.5킬로의 지천인 鳥川과 합류하게 된다.
금강은 백제가 고구려에게 쫓겨서 서울을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할 때에도 좋은 방어선이 되었지 만,신라와 국경을 마주하는 동안에도 미호천과 함께 신라군이 공격하는 주요 침투로이기도 하였다.그 리하여 금강 남해안에는 대전의 계족산성을 비롯하여 곳곳이 백제의 對신라 방어선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육로 교통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충북 내륙까지 세수미를 한양으로 운반하는 해로가 되었으며,충북 청원 부강과 강경,전북 익산과 함께 곡창 항구로 유명하였다.
나.역사개요
1) 백제의 王都 공주
웅진이란 우리 말인 “고마나루”를 漢譯한 것이다.고마는 곰 즉 熊을 뜻하고,나루는 한자로 鎭,津 또는 塞를 뜻한다. 웅진은 구릉의 북쪽이 금강에 접한 분지에 발달한 지대로서,지형상 방어에 유 리하고,수운이 편리한 지리상의 잇점을 가지고 있다.
삼국시대 무렵 “고마(곰)”란, 上,大,神 등의 성스러운 의미를 가졌으며,지형상 금강을 국경으로 한 백제의 방어적인 성격을 잘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곰나루 웅진을 중국 오대의 北史에서는 “固麻城居拔城“이라 하였고,일본 사서인 日本書紀에서도 “久麻那利”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이것은 모두 고마나루 또는 ”고마성“을 음대로 적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75년 백제의 개로왕(AD 455-475)때 고구려의 장수왕(412 - 491)의 침입으로 서울 한성이 함락 되고, 왕은 죽음을 당한 뒤 왕자가 문주왕으로 즉위하면서 혼란에 빠진 나라를 재건하고자 웅진 성(공주)으로 서울을 옮겼다.그 후 성왕 16년(538) 다시 사비성(부여)으로 옮길 때까지 5대 64년 간(22대 文周王 3년,23대 三斤王 2년,24대 東城王 22년,25대 舞寧王 23년,26대 聖王 15년)백제의 서울이었다. 이 기간은 백제 전 역사 678년의 10분의 1에 해당하며,또 백제의 중세이기도 하다.
성왕 16년(538)에 도읍지를 부여로 옮긴 이후에도 웅진은 신라,고려,조선시대를 통하여 오랫동안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웅진성 공주는 백제가 신라에게 멸망한 뒤,신문왕 6년(686) ‘熊川州’으로 개칭되었다가, 경덕왕 16년(757)‘熊州’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웅주는 고려 태조 23년(940)에 이르러 현재의 지명과 같은 ‘公州’라로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고, 조선 초까지 충청도의 감영은 충주이었지만,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선조 31년(1599)에 공주로 옮 겨오게 되었다. 그 이후 고종 33년(1896) 전국을 종래의 8도에서 13도로 개편할 때 충청도는 남, 북도로 분리하게 되었는데,1932년 10월 1일 도청을 대전으로 옮기게 될 때까지 334년간 공주는 충청도의 감영이었고,도청 소재지였다.
2) 충청 감영
가) 교통의 중심지
‘천안 삼거리’는 한말 일제에 의하여 철도가 대중 교통의 중심이 되기 전까지 삼남이 만나는 곳 이자,한양을 가는 가장 큰 중심도시이었다. 한양에서 삼남으로 가는 길목은 천안 삼거리에서 병천을 거쳐 충주와 문경 새재를 넘는 경상 도 길과 공주에서 금강을 거쳐 논산,전주,목포로 가는 전라도 길로 나뉜다. 천안 삼거리에서 전 라도를 가려고 차령을 넘어서면 처음 도시가 충청도 감영이 있는 공주이었는데, 공주는 삼국시 대 백제의 왕도이었고, 고려조에 이르기까지 내내 지방 최대도시로서의 역할을 다해왔다.조선조 에 들어와서도 334년간이나 충청도의 감영이 있던 곳으로서 역사성을 많이 가졌던 공주는 금강 과 함께 충청도와 전라도 길목에서는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다해 왔다.
일제의 침략이 거세어지던 1904년 5 월 25일 경부선 철도의 개통과 더불어 교통이 종래의 육 로에서 철도로 바뀐 뒤에는 새로운 전라,경상의 갈림길이 된 한밭 대전이 각광을 받게 되고 천안 삼거리의 명성이 시들해지게 되었다.
나) 대전과 공주의 관계
경부선이 개통된지 10년만인 1914년 3월 22일 서대전 - 목포를 잇는 호남선 철도가 개통됨 으로서 한밭 대전은 급격한 성장을 하게 되어 같은해인 1914년 3월 1일 총독부府令 제 111호 로 府,郡 통,폐합으로 철도의 개통이후 새로이 도시가 형성된 대전역 부근인 정동,원동 일대 (공주군 외남면 일대)를 중심으로 진잠,유성,회덕현의 각 일부를 떼어내어 “대전군”을 신설 하게 되었다. 그러나,불과 3년이 지난 1917년 11월 1일에는 대전군에서 외남면 등 일부를 떼어서 “대전 면”을 분리 신설하게 되고,이 대전면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지금의 대전시가 형성하게 되었다.
대전면은 1931. 4. 1. 읍으로 승격하게 되어 신흥도시로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는데, 1935년 일약 大田府로 성장하고, 1989년 직할시가 되더니,이제는 5구 89동 인구 124만을 자랑하는 국 내 6대 도시가 되었다.
반면에 날로 쇠퇴하게 된 공주는 1932. 10 11. 도청을 신흥도시 대전으로 빼앗기고,다시 1938년 7월 1일에는 지방법원마저 대전으로 옮겨가고 支院으로 격하되었다. 이러한 공주도 1995년 1월 1일부터 공주시와 공주군의 시,군 통합으로 1읍 10면 8동 인구 14 만의 도시로서 재기를 도모하고 있다.
2 .공주의 역사
가.백제시대
1) 위례성,한성시대
溫祖가 고구려의 유민으로서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당시 마한 54국의 영지인 한강유역의 위례성 (河北)에 이주하여 伯濟國을 건설하여(BC 6) 초기에는 진한왕의 지배를 받았다.그러다가 古爾王 26년(246) 6좌평과 16관등을 제정하고, 낙랑세력을 한강유역에서 완전히 축출하여 고대 국가체제 를 확고히 하였다.
비류왕때 河南 慰禮城(경기도 廣州)에 옮겼다.
백제의 전성기를 이룬 임금으로 평가받고 있는 13대 近肖古王(AD 346 - 375)은 밖으로는 대륙 의 東晋과 동해의 倭와도 수교를하고,왕위의 부자상속제를 확립하는 등 왕권을 강화하였다.
남으로는 馬韓을 멸하여,전남 남해안과 耽羅國(제주도)까지 차지하고,동남쪽으로 신라와는 낙동 강 전선을 구축하였으며,왕 24년(AD 369)에는 대방군(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싸웠는데, 平壤城을 공격하여 마침내 고구려의 16代 高國原王을 전사(371)시킨 뒤 대방군을 점령하였다.
2) 웅진시대
가) 웅진 천도의 배경
고구려 長水王(412 -491)에게 개로왕이 전사(455-475)하고 서울이 함락되자,왕자가 22대 文周 王으로 즉위하면서 서울을 하남 위례성(지금의 경기도 廣州)에서 熊津城(公州)으로 옮겼는데 (475), 26대 聖王 16년 (538) 서울을 다시 사비城(扶餘)으로 옮길 때까지 5대 64년간(문주왕 2 년,삼근왕 2년,동성왕 22년,무령왕 22년,성왕16년) 백제의 수도인 웅진은 錦江을 사이에 두고 많은 역사를 안고 있다.
국가의 위기에서 한성에서 웅진으로 파천하게 되었을때,귀족들의 분화가 일어났는데,木氏등 일부 귀족들은 평소 교류가 빈번했던 왜로 이주하여 아직 원시상태이던 일본열도가 비약적으 로 문화적,정치적 성장을 하게 되는 주도세력이 되었다.이 시기가 일본 역사상 아스카 문화(飛 鳥文化)기라고 한다.
나) 웅진시대의 왕
(1) 22대 文周王(475 -477)
개로왕이 고구려 長水王에게 죽은 뒤 즉위한 文周王이 웅진으로 천도하고,국가체제를 다시 정비하려고 하였지만,국가는 매우 혼란한 상태이었다. 왕 3년(477) 실추된 왕권에 대한 도전으 로 오랫동안 지배층을 이루며 왕비 성씨족이던 兵官佐平(16품계중 1품으로서 국방장관격) 解 丘에게 왕이 시해 당했다.
이때 유의할 점이 피난 귀족의 국왕 시해사건이다.백제의 건국이래 眞時와 解氏는 온조와 함께 남천한 건국세력으로서 王妃姓氏族으로 분류되고 있었으나,웅진 천도이후 진씨는 계속 왕권의 옹호세력이었지만,해씨는 실추된 왕권을 경시하고 왕을 시해하고 모반을 하기에 이르 게 됨으로서 지배세력의 대립과 분화를 엿볼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23대 三斤王(477-478)
문주왕이 시해 당한 뒤 문주왕의 장남으로서 13세의 나이로 外戚인 解丘에 의해서 왕으로 옹립된 삼근왕은 명목상의 왕일뿐 정권을 장악한 解丘가 佐平(1품)이 되어 그의 섭정을 받 게 되었다.
고구려에게 개로왕이 죽임을 당하고,서울을 웅진으로 옮긴지 3년여 동안 다시 선왕이 세력 가에게 죽임을 당하고 명목상의 왕으로만 존재하게 되어 왕권은 땅에 떨어지고,국가의 기강 은 엉망이 되었는데,그나마 왕 2년(478) 다시 解丘가 恩率(3품계) 燕信과 함께 大豆城( ? ) 에서 모반을 일으켰다.이에 佐平 眞男이 토벌에 나섰지만 실패하고, 다시 덕솔(4품)眞老가 토벌에 나서 解丘는 죽임을 당하고,燕信일파는 고구려로 도망을 가자 그의 처자들을 웅진에 서 처형하였다.
이로서 피난귀족이며 왕비족으로서 지배층이던 해씨와 진씨중에서 해씨는 몰락하고, 진씨 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며,이때 燕氏가 기록에 처음 나타나는데 이 燕氏가 새로이 천도한 웅 진지역의 세력가로서 燕岐郡의 토호세력으로 추정되고 있다.
(3) 24대 東城王(479 - 501)
왕은 담력이 큰 호걸로서 활은 백발백중의 명사수로 알려졌는데, 왕은 멀리 중국의 南齊와 수교하고,신라와는 혼인동맹으로 국력의 증대를 꾀했다.
(가) 왕 15년 신라에 청혼하여 신라 이찬 비지의 딸과 혼인하여 이른바 혼인동맹관계가 성 립되었는데,그 이듬해에 신라가 고구려와 薩水(괴산 靑川)에서 싸웠으나,신라가 犬牙城 (聞慶)까지 패퇴하자 백제가 지원하여 격퇴했다.
왕 20년에는 국력을 강화하고,웅진교를 가설하고,신라를 방어할 목적으로 국경지대인 炭 峴(대전 식장산부근)과 沙井城(대전 沙井洞 뒷산)등의 城을 축조하여 후에 東城王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나) 그러나, 동성왕이 점차 독재적인 경향으로 흘러서 많은 반발을 불러오게 되었는데,왕 22년에는 궁성 동쪽에 높이 5丈이나 되는 임류각을 짓고,연못을 파서 고기를 길렀고,신 하들의 간언도 막았다.
왕은 외척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위사좌평(16품계중 1품으로서 王의 警護長官)인 백加 세력을 가림성(부여 任川 聖興山城)에 배치하였으나,이들은 왕이 사비성 서쪽부근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큰 눈을 만나서 馬浦村에서 유숙하는 것을 알고 자객을 보내어 왕을 시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4) 25대 無寧王(501 - 523)
(가) 무령왕이 된 왕자 사마에 대하여는 명확하지 않지만, 왜에서 출생하여 성장하였다고 한 다.
백제의 왕족과 왜와의 관계는 지금까지 한일 역사학계의 논쟁거리이지만,국내의 유력한 학설은 웅진 천도이후 전국 주요 도시에 22담로를 설치하고 왕족을 배치하였다는 기록에 주목하고,담로는 국내 지역만이 아니라 근초고왕 이후 문물을 교류하고 개척한 왜에까지 설치한 것이며,따라서 왜에서 지배하던 왕족이 국내 왕족과는 밀접한 관계이어서 왕위에 오를수 있었다고 한다.좀 더 정확한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나) 귀국하여 정치적 실력자로 등장한 사마는 동성왕에 대한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왕자는 즉시 즉위하여 우두성(?)에서 杆率 解明을 시켜서 토벌에 나서서,항복하는 외척인 백가 세력을 토벌하고,그 시체를 백강(금강)에 버렸다.
왕은 귀족세력과 조화를 이루며 국력을 회복하였는데, 그 당시의 유물과 유적이 왕의 사후에 만들어진 公州 송산리 고분군에 있는 무령왕릉이다.
1971년 7월에 발굴된 이 무덤은 해방이후 고고학계 최대의 성과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데,매장자의 신분을 알 수 있는 지석의 발견과 함께 당시 교류하던 중국 梁의 화폐(五 殊錢)와 사후세계의 土地買收券 등이 出土되어 국보로 지정된 것만 해도 12점이나 되어 당시의 국력과 사상 등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5) 26대 聖王(523- 554)
왕은 수교이후 거래가 활발하던 중국,왜와의 교류를 밀접히 하고,국력을 회복하여 빼앗긴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해서 沙砒城의 토착세력인 沙氏와 결탁하여,왕 16년(538) 475년 문주 왕의 천도이래 5왕 64년동안 왕도이던 웅진성을 떠나 사비성(扶餘)으로 천도하고,國號도 南扶餘라고 개칭하였다.
천도 후에는 중앙관제도 22部로, 전국을 5方, 서울을 5部로 하였다.
이윽고 왕은 신라 眞興王과 연합하여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공격하여 6郡을 되찾았으나,그 2년뒤 그 땅을 신라에게 다시 빼앗기게 되었다. 이에 격분한 성왕은 다시 신 라를 공격하였으나 결국 554년 管山城(忠北 沃川)에서 전사하게 되고,백제는 국왕의 시체조 차 회수하지 못하는 수치를 겪게 되었다.
이로서 비유왕이래 혼인동맹으로 맺어졌던 나제동맹은 깨어지고 삼국의 대립은 치열해졌다.
다) 熊津時代의 行政區域
(1) AD 475년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한 뒤, 국가 체제의 재정비를 시도한 백제는 중국식 관 제를 모방하여 지명의 한자화와 중국식 관제를 도입하였는데,처음 실시하게 된 郡縣制는 서울을(웅진) 5部로,각 部는 다시 5항으로 나누고,地方은 “五方制”를 시행하였다. 5方(長은 方領)의 각 方아래에는 10郡(長은 郡將)을 두고 각 郡마다 3인의 將軍과 700 -1200명의 군대를 두었다.
方은 지금의 道 규모의 관할이었고, 方아래에는 군현을 두었지만 그 군현의 지명은 성왕의 사비천도 이전까지는 문헌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웅진 천도 이후에는 전국 주요지역에 擔魯라는 큰邑 22개를 두었다.
(2) 삼국시대의 지명은 중국의 관제와 지명의 모방내지 답습이었는데,지명을 정하는 크기의 기 준이 되는 字는 州--城--山--川이었다. 예를 들면 熊山은 熊川보다 큰 지역이며 熊城은 熊山보다 크고,熊州는 熊城보다 더 큰 것 으로 이해 되었으며,또 큰 지역일수록 웅천주 또는 웅진주와 같은 2내지 3자의 이름보다는 웅주와 같은 單字의 이름을 가졌다.
그리하여 그 지역에서 반란이나 모반등이 있으면 지명을 격하시키거나 행정구역에서 폐하 고 다른 관할의 관청에서 지배하도록 하였고,반대로 공적 등이 있으면 그 지명을 승격하는 등의 조치가 삼국시대이후 조선시대까지 자주 있었다.
(고려 무인정권 당시 청주가 모반을 이유로 忠順縣으로 강등되고,晋州가 晋陽府로 되기도 하고,조선시대에 와서도 충청도의 지명이 바뀌는 내역에서 청주,충주,공주,홍성을 염두에 두 고,洪城의 地名이 홍성-홍주등으로 바뀌는 연유를 기억하실 것.)
나.통일신라
1) 통일신라의 조직 개요
가)神文王
(1) 백제(660)와 고구려(668)를 각각 멸하고 통일을 이룬 신라는 神文王대에 이르러 왕 7년 (687) 地方 行政制度로서 전국을 9州 5小京(長은 仕臣)으로 확정하고,州-郡- 縣의 조직을 갖추었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망한 뒤,백제의 고토에는 당이 웅진 등 5도독부를 설치하고 지 배해 왔으나,신라가 고구려를 통일한 뒤,이어서 벌어진 당과의 세력경쟁에서 겨우 원산, 대동강 이남지역만을 장악하게 된 신라는 신문왕 6년(686) 백제와 고구려 고토중 영역을 확보한 새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자 새로운 행정구역을 개설하면서 일부는 지명 도 개칭하였다.
이때 종전의 웅진 도독부지역을 ‘熊川州’라고 칭하고,都督이 지배하도록 하였다.
(2) 州는 지금의 道와 같은 정도의 규모로서 軍主(후에는 摠管 - 都督)가, 군(長은 太守),현 (長은 縣令)을 지배하고, 縣 아래에는 村,鄕,部曲등의 組織이 있었다.
* 5小京 : 中原京(충주),北原京(원주),西原京(청주)南原京(남원),金官京(김해)
나)景德王
왕 16년(757)때 熊川州가 다시 ‘熊州’로 개칭되고, 그 아래 13郡 29縣을 관할하게 되었는데, 13郡을 보면, 熊州의 영현은 2 인데,
尼山縣 : 백제의 熱也山縣을 경덕왕이 개칭(尼山)
淸音縣 : 백제의 伐音支縣을 경덕왕이 新豊縣으로 개칭(公州)
그밖에 29현의 내역은아래와 같다.
大麓郡(천안군 목천면), 嘉林郡(부여군 임천면), 西林郡(서천군 서천읍), 伊山郡(예산군 덕산 면) 慧城郡(당진군 면천면), 부여군, 任城郡(대흥),黃山郡(논산군 연산면), 比豊郡(대전 회덕),
潔城郡( 결성), 燕山郡(청원군 문의면), 富城郡(서산군), 湯井郡(온양)이다.
다.고려
1) 행정구역의 개편
가) 12牧 10道
(1) 태조 23년(940) 신라 경덕왕대 이래 불리우던 熊津을 ‘公州’라고 개칭하고,도독부를 설치 하였다.
(2) 성종
(가) 건국초기에는 지방 호족들의 세력을 무시할수 없어서 지방 행정구역도 재편성하지 못하고,중앙에서 지방관도 파견하지 못한채 전운사등 일시적인 징세관을 보내는 정 도이었다.
그러나,왕 2년(983)에 이르러서야 겨우 전국 주요지방에 12목을 설치하여 지방관을 처 음 파견하기 시작하였다.이때 옛 백제의 고도이던 웅진 공주는 牧으로 바뀌고 지방 행정의 중심이 되었다.
* * *
* 12牧 : 海州,黃州,廣州,楊州,忠州,淸州,公州,全州,羅州,昇州,진주,尙州이다.
(나) 왕 14년(995) 건국초기의 호족연합체에서 몇 차례의 대,소란을 거치면서 왕권이 강화 되었는데,어느정도 중앙의 의사가 반영된 지방개편을 할수 있어서 전국을 10도로 하 였다..
나) 5道 兩界
현종 9년(1018) 전국을 10체제에서 다시 5道 兩界 4도호부,8牧(목사는 3품),15부, 56知州郡事, 28鎭將, 20縣令, 129郡으로 다시 정하였는데 일대개편이 있었다.
이때 공주는 牧에서 郡으로 격하되었다.
道 牧
1 楊光道(관내도,河南道,中原道) 廣州,忠州,淸州,
2 전라도(江南道,海陽道) 全州,羅州
3 경상도(영동도,영남도,山南道) 晋州,尙州
4 교주도(강원)
5 서해도(관내도) 黃州
6 東界(朔方道의 和주,溟주 江原,咸南일부
7 北界(패서도) 평안
2)楊光道의 河南道 地域(충청도 지방)
현종 9년(1018)년 현재 하남도 지역은 1府,2州,9郡,34縣이었는데,1府는 天安府이고,主郡 5개소는 公州,運州(뒤에 洪州),嘉林縣(뒤에 林州),富城縣(뒤에 瑞州),그밖에 속군 9,屬縣 34가 있었다.
특히 공주는 성종 2년(983)까지는 牧이었다가, 왕 14년에는 절도사를 둔 곳이었다.현종 9년 (1018)에는 知州事로 강등되어 4개의 屬郡과 8개의 屬縣이 있었다.
속군 4곳은 德恩, 懷德,부여,連山이고,속현 8곳은 市津,德津,鎭岑,儒城,石城,定山,尼山,新豊이었 다.
지금의 서구 진잠,유성읍 지역이던 봉명동 일대는 공주의 속현이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이때 의 대체적인 경계는 유등천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라.조선
1) 공주 개요
선초에는 고려의 제도를 갑습하여 공주에 牧使를 두었으나,세조 4년(1458)에는 鎭을 설치하였 다.인조때 公山縣으로 강등되었다가 복구되었다.
선초이래 충청도의 감영은 충주에 있었지만,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선조 31년(1598) 공주로 옮겨 오게 되었다.이것은 그동안 공주지역의 성장과 발전을 의미한다고 할것이다.
현종 11년 다시 현으로 강등하였다가, 숙종 5년(1679) 다시 목으로 복구되었지만,영조 4년(1728)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3년(1737) 복구하였다.그러나,정조 2년(1778) 다시 현으로 강등 되었 다가 11년(1787) 복구하였는데,1895년 고종 32년 갑오개혁 당시 공주군으로 되었다.
공주는 1932년10월 1일 신흥도시 대전으로 도청을 이전하게 되기가지 334년간 충청도 지방의 행정의 중심도시 역할을 해왔다.
2) 갑오개혁과 그 이후
가) 갑오개혁
(1) 전국 8도에서 23부로 개편
고종 32년(1895) 5월 26일 갑오개혁은 국가체제의 일대개혁이었는데,지방행정구역 개편은 칙령 제 101호로 기본원칙은 소지역주의로서 전국 8도의 지방 행정구역을 23府로 개편하 면서,종래의 부,목,군,현의 명칭도 모두 郡으로 통일하여 336郡으로 만들었다.
이때 충청도는 전국 23부중 3부가 설치되어 公州府,洪州府,忠州府로 나누어지게 되었다.종 전에 감영이 있던 공주부는 충청도 지역의 3부중 首府가 되었다.
(2) 공주 재판소 설치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같은 해 5월 15일 칙령 제 114호에 의하여 지방관으로부터 사법권 과 군사권을 주지않고 재판소를 설치하였다.
명실공히 충청지방의 중심도시인 공주읍에 설치한 공주재판소는 강경,홍성,대전,서산,청 주,충주지원과 함께 각 군에 설치한 등기소를 관할하게 되었다.그러나,시행 3개월만인 8 월 15일 공주 재판소는 ‘충청남도 재판소’로 명칭을 고치게 된다.
이때 경찰권도 일원화하여 서울에는 경무청을 두어 서울의 치안을,지방에는 관찰사 지휘 아래 경찰서를 두었다.
나) 대한제국의 성립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에 의하여 고종 34년(1897년)부터 국호를 大韓帝國이라 하고,漢城 府이외의 지역을 다시 13道 1牧 8府 341郡으로 하는 행정구역 개혁이 있었다.
이때 전년도에 설치하였던 府가 폐지되면서 종래의 충청도는 충남,북도로 나누어지게 되었는 데,공주는 충청남도의 도청 소재지로 되었다.
1牧은 제주이고,
8府는 廣州,開城,江華,仁川,全州,東來,德源,慶興이었다.
다) 1909년 법률제 20호 “지방구역과 명칭의 변경에 관한 건”에서 面이 처음으로 법률상의 행 정구역으로 등장하였는데,그 이전까지는 면과 같은 구역을 社,坊,部,面등으로 불리웠다.
마.일제시대
1) 공주面 탄생
가) 1914년 3월 1일 府令 제 111호로 府,郡이 통,폐합되면서 郡이 재편성 되면서,그 이하인 府 관할내의 면과 郡 관할내의 면도 개편되었다.
이때 공주군 남부면의(교촌,상봉촌,반죽,고상위,허문) 5개리를 관할하다가,동부면의 官峴,강 경동의 2개리와 통합하여 공주군 “공주면”을 신설하고,6개정을 관할하게 하였다.
나) 1909년 처음 시행된 면 제도를 1920년 일부 개정하여 “指定面” 제도가 시행되었는데,지정 면은 면중에서 가장 세력이 큰 곳으로 나중에 邑으로 개칭하는 시초가 되었다..)
2) 공주邑 승격
1930년에 처음 읍제도가 생기면서 읍,면제로 나뉘게 되었는데,이때 전국은 75邑 1,418面이었다.
읍제도가 생긴 이듬해인 1931년 4월1일 부령 제 103호로 공주면이 “공주읍”으로 승격되면서, 주외면의 금성,금학,옥룡,웅진의 4개리를 통합하여 행정구역은 모두 10개정리로 되었는데,이때 의 인구는 10,446명이었다.
3) 도청의 대전이전
가) 1901년 8월21일 일제에 의해서 경부선 철도가 서울 영등포와 釜山 草梁에서 동시에 착공 되었는데, 착공한지 3년만인 1904년11월10일 철도 공사가 연결 완료되었다.
공사가 완전히 끝나기 전인 1903년12월27일부터 부분적으로 철도는 여객운송을 시작하게 되었는데,1905년 5월25일 전국적인 경부선 철도의 개통식 거행과 함께 역의 업무를 개시 하게 되었다.
나) 1914년 3월22일 호남선 철도의 개통식이 있고,1918년 6월20일 대전역사의 신축 낙성식이 있는 등 나날이 성장하는 대전에 비하여,공주는 지형이 협소한 분지로서 경부선,호남선 등 당시에는 혁명적으로 새로운 교통수단인 철도에서 멀어진 곳으로,1932년 10월 1일 신흥 도시 대전으로 도청이 이전하게 되었다.
다) 1933년11월25일 공주의 도청이전 반대에 대한 급부로 금강을 가로 지르는 길이 515m 의 금강대교가 가설되었다. 금강대교는 6.25 당시까지는 한강 이남에서 가장 긴다리로서 명물 이었는데, 6.25사변당시 파괴되었다가 1956년 현재와 같이 복구되었다.
이후에는 공주에서 천안,예산,청양 방면의 교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4) 지방법원의 대전 이전
도청을 신흥도시 대전으로 빼앗기게 된 공주읍은 1938년 7월 1일 총독부령 제 132,133호 로 지방법원마져 대전으로 빼앗기고,같은 날자로 지원으로 격하되었다.
바.대한민국
1) 행정구역 변경
가) 1947. 4. 1.행정구역 명칭변경에 의하여 일본식 명칭인 町을 洞으로 고치게 되었는데,
이때 금정을 校洞,욱정을 班竹洞,상반정을 鳳凰洞,본정을 中洞,대화정을 중학동,금성정을 금 성동,금학정을 금학동,옥룡정을 옥룡동,웅진정을 웅진동,산성정을 山城洞으로 각각 변경하게 되었다.
(1) 옥룡동은 소학동에 있는 ‘용못’이 불려진 것으로 대추골,비선거리,버드나무골,장기대 마을 들이 있다.
대추골은 공주 국립박물관 뒷쪽으로 옛부터 대추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고,비선 거 리는 효자 李福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고 하여 ‘비석거리’라고 불리웠던것이 변한 이름이 다.특히 장기대는 옛날부터 죄수들의 사형터였는데,장기대 나루터도 있어서 번창하기도 하였었다.
(2)산성동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당시 쌍수산성의 이름을 따서 산성정이라고 하던 곳이다.
‘산성 갈마기’는 진남루 아랫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남문앞’이라고도 하는데,장터는 산 성갈마기의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서,구장터는 ‘장터 윗마을’이고,새장터는 ‘장터 아래마을’ 로서 장터가 옮긴 뒤 붙여진 마을이다.
선전거리는 구장터 안에 紬丹만 파는 瑄廛板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사거리는 官峴마 을 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이 네거리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인데,네거리에 홍살문 이 있었다고 해서 네거리를 ‘홍살문 거리’라고도 한다.倉터는 산성갈마기 아래에 있는 마 을로서 감영의 창고와 사창이 있던 곳이다.
(3)금성동은 금강과 쌍수산성에서 각각 따온 동 이름이다.
‘성안’ 또는 ‘성내’는 공산성의 북쪽에 있는 마을인데,인조 24년(1646) 대홍수로 감영이 유 실된 후 임시로 감영 일을 하던 곳이지만,위치가 불편하여 효종 4년(1653) 감영을 지금의 공주사대부고 자리인 봉황산 밑으로 옮겼다. 성안 서쪽에 있는 것을 ‘절골’이라고 하는데, 靈隱寺가 임진왜란때 승병들이 집결하던 곳이지만 그후 소실되어 버렸다. 공주읍의 모양 이 마치 배와 같은 형상이라고 해서 금성동에 있는 산을 ‘艇止山’이라고 붙여졌는데,공주 읍의 주봉은 舟尾山이라고 한다.
본래 금강나루는 산성북쪽 음암 옆이었는데,1913년 신작로를 산성의 서쪽으로 내는 바람 에 나루터도 금성동 북쪽으로 옮겼다.
(4) 신관동은 공주군 장기면에 속하였다가 1986년 공주시로 편입된 곳이다.금강철교에서 장 기면으로 가는 국도에서 첫 동네가 천안,청양,조치원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이다.
이곳은 조선시대까지 행인들의 교통편의를 위한 ‘금강院’이 있던 곳으로서 ‘전막’이라고 도 한다. 전막을 지나서 장기 쪽으로 가면 신관동사무소 맞은 편 동네인 ‘새뜸’이 있다.새 뜸을 지나면 신관동에서 제일 큰 동네인 ‘관골’이 있다.이곳에는 현재 주공 아파트 단지 가 조성되어 있다.
장기대 나루는 ‘李山’또는 李悼山‘이라고 하는 산의 남쪽에 있는 금강 가의 나루터이다. 즉 오얏나루의 아랫쪽으로서 조선시대까지 이곳에는 사형을 집행하는 장기대가 서 있었 다고 한다.
‘梅山’은 지금의 공주대학 정문에서 남쪽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인데, 산의 모양이 매화 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역말’은 매산의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역말’또는 ’역촌‘이라고도 한다.조선시대까지 ’日新驛‘이 있던 곳이다.
‘李山’은 매산의 동쪽에 있는 산으로서,그 아래에 있는 마을 이름도 ’이산‘이라고 부른다.
나) 1961. 9. 1. “지방 자치단체에 관한 임시조치법”으로 읍,면 자치제 폐지와 각급 자치단체의
장의 임명제를 실시하게 되었다.이때 전국은 91邑,1,382面이었다.
다) 1983. 2.15 대통령령 제11027호(1983.1.10공포)에 의해서 이인면의 4개리(주미,봉정,태봉,오 곡),계룡면의 3개리(신기,소학,상왕),장기면의 4개리 (무릉,월송,금흥,신관),우성면의 2개리 (쌍신,월미)가 공주읍으로 편입되어 법정 동은 23개로 조정되었다.
(1) 상왕동은 왕촌이라고도 부르며,상왕촌과 하왕촌으로 나눠져 있는데,지명은 왕씨들의 집 성촌이어서 붙여졌다고도 하고,마을을 따라 흐르는 왕촌천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왕촌천도 원래는 왕천이라고도 하였는데,계룡산에서 발원하여 29구비를 지나서 금강으 로 합류하게 되는데,이 합류지점은 오얏곳으로 금강의 나룻배가 다닐 때 하역항으로 흥 성한 곳이다.
(2) 쌍신동은 공주군 중부면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당시 우성면에 속하게 되었던 곳인데, 1986년 1월 공주읍이 시로 승격할 당시 공주시로 편입하게 되었다.
‘도토방이’는 일제시대에 정안천변에 큰 제방을 쌓았는데,이 둑을 ‘도토방이 둑’또는 ‘쌍 신제방’이라고 불렀다.이 제방 서쪽의 들판을 도토방이 들이라고 하였는데,그 들판의 윗동네를 윗도토방이 들, 아랫마을을 아래도토방이라고 불렀다.
‘就利山’은 공주농고 북쪽에 있는 산인데,백제가 멸망한 뒤 신라 30대 문무왕 5년(655) 신라 문무왕과 당의 劉仁願, 백제 왕자 隆이 이 산 위에서 단을 설치하고,흰 말을 잡아서 피를 뿌리며 동맹을 서약하는 제사를 올렸다는 산으로서 정상에는 지금도 제단 흔적이 남아있다.
도토방이 뒷산이 ‘치마바위’산‘이다.연미산의 일부로서 바위가 치마를 두른 것 같다고 해 서 붙여진 이름이다.
(3) 월미동은 1973년 행정구역 개편당시 우성면에서 공주읍으로 편입된 곳인데,연미산 아랫 마을을 ‘尾山’이라고 한다.미산 윗쪽에 있는 마을은 위미산,미산 아랫마을은 아래미산이 라고 한다.
위미산의 서북쪽안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을 ‘안터’라고 하는데,안터는 ‘仙舞洞’이라고도 하며,“仙人舞袖形’의 명당이 있다고 전한다.‘송산’동쪽에 있는 큰골짜기의 작은 마을을 ‘큰골’이라고 하는데, 우물 맛이 특히 좋아서 ‘甘泉’이라고도 한다.
(4)봉정동은 1983년 이인면에서 일부가 공주읍으로 편입된 곳으로서,‘건넝골’은 만수리 입구 의 만수교 삼거리에서 우측 산비탈에 있는 마을이다.‘上村’이라고도 한다.
건넝골 맞은 편 마을이 ‘반선말’인데,마을 뒷산이 신선이 바둑을 두는 모양이라 해서 산 의 이름을 ‘磐仙峰’이라 하고 마을 이름도 磐仙마을-반선말이라고 한다. 반선말의 남서쪽 에 있는 마을이 ‘방축골’이다.마을 안쪽에 큰 제방-방죽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에는 갈대 숲이 무성했고,뚬부기가 많았다고 한다.
건넝골에서 새재쪽으로 가는 길의 오른쪽에 있는 마을인데,옛날에 절터가 있던 곳이라 는 뜻이 변해서 ‘苧大’또는 苧大里‘라고 부른다.
2) 공주市 승격
가) 공주시 승격
1985.12.28. 법률 제3798호로 공주군 공주읍 일원이 1986. 1. 1자로 시로 승격되면서,공주군 과 분리하게 되었다.시의 행정구역은 법정동 23개,행정동 8개동이고,인구는 53,558명이었는 데,공주군은 11면 268개리로 인구는 95,107명이었다.
나) 공주시 확장
1986.12.23.대통령령 12007호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서 1987. 1. 1 이인면 검상리가 공주 시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중학동,봉황동,산성동,웅진동,금학동,옥룡동,신관동,금흥동,
다) 공주시,군의 통합
1995. 1. 1.부터 1986년에 분리되었던 공주시,군은 다시 통합되어 1읍 10면 8개동으로, 인 구는 141,472명이었다.
3.명승고적
가. 곰나루
1) 웅진 곰나루 전설(熊女傳承)은 이렇다.
“아득한 옛날 한 나무꾼이 나무를 하러 곰나루 강을 건너 舟尾山으로 갔다가 위험에 빠졌는데, 이때 나타난 곰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 그러나,나뭇꾼은 그 여자 곰에게 붙잡혀서 그 곰과 함께 동굴에서 살게 되었다.
나무꾼은 곰과 함께 사는 것이 싫어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지만,곰은 나무꾼이 도망가지 못 하도록 밖으로 나갈 때에는 커다란 돌로 굴 입구를 막아놓았다.그런 생활을 하는 동안 둘 사이 에는 아기도 2명이나 생기게 되었다.
어느 날, 여자 곰이 방심한 틈을 타서 나무꾼은 굴을 빠져 나와서 강을 건너 달아나 버렸다.
이것을 알게 된 곰은 강가로 나와서 나무꾼이 돌아오기를 울면서 기다렸지만,돌아오지 않자 두 아이를 안고 강물 속으로 빠져죽고 말았다.그 이후부터 죽은 곰의 원한 때문인지 매년 흉년이 들고,강물의 물결도 거세어져서 배가 뒤집히는 일이 자주 생기게 되었다.
그러자,마을 사람들은 죽은 곰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하여 곰이 빠져죽은 곳에 사당을 세워 넋 을 위로 해주었는데, 그후로는 이러한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도 공주시 웅진동 곰나루에는 숲사이로 熊神을 모신 사당이 있고,곰과 사람과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이곳에는 곰 사당과 함께 금강의 백사장,솔밭이 함께 어 우러져 아름다운 관광지로서,부지 42,000평에 토속 음식점,야영장,다목적 광장 등이 있다.
2) 熊津이란 ‘곰나루’를 漢字로 고친 것이고,웅진은 公州의 옛 지명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 의 없을 것이다.이런 곰나루가 웅진으로 변하게 된 것은 삼국시대 중국의 영향으로 관제도 중 국식으로 변하고, 地名도 한자화 되면서 부터이다.
곰나루 웅진이 熊川州,熊州 등으로 빈번한 변천을 해 오다가,현재의 지명인 公州라고 바뀌게 된 것은 고려 태조 23년(940)의 일인데, 공주라고 바뀌게 된 기원에 대하여는 종래의 곰나루 내지 고마나루의 한자화 된 음인 웅진-->웅주 -->곰주-->공주라는 說(‘곰자와 유사한 발음인 공자’ 의 음역이라는 설)도 있고,조선 숙종때 李重煥의 “擇利志” 八道總論 충청도 편을 보면,“ 邑北有 小山 盤結於江上 形如公字 州之得名” 즉,고을 북쪽에 산 하나가 강가에 서리고 얽혀서 모양이 公字와 같아서 고을의 이름을 공주라고 하였다는 기록과 같이 웅진에 있는 山의 모양이 公字와 같아서 지명으로 삼았다는 설이 있다.
이 산이 公山인데,이 산 위에는 백제가 웅진 천도를 한 후 궁궐로 삼고 성을 쌓은 공산성이 있다.
나.공산성
1) 공주시내에서 북쪽의 서울,천안을 가는 금강철교를 건느기 직전 도로 오른쪽에 있는 공산성은 산성이 있음에서 유래한 공주시 山城洞에 있다.
공산성은 백제의 21대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죽고,왕자가 즉위하여 22대 문주왕이 되어 漢城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후(475), 금강변에 위치한 公山에 궁궐을 신축하고 해발 110미터 능 선에 조성한 성곽이다.
성곽은 동서로 약 800m,남북으로 약 400m정도의 장방형인데, 그 둘레가 石城 2,193m,土城 467m 등 총 길이가 2,660m나 되는데,원래는 土城이었던 것을 조선시대에 개축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희귀한 백제시대의 성곽과 함께 백제시대 宮城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어서 사적 12 호로 지정되었다.
웅진을 공주라 고쳐 부르게 된 원인이 되었다는 설이 있는 公山의 정상에는 雙樹山城이 있고, 성안 남문 쪽에 雙樹亭이 있으며, 북쪽에는 拱北樓(공산성 北門),臨流閣址, 남쪽에는 鎭南樓(공 산성 南門),蓮池(지방기념물제 42호)등이 있다. 특히 공북루는 선조 36년(1603)옛 望北樓터에 신 축한 것으로서,조선시대 문루 건축의 모범이 되고 있다.강의 남북을 왕래하는 지점이어서 관문 역할도 하였다.진남루는 조선시대 삼남을 지나가는 관문이기도 했다.
2) 공산성은 또 조선시대 16대 임금인 仁祖가 李适의 亂을 피하여 파천한 곳이기도 하여,인조가 雙樹에 기대어 한양 소식을 기다렸다는 野史와 함께 난이 평정된 후, 인조는 한양으로 귀환하 기전 이곳에서 특별히 과거(增廣試)를 시행하여 공주인들의 인심에 보답하는 한편, 임금의 마음 의 벗이 되어 준 쌍수에 통훈대부(정3품 당상관)벼슬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현재 쌍수정을 중심으로 동서로 있던 쌍수중 동쪽에 있던 느티나무는 없어지고 서쪽에 한 그루 만 남아 있다.쌍수가 있는 성 북쪽 금강을 바라보는 곳에는 仁祖播遷史蹟碑가 있다.
또 공산성은 신라말 金憲昌이 반란을 일으킬 때 웅거하던 성이라고도 한다.
다.宋山里 고분군
1) 공주에서 서울,천안 방면에서 가기위하여 공주의 명물인 금강철교를 건느기 직전 도로 오른쪽 이 공산성이고,왼쪽이 곰나루와 송산리 고분군을 가는 길이 된다.
공주시 錦城洞에 있는 송산리 고분군은 475년 백제 22대 문주왕때 웅진으로 천도한후, 26대 성 왕 16년(538) 사비성으로 천도하기까지 5왕 64년동안 백제 왕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분군은 금강을 북쪽 배경으로 한 나지막한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는데,전축분 2기와 석축분 5기등 모두 7기의 분묘가 있다. 5,6호분은 1933년 이미 일본인 고등학교 교사에 의해서 도굴되 었다.
2) 무령왕릉
1971년 7월 5일 분묘들에 대한 배수로 공사중 우연히 발굴하게 된 7호분(전축분)속에서 매장 자의 신원을 알 수 있게하는 誌石(왕과 왕비의 지석이 나란히 발견)의 발굴과 함께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면서 무덤의 주인이 백제 25대 무령왕릉인 것도 알게 되었다.
무령왕릉은 삼국시대의 지석이 왕릉에서 발견된 최초의 일로서,금석문의 학술상으로 막중할 뿐만아니라 삼국사기의 문헌적 가치에 대한 신빙성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하여 고고 학계에서는 해방이후 최대의 성과라고 일컫고 있다.
이 무령왕릉에서는 국보로 지정된 것이 왕의 지석(국보제 163호),왕의 金製冠飾(제154호),왕비 의 金製관식(제155호),왕의 金製귀걸이(제156호),왕비 금제 귀걸이(제157호),왕비 金製 목걸이(제 158호),왕의 金製 뒤꽂이(제159호),왕비 銀製 팔찌(제160호),靑銅 神獸鏡(제161호),石獸(제162 호),왕비 머리베개(제164호),왕의 木製 발받침(제165호)등 12종 22점,부장품 108종 등 모두 2,906점이 발굴되었다. 그밖에도 당시 교류하던 중국 梁의 화폐(五殊錢)와 사후세계의 토지 매 수권 등이 출토되어 당시의 국력과 사상 등을 엿볼 수 있다.
현지에는 부장품의 모형관이 전시되어 있고,출토된 국보 등은 국립 공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3) 6호분 벽화
무령왕릉과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고분으로서,남북으로 폭 2.5미터 길이 4미터의 턴널형 으로 되어있다.송산리 6호분은 송산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유일한 壁畵 전축분이다.
벽에는 그림부분만 진흙으로 발랐고,그 위에는 胡粉으로 동 靑龍,서 白虎,남 朱雀,북 玄武의 四 神圖를 그렸다.
라.선화당
선조 31년(1598) 임진왜란이 끝난 뒤 충청감영을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하였는데,관찰사가 근무 하던 감영이 宣化堂이다.
초기에 감영은 제민천변에 건립하였는데,홍수로 유실된 뒤에는 공산성안에 임시로 설치하기도 하였으나,18세기 초부터 현재의 봉황동에 위치하게 되었다.그러나,1992년 웅진동에 해체 복원하 였으며,지방 유형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었다. 선화당의 정문인 布政司,공주牧의 東軒도 1994년 4월 30일 복원하였다.
마. 국립 공주 박물관
공주시내 중심인 중동 사거리에서 왼쪽인 논산방면의 길로 향해서 300미터쯤 가면 오른쪽 산비탈 에 박물관이 있다.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 출토품을 일괄 전시하기 위하여 1972년 신축하여 1973년 개관한 국립 공 주박물관은 대지 4,127평,건물 557평으로서,개관이후 개보수가 없어서 시설이 많이 낙후된 상태이 다.
현재에도 무령왕릉 출토품을 중심으로 공주 인근 시,군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데,국보 19점,보물 3점,道 指定 유형문화재 2점을 포함하여 유물 8,200여점이 있다.
무령왕릉의 출토품은 모두 국립 공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송산리 고분군 현지에는 모형관이 전시되어있다.
바. 계룡산과 사찰들
1) 계룡산
가) 공주시 반포면과 계룡면을 형성하고 있는 계룡산은 공주에서 대전쪽으로 32번 국도를 약 40리쯤 가면 동남쪽에 있다.
한반도의 산맥이 대개 북에서 남쪽으로 뻗혀있어서 그 계곡을 흐르는 강물도 북에서 남으 로 흐르는 것이 보통이지만,계룡산은 소백산맥의 덕유산에서 북쪽으로 뻗어가기 때문에 그 계곡의 북쪽을 흐르는 금강도 전북 진안,무주에서 발원하여 거꾸로 뻗어가는 소위 逆龍 300 리의 산세이다.
일대가 낮은 산이 연속되다가 유달리 높게 솟은 돌산으로 군봉이 많은 이 산은 마치 닭의 볏을 쓴 용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계룡산”이라고 지었다 하는데,鷄藍山,翁山,中岳 등의 이 름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신라시대부터 계룡산은 5岳중 하나인 西岳으로 불리워지던 靈山이다. 조선 고종때에도 3악 의 하나인 中岳으로 지정되어 妙香山(上岳),智異山(下岳)과 함께 중요시되던 신비스런 산이 다
조선초 태조에 의해서 한때 도읍지로 선택되기도 했던 곳이며,정감록의 비기와 결부되어 수 많은 무속신앙지로도 더 유명하다.
나) 주봉인 천황峰(828m)과 이를 둘러싼 일대의 산지로 구성된 계룡산은,連天峰(742m), 香積 山,(574m),國師峰(421m), 咸芝峰(386m)등으로 이어지면서 노령산맥의 대둔산(877m)으로 연 결된다.
산의 정상봉인 천황봉을 중심으로 동쪽에 은선 폭포,서쪽에 용문폭포가 있고,동서남북 사방 에는 유명한 사찰이 있는데,이러한 伽藍의 배치만으로도 계룡산의 신비를 더하게 해준다.
동 동학사,서 갑사,서남쪽 신원사,북쪽 九龍寺가 위치하고 있었다.그러나,북쪽에 있던 구룡사 는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절터만 남아있다.
봄에는 벚꽃 터널로 동학사가 유명하고,가을에는 갑사의 단풍이 좋다.등산을 좋아하는 사람 들은 신원사 계곡 쪽으로 가서 연천봉,관음봉으로 가는 것이 보통이다.
계룡산은 1968년 12월 31일 건설부 공고 제 164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2) 東鶴寺
(가) 계룡산의 동쪽에 있는 동학사는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에 속한다.호남 고속도로의 유성 톨게 이트에서 서쪽 공주방향으로 빠져나오면 오른편이 대전 국립묘지이고, 왼편에는 유성 골프 장이 있는 ‘박정자’ 고개를 넘게 된다.이 고개를 내려가면 삼거리에서 왼쪽 길이 동학사로 들어가는 길이다.
동학사는 계룡산내의 다른 사찰들이 백제시대에 창건된 것과 달리 신라의 삼국 통일후인 聖 德王 23년 (724) 上願祖師가 開基하고 懷義和尙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동학사라는 이름에 대하여는 절의 동쪽에 鶴바위가 있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도 하고,조선 조에 고려말의 충신 圃隱 정몽주 선생의 ‘設壇享祀以後 東方理學之宗’이라는 데서 연유하였 다는 설도 있다.
(나) 경내에는 대웅전,3층석탑(문화재자료 제58호),招魂閣址가 있고,산 중턱에는 임진왜란때 소실 된 고려시대의 사찰인 淸凉寺址의 雙塔(지방문화재 제 1호)도 볼 수 있다. 절터에 남은 쌍탑 (男妹塔 또는 오뉘탑 이라고도 함)에는 신라 상원조사와 호랑이가 물고 온 처녀의 애틋한 불심의 전설이 있다.
또 조선조 세조에 의하여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임을 당한 성삼문 등 사육신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세조 2년(1456)에 마련된 肅慕殿(지방기념물제 18호)이 경내 에 있다.
동학사에서 갑사로 넘어가는 산길이 만들어져서 많은 등산객과 관광객이 다니고 있다.
3) 甲寺
갑사는 계룡산의 서쪽인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위치한 사찰로서, 공주에서 논산방면 국도를 12킬로쯤 가면 계룡면 소재지가 나오는데,이곳에서 좌측 길로 들어서면 갑사로 가는 길이다.
갑사 史跡碑(지방문화재 제52호)에 의하면,갑산는 백제 久爾辛王 원년(420) 阿道和尙이 창건하고, 威德王 3년(556) 惠明大師가 중건한 사찰로서 통일신라시대에는 義湘大師에 의해서 화엄종의 도량이 됨으로서 화엄종 10대 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한때는 전국 36本寺의 하나로서 많은 末寺를 거느렸지만, 6.25때 가람의 대부분이 소실되어 많 이 퇴락하였고,현재는 마곡사에 속하는 말사의 입장이 되었다.현재 많은 시설이 중건되고 있다.
대웅전(지방문화재 제105호),大寂殿(지방문화재제106호),천불전,浮屠(보물제 257호), 동종,石造 藥師如來立像 등이 경내에 있고,대웅전 남쪽 산기슭에는 臺石은 매몰되어 있고,基壇石만 있는 鐵幢竿및 支柱(보물 제256호),사찰의 건립 당시 부처가 소로 化身되어 일을 하고 죽은 곳에 세 웠다는 功牛塔이 있다.
또 조선시대 선조 2년에 간행된 月印釋譜 板本(보물제 582호)이 있다.월인석보는 세종이 지은 月印千江之曲과 세종의 왕자이던 首陽이 지은 釋譜祥節을 합쳐서 엮은 책으로서 석가의 일대기 와 공덕을 찬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4) 新元寺
신원사는 계룡산 남쪽인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에 위치한 사찰로서, 백제 의자왕 12년(652) 普德 和尙이 창건하고 여러차례 중수하였다고 하는데,현재의 대웅전은 1876년 曹連和尙이 중건되었다.
대웅전,명부전,5층석탑(현재는 5층상단부가 분실되어 4층탑임)을 비롯하여 여러 禪房들이 있다.
대웅전 오른쪽 뒷편에는 鷄龍山神을 모시던 제단인 “中岳壇”(지방문화재 제7호)이 자리하고 있다.조선 고종때 전국의 명산에서 제천행사를 하기 위하여 지정한 3岳은 묘향산,지리산,계룡산 인데,묘향산(上岳壇),지리산(下岳壇)과 함께 계룡산은 鷄龍壇이라고 부르다가 나중에 중악단으로 개칭되었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山祭壇의 건축형식을 엿볼수 있게하며 미관과 장엄함을 지니고 있다.
절 뒷편 계룡산으로 오르는 산길 주변에는 용왕의 화신인 금용을 모신 금용암과 不二庵,고광 암 등이 있다.
5) 구룡사지
백제말 통일신라초기에 건립된 사찰이었으나,소실되어 현재는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 절터에 당 간지주만 남아있다.
사. 麻谷寺
1) 공주에서 예산 방면으로 32번 국도를 약 24킬로쯤 가면 공주시 우성면인데, 오른쪽으로 마곡 사 입구를 알리는 안내문이 있다.이곳에서 오른쪽 길로 8킬로미터쯤 더 들어가면 공주시 사곡 면 운암리 마곡사가 있다.
백제 의자왕 2년(642) 慈臧律師가 창건한 사찰이라고 하지만,그대로 믿기는 어렵고,신라 문성 왕 9년 梵日祖師가 확장하고,헌강왕 3년 道詵國師가 2차 중건을 하고, 고려 예종 10년 普照國師 가 3차 중수하였으며, 조선조 세조가 직접 하사하였다는 “靈山殿”이라는 편액이 현존한다.
泰華山 동쪽 武盛山줄기에 남향으로 위치하고 있는 마곡사는 불교 조계종 제 6교구 본사로서,충 청도 70여 사찰의 총본산이다.
태화산은 경북 소백산에서 南轉하여 속리산이 만들어지고,속리산에서 다시 西轉하여 차령산맥 과 광덕산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이 광덕산의 남쪽이 태화산인 것이다.
절의 이름은 신라 步徹和尙이 설법을 할 때 모여든 신도가 삼밭의 삼(麻)처럼 많다고 하여 마 곡사라고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2) 경내에는 5층석탑(보물제 799호), 대웅보전(보물제 801호), 대광보전(보물제 802호), 靈山殿(지 방문화재 제12호), 銅製 銀入絲香爐(지방문화재제 20호), 銅鐘, 천왕문(문화재자료제 62호) 등 이 있다.
특히 5층석탑은 고려말기 작품으로 사각형 기단부위에 당시 유행하던 元의 라마교 양식으로 지은 탑으로서 세계에서 3개밖에 없는 특수한 탑이라고 전하며,영산전은 그 안에 千佛像(보 물 제800호)이 있기 때문에 일명 ‘천불전’이라고도 하는데,조선 효종 2년(1651) 覺淳大師가 중 수한 것으로서 마곡사에서 제일 오래된 건축물이다.
예로부터 “春麻谷”이라 하여 봄 경관이 빼어나며,물의 흐름과 산의 형세가 太極形이라 하 여 이중환의 택리지나 정감록 등에서도 병란을 피할 수 있는 十勝之地의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 곳이다.
아. 그 밖의 유적
1) 石壯里 舊石器 遺蹟
1964. 5. 연세대학교 손보기 교수에 의해서 발굴된 공주시 장기면 석장리(금강 북쪽해안)에서 발 견된 구석기 시대의 주거지와 석기는 조사 결과 지금으로 부터 약 30,000년전인 구석기 전,중,후 기의 것으로 밝혀졌다(사적제 334호).
2) 金宗瑞 장군 묘
공주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지방도로변인 공주시 장기면 대교리에는 김종서 장군(1390 -1453)의 묘소가 있다.(지방기념물제 16호)
장군의 자는 國卿 호는 節齊로서 본관은 順天이다.고려말 공양왕 2년(1390)에 태어나서 조선조 태종 5년(1405) 문과에 급제한후 세종 15년(1433)에는 함길도 관찰사가 되었다.그 이듬해 야인 을 격퇴하고 6진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는 기초를 만들었다.
문종 원년(1451)우의정에 올라 이듬해 세종실록과 고려사절요의 편찬을 감수하였다.문종이 2 년만에 죽고 세자가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문종이 되었을때,문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집권 하기 위하여 癸酉靖亂을 일으켰을 때 좌의정으로 있던 장군은 承珪,承壁 두 아들과 함께 죽었 다.
3) 우금치 전적지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일어난 동학혁명이 除暴救民을 구호로 삼남지방을 휩쓸면서 전개되다 가 1차휴전을 한 뒤, 일본군이 궁궐을 침입하고 민비를 시해하며, 청,일전쟁을 도발하자 다시 반일,민족 자주수호(斥洋斥倭)를 구호로 2차 봉기가 있었다.
동학군의 2차봉기에는 전봉준의 호남군 이외에도 1차봉기 때에는 반대하던 손병희가 이끄는 호 서군도 참가하는 등 대규모 연합군이었는데,삼남의 동학군은 부여,논산이 함께 만나는 利仁벌에 서 총집결하여 충청도 감영이 있는 공주를 공격하게 되었다. 이에 관군및 일본군의 연합세력 이 대 반격전을 벌인 곳이 공주 우금치 전투이다.
우금치는 牛金峙 또는 牛禁고개라고도 하는데,이 곳은 공주에서 남쪽으로 부여를 향해 넘어 가는 국도의 첫 고개로서,지금의 공주시 금학동 뱁새울 마을이다.우금치라는 이름은 전설에 의 하면, 저녁 무렵이면 누런 금빛을 띤 소가 고개 마을에 나타나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물끄럼히 바라보다가 사라지곤 하여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험한 이 고개에 도둑이 자주 나타나서 소를 몰고가는 것을 막아주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갑오년 음력 11월 9일 대접전 끝에 동학군의 처절한 패배로 끝나게 된 이 곳에는 1973년 천도 교에서 주관하여 우금치 고개를 넘기전 도로 오른쪽에 동학혁명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이곳은 1994년 국가지정 문화재 제 387호로서 사적지로 지정되었고,공주시에서도 1994년부터 ‘우금치 예술제’를 제정하여 민속문화를 계승하고 있다.
첫댓글 와 ~역사공부 하는데 많은도움 되겠습니다 모셔가도 괜찮을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