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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더 확실한 예언
(베드로후서 1:16-21)
베드로 사도는 16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보통 인간의 이성이나 지성으로 생각한다면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스꽝스럽게 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예언은 이치에도 맞지 않는 것을 그럴듯하게 꾸민 이야기로 여길 것입니다. 주님의 동정녀 탄생은 이미 신학자들 간에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그의 대속의 죽으심, 그의 부활, 그리고 그가 다시 구름을 타고 하늘로부터 내려오심, 이런 것들은 성령의 가르침이 없이는 믿음을 가질 수 없는 것으로 세상 사람들에게는 허망하게 들릴 수 있는 일들입니다.
1.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님
그런데 베드로는 이런 일들이 결코 자신이나 사도들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계2장과 3장에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마쳐질 때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고 말씀해 주심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귀가 없이는 진리의 말씀을 공교한 이야기로 돌릴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육으로는 영으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도 없으려니와 믿을 수는 더욱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기 위해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15:26절에서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6:13절에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를 깨닫는 일에는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나 들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듣고 깨닫고 믿는 일은 허락된 사람들이 따로 있는데 이들이 잃은 양들입니다. 하나님의 예정된 백성들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마13:10절-12절에서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드린 후,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아침 주신 본문 말씀을 읽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지혜가 남달리 출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천국의 놀라운 비밀을 알아 들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12 \ 1:16-21
2. 베드로가 내세운 두 가지 증거
베드로는 이 진리를 증거 하는 일에 두 가지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1) 한 가지는 자기 자신의 체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는 사도가 없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사도란 주님과 생활을 함께 하고 그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친히 목격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요15:27절에서 예수님을 증거할 자격자를 말씀하심에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재판에서 증인의 역할이란 대단히 중요합니다. 유 무죄에 대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 증인입니다.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에 주님께서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 받으신 모습을 친히 목격했으며 주님을 증거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들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이 이상 확실한 증거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자신의 확실한 일에 기초를 둔 증거이므로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님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런데 베드로는 19절에서 ‘또 우리에게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다’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여기서 예언이라고 한 말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곧 기록된 성경을 말합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선지자들의 예언은 베드로가 친히 변화산에서 본 증거보다 더 확실한 것이라고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는 이 같은 선지자들의 예언에 대하여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어두움이란 죄악 세상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요한은 이에 대하여 요1:5절에서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등불은 분명히 세상에 비취어지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비취어지는 이 등불은 성령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어두운 마음속에 비취어 생명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19절 종반에서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샛별이란 다시 오시는 재림 주를 말합니다.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기까지 너희가 이런 예언에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고 한 것입니다.
결론 : 주의한다는 말은 조심스럽게 연구하고 살피고 읽는 일을 말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이 있습니까? 이 빛을 따라 어두움이 거치고 날이 새어 주님이 오시기까지 여러분의 생애를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3 \ 1:20-21
(7) 예언의 풀이
(베드로후서 1:20-21)
20절에 나오는 말씀에서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예언이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1. 예언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예언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1) 첫째로 예언은 사람의 말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말이란 사람이 생각한 것을 자기 이성이나 자기 판단에 따라 기록한 글을 말합니다. 사람의 말 중에도 유명한 명언이나 금언이 있어서 소위 ‘어록’이라고 하여 역사에 길이 남기도 하며 민족적인 교훈으로 길이 보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아무리 유명 인사나 지도층 인사가 한 말이나 글이라도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런 일과는 상관이 없이 기록되는 것입니다.
(2) 예언은 사람의 뜻으로 낸 글이나 말이 아닙니다. 사람의 뜻이란 언제나 육신에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현세적인 일이요 물질적인 일이지만 하나님의 뜻이란 영적 일이요 내세적인 일이기 때문에 생명에 관한 일입니다.
(3) 다음에 예언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서 말한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심으로 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그 말씀을 받아야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구약 시대의 감동은 대개의 경우, 선지자의 입술에 말씀을 주심으로 예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자기 입으로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토를 달았습니다. 겔7:1절의 경우를 예로 들면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라고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신약 시대 사도들에게 주신 성령의 감동하심은 사도들의 심령 속에 영감으로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영적인 하나님의 오묘하신 진리를 깨닫거나 구원의 도리를 깨달아 글로 써서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14 \ 1:20-21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벧전1:24절에서 이르시기를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천지는 없어져도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이라도 변개 됨이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으로 당신의 모든 말씀을 완전히 나타내셨습니다. 계1:2절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3. 예언은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예언의 풀이는 세상 학문의 풀이와 다릅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사로이 푼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1) 인간의 이성으로 푼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인간의 이성적인 지식으로나 명철로 깨달을 수 있거나 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성경을 합리적인 방법으로 풀이하려는 여러 가지 신학적 방법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나온 결론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방식의 해석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 무오한 말씀으로도 인정치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비이성적인 신화는 빼야 한다는 것이 그 사람들의 주장인 것입니다.
(2) 성경을 사탄의 간교한 지혜로 풀이하는 일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구인회란 자칭 예수는 계21장에 나오는 천국의 성곽의 척량이 144규빗인 것을 1+4+4 = 9란 방식으로 해석하여 구씨인 자기가 천국의 주인이라고 주장합니다.
(3) 종말에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진리에서 떠나게 하는 방법도 성경을 이상하게 해석하는 방법으로 할 것입니다.
성경의 올바른 해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구원의 도리가 여기서 나오며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예언의 해석에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결론 : 올바른 성경 해석은 올바른 설교와 연결이 됩니다. 특히 주의 종들은 성경을 바로 배우며 연구해야 하며 양 무리들은 그 말씀을 잘 분별하며 또 그 말씀을 영적으로 잘 받아 드려 올바른 신앙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15 \ 2:1-3
(8) 거짓 선생들이 하는 일
(베드로후서 1:1-3)
베드로 사도가 1절에서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고 한 말씀대로 교회에는 언제든지 거짓 선생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이란 말은 거짓된 교훈을 진리인 양 가장해서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들을 말합니다.
1. 거짓 선지자의 등장
거짓 선지자는 그 등장하는 곳이 두 곳으로 나와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 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고 말했습니다. 민간에 일어난 거짓 선지자는 지금의 통일교라든가 몰몬교 혹은 안식교 등 그들 나름대로의 한 단체를 이루어 활동하는 무리들을 일컫습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 교회 안에 직접 침투하여 교회를 본거지로 활동하는 무리들이 있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를 더럽히고 혼란을 주며 영적 생명을 노략질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에 대해 특별히 경각심을 가져야 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너울을 썼건 그리고 어떤 정당성을 내세우건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사탄의 사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해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이들의 정체를 좀처럼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한결같이 천사의 너울을 쓰고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의 식별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7:22-23절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일이 나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식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기 때문에 그들의 정체를 파헤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방법은 그들의 열매를 보고 알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의 열매는 그럴싸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신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일에 대한 열매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절대로 말씀에 순종하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16 \ 2:1-3
2.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일
1절과 2절에서 이들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몇 가지 일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1) 이들은 멸망케 할 이단을 교회로 가만히 끌어들인다고 했습니다. 멸망케 한다는 말은 우리의 영적 생명을 말합니다. 이단은 어떤 미사여구로 우리를 유혹해도 그 그물에 걸리면 영적 생명을 죽이게 됩니다. 이 같은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인다는 것입니다. 이단이란 말은 잘못된 진리를 말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지식, 구원에 관한 잘못된 진리 등이 이런 유에 속합니다. 이들은 성경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믿지 못하게 하고 토를 답니다. 보편적인 진리를 가리우고 어느 한 곳에 있는 편파적인 말씀을 체계화시켜 그것을 진리인 양 가르칩니다.
사탄이 교회에서 하는 일은 가라지를 심는 일입니다. 이단의 씨가 자라면 가라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단자는 사탄에게 충성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 열심이 대단합니다. 이단이란 언제나 진리와 비슷하지만 진리와 엄연히 구분됩니다. 이단이란 진리의 가짜 상품입니다. 시장에서도 가짜 상품이 진짜를 뺨치는 것처럼 이단도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입니다.
이단자들의 특징을 몇 가지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피조물의 자리에까지 떨어뜨리는 일을 하기 때문에 주를 부인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다음에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라고 했습니다. 이단의 특성은 호색에 빠지게 하는 일입니다. 사탄이 발람을 통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방법이 호색이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탐심으로 일한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지은 말을 가지고 거짓된 것을 가르치며 양무리들을 그들의 이익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단자들이나 거젓된 교훈의 특성은 교묘한 헌금 방법과 수단에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재산을 늑탈하고 패가망신시키는 것입니다.
결론 : 이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필연코 멸망할 것입니다. 종말 성도들에게는 두 가지 명심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거짓 선지자들을 식별하는 지혜입니다. 이것을 식별치 못하면 그들의 거짓된 이단에 넘어가 생명을 잃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경성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도적같이 오시기 때문에 경성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17 \ 2:4-9
(9) 불의를 용서치 아니하시는 하나님
(베드로후서 1:4-9)
오늘 본문에 나오는 4절 말씀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범죄한 천사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천사들도 범죄 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이미 범죄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천사들도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1. 범죄한 천사들의 심판
오늘 주신 말씀에는 범죄한 천사들의 이야기만 나올 뿐 어떤 천사들이 어떤 범죄 행위를 했느냐에 대한 말씀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말씀이 유6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천사들은 하늘에서 하나님께 반역을 도모하는 일에 마귀 편에 가담한 자들이며 이 자들에 대한 심판의 언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겔28:13절 이하에는 사탄이 처음 창조함을 받았을 때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며 그자가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했을 때 내린 심판이 두로 왕을 비유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에 대해 14절에서 ‘그룹’이란 명칭으로 불려졌습니다. 그런데 계4장에 나오는 네 생물에 대하여 이들의 이름이 겔10:14절에서 그룹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용서치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들을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는 지옥은 둘째 사망의 장소인 지옥인 것이 아니라 둘째 사망의 자리인 영원한 지옥에 던져 넣을 때까지 가두어 둘 자리로 무저갱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사탄과 그의 사자들의 최종적인 심판의 자리로 둘째 사람의 장소인 지옥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마25:41절에서 예수님은 백보좌 심판을 거친 악인들의 심판의 장소로 지옥을 지목하셨습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명하셨습니다. 마귀가 들어갈 최종적인 심판의 자리는 영영한 불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 노아 시대와 소돔과 고모라 시대의 심판
베드로 사도는 범죄한 하늘의 천사들에 대한 심판을 말하고 노아와 소돔과 고모라 새대의 불의를 좇은 사람들의 심판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5절에서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다’고 했습니다.
18 \ 2:4-9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멸망치 않게 하시려고 범죄가 세상에 관용할 때에도 그의 선지자들을 보내시어 회개하게 하셨고 생명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길을 외면하고 계속 범죄의 길을 따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이른 것입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노아를 통해서 120여 년간 의를 전파하게 하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먹고 마시며 시집가고 장가가고 집을 짓고 팔고 사는 세속적인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그들을 멸하셨습니다. 죄인은 어느 시대에 살아가건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대속의 피를 흘리게 하시고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에 많은 사람들은 외면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주의 재림의 날, 그들이 행한 죄에 대한 엄중한 보응을 받을 것입니다.
6절에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킨 일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불로 멸망시키신 것을 마지막 날에 경건치 아니한 자들에게 본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물의 심판은 노아의 홍수로 다시는 이 땅위에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은 물보다 더 두려운 불의 심판이 될 것임을 벧후 3장에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성에 대한 불의 심판은 바로 그 불의 심판의 본보기이심을 경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로 심판하시는 그 가운데서 의로운 롯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의로운 자들을 불의한 자와 함께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그 심판에서 건져 주실 것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 역사를 이루시는데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져 주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그대로 두어 심판 날 까지 지키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경건한 자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치 아니하시고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는 자들은 오히려 심판에 이르도록 심판의 날까지 지키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그 아들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하신 그 은혜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9 \ 2:10-14
(10) 거짓 선지자의 죄
(베드로후서 1:10-14)
본문 10절부터는 거짓 선생들에 대한 죄가 열거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는 일에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영광 있는 자란 하나님을 가리키는데 그 분을 훼방하는 일에 방자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훼방한다는 말은 진리의 말씀을 대적한다는 말입니다. 진리에 서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임의로 해석하고 아전인수격으로 자기 유익을 꾀하는 일에 적용하는 무리들은 모두 거짓 선생의 무리 중에 속한 자들입니다.
1.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는 자들
거짓 선생들이나 거짓 선지자들은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지만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진리의 말씀을 잘 알지 못하거나 배우지 못하므로 이해하지 못할 때,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벌써 28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감리교신학대학의 학장이 되는 유명한 목사님이 1972년4월1일자 한국일보에 부활주일에 관한 논문을 기고했는데 부활을 전면으로 부인하는 글을 보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신앙의 문제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는 ‘우리는 좁으러운 교리나 불투명한 역사적 자료에 집착하여 오늘의 과제를 잃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고 쓴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좁으러운 교리나 불투명한 역사적 자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신앙적인 문제로 결론을 내린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부활을 우리가 받아 드려 우리 생활에 반영시키자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란 거짓 선생들은 요1:1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대로 읽지 않고 ‘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리고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은 하나의 신이었다’고 해석하면서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이 오역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말씀으로 시인은 하고 있지만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가 아니라 하나의 신이었다는 표현으로 예수님을 은연중에 천사의 무리들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는 거짓 선생이나 가짜 예수나 자칭 하나님의 존재가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이미 죽은지 오래지만 박태선이란 자는 자신을 영모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성삼위의 한 위인 성령님임을 자처했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살아 있는 가짜 하나님으로 통일교의 문선명이가 있습니다. 이 자의 원 이름은 문용명입니다. 용 용자를 풀이하면 사탄이 됩니다. 그것을 선명으 20 \ 2:10-14
로 바꿨는데 선이란 이름 글자를 영어로 발음하면 태양이란 의미가 되고 명자는 밝을 명으로 태양의 빛을 상징시키는 인류의 메시야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영적 구원만 이루었고 육적 구원을 이루지 못했다고 주장하면서 문선명이가 그 남은 구원의 사역, 육체의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2. 거짓 선생들의 도덕적 행실
우리는 이들 거짓 선생들이 하나님을 훼방하는 일에 세 가지 특징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담대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고집한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떨지도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면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연락이란 사치와 방탕함과 음란한 행실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 한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이런 모든 악한 행실로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의 결국에 대하여 말하기를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한다고 했습니다. 불의를 당한다는 말은 불의의 보응을 반드시 받는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이들에 대하여 정죄하기를 그들은 저주의 자식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난 거짓 선생들에 대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으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들이 지금 세상에서 거짓된 것으로 유혹하며 그리스도인 들을 미혹의 길로 유인하지만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통해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심판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허락하셨을 뿐입니다. 그들은 허락을 받고 미혹하기 때문에 정신을 차려야 할 사람들은 우리들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이 진리를 굳게 잡고 정신을 바싹 차리지 못하면 이들의 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이들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존재 가치는 짐승만도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 거짓 선생들을 삼가 해야 합니다. 그 비결은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위에 굳게 서서 비 진리와 싸우는 일입니다.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서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1 \ 2:1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