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들과 씨름하기
저는 집에서 여섯 살 된 아들과 자주 씨름을 합니다. (그러니까 2013년에서 2014년 넘어가는 겨울이네요.) 안방에 있는 다리 없는 침대가 씨름판입니다. 매트리스만 있어서 제법 푹신푹신합니다.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침대 위에서 아들과 씨름 한 판이 벌어집니다.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씨름을 하는 것 같습니다. 처음엔 아들과 몸으로 놀 수 있어서 좋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몸으로 놀면 친밀감이 더해지니까요. 그런데 이 씨름을 몇 달 정도 하니 친밀해지는 것 이상의 배움을 얻게 됐습니다. 하나님 마음이 새록새록 다가올 때가 많아 참 감사하기도 하고 참 재미있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 마음이 이런 것이겠구나 하고 어렴풋이 짐작하게 됐습니다.
씨름은 보통 세 판, 다섯 판, 열 판, 스무 판, 뭐 그때그때 정해놓고 합니다. 열 판을 해서 5대 5가 되면 연장전으로 한 판 더, 그래서 결승전을 합니다. 가장 재미있는 한 판이지요. 또 가끔은 그냥 비긴 것으로 하기도 합니다. 둘 다 이긴 것으로 하자고 합니다. 그렇게 비기는 경우는 있지만 제가 이긴 적은 거의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는 것이 재미있어서 그렇습니다. 마땅히 아빠가 할 일이지요. 지는 것이 기쁘니까 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들이 알 수 있도록 아빠가 힘을 빼고 살살 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정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지기는 하지만 힘은 많이 쓴다는 이야기입니다. 아, 키가 많이 다른데 어떻게 씨름이 될까 하는 궁금증도 생기겠군요. 자세는 이렇습니다. 저는 무릎을 꿇고 시작하고, 아들은 서서 시작합니다. 그럼 서로 얼굴이 교차되어서 씨름하는 자세가 됩니다. 그 자세로 시작해서 제가 엉덩이가 닿거나 손이나 상체가 침대 매트리스에 닿으면 지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두 번씩은 꼭 이렇게 합니다. 제가 아들 허리춤 양쪽을 잡고 한 바퀴를 돌립니다. 그럼 아들 발은 바쁘게 됩니다. 360도 회전하니, 아들도 안 넘어지려면 발을 바쁘게 놀려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아들을 한 바퀴 돌리는 목적은 넘어뜨리려는 것이 아니요, 아빠가 힘을 많이 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사실 지면서도 땀이 납니다. 운동이 됩니다. 동점이 되어서 연장전에 가면 제가 지기 때문에 늘 결과는 아슬아슬하게 한 판 차이가 됩니다.
그런데 열 판을 하기로 했는데 초반에 제가 3대 0 정도로 이기고 있으면, 산하는 그냥 힘없이 쓰러집니다. 그럼 제가 물어보지요, 어, 뭐야? 그럼, 아들이 말합니다. “내가 져 준거야, 하하” 아주 당당하게 말합니다. 무언가를 베풀어줬다는 느낌으로 말합니다. 자기가 져 준 거랍니다. 하하. 저는 그 모습이 그냥 귀엽습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지요. 아니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셨지요. 지면서도 기쁜 이 마음이, 단지 집에서만 느끼는 마음이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왔습니다. 내가 어떤 공간에서 살아가든지, 마찬가지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내가 질 때나, 내가 손해 볼 때 기쁜 마음이 드는 것이, 실제로 내 안에 예수님께서 계신 증거일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씨름 한판 하면서도 잘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씨름을 하듯, 세상에서도, 세상 것에 너무 눈길 주지 말고, 아등바등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더 기쁜 삶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또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를 읽다보면 왜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야곱이 이기는 것으로 나오지만 정말 야곱이 힘이 세서 이긴 것은 아닐 겁니다. 하나님께서 져주신 거죠. 아버지가 아들에게 표시나지 않게 져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언젠가 우리 목사님께서는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가 밀면, 밀리면 됩니다. 밀리는 것이 크리스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미니까 밀려주신 겁니다. 그런데 어느덧 8살이 된 산하에게 제가 물었습니다. “산하야, 너는 무슨 경기든지 네가 이길 때가 많은데, 정말 네가 힘이 세서 이기는 거라고 생각해?” 그러자 산하가 대답합니다. “아니, 아빠가 쪼~금 봐주는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재미있어” 아들은 아버지 마음을 이제 알아갑니다. 저도 하나님 마음을 이렇게 더 알아가고 싶습니다. 안 좋은 것을 하겠다며 우기면서 그동안 하나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을까요?
저는 우리 딸 민하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습니다. 민하는 제가 사랑하는 첫 딸입니다. 아주 예쁜 딸이지요. 민하랑 놀 때가 기억납니다. 그때는 제가 하나님을 몰랐던 때입니다. 그래서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집안일에는 큰 관심 없고, 집에 모처럼 일찍 오면 컴퓨터 하거나 TV를 보고, DVD나 영화를 보고, 그러다 가끔 주말이면 외식한다고 가족들 데리고 나가 맛있는 거 사주면 아빠의 역할을 다한 것으로 생각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도 저는 우리 딸이랑 놀았습니다. 씨름도 하고 축구도 하고 그랬습니다. 특히 축구는 민하가 아주 잘했지요. 공을 차는 감각이 남달랐습니다. 딸의 이름이 새겨진 멋진 유니폼까지 만들어줄 정도로 아빠는 극성이었지요. 지금도 박지성 박주영 유니폼에 딸의 이름을 새기고, 사인까지 받아둔 유니폼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놀다가 일어납니다. 제가 우리 딸이랑 한창 게임에 몰입하다가, 민하가 규칙을 위반하면 제가 먼저 화를 냈던 기억이 납니다. 규칙을 깨는 건 잘못됐다고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조금은 흥분해서 열심히 규칙을 설명해 줬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딸이 주눅 드는 것은 당연했겠지요. 아빠가 왜 그리 승부에 집착하는지, 왜 그리 규칙 준수에 민감한지, 딸을 예수님 마음으로 보지 못하고, 시비만 가리는 마음으로 보니, 오래 참을 수도 없었습니다. 사랑으로 감싸주지도 못했지요. 그렇게 못된 아빠였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말씀을 모르니 아이를 잘 가르치기는 불가능했지요. 아, 지금의 딸과 아빠의 관계에 대해서는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딸이 하는 건 무조건 인정합니다. 잘못된 것이 보이면 감정이 고요한 바다가 됐을 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가며 우리 딸에게 용서를 구하는 말과 편지를 자주 했고, 감사하게도 우리 딸은 그때마다 아빠를 모두 용서해주었습니다. 지금은 우리 딸에 대한 사랑도 듬뿍 듬뿍 늘어가서 참 기쁩니다. 퇴근이 늦어지는 날이 많아지면서 대화할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 마음 한 편에 아쉬움이 늘 가득하지요. 딸을 사랑하는 것도 제 의지로 되지 않았습니다. 딸을 더 사랑하게 된 것은 예수님의 시선을 배운 덕분입니다. 물론 아직 배울 것이 훨씬 더 많지요. 제 시선에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인해 자녀들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을 경험해 보시기를 축복합니다. 제가 힘을 뺄수록, 예수님께서는 더 힘을 내서 일하시지요.
규칙 위반을 감싸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아들도 요즘 씨름을 하면서 룰을 위반합니다. 예를 들어, 씨름하다가 갑자기 간지럼을 태우거나, 아니면 입으로 아빠 목덜미에 혀를 갖다 댑니다. 간지럼에 약한 아빠를 공격하는 대표적인 반칙입니다. 씨름하다 말고 발로 저를 때릴 때도 있었습니다. 때리는 것은 안 된다고 잘 타일러서, 때리는 반칙은 없앴습니다. 제 약점인 옆구리를 기습적으로 맞으면 아프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간지럼 태우는 반칙은 반칙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귀엽게 넘어가 줍니다. 재미있으니까 넘어가는 것입니다. 아빠가 봐주지 않으면 누가 봐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간지럼은 반칙이 아니라고 자꾸 우깁니다. 그래서 저도 분명하게 반칙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우리 목사님께서는 하나님께서도 편들어 주신다고 하셨지요. 저도 간지럼 태우는 아들 편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씨름의 유익은 또 있습니다. 씨름 때문에 산하는 더 잘 먹습니다. 산하가 잘 먹기 싫어하는 음식이 있으면, 아빠가 그걸 먼저 집어서 먹고 이렇게 말합니다. 와, 아빠가 이거 먹어서 에너지가 이만큼 올라갔어, 씨름에서 산하에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하고 말입니다. 그럼 산하도 따라 먹습니다. 그럼 아빠는 바로 그때 절망의 표정을 지어야 합니다. 에너지를 아빠만 많이 받아야 하는데, 아들도 같이 에너지가 늘어나면 씨름에 이기기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표시입니다. 씨름으로 편식도 자연스럽게 고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잘 먹지 않았던 것을 먹기 시작하면 그때는 꼭 큰 칭찬을 해줍니다. 그럼 아이는 자연스럽게 그 맛을 알게 되고 익숙해집니다. 맞습니다. 아이들은 칭찬을 먹고 자라납니다.
민하와 산하는 말씀도 암송합니다. 암송 말씀을 아빠가 정해줍니다. 아빠도 그래서 외워야 합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딸과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이 말씀을 암송한 때를 돌이켜보면 감동입니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큰 기쁨 가운데 하나지요. 말씀 암송에 얽힌 이야기는 나중에 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민하와 산하도 말씀을 외우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아빠가 일이 많아서 조금 늦게 집에 올 때 그렇습니다. 말씀 암송을 못하고 사나흘이 그렇게 지나가면 다시 매일 매일 말씀을 암송하는 습관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조금 애를 써야 합니다. 살을 어렵게 몇 달 동안 빼다가, 1주일 마음놓아버리면 쑥 체중이 올라가는 요요효과와도 비슷합니다. 그럴 때 다시 금방 정상 궤도로 옮겨놓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또 이 씨름입니다. 제가 씨름하다가 중간에 타임, 작전 시간을 요청하고 말씀을 봅니다. 또 말씀을 외우기도 합니다. 그리고 난 뒤에 바로 하는 씨름은 결코 지지 않습니다. 그걸 몇 번 했더니 아들도 다시 말씀을 보고 외우고 그럽니다. 이른바 말씀으로 충전하는 것입니다. 아들은 씨름을 이기고 싶어서, 말씀을 외우지만, 말씀의 위력을 그렇게라도 알려주고 싶은 것이 아빠의 마음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말씀을 외우는 습관은, 잘 닦여진 길처럼 아이들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잘 닦여진 길과도 같습니다. 가끔 거기서 벗어나기도 하지만 금방 제 길을 찾아갑니다. 아빠와 엄마의 역할은 그 길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격려입니다. 아이들은 화풀이의 대상이 아닙니다. 못 알아들으면 알아들을 때까지 사랑으로, 또 사랑으로 설명해주면 됩니다. 그럼 결국 알아듣습니다. 알아들으면 바뀌기 시작합니다. 칭찬이 큰 무기입니다. 민하에게 버럭 했던 일을, 산하에게는 20분 동안 설득하고 설명하고 차분하게 인내하며 말했습니다. 그렇게 저를 바꾸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아, 하나님, 제가 이렇게 참고 사랑할 수 있게 바꾸어 가시니 감사드립니다. 민하가 두세 살쯤이었을 때, 밥을 먹는데 아주 가끔 발을 상에 올려놓고 먹었습니다. 그 나이에는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옛날 저의 눈에는 큰소리를 쳐야 하는 일로 보였나 봅니다. 큰소리로 혼냈습니다. 사랑의 사 자도 모르고, 아니 사랑의 시옷 하나조차도 모르는 아빠였습니다. 그러고도 좋은 아빠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던 모습이 사실 더 아찔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앞으로 더 바꾸어 가실 예수님이 더 기대됩니다. 지금도 여전히 부족한 것 투성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요즘에도 씨름을 합니다. 아들은 물론 딸과도 합니다. (2년 전에는 그랬습니다^^) 딸이 이제 힘이 제법 세졌습니다. 제가 이기고 싶어도 못 이깁니다. 그것도 기쁩니다. 제가 무릎 꿇어야 아들과 키가 비슷해진다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씨름하면서 같은 키 높이가 되니까, 아이의 눈높이와 같아지니까, 아이의 마음이 더 잘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아이의 마음이 보이니, 아이와 몸으로 실컷 놀아줄 수 있고, 그것이 아빠에게도 큰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는 것이 기쁜 것이 감사했습니다.
세상을 사는 크리스천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기쁨인 것 같습니다.
저와 제 가정의 보물은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낮아지는 것도 기쁘다는 것도 감사했습니다.
낮아지니 아이들이 보이고,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꾸짖음 당할 때에도 부모가 자기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도 아이를 꾸짖을 때 아빠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많이 이야기했지요. 부모가 늘 사랑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부모가 보기에 아이들이 늘 기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가르치고, 기쁘지 않은 그때에는 인내와 절제와 지혜와 오래 참음과 온유함으로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아이들로 하여금 부모가 자신들을 미워한다고 여기게 한다면 그 방법은 하나님 마음과는 거리가 있을 겁니다. 관계를 깨뜨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만 돌아보니 아이들은 나이에 맞게 가르치는 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합니다. 방법은 여러 가지이지만 본질은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 마음이, 부모 된 저와 아내에게 그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럼 방법도 일깨워 주십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의 방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때그때에 맞는 말의 지혜를 주시지요. 아들과의 씨름 한판에도 예수님의 사랑과 지혜를 깨닫게 하신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말씀을 암송한 뒤 아들을 한번 이겨볼까 생각 중입니다.
2014년 1월 무지개폭포
###
|
첫댓글 무지개폭포~♡
사랑의 풍요로움을
예수님이름으로 더욱 축복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목사님~
집사님~^^
예수님의 현장에 계셔
가정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이야기들
나눠주시니 감사해요~
아침에 아들과 지각문제로 티격태격했는데 돌아보는 시간이었네요~
예쁜 단풍만큼이나 주님 사랑으로 물들어가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뜨랄라 집사님 마음 안에 계신 예수님께 샬롬~~
축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집사님이 누리시는 평안과 기쁨이 집사님의 가정에도 흘러가 하나님께저 주시는 평화가 가득한 가정이 되어갈 것을 생각하면 참 기뻐집니다~~ 그리 이끌어가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참~~♡♡ 감사네요~~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고 상급이며 선물이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이 주신 복을 충만하게 누리고
계신 무지개 폭포 집사님을 축복해요~~
자녀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고 배워감이 기쁨이고 감사 인것 같아요~~
감사로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집사님의 가정에도 하나님의 평강이 가득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