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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손(外孫) 발복의 터 - 양동마을을 가다
맑음으로 빚고 덕으로 다듬은 청덕(淸德)의 명가(名家)가 있는곳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 조선시대 600년의 전통문화를 간직한 양동마을
THE WORLD HERITAGE . Historic Village of Korea Yangdong.
취재_ QNC 글_ 雲軒 사진_ 當百
600년의 세월을 이어온 유서 깊은 양동마을은 안강에서 영천으로 이어지는 28번 국도변에서 1km정도 들어가면 산등성이를 타고 고풍스러운 한옥이 자연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가옥 구조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고건축의 전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양동(良洞)마을의 지명은 초기에는 양월리(陽月里)의 좌편에 있다하여 양좌동(陽左洞)으로 부르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어진 선비를 많이 배출하였다 하여 양좌동(良左洞)으로 불렀다. 이것이 오늘날의 양동(良洞)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마을은 그 규모나 보존상태, 문화재의 수와 때 묻지 않은 자연환경 등에서 그 어느 곳보다 훌륭하고 볼거리가 많아 영국의 찰스황태자도 지금은 고인이 된 다이애나 비와 함께 1992년 이 곳을 방문했다 한다. 양동마을은 우리나라의 지정민속마을 다섯 곳 중 하회마을과 더불어 양반들의 생활상과 주거양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민속마을로 2010년 7월 31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되어 있다. 하회마을이 풍산류씨의 단일 동성부락 마을이라면, 양동마을은 월성손씨(月城孫氏)와 여강이씨(驪江李氏)의 두 씨족이 이룬 집성촌 마을이라 할 수 있다.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
마을을 이루는 두 씨족 중 먼저 입향한 월성손씨나 후에 입향한 여강 이씨 모두 입향조(入鄕祖)의 처가마을이라 이를 두고 양동마을을 ‘외손(外孫) 마을’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월성손씨 입향조인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는 풍덕류씨(豊德柳氏) 류복하(柳復河)의 무남독녀와 결혼한 후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청송 안덕(安德)에서 이곳 양동으로 이주하여 살았고 여강이씨 입향조인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 1463-1500)도 손소의 장녀와 결혼하여 영일(迎日)에서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았기 때문이다. 영남대 발간 <경북지방고문서집성>에 의하면 류복하(柳復河) 역시도 이곳이 처가라고 한다. 양동마을을 이룬 두 집안 모두 각각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손씨 집안에서는 우참찬에 이르고 청백리에 녹선된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1529) 선생이고, 이씨 집안에서는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된 해동 18현의 한 사람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선생이다. 그런데 숙질(叔姪)간이 되는 이 두 인물이 공교롭게도 모두 손씨 입향조 손소 공이 처음 터 잡고 살았던 지금은 당호가 된 서백당(書百堂)의 같은 산실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풍수 설화에 의하면 서백당의 집터를 잡아준 지관이 “이 곳은 설창산의 혈맥이 응집된 터라 3명의 큰 인물이 태어날것”이라고 예언했다 한다. 3명의 위인 중 2명은 이미 태어났는데 손소 공의 둘째 아들로서 명신이자 청백리인 우재 손중돈 선생과 그의 생질로 해동 18현의 한사람인 회재 이언적 선생이 그들이다. 이제 두 명의 현인이 태어났으니 손씨 집안에서는 남은 한 사람의 현인이 손씨 집안에서 태어날 것으로 기대하며, 회재 이후로 시집간 딸이 해산하기 위해 친정에 와도 이 방은 허락하지 않고 다른 일가 집으로 보낸다고 한다. 방문객에게도 부정탈까봐 절대 공개하지 않는 방이다.
안골 600년의 향나무와 청덕(淸德)의 명가(明家) 서백당
양동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인 서백당은 경북 청송 출신의 손소가 경주에서 50리 떨어진 양동마을의 류씨 집안 무남독녀에게 장가를 들어 새 터전을 마련한 곳 바로 외손발복의 터이다. 조선 전기만 해도 장남은 처가를 따라 나가고 둘째가 이어 받는게 풍습 이었고 지금의 분가 개념과는 다르다.
여강 이씨의 종택 무첨당과 더불어 서백당은 매우 유서깊은 집이다. 서백당의 역사와 전통을 말해주는 상징물은 거대한 향나무. 나무의 수령은 무려 600여년. 일반 향나무와 달리 꾸불꾸불 꼬이고 사방으로 널리 퍼진 모습이 손씨 문중의 왕성함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서백당에는 사랑채 옆 정침의 동북쪽에 사당이 있고 그 옆에 향나무가 위치한다. 사당에서는 양민공 손소를 국불천위로 모시고 있다. 이날 서백당에는 꽤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을 했다. 향나무 앞에서의 기념사진 촬영은 아마도 양동마을에서 가장 기분좋은 한 컷임이 틀림없다. 600여년을 살아 온 나무의 기를 이어받지는 않을까.
맑음과 검소함이 저절로 묻어나는 서백당이다.
경주 양동의 향나무 경상북도 기념물 8호┃유형문화재, 기념물
물봉골의 무첨당 이야기
현사당(現祠堂)
양동에서도 가가예문이라
작은댁이랑 풍습이 조금씩 다른데
공히 같은 것은 현사당이다
인륜지대사 혼례를
예식장에서 이벤트처럼 행하곤
일일이 집안 어른분께 인사 여쭐 여가 없이
신혼여행 떠나기 바쁜 현실에서
명절이면 한복 곱게 차려 입은 새신랑 각시가 사당 찾아
어른 되었음 알리고
들난 조상의 후래(後來)임 각인 시키는데
직장 따라 객지살이로 젊은 시절 다 보내면서
한번 한 종기걸은 저축성 보험처럼
문사 있을 적마다 어느때 현사당했던 누구라며
세월 속 피워 온 향념
자랑스레이 여기는 지손들이 있어
미래 밝은 종가의 사당 우뚝하다
(출전:신순임시인(現무첨당 종부)
현사당(現祠堂):신부가 처음으로 시댁의 사당에 예를 올리는 일
향단(香壇) 보물 제412호
무첨당 ‘無忝堂’은 시경 小宛의 “일찍 일어나고 밥늦게 잠들어서, 너를 태어나게 해 주신 분들을 욕되게 하지 마라”.(夙與夜寢 無添爾所生)에서 유래한다. 이를 회재선생의 맏손자인 이의윤이 호로 사용하면서 당호가 되었다. 동쪽 방문 위에는 ‘左海琴書’ 편액이 걸려있다. 좌해는 서울의 왼편인 영남지방을 말한다.
금서는 귀거래사의 “친척들이 정다운 이야기에 기뻐하고 거문고와 서책을 즐겨 시름을 잊으리”에서 유래하니 선비의 주위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좌해금서’는 영남에 선비가 머물고 있는 마을 이라는 의미이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전에 무첨당을 방문해 대나무에 먹을 찍어서 썼다는 글씨이다.
1603년 낙재(徐思遠)선생께서 영천, 경주지역을 돌아보고 적은 동유일록에 보면 무첨당에 들러 회재선생의 자취를 흠모했고 옥산서원에 이르러 향을 피우고 사당에 절하니 천년의 먼 세월을 깨달을 수 없었네 하시며 이곳 현자들이 포은, 회재 양선생의 뒤로 어찌 도통이 전해지지 않을까 하셨다.
무첨당은 대지의 중앙, 가장 높은 곳에 사당 영역을 마련하고 살림채와 별당채 사이에 직선의 가파른 계단을 설치해 사당이 이집의 중심임을 이집은 대종가임을 강하게 표현 하였다.
무첨당 (無忝堂) 보물 411호┃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안길 32-19
양졸정(養拙亭)
양동마을 안골 입구의 좌측 언덕 위에 있다. 양졸당(養拙堂) 이의징(李宜澄:1568∼1596)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1734년(영조 10)에 세운 정자로, 6·25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58년에 중건하였다. 정면 4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전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하고 건물 뒤쪽에는 쪽마루를 달았다. 기단은 자연석을 높게 쌓아 조성하였으며 낮은 초석 위에 전면에는 두리기둥을,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웠다. 현재 뒤뜰에 딸린 부속채에 사람이 거주하고 있다.
관가정(觀稼亭) 보물 442호┃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안길 121-47
소쇄당(小灑堂) 남씨 할머니
어둠이 지고나서 나서 소쇄당에 도착했다.
양동천을 따라 가다보면 양동 중간쯤 중턱에 위치 하고 있는 소쇄당은 300년정도 된 고택으로 위에 위치한 수졸당(이의잠) 파종택에서 분가한 지손집 이었다.
일자형 소쇄당은 동향으로 소쇄당의 당호의 이름처럼 깨끗하게 살다간 한 선비의 삶이 그대로 녹아든 것 같았다. 앞에 300년정도 수령의 회나무 두그루가 기품있게 소쇄당을 지키고 안채엔 영덕의 명문 영양남씨의 후손으로 이곳 양동으로 시집 온지가 50여년이나 된 안주인이 기거 하고 있다.
소쇄당 마루에 앉아 할머니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다.
할머니는 딸 하나를 두고 아들이 없었는데 시댁으로부터 무척 힘들었다 한다 이 시대에 살아온 할머니들의 공통된 이야기가 아닐까….
내가 그래서 할머니께 양동은 외손발복터라 하는데, 혹시 외손들이 잘 되지 않았느냐고 여쭈니 아니나 다를까 서울대생이다 라고 은근히 자랑이신다. 해서 소쇄당에 오기전에 마을 입구에선 할머니의 이야기가 생각나서 여쭈니 그 할머니가 말하신 자식들이 하버드대를 나온 것이 사실이었고 자식들이 외국에 나가 다들 잘되어 있는데 다만 집을 잘 찾지 않는다 하니 조금은 마음이 씁쓸하다.
첫댓글 5년 전의 사장된 글인데,~~~~ 지난해에도 한번 들렀는데 할머니는 계시지 않았다. 10여 년전 선조의 기문을 찾아 보기 위해 알게 된 소쇄당은 양동의 또 하나의 보물이다. 하룻밤 나그네가 되어보면 마음을 씻고 초야에 머문 참다운 선비의 마음을 알리라~~~
양동으로 장개 가입시더~